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었는데, 호아킨 폰트라는 인물이 자기 딸의 친구이자 젊은 시인인 벨라노와 리마를 향해 이런 말을 했다.

지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그런 문학은 넘쳐 난다.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최고의 문학이다. 슬플 때를 위한 문학도 있다. 기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지식에 갈증을 느낄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절망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이 마지막 문학이 울리세스 리마와 벨라노가 하고 싶어 한 문학이다. 곧 알겠지만 심각한 오류이다. 예를 들어 평온하고 교양 있고 대체로 건전한 생활을 하는 성숙한 독자, 즉 평균적인 독자를 생각해보자. 책과 문학지를 구매하는 사람을. 자 그 사람이 여기 있다. 그 사람은 차분할 때를 위해, 평온할 때를 위해 쓰인 문학을 읽을 수 있다. 또한 터무니없거나 유감스러운 공모(共謀) 없이 비판적인 눈으로 그리고 냉철하게 다른 모든 종류의 문학을 읽을 수 있다. (...) 사람이 평생을 절망하면서 살 수는 없다. 몸이 결국 말을 듣지 않게 되고, 고통은 결국 견딜 수 없어지고, 총명함은 차가운 세찬 물줄기 속에 사라진다. 절망하는 독자는 결국 책과 멀어지고, 필연적으로 절망만 하는 사람이 된다. 아니면 절망을 치료한다! (...) 광맥을 고갈시키지 말라고! 겸허해지라고! 미지의 땅에서 찾아 헤매고 방황하라고! 그렇게 하되 빵 부스러기나 하얀 조약돌 같은 생명줄은 유지한 채! (《야만스러운 탐정들 1》, p. 321)

기존 문단의 질서에 맞서 자신들만의 문학을 꿈꾸던 반항심 가득한 청년들에게 건넨 조언이었다. 물론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지만... ㅋㅋ 내가 그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호아킨이 최고의 문학이라고 말한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을, 특정한 감정 하나에 독자를 붙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삶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문학으로 읽었다. 그리고 이 말은 꼭 문학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벨라노와 리마를 향해 던진 호아킨의 문학적 조언이 다 와닿는 것은 아니었다. 절망에 깊이 잠긴 문학이 어떤 독자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게 하는 통로가 되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게 만들기도 하니까.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 곳도 갈 수 없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돼버린 이들에게도, 언젠가 문을 열면 자신을 기다려 줄 곳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 이건 어디까지나 독자인 내 바람일 테다. 모든 종류의 문학을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을 만큼 자유롭고 성숙한 독자는 아닌, 그저 취향에 맞는 책을 집어삼키는 내게는 어둠 속을 방황하더라도 결국 삶으로 돌아올 ‘생명줄’을 쥐고 있으라는 당부의 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사실 늘 평온하기만 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아마 호아킨이 말한 평온함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라기보다, 온갖 고통의 소요를 치르고도 끝내 자신을 잃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지. 지금의 나에게는 내공에 가까운 말이다.

예전에는 특정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 중 하나로 문학이 내게 이용당하곤 했다. 이제는 어떤 감정 속에 있더라도 그것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틈을 만들어준다. 그 감정에만 오래 머물지 않게 해준다고 해야 할까. 그 고마움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책을 붙들고 읽어 나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내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다. 삼십삼 년을 살아오며 어설프게나마 깨우친 것이 몇 있긴 해도 (진짜 있기나 한 건지...), 정말 앞날만큼은 알 수가 없다. 그건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와도 모를 일이지. 그리고 오늘의 이런 건전한 생각(?)이 앞으로도 그대로 유지되면 좋겠다만, 온갖 것을 다 쏟아부어도 ‘영 오늘은 날이 아니구나!’ 싶은 개떡 같은 날은 또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런 날에는 화려한 수식어구가 필요치 않은, 그저 글을 썼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사람들의 글을 찬찬히 읽고 마음을 헤아려보며, 잠깐 내 사정은 잊고 몰입한다. 그러다 문득, 몰입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 그 어떤 틈새가 내게도 있었던 거구나 싶어 ‘이만해도 됐지 뭐’ 하며 지나간다. 그렇게 지나가진다. 그러고는 다시 책을 편다.

돌고 돌아 7월에 산 책 이야기다. 이놈의 손가락이 인내라는 것을 몰라 장바구니를 비우고 또 몇 권 품에 들였다. 책을 고르는 일은 늘 그렇다. 읽고 싶은 마음은 앞서고, 참는 마음은 늘 한발 늦는다. 책 선택의 고민을 덜고, 또 다른 세계로 쉽게 발을 들일 기회를 얻는 일은 언제나 반갑고 귀한 일. 이번에도 먼저 읽고 좋은 리뷰를 남겨주신 알라디너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소박한 땡투에 꾹꾹 눌러 담았다. 앞서 호아킨의 문장 하나를 붙잡고 이야기가 길어졌으니, 새 책 이야기는 가볍게 남겨야겠다.



토니 모리슨 《가장 푸른 눈》, 《솔로몬의 노래》

누군가의 상처를 개인의 불행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그 뒤에 놓인 사회와 역사의 그림자까지 드러내는 작품은 늘 내 책장 한 켠을 차지한다. 그중에서도 흑인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다. 그동안 만나봤던 저메이카 킨케이드는 식민지의 기억과 여성의 목소리를, 글로리아 네일러는 흑인 여성 공동체의 삶을, 옥타비아 버틀러는 SF라는 장르를 통해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토니 모리슨이다.



이보 안드리치 《드리나 강의 다리》

한 시대를 담아내는 소설, 역사와 인간이 얽힌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보스니아의 드리나강 위에 놓인 한 다리가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걸까. 시작은 다리를 둘러싼 오래된 전설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천천히 풀어낸다. 오스만 제국 시절 세워진 그 다리는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가고 사라지는 시간을 지켜봤고, 제국이 바뀌고 전쟁이 휩쓸고 지나가는 시간도 묵묵히 견뎌냈다. 수백 년을 같은 자리를 지킨 다리라면, 웬만한 역사책보다 더 많은 사람의 삶과 시간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다리가 간직한 것은 거대한 역사의 기록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이야기로 남긴 순간들, 그리고 그들이 잊어버린 시간까지도 함께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란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고 전설로 바꿀 수 있는 것들만을 기억하고 다시 곱씹어 이야기하는 법이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여러 가지 자연 현상들에 대해 무관심하듯 그렇게 특별한 흔적을 남기는 법도 없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갈 뿐인 것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건드리지도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도 않는 법이니까. (p. 32)



알라 알아스와니 《야쿠비얀 빌딩》

1934년 아르메니아인 사업가 하굽 야쿠비얀이 카이로 중심가에 지은 10층짜리 유럽풍 건물. 처음에는 외국인과 상류층 사람들이 호화롭게 살아가던 최고급 아파트였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모습도 달라졌다.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 외국인과 상류층 사람들이 떠나고, 일부 공간은 사무실이나 병원, 임대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과거 하인들이 머물던 옥상에는 값싼 거처를 찾는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또 하나의 서민 사회가 만들어졌다.

처음 만난 인물은 자키 베다. 상류층 명문가 출신이지만 혁명 이후 집안이 몰락하면서, 한때 꿈을 펼치던 엔지니어링 사무실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신세가 되었다. 여자를 좋아하고 음담패설을 즐긴다. 그리고 그런 그를 20년째 ‘주인님’이라 부르며 모시는 아바스카룬이 있다. 그렇다면 건물 꼭대기에는 어떤 삶이 펼쳐지고 있을까. 라크아를 행하는 모습, 침대에서 있었던 일을 부끄러움 없이 이야기하며 웃는 여자들, 그리고 빵 한 덩어리를 얻기 위해 고단한 하루를 버텨내는 사람들. 그곳에는 팍팍한 삶 속에서도 잠시나마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대단하지 않은 작은 순간들을 붙잡으며 하루를 이어가고 있었다. 소곤소곤 대는 소리,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 기침 소리, 쉬지 않고 이어지는 기도문 소리와 함께.



