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시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7
살만 루시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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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해야 할 일이지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일, 거짓을 손가락질하는 일, 어느 한 편에 서서 논쟁을 일으키고 세상을 가다듬어 잠들지 못하게 만드는 일”

AI가 아직 유머 감각까지는 학습하지 못했다며 창조적인 요소가 필요한 부분은 여전히 인간만의 영역이라고 말하는 인도계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답게 일단 재밌다. 뭐랄까, 죽이 척척 맞는 동반자처럼 번역가 김진준 님이 루슈디만의 유머와 감각을 어찌나 맛있게 잘 살리는지 이 소설은 상상력으로 빚은 허구의 이야기 속에 담긴 진실과 진심이 나의 머릿속을 마구마구 헤집으면서도 따라잡힐세라 동서남북으로 핑퐁하는 통에 쉽게 판단하고 예상할 수 없게 만드는 매력까지 더해져 정말 읽을 맛이 활활 불타오르게 했다. 혀가 어찌나 길고 넓은지 눈치코치도 없이 떠들어대며 정신을 사납게도 만들지만, 이 언어의 자유로움이 주는 경쾌함과 명랑함에 빠지면 (어르신께는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루슈디가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호불호도 분명 있겠지만 나에게는 완전히 호다! 호호호! 일단, 주인공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부터 해야겠다. 부모를 잃은 고아였지만 워낙 잘생겨서 일찍이 영화계에 발을 담가 배우가 된 지브릴 파리슈타! 희대의 바람둥이 돈 조반니 못지않은 최악의 바람둥이다. 어느 날, 이유도 없이 전신에서 내출혈을 일으켜 죽을 고비에 처했다가 회복하게 되는데, 그가 깨어난 것은 참으로 다행이지만 한 가지 변화가 생기고 만다. ‘믿음’을 잃게 된 것!

알라시여, 그곳에 계시옵소서, 빌어먹을, 제발 있으시란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고,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제 아무것도 못느껴도 상관없음을 깨달았다. 바로 이 변신의 날부터 병세가 변화를 보였고 회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신의 부재를 증명하기 위해 그는 지금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의 식당에 우뚝 선 채 돼지고기를 질질 흘려가며 먹어치웠다. (p. 55)

지브릴 파리슈타는 원래 이스마일 나지무딘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푸나, 제국의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영국령 푸나였고 아버지가 봄베이의 발 빠른 도시락 배달원이었기에 열세 살 때부터 이스마일도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그의 어린 시절은 그리 행복한 삶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세월은 흘러갔고, 어느 날 한 여성으로부터 삶을 바꾸지 못한다면 생명을 되찾은들 무슨 소용이냐라는 도발적인 한마디를 듣고 난 뒤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런던으로! 지브릴 파리슈타가 아닌 턱수염을 기른 이스마일 나지무딘이라는 옛 이름으로 런던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 그는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살라딘 참차’(자꾸만 참치로 보인다)를 만나게 된다. 두 번째 주인공 참차의 소개도 간략하게 해야겠다.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각종 농약과 인조 비료의 전국 최대 생산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참차는 어릴 적부터 땀 냄새가 풀풀 나고 소음으로 가득한 곳이 아닌 검은 물 건너 머나먼 곳을 동경했다. 가슴속 깊은 욕망을 더 이상 누르지 못해 도망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된다. 희망 없는 인도 땅이 아닌 파운드화가 잔뜩 쌓인 근사한 이국의 도시에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억압하는 아버지와의 거리를 두어야 하리라! 외침이 너무 컸는지 뜬금없이 아버지가 영국 유학을 제안해 그토록 원하던 런던에 가게 된다. 인도의 현실을 제대로 목격한 적이 없이 자라온 그가 영국식으로 바뀌어버린 인도인이 되었다. 말투를 바꾸는 재능이 있어 더빙 분야에서 큰 몫을 차지하며 영국의 방송 전파를 지배하게 되고, 영국인 여성과의 결혼까지 성공하게 된다. 얼굴은 감추고 목소리만 존재한 유령이라 해도 좋다. 성공과 돈과 아내가 있는데 뭐! 사반세기가 흘러 ‘용서’를 위해 다시 고향 땅 인도 봄베이로 날아온 참차. 용서를 해주려는 것인지 받으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 왔다. <한밤의 아이들>에서 피클 국물처럼 들척지근한 향을 풍기는 주인공 ‘살림’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여성 ‘파드마’가 있었다면, 참차에게는 그의 정부 ‘지니’가 있다. 옆에서 비위를 맞추며 부채질을 살살 해 주다가도 단번에 부챗살을 죄다 부러뜨려버릴 것만 같은 여성인 지니가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세상에 사는 것으로도 든든한 자산이라 여기는 참차가 여간 밥맛이 아니었는지 냅다 재수 없는 소리를 내뱉고 떠나버린다.

