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무거운 생각이 그토록 오랫동안 그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그 생각 속에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인 것이다. - P61

"인생은 고약한 함정 이지요. 한 인간의 사색이 무르익어 완숙한 단계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출구 없는 함정에 빠졌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우연성에 의해 무로부터 세상으로 불려나온 거예요······ 왜죠? 그는 자기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알고 싶어하지만, 그것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도 없고, 말해준다 하더라도 헛소리들일 뿐입니다. 그는 문을 두드리지만, 그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죽음이 찾아오지요. 이 역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합니다. 감옥에서 공통의 불행으로 엮인 인간들이 함께 지내며 위안을 느끼듯이, 인생에서는 분석과 이론을 즐기는 인간들이 함께 모여 고담준론을 자유롭게 나누며 시간을 보내지요. 그러다보면 그것이 함정이라는 것도 잊게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지성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쾌락입니다." - P78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죽음에는 오로지 이득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먹거나 마시지 않아도 되고, 세금을 안 내도 되며, 사람들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 무덤에 누워서 일 년도 아니고 백 년, 천 년을 지낼 테니, 그걸 다 계산하면 엄청난 이득이 되지 않겠는가. 사람은 살아 있으면 손해고, 죽으면 이득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더라도 모욕적이고 뼈아픈 진리다. 이 세상의 이치란 왜 이리도 괴상한 것일까? 인간에게 단 한 번 주어진 삶이 이토록 아무 쓸모 없이 흘러가버리니 말이다. - P159

저는 떠올려봤어요. 실상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만족하고 행복해하며 살고 있는지! 이들의 세력은 참으로 압도적입니다! 우리 삶을 한번 보세요. 강자들의 몰염치와 나태, 약자들의 무지몽매, 주변의 끔찍한 궁핍, 비좁은 환경, 타락, 폭음, 위선, 거짓······ 그런 와중에도 집안이나 거리는 조용하고 평온합니다. 이 도시에 사는 오만 명의 사람 중 그 누구도 비명을 지르거나 큰 소리로 분노를 토하는 사람은 없지요. 시장에 가면 식료품을 사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들은 낮에는 먹고, 밤에는 잠자고, 제각기 헛소리를 지껄이다가, 결혼을 하고, 나이를 먹고, 그러다가 죽은 이웃을 싣고 숙연한 얼굴로 묘지에 갑니다. 우리에게는 고통받는 이들이 보이거나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지요. 그런데 이 세상의 끔찍한 일들은 무대 뒤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거든요. 모두 조용하고 평온한 가운데서 오직 통계 숫자만이 소리 없는 항변을 합니다. - P200

어쩌면 바로 이 영속성 속에, 우리 모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 완전한 무관심 속에, 인간의 영원한 구원에 대한 약속이, 지상의 생명들의 끊임없는 운동과 끊임없는 완성에 대한 약속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여명 속에서 너무도 아름다워 보이는 젋은 여인과 나란히 앉아, 바다와 산과 구름과 광활한 하늘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풍경들에 매혹되고 마음이 평온해진 구로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본질적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 이다. 존재의 고귀한 목적과 자신의 인간적 가치를 망각한 채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것들을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아름답다. - P259

좀더 지내다보면 해결책을 찾게 될 것도 같았다. 그때는 새롭고 멋진 삶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끝은 아직 저멀리 있고,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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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한 자리 차지하고는 있지만, 내내 읽을 기회를 놓쳐 ‘머무는 중’으로만 있던 세계문학 단편선 몇 권을 뽑아 들었다. 이 덩치들에게 숨통도 틔워줄 겸. 올해 안에 몇 권이라도 완독해 봐야지, 혼자 다짐을 실컷 하다가 이게 또 다짐까지 해야 할 일인가 싶지만, 다짐씩이나 필요하다. 몇 편 읽고 덮어도 좋고, 다른 책으로 넘어갔다 돌아와도 좋고, 이 책들과 조금 느슨하게 지내볼 생각이다.


랭스턴 휴스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 외 40편>

「떳떳한 코라」에는 멜턴이라는 아담한 마을에서 40년을 살아온 코라가 나온다. 주민들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사람. 그녀를 사람들은 흑인, 검둥이라고 부른다. 스튜더반 집안의 잡부로 일하며 개처럼 취급받아도 코라는 견딘다. 나가봤자 더 가난한 백인 집에서 학대받을 게 뻔하니까. 망할 아버지는 주정뱅이에다가 딸린 자식은 또 왜 그리 많은지, 그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부담감에 코라는 아이였을 때부터 놀 시간조차 없이 지내왔다. “예, 마님.”을 입에 달고 순종하며 지내는 코라가 백인 노동자 조와 짧은 사랑을 나누고 임신하지만, 그가 떠나고 혼자 낳아 키운 아이마저 백일해에 걸려 품에서 떠나보냈을 때서야 신에게 악다구니를 해 본다. 그래서 주인마님의 딸 제시를 속으로 제 딸처럼 여기며 사랑으로 보살폈는데, 제시마저 그 집안의 위선과 거짓에 둘러싸인 채 죽게 된다. 그동안 참고, 보고, 알고 있었던 것들이 장례식장에서 더는 눌러지지 않는다. 오래도록 꾹꾹 눌러두었던 말들이 결국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아가씨, 내가 잠깐 할 말이 있어요.”

이 단편선에 담긴 이야기들은 인종차별을 이야기하면서도 누군가를 줄곧 짓눌리는 사람으로만 두지 않고, 그렇다고 반대편 사람들을 악역으로 세우지도 않으면서도 사람을 좀 불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경매에 부친 소년」에서는 예술과 음악을 사랑하며 살아가던 백인 부부가 집에서 일하던 흑인 여성이 죽은 뒤, 그녀의 사촌인 흑인 소년을 집에 들이게 된다. 잘해준다. 친절하다. 그런데 그 친절 앞에 서 있으면 이상하게 한 발 물러서고 싶어진다. 선의라고 하기엔 어딘가 미심쩍고, 악의라고 하기엔 또 너무 멀쩡하다. 그래서인지 이 부부에게는 늘 이상한 이물감이 남는다. 흑인 예술에 관심이 많은 부부는 영감을 얻기라도 한 듯 아이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곡을 쓴다. 이렇게만 말하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어 보이지만, 노예를 그려보고 싶었다며 그림의 제목마저 ‘경매 부쳐진 소년’이라고 붙이질 않나, 속옷을 벗어달라고 하질 않나. 이들이 아이에게 보인 애착과 관심이 너무나 기괴하다. 여기서 만만치 않은 인물이 하녀 매티다. 다루기 힘들어졌다며 주인부부가 내보낼 생각을 하자 그녀가 받아친다.

“우리도 당신들 백인들의 멍청한 짓거리에 염증이 나던 참이에요!”

부부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만큼 맹랑한 말. 매티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말. 차별, 억압 등 익숙한 이야기를 가져와, 익숙한 사람을 만들어내지 않는 거, 당연한 스토리 안 만드는 거, 이게 매력이다.



허먼 멜빌 <선원, 빌리 버드 외 6편>

작년에 이 책에 실린 「꼬끼오! 혹은 고귀한 수탉 베네벤타노의 노래」를 읽다가 허먼 멜빌이 보통 입담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뒤늦게서야 알아버리고는, 선뜻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모비 딕>을 샀건만 언제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일단 맨 처음에 실린 「바틀비」를 읽어봤다.

화자는 변호사다. 자신의 법률 사무소에서 문서를 베껴 쓰는 필경사 몇 명과 함께 일하고 있다. 건물이며 직원이며 자기 성격까지 한참을 설명한다. 자신을 꽤 좋은 고용주라고 생각하는 이 변호사의 관찰력이 빛나는 온갖 설명과 변명을 잘만 듣고 있다가도 내심 속으로는 ‘아니 그래서 바틀비는 언제 나오는 건데’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는! 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일반적이지 않은 듯 보이면서도 그렇다고 주변에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변호사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해석하고, 혼자 이해하고, 또 납득이 안 돼서 머리를 굴리고, 속은 속대로 타는데 겉으로는 평화를 유지하느라 하루 에너지를 다 쓰는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집에 가면 씻지도 못하고 쓰러져서, “으으……” 영혼 빠져나가는 앓는 소리 내면서 잠들진 않을지ㅋㅋㅋ 이 와중에 드디어!!! 바틀비가 등장한다. 조용해 뵈는 바틀비가 새로 들어와 변호사는 너무나 만족스럽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참으로 예상 못 한 일이 벌어진다. 피식 대다가 의아스럽고 답답하다가 착잡해지고 씁쓸함까지 맛보게 된다.

