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기자를 대동하고 온 대령이 연설하는 대목에서 잠깐 숨을 멈췄다. 대령은 ‘시체가 썩는 진창’을 ‘공터’라고 말했다. 공터는 아무것도 없는 터라는 뜻일 테니 시체들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었다. 커맨더들의 언어는 이렇다. 그 말 같지 않은 말은 바틀이 군에서 제대하기 전에 작성한 설문조사의 문항에서도 반복된다. 인명 살상 후 당신의 감정을 아래의 문항 중에서 골라주시오. A)기쁨, B)불쾌감. ‘나(바틀)’는 정신 병원이 아니라 집에 가고 싶었고, 그래서 A에 체크한다.

 

바틀은 ‘자라는 기억’이라고 말한다. 끔찍했던 상흔들이 지워지지 않고 시간이 흘러갈수록 오히려 자라난다고. 무엇처럼? 초목들처럼 자라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상상해 본다. 바틀의 언어에는 나무와 꽃 이름들이 듬성듬성, 그러나 마치 어떤 패턴이 있는 듯 툭툭 언급된다. 그리고 지나가는 투로 새들을 얘기한다. 마치 지나가는 투로 무심하게.

 

‘시체 썩는 진창-공터’는 비참하다. 채 애도되지 못한 대지는 죽은 목숨들에게도 산-죽은 목숨들에게도 휴식-휴지(休止)의 장소가 되지 못한다. 그 비참의 땅에 초목이 자랄까? 자랄 것이다. 기억들처럼. 마치 의지를 지닌 것처럼. 저 시체들이 물질이 되어 영양분으로 흡수되어 자라게 될 초목들처럼 기억들도 자랄 것이지만, 그 기억의 터에 그 기억의 나뭇가지에 새는 어떻게 둥지를 틀었다가 다시 날아올라 떠날 수 있을까? 제사(題詞)로 쓰인 토마스 브라운 경의 문구처럼자연의 섭리덕분에 우리의 슬픔은 반복이라는 날을 들이대어도 처음처럼 쓰라리지 않을 것.을 기대하고 기다려야만 하는 걸까? 아니다. 이런 형식의 질문은 적절치 못하다.

 

비참의, 슬픔의 내용이 아니라, 그 내용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바틀의 인식은 희망의 내용을 말함이 아니다. 슬픔의 형식으로 살아가기, ‘존중의 그늘’에 죽음을 뉘는 일이다.

 

 

 

P.S.

노란 새를 읽으며 나는 왜 그런지도 모르게, 카우보이 비밥의 OST No Disc에 수록된 Green Bird가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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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6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16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 페이지 가득 무언가를 썼다. 하지만 다 지워버렸다. '일방적 지시'와 '가르치며 배우는, 배우며 가르치는' 관계의 대립에 대해, 미국과 벨기에로 대표되는 서구 열강과 아프리카의 대립,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와 수많은 신을 품은 토착신앙의 대립, 다수결의 선거제도와 만장일치의 합의제도의 대립, 북위 33도의 기후와 적도 기후의 차이, 모국어와 외국어의 대립, 미개라는 불리는 것과 진보라고 불리는 것의 대립, 자라는 식물과 움직이는 곤충, 동물들 다수가 독을 품었고 강에는 악어가 사람을 잡아 먹는 땅에 대해, 수탈과 가난. 무엇보다 성장에 대해, 더더욱 무엇보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에 대해. 여성성의 희망에 대해.

 

하지만 이런 일반화된 말들은 모두 금세 말라비틀어져 버렸다.

