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들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3
치고지에 오비오마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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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고지에 오비오마의 첫 장편소설 <어부들>은 이번에 내가 처음 읽어보게 된 나이지리아 이보족 출신 작가의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요 인물이 이보족 가정의 형제들이기 때문에 간략하게 역사를 덧붙이자면, 식민 지배라는 역사를 빼놓을 수 없는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역시 대영 제국이 식민화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 국경선을 마음대로 그어버려 같은 부족이 여러 나라로 갈리고 다른 부족이 한 나라에 섞여버렸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1967년에 나이지리아의 종족 중 ‘이보족’들이 비아프라 공화국을 건국하고 분리 독립을 선언했는데, 영국 식민 통치에 협조하고 영국으로부터 지원받았던 이보족의 역사로 인해 독립 후 나이지리아에서는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아픔의 무게가 실린 시계추는 멈추지 않고 세월은 흘러갔다. 그렇게 흘러간 세월만큼 잊을 수 없을것만 같았던 것들도 점차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히고 있을테지만 그럼에도 지울 수 없는 기억과 상처를 안은 채 사람들은 오늘의 평화를 바라며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리라.

1996년 1월, 나이지리아 아쿠레 마을에 사는 중산층 이보족 가족의 하루도 분명 그러했다. 아버지가 자식 욕심이 많아 열다섯 살인 장남 이켄나와 보자, 오벰베, 벤저민(화자), 데이비드, 그리고 여동생 은켐까지 총 5남 1녀를 두었다. 너무 어려 어머니의 손길에서 떨어질 수 없는 데이비드와 은켐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 넷이 이 소설의 핵심 인물로 등장하는데, 한참 밖에서 놀기를 좋아할 나이다 보니 우르르 몰려다니며 축구공을 뻥뻥 차서 남의 집 창문을 깨부수기도 하고, 한바탕 꿈에 부풀어 희망 찬 미래를 상상하면서도 지나간 일은 굳이 담아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개구쟁이들답게 방문 밖에서 들리는 부모님의 높아진 목소리에 귀가 쫑긋해져 동태를 살피며 자기들끼리 추리를 펼치는 등 천진난만한 일상을 보낸다.

역사적 원한과 갈등이 있는 이보족과 요루바족이 같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지만, 이 가족이 사는 마을에서는 요루바족인 선생님이 이보족 학생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등 일상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정도만 종종 나온다. 어찌 보면 주어진 환경과 생계가 어려운 아이들과 달리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제대로 경험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뛰쳐나와 집에 들어가기 전 막다른 골목을 향해 계속해서 걷는 이 아이들의 발걸음을 따라가면 북부인들이 거주하는 곳에 다다르게 되고, 대부분 기독교인인 남부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무슬림이 거주하는 곳임을 알 수밖에 없도록 깔개에 무릎을 깔고 앉아 허리를 숙여 기도를 하는 모습, 그리고 장터 전체가 구더기 떼처럼 모여든 사람들로 부글거리는 모습까지…. 이처럼 지역마다 인종, 언어, 문화, 종교, 경제적 차이 등을 실감하게 하는 문장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나이지리아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조만간 오랜 시간 내 책장에서 잠들어 계시는 같은 이보족 출신의 작가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도 살살 깨워 드려야겠다.

얌전히 집에서 독서를 하는 모습을 보이면 부모님이 무척이나 좋아하시겠지만 슬슬 또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 형제들이 친구 몇 명과 함께 ‘오미알라’ 강에 낚시하는 것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다. 참고로 이 강이 어떤 곳이냐 하면, 이제는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경멸을 당하게 된 통행 금지령이 내려진 곳이다. 원래는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유럽에서 식민주의자들이 찾아와 성경을 소개했을 때부터 점차 아쿠레 마을 주민들에게 버려지게 되었다는 이곳에서 아이들은 보상도 없이 고생만 하고, 이곳저곳 다치면서도 부모님 몰래 하는 짓이 대체로 스릴 있고 재미있듯이 그저 물고기 잡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즐거워했다.

평범했던 일상이 지나가고 한순간에 상황이 바뀌어 나이지리아 중앙은행에 다녔던 아버지가 북쪽 마을로 전근을 가게 되어 장터에서 신선식품 가게를 운영하는 어머니가 졸지에 혼자 아이들을 돌보게 된다. 더욱이 아버지가 계신 ‘욜라’라는 곳에 1996년 3월 유혈 분파주의 폭동이 터져 집에 자주 올 수 없게 되는데, 여기서 잠깐 부모님 소개를 간단히 해보자면, 이보족의 전통과 변화 앞에 균형 있게 가정을 유지하기보다는 서구 문화에 치우치는 아버지는 ‘서구적 교육’에 열성이면서도 이보족의 전통인 가부장 제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잘못할 경우 채찍질을 하는 아버지와 달리 미신적 행동을 하면서도 남편의 말에 의존하는 어머니의 힘 잃은 모습이 펼쳐진다. 사랑하는 어린 자식들을 불완전한 사회 속에서 지키려는 부모의 표현이 현대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분명 안정감을 느끼기 어렵게 보이고 우려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게 될 때가 있긴 하지만, 이들의 문화와 분위기를 인식하고 바라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번개가 번쩍이며 우르르쾅 천둥소리 뒤에 금방이라도 무섭게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불안감에 집 밖을 소심하게 내다보듯 서서히 질서가 무너지고 균열을 보이는 상황은 아직 사회의 복합성과는 거리가 먼 아이들의 경직된 감정을 느끼게 했고, 각 등장인물의 상황 안에 예전 식민주의가 아프리카 대륙을 잠식했을 때 겪었을 아픈 역사와 문화 충돌,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불안을 떠올리게 할 만한 문장까지 적절히 녹여 더욱 안타까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도록 만들었다.

