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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평가들에 관하여
로베르토 볼라뇨, 송병선,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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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명의 비평가들. 프랑스
남자 펠티에, 스페인 남자 에스피노사, 이탈리아 남자 모리니, 영국 여자 노턴. 눈에 띈 것은 이들 네 명이 모두 아르킴볼디의
작품에 꽂혀 그들의 커리어를 쌓아왔다는 점, 그리고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모두 모였던 그
모임 이후 이들의 애정경로였다. 정형성. 할리우드적 클리셰라고
할 만한 것들이 <비평가들에 관하여>의 구조를
단순하게 지지하고 있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영국사람이 독일 작가에 흠뻑 빠져 그들 각자의 젊은 시절을
올인해서 각자의 커리어를 쌓다가 학회에서 만난 뒤 세 명의 남자가 모두 영국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는 스토리라인은 아주 뻔하다. 실은 정말로 눈에 띄는 것들은 스토리 사이사이의 에피소드들이지만, 바로
이 뻔한 구조, 이 밑그림이 5권이나 되는 장편소설의 초반을
탱탱하게 만드는 데 더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런 뻔한 구조는 ‘에드윈
존스’라는 화가의 존재로 인해 또 다른 느낌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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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에드윈 존스’는
‘20세기 말의 가장 불온한 화가 중 하나로 그림을 그리던 오른손을 잘랐고, 그걸 방부 처리한 뒤 일종의 다중 자화상처럼 보이는 그림에 붙인’ 사람이다. 노턴이 모리니(그는 휠체어를 타는 남자다)에게 알려준 화가. 모리니는 펠티에와 에스피노사와 함께 스위스 정신병원에
요양중인 에드윈 존스를 찾아간다. 그리고 조용히 묻는다. 왜
그랬냐고. 나중에 모리니는 그때 들었던 답변을 노턴에게만 전한다. ‘돈
때문이라고’
또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 펠티에와 에스피노사가 노턴이 자기들 말고
또 다른 남자(프리처드)와 잠자리를 함께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참석한 학회에서 예전의 자신만만한 그들의 모습과는 달리 완전히 쓸모 없는 참여를 했을 때. 작중 화자의 이런 멘트. ‘그들은 따분함에서 광기로 옮겨가는 자신들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 표정이 더듬거리는 핵심적인 말은 오로지 세 단어, 그러니까 <날 사랑해 줘>였다. 아니면 세 단어와 한 문장으로 구성된 <날 사랑해 줘. 내가 널 사랑하게 해줘>였지만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돈’과 ‘날 사랑해 줘’. 자본주의 속에서 분리될 수 없는 샴쌍둥이적 욕망. 이 욕망은 ‘그림자가 없는 지식인’이라는
말로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욕망의 중심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었나. 욕망은
아무것도 아닌 중심이라고 했었나. 어느 철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텅 빈 중심을 뻔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력적이게 먹히는 이야기구조로 포장한 것이다. 당연히
작가가 의도한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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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이라든가 『부적』에서부터 느낀 것이지만, 볼라뇨는 문학 작가의 이름을 수없이 열거한다. 그나마 『2666』은 좀 덜한 편이긴 하지만. 그 열거된 작가들은 대부분 낯설다. 그렇다면 그 작가들의 이름이
라틴 아메리카와 스페인어 권 나라들, 혹은 북미, 유럽의
다수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지 않을까. 아마
매우 희미하게.. 문학 애호가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에게만 조금 먹힐 정도의 명성들인 것은 아닐까. 거의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아는 체해야 할 때 아는 체
할 수 있는 정도의 이름들, 명성들이 아닐까. 그러니까 저자가
이들 문학작가들의 이름들을 나열할 때, 나는 그가 소설이라는 매체를 이용해서 작가들을 홍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볼라뇨 소설은 어느 면에서 긴 팸플릿이나 마찬가지다.
이 ‘팸플릿’ 이라는 단어가 이 작품의 핵심
주제들과 조우할 때, 문학이라는 카테고리와 엮일 때. 생기는 아이러니.
난 그게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