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단단하게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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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위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인생>으로 잘 알려진 장예모 감독의 <원 세컨드>를 봤다. 영화의 무대는 끝도 없이 펼쳐진 황량한 사막. 척박한 땅에서 고된 노동을 견디는 이들에게 명절보다 설레는 날은 영화 상영일이다. 모래바람을 뚫고 오토바이에 실려 온 필름 통이 도착하고서야 비로소 빛의 세계가 열리던 시절, 영화는 두 달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한 귀한 축제였다.

바글바글 모여든 사람들의 땀 냄새 섞인 공기 속에서도 스크린의 불빛만을 기다리던 간절한 눈빛들. 누구랄 것도 없이 달려든 마을 사람들이 흙먼지에 오염된 필름을 귀한 보물인 양 정성스레 닦아내는 모습은, 지극한 정성을 넘어 엄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특히 반동으로 몰려 노동 캠프에 갇힌 주인공이 선전 영화 속 찰나의 순간, 단 ‘1초’뿐인 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사막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그 어떤 거창한 혁명의 구호보다 인간적이고 뜨거웠다.

옌롄커의 소설 <물처럼 단단하게>는 그 숭고한 ‘인간애’의 자리에 ‘욕망’을 밀어 넣는다. 똑같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시대를 통과하면서도, 누군가는 단 1초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파멸을 무릅쓰고 사막을 건넜다면,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본능을 정당화하는 훨씬 편리한 명분으로 혁명을 앞세운다. 작가는 그 거창한 명분 뒤에 숨은 인간의 민낯을 아주 작정하고 들춰낸다.

이번에 처음 읽게 된 옌롄커의 작품. 제법 두툼하다. 독서대에 책을 고정하는데, 표지에 들어간 옌롄커의 얼굴이 읽는 내내 강제 오픈되는 바람에 그 다소곳하면서도 사색적인 시선 처리를 실시간으로 감당하며 한 장씩 넘겨 내려갔다.

주인공 가오아이쥔은 자신을 숭고한 혁명가의 자식이라 정의하며 스물두 살에 입대한다. 원한다면 군 복무를 이어나갈 수도 있었지만 ‘고향에서 진짜 혁명을 일으키겠다’라고 밝히며 4년 만에 제대한다. 그런데 그의 속내를 까 보면 참 일차적이다. 1년 8개월 동안 여자 구경도 못 했다는 둥 본능적인 허기를 운운하는 모습을 보니, 이 남자의 원대한 꿈은 숭고한 이념보다 억눌린 결핍과 욕망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사람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진실해야 합니다. (p. 17)

가오아이쥔의 이 천연덕스러운 자문자답을 마주했을 때만 해도 ‘그래, 인간이라면 그래야 마땅하지’라며 고개를 끄덕이려 했으나, 뒤이어 나오는 고백들이 가관이다. 권력의 핵심인 지부 서기의 딸이라서 아내를 선택했다는 말부터, 풍채가 남다른 아내를 묘사하며 굳이 마오쩌둥을 거론하는 뻔뻔한 솔직함까지.

그의 들끓는 열정은 고향에 오자마자 엉뚱한 곳에서 폭발한다. 샤훙메이라는 여자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해버린 것! 사실 그녀는 초면이 아니었다. 우연히 철길에서 마주쳤을 때, 가오아이쥔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보란 듯이 맨발을 드러내며 발가락 플러팅(?)으로 묘한 살냄새를 풍겼던 구면의 여성이었던 것. 이 지독한 첫 만남의 잔상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재회했으니, 불이 붙는 건 시간문제였다.


시대의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시간, 가오아이쥔은 옌롄커가 곳곳에 심어둔 불온함 속에서 자기 욕망을 부지런하게 몰아붙인다. 단단하게 굳은 대의를 비틀고 예리한 칼날로 현실을 쓱 그어버리는 파격. 멈추지 않는 이야기 그 틈새로 튀어나오는 상징들을 알아채는 재미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은 울분 속에서, 살만 루슈디의 책들이 남기곤 하던 분노와 희열이 뒤섞인 특유의 잔상이 떠오르기도 했다.

아니 왜, 가진 게 쥐뿔도 없어 판이라도 뒤집어보려 근거 없는 패기 하나로 거친 역사에 몸을 던지는 무모함을 볼 때 말이다. 집안 배경도 출셋길도 막막한 처지에서, 혁명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쫓아 가족마저 뒷전으로 미뤄두고 밖으로 나도는 매정한 뒷모습. 거기서 느껴지는 욕조차 아까운 한심함, 그러다 어느 순간엔 기어코 애처로워지고 마는 그 복잡한 심경. 휴, 인간의 민낯에 낄낄거리다가도 문득 서글퍼지는 건, 왜인지 모를 일이다.

