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P선배 아들 돌잔치 끝나고 1층 커피숍에서 했던 말 기억나? 컨퓨즈드하다고, 카오스틱하다고 했던 말. 크지 않은 뷔페 룸 안의 수십 명 아이들 때문에 혼란스러웠다는 얘기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이들 때문이 아닌 게 확실해. 거기 스피커가 좀 이상했잖아. 신경 거슬리는 노이즈에 또 노래 선곡도 좀 이상했고, 볼륨도 높았고 말이지. 그 커피숍에서 내가 KH의 갓 돌 지난 딸아이가 커피숍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것을 계속 보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실은 걱정되는 마음만 있어서 계속 봤던 건 아닌 것 같아. KH나 돌잔치에 아이들을 데리고 왔던 부모들은 아이들을 대할 때의 어떤 감정들에 풍부하게, 초과되어 노출되어 있는 것이고 나는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일이 좀체 없으니깐.. 아마 KH 딸아이를 계속 봤던 건, 그 어떤 감정을 계속 내게 충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라. 거기서 컨퓨즈드 하다고, 카오스틱 하다고 말한 건 평상시 내 모습에 비춰 이런 얘기 꺼내기가 민망하기도 했고, 나는 없는데.. 하는 자격지심에 굳이 물들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네가 앞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을 거야. 하여간 실제 컨퓨즈드 한 건 아니었다는 얘기지. 그 갓 돌 지난 아이가 이제 나를 몇 번이나 봤다고 말이지.. 졸졸 따라가니까 막 뛰어가다가도 다시 돌아와서는 그 작고 보드라운 손으로 내 손을 잡더란 말이지. 그런 감격은 참. 어쨌든 내 일상에서는 거의 없는 일이잖아. 컨퓨즈드 하긴 했지. 어떤 면에선 말이야.

 

다들 보내고 다시 그 1층으로 나는 돌아왔어. 그 까페 반대편에 있었던 또 다른 까페로 말이야. 거긴 정말 조용하더라. 음악도 좀 전의 투썸플레이스와는 완전히 다르고 말이지. 책 읽기 좋은 장소였어. 그때 읽었던 게 20세기 사상 지도 였는데.. 근데 읽다가 졸고 말았지. 메를로 퐁티까지 읽곤 덮어뒀어.

 

일요일은 음울한 날씨에 꽤 추웠지. 일주일 내내 야근을 했더니 피곤했던지 목이 오른쪽으로 안 돌아가더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시작했어. 줄리언 반스라고. 내가 권한 적은 없을꺼야.. 아마. 근데 좋아하는 작가야. 260여 페이지의 소설인데 170여 페이지까지 읽고 집에 돌아왔는데, 굉장히 들떠서 돌아왔어. 뭔가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영감이 떠올랐다고나 할까. 그래서 신나게 들어와서는 식사하고 맥주 한 잔 하고 통역사의 리뷰를 썼지. 그러다 새벽 12시 반에 인터넷서점의 내 계정을 보니 주문한 책이 편의점에 들어와 있는 걸 봤어. SMS도 안 왔는데 말이지. 그래 그 시간에 나가서 주문한 책들 가지고 왔어.

 

그 박스 안에 들어 있던 책 중 불온한 산책자를 오늘 출퇴근 길에 좀 읽었지. 실은 이 책 때문에 이런 글 쓰고 있는 거야지금껏 해 왔던 얘기와는 하등 상관없는. 그렇지만 꼭 그렇지만은 아닌 어떤 것이 나를 자극했거든. 8명의 철학자와 길거리, 공원, 차 안 등에서 철학을 얘기하는 책인데, 첫 번째 철학자 이름이 코넬 웨스트야. 낯선 철학자. 거기서 그가 이런 얘길 해. 작곡가이자 아주 유명한 뮤지컬기획자이기도 하고 극작가이기도 한 스티븐 손드하임과 극작가 유진 오닐에 대해. 그들의 어머니는 그들을 낳지 않길 바랐다네올해 출판된 무서운 소설 케빈에 대하여가 떠오르더라. 그 얘기를 하면서 철학자가 이런 말을 해.

 

 

이것은 파국의 출발점입니다. 역사적 의미에서 시원이라 할 만한 출발점이죠. 그들의 파국은 나의 블루스보다 훨씬 더 심오합니다. 내게는 나를 깊이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나를 사랑했던 아버지도 있었으니까요. 내게는 손드하임과 오닐 같은 파국 상황이 없었죠. 그러니 흑인 남성으로서 나는 백인 우월주의와 제국주의 예속화 같은 문제는 다룰 수 있지만 나를 낳지 않았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어머니의 존재 같은 심오한 시원적 실존, 유사 존재론적 차원의 문제는 다룰 수 없습니다. 그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손드하임입니다. 오닐입니다. 말하자면 심오한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에 부딪치는 사람이 없길 바라지만요.