쥴퓌 리바넬리 《세레나데》

소설의 주인공은 서른여섯 살의 마야 두란이다. 그녀는 지금 보스턴행 비행기에 올라 노트북을 펼쳤다.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생각이다. 마야는 석 달 전으로 돌아가 그날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스탄불 대학에서 외국인 손님을 맞이하는 일을 하는 마야는 어느 날 독일 출신의 87세 미국인 노교수 막시밀리안 바그너를 수행하게 된다. 늘 그랬듯 튀르키예를 소개하고 손님의 편의를 도우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른손에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다른 손에는 여행 가방을 든 노교수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와 침묵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그러던 순간, 교수가 묵을 숙소로 향하는 택시 뒤를 계속 따라오는 수상한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온다. 뭐지? 공상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마야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바빠진다. 이 교수가 혹시 스파이는 아닐까. 뒤따르는 차는 정보국 차량은 아닐까. 갑자기 요원들이 들이닥쳐 교수를 납치하는 것은 아닐까. 온갖 상상을 펼치던 마야. 대체 왜 그녀는 몇 달이 지난 지금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 글로 남기려 하는 걸까.

나는 모든 걸 다 털어놓을 셈이다. 이렇게 다 이야기하고, 내가 목격한 사실을 만천하에 알려야 내 고통도 극복될 테고, 삶도 단순해질 테니까. (p. 10)



마리아나 엔리케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최근에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몇 권 읽었던 터라 이쪽 작품들도 두루 살펴보던 중, ‘라틴아메리카 고딕 리얼리즘의 대가’라는 소개에 이끌려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작품을 집어 들었다. 아르헨티나의 어두운 역사와 오늘날의 사회 문제를 공포라는 장르에 녹여낸 열두 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실제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방화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표제작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부터 읽어봤다.

“뭘 알고 싶어 하는 거죠?” 실비나가 물었다.
“음, 분신 의식이 언제쯤 끝날지 알고 싶어 하더구나.”
“언제쯤 끝날 걸로 보세요?”
“얘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지만 나는 말이다, 영원히 안 끝나면 좋겠어!” (p. 342)

어느새 웬만한 일에는 쉽게 놀라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실비나 역시 거창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버스에서 소매치기가 자신의 가방 속을 들여다볼지 두려워 빈자리가 생기면 안도하는, 어디에서나 마주칠 법한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런 실비나가 개인의 사건을 넘어 국가 폭력의 문제까지 마주하며 여성들의 연대 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간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선뜻 앞에 서지는 못했던 이들이라면, 실비나를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연대는 처음부터 특별한 사람들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사회에서는 자기 몸으로 저항하게 되고, 세상이 끝내 듣지 않는다면 사람은 결국 몸으로 말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었고, 또 알려고 했을까. 세상이 보내는 신호들을 남의 일처럼 지나치고 또 하나의 끔찍한 사건 정도로 넘겨버리면서, 당장 내 앞의 현실을 살아내는 데 바빴던 내 얼굴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왜 많은 여성이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선택까지 했는지, 왜 마리아 엘레나는 끝나기를 바라야 할 이 의식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는지. 그 앞에서 나는 아직 불에 타지 않은 여성 중 하나일 뿐이었다.



H. P. 러브크래프트 《크툴루의 부름 외 12편》

공포 소설은 이상하게 손이 잘 안 갔다. 시청각적 자극 없이 활자만으로 과연 어디까지 몰입을 끌어낼 수 있을까, 늘 반신반의했다. 그런 작품이 있다고 해도 뭘 알아야 읽어볼 거 아닌가. 주구장창 고어만 늘어놓으며 사람 기분만 더럽게 만드는 공포보다는, 밤에 괜히 이불을 바짝 끌어당겨 덮고 싶게 만드는 그런 공포를 원하던 차에 이 책을 발견! 여름이 가기 전 늦은 밤에 펼쳐볼 생각이었는데,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가장 짧은 작품들 위주로 분위기만 먼저 느껴봤다.

꼿꼿한 자세로 감정 기복 없이 읽어 내려가다가도, 분명 별 타격감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읽는 도중이나 마지막 문장에 다다를 때 등을 훑고 가는 싸한 무언가가 있었다. 공포를 빌려 결국 시선을 다른 곳으로 이끄는 작품도 있었다. 난 이게 더 좋았다. 그 끝에서 마주한 기괴한 절망과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조용한 탄식. 나처럼 장르 소설과는 거리가 있는 독자에게도 의외의 재미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총 14편 가운데 「랜돌프 카터의 진술」, 「에리히 잔의 연주」, 「시체를 되살리는 허버트 웨스트」, 「아웃사이더」까지 네 편을 먼저 읽었는데, 가장 오래 남은 건 마지막에 읽은 「아웃사이더」였다. 비명을 내지르게 만드는 공포가 아니라, 마치 피아노의 마지막 단조 화음을 쾅 하고 내리친 뒤, 그 울림이 한동안 가슴에 머무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

과거를 망각한 덕분에 편안해지기는 했어도 내가 아웃사이더라는 것만은 언제나 기억하고 있다. 이 시대와 인간들 틈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낯선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거대한 황금 아치 너머에 있던 그 괴물에게 뻗은 내 손끝에 차갑고 매끄러운 유리 표면이 만져졌을 때부터 깨달은 사실이었다. (「아웃사이더」, p. 109)



오노레 드 발자크 《잃어버린 환상》, 《골동품 진열실》

시작은 《사촌 퐁스》였다. 고구마 줄기의 끝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다. 최근에 고른 《골짜기의 백합》도 시작부터 영 마음을 움찔거리게 했다. 아무래도 이번이 끝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래,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나. 읽으면 되지.

《잃어버린 환상》 1권의 시작을 알리는 니콜라 세샤르. 읽고 쓰는 능력이 없어 식자공이나 교정자의 역할은 할 수 없었던 수습 인쇄공 출신의 그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 속에서 뜻밖의 기회를 얻는다. 국민공회의 법령을 빠르게 유포해야 했던 시대적 필요 덕분에 ‘어쩌다 보니’ 인쇄업 면허를 받고, 인쇄소 사장까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인쇄소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글을 읽고 다룰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이 운이 따르면 문짝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했던가. 때마침 몰락한 귀족 모콩브 백작이 그의 앞에 나타난다.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했던 백작은 살아남기 위해 인쇄소 감독관으로 일하게 되고, 세샤르는 그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다. 서로 전혀 다른 위치에 있던 두 사람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뒤섞인 과정을 흥미롭게 따라가던 중에 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가난이 끝나면 탐욕이 시작되는 법이다.” (p.21)

뒷이야기가 궁금하지만, 읽다 보면 끝이 없으니 함께 고른 《골동품 진열실》을 펼쳤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작은 지방 도시 알랑송, 아직도 옛 귀족 사회의 공기가 짙게 남아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앞서 읽어본 《잃어버린 환상》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 시대가 끝난 뒤 부르봉 왕정복고를 거치며 사회 질서가 새롭게 자리 잡아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세상은 이미 신흥 부르주아가 돈의 힘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로 바뀌었건만, 발자크는 가장 먼저 혁명으로 몰락한 데그리뇽 가문을 보여준다. 많은 것을 잃었는데도 데그리뇽 후작은 여전히 과거 귀족의 명예와 품위를 붙들고 살아가고, 그 곁에서는 충직한 집사 쉐넬이 현실을 묵묵히 떠받친다. 아직은 인물들을 하나씩 소개하는 단계인데, 발자크 표 각성 한 방 기대 중.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6-07-26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사진도 모두 아름답네요.
 

작년만큼 읽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읽고 쓰기를 꾸준히 이어 나가는 중이다. 예전에는 생각도 못 하던 일이다. 키보드 위로 감정이 실리지 않은 글만 떨어트리던 손가락이었다. 나의 사적인 속내를 담아본다? 그건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졸음 참는 거다) 덜어내고 비워내는 것에 조급해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이라도 일단 담아보자는 마음으로 그렇게 ‘쓰기’를 시작했다. 뚝딱거리던 손가락이 서서히 괜찮아질 때쯤이었을까. 권여선 작가의 책을 읽는데, 머릿속에서 뭔가 불이 번쩍했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각각의 계절>, p. 241)

쏟아내든지, 그것도 아니면 주변을 좀 살펴보든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물어물 말만 흐리다가 곁에 있는 애먼 사람들만 안절부절못하게 만들면, 아니, 그대로 이 순간을 흘려보내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시간에만 맡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건 스스로가 잘 안다. 그렇게 읽고 쓰면서 스스로를 추슬러 보고 난 뒤에서야 “독서는 경이로운 애도” (<작은 파티 드레스>, p. 9)라는 크리스티앙 보뱅의 말을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적다 보니 영 분위기가 우중충해질라 한다. 어쨌든! 역시, 책은 옳다. 쓰는 것도 그만큼. 때론, 그보다 더.