아, 행복은 빛을 불러들이고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즐거운 곳이라고 여기는 반면, 불행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잠복해 있어서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지. 병적이고 어리석은 머리가 빚어낸 망상임이 분명한 이런 서글픈 상상은 바틀비의 기벽과 관련된 좀 더 특별한 다른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는 뭔가 이상한 것들을 발견할 것 같은 예감에 휩싸였다. 무정한 낯선 이들 사이에서 하늘거리는 수의에 싸여 누워 있는 바틀비의 창백한 모습이 떠올랐다. (p. 35)



윌리엄 트레버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

맨 처음에 실린 「욜의 추억」은 시작부터 묘했다. 호텔 테라스에서 깜빡 잠든 미스 티처가 눈을 떠보니, 산책을 나간 친구 미스 그림쇼가 앉을 자리에 낯선 남자가 와 앉아도 괜찮겠느냐고 묻는다. 미스 티처는 차마 안 된다고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퀼런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대뜸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미스 티처는 그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준다. 나였다면 진돗개 하나 발령과 동시에 이 사람이 계속 앉아 있으면 어쩌지, 해코지하면 어쩌지, 나중에 따라오면 어떡하지, 아마 온갖 걱정과 추측부터 하느라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못했을 것 같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내 앞에 앉아 있게 되는 이 상황 자체를 이렇게 오래 두고 보지도 않았을 거다.

처음에는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지?’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왜?’를 따지고 있을 틈조차 주지 않으니 말이다. 퀼런이 욜에서 보낸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려줄수록,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이 상황을 조금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됐다. 미스 티처가 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왜 낯선 남자의 사정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는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등등, 이 모든 걸 판단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고 다른 한 사람이 그것을 들어준다는 일이 더 중요하게 느껴질 만큼. 이때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미스 그림쇼의 등장으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다. 여기서 흥미롭게 들여다본 것은, 미스 티처가 퀼런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은 아주 사적인 마음과 그 마음을 옆에서 너무 아무렇지 않게 끊어버리는 미스 그림쇼에게서 느끼는 미묘한 불편함이었다.

“우리는 추억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윗옷 어깨에 비듬이 내려앉은 지저분한 낯선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짜증이 나 있는 미스 그림쇼에게 아무렇지 않게 껄껄대며 말하는 퀼런. 마치 ‘당신이 하는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사실인지조차 알 수 없군’ 하는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가벼운 대답 정도만 해주는 미스 그림쇼. 그런데 그 ‘가벼운 판단’이 미스 티처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아직 이야기를 다 듣지도 않았는데 누군가의 아픔을 이미 자기가 아는 도식 안에 넣어버리는 모습에 실망한 것 같기도 했다. 이쪽도 저쪽도 이해는 갔다. 언제나 타인의 마음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비난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막상 내가 아끼는 사람이 타인의 아픔을 가볍게 바라보는 모습을 마주하면 어쩔 수 없이 실망하게 되는 그 감정. 희한하게도 별 감흥 없이 읽어내려 간 줄 알았는데, ‘나란 사람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충분히 흘러갈 시간을 주었던가’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든다. 사람의 이야기를 오래 듣는다는 건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전처럼 낯선 사람으로만 바라볼 수 없게 만들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함께.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 수도 있지만, 이런 상황을 내가 맞닥뜨릴 일이 있을까 싶기도 한 묘한 어긋남이 「탁자」에서 이어진다. 지극히 계산적인 유대인 가구 중개업자 제프스는 탁자를 사고파는 일을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추측하고, 그들의 삶을 짜맞추며 거의 확신까지 한다. 상상은 자유. 게다가 돈도 안 들고. 그런데 짐작을 사실처럼 굳혀버리는 일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사는 게 바빠 남의 일에 관심도 없고 신경 쓸 필요성을 모르겠다며 무심한 얼굴로 마음속으로 중얼거릴진 몰라도, 조각조각 쪼개서 들여다보면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타인의 삶에 참 관심이 많다. 문제는 자기 안에서만 완결된 해석을 붙들고 내 짐작은 틀림이 없다고 자부하면서 그 생각을 어느 순간 사실처럼 믿어버린다는 것. 이런 심리를 드러내고 끝이 나버린다면 아, 뭐야 싶을 텐데, 제프스에게서 느껴지는 건 뜻밖에도 그의 고독과 결핍이었다.

제프스는 눈을 감은 채 마음속으로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넓은 빅토리아풍 집에 홀로 서 있는 자기 모습을 보았다. 그의 집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러 달이 흐르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구는 단 한 점도 없었다. 그는 팔고 또다시 샀다. 그는 카펫을 깔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가 온전히 제 것으로 소유한 거라고는 예전에 누군가가 아무런 가치 없는 물건이라고 일러 준, 오래된 라디오 하나밖에 없었다. (「탁자」, p. 46)

조금 더 황당하고 조금 더 긴장하며 읽게 만든 「펜트하우스」는 런던의 한 건물에서 개 한 마리와 함께 사는 중년의 독신 여성 윈턴의 이야기다. 그녀가 사는 건물의 꼭대기층에는 돈 많은 런카 부부가 살고 있다. 그 집에서 일하는 비안카가 식료품점에서 만난 윈턴에게 펜트하우스 구경을 부추기고, 윈턴은 본의 아니게 자신의 개와 함께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게 된다. 수줍음이 많아 15년을 외롭게 지낸 윈턴이 먼저 다가와준 비안카의 손길을 저버릴 수가 없었나 보다. 마침 수도를 고치러 와 있던 관리인 모건까지 합세해 칵테일을 마시는 세 사람. 그런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던 모건이 꽃병을 깨트리고, 카펫 한가운데가 큼직하게 젖어버리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뭔가 이럴 줄 알았어 싶은 일이 기어코 벌어지니 속이 탄다. 어휴. 게다가 오늘은 런카 부부의 펜트하우스를 잡지에 싣기로 한 사람들이 오기로 한 날. 당황스러운 윈턴 앞에서 모건과 비안카는 깔깔대고, 모건은 윈턴이 데려온 개가 꽃병을 깨트렸다고 하자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 그 뒤로도 짜증 나고 어이없는 상황이 이어지는데 나랑 윈턴만 쫄려 죽게 생겼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비안카와, 관리인으로 지내며 여러 세입자의 못 볼 꼴을 다 봐온 탓에 분노와 억한 심정으로 가득한 모건. 이런 두 사람을 보며 윈턴은 나이도 훨씬 많고,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p. 71)인 자신이 이 상황을 정리해야겠다고 느끼기라도 한 건지, 온갖 상황을 머릿속으로 상상한다. 곧이어 펜트하우스 주인 부부와 잡지사 사람들이 도착하고, 서로를 이해시키고 오해를 풀고 싶어 하는 마음은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는다. 윈턴이 이 집에 발을 들일때 부터 왜인지 그냥 제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천만 번 했던 내 속도 점점 끓어올랐다.

재미? 글쎄. 집중하느라 손톱을 잘근거리며 읽게 만드는 그런 재미는 아마 이 책을 덮는 순간까지도 없을지도 모른다. 아직 이 한 권도 다 읽지 않은 터라 대단히 섣부른 판단일 수 있지만, 느낌상 그렇다. 그런데 왜 자꾸만 그 한 장면, 그 잠깐 느껴진 분위기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무심히 뽑아내는 한마디와 그 순간의 감정 속에서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마음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 굳이 재미를 찾지 않게 만드는 이유가 되어주는 것 같다. 「펜트하우스」의 윈턴만 해도 내내 외롭게 지내다가 타인의 손길에 15년 만에 용기를 냈다. 처음으로 남들처럼 평범하고 소소한 즐거움에 어렵게 한 발 내딛어 본 날, 그야말로 개떡같은 일에 휘말린 거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그럼 그렇지. 살던 대로 살지, 내가 무슨.’ 이런 자괴감에 다시 몸을 움츠리진 않을까. 그런데 또 누가 알아. 사람이라면 아주 진절머리가 나서 ‘아, 됐다. 나 혼자서 잘 먹고 잘 살 거야!’ 할지도 모르지.

윌리엄 트레버라는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 때문인지 궁금했었다. 그의 글이. 몇 편의 이야기를 읽으며 느낀 건, 이해가 필요한 여러 상황 속에서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은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는 거다. 인물의 말에 담긴 뉘앙스가 어느 순간 ‘아, 이거’ 하고 확 읽히면서 내가 알던 그 마음을 알아보게 되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한 번씩 붙잡히기도 한다. 잔잔하게 이야기가 흘러가다가도 어느 순간 공기를 확 제압해버리는 문장이 툭 등장한다. 그 갑작스러움에 쓸쓸했고 서글펐고, 때로는 간사했고 오만했고 외로웠던 그때의 내 마음들이 자연스럽게 불려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나의 곁이 필요한 때가 있다는 생각도 하면서. 그러던 중 최근에 받아든 헤르만 브로흐의 <현혹>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나에게 속하지 않고 인류에게 속해 있는 무한성, 어제를 지워버리고 내일만을 인정하는 무한성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시시한 일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일이란 이제는 인식하는 일이 아니고 살기, 함께 살기, 필요할 땐 가끔 도움을 베풀기이다. 나의 내일이 점점 짧아지고 있으니 그렇게라도 해서 어제를 구원하고 싶은 모양이다”


8월이 가고, 9월이 왔다. 지나가고, 새로 왔다.
새로 온 것 중에는 책도 몇 권 있다. 그리고 커피까지. 드립백, 오랜만이다. 알라딘에서 커피를 사는 건 처음이다. 디카페인은 제외하고 싱글 오리진으로만 고르다 보니 종류가 몇 가지밖에 없어, 일단 종류별로 골라봤다. 궁금하니까. 이제 차가운 컵을 쥔 손의 시원함보다 온기를 찾게 되는, 따뜻한 커피가 생각나는 계절에 다다르긴 했나 보다.

