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는 도중부터 읽은 후에도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소수의 작가, 소수의 작품을 반복해서 읽기’의 문제였다. 저자는 아주 당연하게도 아주 자연스럽게도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이 말은 그 전에도 숱하게 들었던 말이고 학창시절에는 늘 반복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옛일을 생각해 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를. 결국 나는 ‘반복적으로 읽기’에 일종의 불안이랄까 방어기제랄까. 그런 것을 늘 지니고 있었음을 느꼈다. 그건 어른들이 다양한 분야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한다고 해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만능박사 식 지식을 지니고 있으면 친구들이 감탄하며 보았기 때문도 아니었던 것 같다. 모종의 불안감을 느끼고 방어적으로 경고음이 켜졌던 것이다.
한 권의 책이나 한 명의 저자를 반복해서 읽는 일은… 통제의 권한을 남에게 넘기는 일이지 않을까? 내가 왕인데 나도 모르게 꼭두각시가 되어 수렴청정 당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 다시 생각해 보니 아마 이런 생각이 어느 순간 내 안 깊숙이 박히게 되었던 듯 하다.
10대나 20대초였다면 당연하고도 건강한 방어기제였던 것 같다. 그건 아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20대 후반이었다면 달리 생각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좀 더 적극적으로 내 안의 목소리를 듣고 내가 읽고 싶은 소수의 작품과 소수의 작가를 반복해서 읽는 일에 보다 열정과 시간을 쏟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올해 들어 가장 바빴던 5월말부터 6월 18일까지, 잠깐의 여유가 생길 때마다 이 생각이 불쑥불쑥 계속 튀어 나왔다.
이제라도 그렇게 의식적으로 노력해보자. 전에 읽었던 책 중 계속해서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들을 다시 읽어보자. 좀더 정기적으로 그렇게 하자. 그렇게 결심했다. 그러고 나니 블로그를 하며 알게 모르게 읽었던 대부분의 책들이 기록에 남아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두 번 이상 읽었던 책들이 뭐가 있나 하고 살펴봤더니, 아 정말 몇 권 안 되는구나.. 하… 10여 년간의 기록을 쭉 훑어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통으로 세 번 이상을 읽은 책은 아예 한 권도 없었고 두 번 읽은 책도 딱 여덟 권뿐 임을 알게 됐다. 부분적으로 발췌해서 읽기는 그것대로, 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기는 또 그것대로 좋은 책은 반복해서 다시 읽어 나가야겠다. 어쩌면 이들 여덟 권부터 시작하는 게 가장 좋겠다.
죽음의 한 연구(박상륭)
: 처음 읽었을 때, 두 번째 읽었을 때 모두, 책의 내용과 상관없는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함께한다. 사진처럼 선명하게 처음 구입했던 날을, 두 번째 선물 받았던 날을 기억한다. 이 책은 다섯 번 이상이라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좀 경이로운 소설이니까.
다다를 수 없는 나라(크리스토프 바타이유)
: 다시 읽게 된 것은 매우 단순한 이유였다. 얇았으니까.. 두꺼운 책을 읽을 만큼 그때 그렇게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어서. 다시 읽었을 때도 처음 읽었던 때와 똑같은 경험을 했는데, 그건 고요함. 마음이 차분해지고 세상에 대한 흥분이 가셔졌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도스토옙스키)
: 처음 읽었을 때부터 이 지하생활자의 마음을 전부 알 것 같았다. 공감을 넘어 거의 대부분은 아마도 그냥 내 얘기 같았다. 내가 지하생활자는 아니더라도 그의 심리의 논리라고 해야 할 그것은 그렇게도 나랑 비슷했다. 그러나 그렇게나 좋아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나 죄와 벌에 비해 얇았기 때문에 두 번 읽었던 것이겠지.
키친(바나나)
: 지옥 한가운데 있었을 때 내게는 기댈 바위 하나와 줄곧 비추는 별빛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지나가듯 흘러가는 혜성 하나가 있었다. 키친은 내게 혜성이었고, 그건 읽기 자체가 주는 위안을 내게 명확히 느끼게 해 주었다. 문학성을 논하는 많은 말들이 있지만, 그건 알 바 아니다. 키친은 책은 계속 읽어나가야 한다는, 삶은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상징 같은 것이다. 내게는.
상실의 시대(하루키)
: 다시 읽은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특별히 좋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결말 부분이 도통 기억이 안 나서, 내가 읽었던 게 맞나 싶어서.
그리스인 조르바(카잔차키스)
: 사사키 아타루는 ‘왜 사람은 책을 성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왜 책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왜 읽고서 옳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정보’라는 필터를 꽂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일까요? 아시겠지요. 미쳐버리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성실히 받아들인다면 사회에서 아마도 광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르는 일. Anyway, 그것이 진짜배기임을 나는 안다. 정말 반복하고 반복해서 읽어야 할 책.
월든(소로)
: 좌우서 라고 한다. 늘 곁에 두고 종이가 닳도록 읽어도 좋을 책. 현재의 내게 좌우서를 말하라고 한다면 월든과 그리스인 조르바를 이야기해야 하겠지만, 통으로 읽은 게 두 번뿐. 털썩. <<주석으로 읽는 월든>> 편으로 다시 읽어야지.
세상 끝으로의 항해(세풀베다)
: 온도 기억. 이라고 불러야 할까? 책을 읽고서 한참이 흘러 내용조차 희미해졌을 때, 책의 제목만 들어도 감각온도를 환기시키는 책들이 있다. 직감적으로 그런 책들은 정말 좋은 책이라고 느끼게 되는데, 내 경우엔 따뜻함 보다는 새벽녘 풀숲의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시원함, 일상의 온도보다 약간 차가운 정도의 감각온도를 환기시키는 책들이 또 읽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다다를 수 없는 나라와 월든, 그리고 세풀베다의 세상 끝으로의 항해(열린책들 판본으로는 지구끝의 사람들)가 그런 경우다. 엔딩에서의 감동은 언제나 서늘함과 함께 상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