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만큼 읽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읽고 쓰기를 꾸준히 이어 나가는 중이다. 예전에는 생각도 못 하던 일이다. 키보드 위로 감정이 실리지 않은 글만 떨어트리던 손가락이었다. 나의 사적인 속내를 담아본다? 그건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졸음 참는 거다) 덜어내고 비워내는 것에 조급해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이라도 일단 담아보자는 마음으로 그렇게 ‘쓰기’를 시작했다. 뚝딱거리던 손가락이 서서히 괜찮아질 때쯤이었을까. 권여선 작가의 책을 읽는데, 머릿속에서 뭔가 불이 번쩍했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각각의 계절>, p. 241)

쏟아내든지, 그것도 아니면 주변을 좀 살펴보든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물어물 말만 흐리다가 곁에 있는 애먼 사람들만 안절부절못하게 만들면, 아니, 그대로 이 순간을 흘려보내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시간에만 맡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건 스스로가 잘 안다. 그렇게 읽고 쓰면서 스스로를 추슬러 보고 난 뒤에서야 “독서는 경이로운 애도” (<작은 파티 드레스>, p. 9)라는 크리스티앙 보뱅의 말을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적다 보니 영 분위기가 우중충해질라 한다. 어쨌든! 역시, 책은 옳다. 쓰는 것도 그만큼. 때론, 그보다 더.

6월에 고른 책 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 내 보석함에 모셔놓은 알라디너 분들의 글을 훔쳐보다가 발견한 책 몇 권, 그리고 최근에 읽은 것 중 더 읽어보고 싶은 작가의 책 몇 권을 책장에 채워봤다. (감사의 마음은 땡투에 담아...) 더운 여름날 시원한 물 한 잔만큼이나 맛있는 찍먹의 순간! 물음표를 달고 짐작과 궁금증이 부풀어 오르는 딱 이 타이밍만의 재미를 즐기며, 이번에도 앞부분 느낌 정도만 남겨본다. 아님, 좀 더 길게.



이반 곤차로프 <오블로모프>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기행 작가인 이반 곤차로프의 작품이다. 이제껏 읽어온 소설 속 인물들과는 사뭇 다른 특질을 지닌 주인공의 모습이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1850년대 러시아를 시대적 배경으로 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삼십 대 초반의 남성, 일리야 일리이치 오블로모프다.

딱 부러진 이념도 없는 것이, 무언가에 몰입할 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자유로운 새처럼 생각이 얼굴에서 산책을 하고, 눈 안을 휘저으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반쯤 벌어진 입술에 내려앉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이마의 주름살 사이로 숨어버렸다가 이번엔 어디론가 아주 자취를 감춰버리곤 한다. (...) 단 한 순간 피곤도, 따분함도 그의 얼굴에서 온화함을 내몰지는 못한다. 그 온화함은 얼굴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p. 11)

저자는 그 온화함이 마음에서 우러나온다며 아름답게 포장해 주지만, 우리는 직감적으로 안다. 그 온화함은 지갑에서 나온다는 만고의 진리를... 돈 많은 백수임이 틀림없다! (아닌가?) 한참 사회활동을 할 법한 나이에 누워있는 게 일상인 데다가 따분함을 느낄 만하다가도 다시 유턴해서 곧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온화함을 내비칠 수 있다? 게다가 “모든 근심은 한숨으로 해결되고 무관심과 졸음 속에서 기력을 잃고 만다 (p. 12)”고 하니 혼자 속 끓여대면서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어 보이고! 좀 낡긴 했지만, 신축성 좋은 잠옷에 부드러운 신발까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흠, 그러면 그렇지.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하인까지 둔 지주였다. 그런데 집 안 꼴이 말이 아니다. 사방에 쌓인 먼지는 기본이고, 거미줄에, 널브러진 접시와 먹다 흘린 빵 부스러기까지. 나름 최소한의 질서는 있는 건지, 오블로모프가 하인 자하르를 부른다. 잠시 후, 오랜 관성과 고집으로 단련된 기존쎄 같은 기운을 풍기며 세상만사가 귀찮다는 얼굴의 자하르가 등장한다.

“집구석 한번 깨끗하다. 먼지 하며, 너절한 게, 맙소사! 저기, 저 구석 좀 보란 말야. 하는 일이 뭐야, 도대체….”
“아니, 하는 일이 뭐냐니유….” 자하르가 억울하다는 투로 툴툴거렸다. “애쓰구 있잖유. 사는 게 뭔지! 먼지두 훔치구, 청소두 거의 매일 하는디….”

“청소해, 구석의 쓰레기도 치우고. 그럼 빈대니 하는 것들도 없어질 거야.”
“치워봐야 또 쌓일 텐디유 뭐.”

160여 년 전의 러시아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뭐, 다 거기서 거기 아닐까? 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이 소설의 저자 이반 곤차로프는 공무원 생활을 오래 했는데 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한 독특한 이력까지 있다. 그 말은 오만가지의 인간을 겪어봤다는 말씀?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느라 다들 기를 쓰고 달리는 격동의 19세기 러시아 한복판에서, 왜 하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을 소설의 전면에 내세웠을까.



아모스 오즈 <유다>

<나의 미카엘>이 워낙에 유명했지만, 딱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를 읽게 됐는데, 아주 좋았다. 강력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감정은 아니지만, 어떤 경계에서 부유하는 인간의 두려움과 머뭇거림의 기억을 공유하는 동안 생각지 못한 동질감이 느껴졌고, 마음이 쓰였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건 여전히 유효하기에. 그리고 이 책을 골랐다.

부친의 사업 실패와 연인과의 결별로 마음이 고달픈 스물다섯 살의 슈무엘. 어딘가 불안정하지만,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그는 원래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라는 제목의 석사 학위 논문을 쓰던 중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한 상태다. 아모스 오즈 문학의 중요한 무대인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둔 점이나, 슈무엘이 드나드는 사회주의 서클의 논쟁과 스탈린에 대한 담론을 담은 장면을 보고 있자면,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에 흐르던 예루살렘 지식인들의 모습과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학업과 사랑이 동시에 흔들리며 삶의 방향을 잃은 슈무엘은 예루살렘을 떠나려고 이사를 준비하던 중, “인문학을 공부하는 미혼 남학생, 역사를 잘 알고 있으며,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리는 세심한 대화가 가능한 분, 저녁마다 다섯 시간 정도 학식이 깊고 지적인 일흔 살 장애인 남성에게 말동무를 해 주시면 무료로 숙소를 제공하고 소액의 월급도 지급함. (p. 26)” 이라는 광고를 읽게 된다. 그리고 어딘가 오래된 상처와 침묵이 배어 있는 고택에서, 까다롭고 논쟁을 즐기는 노인 발트와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발자크는 늘 읽어보고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는 작가였다. <사촌 퐁스>를 읽고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 모른다. 이번에 고른 <고리오 영감>은 ‘인물 재등장 기법’이 최초로 도입된 소설이라고 한다. 안 그래도 <사촌 퐁스>를 읽을 때 재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소개와 함께 줄거리가 펼쳐질 때마다, 나 혼자 초면이라 우두커니 눈만 끔벅거렸는데, 이번에는 재회의 기쁨을 느껴볼 수 있겠구나. 뭐, 딱히 더 만나고 싶은 인물은 없다만... ㅋㅋ

19세기 프랑스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의 앞부분만 슬쩍 들여다보자면, 보케르 부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이 등장한다. 주변 지형을 시작으로 냄새부터 내부 벽지 무늬, 가구와 바닥 상태 하나하나 묘사가 길고 빽빽하다. 하숙집 부동산 매물 실사 보고서를 읽는 기분이다. 나의 인내심이 책 읽을 때만큼은 진득함을 유지하기에 참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뒤이어 이 퀴퀴한 3층짜리 하숙집을 채우고 있는 세입자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고향집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파리에 상경했다는데 어딘지 모르게 눈빛이 번뜩이는 법대생 라스티냐크, 털털하고 유쾌한 척하지만, 언뜻언뜻 구린 구석과 서늘함을 풍기는 근육맨 보트랭, 그리고 이 하숙집의 공식 샌드백이자 조롱거리이면서도 바보처럼 허허거리기만 하는 의문의 노인, 고리오 영감까지. 저마다 사연 있는 얼굴을 한 사람들이 층수별로 방값에 맞춰 다닥다닥 모여 살고 있는 이곳은 돈이 전부인 파리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다.