그래도 아직은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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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9-21 0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윌리엄 트레버 작가 책 저도 가지고 있어 중복되어 반갑네요. 사다놓은지는 한참인데 아직 읽진 못했어요. 한때 현대문학 단편선에 꽂혀 수집?해 보리라 다짐한 적 있었는데 여적 세 권밖에 못 모았어요. 읽지도 않는데 구입만 해서 뭣하나? 그런 생각도 들었고.ㅋㅋ 근데 곰돌이 님 리뷰 읽다보면 아, 다시 모아야 하는 건가? 또 들썩여지기도 하네요.ㅋㅋㅋ 그나저나 알라딘 커피 많이 구입하셨네요? 드립백인가보죠? 하긴 드립백은 갯수가 적어 금방 다 먹어지긴 합니다. 저렇게 쟁여놔야 한 달은 마실 수 있겠어요. 저는 한여름에도 뜨라떼를 마시는 편인데 아직도 아아를 마시다니…많이 젊으시구나! 생각했습니다.ㅋㅋㅋ 제 주변 젊은이들?은 제가 뜨거운 커피 마시는 걸 보고 안 더우세요? 하며 깜짝 놀라곤 하시길래 아, 내가 엄청 나이를 많이 먹었나보군! 그런 생각을 올해부터 하게 되었거든요.ㅋㅋㅋ 그래서 따뜻한 커피를 마셔도 주변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계절이 다가와 참 좋네요.^^ 그리고 즐거운 독서의 계절인지, 방해의 계절인지 모를 계절. 가을! 곰돌이 님께는 즐거운 독서를 즐길 수 있는 좋은 가을이 되셨음 싶네요.^^

곰돌이 2026-09-21 08:10   좋아요 1 | URL
책장에 언젠가는 읽어야 할 텐데, 라는 마음의 짐이 느껴지는 책들 많으시죠? 저는 세계문학 단편선 몇 권, 안나 카레니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 등이 있는데요. 뭔가 스스로 작정하지 않으면(?) 안 읽힐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시작해보자!! 해서 가장 얇은 것들 위주로 꺼내봤어요. 몇 편씩만 읽어봤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나무님도 맛있는 커피 호로록 마시면서 윌리엄 트레버 슬쩍 만나보세요. 요즘 날씨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아, 맞다! 잃시찾 읽고 계신 나무님이시다. 그럼 덩치들에게 눈길이 가기란 쉽지가 않을.... 그럼, 더 천천히 더 느긋하게 즐기면 되겠어요. 그런데 굳이 마음을 먹지 않아도 계절의 변화나 혹은 어떤 감정의 기복에 따라 전혀 생각도 안 했는데 알아서 손에 잡히는 책이 있는 것 같아요. 점점 날이 썰렁해져서 그런지 뭔가 바스라지는 낙엽 같은 건조한 이야기도 조금씩 생각나요. 체호프의 단편도 올해 한 번 읽어보려구요. 차곡차곡 뭔가 자꾸 쌓이기만 한다. ㅋㅋ

정말 오랜만에 드립백이었어요. 다 마셔보진 못했는데, 예가체프 G1 게뎁 첼첼레 괜찮더라고요. 부모님도 드리고, 저희 언니 가방에도 몇 개 쳐 넣어주고 ㅋㅋㅋ 그러다 보면 한 달도 못 갈 것 같아요.

아, 월욜이 좋기란 거의 희박한데, 오늘은 나무님 덕분에 평소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시작을 하게 되네요. 진짜루요. 흑..

다락방 2026-09-21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저는 오늘 언급하신 책 중에서 랭스턴 휴스가 관심이 갑니다. 저는 인종차별, 그리고 디아스포라 에 대해 정말 관심이 많거든요. 그런 글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실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도 물론 관심이 있지만, 문학으로도 읽고 싶어요. 덕분에 오늘 알아갑니다.

역시, 곰돌이 님의 서재에 오는 일은 즐겁습니다. 좋은 글과 함께 좋은 책을 알아가니까요. 계속 써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좀 더 자주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루에 반드시 하나씩!! 어때요?

곰돌이 2026-09-21 09:50   좋아요 0 | URL
오늘은 이 곰이, 다락방님과의 공통점을 찾아낸 날이네요. 저 역시 인종차별, 디아스포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어서인지 많이 읽어보려고 하고 있어요. 깊이는 얕지만, 꾸준히 손길이 가요.

이따금 책을 핑계 삼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 것이 전 여전히 ‘내가, 내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해요. 또 그때마다 당근을 손수 입에 물려주시기까지 해 주셔서 어찌나 감사한지, 직접적으로 알려드릴까요? 뭔가 범접하기 어려운(?)분들이 많은 이 공간에서 저처럼 보통의 사람들도 무언가를 쓴다는 것에 대한 주저함을 조금씩 덜어내는 계기가 주어진다는 것은, 그 사람의 그 날의 하루와 감정을 책임지기도 한단 말이죠!

그런데, 삶과 운명은 다락방님께 땡투까지 해서 구매한 건데, 저 책 갖고는 계시죠? ㅋㅋ

다락방 2026-09-21 10:11   좋아요 0 | URL
당연히!! 갖고 있습니다!! (읽지는 못했지만요. 속닥속닥)

yamoo 2026-09-21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윌리엄 트레버, 허먼 멜빌 현대문학사판 2권에다가 현혹이라니.. 거기다가 제노의 의식까지...4권이 겹치네요!! <삶과 운명>3권도 주문했습니다!ㅎㅎ

곰돌이 2026-09-21 14:08   좋아요 0 | URL
yamoo님과 감히 책 취향이 비슷하다고 생각해 버리겠습니다. ㅋㅋ 최근에 올려주신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도 궁금했던 작품이었는데, 리뷰 올려주셔서 뭔가 해소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지금 언급된 책들 중에서도 몇 권 먼저 읽고 리뷰 써주시면 좋을 텐데요...

rainbass 2026-09-22 0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돗개 하나를 아는분과 커피한잔 하고 싶습니닷!! 우리 축구얘기도 해봐요. ㅋㅋ

곰돌이 2026-09-22 05:23   좋아요 1 | URL
세상이 숭해서 경계부터 하게 된 곰. 그러나 rainbass님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자, 앉으시죠!
 

주문한 책이 도착해 박스를 열어 볼 때마다 어찌나 후끈한 열기를 가득 품고 있던지, 거의 구해내듯 책을 꺼낸 것 같다. 한동안 책 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 책장에 새 책들을 옮겨 보지만, 그 생각도 오래가지는 않는다. 어느새 아침으로는 습하지만 조금은 선선해졌고, 또 이때쯤이면 눈길이 가는 이야기가 생긴다.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스토리>라는 책을 만났다. ‘아무도 나무를 보지 않는 시대’에 대한 경고를 담은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환경 서사시라는 소개가 눈에 들어왔다. 2019년 퓰리처상 수상작이라고 적힌 띠지를 떼어내고 한 장 한 장 넘겨보는데, 예상한 것보다 더 좋았다. 단순히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 영 마음에 안 차지만, 이 두툼한 책을 읽는 동안 내게 무언가 닿는 순간이 많을 것 같다는 섣부른 확신 같은 게 들었다.

자연을 의식하며 살아본 적이 거의 없다. 나무는 늘 나무였고, 산은 늘 산이었다. 계절은 알아서 바뀌었고, 나는 그 곁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늘 거기에 있었다. 당연했다. 아니, 당연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결락이라는 말이 내 삶에 들어왔고, 아무것에도 위안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지려 마음을 쓰지 않았으니 애쓸 일도 없고, 애태우지도 않았다. 내가 너무 구름 위를 걷는 듯 살아왔던 걸까. 상실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경계 너머의 것이었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는 기억에서도 지워졌지만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는 것만은 분명한 그날, 걷다가 저 멀리 보이는 울창한 산을 바라봤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거짓말이다.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보이는 그 산은, 보기만 해도 속이 답답했다.