 

아프리카가, 다섯 명의 여성 화자들의 목소리가, 정말 중요하다. 소설의 매력은 이 두 개의 샘물에서 기인한다. 무엇보다 내가 느끼기에 나의 말, 나의 언어는 이 두 가지를 그려내는 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요즘의 내 혀는 내가 느끼기에도 남성성에 가깝다. 까끌하고 단편적이고 단순 지시적이기까지 하다. 작은 뉘앙스를 놓치지 않는 섬세함은 전혀 없다. 요즘 나의 말은 피폐해졌고 사랑이 없고, 바람이 살랑거리지 않는다. 어정쩡한 개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서 일지도 모르겠고, 추상노동의 힘이 너무 많이 나를 갉아먹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는 새를 잡는 올무 같은 글이 될까 두려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두 가지를 다시 강조하고 싶다. 아프리카. 그리고 어머니 같은, 누이 같은, 친구 같은, 막내 동생 같은... 그녀들의 목소리. 우선 이것만은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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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3-06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뭐지. 궁금해지네요. 지워버리기 전의 글들도 물론.

전 지금 '에이모 토울스'의 [우아한 연인]을 읽는 중이에요. 색다른 이야기도 아니고 충격적인 이야기도 아닌데 엄청 푹 빠져서 읽고 있어요.

dreamout 2013-03-06 21:00   좋아요 0 | URL
기진맥진한 글이었죠.. ㅜㅜ

최근에 나온 웬만한 외국소설들 제목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소설도 있었군요!
 

 

 

스타일(문체)과 메시지. 이 둘을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산문들이 있다(시는 모두 그럴 테지만). 니체가 그랬고 소로우가, 존 버거가 그랬다. 그런 책들을 요약해 핵심을 쓰려고 하면 반병신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유의 흐름, 리듬, 멜로디를 그대로 느끼려면 역시 직접 읽어보는 수 밖에 방법이 없다.

 

책 제목의 무게감이 만만치 않다. 각 장()의 소제목은 선동적이어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기겁할 수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거다. 이렇게 무겁고 정치적이고 좌파적이며 급진적일 수 있는 내용의 책들에 대해 사람들의 두려움은 어쩔 수 없어서 추천하기가 나 조차도 멈칫거리지만, 이 사람(존 홀러웨이)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빨간 펜으로 체크한 문장/문단이 149개가 나왔다. 그 중 스무 개만 실어본다. 저자는 저 시위대 맨 앞장선 사람과 공원에서 책 읽기를 즐기는 소녀를 연결할 줄 아는 사람이다. 경직된 도그마에 빠진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

확실히 폭력은 점점 폭력적으로 되어가는 자본주의와 대결하는 수단으로 더욱더 매혹적으로 되고 있다. G8 회담과 같은 사건들에 대항하는 시위가 최근에, 경찰로부터 시작되는 폭력뿐만 아니라 시위대들에 의해 시작되곤 하는 폭력들로 인해, 더욱더 폭력적으로 된 것은 결코 놀랍지 않다. 그러나 폭력을 가지고 자본에 대항하는 우리의 투쟁들을 사유하는 것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우선, 우리는 폭력에 능숙하지 않다. 폭력은 우리가 창조하고자 하는 사회의 일부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폭력 속에서 자본주의적 세력들과 대항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폭력은 중립적 지형이 아니라 지배세력의 지형이다. 그것은 우리를 우리가 거부하는 사회관계 및 행동양식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인간에 의해 지배되는 위계적 구조가 그것이다. 존엄은 우리의 근거이고 폭력은 그것이 어디에서 나오건 존엄의 부정이다.

 

 

#

우리의 균열들은 순수한 균열들이 아니다. 우리의 존엄은 순수한 존엄이 아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와 단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의 단절은 여전히 그것의 모반을 갖고 태어난다. 우리가 뭔가 다른 것을 하려고 아무리 애쓸지라도, 자본주의의 모순들은 우리의 반란 내부에 그 자신을 재생산한다. 우리가 아무리 반란적이라 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순수한 주체들이 아니다. 자유화의 공간이자 고통스러운 파열로서의 균열들은 우리 내부조차도 횡단한다.