6월에 고른 책 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 내 보석함에 모셔놓은 알라디너 분들의 글을 훔쳐보다가 발견한 책 몇 권, 그리고 최근에 읽은 것 중 더 읽어보고 싶은 작가의 책 몇 권을 책장에 채워봤다. (감사의 마음은 땡투에 담아...) 더운 여름날 시원한 물 한 잔만큼이나 맛있는 찍먹의 순간! 물음표를 달고 짐작과 궁금증이 부풀어 오르는 딱 이 타이밍만의 재미를 즐기며, 이번에도 앞부분 느낌 정도만 남겨본다. 아님, 좀 더 길게.



이반 곤차로프 <오블로모프>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기행 작가인 이반 곤차로프의 작품이다. 이제껏 읽어온 소설 속 인물들과는 사뭇 다른 특질을 지닌 주인공의 모습이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1850년대 러시아를 시대적 배경으로 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삼십 대 초반의 남성, 일리야 일리이치 오블로모프다.

딱 부러진 이념도 없는 것이, 무언가에 몰입할 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자유로운 새처럼 생각이 얼굴에서 산책을 하고, 눈 안을 휘저으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반쯤 벌어진 입술에 내려앉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이마의 주름살 사이로 숨어버렸다가 이번엔 어디론가 아주 자취를 감춰버리곤 한다. (...) 단 한 순간 피곤도, 따분함도 그의 얼굴에서 온화함을 내몰지는 못한다. 그 온화함은 얼굴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p. 11)

저자는 그 온화함이 마음에서 우러나온다며 아름답게 포장해 주지만, 우리는 직감적으로 안다. 그 온화함은 지갑에서 나온다는 만고의 진리를... 돈 많은 백수임이 틀림없다! (아닌가?) 한참 사회활동을 할 법한 나이에 누워있는 게 일상인 데다가 따분함을 느낄 만하다가도 다시 유턴해서 곧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온화함을 내비칠 수 있다? 게다가 “모든 근심은 한숨으로 해결되고 무관심과 졸음 속에서 기력을 잃고 만다 (p. 12)”고 하니 혼자 속 끓여대면서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어 보이고! 좀 낡긴 했지만, 신축성 좋은 잠옷에 부드러운 신발까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흠, 그러면 그렇지.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하인까지 둔 지주였다. 그런데 집 안 꼴이 말이 아니다. 사방에 쌓인 먼지는 기본이고, 거미줄에, 널브러진 접시와 먹다 흘린 빵 부스러기까지. 나름 최소한의 질서는 있는 건지, 오블로모프가 하인 자하르를 부른다. 잠시 후, 오랜 관성과 고집으로 단련된 기존쎄 같은 기운을 풍기며 세상만사가 귀찮다는 얼굴의 자하르가 등장한다.

“집구석 한번 깨끗하다. 먼지 하며, 너절한 게, 맙소사! 저기, 저 구석 좀 보란 말야. 하는 일이 뭐야, 도대체….”
“아니, 하는 일이 뭐냐니유….” 자하르가 억울하다는 투로 툴툴거렸다. “애쓰구 있잖유. 사는 게 뭔지! 먼지두 훔치구, 청소두 거의 매일 하는디….”

“청소해, 구석의 쓰레기도 치우고. 그럼 빈대니 하는 것들도 없어질 거야.”
“치워봐야 또 쌓일 텐디유 뭐.”

160여 년 전의 러시아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뭐, 다 거기서 거기 아닐까? 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이 소설의 저자 이반 곤차로프는 공무원 생활을 오래 했는데 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한 독특한 이력까지 있다. 그 말은 오만가지의 인간을 겪어봤다는 말씀?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느라 다들 기를 쓰고 달리는 격동의 19세기 러시아 한복판에서, 왜 하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을 소설의 전면에 내세웠을까.



아모스 오즈 <유다>

<나의 미카엘>이 워낙에 유명했지만, 딱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를 읽게 됐는데, 아주 좋았다. 강력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감정은 아니지만, 어떤 경계에서 부유하는 인간의 두려움과 머뭇거림의 기억을 공유하는 동안 생각지 못한 동질감이 느껴졌고, 마음이 쓰였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건 여전히 유효하기에. 그리고 이 책을 골랐다.

부친의 사업 실패와 연인과의 결별로 마음이 고달픈 스물다섯 살의 슈무엘. 어딘가 불안정하지만,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그는 원래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라는 제목의 석사 학위 논문을 쓰던 중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한 상태다. 아모스 오즈 문학의 중요한 무대인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둔 점이나, 슈무엘이 드나드는 사회주의 서클의 논쟁과 스탈린에 대한 담론을 담은 장면을 보고 있자면,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에 흐르던 예루살렘 지식인들의 모습과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학업과 사랑이 동시에 흔들리며 삶의 방향을 잃은 슈무엘은 예루살렘을 떠나려고 이사를 준비하던 중, “인문학을 공부하는 미혼 남학생, 역사를 잘 알고 있으며,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리는 세심한 대화가 가능한 분, 저녁마다 다섯 시간 정도 학식이 깊고 지적인 일흔 살 장애인 남성에게 말동무를 해 주시면 무료로 숙소를 제공하고 소액의 월급도 지급함. (p. 26)” 이라는 광고를 읽게 된다. 그리고 어딘가 오래된 상처와 침묵이 배어 있는 고택에서, 까다롭고 논쟁을 즐기는 노인 발트와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발자크는 늘 읽어보고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는 작가였다. <사촌 퐁스>를 읽고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 모른다. 이번에 고른 <고리오 영감>은 ‘인물 재등장 기법’이 최초로 도입된 소설이라고 한다. 안 그래도 <사촌 퐁스>를 읽을 때 재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소개와 함께 줄거리가 펼쳐질 때마다, 나 혼자 초면이라 우두커니 눈만 끔벅거렸는데, 이번에는 재회의 기쁨을 느껴볼 수 있겠구나. 뭐, 딱히 더 만나고 싶은 인물은 없다만... ㅋㅋ

19세기 프랑스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의 앞부분만 슬쩍 들여다보자면, 보케르 부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이 등장한다. 주변 지형을 시작으로 냄새부터 내부 벽지 무늬, 가구와 바닥 상태 하나하나 묘사가 길고 빽빽하다. 하숙집 부동산 매물 실사 보고서를 읽는 기분이다. 나의 인내심이 책 읽을 때만큼은 진득함을 유지하기에 참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뒤이어 이 퀴퀴한 3층짜리 하숙집을 채우고 있는 세입자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고향집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파리에 상경했다는데 어딘지 모르게 눈빛이 번뜩이는 법대생 라스티냐크, 털털하고 유쾌한 척하지만, 언뜻언뜻 구린 구석과 서늘함을 풍기는 근육맨 보트랭, 그리고 이 하숙집의 공식 샌드백이자 조롱거리이면서도 바보처럼 허허거리기만 하는 의문의 노인, 고리오 영감까지. 저마다 사연 있는 얼굴을 한 사람들이 층수별로 방값에 맞춰 다닥다닥 모여 살고 있는 이곳은 돈이 전부인 파리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다.

말라붙은 심장과 텅 빈 두개골 가운데서 어느 것이 보기에 더 끔찍스러운지 누가 결정할 수 있을 것인가? (p. 12)

그리고 똑같이 19세기 프랑스를 다룬 <골짜기의 백합>을 골라봤다. 우선 펼쳐 든 앞부분의 공기는 <고리오 영감>의 음울하면서도 퀴퀴한 파리 골목과는 전혀 딴판이다. 펠릭스라는 남성이 자신의 연인 나탈리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함께 있어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자주 상념과 침묵에 잠기던 펠릭스의 모습에, 나탈리는 그의 과거가 궁금해진 모양이다. 과연 그녀에게 지난날을 고백하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탈리가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오래 묻어둔 자신의 이야기를 기꺼이 꺼내 들기로 한다.