이따금 겸연쩍을 때면, (책을 뚫고 전달되는 따가운 눈초리를 의식이라도 한 듯) “제 말을 끊지 마십시오.”라며 세상 점잖은 톤으로 엄포를 놓는 그 도둑이 제 발 저린 듯한 방어기제를 구경하다 보면 어이없는 실소가 삐져나온다. 만약 그가 결핍 하나 없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어도 이토록 처절하게 혁명을 운운했을까, 하는 물음에 이미 답이 읽혀버린 탓일까. 그건 그렇고 혁명이란 단어는 수백 번 본 것 같은데... 아니, 아이쥔! 진짜 혁명이라는 게 있긴 한 겁니까? ㅋㅋㅋ


마오쩌둥의 어록을 불쑥불쑥 소환시키는 이 기묘한 서사 끝에, 나는 가오아이쥔이 온갖 생각을 쥐어짜고 요란하게 쌓아 올린 이야기 아래에서 혁명은 거창했고, 인간은 그보다 더 적나라했음을 확인했다. 옌롄커의 책들에 ‘금서’라는 딱지가 떨어지지 않는 이유도, 결국은 그가 끝내 시선을 거두지 않는 지점 때문일 것이다.

꽉 쥐고 있던 손가락을 쫙 펴는 것처럼, 이런 불편하고 노골적인 세계를 자유롭게 헤집으며 헛웃음 한 번 지어보는 것. 고상하진 않아도, 금기를 넘나드는 이야기만이 줄 수 있는 그런 솔직함을 느끼는 동안 문득 권력의 검열 아래 입을 틀어막힌 이야기 중에 얼마나 많은 수작이 묻혀버렸고, 묻히고 있는가를 생각하니, 새삼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달빛 아래, 복잡한 심사를 띄워 보내며 노래를 흥얼거리던 가오아이쥔의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자신의 날뛰는 마음을 노래 가사가 이토록 고요하게 가라앉혀줄 줄은 몰랐다던 그의 나직한 고백. 나 역시 이 소설의 어느 갈피가 내 마음을 붙들 거라 예상치 못했듯이. 투박한 노래 한 줄에 흔들리는 나약한 인간의 마음. 왜인지 이 장면이 한쪽 가슴을 뜨겁게 데운다. 묘하게도 우리가 책을 읽으며 얻는 감정과도 맞닿아 있어서일 테지. 어지럽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 뒤늦은 평온.

그리고 나는 이 비루한 역사의 굴레 속에서, 작가가 끝내 손에서 놓지 못한 볼펜의 무게를 가만히 가늠해 볼 뿐이다.

“저는 죄상을 폭로해줄 투박한 심대의 볼펜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p.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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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5-01 2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한국의 어느 여류 소설가가 한강 작가는 자격이 없다며 중국의 옌렌커가 수상했어야 한다고 했던 적이 있었죠. 그때 궁금하여 그의 소설을 읽었는데 그 또한 대단한 작가임은 부인할 수 없겠더군요. 특히, 띵씨 마을의 꿈(丁庄梦)은 수작입니다. 한번 읽어보시길...

곰돌이 2026-05-01 21:21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옌롄커의 작품들이 꽤 많아서 어떤 것부터 읽어봐야 할지 고민 중이던 참에 잉크냄새님의 댓글이 너무나도 반가워요! <일광유년>을 일단 찜해두었는데, 추천해주신 작품도 꼭 챙겨 읽어볼게요. 감사합니다!
 
물처럼 단단하게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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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거창했고, 인간은 그보다 더 적나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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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코
서보 머그더 지음, 정방규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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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 머그더의 <도어>가 남긴 배타적인 침묵, 그리고 <아비가일>의 엄격한 기숙사 규율 속에서 집을 그리워하던 소녀의 날 선 긴장감이 여전히 기억에 선하다. 같은 헝가리 작가인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끊임없이 주인이 바뀌며 내어주어야 했던 땅의 기억 때문인지, 이들이 빚어낸 인물들은 마음의 빗장을 깊게 걸어 잠그고 있다. 흉터가 단단해질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 그제야 삭히고 삭힌 감정들을 토로하는 것처럼 들리는 이 탄식과도 같은 고백을 다시 마주하고 싶었던 걸까.