“사람들이 당신 곁에 너무 접근하지 못하게 해요, 살라딘 씨. 방어막을 열어주면 그놈들은 곧바로 당신의 심장을 찌를 테니까.” (p. 119)

그래, 다시 떠나자! 단정한 양복과 질서정연하고 만족스러운 런던에서의 삶으로! 그리하여 봄베이발 런던행 비행기에서 참차와 영화배우 지브릴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한편, 지브릴이 믿음을 잃고 부정한 돼지고기를 먹은 후 그날 밤부터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그는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존재였다. 대천사 지브릴. 천사가 된 그에게 온갖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희한하게도 잠들 때마다 중단되었던 부분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똑같은 곳, 똑같은 꿈. 지독한 악몽처럼. (이 소설의 홀수장에서는 지브릴과 참차가 마주한 현실이, 짝수장에는 천사로 변신한 지브릴의 꿈이 교차한다.)

불행하게도 이 비행기는 런던 상공에서 폭파된다. 생존자는 단 두 명이다. 지브릴과 참차! 이들이 떨어져 내려오는 과정은 절대 일반적이지 않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빙글빙글 공중 헤엄을 치며 발버둥 치고 거꾸로 선 채 비명을 지르며 도착한다. 엥? 아니, 어떻게 사람이 하늘에서 폭탄처럼 내리꽂히듯 올 수 있느냐며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리라고 생각하겠지만, 불가능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넘치는 세상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니 뭐, 대단히 놀랄 만한 일이 아니라는 듯? 펜을 쥔 손에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까지 쏟아내는 말과 와다다다 시끌벅적한 묘사가 이어지는데, 거의 만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부활인 것인가? 3만 피트 상공에서 떨어졌어도 살아남았다니! 낼모레면 구십 대가 되는 노파에게 발견되어 몸을 추스를 수 있게 되었는데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치고 영주권이 있다고 믿어달라고 소리치는 참차만 날름 잡아간다. 그럼, 지브릴은? 지브릴도 잡혀가야 하는 거 아닌가? 일단 추락과 동시에 두 사람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먼저 밝혀야겠다. 지브릴은 머리 바로 뒤에서 은은한 황금빛이 비치며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에 뭔가 질문을 하고 싶게 만들고 비밀을 고백하고 싶게 만드는 천사의 모습이고, 참차는 염소 뿔 한 쌍이 시시각각 길어지는 털북숭이 악마의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끌려가는 참차는 도와달라며 악을 쓰며 소리치지만, 지브릴은 어떤 환상에 사로잡혀 그곳에만 시선을 두고 있다.


지브릴의 꿈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도시 자힐리아(이슬람 등장 이전의 무지의 시대)에서 소개되는 인물들과 이야기도 꽤 흥미롭다. 인도 영화계에서 힌두교의 각종 신들을 연기했던 무신론자 배우 지브릴 파리슈타가 아닌 이슬람교의 대천사 지브릴! 지브릴의 시선으로는 이 꿈속에서의 모든 상황과 사람들이 그저 영화 속 한 장면과 연기를 하는 배우처럼 여겨질 뿐인데, 난데없이 사람들이 자신을 소환시키는 것이 아닌가? 대천사의 역할과 그 외 여러 배역을 맡은 정말 꿈속에서나 가능한 상황에 놓여있으니 일단 이 웃기는 상황에서 어리둥절하기만 하고 꿈이 창조한 자아가 느끼는 두려움에 벗어나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헛일이다. 거기에다가 유일신교냐 단일신교냐 판단해 달라는 데 미칠 지경이다. 자신은 그저 악몽에 시달리는 멍청한 배우일 뿐인데, 뭘 알겠다고 자꾸만 사람들이 답을 원하는 건지 괴롭기만 하다. 환상과 환상을 오가고 신기루가 신기루를 덮쳤다. 여러 영상이 나타나 그의 머릿속을 뒤죽박죽 만들어 버리는 통에 점점 몸이 무거워지고 가슴에는 돌덩이를 올려놓은 듯한 지브릴은 현실에서 자신이 믿음을 버린 것을 벌하려고 미치게 만들려는 것인가라는 두려움과 함께 무력함과 무지함을 느낄 뿐이다.

루슈디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는데, 특히 아랍과 이슬람 문명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특히, 흥미롭게 읽었던 장면 하나만 얘기하자면, 지브릴의 꿈속에서 등장한 장면인데, 알라트(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의 여신)가 번개 창에 맞고 거꾸로 내리꽂히면서 머리가 산산이 터지고 검은 얼룩만 남기며 죽음과 함께 ‘시간’의 종언이 선포된다.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시대 인물과 이란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사건인 1979년 이란에서 발생한 이슬람 혁명을 적절하게 섞은 것인데, 이 혁명으로 많은 이민자가 발생했고 불법 이민자로 몰려 체포되어 불법 구금까지 당한 참차의 현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참차는 누가 봐도 사람의 말 대신 “매애애애!” 소리를 내는 양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변한 데다가 이민국 요원에게 온갖 추행과 군홧발에 짓밟히는 공포의 세계가 펼쳐진 지금, 이 순간,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상황에 몸마저 부들부들 떨릴 만큼 추운 곳에 감금되어 비참함에 빠져 있다. 이 지독한 모욕과 좌절감이 언제쯤에야 끝날지 도대체 어느 곳이 목적지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어렵사리 탈출에 성공한 그는 낙심천만한 상태에서 이민자의 하숙집에서 머물게 되는데, 이제 완전한 악마의 모습을 갖춘 뿔 달린 염소인간 그 자체였고 사람들은 징그러운 괴물이 눈앞에 나타나면 놀라 자빠지기 일쑤였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세상이 미쳐 돌아가니 악마가 나타났다고 하겠지만 참차는 그저 억울할 뿐인데, 그런 참차에게 손길을 건네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건 바로 동포들이었다.