그렇게 펠릭스는 자신의 과거를 적어 내려간다. 갓난아기 시절 시골 보모 손에 맡겨진 일부터, 좀 자라서는 형과 누이들의 지독한 괴롭힘, 부모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채 온 집안의 애정을 철저히 박탈당했던 유년기의 외로움과 불행까지. 더욱 착잡해지는 것은, 펠릭스가 악바리 같은 정신적 저항력을 키워내며 버텨 왔다는 점이다. 부모의 방임 속에서 혼자 차별받는 펠릭스의 모습 위로, 실제 발자크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사촌 퐁스> 속 퐁스의 지독한 결핍이 겹쳐 보여, 이게 또 하나의 맴찢 포인트! ㅠㅠ 편지에 담긴 뒷이야기들이 어떤 내용일지 아직은 모르지만, 당장은 내가 나탈리라면 펠릭스의 편지를 읽자마자 안쓰러운 마음에 일단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을 것 같다.

내 안에서만 갇혀 살아야 하는 가혹한 운명을 바꾸려 얼마나 노력했던가! 열정적인 마음이 오랫동안 품은 희망들이 하루 만에 무너진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p. 17)

이런 가시 박힌 장벽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인 감정의 뿌리가 너무도 깊어서, 또 어머니의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그녀에 대한 거룩한 외경심은 버릴 수가 없어서, 우리가 더 나이 들어서 그녀를 정당하게 심판하게 된 그날까지 너무나 어리석게도 그녀를 계속 사랑했다. (p. 26)



자우메 카브레, <나는 고백한다>

“행복과 불행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 그저 나에게 달려 있었다. 이를 깨닫는 데 무려 육십 년이나 걸리다니. 나는 버림 받았고, 고독하고, 당신을 너무나도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당신은 나의 정신적인 지주다. 공포스럽기는 하지만 표류하지 않기 위해 떠내려가는 뗏목을 억지로 붙잡는 일은 하지 않겠다. (...) 내 마지막 기회라고 할 이 원고 앞에 나는 홀로 섰다”

이 차갑고도 고독한 고백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바르셀로나(발카르카)라는 현재와 500년 전 중세 수도원, 그리고 1690년 대재앙의 과거가 경계를 허물듯 뒤섞이며 시점이 바뀌고 교차한다. 온통 까맣게 타버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한 숲, 그 황량한 잿더미 속에서 돈이 될 만한 나무 밑동을 기를 쓰고 찾아내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그중에서도 악기용 목재를 찾아내는 데 뛰어난 눈을 가진 자키암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단순한 배경이 아닐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자키암과 그의 아버지의 대화가 이어진다.

“아무리 네가 악기용 목재를 찾아내는 데 최고의 실력을 갖추었다지만, 아들아, 이 저주받은 집안의 넷째 아들아, 우리가 절대 팔지 않을 가장 훌륭한 재질의 단풍나무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너의 목숨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앞에 닥쳐올 고난으로부터 너를 지킬 수 있는 길이야.” (p. 19)

결국 숲을 떠나야만 하는 자키암의 가혹한 운명. 그리고 소설의 서두를 연, 죄의식에 짓눌린 한 노인의 서글픈 참회. 이 두 줄기의 서사가 내 머릿속에 맞물리면서 묘한 불길함과 먹먹함을 풍기더니, 어느새 시선은 잿더미가 된 숲을 빠져나와, 골동품 수집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아버지 ‘펠릭스 아르데볼’이 지배하는 바르셀로나의 무거운 저택으로 넘어온다. 그리고 이 숨 막히는 그늘 밑에서, 앞서 등장한 노인의 유년 시절이었을 소년 ‘아드리아’가 모습을 드러낸다. 위안이 필요한, 펠릭스의 고독한 아들의 모습으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인간으로 키워내기 위해 분주한 사람처럼 보이고, 어머니는 그 곁에서 묘하게 차갑다.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어린 아드리아가 아버지의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게 너무나 익숙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첫머리에서 만난 그 고백이 괜히 더 아프게 읽힌다. 아직 어설픈 짐작으로 베일을 걷어내듯 읽고 있지만, 소설 속 역사적 사건, 인물들의 대화, 그리고 그 안에 감도는 공기들이 뭔가 거대한 한 지점을 향해 차곡차곡 쌓여 가는 듯한 느낌에 기대감이 끌어올려지면서 묘하게 흥분되고, 얼른 다음 장을 넘기고 싶게 만드는 맛이 있다. 다만, 오는 길이 잘 닦인 아스팔트 길 같지만은 않았다는 것.



저번 5월에 구매한 책 리스트(사촌퐁스, 마왕, 딩씨 마을의 꿈, 아메리카의 비극 등)가 ‘인간 욕망 파멸 세트’였다면, 6월은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같다. 이미 상처를 안고 있거나, 후회하고 있거나, 멈춰 서 있거나, 과거에 붙들려 있는 모습으로. 하긴, 맨날 도파민이나 터지는 탄탄대로 같은 인생사가 세상에 어딨나 싶다. 결국은 덜컹거리는 이야기들 속에서 내 삶의 어느 한 조각을 발견하게 되니, 또 읽고 또 끄덕이고 또 어딘가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 아닐지.

인간이 지상에서 거주하는 것은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단순하고 일상적이며 진부한 삶일 뿐이다.(...) 우리에게 부여된 운명은 실패하는 것이며, 모든 예술과 학문에서, 그리고 가장 본질적으로는 삶이라는 순수한 예술 안에서 실패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실패야말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취다. (<횔덜린의 광기>, p. 340)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ainbass 2026-06-28 0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을유출판사 책이군요. 을유 표지는 언제봐도 고급지다는.

곰돌이 2026-06-28 05:40   좋아요 1 | URL
그쵸! 을유는 색감도 고급스럽고 디자인도 깔끔해서 저도 좋아요. 종합적으로 만족도가 높음.
 

5월, 책 읽기 딱 좋은 계절이다.

앞에 어느 달을 갖다 붙여도 어울릴 문장이겠지만, 5월이니까 한번 적어봤다.

작년 5월 내 생일날 나에게 주는 선물로 파스칼 메르시어의 《언어의 무게》를 샀었는데, 이번에는 식구가 조금 더 늘었다. 새 책을 들이는 일은 언제나 설레는 법. 아직 첫 페이지도 열어보지 못한 책들이 태반인 마당에, 내가 덥석 도전해도 될까 싶은 책들이 줄줄이 이어져 위압감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뭐, 글자가 나를 잡아먹는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축하의 명분’으로 모인 책들이다.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금, 그리고 그때》

나는 남의 감정에 꽤 영향받는 인간이라, 일상에서든 책에서든 같은 말도 꼭 상처처럼 던지는 사람을 마주하면 금세 피로해진다. 이런 감정은 꼭 젖은 솜처럼 달라붙는다. 달라져야지, 몇 번이고 되뇌어봐도 별도리가 없다. 그래서일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는 무심한 문장들이, 나를 붙잡곤 한다. 그래서 킨케이드의 신간 소식이 반가웠고, 다시 또 만났다.

제목에 미래를 뜻하는 단어는 빠져있다. 내가 느낀 킨케이드라면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믿을 수 없는 시간이라 여기는 사람에 가까워서, 미래 대신 ‘지금’과 ‘그때’에 더 의미를 둔 걸까, 하는 별 중요하지 않은 혼자만의 넋두리를 덧붙여본다. 킨케이드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자전적 성격이 짙고 카리브해 앤티가섬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한 중년 여성의 삶을 전지적 시점으로 쓴 소설이다. 작곡가인 남편 미스터 스위트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내 미시즈 스위트. 행복한 결혼생활?

지금 내 아내인 저 여자, 하지만 처음 만났던 그때는 그저 빼빼 마른 소녀였지. 전지가위를 기다리는 삐져나온 나무의 삐져나온 나뭇가지 혹은 잡초처럼, 진정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치워버려도 되는 존재. 아, 그래, 저 여자에게서 벗어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p. 34)

남편이 아내를 바라보며 속으로 삼키는 이 잔인한 생각만 들여다봐도 이들의 관계가 전혀 달콤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 수 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녹턴뿐이었다. 이 곡에 〈이 결혼은 끝장이야〉라는 제목을 붙이며 온갖 방식의 분노를 집어넣고,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 시한폭탄처럼 자신들의 관계가 파국에 이를 것임을 알려준다. 안 그래도 책 소개 글을 읽어보니 미시즈 스위트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이후로, 어머니를 떠올리며 글을 써 내려간다는데? 여기서 어머니란,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다. 나를 버리고 간 망할 엄마다.



하인리히 뵐 《여인과 군상》

최근 《천사는 침묵했다》를 읽었는데, 어쩐지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나라도 제대로 읽어보고 난 뒤 천천히 읽어봐야지 했는데 어디 그게 맘처럼 쉽나. 고민이야 평상시에도 숱하게 하는 게 고민이니, 책 사는 데서라도 덜 하자 싶어, 그냥 샀다.

