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에 들어서서 여권을 넘기다가 자기 사진을 들여다봤다. 마지막으로 이 사진을 본 것은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의 개인 서재에 있을 때였다. 그때는 미래가 없는 사람의 사진이었지만, 이제는 가능성이 다시 열린 어떤 남자의 모습이었다. - P7
유리창 손잡이를 잡았다. 이번에는 그때와 달리 버티려고 꽉 잡는 게 아니었고, 이제 안개에 대고 시험 삼아 해보는 말도 망설임이나 복잡함에 대한 불안 없이 평소처럼 물흐르듯 가볍고 경쾌한 기쁨을 드러냈다. 평생 지속됐고, 그에게 다른 그 무엇보다도 더 큰 행복을 의미했던 가벼움과 기쁨이었다. - P36
사랑하는 사이먼, 너는 늘 강하고 경탄스러운 아이였고, 아무도 모르게 학교와 부모님 집을 떠나서 대도시의 불빛과 그 아래 다니는 기차로 도망친 소년이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진기하며 위험한 의지인가! 도박꾼의 의지다! 두려움에 떨 때도 많겠지만 얼마나 큰 자신감이 필요한 일인가! 네가 이렇듯 뜨겁고 정신 나간 의지, 그리고 그 의지의 바탕이 되는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을 다시 한번 불태워서 너 자신의 단어로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펜을 잡길 바란다. - P46
한번은 리비아가 집에 돌아와서, 패트가 음식을 가져다준 후에 구름이 걷히고 별이 나타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런 말을 했다고 전했다. "나는 하늘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다." 레이랜드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뗐다. "나쁜놈. 단테의 <신곡> 지옥편 마지막 장면이잖아.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에서 나와서 드디어 별들을 다시 볼 때 말이야." 그러고 책을 가지고 와서 소리 내어 읽었다. "그 사람 안에는 다른 삶이 있어." 언젠가 소피아가 한 말이었다. - P134
"뭔가 다른 의미에서는, 더 깊은 의미에서는 여전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네.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에 뭘 해야 하지? 이제 ‘중요한’ 건 뭘까? 번역을 다시 시작하자 약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네. 이 질문에 내포된 절망적인 불안감이 문장을번역할수록 뒤로 물러나고, 차분하고 명확한 감정만 남은 거지. 내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도 중요한 것은 내가 제일 즐겁게 하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즉 올바른 언어를 찾는 일이었네. 이 감정이 흔들리지 않고 확고했다는 뜻은 아닐세. 정신 나간 짓을 많이 했다네. 하루 종일 배를 타기도 하고, 폭우가 내리는 바깥으로 나가기도 하고, 더는 읽지 못할 책을 산더미처럼 사들이기도 하고, 중국어도 배우기 시작했지. 하지만 언제나 다시, 특히 밤이 되면 항상 파베세의 책으로 돌아왔네. 아침 여명이면 책상에 앉아,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해도 언어와 함께 보내리라는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네." - P219
"쉼표가 중요하군. 없애면 유치하게 들리네. 짧고 건조해. 그게 끝이야. 사실 의미가 없지. 잊힌 모든 기억이 어떻게 풍요로움에 도움이 되겠나? 그렇다면 그건 전혀 모르는, 알 수 없는 풍요로움일세. 그게 어떻게 풍요로움이 되겠어? 쉼표는 모든 것을 바꾸네. 추억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생에서 얼마나 큰 부분이 추억인지 우리는 그제야 알게 돼. 그리고 쉼표 뒤에서야 우리가 이 보물을 잊고살 때가 얼마나 많은가 기억하지. 또한 쉼표에 내포된 망설임은 잊어버린 이 보물을 추억을 통해 다시 반복하라는 요청으로도 익히네. 그러면 방향을 제시해주는 깊은 문장이지. 진부하고 단순한 문장을 쉼표가 위대한 문장으로 만드네." - P237
타인의 소망이 자기 자신의 의지를 찾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그런 일도 있었다. 타인의 단호함이 자신의 내면에 대한 통찰을 던져주므로. - P340
소피아가 구원의 소식을 들고 그의 집으로 달려온지 이틀 후, 레이랜드는 기차를 타고 밀라노로 가서 오랫동안 대성당에 앉아 있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모여서 저마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위하고 있었다. 레이랜드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그들이 무릎을 꿇고 굴복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가 오르간으로 바흐를 연주했다. 바흐를 이렇게 들어본 적이 있던가? 이렇게 내면이 울린 적이 있나? - P342
온갖 폭포, 갈등의 다급한 폭포. 나는 이게 어떤 모습이어야할지 알 고 있었고, 모든 것은 이론의 여지 없이 저절로 일어났답니다. 내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있다는 걸 깨닫고 무척 행복했지요. 내 안의 풍경을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더라는 뜻이에요. 숨어서 침묵하던 지식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식이 됐어요. 추상적이 아니라 경험으로 들어와서 영향을 끼치는 지식이었어요. 내가 첫 상상력과 문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각성, 멈출 수 없는 각성과도 같았고, 나는 더는 예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 P345
닳은 느낌이엇네. 많은 생각과 감정, 단어들을 너무 많이 찾다가 닳아버린 느낌. 당시에 나는 사십 대였고 이제 곧 예순이네. 내가 그때와 같은 사람인지 그사이에 달라졌는지 묻는 건 의미가 없어. 이런 말은 친숙한 동시에 낯설고, 놀라운 동시에 권태로운 그 중요한 무언가를 다시 느끼게 하지 못하니까. - P363
"작고 초라한 접수대 뒤에서 나도 일종의 모자이크에 열중했어. 단어들의 모자이크였지. 어두운 예배당의 그 여자와 마찬가지로 나도 모자이크를 볼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네. 그 모자이크는, 그러니까 문장과 텍스트는 누가 알아채든 아니든 그냥 ‘옳아야’ 했지. 지금도 번역을 할 때면 나는 어두운 예배당에 있는 것과 같아. 시정으로 가득한, 도드라진 현재의 순간을 경험하네. 그러다가 번역이 출간되어 세상에 공개되면, 예배당의 어둠을 떠나 현란한 빛속으로 나오면 거의 유감이라고 느낄 때도 이따금 있지. 정신 나간소리 아닌가?" "아니, 전혀 아니야." 디 로시가 대답했다. -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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