 

 

이 글을 읽고 나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어. 이상하게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고 느꼈던 들뜬 마음은 저만치 사라져 버렸지. 새로운 해석도, 대단한 영감도 아니었는지 희미해져 갔어. 통역사를 내가 권했잖아? 근데 리뷰에서 한가지 밖에 말할 수 없었는데.. 나조차 왜 그런지 몰랐는데 말이지. 이 글을 읽고 뭔가 알게 된 기분이 들어.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 서양 누드화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 걸작으로 렘브란트의 누드화를 소개하거든. 그 작품이 대단한 이유 중에 하나는 당시의 클리셰를 따르지 않았다는 건데... “자신이 그리고 있는 특정 여자에 대한 화가의 개인적인 관심이 너무 강해서, 관객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라고 말했거든. 존 버거가 말이지.

 

통역사는 가족사야. 아빠와 엄마, 언니와 동생(주인공 수지)의 이야기지. 그리고 좋은 가정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지. 저기 코넬 웨스트가 한 말을 연결해서 말하면, 이 소설은 부모가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라고 말할 정도의 끔찍함은 아닐지 몰라도 말이지.. 가족과의 파국으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모성이 모성을 부정하는정점의 심오함 까지는 아니어도 거의 그 근방에 가까운 심오함을 주제로 한 소설이야. 웨스트가 한 말처럼... 나는 그 심오함을 다룰 수 없는 거야다루기 싫었던 거지.

 

거기에 더해 통역사』는 두 자매를 위한 자리가 만들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게 끝이 나거든. 수지는 그레이스(언니)만 보고 있어. 아마 그레이스도 그렇겠지. 거기엔 제3(독자)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어. 나는 맞아. 그런 거였군. 내가 더 이상 어떤 말을 할 수 없었던 게…’ 하는 기분이 들었던 거야. 그나마 불온한 산책자』를 읽고서야 이렇게 슥슥 몇 글자라도 얘기할 수 있게 되어서얘기하고 싶었어. 『통역사』는 그런 소설이었다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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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6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06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댈러웨이 2012-11-06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림아웃님, 저는 이 리뷰를 읽고 어쩐 일인지 <불온한 산책자>들과 존 버거의 책이 읽고 싶어졌어요. 그런데 한 권은 철학자 아저씨들의 얘기라 어렵겠네요. ㅎㅎ <통역사>에 대한 의견이 좀 갈리는 것 같아서 품절 풀렸을 때 구입을 미뤘었거든요. 또 품절로 뜨는 것 같은데요? 아래 <통역사>에 대한 짧은 리뷰도 봤었는데, 이렇게 긴 리뷰를 다시 쓰게 하는 책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참, 저도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고서 꽤 흥분했었는데, 드림아웃님은 그 들뜸이 사라졌다고 이 리뷰 말미에 쓰신 걸 보니 좀 약했나 보네요. ^^

dreamout 2012-11-06 21:01   좋아요 0 | URL
줄리언 반스의 소설은 아직 다 읽진 않았어요. 남은 페이지를 다 읽다보면 어쩌면 다시금 들뜬 마음이 돌아올지도 모르겠어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영감은 너무 빨리 사라져요. 고개를 돌려 잠깐 정신 팔면 스르르륵 사라져 버리고 말죠. ㅠㅠ

2012-11-06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불온한 산책자와 존 버거, 눈에 담았습니다. 특히 불온한 산책자 인용구 보니 퍽 땡기네요~.

dreamout 2012-11-07 20:50   좋아요 0 | URL
음.. 그래도 저는 존 버거의 책을 더 권해 드리고 싶어요. ㅎㅎ
불온한 산책자. 괜찮네요.

samsuni76 2012-12-08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그날 진짜 컨퓨스드했어요..ㅎ 사실 그 자리에 가는것도 참 많이 고민했더랬죠..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자꾸 위축되는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않은 척 꾸미는거 꽤 에너지가 소비되는 일이니까요...서로 입장이 다른데도 그날 그꼈던 감정과 작은 손에서 느끼는 위안은 비슷한거 같네요^^

2012-12-10 0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msuni76 2012-12-08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그렇고 통역사 진짜 없더라...헌책도 새책도..

