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 모험가, 이민자, 떠돌이, 사기꾼, 강도, 산적, 도둑, 살인자, 광인, 혁명가. 브루스 채트윈은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꿰매 이어 하나의 패치워크를 만들어 낸다. 여행기, 소설, 르포르타주가 공존하는 이 책의 형식은 파타고니아스럽다. 그 땅과 굉장히 잘 어울린다. 영국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스페인어를 모어로 사용하여 문학을 하는 라틴 아메리카계 작가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 땅과 바람에 밀착한 호흡이 느껴진다. 시작은 공룡의 일부라고 알았던 작은 가죽조각에서부터다. 어린 시절, 할머니 집에 있던 가죽 조각. 그게 인연이 되어 시작된 이 여행기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비유한 《보스턴글로브》지의 비평가는 확실히 눈이 밝았다.
20대의 흐릿했던 어느 날, 『해피투게더』를 혼자 보러 갔다. 개봉 첫날. 어둠과 노란 불빛이 공존했던 아휘와 보영의 방, 숨막혔던 그 방과 인디고빛 기운에 감싸인 우수아이아의 등대만은 지금껏 기억에 남았다. 푼타아레나스, 우수아이아, 티에라델푸에고. 이들 파타고니아의 맨 끝 지역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더불어 그때의 내가 몹시도 가보길 원했던 곳이었다. 세상의 끝에 대한 갈증. 아니 세상에서 겪은 갈증을 해갈하는 시원의 샘물 같은 것이 거기, 그 끝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나는 확실히 병적인 데가 있었던 것 같다. 두 번 이상 읽은 책들에 대해 블로그에 포스팅한 후, 그 책 제목들을 다시 하나하나 확인하다가 살짝 놀랐다. 죽음의 한 연구의 ‘유리’와 다다를 수 없는 나라의 ‘안남’,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지하’, 키친의 ‘부엌’과 상실의 시대의 ‘요양원’, 그리스인 조르바의 ‘크레타’, 월든의 월든 호숫가 ‘오두막’, 세상 끝으로의 항해의 파타고니아와 남극 사이의 ‘바다’. 그리고 포스팅 했을 때는 깜빡 빼 놓았던 좀머씨 이야기의 좀머씨 ‘머리 속’. 세상의 중심과 멀리 떨어진 곳들에 대한 끌림은 뭔가 본능적인 데가 있었다.
토요일 아침. 동대문구로 봉사활동을 갔다. 회사 봉사단체복을 입고 팀원 몇 명과 함께 아이들과 놀아주러 갔다. 삼십여 명의 초등학교 학생들과 어린이대공원으로. 아이들은 교회를 나서는 순간부터 신나게 떠들고 방방 뛰었다. 버스에서 조금 잠잠하다가 어린이대공원에 들어서자 귀청이 떨어질 듯 소리지르며 날아다녔다. 나와 같은 조였던 6명의 아이들을 포함해 어린이대공원은 그야말로 어린이 ‘대’공원이었다. 좋은 날씨라 아이들로 시끌시끌했다. 우리 조는 다른 조와는 좀 떨어져서, 편하게 퍼져 자는 곰과 심드렁한 표정들로 관람객들을 맞이하는 고양이과 동물들을 보고 식물관으로 들어섰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재빨리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 가고, 조금 뒤쳐지던 나와 내 곁의 3학년 여자아이. 그 아이가 내게 말을 건넸다. “귀찮으시죠?” 라고… 순간 당황했고 창피했다. 하지만 아이의 얼굴 표정, 다 이해한다는 듯한, 공모자 같은 눈빛으로 환하게 웃으며 묻는 그 아이의 얼굴을 보고는 채 1초도 안돼 무언가 따뜻한 것이 가슴 속으로 들어옴을 느꼈다. 나는 “아니, 어제 집안에 제사가 있어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해서 그래. 귀찮았으면 아예 안 왔지”라고 말했다. 그 말은 진실이었다. 지하철로 한 시간여, 거기에 더해 20여분을 걸어 아이들이 있는 교회까지 오는 동안 그 봉사활동이 부담스럽다던가 귀찮다던가 하는 생각은 안 했으니까. 아이가 그 말을 건넨 순간, 무언가가 편해지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는데, 바로 아이가 덧붙여 말을 건넨다. “선생님은 꼭 우리 아빠 닮았어요”라고. 점심에 도시락을 까먹으며 나는 그 여자아이의 아빠 나이가 마흔 셋이라는 것을 들었다. 큰형 뻘 되는 그 알지도 못하는 사내가 나는 몹시도 부러워졌다. 우리 조 여섯 명 모두 바르고 격의 없고 귀여웠는데, 특히나 내게 “귀찮으시죠?”라고 귀여운 얼굴로 싱긋 웃으며 묻던 3학년 여자아이는 예쁜 아이였고, 예쁜 말을 할 줄 알았고, 예쁜 태도가 내재되어 있는 아이였다.
날씨가 화창하기 그지없던 어제 토요일 어린이대공원은 ‘파타고니아’와 지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끝과 끝의 느낌이 들었다. 모험가, 살육자를 비롯한 미친 남자들의 냄새가 진동하고 삭막함과 짙은 외로움, 하드보일드 한 삶의 밑바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곳과 시끌시끌하지만 누가 봐도 파라다이스에 가까웠던 어제 토요일의 대공원은 확실히 대척점에 있다고 느껴질 만 했다. 하지만 또한 몹시도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갖지 못한, 경험해 보지 못한, 하지 못한 것들. 파타고니아에 안 갔고, 예쁜 딸아이도 없다. 후회는 없지만 마음이 조금 쩌릿했다.
봉사활동을 끝내고 반디 코엑스점에서 책들을 들춰보다 그냥 나와서 집으로 돌아왔다. 무한도전 할 시간이네.. 하면서 잠들었고 일요일 아침 6시에 눈떴다. 출출했다. 기운 차린 출출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