“가고 말고는 너희 마음이지만, 그런 식으로 다시 목소리를 높이지는 말거라. 알겠느냐?” (p. 34)

우리 모두 꺼리는 점이 있었다. 보자는 오미알라강이 작고 그 안에는 ‘쓸모없는’ 물고기밖에 없다는 점을 싫어했다. 오벰베에게는 물 밑, 강 속에는 빛이 없는 만큼 밤에 물고기들이 뭘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는 밤이면 강은 이불처럼 덮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물고기들이 대체 어떻게 ―전기도, 등불도 없는데―돌아다니는지 자주 궁금해했다. 그리고 나는 방어와 올챙이의 나약함이 매우 싫었다. 강물에 담아두는데도 얼마나 쉽게 죽는지! 이런 약점에 나는 가끔 울고 싶었다. (p. 81)

어느 날 아이들은 강에서 모두가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는 ‘아불루’를 만나게 되는데, 이들의 만남은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이 떠올려지기도 했다. 주인공 살림의 외할아버지가 카슈미르 골짜기의 지박령 같은 존재인 늙은 뱃사공 ‘타이’를 만났을 때처럼,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마치 꿈속에서 벌어진 일 같기도 한 상황이라든지, 기괴함이 느껴지는 아불루에 대한 묘사 등이 그러했다. 극히 일부분에 대한 비교일 뿐이지만, 살만 루슈디의 작품에서는 ‘아니, 어딜 맨입으로 단박에 알려고 들어?!’라는 듯 너스레 속에 잔혹한 인도의 역사적 진실을 녹여 기발함에 놀라면서도 익살스러움 뒤에 숨겨진 애환을 헤아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신적 교감을 오고 가게 했다면, 치고지에 오비오마의 <어부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형들을 통해 대부분의 사물을 이해하며 자라온 동생이 어디서도 본 적이 없고 들어본 적 없는 처음 겪는 기묘한 상황을 아직은 동심을 가진 아이의 시선으로 표현해 준 느낌이었다.

그 남자는 우리 눈앞에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다. 걸친 것이라고는 어깨에서 허리까지 느슨하게 걸려 있는 넝마 한 조각이 전부였다. 사타구니는 빽빽한 털로 덮여 있었고, 그 한가운데 혈관이 두드러진 성기가 허리띠처럼 흐늘거리며 늘어져 있었다. 그의 두 다리는 팽팽한 정맥들로 터질 듯 했다. 그는 귀청을 찢을 듯한 시끄러운 고함을 내지르며 망고를 아주 높이 내던졌다. 기세만 봐서는 망고가 30킬로미터쯤 떨어진 마을 중심부에라도 떨어질 것 만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발밑이 쑥 꺼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p. 135)

기괴함으로 오싹하게 만드는 아불루가 이켄나를 부르기 시작한다. 평범한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그의 부름에 두려움에 찬 친구들은 하나둘 떠나고 형제들만 남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켄나를 부르는 아불루가 “너는 붉은 강에서 헤엄칠 것이나 다시는 그 강물에서 떠오르지 못할 것이다.”라며 영 사람을 찜찜하게 만드는 재수 없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침이나 ‘퉤’ 뱉어버리고 탁 털어내면 좋을 이 말 한마디를 예언처럼 받아들인 이켄나는 완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가웠던 모습을 잃어가고 형제 간의 사이도 점점 틀어지게 된다. 그런 이켄나를 놓쳐버린 연의 끈을 바라보듯 했을 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애 좋던 시절이 눈앞에서 필름처럼 지나가는 것을 허망하게 느끼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길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을까 싶어 내 콧등도 조금 시큰해져왔다.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인 아프리카 출신의 작가라는 이미지가 심어준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 간의 갈등이나 정체성 혼란, 사회적 및 문화적 영향 등을 중심으로 줄거리가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1986년생이라 나이지리아 독립(1960년) 이후의 내전, 쿠데타 등을 직접적으로 겪은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 사회 문제에서 조금은 빗겨나갈 수 있지 않았겠는가. 물론, 대규모 반정부 폭동이 일어났던 1993년에 형들의 손에 이끌려 다녔던 겁먹은 동생의 불안과 공포를 다루고는 있다. 어쩌면 저자가 직접 눈으로 봤을지 모를 그때의 공포스러운 광경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심정을 그대로 담고 싶어서 이 소설의 화자를 형제 중에서 당시 자신의 나이와 비슷한 벤자민으로 정한 걸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어려운 나이지리아의 현재까지 이어지는 내전, 부정부패,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가 가속화시키는 남북전쟁 등으로 무고한 시민이 희생당하고 빈부 격차가 나날이 벌어지는, 그야말로 반 토막으로 썰린 세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지나간 역사를 알아챌 수 있도록 곳곳에 담았다. 비중이 크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위기를 맞닥뜨리게 된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감정 변화를 담은 서사에 나이지리아 속담, 전통 등을 접목하여 그들의 문화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특히, 동물에 관해서 많이 접하게 되었는데 평소에 좋지 않은 징조로 느껴졌던 ‘거미’가 이보족에게는 슬픔의 동물이라는 것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슬퍼하는 사람들의 집에 둥지를 틀고, 점점 더 많은 그물을 소리 없이, 마음 아프게 짠다고 믿었다는…. 이 말에 왠지 앞으로 집에서 거미를 발견하게 되면, 예전과 달리 ‘이 녀석이 내 슬픔을 알고 찾아왔나?’라는 생각에 조금은 덜 무섭고 덜 징그럽게 들여다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보면 나란 사람은 말 한마디에 참 현혹되기 쉬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심리 변화가 오히려 인간이든 사물이든 동물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바라보기 나름이고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생각, 존재의 다면성을 떠올리게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낯선 곳에 덩그러니 놓여진 것만 같은 십대의 연약한 소년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까지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의미다. 그런 내가 가장 흥미롭게 들여다본 것은 연약함과 강함이 공존하는 인간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과 미래에 그려지는 불행 중 어느 것이 더 구체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드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점이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에만 멈추도록 저자는 한정된 곳에 독자를 가두지 않는다. 그래서 꽤 생각할 게 많은 소설이었다. 이것은 치고지에 오비오마가 독자와 마주하게 한 단순한 아이의 시선이 던지는 불완전하고 연약한 메시지가 오히려 깊은 사유를 끌어내는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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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 아우슈비츠와 그 이후
샤를로트 델보 지음, 류재화 옮김 / 가망서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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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