말라붙은 심장과 텅 빈 두개골 가운데서 어느 것이 보기에 더 끔찍스러운지 누가 결정할 수 있을 것인가? (p. 12)

그리고 똑같이 19세기 프랑스를 다룬 <골짜기의 백합>을 골라봤다. 우선 펼쳐 든 앞부분의 공기는 <고리오 영감>의 음울하면서도 퀴퀴한 파리 골목과는 전혀 딴판이다. 펠릭스라는 남성이 자신의 연인 나탈리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함께 있어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자주 상념과 침묵에 잠기던 펠릭스의 모습에, 나탈리는 그의 과거가 궁금해진 모양이다. 과연 그녀에게 지난날을 고백하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탈리가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오래 묻어둔 자신의 이야기를 기꺼이 꺼내 들기로 한다.

그렇게 펠릭스는 자신의 과거를 적어 내려간다. 갓난아기 시절 시골 보모 손에 맡겨진 일부터, 좀 자라서는 형과 누이들의 지독한 괴롭힘, 부모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채 온 집안의 애정을 철저히 박탈당했던 유년기의 외로움과 불행까지. 더욱 착잡해지는 것은, 펠릭스가 악바리 같은 정신적 저항력을 키워내며 버텨 왔다는 점이다. 부모의 방임 속에서 혼자 차별받는 펠릭스의 모습 위로, 실제 발자크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사촌 퐁스> 속 퐁스의 지독한 결핍이 겹쳐 보여, 이게 또 하나의 맴찢 포인트! ㅠㅠ 편지에 담긴 뒷이야기들이 어떤 내용일지 아직은 모르지만, 당장은 내가 나탈리라면 펠릭스의 편지를 읽자마자 안쓰러운 마음에 일단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을 것 같다.

내 안에서만 갇혀 살아야 하는 가혹한 운명을 바꾸려 얼마나 노력했던가! 열정적인 마음이 오랫동안 품은 희망들이 하루 만에 무너진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p. 17)

이런 가시 박힌 장벽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인 감정의 뿌리가 너무도 깊어서, 또 어머니의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그녀에 대한 거룩한 외경심은 버릴 수가 없어서, 우리가 더 나이 들어서 그녀를 정당하게 심판하게 된 그날까지 너무나 어리석게도 그녀를 계속 사랑했다. (p. 26)



자우메 카브레, <나는 고백한다>

“행복과 불행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 그저 나에게 달려 있었다. 이를 깨닫는 데 무려 육십 년이나 걸리다니. 나는 버림 받았고, 고독하고, 당신을 너무나도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당신은 나의 정신적인 지주다. 공포스럽기는 하지만 표류하지 않기 위해 떠내려가는 뗏목을 억지로 붙잡는 일은 하지 않겠다. (...) 내 마지막 기회라고 할 이 원고 앞에 나는 홀로 섰다”

이 차갑고도 고독한 고백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바르셀로나(발카르카)라는 현재와 500년 전 중세 수도원, 그리고 1690년 대재앙의 과거가 경계를 허물듯 뒤섞이며 시점이 바뀌고 교차한다. 온통 까맣게 타버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한 숲, 그 황량한 잿더미 속에서 돈이 될 만한 나무 밑동을 기를 쓰고 찾아내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그중에서도 악기용 목재를 찾아내는 데 뛰어난 눈을 가진 자키암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단순한 배경이 아닐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자키암과 그의 아버지의 대화가 이어진다.

“아무리 네가 악기용 목재를 찾아내는 데 최고의 실력을 갖추었다지만, 아들아, 이 저주받은 집안의 넷째 아들아, 우리가 절대 팔지 않을 가장 훌륭한 재질의 단풍나무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너의 목숨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앞에 닥쳐올 고난으로부터 너를 지킬 수 있는 길이야.” (p. 19)

결국 숲을 떠나야만 하는 자키암의 가혹한 운명. 그리고 소설의 서두를 연, 죄의식에 짓눌린 한 노인의 서글픈 참회. 이 두 줄기의 서사가 내 머릿속에 맞물리면서 묘한 불길함과 먹먹함을 풍기더니, 어느새 시선은 잿더미가 된 숲을 빠져나와, 골동품 수집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아버지 ‘펠릭스 아르데볼’이 지배하는 바르셀로나의 무거운 저택으로 넘어온다. 그리고 이 숨 막히는 그늘 밑에서, 앞서 등장한 노인의 유년 시절이었을 소년 ‘아드리아’가 모습을 드러낸다. 위안이 필요한, 펠릭스의 고독한 아들의 모습으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인간으로 키워내기 위해 분주한 사람처럼 보이고, 어머니는 그 곁에서 묘하게 차갑다.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어린 아드리아가 아버지의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게 너무나 익숙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첫머리에서 만난 그 고백이 괜히 더 아프게 읽힌다. 아직 어설픈 짐작으로 베일을 걷어내듯 읽고 있지만, 소설 속 역사적 사건, 인물들의 대화, 그리고 그 안에 감도는 공기들이 뭔가 거대한 한 지점을 향해 차곡차곡 쌓여 가는 듯한 느낌에 기대감이 끌어올려지면서 묘하게 흥분되고, 얼른 다음 장을 넘기고 싶게 만드는 맛이 있다. 다만, 오는 길이 잘 닦인 아스팔트 길 같지만은 않았다는 것.



저번 5월에 구매한 책 리스트(사촌퐁스, 마왕, 딩씨 마을의 꿈, 아메리카의 비극 등)가 ‘인간 욕망 파멸 세트’였다면, 6월은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같다. 이미 상처를 안고 있거나, 후회하고 있거나, 멈춰 서 있거나, 과거에 붙들려 있는 모습으로. 하긴, 맨날 도파민이나 터지는 탄탄대로 같은 인생사가 세상에 어딨나 싶다. 결국은 덜컹거리는 이야기들 속에서 내 삶의 어느 한 조각을 발견하게 되니, 또 읽고 또 끄덕이고 또 어딘가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 아닐지.

인간이 지상에서 거주하는 것은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단순하고 일상적이며 진부한 삶일 뿐이다.(...) 우리에게 부여된 운명은 실패하는 것이며, 모든 예술과 학문에서, 그리고 가장 본질적으로는 삶이라는 순수한 예술 안에서 실패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실패야말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취다. (<횔덜린의 광기>, p.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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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ass 2026-06-28 0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을유출판사 책이군요. 을유 표지는 언제봐도 고급지다는.

곰돌이 2026-06-28 05:40   좋아요 1 | URL
그쵸! 을유는 색감도 고급스럽고 디자인도 깔끔해서 저도 좋아요. 종합적으로 만족도가 높음.
 

5월, 책 읽기 딱 좋은 계절이다.

앞에 어느 달을 갖다 붙여도 어울릴 문장이겠지만, 5월이니까 한번 적어봤다.

작년 5월 내 생일날 나에게 주는 선물로 파스칼 메르시어의 《언어의 무게》를 샀었는데, 이번에는 식구가 조금 더 늘었다. 새 책을 들이는 일은 언제나 설레는 법. 아직 첫 페이지도 열어보지 못한 책들이 태반인 마당에, 내가 덥석 도전해도 될까 싶은 책들이 줄줄이 이어져 위압감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뭐, 글자가 나를 잡아먹는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축하의 명분’으로 모인 책들이다.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금, 그리고 그때》

나는 남의 감정에 꽤 영향받는 인간이라, 일상에서든 책에서든 같은 말도 꼭 상처처럼 던지는 사람을 마주하면 금세 피로해진다. 이런 감정은 꼭 젖은 솜처럼 달라붙는다. 달라져야지, 몇 번이고 되뇌어봐도 별도리가 없다. 그래서일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는 무심한 문장들이, 나를 붙잡곤 한다. 그래서 킨케이드의 신간 소식이 반가웠고, 다시 또 만났다.

제목에 미래를 뜻하는 단어는 빠져있다. 내가 느낀 킨케이드라면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믿을 수 없는 시간이라 여기는 사람에 가까워서, 미래 대신 ‘지금’과 ‘그때’에 더 의미를 둔 걸까, 하는 별 중요하지 않은 혼자만의 넋두리를 덧붙여본다. 킨케이드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자전적 성격이 짙고 카리브해 앤티가섬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한 중년 여성의 삶을 전지적 시점으로 쓴 소설이다. 작곡가인 남편 미스터 스위트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내 미시즈 스위트. 행복한 결혼생활?

지금 내 아내인 저 여자, 하지만 처음 만났던 그때는 그저 빼빼 마른 소녀였지. 전지가위를 기다리는 삐져나온 나무의 삐져나온 나뭇가지 혹은 잡초처럼, 진정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치워버려도 되는 존재. 아, 그래, 저 여자에게서 벗어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p. 34)

남편이 아내를 바라보며 속으로 삼키는 이 잔인한 생각만 들여다봐도 이들의 관계가 전혀 달콤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 수 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녹턴뿐이었다. 이 곡에 〈이 결혼은 끝장이야〉라는 제목을 붙이며 온갖 방식의 분노를 집어넣고,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 시한폭탄처럼 자신들의 관계가 파국에 이를 것임을 알려준다. 안 그래도 책 소개 글을 읽어보니 미시즈 스위트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이후로, 어머니를 떠올리며 글을 써 내려간다는데? 여기서 어머니란,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다. 나를 버리고 간 망할 엄마다.