서보 머그더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늘 같은 지점에서 마음이 동요되곤 한다. 인물들이 무너지지 않으려고 세워둔 벽이 보이기 시작할 때. 아직은 그들이 선택한 방식들을 이해와는 조금 다른 자리에서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그러나 곧 알게 된다. 숨이 턱 막히다가도 한 꺼풀만 더 들춰보면 그 벽이 단순한 방어가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쌓아 올린 가장 처절한 흔적이라는 걸.

목사 집안에서 자란 ‘어누슈커’는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9년 만에 고향집으로 향한다. 올해 스물아홉 살인 그녀에게 집은 따스한 품이라기보다, 오랫동안 구석에 처박아두어 쿰쿰한 먼지가 내려앉은 옛 물건을 억지로 꺼내 보는 일에 가깝다. 종교적 규율에 막힌 숨 가쁜 공기, 단정과 엄숙으로 무장한 집안의 권위주의에 조용한 반항이라도 하듯 그녀는 격식을 갖추지 않은 채 나갈 준비를 마친다. 이런 모습이 집안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내뱉는 한마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보면 되겠지.”

무엇이 그토록 그녀를 짓눌렀기에 9년 전 그날, 도망치듯 집을 나와야만 했을까.

여기에 ‘프레스코’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덜 마른 벽 위에 그려지는 이 그림은 한 번 스며들면 수정할 수 없어, 잘못 그리면 벽을 아예 깎아내야만 한다고 한다. 이미 굳어버린 벽처럼, 이 소설 속 가족 역시 뒤늦게 고쳐보려 애써도 결코 수정할 수 없는 균열을 품은 걸까. 화가인 어누슈커는 이 단단히 굳은 풍경 위에 새로운 이미지를 덧입힐 수 있을지, 아니면 그저 지워지지 않을 작은 금 하나를 더 긋는 데 그칠 뿐일지 궁금해진다.

초반에는 인물들의 관계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가계도를 살피듯 읽어 나가야 했다. 하지만 일단 관계의 윤곽이 잡히고 나니, 그들 각자의 삶이 지닌 모습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어>의 에메렌츠가 길 잃은 동물을 품에 들이고 손길이 필요한 여성들을 돌봤듯, 이 소설에도 타인의 허기를 제 몸으로 받아내는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 어누슈커보다 열한 살 많은 언니, 연커다. 연커는 과거 자신의 아이에게 젖을 물릴 때마다 동생 어누슈커를 떠올리곤 했다. 엄마가 한 번도 젖을 물리지 않아 늘 차가운 젖병 꼭지에만 의지해야 했던 어린 동생을.

밖에서는 신앙적 권위를 내세우는 목사였으나, 집안에서는 가족의 숨통을 조이는 권력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연커는 ‘어린 식모’처럼 자랐다. 집안에 문제를 키우고 싶지 않아 하는 성향이 강한 연커는 모든 갈등을 자기 선에서 조용히 눌러 담으려 애쓰는 사람이다. 더 안타까운 건, 결국 침묵 뒤로 숨어버릴 수밖에 없는 스스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정작 자신도 행복 근처에 가보지 못했으면서 동생의 허기를 기억해 내는 연커. 그녀가 건넬 수 있었던 유일한 구원은 상황의 해결이 아니라 그저 차마 꺼내 놓지 못한 것들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으며 함께 아파하는 애달픈 연대였을지도 모른다.

무거운 늪처럼 끌어당기는 이야기 위로, 서늘한 바람을 확 불어넣으며 “정신 차리고 이 집안의 진짜 얼굴을 봐!”라고 속삭이는 듯한 인물이 있다. 바로 전쟁고아였던 아르파드다. 아버지가 부모를 잃은 조카를 ‘시혜’하듯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아르파드는 이 가족의 사소한 습성부터 감춰진 진실까지 하나하나 눈에 담는다. 당사자들조차 외면하고 싶어 하는 구석들을.