프랑스 극작가 ‘샤를로트 델보’는 나치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비시 정권 하에서 반독 저항 운동을 하다가 1942년에 남편과 함께 체포되어 1943년에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고, 1944년 초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로 이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45년 4월에 석방된다. 유명한 연극배우이자 감독인 ‘루이 주베’의 비서였고, 극단의 순회공연으로 남미에 체류하고 있었으나 비시 정권이 레지스탕스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문화예술계 친구들이 고초를 겪자, 주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파리로 돌아올 만큼 연대와 희생, 그리고 사랑의 가치를 알았던 그녀다. 이 책은 델보의 27개월간의 수용소 생활과 살아 돌아온 경험, 그리고 살아남은 동료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해야 했던, 아니, 해야만 했던 델보의 표현 방법은 때로는 시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총 3부로 되어 있는데, 마지막 3부는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또 다른 여성들의 말을 담고 있다.


책 가장자리를 독서대 고정핀으로 고정하니 종이가 매끈해서인지 고정핀이 톡톡 튕겨 나갔다. 확 펼치면 속지가 뜯어질 것만 같아 약간의 불만을 느끼며 읽기 시작했다. 그래도 입안에서 살살 굴려 가며 녹여 먹는 사탕은 맛있었다. 이 달콤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입안에 침과 이따금 목을 축일 만큼의 커피도 충분했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했던 날도 있었고, 이대로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내 굶지는 않았다. 극심한 갈증에 더 이상 입안에서 침이 돌지 않아 미각을 잃었던 적조차 없다. 맛집에 늘어선 줄에서 대기를 하고 있어도 어르신과 아이들을 대동한 가족에게 자리 양보하는 것쯤이야 전혀 문제도 아니고, 추운 날씨에 든든하게 챙겨입었기 때문에 햇빛이 들어오는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누군가를 떠밀어서라도 차지하고픈 욕심 또한 없다. 볼일을 다 보고 나면 집으로 가면 된다. 집은 그런 곳이다. 집이라는 게 무엇인지 잊을 수가 없는 당연한 보금자리.

그런 내가 애당초 이 책을 읽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도 알 수가 없다. 살아 돌아온 여성들이 나와 같은 사람들을 향해 말한다. 자신들의 경험은 쓸모없는 지식일 뿐이라고. 그렇지만 그들은 말해야만 했다. 자신들의 귀환과 돌아오지 못한 여성들의 죽음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러니 말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아침을 알리는 채찍 소리와 함께 저항 의지조차 잃은 여성들이 추위 속에 내던져졌고, 바닥을 평평하게 하려고 진흙을 떠 밖으로 던져야 했다. 다 같이 작업을 하던 중 카포 여자가 들이닥쳐 고함을 치고 동료들을 데려가 혼자 일하게 된 ‘나’는 홀로 남겨졌다는 절망에 두려움만 느꼈다. 혼자 있으니, 귀환을 믿을 수가 없다. 도랑에 홀로 남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불안에 떨고 있는데, 다른 작업장으로 옮겨진다. 팔 힘이 다 빠져 고통스럽고 아파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가 없다.

“오늘은 할 수가 없어.”

‘륄리’라는 여성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심히 다가와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너 안 보이게 내 뒤로 와. 이젠 울어도 돼.”

이 말이 필요했던 거다. 겁먹지 말라며 마른 나무줄기 같은 손으로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연약한 손목을 잡아주며 저마다 서로를 진정시키고 안심시키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금 더 기운이 남아 있는 사람이 더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말이다. 필요에 의한, 목적이 있는 친절과 배려가 아니라 같이 살아남기 위해서. 화장터 굴뚝에서 밤낮으로 사람들이 타죽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연기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수용소 생활을 담은 1, 2부를 읽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서로를 이끌어주는 동지애였다. 아무도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도 서로 불안과 고통을 덜어주려 했다. 안심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수용소와 관련한 책 중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었을 때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목표’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준 것이 가장 크게 와닿았었는데, 이 여성들에게서도 마찬가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침부터 처음으로 수프나 잡일, 빵에 대한 걱정을 잊게 한 순간이 이들에게 존재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들만의 연극 <상상병 환자>를 성공적으로 올리는 것. 이 목표가 그들을 잠깐 또 버티게 해준 것이다. 자신의 뜻에 따라 무언가를 한다는 그 사실이 의지가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었던 순간이 돼 주었던 걸까?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굉장한 힘이 아닐 수 없다. 아우슈비츠에서 말이다.

허영기 없는 배우들의 기적. 문득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되찾고, 상상을 되살리는 관객의 기적. 놀라웠다. 왜냐하면 그 두 시간 동안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인육의 연기가 그치지 않는 와중에도 우린 우리가 연기하는 세계를 더 믿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당시 우리가 유일하게 믿었던 자유, 이를 위해 앞으로 500일을 더 투쟁해야 했던 바로 그 자유를 향한 믿음보다 강했다. (p. 254)

구원을 믿을 수도, 바랄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서로 기대고 부축하면서 힘을 비축해 끝까지 살아남으려 했다. 어떻게 친절과 연민을 간직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알 수가 없다. 수용소에서 돌아온 그녀가 호텔방에서 침대에 일어나 방문을 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식당으로 내려가 접시를 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모두가 서로 아는 사람인 듯 수다 떨며 웃음으로 가득 찬 그 공간 안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괴로운 일이며, 내 앞에 놓인 빵을 먹고 맛을 음미하기보다 얼른 다시 호텔방으로 올라가 혼자 울어버리고 싶다는 것을. 그러나 도저히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방이 몇 호실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혼자서는 찾아서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나의 성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 아버지의 이름을 묻는 말에 머뭇거리는 것을 말이다. 모두가 지나간 일은 잊고 살아가 주길 바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무엇인지를. 그토록 원하던 귀환이 이토록 괴로울 수가 없는 그 무너지는 마음을 나는 알지 못한다.