그렇게 걸었고 또 걸었다.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그제야 안다.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아 잊고 있었던 것들을. 냄새도 맡아보고, 소리도 들어보고, 방향도 바꿔보라고. 자연은 내다볼 줄 안다. 그러니 나는 자연에 빚을 졌다. 자연만이 아니다. 책에도 빚을 졌다. 지금은 꼭 이유가 있어야 책을 펼치는 것은 아니다. 읽다 보면 읽고 싶어지고, 읽고 싶으면 또 펼친다. 그 사이 어딘가에 의리도 조금은 있는 것 같다. 이제 아주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지나간 순간의 숨을 다시 쉬는 날이 있긴 하지만, 예전처럼 오래 붙들고 있진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된 나에게, 그때의 나와 내가 해보았던 여러 시도를 떠올리게 했다. 이 책이.


리처드 파워스 <오버스토리>

오버스토리. 숲의 지붕을 이루는 나무들의 층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뿌리, 몸통, 수관, 종자’로 이어지는 목차를 보니, 나무 한 그루를 들여다보듯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는 소설인 걸까. 전후 사정도 알지 못하면서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이 있었다”라는 이 짧은 첫머리를 읽고, 어디라고 정확히 짚을 수 없는 곳에서부터 찌르르해지면서 나의 묵힌 감정들이 올라왔다. 자연에 기대어 본 적이 있기에 조금 더 특별한 감정으로 다가왔는가 보다. 그때의 나는 분명 이 책을 읽을 생각조차 안 했을 테지만, 지금은 읽고 있다.

어떤 여자가 바닥에 앉아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다. 나무껍질이 여자의 등을 인생처럼 딱딱하게 누른다. 솔잎은 허공에 향기를 뿌리고 나무 한가운데에서 전해지는 힘이 나직한 노래를 부른다. 여자의 귀가 가장 낮은 주파수에 집중한다. 나무는 말이 존재하기 전의 말로 이야기를 한다. (p. 13)

뒤이어 “신호가 여자의 주위로 씨앗처럼 떨어진다”는 문장에 시선이 한동안 머물렀고, 당장에 눈에 띄는 것은 없었지만 천천히 비집고 나오고 있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며, 아주 조금은 가상히 여겨보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책 속의 죽음을 읽으며 누군가를 잃었던 때를 떠올렸다. 글쎄, 그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 만한 말은 잘 모르겠다. 그저 어쩌지 못하겠는 마음을 책을 통해 다시 마주하니 조금 힘들었다. <모든 저녁이 저물 때>라는 책 때문이다.


예니 에르펜베크 <모든 저녁이 저물 때>

갈리시아의 한 작은 도시, 유대교 여성과 기독교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여덟 달 된 아기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 속하는 일 앞에서 아기 엄마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예전에 장례를 마치고 아직 슬픔에 잠겨 있는 유가족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곤 했던 그녀의 발치에는, 이제 한 친구가 가져다 놓은 음식 그릇이 놓여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할머니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더 이상 할머니가 아니다. 다시 딸의 엄마일 뿐이다. 이야기는 어머니가 오래전 겪었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딸이 이제 조만간 깨닫게 될 사실을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이 죽은 하루가 저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이 저무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p. 24)

그런데 작가가 이야기를 참 묘하게 끌고 간다. 한 장면을 한 방향으로만 밀어붙이지 않고, 아주 작은 틈을 통해 자연스럽게 다른 결로 옮겨간다. 풀어가는 방식 자체가 꽤 마음을 잡아끌고 매력 있다. 예측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마음이 슬픈데, 아름답다. 너무 알겠는데, 어디서 읽어본 적은 없다. 이러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


그리고,


시몬 드 보부아르 <레 망다랭>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돌아가다>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책들과 동성애자로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 내가 파리에 정착하게 만든 두 가지 큰 이유였던 것 같다”는 부분을 읽고 밑줄까지 그어 가며 궁금해했다. 보부아르를. 누군가의 글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과, 그 글이 실제로 삶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 아닌가. 출신 계급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처럼, 성적 지향은 평생 감춰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았을 그가 보부아르를 읽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이 자신의 삶을 전부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가능성’을 발견했을 때의 그 표정이, 짧은 문장 안에서도 다 들여다보이는 것만 같았다.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게 된 자의 해방감이. 나도 보부아르를 펼쳤다. 여러 책 중에서도 <레 망다랭>을.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앙리는 ‘희망’이라는 뜻의 신문사 <레스푸아>를 운영하고 있다. 크리스마스이브, 앙리와 그의 동거녀이자 전직 가수인 폴이 사는 원룸에 작가 뒤브뢰유와 그의 아내 안, 딸 나딘을 비롯한 사람들이 모인다. 전쟁이 끝나가는 시기, 이들은 한자리에 모여 술과 음식을 함께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뒤브뢰유는 앙리에게 자신의 정치적 활동에 함께할 것을 권한다. 신문사를 계속 운영하는 한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앙리도 잘 알지만,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어 한다.

늘 똑같은 얼굴들, 똑같은 환경, 똑같은 대화, 똑같은 문제들, 변하면 변할수록 더욱 비슷해지다니. 결국 살아 있는 채로 죽어가는가 싶은 것이다. (p. 22)

“나는 생각하는 것을 반드시 있는 그대로 말하려고 해. 조직에 매이지 않은 채 말이야.” (p. 36)

서로 다른 생각으로 충돌하고, 사랑하고, 상처받으면서도 자기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초반부만 읽어서 다 짐작할 순 없지만, 정치와 이념을 둘러싼 이야기라 읽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릴 줄 알았는데, 결국은 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생각보다 흥미롭게 읽히고 가독성도 괜찮다.


디노 부차티 <타타르인의 사막>

처음 만나는 이탈리아 작가 디노 부차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는 작가라는데, 몇 쪽을 읽는 동안 가장 크게 느낀 건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담담한데, 어딘가 착잡한 기운이 감돈다는 것.

힘들었던 기숙사 생활을 끝내고 장교가 된 조반니 드로고는 첫 부임지인 바스티아니 요새로 떠난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나 활기가 느껴진다기보다는 미래에 큰 기대도 없어 보이고, 심지어 헛헛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머니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길을 나선 그는 어디에 있는지도, 얼마나 먼지도 모르는 요새를 찾아 계속 산을 오른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마부에게 요새의 위치를 묻자, 뜻밖의 답이 돌아온다.

“이 부근에는 요새가 없어요.”

불안감이 밀려오지만, 그가 잘못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렇게 한참 더 올라 마침내 거대한 군사시설과 마주한다. 황량하고 냉랭한 건축물. 이번에는 정말 요새인가 싶었는데, 또 아니다. 걸인으로 보이는 어떤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며 이곳은 이미 십 년도 넘게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곳이라고 한다. 거센 바람까지 불어닥친다. 잠잠해지고 난 뒤 다시 길을 나서고, 마침내 사람이 눈에 보인다. 오르티츠라는 이름의 대위였다. 인사를 나누던 중, 대위가 드로고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굽니까?”

드로고는 두려움을 느낀다. 아무 뜻 없이 던진 평범한 질문이었을 텐데, 왜 이 말이 드로고에게는 대답하기 두려운 질문이었을까.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안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라도 온갖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와 쉽게 입을 떼기 어려웠을 것 같다. 드로고에게도 그랬던 건 아닐까. 이어 대위에게서 또 한 번 예상 밖의 이야기를 듣는다. 드로고의 목적지인 바스티아니 요새는 더 이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

저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이 거주하기 힘들어 보이는 저 건물과 흉벽, 포대와 탄약고 뒤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까? 아무도 지나쳐간 적 없다는 돌투성이 사막의 북쪽 왕국은 어떠할까? 어렴풋이 기억하건대, 지도에서 국경선 너머 광활한 지역에는 몇 안 되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요새의 높이 정도라면 몇몇 마을이나 초원, 하다못해 집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아니면 오직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의 황량함뿐일까? (...) 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요새 입구에 발조차 내딛지 않고 다시 그가 떠나온 평야로, 그의 도시로, 익숙한 옛 생활로 내려갈 수만 있다면! (p. 21)


버나딘 에바리스토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흑인 여성 최초로 부커상을 받은 작가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작품이다. 열아홉 살 딸을 둔 오십 대 여성, 자칭 전투력 넘치는 중년의 베테랑 ‘앰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런데 앰마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구 도미니크에게로 시선이 옮겨가고, 또 다른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 사람의 가족과 친구, 과거의 시간까지 닿는다. 한 사람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 사람을 둘러싼 다른 삶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열두 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내가 알지 못했던 삶의 모양들을 하나씩 만나게 될 것 같다.

한 사람을 내가 본 모습 하나, 그 단면으로만 기억하는 건 어쩐지 아쉽다. 지나고 나서야 후회로 남는 순간들이 있어서일거다. 누구나 남들이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의 시간이 있고, 누구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니까. 그런데 참 웃긴 것이, 소설 속 인물을 바라볼 때는 내가 알지 못하는 모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깊이 들여다보려고 하면서, 현실에서는 영 그러질 못한다.