2012-12-10 0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통역사
수키 김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읽는 방법』에서 플롯 전진형 술어, 주어 충전형 술어라는 개념을 읽고서 그럴싸하다는 생각을 했다. Interpreter(통역사)는 수지(주인공)와 그레이스(주인공의 언니)의 이야기를 전진시키는데도, 두 인물이 처한 상황과 그네들의 성격을 충전해주는데도 중요하다. 거기에 나는 하나의 단어를 더 추가하고 싶다. 퀸스 출신. 김용수를 처음 만났던 첫 장면에서 3인칭인 화자의 목소리는 등장인물인 수지의 그것과 포개진다. 3인칭이라기 보다는 1인칭적인 묘사. 흔히 자유간접화법이라고 하는 인칭 변화를 통해 김용수를 묘사하는 그 대목에서 나는 수지의 안목에 상당히 놀랐다. Profiler(범죄 심리분서가)의 그것과 같은 정도의 날카로운 관찰력. 수지는 Interpreter로서만이 아니라 Profiler의 능력도 갖춘 사람이라는 사실. 이것은 소설의 가장 큰 수수께끼인 수지 부모님의 죽음은 대체 어떻게 된 건가?’하는 의문에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더한다. 가족과의 행복한 기억이 없던 유년시절과 부모와 절연하게 만들었던 중년 백인과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갑작스런 부모의 죽음. 이 모든 것들로 인해 속이 텅 빈 수지. 그녀가 Profiler 수준의 관찰력과 추리력을 갖고 있다는 그 사실은

 

5년 전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그녀가 짐작하는 바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아직 말하지 않은(못한) 것은 무엇인지, 기억의 수면 위로 아직 떠올리지 못한(않은) 것은 무엇인지.. 하는 의문을 떠올리게 했다. 감춰진 이 수수께끼야 말로 나를 흔들었다. 사실의 파편들을 꿰어 하나 하나의 진실을 접할 때마다 느꼈을 그녀의 아픔. 속울음 울고 있을.. 그 모습이 그려졌다.

 

 

Interpreter(통역사)로는 더 질긴 이야기, 어쩌면 더 아픈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못하겠다. 나중에.. 나중에 다시 한 번 더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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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의 연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6
마누엘 리바스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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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지 일주일 이상 지난 책에 대해 뭔가를 끄적거리려고 하니 좀 멍하다. 하지만 희미해져 가는 기억이 좋은 점도 있다. 시간의 흐름에도 씻겨 나가지 않은 한 두 가지만 간단히 얘기할 수 있게 만들어 줄 테니.

 

인물들간의 대화에서 애너그램이 자주 보인다. 애너그램은 단어를 구성하는 철자의 순서를 바꾸거나 다른 철자로 대체해서 새로운 뜻의 단어를 만드는 놀이인데, 저 연필. 목수의 연필이 뜻하는 것 중 하나도 이거다. 새로운 배치를 만들 수 있음.

 

산책은 좋은 것이지. 일상적인 의미에서는. 하지만, 스페인 내전 중의 교도소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산책하러 간다는 뜻은 그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의미니까. 맥락이 조금만 달라져도 단어의 뜻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애너그램과 소설에서 기능하는 바가 같다.  전환의 이야기, 어떻게 전환(또는 변신)이 가능한가? 그게 이 소설의 중심이라고 느껴진다.

 

많은 것들을 잊었고 잊은 채로 내버려 두고자 한다. 소설에서 밝히는 20세기초 스페인의 아픈 역사나 종교적이면서 철학적이고 낭만적이기까지 한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그곳조차 그 역사에서 전혀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 것도 잊어버려도...

 

안 잊은 첫 번째 것. 무엇이 삶의 전환을 가능케 할 수 있는가. 교도소 간수이자 마리사를 짝사랑하는 에르발의 순정, 마리사의 남자 의사 다 카르바의 의지, 마리사와 다 카르바의 사랑, 교도소에 갇힌 추레한 몰골의 사람들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영광의 문에 나오는 인물들로 변모시킨 화가의 시선, 칭기즈 칸이라고 불리는 거인에게 발가락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의 유머와 여유, 산티아고의 알 카포네로 불렸던 마리사의 할아버지를 (이상한 모습이었지만)변화시킨 ..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 창대 할 수 있는 씨앗들에 관한 이야기.