소설은 화자가 ‘레니 파이퍼’라는 48세 독일 여성의 삶을 추적하는 보고서 형식으로 시작된다. 1941년, 하사관과 단 사흘간의 결혼생활 끝에 전쟁 미망인이 된 레니는 연금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완전히 무너져 있다. 하나뿐인 아들마저 감옥에 갇혀 있으니 말이다. 화자는 레니를 아는 주변 인물을 인터뷰하고 서류를 뒤져가며 그녀의 삶을 복원해 나간다.

소설의 시작점은 1970년대 초반이지만, 이야기는 곧 레니의 어린 시절과 제2차 세계대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화자는 왜 하필, 이토록 무너져 버린 레니의 삶을 그토록 집요하게 좇는 걸까? 다른 건 몰라도 세상이 보는 레니와 실제의 레니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막스 프리슈 《슈틸러》

또! 또! 또! 하나라도 진득하게 읽어보고 나서 사도 될 것을, 책이 어디 도망이라도 가는 것도 아니고, 선착순으로 손들고 사야 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이렇게 성급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호모 파버》를 인연으로 이 책까지 책장에 날름 채워 넣었다.

방금 집어 든 《여인과 군상》이 주변 사람들의 기억 조각들을 모아 ‘레니’라는 한 여자의 삶을 외부에서부터 짚어 들어간다면, 이 책 《슈틸러》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시작된다. 감옥에 갇힌 한 남자가 “나는 슈틸러가 아니다!”라고 처절하게 외치며, 세상이 강요하는 ‘슈틸러’라는 이름과 정체성을 온몸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꾸만 그를 6년 전 행방불명된 스위스인 조각가 ‘아나톨 슈틸러’라고 부르고, 자신을 미국인 ‘화이트’라고 주장하는 이 남자는, 자신의 정체를 증명하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아니, 그런데, 그 와중에 30센티미터가 조금 못 되는 자기 구두로 감방 크기를 재보는 게 아닌가?

길이 3.10미터, 폭 2.40미터, 높이 2.50미터...

이 대목에서 앞서 펼쳐봤던 《호모 파버》가 머릿속을 스친다. 비행기가 사막에 비상 착륙하는 난리통 속에서도 엔진 결함을 숫자로 계산하고 있던 그 남자! 막스 프리슈의 주인공들은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상황에 안 맞게 이성적이고 치밀한 건지 모르겠다.



미셸 투르니에 《마왕》

제목을 보는 순간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괴테의 시에 영감을 준 게르만 신화와 유럽의 식인귀 전설, 그리고 소년 예수를 어깨에 태워 강을 건넌 성 크리스토프의 생애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덕분에 책장을 넘기기 전부터 슈베르트의 긴박한 반주 소리와 함께 아이를 유혹해 데려가는 존재라는 이미지가 겹치면서, 소설이 어떤 분위기로 흘러갈지 어렴풋이 느껴볼 수 있었다.

이야기는 ‘아벨 티포주’라는 기이한 남자의 일기로 시작된다. 말 못 해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말이 엄청 많다. 물론 초반이 일기 형식이라 더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말이 너~무 많다. 더욱이 자신을 세상의 징후를 읽어내는 특별한 존재라 믿으며 지극히 사소한 것들까지 장엄한 서사처럼 떠들어댄다. 망상증인가? ㅋㅋㅋ

사실 이 지독한 집착의 뿌리에는 어린 시절 기숙학교에서 만난 절대적 권력자, ‘네스토르’가 있다. 같은 학생이었지만 티포주에게는 신이나 다름없던 존재. 세상의 모든 우연을 자신들만의 특별한 운명으로 해석하는 법을 가르쳐준 그는, 티포주의 자아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인 것 같다.

초반에는 약간 “뭔 소리지?”라며 미간에 살짝 힘을 주고 읽게 할 만큼 몰입력을 요하는데, 이게 단순히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는 소설들과는 결이 좀 다르다. 오히려 한 남자의 내면을 아주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기분이라 전개가 묘하게 흥미롭다.
나중에는 전쟁의 발발과 함께 징집되고, 나치의 엘리트 교육 기관인 ‘나폴라’에서 소년들을 선발하는 역할까지 맡게 된다는데, 슈베르트의 마왕과 성 크리스토프의 생애 그리고 티포주의 기괴함까지 이 삼박자가 본격적으로 읽기 전 약간의 흥분을 주는 데는 틀림없다.



시어도어 드라이저 《아메리카의 비극》

대공황이 터지기 전, 성공과 돈에 눈먼 인간들의 탐욕이 절정에 달해 있던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어릴 때부터 초라한 현실과 번쩍이는 상류층 세계 사이의 간극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란 ‘클라이드 그리피스’는 거리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전도하던 부모 밑에서 자랐다. 가난과 궁핍을 견디기보다 어떻게든 다른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청년이다. 호텔 벨보이 일을 하며 번쩍이는 옷차림과 돈 냄새, 부유한 젊은이들의 삶을 가까이서 본 뒤부터는 더더욱 그렇다.

‘저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라는 감각만을 따져본다면, 슈테판 츠바이크의 《우체국 아가씨》 속 크리스티네가 떠올랐다. 단 한 번 맛본 화려한 세계 때문에 평범한 일상이 더없이 초라하고 견디기 힘들어져 버린 크리스티네처럼, 클라이드 역시 호텔의 돈 냄새를 맡은 순간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게 아닐까.

이 얼마나 화려한가! 정말로 부자라는 것이, 또 이 세상에서 출세한다는 것이, 한마디로 돈이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곧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자기와 같은 다른 사람들의 시중을 받는 것을 뜻했다. 이런 모든 사치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것은 가고 싶을 때 가고, 가고 싶은 곳에 가며, 가고 싶은 방식대로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p. 91)



오노레 드 발자크 《사촌 퐁스》

슈테판 츠바이크가 이 작품을 발자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했다고 하니 요거 은근히 기대를 안 할 수가 없군! 책 소개 글에 “유행에서 뒤처진 노총각이자 식충 취급을 받는 퐁스의 비극적 일대기”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시작부터 인간 취급이 영 박하다. 뭘 얼마나 잡수시길래 식충소리까지...

부르주아적 물질주의가 사회를 지배하던 1840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젊은 시절 예술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로마 유학까지 다녀온 작곡가이자 지금은 대중극장의 지휘자로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주인공 실뱅 퐁스는,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옷을 입고 다니는 노총각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먼 친척 집들을 전전하며 ‘식충’ 소리까지 듣는 궁색한 처지의 인물이다.

상상해보라, 1844년에 스펜서를 입은 사람의 출현은, 마치 두어 시간 동안 나폴레옹이 부활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p. 8)

겉보기엔 그저 친척 집 식탁을 전전하는 ‘프로 수저러’ 같지만, 퐁스 선생에겐 다 계획이 있다. 한 끼 식사값, 낡은 외투를 새로 맞출 돈까지도 아껴 예술품을 사들이는 것이다. 남들은 근사한 저녁 식사에 쓸 돈으로, 퐁스는 예술품 한 점을 꿈꾸는 인간이랄까.

보물이 대놓고 “나 보물이다~” 하고 굴러다닐 리 없으니, 퐁스 선생은 극장 업무 외의 시간을 죄다 작품을 찾아다니는 데 바친다. 일찍이 유학 시절부터 다져온 안목 덕분에 그의 집은 어느새 온갖 걸작들로 빼곡해진다. 정작 본인은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스펜서를 입고 친척들의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말이다. 게다가 웃을 때 드러나는, 희고 튼튼한 치아는 상어도 부러워할 만했다고 하니, 저작기능도 타고 나셨군! 식도락가에게 이보다 더한 축복이 또 있을까 싶다.

보통 전지적 시점이라고 하면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느낌인데, 이 소설은 화자가 내 옆에 딱 붙어서 팔짱을 끼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느낌이라 파리 한복판에서 퐁스의 뒤를 몰래 밟고 있는 스토커가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소설의 앞부분은 순수한 영혼인 퐁스 선생을 알아가는 재미로 평화롭게(?) 즐기기만 하면 되는데, 책 소개 글을 참고하니 퐁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충격을 받고 몸져눕는가 보다. 흑흑.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평생에 걸쳐 수집해 온 예술품들이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라는 것! 이 사실이 드러나자, 사람들이 하이에나처럼 모여든다는데 아휴, 징글징글하다 정말. 발자크는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건 애정보다 돈이라는 사실을 들춰내려는 걸까.