행복이라는 것, 그건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일까? (p. 364)


델보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의지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고통과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위로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 아니다. 고민이라는 표현은 너무 가볍다. 그저 애도의 시간에 붙들려 똑같이 죽어 있는 사람으로 머물러 있듯이, 살다 보면 무어라고 할 수 없는 그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 책에 추천의 글을 적어주신 목정원 작가님은 “타인의 몸에서 발생하는 허기를 권태를 절망을 간절히 바라봄으로써 함께 겪어 내 몸처럼 이해하는 일. 간절히 읽는다면 우리도 알게 될 테니”라며 서로를 격려하는 말을 담아주셨다. 때론 응시하며 연민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상대에게는 거북스럽고 오히려 상처를 입히는 행위가 되어버릴까 봐 어떤 식으로 위로의 마음을 전해야 하느냐는 생각에 머물러만 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읽었던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에서 와닿았던 말을 적어본다.

그토록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자신의 걱정을 이해하는, 아니, 적어도 이해해 주려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당신이 이해해 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초조한 마음>, p.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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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1-09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와 같은 증언 문학이군요. 프리모 레비는 인간임을 잊지 않기 위해 매일 이를 닦고, 단테의 신곡을 외우고, 프랑스인 동료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하더군요. 증언하기 위해 삶을 이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숙연해집니다.

곰돌이 2025-11-09 11:48   좋아요 0 | URL
수용소 안에서도 사람의 ‘선’을 느끼게 했던 인물의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말했던 프리모 레비의 말이 떠올려집니다. 서로가 버틸 힘을 주고받는 그 자체가 경이롭게 느껴져서인지 이따금 수용소와 관련된 책은 의도적으로 읽게 되는 것 같아요.

yamoo 2025-11-10 1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모두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본 작가들입니다..ㅎㅎ
프리모 레비는 작가 서경식이 가장 애정하는 작가인듯하네욤...^^;;

곰돌이 2025-11-10 13:46   좋아요 0 | URL
그 애정 안에 동질감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yamoo님께서 <디아스포라 기행> 리뷰를 올려주신 게 기억납니다.
 
인생 수정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1
조너선 프랜즌 지음, 김시현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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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의미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윙윙대며 떠나지 않게 만드는 한 가족의 일상과 선택이 펼쳐진다. 저자 조너선 프랜즌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헤아려주지 못하고 살아온 이 가족 개개인의 마음을 ‘제대로’ 들어주고, 헤아려주고픈 생각인지 정말 집요하고 끈질기게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과 내면을 파고들며 글을 써 내려갔다. 누군가 내 삶에 대해 이토록 꿰뚫어 글을 써내려간다면? 이라는 상상만으로도 조금 무섭게 느껴질 정도다. 견딜 수 없는 마음, 도무지 어쩌지 못하겠는 그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서인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에너지가 점점 소진되어 가는 것을 느끼기도 했고, 가족에게조차, 아니 가족이기에 나 자신을 숨기고 완벽하면서도 꽤 괜찮은 자식인 척했던 순간에서 여전히 떳떳할 수 없기에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진실을 명확하게 볼 수 없었음에도 안다고 생각하며 행동했던 과거의 죄책감까지 밀려와서일 것이다.


“목조 창틀을 댄 유리문으로 비치는 빛은 잿빛일지언정 대초원의 낙관주의를 품고 있었다. 천 킬로미터 이내에는 대기를 교란할 바다가 없었다.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은 오래된 오크 나무의 자세는 돌발적이고, 야생적이고, 도도하여 영원을 내다보는 듯했다. 울타리 없는 세상에 대한 기억이 이들 가지에 필기체로 적혀 있었다”

노년을 즐기는 은퇴자들로 갑판마다 활기가 넘치는 럭셔리 크루즈를 타고 있는 남편 ‘앨프리드’와 아내 ‘이니드’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자신들이 사는 곳이자 고향인 미국 중서부에 있는 세인트주드에서 자식들과 다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안락하고 편안한 인생을 누리고 사는 가족으로 여겨지지만,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극복해야 할 속사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 고단해 보이는 어깨에 두 손을 살포시 얹어 사람의 온기만 건네도 마음이 사르르 녹아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이니드와, 파킨슨병에 걸려 점점 더 인격이 황폐해져 가고 늘 상상도 못한 완전히 새롭고 낯선 실존 속에 내던져지는 삶의 연속인 앨프리드.

겉보기에는 서부의 온화한 날씨를 닮은 듯한 이니드는 동부 도시 출신의 남성과 누가 봐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우아한 결혼식과 피로연을 열어주길 기대했던 필라델피아의 잘나가는 레스토랑에서 셰프로 활약하고 있는 막내딸 ‘데니즈’가 몬트리올 출신의 키 작은 중년 유대인 셰프와 법원에서 결혼했다는 소식을 알렸을 때, 처음으로 위에 탈이 났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녀가 딸의 이혼 소식을 들었을 때의 심정은 말해 무엇할까.

부익부 빈익빈의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둘째 아들 ‘칩’은 종신 교수직을 박탈당한 뒤, 개당 3달러 89센트였던 아보카도 다섯 개를 집어 들고는 이내 다시 내려놓고 결정을 내릴 수가 없는 악몽 속에서 지내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안에 가격이 붙은 물건들은 유행을 내세우며 “지금은 쇼핑하러 갈 때야!!!”라고 외치도록 사람들의 소비 욕구를 자극하고, 이런 허영심과 욕망이 들끓는 세상 속에서 여동생 데니즈에게 빌린 돈으로 불안감을 잠시 숨겨줄 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술을 마시고 여자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건강과 활기를 원하는 순간에 머물러 있는 할말하않 칩의 일상과 선택을 들여다보는 것을 시작으로 내 눈도 서서히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돈과, 돈 없는 삶의 치욕이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과 핸드폰과 양키 캡 모자와 SUV는 하나같이 고문이었다. 그가 탐을 내거나 시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돈 없는 그는 제대로 된 사람이라 할 수 없었다. (p. 158)

