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P선배 아들 돌잔치 끝나고 1층 커피숍에서 했던 말 기억나? 컨퓨즈드하다고, 카오스틱하다고 했던 말. 크지 않은 뷔페 룸 안의 수십 명 아이들 때문에 혼란스러웠다는 얘기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이들 때문이 아닌 게 확실해. 거기 스피커가 좀 이상했잖아. 신경 거슬리는 노이즈에 또 노래 선곡도 좀 이상했고, 볼륨도 높았고 말이지. 그 커피숍에서 내가 KH의 갓 돌 지난 딸아이가 커피숍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것을 계속 보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실은 걱정되는 마음만 있어서 계속 봤던 건 아닌 것 같아. KH나 돌잔치에 아이들을 데리고 왔던 부모들은 아이들을 대할 때의 어떤 감정들에 풍부하게, 초과되어 노출되어 있는 것이고 나는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일이 좀체 없으니깐.. 아마 KH 딸아이를 계속 봤던 건, 그 어떤 감정을 계속 내게 충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라. 거기서 컨퓨즈드 하다고, 카오스틱 하다고 말한 건 평상시 내 모습에 비춰 이런 얘기 꺼내기가 민망하기도 했고, 나는 없는데.. 하는 자격지심에 굳이 물들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네가 앞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을 거야. 하여간 실제 컨퓨즈드 한 건 아니었다는 얘기지. 그 갓 돌 지난 아이가 이제 나를 몇 번이나 봤다고 말이지.. 졸졸 따라가니까 막 뛰어가다가도 다시 돌아와서는 그 작고 보드라운 손으로 내 손을 잡더란 말이지. 그런 감격은 참. 어쨌든 내 일상에서는 거의 없는 일이잖아. 컨퓨즈드 하긴 했지. 어떤 면에선 말이야.
다들 보내고 다시 그 1층으로 나는 돌아왔어. 그 까페 반대편에 있었던 또 다른 까페로 말이야. 거긴 정말 조용하더라. 음악도 좀 전의 투썸플레이스와는 완전히 다르고 말이지. 책 읽기 좋은 장소였어. 그때 읽었던 게 『20세기 사상 지도』 였는데.. 근데 읽다가 졸고 말았지. 메를로 퐁티까지 읽곤 덮어뒀어.
일요일은 음울한 날씨에 꽤 추웠지. 일주일 내내 야근을 했더니 피곤했던지 목이 오른쪽으로 안 돌아가더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시작했어. 줄리언 반스라고. 내가 권한 적은 없을꺼야.. 아마. 근데 좋아하는 작가야. 260여 페이지의 소설인데 170여 페이지까지 읽고 집에 돌아왔는데, 굉장히 들떠서 돌아왔어. 뭔가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영감이 떠올랐다고나 할까. 그래서 신나게 들어와서는 식사하고 맥주 한 잔 하고 『통역사』의 리뷰를 썼지. 그러다 새벽 12시 반에 인터넷서점의 내 계정을 보니 주문한 책이 편의점에 들어와 있는 걸 봤어. SMS도 안 왔는데 말이지. 그래 그 시간에 나가서 주문한 책들 가지고 왔어.
그 박스 안에 들어 있던 책 중 『불온한 산책자』를 오늘 출퇴근 길에 좀 읽었지. 실은 이 책 때문에 이런 글 쓰고 있는 거야… 지금껏 해 왔던 얘기와는 하등 상관없는. 그렇지만 꼭 그렇지만은 아닌 어떤 것이 나를 자극했거든. 8명의 철학자와 길거리, 공원, 차 안 등에서 철학을 얘기하는 책인데, 첫 번째 철학자 이름이 코넬 웨스트야. 낯선 철학자. 거기서 그가 이런 얘길 해. 작곡가이자 아주 유명한 뮤지컬기획자이기도 하고 극작가이기도 한 스티븐 손드하임과 극작가 유진 오닐에 대해. 그들의 어머니는 그들을 낳지 않길 바랐다네… 올해 출판된 무서운 소설 『케빈에 대하여』가 떠오르더라. 그 얘기를 하면서 철학자가 이런 말을 해.
이것은 파국의 출발점입니다. 역사적 의미에서 시원이라 할 만한 출발점이죠. 그들의 파국은 나의 블루스보다 훨씬 더 심오합니다. 내게는 나를 깊이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나를 사랑했던 아버지도 있었으니까요. 내게는 손드하임과 오닐 같은 파국 상황이 없었죠. 그러니 흑인 남성으로서 나는 백인 우월주의와 제국주의 예속화 같은 문제는 다룰 수 있지만 나를 낳지 않았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어머니의 존재 같은 심오한 시원적 실존, 유사 존재론적 차원의 문제는 다룰 수 없습니다. 그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손드하임입니다. 오닐입니다. 말하자면 심오한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에 부딪치는 사람이 없길 바라지만요.
이 글을 읽고 나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어. 이상하게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고 느꼈던 들뜬 마음은 저만치 사라져 버렸지. 새로운 해석도, 대단한 영감도 아니었는지 희미해져 갔어. 『통역사』를 내가 권했잖아? 근데 리뷰에서 한가지 밖에 말할 수 없었는데.. 나조차 왜 그런지 몰랐는데 말이지. 이 글을 읽고 뭔가 알게 된 기분이 들어.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 서양 누드화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 걸작으로 렘브란트의 누드화를 소개하거든. 그 작품이 대단한 이유 중에 하나는 당시의 클리셰를 따르지 않았다는 건데... “자신이 그리고 있는 특정 여자에 대한 화가의 개인적인 관심이 너무 강해서, 관객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라고 말했거든. 존 버거가 말이지.
『통역사』는 가족사야. 아빠와 엄마, 언니와 동생(주인공 수지)의 이야기지. 그리고 좋은 가정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지. 저기 코넬 웨스트가 한 말을 연결해서 말하면, 이 소설은 부모가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라고 말할 정도의 끔찍함은 아닐지 몰라도 말이지.. 가족과의 파국으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모성이 모성을 부정하는’ 정점의 심오함 까지는 아니어도 거의 그 근방에 가까운 심오함을 주제로 한 소설이야. 웨스트가 한 말처럼... 나는 그 심오함을 다룰 수 없는 거야… 다루기 싫었던 거지.
거기에 더해 『통역사』는 두 자매를 위한 자리가 만들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게 끝이 나거든. 수지는 그레이스(언니)만 보고 있어. 아마 그레이스도 그렇겠지. 거기엔 제3자(독자)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어. 나는 ‘맞아. 그런 거였군. 내가 더 이상 어떤 말을 할 수 없었던 게…’ 하는 기분이 들었던 거야. 그나마 『불온한 산책자』를 읽고서야 이렇게 슥슥 몇 글자라도 얘기할 수 있게 되어서… 얘기하고 싶었어. 『통역사』는 그런 소설이었다고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