운명이란 얼마나 잔인한 것이기에 내가 그토록 염원하던 세계가 이렇게 나를 거부하게 만드는가. 이미 오래전에 전령했다고 믿었던 이 도시의 성문에서 이렇게 쫓겨나야 한다니 이 얼마나 허무한 노릇이냐! 나는 벌써 오래전부터 내 동포들을 까마득히 멀게만 생각했건만 이제 와서 다시 그들의 품속으로 내던지다니 이 얼마나 비열하고 속 좁은 짓이냐! (p. 392)

하숙집의 높은 다락방에서 지내게 된 참차는 창밖을 내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밤거리를 순찰하는 공격 준비가 된 민병대, 촛불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하는 미움을 받는 사람들, 그리고 주변 곳곳에 있는 공격성을 가진 성난 사람들을 바라보는 동안 참차는 꿈속에서나 봤던 악마의 모습이 따로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타향살이하는 이민자들이 뒤죽박죽 변환의 과정에서 얻은 상실감도 보았다. 낯선 땅,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 고향의 푸른 물길은 사라지고, 느긋하게 인사를 주고받을 여유조차 없는 귀신 도깨비 나라 같은 곳에서 집안의 문은 죄다 걸어 잠그고 기도나 올리는 것조차 모자라 자식들은 모국어를 쓰지 않으며 부모에게 상처를 주는 진짜 현실을 바라본다. 끝내 참차는 현실을 받아들이려 한다. “만물은 정해진 운명의 쇠사슬에 매여 있다.”라고 말한 고대 로마 시대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를 선택한 것도 그 이유에서일 것이다. 분명 탓할 상대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악몽에서 깨어나도 근본적인 상황은 똑같았다. 반평생 인도 땅을 벗어나려 애써오며 진짜 현실을 보려 하지 않았던 참차는 이제 꿈과 현실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쓰디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일까.

주제 의식이 분명하면서도 무거운 이 소설은 툭 하고 내뱉듯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도 실존 인물과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기에 허투루 읽어내리기가 어렵다. 저자의 익살스러움이 다소 산만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의 유머는 절대 가볍지 않다. 끈적한 공기와 열기에 현기증을 일으키고 질식할 것만 같은 공간에서 깨달음과 동시에 좌절감을 느껴야만 했던 이의 심정은 도리어 처연한 가을바람 같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불경스럽게 다뤘다며 작가의 목에 수십억의 현상금이 걸리고, 불태워진 이 책을 비롯해 루슈디가 이 세상에 내보인 소설들은 어느 것이 현실이고 허구인지 구분할 수 없는 끔찍한 공포와 악몽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그의 삶 또한 읽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쾌함과 동시에 착잡함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지브릴이 꿈속에서 천사들조차 그 너머로 나갈 수 없다고 하는 낙원의 경계에 있는 로테나무의 가지를 끝내 붙잡지 못한 채 꿈속에서 시를 노래하는 것처럼 그는 글을 써 내려갔으리라.

로테나무의 가지를 붙잡으려 하고, 그러나 놓치고, 내리꽂히고, 철퍼덕.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죽을 수도 없고, 지옥에서 조용한 유혹의 시를 노래했다. (p. 146)

소설 속 인물의 삶이 전부 작가의 삶을 비추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들과 함께 같은 땅을 밟고, 뛰어놀고, 역사를 목격했으며, 분노를 감출 수 없었고, 말해야만 했고, 그렇기에 그 땅을 떠난,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한 개인의 삶을 조용히 비추는 조그마한 공간을 마음 한구석에 품고 읽게 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 같다. 왜 고향을 등지고 이민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새로운 곳에 뿌리를 내려 무언가 잃어버렸지만 찾을 수 없이 헤매야만 하는 이들의 끝도 없는 우울함을 헤아려볼 때,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연민의 감정을 감출 수가 없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떠나 개인적으로 살만 루슈디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감명 깊게 다가온 가장 큰 이유를 말해보자면, 그는 온갖 일에 휩쓸리면서 저항할 수 없던 상황을 겪으면서도 분노를 비난으로 표출하지 않는다. ‘사랑’으로 말한다. 그가 던지는 메시지 중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였던 것,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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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2-17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기하게도 저도 자꾸만 참치나 참자로 읽게 되네요. 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새해에도 즐거운 독서 인생 되시길 바랍니다.

곰돌이 2026-02-17 22:32   좋아요 0 | URL
참차로 읽기까지 참치와 참자를 거쳐야 하는 건 아마 저와 잉크냄새님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것 같아요. 그쵸? ㅎㅎ 잉크냄새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