옌롄커 《딩씨 마을의 꿈》

결국 여기에서도 사람을 움직이는 건 돈이었다. 피와 맞바꾼 돈 때문에 죽음이 코앞에 닥쳐와도 멈추지 못하는 욕망이라니.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소박한 꿈은 결국 마을 전체를 재앙으로 몰아넣는다.

갑자기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에서 근룡이와 방씨를 따라 얼떨결에 매혈하러 가던 허삼관도 떠오른다. 하지만 그 인간적인 온기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최근에 읽은 옌롄커의 《물처럼 단단하게》에서는 인물들이 풍기는 강렬함을 통해, 후끈, 아니 거의 화끈거리는 감정들을 느꼈었는데, 이번에도 꽤 지독한 인간 군상을 보여줄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이번 책장엔 인간 욕망 파멸 세트가 잔뜩 모였다.



마지막으로, 《사촌 퐁스》에서 발견한 몹시 위험한 문장을 공유하며 글을 마친다.

“실제로 어떤 고민도, 어떤 우울도 마음에 뜨는 뜸과 같은 기벽 앞에선 저항하지 못한다. 어느 시대에서나 ‘쾌락의 술잔’을 들이켜지 못하는 이들이여, 무엇이든(벽보를 수집하기도 한다!) 수집하라. 그러면 행복이라는 금괴를 잔돈으로 얻을 것이다” (p. 19)

아니, 행복이라는 금괴를 잔돈으로 얻을 수 있다니. 이보다 실속 있는 기쁨이 또 있을까. 비워도 자꾸만 채워지는 장바구니 아닌가... 흠, 그래 좋다. 안 그래도 읽고 싶은 책만 잔뜩 쌓였는데, 앞으로도 ‘마음의 뜸’이라 생각하며 책을 사겠다. 끄떡끄떡.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26-05-25 2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옌렌커의 소설 중 <딩씨 마을의 꿈>이 가장 좋았어요. 다른 소설처럼 너무 판타지스럽지도 않고요.
그나저나 책들이 다 한 두께 합니다.

곰돌이 2026-05-25 21:36   좋아요 1 | URL
딱 뭘 읽을까 헤매던 참에 잉크냄새님이 추천해주셔서 덕분에 옌롄커와의 두 번째 만남은 큰 고민이 없었네요. 상봉이 빨랐어요. ㅎㅎ 직업 특성상 평소에 두꺼운 책이나 서류들을 워낙 끼고 살다 보니, 두께에 대한 거부감은 없어서 겁 없이 잘 사기만 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추천해주시면 덥썩 물어가겠습니다!!

yamoo 2026-05-26 0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갑게도 4권이 겹치네요..ㅎㅎ
그리고 작품은 다르지만 저자들의 다른 책도 한 권씩 소장하고 있네요..^^

곰돌이 2026-05-26 08:01   좋아요 0 | URL
일단 사촌 퐁스는 무조건 들어가 있을 것 같아요. 퐁스 선생처럼 예술을 곁에 두고 계시는 yamoo님이라면 말이죠! 그 외 마왕, 슈틸러도 들어가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같은 책들을 공유하고 있다니 전우애가 생깁니다 ㅋㅋㅋ 나중에 완독의 길에서 만나뵐 날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문득, 작년의 오늘이 궁금해졌다.
그날의 나는 어떤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었을까, 나조차 잊고 있던 1년 전의 나는 어떤 마음의 밑줄을 긋고 있었을까.

북플에 남아 있던 1년 전 기록을 슬쩍 들여다봤다. 그때의 나는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고 있었고, 스스로는 제자리에서 반 발자국쯤 나아갔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몰랐으면 하는 마음, 지나쳐주길 바라는 마음. 이 모든 감정이 뒤섞여 복잡한 심경으로 지냈던 그때의 나날들이 머릿속에서 휘리릭 지나간다. 사실은 거의 멈춰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 혼자만이 알아챌 수 있는 아주 미세한 움직임, 그 정도만으로도 그때의 나에게는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지금의 나는 또 어떤가 싶어진다.

사소한 엉망 속에서도 나는 웃고, 잠깐 화를 내고, 또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걷는다. 여전히 미루고 또 미루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 얼른 자동차 엔진오일도 갈아야 하는데, 이런 건 왜 이렇게 미루게 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사는 일은 전혀 귀찮지 않다. 고르고, 주문하고, 박스를 뜯는 순간만큼은 이상하게 부지런해진다. 며칠 전엔 언니가 내 방에 들어와 한쪽 입꼬리를 예리하게 씨익 올리더니, 책장을 훑다가 한마디 던지고 나갔다.

“관상용.”

읽은 책보다 ‘읽으려고 했던 책’이 훨씬 많은 게 사실이기에 할 말이 없다. 어떤 책은 아직 읽지도 않았는데 괜히 아껴두고 싶어진다. 지금 읽기엔 아깝고, 나중의 내가 더 잘 읽어줄 것 같은 느낌. 그 ‘나중의 나’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쩔 땐 책을 펼치는 시간보다 책을 고르는 시간이 더 길어질 때가 있다. 이럴 때 나는 이야기를 읽고 싶은 게 아니라, 이야기를 고르는 기분이 좋은 건가 싶다. 근데 이렇게 주절주절 쓰고 있는 걸 보니, 확실히 ‘관상용’에 긁히긴 했나 보다.

그럼에도 책을 샀다.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책은 뻔히 한정되어 있는데, 기어코 또 사버렸다. 오르한 파묵을 제외하면 전부 처음 읽는 작가들이다. 먼저 읽고 리뷰를 남겨주신 분들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소박하게나마 ‘땡투’를 보내드렸다. 그렇게 또 아홉 권을 만나게 됐다. 읽을 예정인 책만 또 늘어난 셈이다. 궁금한 마음에 여기저기 앞부분만 조금씩 읽어보는 중이다. 나중에 다 읽어봐야 알겠지만, 일단 지금 막 나를 스친 이 책들의 첫인상은 이렇다.



아시아 제바르 《프랑스어의 실종》

최근에 읽은 《후리》를 쓴 카멜 다우드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알제리 작가다. 소개를 읽다 보니 알제리 여성 최초의 고등사범학교 입학 같은 타이틀보다, 알제리 이슬람 학생 총연합 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당했다는 이력이 더 눈에 띈다. 그때부터 본명 대신 ‘아시아 제바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데, 자기 이름까지 지워가며 지키고 싶었던 세계는 대체 뭐였을까 궁금해졌다.

그런 작가의 이력을 알고 나서인지 “그러니까 바로 오늘,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라는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저자의 실제 삶이 문장 뒤로 어렴풋이 겹쳐 보였다. 다른 아랍 여성들과 달리 프랑스에서 교육받았던 그의 이력이 이 소설 속에 어떤 그림자로 스며 있을지 상상해 보면서.

어느 바다든, 어느 바다의 파도든 자신에게 매혹적인 행복의 시간을 되돌려 주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주 가까이에서 찰싹거리는 그 물결 소리가 더 멀리서, 깊이 파묻혀 있던 과거에서 되살아나 들려오는 듯했다. (p. 20)

파리에서 20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고향 알제리로 돌아온 화자 베르칸. 그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훨씬 담담해서 오히려 더 마음이 쓰리다. 분명 고향 땅을 밟았는데 어딘지 모르게 서먹해 보이는 공기. 오랫동안 써온 프랑스어라는 언어가 마치 남의 옷처럼 느껴지는 그 이물감이 문장 사이사이에서 툭툭 걸린다. 고향에 왔지만 정작 내 언어는 어디에 있는지 되묻는 것 같은 그 막막함. 그러나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조차 스스로 결정하려는 그의 모습에서, 프랑스어와 고향의 언어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단호한 기색이 느껴진다.

가장 흥미로운 건 시점의 변화다. 베르칸의 직접적인 목소리와 그의 삶을 읊어주는 제3자의 시선이 묘하게 교차된다. 처음엔 살짝 당혹스러웠지만, 이내 이 불친절한 전환이 내게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어색함보다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뒤에 숨어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긴장감처럼. 이 묘한 시점의 차이가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갈지, 그리고 낯선 틈새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 덕분에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무겁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왜, 퇴직까지 앞당겨가며 이 낯선 고향으로 기어이 돌아와야만 했을까.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할 겁니다! 그러자면 온전히 제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p. 22)



하인리히 뵐 《천사는 침묵했다》

도입부의 몇 줄만으로도 전쟁이 훑고 지나간 폐허의 냄새와 지독한 허기, 그리고 적막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주인공 한스 슈니츨러는 전쟁 끝에 탈영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그가 마주한 세상은 뼈대만 남은 건물들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잿빛 도시다.