 

안 잊은 두 번째는 장면.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거리 한 복판에서 찰싹 달라붙은 채, 서로를 마셔댈 듯 정신 없이 입 맞추는 커플. 안 잊은 첫 번째라고 얘기한 순 고상한 것들을 모두 잊어버릴지라도, 이 육체적 열망, 육체적 그리움만은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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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 모험가, 이민자, 떠돌이, 사기꾼, 강도, 산적, 도둑, 살인자, 광인, 혁명가. 브루스 채트윈은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꿰매 이어 하나의 패치워크를 만들어 낸다. 여행기, 소설, 르포르타주가 공존하는 이 책의 형식은 파타고니아스럽다. 그 땅과 굉장히 잘 어울린다. 영국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스페인어를 모어로 사용하여 문학을 하는 라틴 아메리카계 작가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 땅과 바람에 밀착한 호흡이 느껴진다. 시작은 공룡의 일부라고 알았던 작은 가죽조각에서부터다. 어린 시절, 할머니 집에 있던 가죽 조각. 그게 인연이 되어 시작된 이 여행기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비유한 보스턴글로브지의 비평가는 확실히 눈이 밝았다.

 

 

 

20대의 흐릿했던 어느 날, 『해피투게더』를 혼자 보러 갔다. 개봉 첫날. 어둠과 노란 불빛이 공존했던 아휘와 보영의 방, 숨막혔던 그 방과 인디고빛 기운에 감싸인 우수아이아의 등대만은 지금껏 기억에 남았다. 푼타아레나스, 우수아이아, 티에라델푸에고. 이들 파타고니아의 맨 끝 지역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더불어 그때의 내가 몹시도 가보길 원했던 곳이었다. 세상의 끝에 대한 갈증. 아니 세상에서 겪은 갈증을 해갈하는 시원의 샘물 같은 것이 거기, 그 끝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나는 확실히 병적인 데가 있었던 것 같다. 두 번 이상 읽은 책들에 대해 블로그에 포스팅한 후, 그 책 제목들을 다시 하나하나 확인하다가 살짝 놀랐다. 죽음의 한 연구의 유리와 다다를 수 없는 나라의 안남’,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지하’, 키친의 부엌과 상실의 시대의 요양원’, 그리스인 조르바의 크레타’, 월든의 월든 호숫가 오두막’, 세상 끝으로의 항해의 파타고니아와 남극 사이의 바다’. 그리고 포스팅 했을 때는 깜빡 빼 놓았던 좀머씨 이야기의 좀머씨 머리 속’. 세상의 중심과 멀리 떨어진 곳들에 대한 끌림은 뭔가 본능적인 데가 있었다.

 

 

 

토요일 아침. 동대문구로 봉사활동을 갔다. 회사 봉사단체복을 입고 팀원 몇 명과 함께 아이들과 놀아주러 갔다. 삼십여 명의 초등학교 학생들과 어린이대공원으로. 아이들은 교회를 나서는 순간부터 신나게 떠들고 방방 뛰었다. 버스에서 조금 잠잠하다가 어린이대공원에 들어서자 귀청이 떨어질 듯 소리지르며 날아다녔다. 나와 같은 조였던 6명의 아이들을 포함해 어린이대공원은 그야말로 어린이 공원이었다. 좋은 날씨라 아이들로 시끌시끌했다. 우리 조는 다른 조와는 좀 떨어져서, 편하게 퍼져 자는 곰과 심드렁한 표정들로 관람객들을 맞이하는 고양이과 동물들을 보고 식물관으로 들어섰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재빨리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 가고, 조금 뒤쳐지던 나와 내 곁의 3학년 여자아이. 그 아이가 내게 말을 건넸다. “귀찮으시죠?” 라고순간 당황했고 창피했다. 하지만 아이의 얼굴 표정, 다 이해한다는 듯한, 공모자 같은 눈빛으로 환하게 웃으며 묻는 그 아이의 얼굴을 보고는 채 1초도 안돼 무언가 따뜻한 것이 가슴 속으로 들어옴을 느꼈다. 나는 아니, 어제 집안에 제사가 있어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해서 그래. 귀찮았으면 아예 안 왔지라고 말했다. 그 말은 진실이었다. 지하철로 한 시간여, 거기에 더해 20여분을 걸어 아이들이 있는 교회까지 오는 동안 그 봉사활동이 부담스럽다던가 귀찮다던가 하는 생각은 안 했으니까. 아이가 그 말을 건넨 순간, 무언가가 편해지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는데, 바로 아이가 덧붙여 말을 건넨다. “선생님은 꼭 우리 아빠 닮았어요라고. 점심에 도시락을 까먹으며 나는 그 여자아이의 아빠 나이가 마흔 셋이라는 것을 들었다. 큰형 뻘 되는 그 알지도 못하는 사내가 나는 몹시도 부러워졌다. 우리 조 여섯 명 모두 바르고 격의 없고 귀여웠는데, 특히나 내게 귀찮으시죠?”라고 귀여운 얼굴로 싱긋 웃으며 묻던 3학년 여자아이는 예쁜 아이였고, 예쁜 말을 할 줄 알았고, 예쁜 태도가 내재되어 있는 아이였다.