사방에서 새로이 탄생한 백만장자들 수백만 명이 특별함을 누리겠다는 동일한 목표에 매진했다. 빅토리아시대의 완벽한 제품을 구입하고, 그 누구의 흔적도 없는 비탈에서 스키를 타고, 유명 셰프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고, 발자국 하나 없는 해변을 즐겼다. 게다가 돈은 없으면서도 완벽한 쿨함을 추구하는 젊은 미국인들이 수천만명이나 되었다. (p. 289)

취미생활 목적으로 650달러짜리, 그것도 겨우 650달러라면서 카메라와 장비를 사달라며 조르고 있는 아들을 포함해 세 아이 아빠이자 은행 중역인 원칙주의자 장남 ‘개리’는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은 필요 없을 만큼 경제적 빈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다. 중서부를 벗어나 쿨함을 장착하고, 이상적으로 균형 잡힌 가족의 모습을 만들고 유지하려 애쓰는 그의 삶은 어떨까? 대다수 서민의 시선에서는 넘치는 과잉으로 쾌감을 상실한 자가 한가하게 정신적 고민과 사투를 벌인다고 냉소할지 모르겠지만, 그는 점점 갈수록 과민과 불안으로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상태에 놓여 있다. 어린 시절 부모의 불운한 결혼 생활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인생을 읽었을 개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온전한 형태로 주고받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얻게 된 해결되지 못하고 묵힌 감정들로 홀로 사투라도 벌이는 중인 걸까...

이 가족에게 지금 필요한 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잡지에서 할인 쿠폰을 오리는 엄마 이니드의 모습과 식료품점에서 감초와 함께 고른 ‘행운의 요정’ 인형을 산 둘째 아들 칩의 모습에서 지금 이 가족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들은 단순히 재미와 당첨의 의미 이상의 삶의 위로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욕심이 자기 비하로 연결되는 모습과 함께 미래의 불안함을 잠재워줄 만한 요인이 어느 하나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버리지 못하는 희망을 품는 두 사람의 모습과 더불어 이 가족의 현 상황이 안타까웠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규정해서는 안 되며,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과 처한 상황이 다르기에 받아들이는 것 또한 차이가 있을 테지만 내 시선에는 그렇게 보였다. 부모와 자식 간의 문화도 다르고 소통 방식도 다른 것은 이 집만의 일이 아닌, 보통 가정의 모습일 거란 생각에 더 이입되어서인지 뭔가 계속 가슴이 저릿하게 만들었다. 특히, 서로에게 감정이 소진된 사람처럼 온기를 잃은 첫째 아들 개리와 아빠 앨프리드가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는 더 이상 열리지 않을 것만 같은 좁은 공간 안에 질식할 듯한 무거운 공기만 꽉 채울 뿐, 밖으로 한 발짝 내딛는 것이 이토록 어려울 수가 없었다.


“아빠는 삶에 만족하나요? 더없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개리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물었다.
“개리, 나는 고통받고 있어......”
“많은 사람이 고통받죠. 그게 이유라면 좋아요. 그래서 스스로를 안쓰러워하고 싶다면 그것도 좋아요. 하지만 왜 엄마까지 끌어들이죠?”

“삶에는 그저 견뎌야만 하는 것이 있어.”
“그런 생각이라면 굳이 왜 사나요? 대체 뭘 기다리는 거예요?”
“나도 매일 그 질문을 한단다.”
“그럼 답은 뭔데요?”
“네 대답은 뭐냐? 너는 내가 뭘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부자의 표정이 읽힌다. 지난 과거를 부정적으로만 해석하며 앨프리드와 정반대의 삶을 살겠다는 의식적인 결단을 내리고 지내온 듯한 개리는 자신이 아버지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 있지도 않은 에너지를 억지로 쥐어짜면서까지 맞춰 가며 이룬 안정된 가정을 보란 듯이 보여주고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개인적인 감상으로 자기 확신을 얻기 위한 개리의 몸부림과 대비되는 앨프리드의 담담하고 절제된 감정에서 독자가 스스로 공허함과 먹먹함을 느끼도록 표현한 부분이 이 소설의 압권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많이 참아주고 인내하며 살아왔을 테지만, 여전히 듣고 싶은 얘기에만 귀 기울이고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는 이 가족은 인내심을 가지고 조절을 해 봐도, 밥 한 끼 먹기조차 어려워 보였다. 이제는 억지로 맞추려 할 것도 없이 암묵적 합의를 통해 그들이 지내온 모습 그대로 시간을 흘려보낸다. 각자의 생각과 감정들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허탈한 관계 속에서도 낙관적인 희망을 발견하게 된 나는 이들 가족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면 아무런 노력조차 하지 않을 텐데, 이들은 분명 각자의 방식으로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부인하고 밀어내 보지만, 가슴 속에서 펄펄 끓고 있는 절실함과 간절함이 있기에 아프고 상처받는 것이 아닐까?

흘려보낸 것들 속에는 분명 다가가기 위한 노력과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끌어올린 용기, 그리고 역시나 변하지 않음을 구태여 눈으로 확인한 뒤 얻은 허탈한 마음까지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삶 속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나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헤매면서 쾌락과 자극을 좇기도 하고, 물질 지향적 삶에서 나름 충족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지내기도 한다. 그러나 삶의 가치는 내면을 단단하게 다지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모두 다 안다. 알지만 흔들리고 죄책감을 느끼며 혼란을 겪는 사람들의 숨이 막힐 듯한 심경을 온전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저자는 한 가족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 다층적인 의미로 해석해 볼 만한 이야기를 소리 내어 숨 쉬는 것조차 잠시 잊은 채 집요하게 파고들 듯 극도로 집중하며 보게 만든다. 눈이 몹시 뻐근했다. 그러나 이 부분이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내가 느낀 쾌감의 요인 중 하나였다고 말하고 싶다.