그는 이제 오로지 생존과 허기로 세상을 본다. 당장 배를 채울 빵 한 조각과 몸을 뉠 안전한 장소가 그에겐 그 어떤 이념보다 절실하다. 버려진 옷 주머니에서 우연히 발견한 담배를 입에 물고서 성냥불을 가진 누군가가 지나가길 기다린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그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시절의 집을 멍하니 떠올려본다.

돌로 만든 천사의 얼굴은 부드럽고도 고통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p. 8)

손에 백합 한 송이를 든 채 침묵하는 천사상. 한스는 그 천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묘한 희열에 잠긴다. 전쟁이 삼켜버린 도시에서 그가 처음으로 마주한 ‘얼굴’다운 얼굴이기 때문이었을까?



안톤 체호프 《상자 속의 사나이》

단편의 매력을 처음 알게 해준 건 권여선 작가의 작품들이었다. 서서히 단편 쪽으로 관심이 옮겨가면서 세계문학 단편선을 한 권씩 모으다 보니 결국 안톤 체호프까지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여러 편의 단편이 모여 있는 구성이다. 이제 막 앞부분에 실린 <굴>과 <아뉴타>그리고 <반카> 까지만 읽어봤는데, 누구는 죽을 것 같은데 누구는 웃고 있고, 누구는 진심인데 누구는 이용만 한다. 인간이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는 이유로 발생하는 그 지독한 온도 차. 체호프는 그걸 요란하게 꾸미지 않고 그냥 툭 내놓는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아프게 찌른다.

굳이 비교하자면, 권여선이 뜨겁게 도려낸 자리를 체호프가 그 뜨거운 순간을 식지 않은 채로 냉정하게 응시하는 기분이다. 한낱 먼지인 나의 감상일 뿐이다.

체호프의 글에 담긴 ‘삶의 민낯’에서 내가 느낀 냉기 외에 남은 이야기들이 또 어떤 다양한 감정을 얻게 해줄지 궁금해진다. 아직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각기 다른 온도로 놓인 이야기들이 담겨있을까? 읽어봐야 알겠지. 왜인지 서늘한 가을 끝자락에 읽어 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그래야겠다.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내 기억이 맞다면 희곡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하니 희곡을 좀 읽어본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유일한 한 권이다. ㅋㅋ

여기에 한 권을 더 얹어보려 한다. 일단 제목부터가 좀 압도적인 느낌인데 책장을 펼치자, 아침 햇살이 거실을 꽉 채우고 있다. 모여 있는 네 가족의 대화가 참 묘하다. 분명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는데, 그 말들 속에 가시가 돋쳐 있다.

가장 가까운 이의 살결을 가장 아프게 할퀴는 그들의 대화 과정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눈치가 보일 정도다. 불씨를 덮듯이 아슬아슬하게 애써보지만 이미 뒤편엔 짙은 그림자가 깔린 기분. 닥쳐올 불행이 두려워 날을 세우는 사람들처럼 보여서 어딘가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 이들이 통과해야 할 길고 긴 밤을 채우게 되는 것은 무엇일지. 4막 중 1막을 읽었을 뿐인데, 가슴팍이 이렇게도 갑갑할 수가 없다.



막스 프리슈 《호모 파버》

유네스코 소속으로 저개발 지역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주인공 발터 파버는 모든 걸 확률과 통계로만 따지는 뼛속까지 엔지니어다. 소설 시작부터 비행기가 사막에 비상착륙을 하게 되는 난리가 나는데, 이 와중에도 엔진 결함을 숫자로 계산하고 있는 이 남자를 보고 있자니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온다. 세상 모든 일을 계산기로 두드려보고 나서야 안심하는 그는 엄숙한 분위기도 싫고, 괜히 질척거리며 대화를 이어 나가는 스타일도 아닌 듯싶다.

보이는 것만 보는 인간미가 영 부족한 남자다. 그런데 읽을수록, 난 이 사람이 은근히 맘에 든다! 실생활에서 때론 이런 지독한 투명함이 더 낫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일지언정, 적어도 계산기 밖의 딴마음은 품지 않을 것 같다. 사실은 우리가 모두 가끔 속에서 끓어대는 ‘단절의 욕구’를 대변해 주는 것 같아 묘하게 정이 간다. 나만 그런가? (또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군.)

난 내가 지구상 최초의 인간도, 최후의 인간도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게다가 내가 최후의 인간이라고 단순하게 상상해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 히스테리를 부릴 이유가 뭐란 말인가? (p. 33)

하지만 인생은 늘 계산기 밖에서 터지는 법. 그의 견고한 논리를 비웃으며 자꾸만 끼어드는 ‘우연’들이 이 소설에 기묘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감정 따위는 하나도 안 섞인 차가운 기계 부속품 같은 문장들 끝에 어떤 비극이 그려질 것 같아 자꾸만 어디 한번 보자? 싶은 심보를 자극한다. ㅋㅋ 읽다보니 《슈틸러》도 급 관심이 간다.



로베르토 볼라뇨 《야만스러운 탐정들 1·2》

최근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를 찍먹했다가,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을 좀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샀고, 그 흐름이 자연스럽게 로베르토 볼라뇨에게까지 이어졌다. 원래는 《2666》이 궁금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내가 쉽게 덤빌 두께가 아니라서 《야만스러운 탐정들》로 방향을 틀었다.

대학교 안 시 창작 교실을 중심으로 시인이 되려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 떠들고, 시를 쓰고, 문학을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먼저 펼쳐진다. 이곳은 시에 대한 평가와 각자의 작품 이야기가 오가고, 때로는 서로의 문장을 두고 농담처럼 가볍게 날을 세우기도 하는 공간이다.

이 소설은 처음 문을 열어주는 화자가 있는데, 어딘가 너무 진지해서 좀 웃기다. 건조한 웃음이랄까? 본인은 꽤 심각하게 시와 문학을 바라보는 것 같은데, 옆에서 보면 살짝 과몰입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그 와중에 폼은 또 꽤 잡는다. 누구나 ‘어린 패기’가 대기권을 뚫고 올라가는 시절이 있으니까.

딱히 누가 주인공이라는 느낌보다는 몇몇 핵심 인물들 사이로 시선이 계속 이동하는 구조처럼 느껴진다. 초반만 읽어서는 아직 무슨 이야기라고 말하기 어렵다. 여러 인물의 목소리가 번갈아 등장하기 때문에 하나의 이야기로 딱 떨어지기보다는 계속 겹치는 말들의 흐름처럼 흘러간다. 그래서 이야기를 정리해서 이해하기보다는, 그 안의 분위기를 따라가게 된다.

초면인지라 처음엔 쭈뼛거리며 접근했건만, 읽다 보니 요거 은근히 빠져든다. 막 써 내려간 듯한 생생함 때문인지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지다 말고 애매한 지점에서 재미가 터지기도 한다. 앉은자리에서 백 쪽 정도를 쭉 읽었다. 실제로 1973년 칠레에서 발생한 ‘피노체트 쿠데타’가 이들의 대화 속에서 스치듯 지나가는데, 단순한 배경이라기보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결도 어딘가 이 사건 이후의 공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는 혼자만의 추측을 해 본다.

화자가 고백하길, 자신은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나는 ‘충분히’ 자세한 이야기 한가운데에 있다. ㅋㅋㅋ



오르한 파묵 《하얀 성》, 《새로운 인생》

이제 앞으로 겨울이면 더 생각날 오르한 파묵. 작년에 《눈》을 읽고 홀딱 빠졌다는 재탕 삼탕의 말을 또 해야겠다. 너무나 좋았던 첫 만남 덕분에 최근 《내 이름은 빨강》까지 만날 수 있었고, 몇 권 더 품에 들였다.

한동안 나는, 명확하게 들려주는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였다. 분명 듣고 싶은 목소리가 있었을 테지.