아무튼, 오늘도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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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8-23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버스토리>가 맘에 꽂히네요.
자, 이제 색깔별로 꽂아볼 시간입니다. ㅎㅎ

곰돌이 2026-08-23 12:00   좋아요 0 | URL
이대로 색깔 찾아 쏙쏙 채우기만 하면 될 것 같죠? ㅎㅎ 고스란히 들어가 줄 만큼만 책장이 넉넉하면 좋을 텐데요... 흑흑

자목련 2026-08-23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버스토리>아름다운 문장과 자연의 신비로움으로 기억하는 소설이에요.
나란히 발맞추는 책들, 경쾌하고 즐거워 보입니다!

곰돌이 2026-08-23 12:01   좋아요 0 | URL
이 책에 자목련님이 남겨주신 글과 산뜻한 책 사진, 이미 다 보았지요. ㅎㅎ 처서매직은 없지만, 가을로 점점 기울어져가고 있어서인지 어딘가 차분하면서도 잔잔한 이야기에 손길이 가요!

Falstaff 2026-08-23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돌이님 글도 참 잘 쓰셔요. 세상에 이런 일이! 전부 재미나게 읽은 책이라 내 마음까지 므흣하네요.

곰돌이 2026-08-23 12:02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님의 첫 칭찬에는 (혼자 가슴에 새겨둠 ㅋㅋ) 앞으로 더 열심히 읽어보라는 응원의 뜻이라 생각하며 흥분을 간신히 가라앉혔는데요. 이번엔 못 참습니다!!! 폴스타프님의 글을 읽고, 고른 책으로 책장을 채우는 경우가 많으니 (이미 아시죠? ㅋㅋ)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기도 이제 머쓱할 지경이네요.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 계속.

다락방 2026-08-23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돌이님 글도 참 잘 쓰셔요.2 저보다 먼저 폴스타프 님이 말씀해주셨네요. 저도 딱 그 댓글 달려고 했거든요. 곰돌이 님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좋고, 이게 알라딘이다 싶어요. 크- 계속 써주세요!

다락방 2026-08-23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오버스토리 저도 사둔지 한참 된 책입니다! (안읽었지만..)

곰돌이 2026-08-23 18:0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댓글 첫줄에서 폴스타프님 목소리(제가 상상한 그의 음성이...ㅋㅋ)가 들리네요. 큰 의미고 뭐고 없이 재미만으로 읽을 때도 많지만, 속에 들어찬 무언가를 좀 덜어내고 싶을 때, 내 이야기를 써 보고 감정을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는 그 시간만으로도 얻는 게 넘 많아서 겁없이 이어가고 있네요. 제가 잘한 일 중 하나이기도 해요. 큭. 그런데 이렇게 곰 한 마리의 마음을 후끈하게 해주시는 이야기까지 들으니... 이 순간을 잔뜩 누리리! ㅎㅎ <오버스토리>는 제가 먼저 읽어볼게요. 다락방님은 잃시찾도 읽으셔야 하고, 넘 바빠요!
 

최근에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었는데, 호아킨 폰트라는 인물이 자기 딸의 친구이자 젊은 시인인 벨라노와 리마를 향해 이런 말을 했다.

지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그런 문학은 넘쳐 난다.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최고의 문학이다. 슬플 때를 위한 문학도 있다. 기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지식에 갈증을 느낄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절망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이 마지막 문학이 울리세스 리마와 벨라노가 하고 싶어 한 문학이다. 곧 알겠지만 심각한 오류이다. 예를 들어 평온하고 교양 있고 대체로 건전한 생활을 하는 성숙한 독자, 즉 평균적인 독자를 생각해보자. 책과 문학지를 구매하는 사람을. 자 그 사람이 여기 있다. 그 사람은 차분할 때를 위해, 평온할 때를 위해 쓰인 문학을 읽을 수 있다. 또한 터무니없거나 유감스러운 공모(共謀) 없이 비판적인 눈으로 그리고 냉철하게 다른 모든 종류의 문학을 읽을 수 있다. (...) 사람이 평생을 절망하면서 살 수는 없다. 몸이 결국 말을 듣지 않게 되고, 고통은 결국 견딜 수 없어지고, 총명함은 차가운 세찬 물줄기 속에 사라진다. 절망하는 독자는 결국 책과 멀어지고, 필연적으로 절망만 하는 사람이 된다. 아니면 절망을 치료한다! (...) 광맥을 고갈시키지 말라고! 겸허해지라고! 미지의 땅에서 찾아 헤매고 방황하라고! 그렇게 하되 빵 부스러기나 하얀 조약돌 같은 생명줄은 유지한 채! (《야만스러운 탐정들 1》, p. 321)

기존 문단의 질서에 맞서 자신들만의 문학을 꿈꾸던 반항심 가득한 청년들에게 건넨 조언이었다. 물론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지만... ㅋㅋ 내가 그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호아킨이 최고의 문학이라고 말한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을, 특정한 감정 하나에 독자를 붙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삶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문학으로 읽었다. 그리고 이 말은 꼭 문학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벨라노와 리마를 향해 던진 호아킨의 문학적 조언이 다 와닿는 것은 아니었다. 절망에 깊이 잠긴 문학이 어떤 독자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게 하는 통로가 되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게 만들기도 하니까.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 곳도 갈 수 없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돼버린 이들에게도, 언젠가 문을 열면 자신을 기다려 줄 곳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 이건 어디까지나 독자인 내 바람일 테다. 모든 종류의 문학을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을 만큼 자유롭고 성숙한 독자는 아닌, 그저 취향에 맞는 책을 집어삼키는 내게는 어둠 속을 방황하더라도 결국 삶으로 돌아올 ‘생명줄’을 쥐고 있으라는 당부의 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사실 늘 평온하기만 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아마 호아킨이 말한 평온함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라기보다, 온갖 고통의 소요를 치르고도 끝내 자신을 잃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지. 지금의 나에게는 내공에 가까운 말이다.

예전에는 특정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 중 하나로 문학이 내게 이용당하곤 했다. 이제는 어떤 감정 속에 있더라도 그것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틈을 만들어준다. 그 감정에만 오래 머물지 않게 해준다고 해야 할까. 그 고마움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책을 붙들고 읽어 나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내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다. 삼십삼 년을 살아오며 어설프게나마 깨우친 것이 몇 있긴 해도 (진짜 있기나 한 건지...), 정말 앞날만큼은 알 수가 없다. 그건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와도 모를 일이지. 그리고 오늘의 이런 건전한 생각(?)이 앞으로도 그대로 유지되면 좋겠다만, 온갖 것을 다 쏟아부어도 ‘영 오늘은 날이 아니구나!’ 싶은 개떡 같은 날은 또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런 날에는 화려한 수식어구가 필요치 않은, 그저 글을 썼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사람들의 글을 찬찬히 읽고 마음을 헤아려보며, 잠깐 내 사정은 잊고 몰입한다. 그러다 문득, 몰입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 그 어떤 틈새가 내게도 있었던 거구나 싶어 ‘이만해도 됐지 뭐’ 하며 지나간다. 그렇게 지나가진다. 그러고는 다시 책을 편다.

돌고 돌아 7월에 산 책 이야기다. 이놈의 손가락이 인내라는 것을 몰라 장바구니를 비우고 또 몇 권 품에 들였다. 책을 고르는 일은 늘 그렇다. 읽고 싶은 마음은 앞서고, 참는 마음은 늘 한발 늦는다. 책 선택의 고민을 덜고, 또 다른 세계로 쉽게 발을 들일 기회를 얻는 일은 언제나 반갑고 귀한 일. 이번에도 먼저 읽고 좋은 리뷰를 남겨주신 알라디너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소박한 땡투에 꾹꾹 눌러 담았다. 앞서 호아킨의 문장 하나를 붙잡고 이야기가 길어졌으니, 새 책 이야기는 가볍게 남겨야겠다.



토니 모리슨 《가장 푸른 눈》, 《솔로몬의 노래》

누군가의 상처를 개인의 불행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그 뒤에 놓인 사회와 역사의 그림자까지 드러내는 작품은 늘 내 책장 한 켠을 차지한다. 그중에서도 흑인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다. 그동안 만나봤던 저메이카 킨케이드는 식민지의 기억과 여성의 목소리를, 글로리아 네일러는 흑인 여성 공동체의 삶을, 옥타비아 버틀러는 SF라는 장르를 통해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토니 모리슨이다.