 

이 문제들은 아마도 필연적일 것이다. 균열들의 목적은 성자들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상이한 관계 형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들은 순수성이나 청교도주의에 기초할 수 없다. 그것들을 자기희생의 이념에 정초하려는 시도는 재앙적이다. 만약 그것들이 매혹적 공간/순간이 아니라면, 만약 그것들이 자석 같은 인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결코 균열들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확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단단한 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단단한 선과 분명한 구분은 존엄의 춤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거대한 민중 봉기와 공원에 앉아 책을 읽는 소녀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 그것은 개방되고 공적인 반란의 선언임에 반해 후자의 경우에 그것은 아주 사적이고 탈정치화 된 기쁨의 순간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공적이고 개방적인 것에만 우리의 응시를 제한한다면,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의 비전을 제한하는 일만을, 그럼으로써 우리 존엄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일만을 할 뿐이다. 이럴 때 사실상 우리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자본주의적 구분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의 목표는 저 구분을 깨뜨리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공원의 소녀가 떨쳐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리 모두가 책을 읽거나 우리가 원하는 바의 것을 하면서 공원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싸우기를 원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소녀의 저 책 읽기에 들어있는 투쟁의 현재적 잠재력을 인식하고 존중할 수 없으면, 우리는 실제로 저 균열의 잠재적 운동에 대해 우리의 눈을 닫는 것이다. 널리 퍼져 있는 우리의 균열의 잠재력을 닫아버리고 우리가 게토에 우리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중략) 공원에서 책을 읽는 소녀가 조용히 말하고 있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을 위해서 살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반미 시위의 슬로건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슬로건이다. 이 문제는, 급진성의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아픔을 자극하는 문제, 분노와 꿈을 흐르게 하는 문제, 공명을 발견하는 문제이다.

 

 

#

전경에 놓여있는 것은 소외된 노동이다. 노동(소외된 노동)은 우리가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활동이며 주인을 생산하는, 자본을 생산하는 활동이다. (소외된)노동은 적이다. 우리는 노동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다른 가능성(잠재력, )이 있다.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에 참가하기 위한, 의식적인 삶-활동이 그것이다. 여기, 소외된 노동과 의식적 삶-활동 사이에는 대비 contrast 뿐만 아니라 적대 antagonism 가 있다.

 

 

#

산업 자본주의의 초기부터 자본가들에 의해 고용된 노동자들은 더 나은 조건, 더 높은 임금, 더 짧은 노동시간 등을 쟁취하기 위해 연합해 왔다. 전형적인 조직형식은 노동조합인데 그것은 위계적이며 일반적으로 관료적인 조직형식이다. 추상노동의 투쟁은 일차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용을 둘러싼 투쟁이다. 더 나은 고용조건을 위한 투쟁, 더 높은 임금을 위한 투쟁, 더 많은 고용을 위한 투쟁, 실업에 반대하는 투쟁 등이 그것이다. 이 투쟁들은 중요하다. 그것들은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조건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자본주의의 지배의 재생산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투쟁들이며 우리의 행위를 낯선 통제 아래 종속시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투쟁들이고 행위의, 노동으로의 지속적 추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투쟁이다.

 

 

#

추상노동과 행위 사이에는, 즉 행위의 노동으로의 추상과 행위의 자기결정으로의 밀침 사이에는 항구적인 적대가 있다. 이것은, 맑스가 노동의 이중성이라고 부른 것이다. 두 개 유형의 활동 사이에는 끊임없는 긴장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노동의 지배에 감춰져 있다. 추상노동이 유일하게 가능한 활동유형인 것처럼 보인다. 노동에 대한 일원적 개념이 지배한다. 행위의 노동으로의 추상(그리고 노동에 대한 일원적 개념)은 추상 그 자체의 내재적 동학에 의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운동 속에 내재하는 스크루의 끊임없는 회전에 의해 부단히 위협받는다. 노동 범주의 일원적 성격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투쟁에 의해 처음으로 크게 찢어졌다. 당시에 투쟁에 대한 인정이, 노동에 대항하면서 대안 행위를 지지하는 인정이 있었다. 노동 범주의 이 균열은 추상노동의 전체 배치를, 그리고 그것의 모든 구성범주들을 찢는다. 섹슈얼리티, 국가, 자연, 화폐, 총체성, 시간 등등의 모든 물신들은 그 자체로 물신화의 과정과 반물신화 사이의 전투로 나타난다. 이 전투는 매우 다양한 방식들로 매우 다양한 장소에서 계속 치러진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명령 속에 있는 균열의 실체이다.