연약하면서도 역겹기도 한 극심한 내면의 고통과 비참함을 느끼면서도, 인간은 결국 한 발자국 스스로 내딛게 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온전히 나로 살 수 없다는 서글픔을 뒤로 하고 나를 살리기 위한 삶의 내디딤의 시작일지라도 말이다. 참아야 하고 견뎌야 하는 것이 많았던 과정에서 자신이 받은 상처를 위안 삼아 이기적이었던 타이밍의 내가 취한 행동으로 사로잡히게 된 죄책감을 덜어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또다시 우리는 서로에게 손을 건네지 않는가? 온전한 형태는 아니더라도 나는 이 모습도 사랑의 또 다른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으로부터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새로운 삶의 기류와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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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짧은 낮 거장의 클래식 3
츠쯔졘 지음, 김태성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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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조부모님이 시골에서 과수원을 하셔서 중학교 여름 방학 때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낯선 풍경과 내 집 같지 않은 잠자리, 그리고 생소한 벌레들 속에서 즐거움에만 들떠서 왁자지껄 나눴던 대화는 이제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1박 2일 외박이라는 사실 자체에 잔뜩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 오디오가 비어 있을 틈이 없던 중딩 넷이서 말 한마디 없이 조용했던 순간만큼은 또렷하다. 그건 셀 수도 없이 많은 별이 떠 있는 밤하늘을 올려다봤을 때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많은 별을 봤던 꿈 같으면서도 생생한 그 순간이 중국 북방 서민의 삶을 담은 츠쯔젠의 <가장 짧은 낮>을 읽는 동안 자연스레 떠올려졌다.

1년에 딱 하루 목욕을 하는 섣달 스무이렛날, 가족들을 위해 목욕물을 데우고 오수를 버리러 강가로 가는 수고를 해야만 했던 「깨끗한 물」에 등장하는 소년 ‘톈두’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톱니바퀴 같은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부터 황혼의 끄트머리에서 두려움 없이 힘이 넘쳤던 시절을 그려보는 노인의 서글픈 정경까지... 이 책에 담긴 열여섯 편의 단편은 역사적 운명과 사람 간의 인연으로 얽혀 눈이 녹지 않은 길을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걸어가듯 놀란 가슴으로 늘 안심할 수 없는 불안감을 가진 채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부터 특별한 사건 없이 그저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까지 잔잔하게 흐른다.

얼음이 녹으면서 진흙탕으로 변한 마을 길에 너도나도 주르륵 미끄러져 집마다 엄마들은 늘어난 빨랫감과 함께 닳아가는 비누가 여간 아까운 게 아니고, 오늘은 좀 다르려나 했지만 영락없이 미끄러져 바지와 책가방에 잔뜩 진흙이 묻은 바람에 또 한 소리 들을까 봐 들어오지도 못하는 아이들과 눈치만 보는 남편의 모습.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의 형편과 사정이 달라 제각기 나름의 골치를 앓아가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밤이면 하늘에 별이 가득하니 아름답기만 하고, 언제나 눈이 다 녹을까 하소연하지만 금세 또 계절이 지나 서서히 따스한 바람도 불어오고 밭일을 위해 농기구 손질을 할 때가 돌아온다. 그 와중에 내 식구끼리도 뜻이 달라 서로 미워하고 의심하고 토라지기도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위로하고 감싼다. 그러니 고단한 삶도 살아지는가 보다.

아무것도 위로가 안 돼서 콧물 한 번 훌쩍이며 밖으로 나가면, 밤하늘에 떠 있는 별과 맑고 차가운 달빛이 토라진 마음을 슬쩍 녹여주는 마법을 부려준다. 눈앞에 그려지는 자연과 사람들의 입김, 그리고 아이들이 듣기 남사스러운 이야기를 껄껄거리며 주고받는 어른들의 대화를 비롯해 숨기지 못하고 저절로 툭 튀어나오는 본심을 실감 나게 표현해서인지 읽는 맛이 좋았다. 사소한 말도 더 재미있게, 그것도 본인은 웃지도 않고 시치미 떼듯 담백하게 들려주니 피식피식 웃어댈 일이 종종 생겨났다.

아빠는 얼굴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데다 코에는 연륜이 다른 푸른콧물 두 가닥이 얼어붙어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얼굴이 문드러진 것 같았다. (「깨끗한 물」, p. 25)

순박하지만, 눈치 없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매서운 눈빛에도 불구하고 목욕통을 고쳐 달라는 이웃집 과부의 부탁으로 나갔다가 그 집에 화장(火墻)이 제 역할을 못 하는 게 마음에 걸려 연통 안에 남은 재까지 파내주느라 재 범벅을 하고 돌아온 모습을 담은 문장인데, 날이 얼마나 추웠는지 모를 수가 없다. 그보다 연륜이 다른 콧물이라니?! 앜ㅋㅋㅋㅋㅋ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쑤저광’의 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 얼음이 녹아 진흙탕으로 변한 마을 길에 미끄러지기 일쑤라 낡은 옷과 신발을 신고 다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일하게 깔끔하고 멋지게 구두를 신고 중산복을 차려입고 다니는 쑤저광을 보며 마을 사람들은 따박따박 월급을 받아 살아가니 자기네들처럼 수확 걱정은 없을 거라 이기죽거리지만, 그에게도 남모를 속사정은 있다. 문화대혁명 시절에 학교에 공선대가 쳐들어와 축목장으로 하방 되어 작업복을 입고 돼지를 키웠던 그가 복권되어 다시 원래의 직위로 돌아왔건만, 급작스러운 출장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침울한 마음으로 사무실에서 물건들을 하나둘 정리하다 평소 몰래 쓴 시가 적힌 종이들을 뒤적거려 본다.