내게도 차츰차츰 조금씩 변화는 찾아오더라. 지금의 나는 이전처럼 또렷한 문장을 찾기보다, 오래 머무는 문장을 더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의미를 단번에 건네받기보다는, 그 의미 주변을 맴도는 시간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면 너무 뜬구름 잡는 사람처럼 보이려나? 후훗. 어쨌든 요즘은 선명한 목소리보다, 눈 내리는 날 창밖처럼 흐릿한 이야기들에 더 오래 시선을 두게 된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속 인물들은 어딘가에 완전히 발붙이지 못한 채 떠다니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게 그렇게 내 마음을 붙든다. 이유를 다 말하지 못한 채로, 그저 오래 남는 것들처럼.



작년 오늘, 김연수의 문장을 따라 ‘반 발짝’ 나아갔다고 믿었던 내가 그랬듯, 지금의 나도 이 아홉 권의 책들 사이를 헤매며 나만의 보폭으로 기분 좋게 걷는 중이다. 새 책을 만지작거리며 아직은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 채 조금씩 다가가는 기분, 난 이 기분이 참 좋다. 날 선 시선, 서정적인 여운, 예리한 통찰... 이토록 다양한 감정들을 조금씩 느껴볼 수 있었던 기분 좋은 시간 역시 참 좋다.

앗! 글을 닫기 전 작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내온 메시지 같은 밑줄을 다시 한번 꺼내 본다. 이 문장 하나 슬쩍 남겨두고 이제 정말 마무리 지어야겠다.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나온 한 구절이다.

“시간의 끝에,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르렀을 때 이번에는 가장 좋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기를”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6-04-15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상용이든 뭐든 저렇게 아름답게 꽂혀 있는 것만으로 행복해지잖아요. 사진 속 책들이 곰돌이님의 글과 함께 특별한 풍경이 되는 시간입니다. 곰돌이님의 글을 읽은 것만으로도 저 책들을 살 이유는 충분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산 책은 언젠가는 읽는다라고 저는 오늘도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올거기 때문에 언젠가라고 말이죠. ㅎㅎ

곰돌이 2026-04-15 12:53   좋아요 1 | URL
저한테는 마음이 텅 빈 날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는 든든한 비상약 같은 존재들인데, 독서 하수의 마음에 아주 재를 한웅큼 뿌리고 가더라고요. ㅋㅋ 가지런히 있는 모습만 봐도 그저 좋은데 말이죠! 그래도 바람돌이님이 이렇게 제 소박한 탐닉을 근사하게 긍정해 주시니 금세 마음의 평화가 옵니다. 😊

페넬로페 2026-04-15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년에 김연수 작가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읽었던 것 같아요.
곰돌이님과 읽은 책을 공유할 수 있어 좋고
이렇게 올려주신 새로운 책이 읽고 싶어지는 설레는 맘도 좋네요.
저도 관상용 책을 저렇게 분위기 있게 만들어 놓으면 잘 읽을 수 있을까요!

곰돌이 2026-04-15 13:26   좋아요 1 | URL
작년에 저는 북플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어버버‘ 시절이라, 페넬로페님과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반갑게 흔적 하나 남길 용기가 없었나 봐요. 지금은 용기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곰이 되어서, 이렇게 책을 사이에 두고 설레는 마음을 주고받을 만큼 자랐네요. ㅎㅎ
아, 그리고 페넬로페님은 굳이 분위기를 만드실 필요가 없어요. 책을 대하는 페넬로페님의 마음보다 더 근사한 분위기가 어디 있겠어요. 단언컨대, 없습니다!! ㅋㅋ

잉크냄새 2026-04-15 2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그어진 밑줄이 오늘의 나에게 보내는 메세지 같다 라는 글이 좋네요.

곰돌이 2026-04-15 21:02   좋아요 0 | URL
과거의 기록을 들여다보며 그때의 감정을 헤아리다 보니, 제가 무엇을 간절히 필요로 했고 또 무엇이 부족했었는지 알게 되더라고요. 나만이 느끼는 변화를 알아챌 수 있도록 글을 남긴 게 참 뜻깊은 순간이었습니다.
말씀해 주신 부분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지만, 작년의 저와 같은 마음으로 시간을 견디고 있을 누군가에게 건네는 인사이기도 했거든요. 그 온기를 마음으로 느끼셨다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잉크냄새님께도 이 구절이 기분 좋은 응원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책읽는나무 2026-04-16 0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디너님들의 구입한 책들을 찍는 본인들의 최애 장소들이 있던데 저는 그게 또 참 좋더라구요.
책은 어느 풍경에도 잘 어울려서 그럴까요?
집 안 책상 위나, 뒷배경인 책장들도, 잠깐 비치는 집 안 속 창문 또는 블라인드마저도!
그리고 때론 외출해서 까페 안에서 찍은 읽는 책 풍경사진 마저도 예쁘더군요.
암튼 책들이 어마어마합니다.
또 즐거운 독서시간 만끽하시겠군요.^^

곰돌이 2026-04-16 08:30   좋아요 1 | URL
제 사진의 8할은 침대 옆 협탁인데, 예쁘게 보여드리고 싶어서 물티슈로 쌓인 먼지도 한번 슥 닦아냈어요. ㅋㅋ 실은 가장 만만한 공간이라 찍어본 건데, 책나무님 말씀 덕분에 다시 보니 나에게는 그저 익숙하고 사적인 공간도 책과 어우러지면 누군가에겐 좋은 풍경이 될 수 있겠다 싶어요. 박스 채로 찍은 사진마저 구경하는 재미가 있듯이요.
‘읽을 예정인 책’이 또 한껏 늘어났는데, 찬찬히 야금야금 읽어보겠습니닷! 그나저나 오늘 날씨 너무 좋아요! 정말 봇짐 매고 어디 콕 박혀서 책이나 보고 맛있는 거나 먹으면 딱 좋겠는데 말이죠. (흑) 책나무님도 마음만이라도 봇짐 매고 훌쩍 떠나는 기분처럼, 오늘 하루 틈틈이 기분 좋은 순간들 만끽하시길 바랄게요!

rainbass 2026-04-19 0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엔진오일이 더 급한것 같습니닷!! (여기 왜케 초현실적이죵?? ㅋㅋ )

곰돌이 2026-04-19 08:22   좋아요 1 | URL
CPR 들어가기 전에 교체 완료했습니다ㅋㅋ 이런 건 늘 ‘얼른 하라’는 소리 듣고 나서야 움직이는 타입입니다… 흑흑
 

<나라 없는 사람> 중에서...

예술은 삶을 보다 견딜 만하게 만드는 아주 인간적인 방법이다. 잘하건 못하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진짜로 영혼을 성장하게 만드는 길이다. 샤워하면서 노래를 하라. 라디오에 맞춰 춤을 추라. 이야기를 들려주라. 친구에게 시를 써보내라. 아주 한심한시라도 괜찮다. 예술을 할 땐 최선을 다하라. 엄청난 보상이 돌아올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않았는가! - P32

인간은 춤추는 동물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대문을 나서서 뭔가 한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우리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냄새를 피우기 위해서다. 누군가 다른 이유를 대면 콧방귀를 뀌어라. - P66

블루스는 전세계인에게 돌아간 선물인 걸까? 내가 들어본 최고의 리듬앤드블루스 연주는 폴란드 크라쿠프의 한 클럽에서 핀란드 출신의 세 남자와 한 여자가 연주한 것이었다. 재즈 역사가이자 훌륭한 작가이고 무엇보다 나의 절친한 친구인 앨버트 머리가 한 말에 따르면, 이 나라에 노예제—결코 완전히 치유되지 못할 잔혹 행위 —가 번성했던 기간의 평균자살률은 노예보다 노예 소유주 쪽이 훨씬 높았다고 한다. 머리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노예들에겐 우울증을 해결할 방법이 있었던 반면, 노예 소유주들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노예들은 블루스를 연주하고 노래함으로써 노인자살 충동을 떨칠 수 있었다. 머리가 제시하는 또다른 이유도 나에겐 꽤 합당하게 들린다. 즉 블루스는 우울증을 집 밖으로 날려버리지는 못하지만 음악을 연주하는 방 안 구석으로 쫓아버릴 수는 있다는 것이다. 기억해둘 필요가 있는 사실이다. - P71

알렉스 삼촌이 무엇보다 개탄한 것은, 사람들이 행복할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한여름에 사과나무 아래서 레모네이드를 마시면서 윙윙거리는 꿀벌들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면 삼촌은 즐거운 이야기를 끊고 불쑥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 행복이랴!" - P1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