 

 

 

날씨가 화창하기 그지없던 어제 토요일 어린이대공원은 파타고니아와 지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끝과 끝의 느낌이 들었다. 모험가, 살육자를 비롯한 미친 남자들의 냄새가 진동하고 삭막함과 짙은 외로움, 하드보일드 한 삶의 밑바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곳과 시끌시끌하지만 누가 봐도 파라다이스에 가까웠던 어제 토요일의 대공원은 확실히 대척점에 있다고 느껴질 만 했다. 하지만 또한 몹시도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갖지 못한, 경험해 보지 못한, 하지 못한 것들. 파타고니아에 안 갔고, 예쁜 딸아이도 없다. 후회는 없지만 마음이 조금 쩌릿했다.

 

 

 

봉사활동을 끝내고 반디 코엑스점에서 책들을 들춰보다 그냥 나와서 집으로 돌아왔다. 무한도전 할 시간이네.. 하면서 잠들었고 일요일 아침 6시에 눈떴다. 출출했다. 기운 차린 출출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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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10-15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림아웃님, 어린이대공원에서 식물원으로 향하던 그 시간은 오후 열두시 반에서 한시반 사이가 아니었는지요. 저..그 순간에 대공원에 있었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간 여동생을 기다리며 조카랑 식물원근처의 벤치에 앉아있었거든요. 단체로 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는데, 제 앞으로 아이들이 여러명 지나가면서 그들을 통솔하는 어른들도 당연히 있었거든요. 그 중에 한 아이었는지 혹은 한 어른이었는지 한 방향을 가리키는 말도 들었구요. 어쩌면 드림아웃님과 제가 같은시간에 같은공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거의 맞을것 같아요!!

dreamout 2012-10-16 22:23   좋아요 0 | URL
오전11시 반에서 12시 사이였던거 같아요.
시간은 자신할순 없지만,
와~ 어쨌든 같은 시간대에 같은 장소에 계셨던 거군요! @@
서울이 좁아요~
 

 

 

 

자본주의적 에고(ego)의 시선을 유화, 누드화, 광고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드러낸 글이다.

 

대상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건처럼보이게 했던 유화는 곧 부자들이 자신들의 소유물들을 과시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금고역할을 하게 되었고, 관객을 의식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여성의 누드화는 여성을 또 하나의 소유물로 여기는 남성들의 시각을 드러낸다. 광고는 유화적 형식을 빌려왔으되 현재의 시점이 아닌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시선으로 현재를 느끼게 함으로써 광고를 대하는 부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암약적 불안을 느끼게 한다.

 

전에 이 책을 보았을 때 내가 요약한 내용은 이랬다. 이 내용을 하나로 꿰뚫는 무언가를 찾다가 에고의 시선과 주체의 시선이라는 측면으로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 두 개의 시선이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적 시선이고 또 하나는 아주 예외적인 존재들의 시선이다.

 

 

먼저 에고(ego)의 시선. 자본주의적 에피스테메에 잠긴 시선이다. 원근법 상의 소실점 자리를 차지하는 시선. 개별적 차원에서는 스스로의 과대망상을 키우고, 관계적 차원에서는 여성을 낮게 대하며, 사회적 차원에서는 타인들에게 선망을 불러 일으키는 일련의 기제를 작동시키는 시선인 것이다.

 

주체의 시선은 이런 것. 찢어지게 가난했던 프란스 할스가 부자들을 그리면서도 가난뱅이로서의 보는 방식을 뛰어넘으려 했던 것. 대상에 대한 열정이 너무나 강렬하여 관객이 끼어들 여지가 없도록 그려낸 렘브란트의 누드화 같은 것. 그림 속의 대상이 현실감을 전혀 갖지 않게 만들려고 했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안목 같은 것.

 

 

‘For the rich is not art’

주체의 시선을 갖추는 것. 누구도 제대로 반박하지 않는 시대적 전제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그런 시선. 보는 방식(Ways of seeing)만의 문제가 아닌 그것. 내가 성취하고 싶은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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