이보 안드리치 《드리나 강의 다리》

한 시대를 담아내는 소설, 역사와 인간이 얽힌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보스니아의 드리나강 위에 놓인 한 다리가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걸까. 시작은 다리를 둘러싼 오래된 전설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천천히 풀어낸다. 오스만 제국 시절 세워진 그 다리는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가고 사라지는 시간을 지켜봤고, 제국이 바뀌고 전쟁이 휩쓸고 지나가는 시간도 묵묵히 견뎌냈다. 수백 년을 같은 자리를 지킨 다리라면, 웬만한 역사책보다 더 많은 사람의 삶과 시간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다리가 간직한 것은 거대한 역사의 기록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이야기로 남긴 순간들, 그리고 그들이 잊어버린 시간까지도 함께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란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고 전설로 바꿀 수 있는 것들만을 기억하고 다시 곱씹어 이야기하는 법이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여러 가지 자연 현상들에 대해 무관심하듯 그렇게 특별한 흔적을 남기는 법도 없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갈 뿐인 것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건드리지도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도 않는 법이니까. (p. 32)



알라 알아스와니 《야쿠비얀 빌딩》

1934년 아르메니아인 사업가 하굽 야쿠비얀이 카이로 중심가에 지은 10층짜리 유럽풍 건물. 처음에는 외국인과 상류층 사람들이 호화롭게 살아가던 최고급 아파트였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모습도 달라졌다.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 외국인과 상류층 사람들이 떠나고, 일부 공간은 사무실이나 병원, 임대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과거 하인들이 머물던 옥상에는 값싼 거처를 찾는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또 하나의 서민 사회가 만들어졌다.

처음 만난 인물은 자키 베다. 상류층 명문가 출신이지만 혁명 이후 집안이 몰락하면서, 한때 꿈을 펼치던 엔지니어링 사무실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신세가 되었다. 여자를 좋아하고 음담패설을 즐긴다. 그리고 그런 그를 20년째 ‘주인님’이라 부르며 모시는 아바스카룬이 있다. 그렇다면 건물 꼭대기에는 어떤 삶이 펼쳐지고 있을까. 라크아를 행하는 모습, 침대에서 있었던 일을 부끄러움 없이 이야기하며 웃는 여자들, 그리고 빵 한 덩어리를 얻기 위해 고단한 하루를 버텨내는 사람들. 그곳에는 팍팍한 삶 속에서도 잠시나마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대단하지 않은 작은 순간들을 붙잡으며 하루를 이어가고 있었다. 소곤소곤 대는 소리,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 기침 소리, 쉬지 않고 이어지는 기도문 소리와 함께.



쥴퓌 리바넬리 《세레나데》

소설의 주인공은 서른여섯 살의 마야 두란이다. 그녀는 지금 보스턴행 비행기에 올라 노트북을 펼쳤다.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생각이다. 마야는 석 달 전으로 돌아가 그날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스탄불 대학에서 외국인 손님을 맞이하는 일을 하는 마야는 어느 날 독일 출신의 87세 미국인 노교수 막시밀리안 바그너를 수행하게 된다. 늘 그랬듯 튀르키예를 소개하고 손님의 편의를 도우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른손에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다른 손에는 여행 가방을 든 노교수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와 침묵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그러던 순간, 교수가 묵을 숙소로 향하는 택시 뒤를 계속 따라오는 수상한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온다. 뭐지? 공상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마야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바빠진다. 이 교수가 혹시 스파이는 아닐까. 뒤따르는 차는 정보국 차량은 아닐까. 갑자기 요원들이 들이닥쳐 교수를 납치하는 것은 아닐까. 온갖 상상을 펼치던 마야. 대체 왜 그녀는 몇 달이 지난 지금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 글로 남기려 하는 걸까.

나는 모든 걸 다 털어놓을 셈이다. 이렇게 다 이야기하고, 내가 목격한 사실을 만천하에 알려야 내 고통도 극복될 테고, 삶도 단순해질 테니까. (p. 10)



마리아나 엔리케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최근에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몇 권 읽었던 터라 이쪽 작품들도 두루 살펴보던 중, ‘라틴아메리카 고딕 리얼리즘의 대가’라는 소개에 이끌려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작품을 집어 들었다. 아르헨티나의 어두운 역사와 오늘날의 사회 문제를 공포라는 장르에 녹여낸 열두 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실제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방화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표제작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부터 읽어봤다.

“뭘 알고 싶어 하는 거죠?” 실비나가 물었다.
“음, 분신 의식이 언제쯤 끝날지 알고 싶어 하더구나.”
“언제쯤 끝날 걸로 보세요?”
“얘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지만 나는 말이다, 영원히 안 끝나면 좋겠어!” (p. 342)

어느새 웬만한 일에는 쉽게 놀라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실비나 역시 거창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버스에서 소매치기가 자신의 가방 속을 들여다볼지 두려워 빈자리가 생기면 안도하는, 어디에서나 마주칠 법한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런 실비나가 개인의 사건을 넘어 국가 폭력의 문제까지 마주하며 여성들의 연대 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간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선뜻 앞에 서지는 못했던 이들이라면, 실비나를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연대는 처음부터 특별한 사람들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사회에서는 자기 몸으로 저항하게 되고, 세상이 끝내 듣지 않는다면 사람은 결국 몸으로 말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었고, 또 알려고 했을까. 세상이 보내는 신호들을 남의 일처럼 지나치고 또 하나의 끔찍한 사건 정도로 넘겨버리면서, 당장 내 앞의 현실을 살아내는 데 바빴던 내 얼굴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왜 많은 여성이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선택까지 했는지, 왜 마리아 엘레나는 끝나기를 바라야 할 이 의식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는지. 그 앞에서 나는 아직 불에 타지 않은 여성 중 하나일 뿐이었다.



H. P. 러브크래프트 《크툴루의 부름 외 12편》

공포 소설은 이상하게 손이 잘 안 갔다. 시청각적 자극 없이 활자만으로 과연 어디까지 몰입을 끌어낼 수 있을까, 늘 반신반의했다. 그런 작품이 있다고 해도 뭘 알아야 읽어볼 거 아닌가. 주구장창 고어만 늘어놓으며 사람 기분만 더럽게 만드는 공포보다는, 밤에 괜히 이불을 바짝 끌어당겨 덮고 싶게 만드는 그런 공포를 원하던 차에 이 책을 발견! 여름이 가기 전 늦은 밤에 펼쳐볼 생각이었는데,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가장 짧은 작품들 위주로 분위기만 먼저 느껴봤다.

꼿꼿한 자세로 감정 기복 없이 읽어 내려가다가도, 분명 별 타격감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읽는 도중이나 마지막 문장에 다다를 때 등을 훑고 가는 싸한 무언가가 있었다. 공포를 빌려 결국 시선을 다른 곳으로 이끄는 작품도 있었다. 난 이게 더 좋았다. 그 끝에서 마주한 기괴한 절망과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조용한 탄식. 나처럼 장르 소설과는 거리가 있는 독자에게도 의외의 재미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총 14편 가운데 「랜돌프 카터의 진술」, 「에리히 잔의 연주」, 「시체를 되살리는 허버트 웨스트」, 「아웃사이더」까지 네 편을 먼저 읽었는데, 가장 오래 남은 건 마지막에 읽은 「아웃사이더」였다. 비명을 내지르게 만드는 공포가 아니라, 마치 피아노의 마지막 단조 화음을 쾅 하고 내리친 뒤, 그 울림이 한동안 가슴에 머무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

과거를 망각한 덕분에 편안해지기는 했어도 내가 아웃사이더라는 것만은 언제나 기억하고 있다. 이 시대와 인간들 틈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낯선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거대한 황금 아치 너머에 있던 그 괴물에게 뻗은 내 손끝에 차갑고 매끄러운 유리 표면이 만져졌을 때부터 깨달은 사실이었다. (「아웃사이더」, p. 109)



오노레 드 발자크 《잃어버린 환상》, 《골동품 진열실》

시작은 《사촌 퐁스》였다. 고구마 줄기의 끝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다. 최근에 고른 《골짜기의 백합》도 시작부터 영 마음을 움찔거리게 했다. 아무래도 이번이 끝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래,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나. 읽으면 되지.

《잃어버린 환상》 1권의 시작을 알리는 니콜라 세샤르. 읽고 쓰는 능력이 없어 식자공이나 교정자의 역할은 할 수 없었던 수습 인쇄공 출신의 그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 속에서 뜻밖의 기회를 얻는다. 국민공회의 법령을 빠르게 유포해야 했던 시대적 필요 덕분에 ‘어쩌다 보니’ 인쇄업 면허를 받고, 인쇄소 사장까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인쇄소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글을 읽고 다룰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이 운이 따르면 문짝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했던가. 때마침 몰락한 귀족 모콩브 백작이 그의 앞에 나타난다.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했던 백작은 살아남기 위해 인쇄소 감독관으로 일하게 되고, 세샤르는 그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다. 서로 전혀 다른 위치에 있던 두 사람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뒤섞인 과정을 흥미롭게 따라가던 중에 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가난이 끝나면 탐욕이 시작되는 법이다.” (p.21)

뒷이야기가 궁금하지만, 읽다 보면 끝이 없으니 함께 고른 《골동품 진열실》을 펼쳤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작은 지방 도시 알랑송, 아직도 옛 귀족 사회의 공기가 짙게 남아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앞서 읽어본 《잃어버린 환상》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 시대가 끝난 뒤 부르봉 왕정복고를 거치며 사회 질서가 새롭게 자리 잡아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세상은 이미 신흥 부르주아가 돈의 힘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로 바뀌었건만, 발자크는 가장 먼저 혁명으로 몰락한 데그리뇽 가문을 보여준다. 많은 것을 잃었는데도 데그리뇽 후작은 여전히 과거 귀족의 명예와 품위를 붙들고 살아가고, 그 곁에서는 충직한 집사 쉐넬이 현실을 묵묵히 떠받친다. 아직은 인물들을 하나씩 소개하는 단계인데, 발자크 표 각성 한 방 기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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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7-26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도 사진도 모두 아름답네요.