스스로 심사 위원이 되어 살아남아야 할 시와 총살당해야 할 시들을 판결했다. 그의 심사를 받아 살아남은 시는 다섯 수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판결한 시들을 팔이 잘린 비너스 상처럼 수기로 쓴 『납란사(納蘭詞)』 한 권과 함께 신문지로 싸서 복도에 있는 화로 속에 넣어버렸다. 파박-하는 소리와 함께 화로가 잠시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불길이 그의 재물들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한숨을 내쉬고 화로 곁을 떠난 쑤저광은 사무실로 돌아와 마른 나무처럼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해빙」, p. 75)

소자산계급 정서가 느껴지는 시와 함께 아궁이처럼 활활 타오르는 열정과 욕망이 조금이라도 내비치는 시는 퇴폐적이라 태우고, 이건 이래서 태우고 저건 저래서 태우고 나니 남은 건 찬바람 도는 처량함뿐이다.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그 시절을 견디는 쑤저광을 포함해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억울해하거나 분노하고 시대를 비꼰다는 느낌은 크게 받지 못했다. 국가 시책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오늘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농촌 마을 사람들, 그리고 각자 처한 상황에서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손과 말은 거칠어도 서로의 형편을 헤아리고 힘을 보태는 모습에 더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옛 우리 어른들의 삶을 들추어보듯 말이다. 애간장만 죽도록 녹이면서 아슬아슬하게 긴장하고 있다가 막상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한시름 놓고 이내 술 한 잔 마실 생각을 한다든지, 이웃에게 받은 배려에 당장은 고마운 마음이 커서 담배 한 보루라도 사서 갖다주려고 나왔다가 이내 본전 생각이 나서 도로 집으로 쓱 들어가 버리기도 하는 그런 서민의 삶 말이다.

동물과 교감하며 서로 측은지심을 갖는 이의 모습에 마음의 기름때가 벗겨지는 듯한 동화 같은 이야기부터 삶의 애환에 인간의 본성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글까지, 내 정서와 잘 맞았던 것 같다. 그리운 시절과 잊지 못할 사람에 대한 기억이 더욱 마음 한편을 시리게 하는 계절이 와서인지 빈 공간이 유독 선명해진 탓에 생긴 허전함을, 열여섯 편의 단편을 애달파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는 동안 마음 온도가 높아져 시린 한구석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었다. (훌쩍) 인위적이지 않은 순수한 모습을 한 사람들의 삶을 보면 독한 기운이 빠지는 듯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르며, 자칫 지나쳐도 감성에만 치우칠 수 있다. 그런데 손으로 휘저으며 목욕통 속 물 온도를 마침맞도록 조절한 듯한 이야기가 골고루 담겨 있어서인지,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나에게는 딱 맞는 따뜻한 물에 몸을 푸~욱 담가 본 느낌이었다.

어둠에서는 손전등을 켜야 주변을 살필 수 있듯이, 여유롭고 화려함에 가려져 있던 사람들의 모습을 비춘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타인의 삶을 헤아려보는 그녀의 넉넉한 마음이 읽히면서도 내 옷깃을 한 번 더 여미고 추스르느라 소홀했던 것들이 떠올라서인지 쌓아둔다고 소용은 없는데도 후회와 죄책감을 탁 털어낼 수는 없었다. 나는 아직 때가 아님을 느낀다. 그래도 누구나 그렇게 살아간다는 듯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이야기 덕분인지 잊지 못할 멋진 광경과 아름다운 추억을 다시 떠올려보는 활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신중하게 맥을 짚듯 무게를 실어 전하는 격언이 담긴 이야기 뒤로 펼쳐지는 계절의 변화를 담은 풍경과 함께 여러 사람의 모습을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비춰주기에 꽤 많은 분량이지만 꾸역꾸역 읽어내야 할 일은 단연코 없었다. 이제는 기력도 예전만 못하고 시든 풀과 차가운 눈이 시야에 더 들어온다는 츠쯔젠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궁금하긴 해도 분량이 조금 부담스럽다면, 시간 날 때마다 천천히 조금씩 읽어봐도 괜찮을 것 같다. 각 단편에 담긴 긴 여운이 댕강 잘려나가듯 하지 않으니 말이다. 특히, 톈두가 올려다본 밤하늘에 뜬 별은 정말 너무나 아름다웠을 것 같다.

톈두는 머리를 목욕통 위에 얹어놓고 있어 창밖의 깊은 어둠을 바라볼 수 있었고, 밤의 어둠 속에서 오래 꺼지지 않는 별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그 별들이 이미 망망한 어둠을 가로질러 자기 방 창문 안으로 들어온 목욕통 속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연노란 쥐엄나무 꽃처럼 맑은 향기를 내뿜으면서 한 해의 풍진을 다 씻어버리려는 것 같았다. (「깨끗한 물」, p.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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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1-02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 소설 속 배경은 예전 우리네 삶과 유사한 측면이 많아서 옛 추억에 빠져들곤 합니다. 삶의 구체적 방식은 다르지만 그 바닥에 흐르는 삶의 정서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이더군요.

곰돌이 2025-11-02 10:28   좋아요 0 | URL
네, 그런 이유에서인지 계속 손이 가네요. 조금씩 찾아서 읽어보고 있는 중이에요. ㅎㅎ 아직 읽어본 책이 몇 권 안 되지만, 이 책은 혹시라도 중국 소설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분들이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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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년에게 처음 눈길이 멈췄던 것이 어느 날, 어느 때였는지를 나는 지금도 기억할 수 있다”

나의 열여섯 살 때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누구나가 거쳐가는 과정을 예외 없이 거치면서 손발이 오글거리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특히, 그때는 가족보다 친구가 좋았기에 유독 눈길이 가는 친구와 베프가 되었을 때의 기쁨이란 실로 대기권을 뚫고도 남았다. 그리고 왠지 느낌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저 친구랑 베프가 될 것만 같은 근거 없는 믿음이 주는 확신 같은 거.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열여섯 살 소년들이 이런 찰떡같은 예감을 상기시켜줘서 옛 감성에 너무 젖은 것인지, 그때의 순수함을 찾을 수 없는 타성에 젖은 직장인의 모습을 한 내 모습이 되려 이질감이 들고 영 기분이 그저 그렇다. (흐윽)

1932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사는 짤막하고 투박하며 잉크 물이 든 손을 가진 유대인 소년 ‘한스 슈바르츠’는 같은 반에 전학 온, 희고 티끌 한 점 없는 깨끗한 손을 가진 독일 귀족 소년 ‘콘라딘 폰 호엔펠스’에게 호감을 갖는다. 그리고 슈바르츠도 나처럼 찰떡같은 예감이 들기 시작한다. 감히 손을 내밀기도 어렵기만 한 호엔펠스와 친구가 될 것 같은 예감 말이다. 이미 잘생기고 매력적인 전학생 주변을 하이에나처럼 에워싸는 녀석들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결국 그 녀석들을 제치고 호엔펠스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위대한 시인이 되고 싶었던 슈바르츠가 마침내 친구 이상형에 딱 걸맞은 호엔펠스와 친구가 되었다는 이 설렘과 벅찬 기쁨이 어땠을지는 전하려 애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저 온 천지가 봄이었으니 말이다.