 

 

#

추상노동은 우리에게 안정성의 세계를, 고정된 준거점의 세계를 제공한다. 그런 세계 속에서 돈은 돈이고 국가는 국가며 여성은 여성이고 남성은 남성일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 즉 동일성의 기만 위에 구축된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며 거짓된 세계이다.

 

추상노동을 공격하는 것은 안정된 세계를 공격하는 것이며 우리 머리 위의 지붕을 떠받치는 기둥들을 잘라 내는 것이다. 추상노동을 공격하는 것은 실존하는 it is 세계를 공격하는 것이며 우리가 행위 하는 we do(가두어진 그리고 또 가두어지지 않은) 세계를 풀어놓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것이 계쟁 중에 있는 현기증 나는 세계를 끌어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말하듯이, 이 세계에서 이것이 불러일으키는 현기증은 진리지표 index veri’ 이다. 이것은 흥분되는 것이며 놀라운 것이다.

 

 

#

새로운 멜로디의 중심에는 모순들이 놓여 있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모순이 아니라 행위와 노동 사이의 더 깊은 (논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더 우선적인) 갈등이 있다. 이 모순은 살아 있는, 고동치는 사회적 적대이며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항상적이고 필연적인 투쟁이다. 모순은 투쟁이다. 개념들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생각하는 사회적 적대의 개념화이다. 모든 개념들인 열린 개념으로, 투쟁의 열린, 미해결의 과정의 개념화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비정체성은 추상노동에 대항하는 행위의 반란이며, 계급투쟁이다.

 

 

#

우리는 그림자 안에, 마스크 뒤에 산다. 우리의 비가시적인 노동-안에서-대항하며-넘어서는-행위는 심지어 혁명적 이론에서조차 인식되지 않는다.

 

마스크는 추상노동의 마스크이다. 우리가 살펴본 바의 노동의 추상은 주체의 추상이며, 성격마스크의 부과이고 사람들의, 인격으로의 변형이다. 자본가들은 자본의 인격화로 되고 노동자는 노동의 인격화로 된다. 온갖 예측할 수 없는 차원을 가진 인간은 일차원적 인간으로, 노동조합의식을 가진 노동자로, 사회관계의 담지자로 환원된다.

 

(중략) 극장은 18세기나 19세기의 건축물이 아니라 오늘날의 건축물이며 매우 부서지기 쉬운 건축물이다. 무대에서의 투쟁 배후에 선행하는 투쟁이 있다. 무대에 올라가지 않으려는 투쟁, 우리의 행위를 추상노동에 종속시키지 않으려는 투쟁, 심지어 무대에서조차 배우들이 자신의 마스크를 벗어 던지려는 욕망 등이 있다. 동일성의 투쟁이 아니라 동일화에 대항하는 투쟁이 있다. 혁명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인물들 사이의 전투가 아니라 배우들과 그들의 성격마스크 사이의 전투이다.

 

 

#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일차원적이지 않다. 우리의 일차원성 뒤에는 다성적이고 다형적인 비판이 있다. 추상노동의 인격화 뒤에는 (혹은 안에서-대항하며-너머에는) 행위자가, 감히 춤추는 행위자가 있다. 지배의 표면 아래에는 들끓는 반란이 있다. 정체성에 대항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려는 노력은 반-정체성의 무한한 활동이다. 노동자로-전환된-야생성 안에는 반란-속의-야생성이 춤춘다.

 

(중략) 잠재성 : 그것이야말로 혁명의 실체이다.

 

 

#

우리는 마치 세상이 우리로부터 분리된 무엇일 수 있는 것처럼 그 세상에 대해 이론화하고 있지 않다. 좋든 싫든, 우리는 그 과정의 일부이며 우리의 읽기와 쓰기는 그 운동의 일부이다.