하인리히 뵐 《여인과 군상》

최근 《천사는 침묵했다》를 읽었는데, 어쩐지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나라도 제대로 읽어보고 난 뒤 천천히 읽어봐야지 했는데 어디 그게 맘처럼 쉽나. 고민이야 평상시에도 숱하게 하는 게 고민이니, 책 사는 데서라도 덜 하자 싶어, 그냥 샀다.

소설은 화자가 ‘레니 파이퍼’라는 48세 독일 여성의 삶을 추적하는 보고서 형식으로 시작된다. 1941년, 하사관과 단 사흘간의 결혼생활 끝에 전쟁 미망인이 된 레니는 연금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완전히 무너져 있다. 하나뿐인 아들마저 감옥에 갇혀 있으니 말이다. 화자는 레니를 아는 주변 인물을 인터뷰하고 서류를 뒤져가며 그녀의 삶을 복원해 나간다.

소설의 시작점은 1970년대 초반이지만, 이야기는 곧 레니의 어린 시절과 제2차 세계대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화자는 왜 하필, 이토록 무너져 버린 레니의 삶을 그토록 집요하게 좇는 걸까? 다른 건 몰라도 세상이 보는 레니와 실제의 레니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막스 프리슈 《슈틸러》

또! 또! 또! 하나라도 진득하게 읽어보고 나서 사도 될 것을, 책이 어디 도망이라도 가는 것도 아니고, 선착순으로 손들고 사야 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이렇게 성급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호모 파버》를 인연으로 이 책까지 책장에 날름 채워 넣었다.

방금 집어 든 《여인과 군상》이 주변 사람들의 기억 조각들을 모아 ‘레니’라는 한 여자의 삶을 외부에서부터 짚어 들어간다면, 이 책 《슈틸러》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시작된다. 감옥에 갇힌 한 남자가 “나는 슈틸러가 아니다!”라고 처절하게 외치며, 세상이 강요하는 ‘슈틸러’라는 이름과 정체성을 온몸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꾸만 그를 6년 전 행방불명된 스위스인 조각가 ‘아나톨 슈틸러’라고 부르고, 자신을 미국인 ‘화이트’라고 주장하는 이 남자는, 자신의 정체를 증명하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아니, 그런데, 그 와중에 30센티미터가 조금 못 되는 자기 구두로 감방 크기를 재보는 게 아닌가?

길이 3.10미터, 폭 2.40미터, 높이 2.50미터...

이 대목에서 앞서 펼쳐봤던 《호모 파버》가 머릿속을 스친다. 비행기가 사막에 비상 착륙하는 난리통 속에서도 엔진 결함을 숫자로 계산하고 있던 그 남자! 막스 프리슈의 주인공들은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상황에 안 맞게 이성적이고 치밀한 건지 모르겠다.



미셸 투르니에 《마왕》

제목을 보는 순간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괴테의 시에 영감을 준 게르만 신화와 유럽의 식인귀 전설, 그리고 소년 예수를 어깨에 태워 강을 건넌 성 크리스토프의 생애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덕분에 책장을 넘기기 전부터 슈베르트의 긴박한 반주 소리와 함께 아이를 유혹해 데려가는 존재라는 이미지가 겹치면서, 소설이 어떤 분위기로 흘러갈지 어렴풋이 느껴볼 수 있었다.

이야기는 ‘아벨 티포주’라는 기이한 남자의 일기로 시작된다. 말 못 해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말이 엄청 많다. 물론 초반이 일기 형식이라 더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말이 너~무 많다. 더욱이 자신을 세상의 징후를 읽어내는 특별한 존재라 믿으며 지극히 사소한 것들까지 장엄한 서사처럼 떠들어댄다. 망상증인가? ㅋㅋㅋ

사실 이 지독한 집착의 뿌리에는 어린 시절 기숙학교에서 만난 절대적 권력자, ‘네스토르’가 있다. 같은 학생이었지만 티포주에게는 신이나 다름없던 존재. 세상의 모든 우연을 자신들만의 특별한 운명으로 해석하는 법을 가르쳐준 그는, 티포주의 자아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인 것 같다.

초반에는 약간 “뭔 소리지?”라며 미간에 살짝 힘을 주고 읽게 할 만큼 몰입력을 요하는데, 이게 단순히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는 소설들과는 결이 좀 다르다. 오히려 한 남자의 내면을 아주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기분이라 전개가 묘하게 흥미롭다.
나중에는 전쟁의 발발과 함께 징집되고, 나치의 엘리트 교육 기관인 ‘나폴라’에서 소년들을 선발하는 역할까지 맡게 된다는데, 슈베르트의 마왕과 성 크리스토프의 생애 그리고 티포주의 기괴함까지 이 삼박자가 본격적으로 읽기 전 약간의 흥분을 주는 데는 틀림없다.



시어도어 드라이저 《아메리카의 비극》

대공황이 터지기 전, 성공과 돈에 눈먼 인간들의 탐욕이 절정에 달해 있던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어릴 때부터 초라한 현실과 번쩍이는 상류층 세계 사이의 간극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란 ‘클라이드 그리피스’는 거리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전도하던 부모 밑에서 자랐다. 가난과 궁핍을 견디기보다 어떻게든 다른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청년이다. 호텔 벨보이 일을 하며 번쩍이는 옷차림과 돈 냄새, 부유한 젊은이들의 삶을 가까이서 본 뒤부터는 더더욱 그렇다.

‘저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라는 감각만을 따져본다면, 슈테판 츠바이크의 《우체국 아가씨》 속 크리스티네가 떠올랐다. 단 한 번 맛본 화려한 세계 때문에 평범한 일상이 더없이 초라하고 견디기 힘들어져 버린 크리스티네처럼, 클라이드 역시 호텔의 돈 냄새를 맡은 순간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게 아닐까.

이 얼마나 화려한가! 정말로 부자라는 것이, 또 이 세상에서 출세한다는 것이, 한마디로 돈이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곧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자기와 같은 다른 사람들의 시중을 받는 것을 뜻했다. 이런 모든 사치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것은 가고 싶을 때 가고, 가고 싶은 곳에 가며, 가고 싶은 방식대로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p. 91)



오노레 드 발자크 《사촌 퐁스》

슈테판 츠바이크가 이 작품을 발자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했다고 하니 요거 은근히 기대를 안 할 수가 없군! 책 소개 글에 “유행에서 뒤처진 노총각이자 식충 취급을 받는 퐁스의 비극적 일대기”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시작부터 인간 취급이 영 박하다. 뭘 얼마나 잡수시길래 식충소리까지...

부르주아적 물질주의가 사회를 지배하던 1840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젊은 시절 예술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로마 유학까지 다녀온 작곡가이자 지금은 대중극장의 지휘자로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주인공 실뱅 퐁스는,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옷을 입고 다니는 노총각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먼 친척 집들을 전전하며 ‘식충’ 소리까지 듣는 궁색한 처지의 인물이다.

상상해보라, 1844년에 스펜서를 입은 사람의 출현은, 마치 두어 시간 동안 나폴레옹이 부활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p. 8)

겉보기엔 그저 친척 집 식탁을 전전하는 ‘프로 수저러’ 같지만, 퐁스 선생에겐 다 계획이 있다. 한 끼 식사값, 낡은 외투를 새로 맞출 돈까지도 아껴 예술품을 사들이는 것이다. 남들은 근사한 저녁 식사에 쓸 돈으로, 퐁스는 예술품 한 점을 꿈꾸는 인간이랄까.

보물이 대놓고 “나 보물이다~” 하고 굴러다닐 리 없으니, 퐁스 선생은 극장 업무 외의 시간을 죄다 작품을 찾아다니는 데 바친다. 일찍이 유학 시절부터 다져온 안목 덕분에 그의 집은 어느새 온갖 걸작들로 빼곡해진다. 정작 본인은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스펜서를 입고 친척들의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말이다. 게다가 웃을 때 드러나는, 희고 튼튼한 치아는 상어도 부러워할 만했다고 하니, 저작기능도 타고 나셨군! 식도락가에게 이보다 더한 축복이 또 있을까 싶다.