이 소설에는 배경으로 치우칠 인물이 단 하나도 없다.
오랜 세월 목사 집안의 그림자로 살았던 하녀, 커티의 삶 또한 그랬다. 그녀는 장례식에 가기 위해 서랍 깊숙이 넣어둔 ‘검은 옷’을 꺼낸다. 그것은 40년 전, 그녀가 첫 월급으로 산 유일한 사치였다. 평생 누더기만 걸치다 죽는 순간까지 남루했던 아버지를 기억하는 그녀에게, 이 빳빳한 검은 옷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온전한 내 것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가장 서글픈 안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읽은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문맥에 딱 들어맞는 ‘정확한 단어’를 찾아냈을 때 짜릿한 희열을 느낀다는 고백을 봤다. 일개 독자인 내가 감명 깊게 읽은 책에 대한 감상 글을, 공을 들여 써 내려갔을 때, 그 결과물이 제법 만족스러울 때의 천 배의 쾌감일까? 만 배쯤 될까? 나는 그 마음을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박완서 작가가 말한 쾌감이 꼭 쓰는 사람만의 쾌감은 아닐 것이다. 작가가 단어 하나를 고르기 위해 스스로를 들볶았을 고심의 흔적들, 누군가의 생을 앓아본 듯한 문장을 발견할 때면 독자인 나 또한 찌르르한 전율을 느낀다. 이 소설을 읽으며 여러 번 그런 문장을 만났다.

“이 소설은 열세 시간의 기록이다”

이 문구 하나가 내 마음을 확 사로잡았다. 단순히 열세 시간의 기록일 뿐이라고? 그런데 그걸 서보 머그더가 들려준다? 고민하고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낯선 땅, 타인의 삶을 잠시 들여다보고선 그 속내를 다 안다는 듯 공감하는 일이 때론 스스로도 멋쩍다. 그럼에도 나는,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오는 열세 시간의 여정부터, ‘이런 얘기쯤은 해도 되겠지’ 싶은 속내를 마음 놓고 털어놓을 사람 하나 없는 이들의 미처 다 드러나지 않은 삶까지 짐작해 내고, 그 통증을 함께 앓았다. 누구 하나 특별히 악한 의도를 품은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이들의 삶에는 사랑이 부족했는지. 이 지독한 정서가, 참 쓰고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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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코
서보 머그더 지음, 정방규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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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인 기대 속에서도 서로의 허기를 알아채는 찰나가 스치듯 남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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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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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밀화가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누가, 왜 그랬는지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16세기 오스만 제국, 궁정에서는 서양식 원근법을 몰래 도입하려는 책이 제작되고 있었다. 전통과 새로운 시선 사이에서 흔들리며, 세밀화가들의 내면도 조금씩 드러난다. 처음에는 범인이 누구인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그보다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이번 리뷰에는 살인사건의 전개보다,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선택을 보여주는 두 여성, 세큐레와 에스테르, 그리고 마음에 남는 몇 장면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려 한다.

일단 세큐레. 1권에서 등장한 남자 주인공 카라(검정)가 사랑하는 여자. 그녀는 내 마음을 가장 널뛰게 한 인물이다. 전쟁터에 나간 남편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채, 사회적으로도 애매한 위치에서 아이 둘을 키우고, 시동생 하산과도 얽혀 있다. 그렇다고 카라에 대한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그냥 변덕스러운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럴까 싶고. 그런데 계속 따라가다 보니, 그게 그렇게 단순하게 잘라 말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제도의 경계 속에서 선택해야 하는 현실, 거기에 카라의 사랑까지 얽히니, 감정 하나로 정리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해가 될 때도 있지만, 어느 순간은 전혀 못 따라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티고 있던 감정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마다 자신도 모르게 둘째 아들의 따귀를 ‘찰싹’ 때리는 장면이 그랬다. 삶이 마음대로 안 될 때, 결국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감정이 튀어버리는 것이다. 단순히 나쁜 행동이라고 잘라 말하기에는, 그 안에 그녀가 느끼는 상태가 고스란히 보이는 느낌이었다. 사람이 무너지는 순간을 옆에서 보고 있는 기분.

나는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 책을 통해 여러 감정을 접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좀 막혔다. 현실에서도 흔히 목격되는 패턴 아닌가. 아이들이 감정의 출구처럼 소비되는 장면을 보면서, 내가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인간의 모순을, 부모와 어린 자식의 관계 속에서 드러내니까 불편하게 받아들여졌다. 물론 소설 속에서는 잠깐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이 소설이 그려내는 전통과 새로운 시선, 서양과 동양, 예술과 삶의 경계가 흔들리는 틈에서, 세큐레는 당시 여성으로서 얼마나 불안정한 선택의 기로 위에 위태롭게 서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약간 다른 방향에서 이야기를 건드리는 여성도 있었다. 유대인 상인 에스테르. 현실적이고 계산적이며, 때로는 속물적이기까지 하지만, 감정에 휩쓸리는 사람은 아니라서 오히려 덜 답답했다. 그녀는 카라와 세큐레 사이에서 오가는 편지를 배달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소식을 전하고 관계를 이어 붙인다. 감정적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지만, 관계와 정보에는 깊숙이 개입하는 인물이다. 늘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느낌.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시선이 묘하게 불편하지만, 희한하게 이해가 갔다. 따뜻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차갑다고도 할 수 없는 사람. 정을 쌓기보다는, 필요할 때 닿았다가 떨어지는 관계처럼 존재한다. 딱 그 순간만 같은 편에 서주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사실 가까이 두고 싶은 타입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숨이 트였다.