 

 

#

우리는 동질적 대중이 아니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또 차이들의 다중도 아니다. 우리는 추상노동에 대항하는 행위의 반란이며 동질화에 대항하는 이질성의 반란이고, 모순에 대항하는 차이의 반란이며 단순한 대항성에 대항하며 넘어서는 너머성의 반란이다. 행위의 노동으로의 추상은 그것의 동질화이다. 그것은 비등가적인 활동들에 등가성을 부과하는 것을 통해 획득된다. 노동에 대항하는 행위의 투쟁은 이 동질화에 대항하는 반란이며 우리의 행위들의 차이에 대한 단언이며, 자본의 이원적 적대를 타개하려는, 그리고 돈을 통해 부과된 추상으로부터 우리의 행위를 해방시키려는 시도이다. 이질성은 존재론적 특징이 아니라 노동의 추상화에 반대하는 우리의 투쟁이고 그 투쟁에 중심적인 것이다.

 

 

#

각자가 성격마스크 너머의 그림자 같은 형상을 보고 듣고 만지려고 애쓰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숨겨진 신경들을 감각하는 문제이고 그것을 접촉하려고 애쓰는 문제이다. 그래서 혁명이론은 예술, 연극, 음악, 시와 뒤섞인다. 이 모든 것은 그 최상의 순간에 성격마스크의 세계를 돌파하려는 시도이며 그 아래에 깔려 있는 열정과 존엄에 목소리를 부여하고 그것들을 분기시키려는 시도이다.

 

 

#

다른 말로 표현하면 비판은 동사의 회복이다. 우리의 세계관은 명사들에 의해, 화폐, 국가, 자동차, , 컴퓨터, 식품 등등의 물건들에 의해 지배된다. 행하기, 창조하기, 그리기, 요리하기, 조직하기, 벽돌쌓기, 가르치기 등등은 망각된다. 각각의 명사는 적어도, 그것이 인간의 행동의 결과를 개념화하는 한해서는 동사의 지양을 함축한다. 각각의 명사는, 행동의 결과를 행동 자체로부터, 행위 된 것을 행위로부터 분리시키면서, 행동의 결과에 자율성의 외관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자동차는 그것을 생산하는 자동차-만들기를 감추며, ‘은 이 순간에 내가 하고 있는 바(글쓰기)를 숨기며, ‘소유는 전용하기를 숨기고, ‘화폐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화폐화를 숨긴다.

 

 

#

이것은 결혼의 시간이 아니라 사랑의 시간이다. 결혼은 부단히 창조되고 재창조될 때에만 존재하는, 무엇보다도 어른 속에 어린아이시간의 벌어진 상처로 존재하는 관계하기에 지속의 코팅을 입힌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은 반제도적 시간이다. 제도들은 관계들을 얼게 하려고, 시간을 정지시키려고, 혹은 미리 지정된 궤도를 따라 달리게 하려고, 오늘을 어제의 규율에 묶으려고, 내일을 오늘의 판에 박힌 일상에 묶으려고 한다. 제도들이 언제나 이름이나 헌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제도화는, 우리 위로 기어올라 각각의 순간으로부터 열정을 빨아들이는 시계시간의 실천이다.

 

 

#

어떤 인터뷰에서 부사령관 마르꼬스는, 미래 사회에 대한 그의 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한다. ‘사빠띠스따가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사회는, 그들이 매일 다른 영화를 살기로 선택할 수 있는 영화 프로그램과 같을 것이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지난 5백 년 간, 그들은 똑같은 영화를 살도록 반복해서 강제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역시, 지난 몇 백 년 간, 우리가 똑같은 영화를, 자본주의라는 영화를 살아오고 있다고, 그 영화는 매우 나쁜 영화이며 매우 지겨운 영화이고,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들을 탈인간화하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

혁명은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 사회적 실재의 창조자로서의 우리의 책임을 짊어지는 것, 그리고 우리의 행위할-힘을 사회적으로 짊어지는 것.

 

 

#

물으면서 우리는 걷는다. 커다란 문제는 우리는 해답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만들기를 어떻게 멈출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정말로 모른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투쟁의 세계의 문지방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배우고 있다. 거기에는 적용되어야 할 어떠한 처방도 없다.