곰돌이 2026-07-26 09:58   좋아요 0 | URL
늘 드러내는 것에 있어서는 고민이 많고 쑥스럽기만 해서요. 이 글도 올려놓고 혼자 오버한 것 같아서 ㅋㅋㅋ 지울까 고민하다가 아몰라~ 하면서 뒀는데...... 다락방 님 댓글 잘못 단 건 아니시겠죠? 아, 달디달다...

다락방 2026-07-26 13:23   좋아요 1 | URL
진심입니다.글과 사진이 너무나 고급져요!!

잠자냥 2026-07-26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최근에 들어온 몇몇 땡투의 출처가 곰돌이 님이었군요! 감사합니다. 재미나게 읽으세요.

곰돌이 2026-07-26 15:31   좋아요 0 | URL
곰이라 그런지 맛있는 거랑 재미있는 책 낚아채는 데 빠르답니다. 마리아나 엔리케스 글이 매력 있더라고요. 잠자냥님 덕분에 매번 좋은 작품과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어 신나고, 감사한 마음은 큰데 땡투는 영 변변찮네요.ㅋㅋ

책읽는나무 2026-07-27 0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볼라뇨 책 어디선가 접하고 보관함에 막 쑤셔둔 적 있었는데 저런 문장들이 있었군요. 문학이란…크.^^
그리고 곰돌이 님이 거두신 문학책들과 문학의 정의…크!!
절로 취하네요.ㅋㅋ
이 더운 여름 문학책과 함께 하신다면 그리 많이 덥진 않으시겠어요.
고요한 여름 풍경입니다.

곰돌이 2026-07-27 14:54   좋아요 0 | URL
‘크‘가 두 번!! 갑자기 얼마나 시원한지 감도 안 오는 막걸리가 확 땡기게 만드시는군요!! 요즘 책나무님은 만화책 열심히 읽고 계시던데, 저는 지금 읽고 있는 책 다 읽고 나면 공포 소설이나 한 권 읽어볼까 해요. 으스스 ㅋㅋ
 

작년만큼 읽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읽고 쓰기를 꾸준히 이어 나가는 중이다. 예전에는 생각도 못 하던 일이다. 키보드 위로 감정이 실리지 않은 글만 떨어트리던 손가락이었다. 나의 사적인 속내를 담아본다? 그건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졸음 참는 거다) 덜어내고 비워내는 것에 조급해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이라도 일단 담아보자는 마음으로 그렇게 ‘쓰기’를 시작했다. 뚝딱거리던 손가락이 서서히 괜찮아질 때쯤이었을까. 권여선 작가의 책을 읽는데, 머릿속에서 뭔가 불이 번쩍했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각각의 계절>, p. 241)

쏟아내든지, 그것도 아니면 주변을 좀 살펴보든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물어물 말만 흐리다가 곁에 있는 애먼 사람들만 안절부절못하게 만들면, 아니, 그대로 이 순간을 흘려보내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시간에만 맡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건 스스로가 잘 안다. 그렇게 읽고 쓰면서 스스로를 추슬러 보고 난 뒤에서야 “독서는 경이로운 애도” (<작은 파티 드레스>, p. 9)라는 크리스티앙 보뱅의 말을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적다 보니 영 분위기가 우중충해질라 한다. 어쨌든! 역시, 책은 옳다. 쓰는 것도 그만큼. 때론, 그보다 더.

6월에 고른 책 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 내 보석함에 모셔놓은 알라디너 분들의 글을 훔쳐보다가 발견한 책 몇 권, 그리고 최근에 읽은 것 중 더 읽어보고 싶은 작가의 책 몇 권을 책장에 채워봤다. (감사의 마음은 땡투에 담아...) 더운 여름날 시원한 물 한 잔만큼이나 맛있는 찍먹의 순간! 물음표를 달고 짐작과 궁금증이 부풀어 오르는 딱 이 타이밍만의 재미를 즐기며, 이번에도 앞부분 느낌 정도만 남겨본다. 아님, 좀 더 길게.



이반 곤차로프 <오블로모프>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기행 작가인 이반 곤차로프의 작품이다. 이제껏 읽어온 소설 속 인물들과는 사뭇 다른 특질을 지닌 주인공의 모습이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1850년대 러시아를 시대적 배경으로 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삼십 대 초반의 남성, 일리야 일리이치 오블로모프다.

딱 부러진 이념도 없는 것이, 무언가에 몰입할 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자유로운 새처럼 생각이 얼굴에서 산책을 하고, 눈 안을 휘저으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반쯤 벌어진 입술에 내려앉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이마의 주름살 사이로 숨어버렸다가 이번엔 어디론가 아주 자취를 감춰버리곤 한다. (...) 단 한 순간 피곤도, 따분함도 그의 얼굴에서 온화함을 내몰지는 못한다. 그 온화함은 얼굴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p. 11)

저자는 그 온화함이 마음에서 우러나온다며 아름답게 포장해 주지만, 우리는 직감적으로 안다. 그 온화함은 지갑에서 나온다는 만고의 진리를... 돈 많은 백수임이 틀림없다! (아닌가?) 한참 사회활동을 할 법한 나이에 누워있는 게 일상인 데다가 따분함을 느낄 만하다가도 다시 유턴해서 곧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온화함을 내비칠 수 있다? 게다가 “모든 근심은 한숨으로 해결되고 무관심과 졸음 속에서 기력을 잃고 만다 (p. 12)”고 하니 혼자 속 끓여대면서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어 보이고! 좀 낡긴 했지만, 신축성 좋은 잠옷에 부드러운 신발까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흠, 그러면 그렇지.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하인까지 둔 지주였다. 그런데 집 안 꼴이 말이 아니다. 사방에 쌓인 먼지는 기본이고, 거미줄에, 널브러진 접시와 먹다 흘린 빵 부스러기까지. 나름 최소한의 질서는 있는 건지, 오블로모프가 하인 자하르를 부른다. 잠시 후, 오랜 관성과 고집으로 단련된 기존쎄 같은 기운을 풍기며 세상만사가 귀찮다는 얼굴의 자하르가 등장한다.

“집구석 한번 깨끗하다. 먼지 하며, 너절한 게, 맙소사! 저기, 저 구석 좀 보란 말야. 하는 일이 뭐야, 도대체….”
“아니, 하는 일이 뭐냐니유….” 자하르가 억울하다는 투로 툴툴거렸다. “애쓰구 있잖유. 사는 게 뭔지! 먼지두 훔치구, 청소두 거의 매일 하는디….”

“청소해, 구석의 쓰레기도 치우고. 그럼 빈대니 하는 것들도 없어질 거야.”
“치워봐야 또 쌓일 텐디유 뭐.”

160여 년 전의 러시아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뭐, 다 거기서 거기 아닐까? 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이 소설의 저자 이반 곤차로프는 공무원 생활을 오래 했는데 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한 독특한 이력까지 있다. 그 말은 오만가지의 인간을 겪어봤다는 말씀?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느라 다들 기를 쓰고 달리는 격동의 19세기 러시아 한복판에서, 왜 하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을 소설의 전면에 내세웠을까.



아모스 오즈 <유다>

<나의 미카엘>이 워낙에 유명했지만, 딱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를 읽게 됐는데, 아주 좋았다. 강력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감정은 아니지만, 어떤 경계에서 부유하는 인간의 두려움과 머뭇거림의 기억을 공유하는 동안 생각지 못한 동질감이 느껴졌고, 마음이 쓰였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건 여전히 유효하기에. 그리고 이 책을 골랐다.