보통 전지적 시점이라고 하면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느낌인데, 이 소설은 화자가 내 옆에 딱 붙어서 팔짱을 끼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느낌이라 파리 한복판에서 퐁스의 뒤를 몰래 밟고 있는 스토커가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소설의 앞부분은 순수한 영혼인 퐁스 선생을 알아가는 재미로 평화롭게(?) 즐기기만 하면 되는데, 책 소개 글을 참고하니 퐁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충격을 받고 몸져눕는가 보다. 흑흑.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평생에 걸쳐 수집해 온 예술품들이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라는 것! 이 사실이 드러나자, 사람들이 하이에나처럼 모여든다는데 아휴, 징글징글하다 정말. 발자크는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건 애정보다 돈이라는 사실을 들춰내려는 걸까.



옌롄커 《딩씨 마을의 꿈》

결국 여기에서도 사람을 움직이는 건 돈이었다. 피와 맞바꾼 돈 때문에 죽음이 코앞에 닥쳐와도 멈추지 못하는 욕망이라니.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소박한 꿈은 결국 마을 전체를 재앙으로 몰아넣는다.

갑자기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에서 근룡이와 방씨를 따라 얼떨결에 매혈하러 가던 허삼관도 떠오른다. 하지만 그 인간적인 온기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최근에 읽은 옌롄커의 《물처럼 단단하게》에서는 인물들이 풍기는 강렬함을 통해, 후끈, 아니 거의 화끈거리는 감정들을 느꼈었는데, 이번에도 꽤 지독한 인간 군상을 보여줄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이번 책장엔 인간 욕망 파멸 세트가 잔뜩 모였다.



마지막으로, 《사촌 퐁스》에서 발견한 몹시 위험한 문장을 공유하며 글을 마친다.

“실제로 어떤 고민도, 어떤 우울도 마음에 뜨는 뜸과 같은 기벽 앞에선 저항하지 못한다. 어느 시대에서나 ‘쾌락의 술잔’을 들이켜지 못하는 이들이여, 무엇이든(벽보를 수집하기도 한다!) 수집하라. 그러면 행복이라는 금괴를 잔돈으로 얻을 것이다” (p. 19)

아니, 행복이라는 금괴를 잔돈으로 얻을 수 있다니. 이보다 실속 있는 기쁨이 또 있을까. 비워도 자꾸만 채워지는 장바구니 아닌가... 흠, 그래 좋다. 안 그래도 읽고 싶은 책만 잔뜩 쌓였는데, 앞으로도 ‘마음의 뜸’이라 생각하며 책을 사겠다. 끄떡끄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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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5-25 2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옌렌커의 소설 중 <딩씨 마을의 꿈>이 가장 좋았어요. 다른 소설처럼 너무 판타지스럽지도 않고요.
그나저나 책들이 다 한 두께 합니다.

곰돌이 2026-05-25 21:36   좋아요 1 | URL
딱 뭘 읽을까 헤매던 참에 잉크냄새님이 추천해주셔서 덕분에 옌롄커와의 두 번째 만남은 큰 고민이 없었네요. 상봉이 빨랐어요. ㅎㅎ 직업 특성상 평소에 두꺼운 책이나 서류들을 워낙 끼고 살다 보니, 두께에 대한 거부감은 없어서 겁 없이 잘 사기만 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추천해주시면 덥썩 물어가겠습니다!!

yamoo 2026-05-26 0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갑게도 4권이 겹치네요..ㅎㅎ
그리고 작품은 다르지만 저자들의 다른 책도 한 권씩 소장하고 있네요..^^

곰돌이 2026-05-26 08:01   좋아요 0 | URL
일단 사촌 퐁스는 무조건 들어가 있을 것 같아요. 퐁스 선생처럼 예술을 곁에 두고 계시는 yamoo님이라면 말이죠! 그 외 마왕, 슈틸러도 들어가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같은 책들을 공유하고 있다니 전우애가 생깁니다 ㅋㅋㅋ 나중에 완독의 길에서 만나뵐 날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문득, 작년의 오늘이 궁금해졌다.
그날의 나는 어떤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었을까, 나조차 잊고 있던 1년 전의 나는 어떤 마음의 밑줄을 긋고 있었을까.

북플에 남아 있던 1년 전 기록을 슬쩍 들여다봤다. 그때의 나는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고 있었고, 스스로는 제자리에서 반 발자국쯤 나아갔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몰랐으면 하는 마음, 지나쳐주길 바라는 마음. 이 모든 감정이 뒤섞여 복잡한 심경으로 지냈던 그때의 나날들이 머릿속에서 휘리릭 지나간다. 사실은 거의 멈춰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 혼자만이 알아챌 수 있는 아주 미세한 움직임, 그 정도만으로도 그때의 나에게는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지금의 나는 또 어떤가 싶어진다.

사소한 엉망 속에서도 나는 웃고, 잠깐 화를 내고, 또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걷는다. 여전히 미루고 또 미루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 얼른 자동차 엔진오일도 갈아야 하는데, 이런 건 왜 이렇게 미루게 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사는 일은 전혀 귀찮지 않다. 고르고, 주문하고, 박스를 뜯는 순간만큼은 이상하게 부지런해진다. 며칠 전엔 언니가 내 방에 들어와 한쪽 입꼬리를 예리하게 씨익 올리더니, 책장을 훑다가 한마디 던지고 나갔다.

“관상용.”

읽은 책보다 ‘읽으려고 했던 책’이 훨씬 많은 게 사실이기에 할 말이 없다. 어떤 책은 아직 읽지도 않았는데 괜히 아껴두고 싶어진다. 지금 읽기엔 아깝고, 나중의 내가 더 잘 읽어줄 것 같은 느낌. 그 ‘나중의 나’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쩔 땐 책을 펼치는 시간보다 책을 고르는 시간이 더 길어질 때가 있다. 이럴 때 나는 이야기를 읽고 싶은 게 아니라, 이야기를 고르는 기분이 좋은 건가 싶다. 근데 이렇게 주절주절 쓰고 있는 걸 보니, 확실히 ‘관상용’에 긁히긴 했나 보다.

그럼에도 책을 샀다.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책은 뻔히 한정되어 있는데, 기어코 또 사버렸다. 오르한 파묵을 제외하면 전부 처음 읽는 작가들이다. 먼저 읽고 리뷰를 남겨주신 분들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소박하게나마 ‘땡투’를 보내드렸다. 그렇게 또 아홉 권을 만나게 됐다. 읽을 예정인 책만 또 늘어난 셈이다. 궁금한 마음에 여기저기 앞부분만 조금씩 읽어보는 중이다. 나중에 다 읽어봐야 알겠지만, 일단 지금 막 나를 스친 이 책들의 첫인상은 이렇다.



아시아 제바르 《프랑스어의 실종》

최근에 읽은 《후리》를 쓴 카멜 다우드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알제리 작가다. 소개를 읽다 보니 알제리 여성 최초의 고등사범학교 입학 같은 타이틀보다, 알제리 이슬람 학생 총연합 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당했다는 이력이 더 눈에 띈다. 그때부터 본명 대신 ‘아시아 제바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데, 자기 이름까지 지워가며 지키고 싶었던 세계는 대체 뭐였을까 궁금해졌다.

그런 작가의 이력을 알고 나서인지 “그러니까 바로 오늘,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라는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저자의 실제 삶이 문장 뒤로 어렴풋이 겹쳐 보였다. 다른 아랍 여성들과 달리 프랑스에서 교육받았던 그의 이력이 이 소설 속에 어떤 그림자로 스며 있을지 상상해 보면서.

어느 바다든, 어느 바다의 파도든 자신에게 매혹적인 행복의 시간을 되돌려 주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주 가까이에서 찰싹거리는 그 물결 소리가 더 멀리서, 깊이 파묻혀 있던 과거에서 되살아나 들려오는 듯했다. (p. 20)

파리에서 20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고향 알제리로 돌아온 화자 베르칸. 그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훨씬 담담해서 오히려 더 마음이 쓰리다. 분명 고향 땅을 밟았는데 어딘지 모르게 서먹해 보이는 공기. 오랫동안 써온 프랑스어라는 언어가 마치 남의 옷처럼 느껴지는 그 이물감이 문장 사이사이에서 툭툭 걸린다. 고향에 왔지만 정작 내 언어는 어디에 있는지 되묻는 것 같은 그 막막함. 그러나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조차 스스로 결정하려는 그의 모습에서, 프랑스어와 고향의 언어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단호한 기색이 느껴진다.