친구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소년이었던 슈바르츠에게 호엔펠스는 ‘희망’이었을 것 같고, 새로운 마음으로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꿈꾸며 ‘행복’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던 것이 아닐까? 그의 진심이 묻어나는 글에서 호엔펠스와의 우정이 슈바르츠의 삶에서 얼마나 귀중했는지를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마음가짐을 얻게 할 만큼 빛나고 소중한 우정이라니... 삶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이라 여기며 행복해하는 모습과 함께 이들이 사는 곳의 아름다움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묘사가 이 모든 것을 조금도 훼손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만 가득 차게 만들었다.

나무와 월계수 덤불 사이로 몇 킬로미터씩 뻗어 나간 숲들을, 그리고 절벽이며 성채들, 미루나무들, 포도밭과 오래된 도시들 사이를 유유히 흘러 하이텔베르크와 라인 강을 거쳐 북해로 빠져나가는 네카어 강을 볼 수 있었다. 밤이 내리면 경치는 피렌체의 피에솔레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수천 개의 불빛들, 재스민과 라일략 향기가 실린 따뜻하고 상쾌한 바람, 사방에서 들려오는, 너무 많은 음식으로 졸려 하거나 너무 많은 술로 정열에 취해 만족스러워 하는 시민들의 이야기 소리와 노랫소리와 웃음소리로 마법에 홀린 듯했다. (p. 77)

갖가지 꽃과 나무의 색을 느끼며 사는 인생의 행복이 얼마나 평온하면서도 마음을 부자로 만들어주는지를 알려준다. 저자가 화가로서의 경력을 갖고 있어서인지 자연에 대한 묘사에서 풍경을 스케치하고 색을 입히며, 물감에 없는 색은 두 소년이 보여주는 우정의 반짝임으로 칠하여 완성하듯이 낭만적으로 표현해준다. 그래서인지 평온한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여유를 만끽하는 이 봄이 더 오래 지속되길 바라게 만든다.

얼마 전, 필리아님이 올려주신 <횔덜린의 광기> 리뷰를 감명 깊게 읽었는데, 특히 ‘거주하는 삶’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오래 머물렀다. 그런 이유로 ‘프리드리히 횔덜린’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마침 슈바르츠와 호엔펠스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횔덜린이라고 한다. 그가 정신 착란에 시달리며 36년 동안 은둔하며 지냈던 튀빙겐에 있는 탑을 내려다보며 두 소년이 횔덜린의 시 「반평생」을 낭송하는 장면에서, 어떤 마음을 품고 시를 낭송했을지 상상해보니 왠지 가슴 한 켠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적어본다.


노란 배들이 매달리고
들장미 가득 심긴
땅이 호수에 비치니.
너희 고귀한 백조들은
키스로 물을 마시며
신성하고 냉철한 물 속에
네 머리를 담그누나.

아아, 나는 어디에서 이 겨울에
꽃들을 찾을 수 있을 거나
또 햇빛과 지상의 그림자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거나.
깃발들이 덜컹거리는
바람 속에서 벽들은
말 없이 차갑게 서 있는데.


시를 통해 내가 느낀 감정선이 슈바르츠와 호엔펠스에게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서야 그토록 원하던 친구와 우정을 쌓기 시작하면서 느끼는 행복감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싶었던 유대인 소년 슈바르츠가 이상과 현실을 고뇌하는 마음, 그리고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할 만한 환경에서 살아온 귀족 소년 호엔펠스가 맞닥뜨리게 될 현실이 그려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여러 경험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성장해 나가야 할 청소년기에는 흔들림이 없을 거라 스스로 장담하며 고집스럽게 내세운 신념조차 흔들리고 무너지는 반복이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더욱이 광기와 분노로 가득 찬 세상에서는 어른들조차 혼란의 연속이 아닌가. 시내와 학교에서 나치즘의 상징 하켄크로이츠를 쉽게 볼 수 있게 되었고, 유대인을 향한 모욕과 경멸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슈바르츠와 호엔펠스 각자가 가진 신념이 충돌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들의 순수한 우정을 바라보며 안도감을 갖지 못하고 안타까움과 불안함을 가진 채 읽어내려가야만 했다.

두 소년의 심리가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분명했지만, 서문과 추천사에 쏟아진 찬사만큼의 감정까지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순수하고 단순한 시선으로 그 시대를 바라보고 서로의 관심사에 더 흥미를 느끼며 우정을 쌓아갔던 초반부의 이야기들이 아름다웠고 좋았다. 그래서 슈바르츠와 호엔펠스가 사랑하는 횔덜린의 시를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고, 그런 이유로 <횔덜린의 광기>와 함께 읻다 출판사의 횔덜린 시선집 <생의 절반>을 주문했다. 시집은 서너 권 정도 읽어본 게 전부인 나의 해석 수준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진입 장벽이 높게만 느껴져 감히 시선을 두지 못했는데,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궁금한 마음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내겐 특별한 사건(?)이 아닐 수 없게 되었다.

빛바랜 종이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책장을 넘기는 동안, 독일의 경제 회복을 위해 유대인의 재산을 강탈하고 수단으로써 이용하며 더 많은 희생양을 원했던 히틀러와 나치의 잔인함을 정면으로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무엇을 앗아갔는지를 확인시켜주고 인간다움을 아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이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저자는 조화로운 삶을 위해 ‘가치 있는 삶’에 뜻을 두고 그 마음을 담아 이 책의 결말을 정한 것이 아닐까?라는 혼자만의 짧은 생각을 해보았다. 계절과 함께 흘러가고 변화되는 주어진 삶, 그저 처한 운명에 따라 어떻게든 살아가면서도 인간이 잃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는 나 자신을 실패자로 본다. 그것이 정말로 문제가 되어서가 아니다. 영원의 상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다 실패자들이니까. (p.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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