부친의 사업 실패와 연인과의 결별로 마음이 고달픈 스물다섯 살의 슈무엘. 어딘가 불안정하지만,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그는 원래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라는 제목의 석사 학위 논문을 쓰던 중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한 상태다. 아모스 오즈 문학의 중요한 무대인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둔 점이나, 슈무엘이 드나드는 사회주의 서클의 논쟁과 스탈린에 대한 담론을 담은 장면을 보고 있자면,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에 흐르던 예루살렘 지식인들의 모습과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학업과 사랑이 동시에 흔들리며 삶의 방향을 잃은 슈무엘은 예루살렘을 떠나려고 이사를 준비하던 중, “인문학을 공부하는 미혼 남학생, 역사를 잘 알고 있으며,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리는 세심한 대화가 가능한 분, 저녁마다 다섯 시간 정도 학식이 깊고 지적인 일흔 살 장애인 남성에게 말동무를 해 주시면 무료로 숙소를 제공하고 소액의 월급도 지급함. (p. 26)” 이라는 광고를 읽게 된다. 그리고 어딘가 오래된 상처와 침묵이 배어 있는 고택에서, 까다롭고 논쟁을 즐기는 노인 발트와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발자크는 늘 읽어보고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는 작가였다. <사촌 퐁스>를 읽고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 모른다. 이번에 고른 <고리오 영감>은 ‘인물 재등장 기법’이 최초로 도입된 소설이라고 한다. 안 그래도 <사촌 퐁스>를 읽을 때 재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소개와 함께 줄거리가 펼쳐질 때마다, 나 혼자 초면이라 우두커니 눈만 끔벅거렸는데, 이번에는 재회의 기쁨을 느껴볼 수 있겠구나. 뭐, 딱히 더 만나고 싶은 인물은 없다만... ㅋㅋ

19세기 프랑스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의 앞부분만 슬쩍 들여다보자면, 보케르 부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이 등장한다. 주변 지형을 시작으로 냄새부터 내부 벽지 무늬, 가구와 바닥 상태 하나하나 묘사가 길고 빽빽하다. 하숙집 부동산 매물 실사 보고서를 읽는 기분이다. 나의 인내심이 책 읽을 때만큼은 진득함을 유지하기에 참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뒤이어 이 퀴퀴한 3층짜리 하숙집을 채우고 있는 세입자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고향집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파리에 상경했다는데 어딘지 모르게 눈빛이 번뜩이는 법대생 라스티냐크, 털털하고 유쾌한 척하지만, 언뜻언뜻 구린 구석과 서늘함을 풍기는 근육맨 보트랭, 그리고 이 하숙집의 공식 샌드백이자 조롱거리이면서도 바보처럼 허허거리기만 하는 의문의 노인, 고리오 영감까지. 저마다 사연 있는 얼굴을 한 사람들이 층수별로 방값에 맞춰 다닥다닥 모여 살고 있는 이곳은 돈이 전부인 파리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다.

말라붙은 심장과 텅 빈 두개골 가운데서 어느 것이 보기에 더 끔찍스러운지 누가 결정할 수 있을 것인가? (p. 12)

그리고 똑같이 19세기 프랑스를 다룬 <골짜기의 백합>을 골라봤다. 우선 펼쳐 든 앞부분의 공기는 <고리오 영감>의 음울하면서도 퀴퀴한 파리 골목과는 전혀 딴판이다. 펠릭스라는 남성이 자신의 연인 나탈리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함께 있어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자주 상념과 침묵에 잠기던 펠릭스의 모습에, 나탈리는 그의 과거가 궁금해진 모양이다. 과연 그녀에게 지난날을 고백하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탈리가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오래 묻어둔 자신의 이야기를 기꺼이 꺼내 들기로 한다.

그렇게 펠릭스는 자신의 과거를 적어 내려간다. 갓난아기 시절 시골 보모 손에 맡겨진 일부터, 좀 자라서는 형과 누이들의 지독한 괴롭힘, 부모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채 온 집안의 애정을 철저히 박탈당했던 유년기의 외로움과 불행까지. 더욱 착잡해지는 것은, 펠릭스가 악바리 같은 정신적 저항력을 키워내며 버텨 왔다는 점이다. 부모의 방임 속에서 혼자 차별받는 펠릭스의 모습 위로, 실제 발자크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사촌 퐁스> 속 퐁스의 지독한 결핍이 겹쳐 보여, 이게 또 하나의 맴찢 포인트! ㅠㅠ 편지에 담긴 뒷이야기들이 어떤 내용일지 아직은 모르지만, 당장은 내가 나탈리라면 펠릭스의 편지를 읽자마자 안쓰러운 마음에 일단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을 것 같다.

내 안에서만 갇혀 살아야 하는 가혹한 운명을 바꾸려 얼마나 노력했던가! 열정적인 마음이 오랫동안 품은 희망들이 하루 만에 무너진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p. 17)

이런 가시 박힌 장벽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인 감정의 뿌리가 너무도 깊어서, 또 어머니의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그녀에 대한 거룩한 외경심은 버릴 수가 없어서, 우리가 더 나이 들어서 그녀를 정당하게 심판하게 된 그날까지 너무나 어리석게도 그녀를 계속 사랑했다. (p. 26)



자우메 카브레, <나는 고백한다>

“행복과 불행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 그저 나에게 달려 있었다. 이를 깨닫는 데 무려 육십 년이나 걸리다니. 나는 버림 받았고, 고독하고, 당신을 너무나도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당신은 나의 정신적인 지주다. 공포스럽기는 하지만 표류하지 않기 위해 떠내려가는 뗏목을 억지로 붙잡는 일은 하지 않겠다. (...) 내 마지막 기회라고 할 이 원고 앞에 나는 홀로 섰다”

이 차갑고도 고독한 고백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바르셀로나(발카르카)라는 현재와 500년 전 중세 수도원, 그리고 1690년 대재앙의 과거가 경계를 허물듯 뒤섞이며 시점이 바뀌고 교차한다. 온통 까맣게 타버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한 숲, 그 황량한 잿더미 속에서 돈이 될 만한 나무 밑동을 기를 쓰고 찾아내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그중에서도 악기용 목재를 찾아내는 데 뛰어난 눈을 가진 자키암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단순한 배경이 아닐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자키암과 그의 아버지의 대화가 이어진다.

“아무리 네가 악기용 목재를 찾아내는 데 최고의 실력을 갖추었다지만, 아들아, 이 저주받은 집안의 넷째 아들아, 우리가 절대 팔지 않을 가장 훌륭한 재질의 단풍나무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너의 목숨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앞에 닥쳐올 고난으로부터 너를 지킬 수 있는 길이야.” (p. 19)

결국 숲을 떠나야만 하는 자키암의 가혹한 운명. 그리고 소설의 서두를 연, 죄의식에 짓눌린 한 노인의 서글픈 참회. 이 두 줄기의 서사가 내 머릿속에 맞물리면서 묘한 불길함과 먹먹함을 풍기더니, 어느새 시선은 잿더미가 된 숲을 빠져나와, 골동품 수집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아버지 ‘펠릭스 아르데볼’이 지배하는 바르셀로나의 무거운 저택으로 넘어온다. 그리고 이 숨 막히는 그늘 밑에서, 앞서 등장한 노인의 유년 시절이었을 소년 ‘아드리아’가 모습을 드러낸다. 위안이 필요한, 펠릭스의 고독한 아들의 모습으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인간으로 키워내기 위해 분주한 사람처럼 보이고, 어머니는 그 곁에서 묘하게 차갑다.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어린 아드리아가 아버지의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게 너무나 익숙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첫머리에서 만난 그 고백이 괜히 더 아프게 읽힌다. 아직 어설픈 짐작으로 베일을 걷어내듯 읽고 있지만, 소설 속 역사적 사건, 인물들의 대화, 그리고 그 안에 감도는 공기들이 뭔가 거대한 한 지점을 향해 차곡차곡 쌓여 가는 듯한 느낌에 기대감이 끌어올려지면서 묘하게 흥분되고, 얼른 다음 장을 넘기고 싶게 만드는 맛이 있다. 다만, 오는 길이 잘 닦인 아스팔트 길 같지만은 않았다는 것.



저번 5월에 구매한 책 리스트(사촌퐁스, 마왕, 딩씨 마을의 꿈, 아메리카의 비극 등)가 ‘인간 욕망 파멸 세트’였다면, 6월은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같다. 이미 상처를 안고 있거나, 후회하고 있거나, 멈춰 서 있거나, 과거에 붙들려 있는 모습으로. 하긴, 맨날 도파민이나 터지는 탄탄대로 같은 인생사가 세상에 어딨나 싶다. 결국은 덜컹거리는 이야기들 속에서 내 삶의 어느 한 조각을 발견하게 되니, 또 읽고 또 끄덕이고 또 어딘가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 아닐지.

인간이 지상에서 거주하는 것은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단순하고 일상적이며 진부한 삶일 뿐이다.(...) 우리에게 부여된 운명은 실패하는 것이며, 모든 예술과 학문에서, 그리고 가장 본질적으로는 삶이라는 순수한 예술 안에서 실패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실패야말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취다. (<횔덜린의 광기>, p.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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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ass 2026-06-28 0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을유출판사 책이군요. 을유 표지는 언제봐도 고급지다는.

곰돌이 2026-06-28 05:40   좋아요 1 | URL
그쵸! 을유는 색감도 고급스럽고 디자인도 깔끔해서 저도 좋아요. 종합적으로 만족도가 높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