 

 

#

우리는 우리의 삶의 흐름을, 가능한 한 효율적으로, 존엄에 기초를 둔 사회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돌리려고 애쓴다. 우리는 반란의 사회적 흐름의 일부이다. 그리고 이 흐름 속에는 경직성과 경직된 노선의 여지가 전혀 없다. 올바름과 배신이라는 개념들, 좌파 문화 속에 굳게 뿌리박고 있는 그것의 상보성은 반란의 흐름에 대한 장애물들이다. 경직성과 도그마를 창출하는 것, ‘그들은 개량주의자들이므로 그들에게 우리는 말도 걸지 않을 거야, ‘그들이 코카콜라를 마시므로 우리는 그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 ‘그들은 종파주의자들이므로 그들과는 협력하지 않을 거야를 창출하는 것은 반란의 흐름을 얼리는 일에서 적극적 역할을 맡는 것이며 자본주의적 자유의 정의들, 분류들, 물신들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

혁명이 노동에 대항하는 행위의 반란이라면, 문제는 대중들에게 혁명적 의식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존재하는 반란들을 식별할 민감성을 발전시키는 것이며 그것들과 접촉하고, 그것들과 공명하고, 그것들을 끄집어 낼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며 얼어붙은 것의 해동과 합류에 참여할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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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3-02-24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임아웃님,,,이 폰트는 컴으로 읽기 힘드네요,,희미해요,,,스맛폰으로 다시 읽을게요,,;;

dreamout 2013-02-24 23:39   좋아요 0 | URL
아. 맑은 고딕이 흐릿하게 잘 안보일 때가 있더라구요.
돋음으로 바꿨어요~ ^^;

탄하 2013-02-27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있던 책인데 문장을 20개나 발췌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일단 별찜해 놓고 주말에 자세히 읽어봐야겠어요.

dreamout 2013-02-28 00:41   좋아요 0 | URL
사소한 것과 거대한 것의 연결에 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됐어요.
이 책 덕분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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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의 순간들』은 뜻밖에도 눈 먼 사람들에게 끌린 사진가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처음에 실린 폴 스트랜드의 「Blind Woman」을 보면서 레미제라블이나 케테 콜비츠를 떠올렸지만, 아니다. 내 생각은 진실에 거의 닿지 못했다. 제프 다이어가 옳다. 눈먼 여인.을 찍었다는 점. 너무도 분명해서 더 덧붙일 것도 없는 그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눈 먼 사람들에게 이끌린 사진가들의 숨겨진 욕망에 대한 제프 다이어의 통찰은 돌직구가 되어 내 편견을 깨부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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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즌우드 바이블』 읽기는 인류학 서적 읽기와 비슷하다. 학문적이어서 딱딱하고 재미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1950년대 아프리카 콩고가 배경인데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문화에 대해 내가 까막눈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만이 아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아프리카만큼 1950년대 미국 조지아에서 살다 선교 목적으로 콩고에 온 목사 네이선 가족의 아메리카관습조차 내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책에서 다뤄진 수많은 사례들만큼이나 어느 정도는 신기(?)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1950년대 미국인. 이 두 가지 프레임보다 더 흥미진진한 건 따로 있다. 엄마와 네 딸들. 이 다섯 여성 화자의 목소리.

 

열정적이기에 더 미칠 것 같은 고지식한 목사 네이선의 아내 올리애너, 백색에 가까운 금발의 여왕(자칭) 레이첼, 아빠의 말을 거의 맹목적으로 따르는 리아. 리아와 쌍둥이지만 선천적 반신불수인 에이다. 말괄량이 꼬마 아가씨 루스 메이. 이 목소리들.

