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중에서...

이제 펄롱은 과거에 머물지 않기로 했다. - P19

가끔 펄롱은 딸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걸 보며ᅳ성당에서 무릎 절을 하거나 상점에서 거스름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ᅳ이 애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한 기쁨을 느끼곤 했다.
"우린 참 운이 좋지?" 어느 날 밤 펄롱이 침대에 누워 아일린에게 말했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그렇지." - P20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ᅳ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 P29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고 펄롱은 검게 반짝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 표면에 불 켜진 마을이 똑같은 모습으로 반사되었다. 거리를 두고 멀리서 보면 훨씬 좋아 보이는 게 참 많았다. 펄롱은 마을의 모습과 물에 비친 그림자 중에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 P67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니?" 펄롱이 말했다. "말만 하렴."
아이는 창문을 쳐다보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친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처음으로 혹은 오랜만에 친절을 마주했을 때 그러듯이. - P81

그게 가능할지, 아니면 어떻게 할지, 정말 뭔가를 할 것인지, 진짜로 거기 갈 것인지 생각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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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 우드의 <상실의 기도>를 방금 받았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있지만, 조금만 훑어볼까 싶어서 펼쳐봤다. 계속 읽고 싶게 만드는 느낌이 든다. 속이 시끄러울 때, 방해받고 싶지 않을 때, 소란스러움 없이 차분한 마음으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잔디는 없고 그냥 흙먼지 쌓인 죽은 풀밭이다. (p. 16)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묘비, 기계로 자르고 광택을 낸 그 두 개의 돌덩이 앞에 섰다. 묘비의 색깔과 디자인, 그 위의 글자들은 부모님 누구의 흔적도 간직한 듯 보이지 않지만 분명 내가 결정하고 승인했을 것이다. (p. 16)

나의 외면은 변하지 않았으나 내면의 모든 것이 곤두박질치던 기억. 마치 내 안에서 모래톱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던. (p. 17)

마치 알알이 묵주처럼. 마치 내 몸의 뼈 이름을 하나하나 되새기듯. (p.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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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5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따끈따끈한 신간이네요. 잘 모르는 작가라서 이런 책은 먼저 읽은 분의 리뷰가 항상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부커상 좋아요. 부커상 출신 작품들 왠만하면 괜찮더라구요.

곰돌이 2025-09-15 20:44   좋아요 1 | URL
앞부분만 조금 읽어봤는데 불편한 느낌이 없고 편하더라고요.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고 싶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흠.. 표현력이 부족해서 답답해요!!) 바람돌이님이 아마 잘 알아채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ㅋㅋ

바람돌이 2025-09-15 20:45   좋아요 1 | URL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고싶은게 제일 핵심이죠. 훌륭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밤의 아이들 1> 중에서...

저마다 자기 영역을 가진 신성한 소들이 흙먼지 자욱한 길거리를 어슬렁어슬렁 순찰하면서 배설물을 증거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파리 떼! 즐거운 듯 붕붕거리는 공공의 적 제1호가 마치 꽃가루를 옮기는 꿀벌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이 똥에서 저 똥으로 날아다니며 아낌없이 퍼붓는 이 선물에 내려앉아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 P75

내 말은 다만 내 몸이 낡아빠진 항아리처럼 좍좍 갈라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하나밖에 없는 그러나 별로 사랑스럽지 않은, 역사에 너무 많이 두들겨 맞고 아래위로 배수(水) 작업에 시달리고 문짝에 찍혀 훼손되고 타구(具)에 맞아 머리통이 깨지는 등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이 가엾은 몸뚱이가 마침내 조각조각 쪼개지기 시작한 것이다. - P86

"맙소사, 해가 왜 저쪽에 있지? 해가 엉뚱한 쪽에서 떠올랐네!" - P144

그들은 위로위로위로 기어올라 폐허의 가장 높은곳에서 자기들의 영토를 감시하다가 성 전체를 조각조각 해체하는 일에 몰두한다. 파드마, 이 말은 사실이다: 그대는 그곳에 가본 적도 없고, 해질녘 그곳에서 끙끙거리며 돌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흔들고 당기고 또 흔들고 당기고 하면서 한 번에 하나씩 돌을 뽑아내느라 여념이 없는 그 털북숭이들을 지켜본 적도 없지만......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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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포터> 중에서...

바다, 바다, 너무나 광활한, 너무나 광활하고도 광활한 바다가 그들, 포터 씨와 바이쳉거 박사 앞에 놓여 있었으며, 둘 다에게 바다는 극도의 위험을, 너무도 어두운 기억들을 품고 있었다. - P16

그는 그 전 모습 그대로, 프라하에서 왔고 그에 수반된 모든 일을 겪은, 죽음에서의 탈출과 낙원에서의 추방과 지도로만 알았던 끔찍한 이름들이 붙은 장소들로의 여행을 겪었으며 이제는 포터 씨로의 그리고 포터씨를 이런 모습으로 만들었고 또 앞으로의 모습으로 만들 장소로의 여행을 겪은 사람 그대로였고, 그 모든 것은 참으로 하잘것없어 어떤 지도 제작자도 포터 씨의 존재와 그가 어디서 왔는지와 무엇이 그를 만들었는지 알지 못했고 그리하여 바이쳉거 박사는 그것을 지도에서 본 적이 없었다. - P23

포터 씨는 자신이 속한 모든 포터들을, 그리고 어쩌다 자신이 그 혈통이 되었는지 알고 싶은 열망이 없었고, 과거를 캐물어 현재와 미래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았고, 다만 대지의 모양이나 하늘의 색을 서술하라는 요청을 받은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말했고 모든 진실한것에 선천적으로 깃들어 있는 확신을 실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 P31

누구도 완전히 똑같은 상황에서 세상에 들어오지 않는다. - P46

너무나 많은 고통이 포터 씨에게 따라붙었고, 너무나 많은 고통이 그를 소진했고, 너무나 많은 고통을 그는 남기고 갔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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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잠에서 깰 때마다 시계를 보았다. 그녀는 시간이 흐르는 게 두려웠다. 시곗바늘이 돌면서 시간이 흘러간다는 사실, 시침과 분침이 시시각각 낯선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잠을 자면서, 밥을 물에 말아 먹으면서, 책을 읽으면서, 바흐의 <브란덴부르크협주곡>을 들으면서 흘려보낸 그때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몸이 나아지고 마음이 아물고 시나리오를 다시 쓸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프지 않고 울지도 않고 글을 다시 쓰게 될 그 시간, 그때의 시곗바늘이 어디를 가리키게 될지 알지 못해 그녀는 못 견디게 불안했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거칠고 두터운 시간이 흘러갔다. - P34

단단한 불신과 의혹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채 하염없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유리 밖 어두운 공간을 바라보았던 것일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마치 언젠가 그녀 자신이 자신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던 것만 같은 달콤한 기시감이 강물처럼 그녀를 감쌌다. - P40

현실의 시간은 밤이지만 이곳에서 나는 기억의 한낮을 산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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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5-08-28 1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집, 정말 좋아요!
곰돌이 님의 리뷰 기대해요^^

곰돌이 2025-08-28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맨 처음에 실린 ‘빈 찻잔 놓기’만 읽고 언저리에만 맴돌았을 뿐인데도 좋네요. 이따금 자목련님이 예전에 올려놓으신 글을 읽어보는데, 그것 또한 잘 읽고 있어요. 글이 너무 좋아서 흔적을 남기고 싶었지만 참았고요! (혼자 몰래 야금야금) 앗참!! 저의 리뷰는 절대 절대 기대하지 마시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