<중국 정치사상사> 제1권은 상나라부터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정치사상을 살펴본다. 제1장의 제목은 “상(商)대의 정치 관념”, 제2장은 “서주(西周)의 정치사상”이다.
먼저, 상나라부터 봐보자. 상은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이 지배적이었던 샤머니즘 사회, 주술적 사회였다. 상나라 사람은 매우 미신적이었다. 그래서 상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결합된 신권 정치가 나타났다.
상나라에서 최고의 신은 상제라고도 하는 제(帝)였다. 상제는 최고 신이었으므로, 일체의 자연현상을 관장할 뿐 아니라 인간 세상의 주재자이기도 하였다. 즉, 전쟁, 경제, 건설 등을 주재했다. 상제 숭배 외에도 조상에 대한 숭배도 성대하게 행해졌다. 상제와 조상신은 상나라 정치사상의 핵심적인 관념이다. 상나라의 왕은 상제를 왕의 수호신으로 하였다. 상제는 세상사를 관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왕의 권력을 보호하는 수호자였던 것이다. 조상 숭배 역시 상왕의 통치 정당성을 비호했다. 상왕의 선조는 살아있을 때는 인간의 왕이었지만, 죽은 뒤에는 귀왕이 되어 귀신의 세계를 관리한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동시에 인간 세상에서 통치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도록 현세의 은왕을 돕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상나라의 왕은 자신의 힘을 강화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상나라에서 중요한 정치적 관념은 세 가지, 즉 상제, 조상, 은왕이 있는데, 이 삼자의 관계는 상제와 조상신이 은왕의 권력을 수호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은왕은 이들의 힘으로 권력을 강화해갔다.
이러한 은나라에서 왕이란 어떤 존재였는가? “왕은 광대한 토지와 노예를 점유하고 인민에 대한 생사여탈의 대권을 장악하여 강력한 통치를 수행하였다.” 광대한 토지와 노예라는 경제적 기반은 은나라 왕이 인민에 대한 생사여탈의 대권을 장악하게 된 핵심이자 왕의 통치 근거이기도 했다. 경제력이 은왕의 권력의 현실적 기반이라면, 이념적으로는 상제와 조상신이라는 형이상학적 근거가 있었다. 후대에 상제와 은왕은 결합되어 ‘여일인’이라는 사람과 신이 결합된 성질을 지니게 되었다. 하늘을 받들고, 조상을 승계하며, 백성을 구제할 지위에 있는 여일인은 일종의 신의 대리자 같은 인상도 준다.
주나라도 상제 신앙을 계승하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은나라 때와는 달라졌다. “그 핵심은 명(命)이 항상 일정치 않은 바이니 오로지 덕 있는 자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공의 정치사상에서는 상제와 함께 덕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이는 정신적 보호망으로서의 상제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면서도 동시에 인사를 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명(命), 다른 말로 천명은 상황에 따라 권력자를 바꿀 수도 있다. 그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덕’이다. 여기서 윤리와 정치가 합치되어 하나가 되었다. 권력자에 대한 천명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은나라 때라면, 점을 쳐서 알아냈겠지만, 주공에 이르러서는 백성의 정서에 있다. 이제 민심은 천명의 지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정치 관념에서의 변화는, 주나라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 때문에 발생했다. 은의 종속국이었던 주나라는 무력으로써 상나라를 무너뜨렸다. 그렇기 때문에 주나라는 건국의 정당성을 계속해서 주장해야 했다. 이러한 정당화 논리가 바로 ‘천명에 따르고 인심에 반응했다’는 순천응인의 혁명론이다. 주나라는 혁명을 했다. 은나라 말기의 폭정으로 민심이 동요했고, 천명이 더 이상 나쁜 왕에게 머무르지 않았다. 천명이 변한 것이다. 그래서 주나라의 혁명은 천명에 의해 정당화되고, 여기서 덕이 강조되었다. 덕을 정치에 적용하면 보민이라는 주공이 제기한 새로운 정치 개념이 탄생한다. 은에서도 덕이 있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종교적 개념이었다.
주공은 고대 중국 정치사상사에서 특별한 지위를 지니는데, 그의 중요한 업적이 바로 왕조의 성립 근거를 찾기 위해 천명의 중요성과 민정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천명사상이라는 관념적 신비주의가 국가와 왕권을 정당화하는 작용을 하였지만, 동시에 민심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됨을 일깨운 것도 주공이다. 이 부분에서 은과 주의 통치 메커니즘의 차이점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