가장 흥미로운 건 시점의 변화다. 베르칸의 직접적인 목소리와 그의 삶을 읊어주는 제3자의 시선이 묘하게 교차된다. 처음엔 살짝 당혹스러웠지만, 이내 이 불친절한 전환이 내게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어색함보다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뒤에 숨어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긴장감처럼. 이 묘한 시점의 차이가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갈지, 그리고 낯선 틈새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 덕분에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무겁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왜, 퇴직까지 앞당겨가며 이 낯선 고향으로 기어이 돌아와야만 했을까.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할 겁니다! 그러자면 온전히 제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p. 22)



하인리히 뵐 《천사는 침묵했다》

도입부의 몇 줄만으로도 전쟁이 훑고 지나간 폐허의 냄새와 지독한 허기, 그리고 적막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주인공 한스 슈니츨러는 전쟁 끝에 탈영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그가 마주한 세상은 뼈대만 남은 건물들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잿빛 도시다.

그는 이제 오로지 생존과 허기로 세상을 본다. 당장 배를 채울 빵 한 조각과 몸을 뉠 안전한 장소가 그에겐 그 어떤 이념보다 절실하다. 버려진 옷 주머니에서 우연히 발견한 담배를 입에 물고서 성냥불을 가진 누군가가 지나가길 기다린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그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시절의 집을 멍하니 떠올려본다.

돌로 만든 천사의 얼굴은 부드럽고도 고통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p. 8)

손에 백합 한 송이를 든 채 침묵하는 천사상. 한스는 그 천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묘한 희열에 잠긴다. 전쟁이 삼켜버린 도시에서 그가 처음으로 마주한 ‘얼굴’다운 얼굴이기 때문이었을까?



안톤 체호프 《상자 속의 사나이》

단편의 매력을 처음 알게 해준 건 권여선 작가의 작품들이었다. 서서히 단편 쪽으로 관심이 옮겨가면서 세계문학 단편선을 한 권씩 모으다 보니 결국 안톤 체호프까지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여러 편의 단편이 모여 있는 구성이다. 이제 막 앞부분에 실린 <굴>과 <아뉴타>그리고 <반카> 까지만 읽어봤는데, 누구는 죽을 것 같은데 누구는 웃고 있고, 누구는 진심인데 누구는 이용만 한다. 인간이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는 이유로 발생하는 그 지독한 온도 차. 체호프는 그걸 요란하게 꾸미지 않고 그냥 툭 내놓는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아프게 찌른다.

굳이 비교하자면, 권여선이 뜨겁게 도려낸 자리를 체호프가 그 뜨거운 순간을 식지 않은 채로 냉정하게 응시하는 기분이다. 한낱 먼지인 나의 감상일 뿐이다.

체호프의 글에 담긴 ‘삶의 민낯’에서 내가 느낀 냉기 외에 남은 이야기들이 또 어떤 다양한 감정을 얻게 해줄지 궁금해진다. 아직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각기 다른 온도로 놓인 이야기들이 담겨있을까? 읽어봐야 알겠지. 왜인지 서늘한 가을 끝자락에 읽어 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그래야겠다.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내 기억이 맞다면 희곡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하니 희곡을 좀 읽어본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유일한 한 권이다. ㅋㅋ

여기에 한 권을 더 얹어보려 한다. 일단 제목부터가 좀 압도적인 느낌인데 책장을 펼치자, 아침 햇살이 거실을 꽉 채우고 있다. 모여 있는 네 가족의 대화가 참 묘하다. 분명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는데, 그 말들 속에 가시가 돋쳐 있다.

가장 가까운 이의 살결을 가장 아프게 할퀴는 그들의 대화 과정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눈치가 보일 정도다. 불씨를 덮듯이 아슬아슬하게 애써보지만 이미 뒤편엔 짙은 그림자가 깔린 기분. 닥쳐올 불행이 두려워 날을 세우는 사람들처럼 보여서 어딘가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 이들이 통과해야 할 길고 긴 밤을 채우게 되는 것은 무엇일지. 4막 중 1막을 읽었을 뿐인데, 가슴팍이 이렇게도 갑갑할 수가 없다.



막스 프리슈 《호모 파버》

유네스코 소속으로 저개발 지역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주인공 발터 파버는 모든 걸 확률과 통계로만 따지는 뼛속까지 엔지니어다. 소설 시작부터 비행기가 사막에 비상착륙을 하게 되는 난리가 나는데, 이 와중에도 엔진 결함을 숫자로 계산하고 있는 이 남자를 보고 있자니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온다. 세상 모든 일을 계산기로 두드려보고 나서야 안심하는 그는 엄숙한 분위기도 싫고, 괜히 질척거리며 대화를 이어 나가는 스타일도 아닌 듯싶다.

보이는 것만 보는 인간미가 영 부족한 남자다. 그런데 읽을수록, 난 이 사람이 은근히 맘에 든다! 실생활에서 때론 이런 지독한 투명함이 더 낫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일지언정, 적어도 계산기 밖의 딴마음은 품지 않을 것 같다. 사실은 우리가 모두 가끔 속에서 끓어대는 ‘단절의 욕구’를 대변해 주는 것 같아 묘하게 정이 간다. 나만 그런가? (또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군.)

난 내가 지구상 최초의 인간도, 최후의 인간도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게다가 내가 최후의 인간이라고 단순하게 상상해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 히스테리를 부릴 이유가 뭐란 말인가? (p. 33)

하지만 인생은 늘 계산기 밖에서 터지는 법. 그의 견고한 논리를 비웃으며 자꾸만 끼어드는 ‘우연’들이 이 소설에 기묘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감정 따위는 하나도 안 섞인 차가운 기계 부속품 같은 문장들 끝에 어떤 비극이 그려질 것 같아 자꾸만 어디 한번 보자? 싶은 심보를 자극한다. ㅋㅋ 읽다보니 《슈틸러》도 급 관심이 간다.



로베르토 볼라뇨 《야만스러운 탐정들 1·2》

최근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를 찍먹했다가,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을 좀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샀고, 그 흐름이 자연스럽게 로베르토 볼라뇨에게까지 이어졌다. 원래는 《2666》이 궁금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내가 쉽게 덤빌 두께가 아니라서 《야만스러운 탐정들》로 방향을 틀었다.

대학교 안 시 창작 교실을 중심으로 시인이 되려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 떠들고, 시를 쓰고, 문학을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먼저 펼쳐진다. 이곳은 시에 대한 평가와 각자의 작품 이야기가 오가고, 때로는 서로의 문장을 두고 농담처럼 가볍게 날을 세우기도 하는 공간이다.

이 소설은 처음 문을 열어주는 화자가 있는데, 어딘가 너무 진지해서 좀 웃기다. 건조한 웃음이랄까? 본인은 꽤 심각하게 시와 문학을 바라보는 것 같은데, 옆에서 보면 살짝 과몰입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그 와중에 폼은 또 꽤 잡는다. 누구나 ‘어린 패기’가 대기권을 뚫고 올라가는 시절이 있으니까.

딱히 누가 주인공이라는 느낌보다는 몇몇 핵심 인물들 사이로 시선이 계속 이동하는 구조처럼 느껴진다. 초반만 읽어서는 아직 무슨 이야기라고 말하기 어렵다. 여러 인물의 목소리가 번갈아 등장하기 때문에 하나의 이야기로 딱 떨어지기보다는 계속 겹치는 말들의 흐름처럼 흘러간다. 그래서 이야기를 정리해서 이해하기보다는, 그 안의 분위기를 따라가게 된다.

초면인지라 처음엔 쭈뼛거리며 접근했건만, 읽다 보니 요거 은근히 빠져든다. 막 써 내려간 듯한 생생함 때문인지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지다 말고 애매한 지점에서 재미가 터지기도 한다. 앉은자리에서 백 쪽 정도를 쭉 읽었다. 실제로 1973년 칠레에서 발생한 ‘피노체트 쿠데타’가 이들의 대화 속에서 스치듯 지나가는데, 단순한 배경이라기보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결도 어딘가 이 사건 이후의 공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는 혼자만의 추측을 해 본다.

화자가 고백하길, 자신은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나는 ‘충분히’ 자세한 이야기 한가운데에 있다. ㅋㅋㅋ



오르한 파묵 《하얀 성》, 《새로운 인생》

이제 앞으로 겨울이면 더 생각날 오르한 파묵. 작년에 《눈》을 읽고 홀딱 빠졌다는 재탕 삼탕의 말을 또 해야겠다. 너무나 좋았던 첫 만남 덕분에 최근 《내 이름은 빨강》까지 만날 수 있었고, 몇 권 더 품에 들였다.

한동안 나는, 명확하게 들려주는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였다. 분명 듣고 싶은 목소리가 있었을 테지.

내게도 차츰차츰 조금씩 변화는 찾아오더라. 지금의 나는 이전처럼 또렷한 문장을 찾기보다, 오래 머무는 문장을 더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의미를 단번에 건네받기보다는, 그 의미 주변을 맴도는 시간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면 너무 뜬구름 잡는 사람처럼 보이려나? 후훗. 어쨌든 요즘은 선명한 목소리보다, 눈 내리는 날 창밖처럼 흐릿한 이야기들에 더 오래 시선을 두게 된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속 인물들은 어딘가에 완전히 발붙이지 못한 채 떠다니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게 그렇게 내 마음을 붙든다. 이유를 다 말하지 못한 채로, 그저 오래 남는 것들처럼.