 

그리고 순서. 언제나 맨 앞자리를 맡는 리아, 맨 앞자리로 나서고 싶지만 아직은 어린 루스 메이, 뒤에서 시큰둥하게 움직이는 레이첼, 한 쪽 다리를 질질 끌며 앞서가는 자매들을 따라 잡아야 하는 에이다. 이 순서는 그녀들이 낯설고 위험한 콩고에서 이동할 때의 순서이기도 하고, 이 소설에서 화자로 나서는 순서이기도 하다. 목소리들이 사랑스러울수록 이 순서는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200여 페이지를 읽은 지금, 이후로 이 순서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긴장을 느끼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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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구체적 행위와 추상노동 사이의 긴장은 일상 경험의 문제이다. 만약 우리가 교사라면 우리는 잘 가르치는 것과 등급 매기기 혹은 필요한 대학원생의 수를 확보하기 사이의 긴장을 느낀다. 우리가 목수라면, 우리는 좋은 테이블 만들기와 팔릴 상품을 생산하기 사이의 모순을 느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콜센타에서 노동한다면 우리는, 전화로 누군가와 다정한 담소를 나눌 가능성과 직업기율 사이에서 긴장을 느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조립라인에서 일한다면 우리는 다른-행위의 압박을 견딜 수 없는 좌절로 느낄 것이다. 이 책의 첫 부분에서 우리는 이 긴장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활동을 추상노동의 요구에 종속시키는 것을 거부하도록, 그것을 돈의 요구에서 해방시킬 방법을 찾도록 이끈다는 것을 보았다

 

『크랙 캐피털리즘』은 어려운 이론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읽다가 자꾸만 멈추게 된다. 즉각적으로 공감되는 내용으로 우리의 일상적 고민의 핵심에 자리한 노동의 이중적 성격을 파헤치고 있다. 이제 7부 「노동에 대항하는 행위」를 읽을 차례다. 대안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아마도 또 계속 멈춰가며 읽어 나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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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2-18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이즌우드 바이블]을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결제할 때마다 빼버리게 돼요. 혹시라도 지루하거나 딱딱하거나 할까봐서요. 그래서 읽지 못할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뭡니까. 그런데 드림아웃님의 이 페이퍼를 읽으니, 그보다는 어떤 두려움과 긴장감이 더 많이 지배할 것 같네요. 이번 결제할 때는 더이상 고민하지 말고 집어넣어야겠어요. 어떤 작품일까, 두근두근해요.

dreamout 2013-02-19 21:39   좋아요 0 | URL
전혀 딱딱하지 않아요. 화자들이 아직 사춘기 소녀이거나 어린아이여서 그런지 오히려 눈웃음이 나올때가 많아요. 아직은요... ^^
 

 

뉴욕의 풍경을 반듯한 선으로 그린 그림들을 보고 왜 불안감을 느꼈는지. 원인은 몇 가지가 있다. 최근에 나눈 직장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경제적 하층으로 떨어질 것에 대한 공포감을 누구나가 느끼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창밖 뉴욕』 저자들의 성공에 질투와 시기심을 느껴서 그랬는지. 얼마 전 눈길에 미끄러져 왼쪽 눈가에 찰과상을 입고는 안경을 쓰고 있는 나 자신, 언제라도 예기치 못한 사건에 실명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새삼스럽게 거대하게 느껴져서 일지. 『크랙 캐피털리즘』을 읽으며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는 행위를 초긍정적으로 보다가 혹 이 자본주의라는 도시가, 건축물이 그 수많은 균열들로 붕괴된다면 나는 또한 그것을 긍정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염려 때문인지.

 

이런 생각들이 얽히고 설켰다. 그렇지만 차차 생각이 가라앉았고 차분해졌다. 풍경보다 창틀이 역시 중요하다. 인식되지 않는 일상의 일상적인 것들, 사람들 중에 내가 어떤 것에 반듯한 창을 향하게 하여 중요하게 볼지. 그것을 결정하는 일이 내 손에 달렸음을. 그리고 그 행위가 무엇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임을. 보다 차분하게 관조할 수 있었다. 모종의 불안감은 어쩔 수 없다. 미래는 알 수 없고 현재는 찰나적이어서 성찰의 빗물이 골고루 스며들지 않는다. 그래도 할 수 없다. 하는 만큼 해야지. 내 창이 향하는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나다. 비록 그 창으로 볼 수 있는 것이 크라이슬러 빌딩이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아니라 급수탑이거나 이웃집 창문이거나 낡은 비상계단이거나 벽돌 벽뿐이더라도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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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1 20: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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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2 2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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