작년 오늘, 김연수의 문장을 따라 ‘반 발짝’ 나아갔다고 믿었던 내가 그랬듯, 지금의 나도 이 아홉 권의 책들 사이를 헤매며 나만의 보폭으로 기분 좋게 걷는 중이다. 새 책을 만지작거리며 아직은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 채 조금씩 다가가는 기분, 난 이 기분이 참 좋다. 날 선 시선, 서정적인 여운, 예리한 통찰... 이토록 다양한 감정들을 조금씩 느껴볼 수 있었던 기분 좋은 시간 역시 참 좋다.

앗! 글을 닫기 전 작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내온 메시지 같은 밑줄을 다시 한번 꺼내 본다. 이 문장 하나 슬쩍 남겨두고 이제 정말 마무리 지어야겠다.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나온 한 구절이다.

“시간의 끝에,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르렀을 때 이번에는 가장 좋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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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4-15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상용이든 뭐든 저렇게 아름답게 꽂혀 있는 것만으로 행복해지잖아요. 사진 속 책들이 곰돌이님의 글과 함께 특별한 풍경이 되는 시간입니다. 곰돌이님의 글을 읽은 것만으로도 저 책들을 살 이유는 충분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산 책은 언젠가는 읽는다라고 저는 오늘도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올거기 때문에 언젠가라고 말이죠. ㅎㅎ

곰돌이 2026-04-15 12:53   좋아요 1 | URL
저한테는 마음이 텅 빈 날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는 든든한 비상약 같은 존재들인데, 독서 하수의 마음에 아주 재를 한웅큼 뿌리고 가더라고요. ㅋㅋ 가지런히 있는 모습만 봐도 그저 좋은데 말이죠! 그래도 바람돌이님이 이렇게 제 소박한 탐닉을 근사하게 긍정해 주시니 금세 마음의 평화가 옵니다. 😊

페넬로페 2026-04-15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년에 김연수 작가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읽었던 것 같아요.
곰돌이님과 읽은 책을 공유할 수 있어 좋고
이렇게 올려주신 새로운 책이 읽고 싶어지는 설레는 맘도 좋네요.
저도 관상용 책을 저렇게 분위기 있게 만들어 놓으면 잘 읽을 수 있을까요!

곰돌이 2026-04-15 13:26   좋아요 1 | URL
작년에 저는 북플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어버버‘ 시절이라, 페넬로페님과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반갑게 흔적 하나 남길 용기가 없었나 봐요. 지금은 용기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곰이 되어서, 이렇게 책을 사이에 두고 설레는 마음을 주고받을 만큼 자랐네요. ㅎㅎ
아, 그리고 페넬로페님은 굳이 분위기를 만드실 필요가 없어요. 책을 대하는 페넬로페님의 마음보다 더 근사한 분위기가 어디 있겠어요. 단언컨대, 없습니다!! ㅋㅋ

잉크냄새 2026-04-15 2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그어진 밑줄이 오늘의 나에게 보내는 메세지 같다 라는 글이 좋네요.

곰돌이 2026-04-15 21:02   좋아요 0 | URL
과거의 기록을 들여다보며 그때의 감정을 헤아리다 보니, 제가 무엇을 간절히 필요로 했고 또 무엇이 부족했었는지 알게 되더라고요. 나만이 느끼는 변화를 알아챌 수 있도록 글을 남긴 게 참 뜻깊은 순간이었습니다.
말씀해 주신 부분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지만, 작년의 저와 같은 마음으로 시간을 견디고 있을 누군가에게 건네는 인사이기도 했거든요. 그 온기를 마음으로 느끼셨다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잉크냄새님께도 이 구절이 기분 좋은 응원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책읽는나무 2026-04-16 0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디너님들의 구입한 책들을 찍는 본인들의 최애 장소들이 있던데 저는 그게 또 참 좋더라구요.
책은 어느 풍경에도 잘 어울려서 그럴까요?
집 안 책상 위나, 뒷배경인 책장들도, 잠깐 비치는 집 안 속 창문 또는 블라인드마저도!
그리고 때론 외출해서 까페 안에서 찍은 읽는 책 풍경사진 마저도 예쁘더군요.
암튼 책들이 어마어마합니다.
또 즐거운 독서시간 만끽하시겠군요.^^

곰돌이 2026-04-16 08:30   좋아요 1 | URL
제 사진의 8할은 침대 옆 협탁인데, 예쁘게 보여드리고 싶어서 물티슈로 쌓인 먼지도 한번 슥 닦아냈어요. ㅋㅋ 실은 가장 만만한 공간이라 찍어본 건데, 책나무님 말씀 덕분에 다시 보니 나에게는 그저 익숙하고 사적인 공간도 책과 어우러지면 누군가에겐 좋은 풍경이 될 수 있겠다 싶어요. 박스 채로 찍은 사진마저 구경하는 재미가 있듯이요.
‘읽을 예정인 책’이 또 한껏 늘어났는데, 찬찬히 야금야금 읽어보겠습니닷! 그나저나 오늘 날씨 너무 좋아요! 정말 봇짐 매고 어디 콕 박혀서 책이나 보고 맛있는 거나 먹으면 딱 좋겠는데 말이죠. (흑) 책나무님도 마음만이라도 봇짐 매고 훌쩍 떠나는 기분처럼, 오늘 하루 틈틈이 기분 좋은 순간들 만끽하시길 바랄게요!

rainbass 2026-04-19 0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엔진오일이 더 급한것 같습니닷!! (여기 왜케 초현실적이죵?? ㅋㅋ )

곰돌이 2026-04-19 08:22   좋아요 1 | URL
CPR 들어가기 전에 교체 완료했습니다ㅋㅋ 이런 건 늘 ‘얼른 하라’는 소리 듣고 나서야 움직이는 타입입니다… 흑흑
 

<나라 없는 사람> 중에서...

예술은 삶을 보다 견딜 만하게 만드는 아주 인간적인 방법이다. 잘하건 못하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진짜로 영혼을 성장하게 만드는 길이다. 샤워하면서 노래를 하라. 라디오에 맞춰 춤을 추라. 이야기를 들려주라. 친구에게 시를 써보내라. 아주 한심한시라도 괜찮다. 예술을 할 땐 최선을 다하라. 엄청난 보상이 돌아올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않았는가! - P32

인간은 춤추는 동물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대문을 나서서 뭔가 한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우리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냄새를 피우기 위해서다. 누군가 다른 이유를 대면 콧방귀를 뀌어라. - P66

블루스는 전세계인에게 돌아간 선물인 걸까? 내가 들어본 최고의 리듬앤드블루스 연주는 폴란드 크라쿠프의 한 클럽에서 핀란드 출신의 세 남자와 한 여자가 연주한 것이었다. 재즈 역사가이자 훌륭한 작가이고 무엇보다 나의 절친한 친구인 앨버트 머리가 한 말에 따르면, 이 나라에 노예제—결코 완전히 치유되지 못할 잔혹 행위 —가 번성했던 기간의 평균자살률은 노예보다 노예 소유주 쪽이 훨씬 높았다고 한다. 머리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노예들에겐 우울증을 해결할 방법이 있었던 반면, 노예 소유주들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노예들은 블루스를 연주하고 노래함으로써 노인자살 충동을 떨칠 수 있었다. 머리가 제시하는 또다른 이유도 나에겐 꽤 합당하게 들린다. 즉 블루스는 우울증을 집 밖으로 날려버리지는 못하지만 음악을 연주하는 방 안 구석으로 쫓아버릴 수는 있다는 것이다. 기억해둘 필요가 있는 사실이다. - P71

알렉스 삼촌이 무엇보다 개탄한 것은, 사람들이 행복할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한여름에 사과나무 아래서 레모네이드를 마시면서 윙윙거리는 꿀벌들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면 삼촌은 즐거운 이야기를 끊고 불쑥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 행복이랴!"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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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세계문학 단편선을 종종 사 모으고 있었다. 책을 처음 펼칠 때면 새 책을 만나는 설렘에 몇 편을 단숨에 읽고, 한동안 애정을 담아 이리저리 들춰본다. 하지만 그 마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다른 책들이 눈에 들어오면 관심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옮겨 가고, 읽다 만 단편집들은 책장 한켠에서 조용히 기다린다.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닌데, 읽지 못한 책들이 조금씩 밀려가는 느낌이 은근하게 마음을 눌러 온다. 그래서 비교적 얇은 편에 속하는, 흑인 문학의 거장 랭스턴 휴스의 작품을 다시 꺼내 들었다.

41편의 단편 중 맨 처음에 실린 「달빛 아래의 몸뚱이들」에는 아프리카로 화물을 실어 나르는 선원들이 등장한다. 그중 주인공은 열여덟 살, 스스로 바다를 택한 소년이다. 지긋지긋한 가난에 찌든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선원이 된 모습이라기보다는, 바다 그 자체를 숨 쉴 수 있는 피난처로 삼고, 화물선의 좁은 공간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일종의 안식과 자유를 발견한 사람처럼 보였다. 거칠게 느껴지는 선원생활도 그들에게는 대단한 일이 아니다. 마치 영화 《부력》 속 불법 원양어선에 선장과 그의 부하들이 육지에 내려, 소금기 가득한 몸을 대충 씻고 벌거벗은 채로 기다리는 여성의 방으로 달려가는 장면처럼, 혹은 작년에 정주행하면서 재미있게 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작품인 《보물섬》의 프리퀄로 제작된 미드 《검은해적》에서 선원과 해적들이 고단한 일상을 달래듯 창녀촌을 찾는 장면처럼, 본능적인 쾌락이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열여덟 살 소년도 그 속에서 특별한 것 없는 한 명의 선원으로 지내다가 ‘누누마’라는 소녀를 알게 된다.

방랑벽이 있는 열여덟 살에게 세상은 아름다웠다. 선원이 된 첫해 나는 식당에서 일을 했다. 가지고 있던 교재들일랑 모두 뱃전 너머로 던져 버리고 몇 달 동안 부모님에게 편지도 한 장 쓰지 않았다. 내 생각에 그때껏 내가 알던 사람들은 내게 친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자유였다. 바다는 나를 어머니처럼 맞아 주었고 웨스트일래너라는 화물선은 내 안식처가 되었다. ( 「달빛 아래의 몸뚱이들」, p. 8)

날들이 가고 밤들이 지나갔다. 다시 날들이 가고 밤들이 지나갔다. 광활한 아프리카의 무연한 하늘은 별들이 총총하게 들어찼다가는 뜨거운 태양이 떠올랐다. 웨스트일랜호는 조용히 침묵하듯 떠 있었다. ( 「달빛 아래의 몸뚱이들」, p. 12)

백인 선원들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장난스럽게 농담을 건네는 누누마와의 관계는 문란하거나 저질스럽게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청춘 멜로의 한 장면처럼 부드럽게 흐른다. 서로를 이해하며 필요할 때 의지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자연스럽고 조심스럽게 맞물린다. 소년은 한때 누누마를 사랑한다고 믿었고, 세월이 흘러 거의 잊힌 지금, 그녀와의 기억이 이 이야기를 쓰게 만들었다 고백한다. 이어지는 단편 「눈부신 그 사람」에서도 같은 화물선 웨스트일래너호와 선원들이 등장하지만, 이 이야기가 같은 소년의 시선인지, 혹은 또 다른 선원의 기억인지 명확하지 않다. 이야기는 선실을 담당하는 한 선원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그가 우연히 승객 중 데이지 존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의 일기장을 보게 된다. 그 안에는 선원 중 가장 잘생긴 에릭 긴트에 대한 호감뿐 아니라, 외로움과 고독이 은밀하게 담겨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일해 온 선교사 부부의 딸인 온순하고 순종적인 그녀에게 호감 가는 남자가 생긴 것이다. 일기장을 처음 본 선원은 입이 새털인 것이 분명하다. 입이 한가하면 답답해 죽나보다. 이미 선원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싹 퍼졌다. 배 후미에 있는 선원들 숙소에서 각자 침대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서 시시덕거리며 한 여성의 은밀한 속사정을 떠들어 대니 말이다. 그런데, 한가해도 너무 한가해 보이는 선원들의 모습이지 않은가? 부릴 화물이 거의 없는 탓에, 배는 한참을 정박해 있다가 자정이 되어서야 다시 항해를 시작한다. 바다의 고요 속에서 소소한 소란과 수다, 그리고 은밀한 호기심은 그렇게 배 위에서 느릿한 시간 속에서 퍼져나간다.

컬럼비아 대학 자퇴 후 잠시 화물선에 올랐던 저자가 실제로 겪은 이야기는 아닐까라는 착각에 잠시 빠지기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 랭스턴 휴스가 흑과 백으로 나누어진 삶에서 어떤 경계를 두지 않고 자유로움을 얻고 싶었던 갈증을 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껄껄껄 웃어대는 선원들을 따라 거리낌없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지만, ‘지금 웃어도 되는 걸까’ 싶은 복잡함이 마음 한쪽에 남아 특유의 여유로움이 온전히 즐겁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신기하게도 흔들흔들하는 배가 멀미를 일으키지 않고 잔잔하게 다가온다. 욕이 섞인 농지거리를 주고받는 선원들의 장난 역시 불쾌하지 않다. 아마도 저자는 고된 삶의 면면을 거칠게 드러내기보다는, 상륙해 항구를 거닐고 농부들과 섞여 어울리는 선원들, 해 질 무렵 선원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항구 처녀들과 산책로를 걷는 장면 등 고된 삶의 연속인 나날 속에서도 서글픔을 감춘 그들만의 생기와 문화를 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의도가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스며든 듯하다.

태양이 바다 너머로 떨어지자 다카르 항에 어둠이 찾아온다. 니스나리옹의 브루사드 호텔의 작은 정원 카페. 원주민 음악, 분수, 흑인 웨이터들, 담배 연기, 포도주, 별들. 여기저기 테이블에 흩어져 앉아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선원들과 흑인 소녀들, 몇 명의 프랑스 여인들이 보인다. 뚱뚱한 가게 주인은 손을 마주 부비며 흥청대는 가게 분위기에 고무되어 있다. 프랑스 여인들 중 한 명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지만 뉴어크 출신의 마이크가 부르기 시작한 < 왜 내가 너 때문에 울어야 하나>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갑판장은 테이블 위에 대자로 뻗어 잠이 들었다. 제리는 분숫가에서 춤을 추고 있다. 취한 사람들의 웃음과 주정소리가 작은 정원을 가득 채운다. (「눈부신 그 사람」, p. 26)

바다에서 일주일을 같이 생활하다 보면 그리스인, 서인도 제도 흑인, 아일랜드인, 포르투갈인, 미국인 등으로 잡다하게 구성된 선원들끼리 꽤 친해지기 마련이다. 날씨가 따뜻하면 선원들은 후갑판에 모여 서성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 바다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끼리도 아주 친해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 타국의 항구에서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그들은 마치 형제들처럼 똘똘 뭉친다. 물론 언제나 형편없는 음식을 내놓는 주방장과 설전을 펼칠 때도 모든 선원은 하나로 뭉친다. 바다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어머니로 치자면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서로 피를 나눈 형제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꼬마 숫총각」, p. 31)


제법 묵직한 덩치를 자랑하던 책들 중 하나를 골라 겨우 몇 편만 읽었을 뿐인데, 왠지 숙제를 마친 듯 후련한 기분이 든다. 리뷰를 올릴 때마다 별점을 매겨야 하는 것도 참 곤욕스러운 일 중 하나인데, 페이퍼는 그 곤욕스러움에서 자유롭다는 점이 한몫한 걸까? 끝으로 최근에 구매한 네 권의 책을 기록해 본다. 다음에 펼쳐질 읽을거리가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미국의 체호프’라 불리는 레이먼드 카버의 열두 편의 단편이 실린 책이다. (사실, 나는 정작 둘 다 아직 안 읽어봤다.)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책이었는데, 얼마 전 박완서 작가님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읽다가, 똭! 등장하는 게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변영주 감독님이 추천하는 책이기도 하고, 손에 넣고 싶었던 책이기도 해서, 이건 분명 나에게 보내진 ‘사라’는 우주적 신호였다. 한동안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비우기를 연거푸 반복했지만, 결국 이번에는 사버렸다. 저번 페이퍼에 뚱책을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인 것처럼 올려놓았는데,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얇은 책들이 줄줄이 놓여 있다. 덩치에 좀 질렸나? 낄낄. ㅋㅋㅋ 일단, 분위기라도 느껴볼 겸, 맨 처음에 실린 「깃털들」을 읽어봤다. 새 자동차, 두 주 정도 캐나다로 여행을 원하며, 반면에 아이들은 원하지 않는 부부인 잭과 프랜이 등장한다. 어느 날, 직장에서 알게 된 버드라는 친구에게 저녁 초대를 받게 된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평범한 일상일 뿐인데, 두 사람이 풍기는 느낌은 뭐랄까, 뭔가 묘하게 불편하다. 흠...

“우리 달달한 과자를 가져가자.”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프랜이 말했다. “아니다. 뭘 가져가든 난 신경 안 쓸래. 이건 당신 체면치레니까. 법석 떨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면 난 안 갈 거야. 라즈베리 커피링을 만들 수는 있어. 아니면 컵케이크나.”

“디저트는 준비하겠지.” 내가 말했다. “디저트도 정하지 않고 식사 초대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p. 15)

저녁 초대가 달갑지 않은 듯하면서도 그렇다고 완전히 거절할만큼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은 두 사람의 대화는, 읽는 내내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버드의 집으로 가기 위해 교외로 나서는 길에서 잭은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운전하며 드라이브의 즐거움에 빠진다. 그는 눈 앞에 펼쳐진 목초지와 낡은 축사, 그리고 천천히 이동하는 젖소떼를 바라보며 “참 그림 같은 풍경”이라고 말하지만, 프랜은 그 말에 공감하기는커녕 짧게 “깡촌이네.” 뚝 잘라 말한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감정적이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프랜의 반응에도 잭은 크게 맞서지 않고, 그녀를 이해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또 한편으로, 이 부부는 아이를 갖는 문제를 언젠가는 하게 될 일처럼 미뤄 두고 있다. 그래서인지 버드의 집에 있는 생후 8개월 된 아기가 혹시 이들 부부에게 어떤 감정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만드는 요인이 될까 봐, 괜히 나 혼자 은근히 긴장감이 돌았다. 버드 부부는 안정적이고 평온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결국 이 날의 저녁 식사는 주인공 부부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해 보이는 결말로 이어진다. 쌉싸름하다.



존 치버 『팔코너』

에제키엘 패러것. 영락한 집안의 차남으로 중년의 대학교수이자 마약중독자이다. 동시에 유일한 형제인 형을 죽이고 팔코너 교도소 독방동에 수감된 734-508-32번 죄수.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푸른 하늘이 자신에게 허용된 유일한 자유 공간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는 이제 사기꾼과 살인자는 동료로, 폭력과 인권유린이라는 채찍을 휘두르는 교도관들은 관리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출판사의 소개 글을 여기까지 읽고, 더 내려가면 스포일러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예감에 손가락이 멈췄다. 그리고 스크롤을 쭉쭉 내려보다가, 먼저 읽고 리뷰를 남겨주신 폴스타프님의 조언: “출판사 소개 글은 읽지 말고 읽길 바란다.”를 발견했다. 폴스타프님께 땡투를 날리고, 망설임 없이 바로 구매 버튼을 눌렀다. 실제 변호사인 저자가 억울하게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을 변호하며 겪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월터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을 읽은 이후,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책은 오랜만이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혹시라도 스포일러가 될까 소심하게 뒤표지를 들여다봤다. “희망과 구원의 가능성을 고찰하는 작품”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자기 죄의 무게를 실감하게 만드는 상상할 수도, 굳이 만나야 할 이유도 없었던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에 갇혀 지내게 된 그가 들려줄 이야기는 과연 어떤 것이 될까.



저메이카 킨케이드 『내 어머니의 자서전』

작년에 읽은 책 중 손꼽히는 작품중 하나는, 카리브 문학의 거장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미스터 포터』였다. 주인공의 할머니가 맞이한 죽음, 차가운 파도가 몰아치는 순간의 그 슬픔과 고요가 아직도 마음을 붙든다. 글이 이렇게 날카롭고도 시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정도로 여운이 길었다. 나중에 이 책 속에 담긴 그녀의 기록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 통찰과 언어의 힘이 또 얼마나 깊숙이 나를 흔들지 기대된다.

내가 스스로에게 말하기 시작한 이유는 나의 목소리를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목소리는 내게 다정하게 들렸고, 나를 덜 고독하게 해 주었는데, 나는 고독했고 나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였나? 내 어머니는 죽었고,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p. 21)

무슨 일이 일어났고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나는 즉각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나마, 분별없게나마 나는 몇 마디 말을 통해 내 생활을 변화시켰다. 아마 내 생명까지 구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로 나는 늘 스스로에게든 남들에게든 내 상황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내가 나 자신을 극도로 의식하고, 스스로의 욕구에 그토록 관심을 갖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신경을 쓰고, 나의 불만을, 나의 즐거움을 자각하게 된 계기는 그 때문이다. 뚜렷한 목적 없는 이 어린애다운 고통의 표현으로부터 내 인생이 바뀌었고 나는 그 점을 마음에 새겼다. (p. 28)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죔레는 거기에』

원래 『죔레가 사라지다』라는 제목으로 예약 구매한 책이, 막상 손에 쥐니 『죔레는 거기에』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새로운 제목이 훨씬 마음에 든다. 올해 아흔두 살, 세월의 무게가 온몸에 배인 노인 카다 요제프와 그의 노견 죔레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라슬로는 긴 호흡과 난해함으로도 유명하지만, 이 소설은 주인공이 노인과 개라는 설정 덕분인지 비교적 편안하게 읽힌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줄거리와 역자 후기를 읽어보면 세대 간 갈등, 가치관의 충돌,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이 배경으로 깔려 있지만, 아직은 숲의 가장 높은 지대에 살고 있는 요제프와 죔레의 세계는 고요함을 뿜어내고, 조금은 여유롭다. 그러나 평온함 뒤에는 긴장이 숨어 있다. 헝가리 아르파드 왕가의 벨러 4세, 칭기즈 칸의 후손이자 왕위 계승자인 것을 숨기고 사는 요제프가 자신의 집을 찾아온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을 둘러본다. 군주제를 재건하려는 추종자들, 무장봉기를 꿈꾸는 집단, 또 다른 정치적 세력까지 뒤얽혀 있다. 지금은 말할 수 없는 이유로, 1945년에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결심했고, 그 결정을 지금까지 단단히 지켜온 요제프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자신이 바라는 것은 그들이 이해해주는 것이라고, 그 이유는 이제 이 삶이 지쳤기 때문이며, 벌써 세 번째 만남이라는 이 시점에서 그는 그들에게 신뢰가 간다고 여기기에 솔직하게 고백하는데, 아주 작은 노력조차도 육체적으로 자신을 지치게 하며, 이제 그만하고 놓아도 된다는, 마지막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이만하면 충분하고, 한 사람의 인생으로는 아흔한 해면 충분하지 않느냐?, 그는 너무도 많은 것을 보았고, 너무도 많은 일을 겪었으며, 너무도 다양한 것들을 견뎌야 했지만, 그는 결국 그것들을 이겨냈고, 가족과 종교적 계율과 사랑하는 조국이 그에게 요구한 대로 품위를 지키며 살아왔으나, 이제는 이만하면 되었다고, 매일 음식을 해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잠자리를 들고, 제때 일어나지만, 그것은 단지 모든 것이 제 궤도를 따라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라면서, (p. 28)

당신들이 발견한 사실, 즉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과 여기에서 우리가 이렇게 만난다는 사실은 일곱 겹으로 봉인된 비밀로 남아야 하오, 알겠지만 누구도, 아무도 이것을 알아서는 안 되며,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알아서는 안 되오, (p. 31)



(헥헥)
작정하고 페이퍼를 작성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나 혼자 신나게 이 말 저 말 말보따리를 풀어놓고 말았다. 뭐, 늘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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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26-03-08 0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소개가 참 좋습니다. ^^ 다 읽어보고 싶도록 만드시네요. ㅎㅎ

곰돌이 2026-03-08 08:16   좋아요 1 | URL
아쿠, 감사합니다. 끄적끄적 적어 내려가는 동안 저도 꽤 즐거웠어요. 책이 재미있었거든요. 하하. 즐겁게 읽어주신 것 같아 제 마음도 좋습니다. 오늘은 밥 한 끼만 먹어도 될 것 같아요. ㅎㅎ

자목련 2026-03-08 0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만난 책은 <대성당>뿐인데 이 한 권이 있어 괜히 좋습니다. ㅎㅎ

곰돌이 2026-03-08 09:33   좋아요 0 | URL
좋다고 생각해 주시는 그 마음이 저는 더 좋습니다. (부끄)

페넬로페 2026-03-08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표지가 마음에 들어 저도 세계문학 단편선을 몇 권 구매했는데, 잘 안 읽게 되더라고요. 라슬로의 신간은 헝가리어 직접 번역이라 저도 희망도서 신청했어요. 곰돌이님의 책 소개는 우아하게 아름답습니다^^

곰돌이 2026-03-08 09:35   좋아요 1 | URL
살아생전 ‘우아’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없던 곰이 세상에나 마상에나…. 제 두 눈을 의심했습니다. ㅋㅋ 저 오늘 밥은 다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