이 소설의 사건들, 세밀화가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단순히 범인을 찾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처럼 보인다. 그중에서도 같은 이야기와 소재를 서로 다른 화풍으로 그린 두 권의 책을 나란히 놓고, 어느 세밀화가의 손길인지 맞혀보는 장면은 굉장히 흥미롭고, 몰입해서 읽은 장면이었다. 이슬람 회화가 서명도 없이 한 작품을 여러 명의 화가가 나눠 그리지만, 그래도 각자의 특징이 자연스레 드러난다는 점을 발견하는 재미 덕분이었다. 우리 삶 속에서도 생각지도 못한 아주 작은 디테일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어릴 적 나는 그림을 본다는 게 결국 ‘얼마나 실제처럼 그렸는가’를 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건 서양의 시선에 너무 기울어진 생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 회화가 원근을 만들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붙잡으려 했다면, 이슬람 회화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더 중요한 질서와 의미를 드러내려 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세밀화가들은 자신의 개성을 지우고 전통을 따르며, 독창성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자연스럽게 여겼다. 자신을 한 걸음 물러놓고, 모든 것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몸짓처럼 느껴졌다.

어떤 세밀화가가 말 그림을 설명하며,
“세밀화가는 자신의 분노와 질주를 그리지 않는다네. 가장 완벽한 말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하면서, 세상의 풍성함과 그것을 창조한 이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사랑의 빛깔들을 보여줄 뿐이지”라고 했다.

세밀화가는 자신의 시선보다 오래된 방식을 존중하며 작품 속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세큐레와 에스테르는 각자의 현실 속에서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하며 삶을 이어갔다. 서로 다른 길이었지만, 자아를 지워가며 살아야 했던 그들의 결은 어딘가 닮아 보였다. 자신을 지울수록 그 삶이 견뎌내야 했던 괴로움만은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왔기에, 소설 속 인물들이 그려낸 인생사는 내 마음 한편을 왠지 모르게 서글프게 했다.

이슬람 회화와 서양 회화, 두 세계의 충돌뿐 아니라 결국 사람을 그리고, 삶을 다룬 소설이기에 더 집중하며 읽을 수 있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경한 계절의 풍경을 바라보듯 느껴보기도 했지만, 이렇게 다양하게 느껴보기 위해 소설을 읽는 거지 싶다. 과연 범인이 누구일까 따라가는 긴장감 속에서도 유독 기억에 오래도록 남은 장면이 하나 있다. 2권 초반에 천국과 지옥 사이 어딘가에 놓인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이었는데, 나는 이미 생을 마감한 자의 독백 안에서 여러 감정을 헤아려보았다. 물론 이 세계가 실제 존재할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읽는 동안 잠시, 존재하는 듯 느껴졌다.

베르자흐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보이고 공간의 경계도 없다. 그러나 삶이 꽉 끼는 셔츠만 같다는 것은 오직 시간과 공간의 감옥에서 벗어나야만 깨달을 수 있다. 죽은 자들의 왕국에서 진정한 행복은 육신이 없는 영혼이라면, 산 자들의 영토에서 가장 큰 행복은 영혼 없는 육신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죽은 다음이 아니면 알 수가 없다. 고매한 신을 향해 기도했다. 우리에게 천국에서는 육신 없는 영혼을, 그리고 이승에서는 영혼 없는 육신을 베풀어 주십사고. (p. 57, 베르자흐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세계. 연옥을 뜻한다)

죽음과 삶의 역설 속에서, 씁쓸하면서도 묘하게 평온한 느낌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내가 붙잡고 있는 것들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이후로, 다음을 알 수 없는 불완전한 삶과 그 안의 모순을 굳이 다 이해하려 하지 않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이 문장에 마음이 더 붙들렸는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낯선 세계처럼 느껴지는 16세기 오스만 제국과 그 시대를 살아간 세밀 화가들의 감춰진 감수성까지, 꽤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오르한 파묵은 좁은 골목의 그림자, 집 안의 속삭임, 창문 너머로 흩날리는 빛까지 하나하나 살아 숨 쉬는 순간처럼 담아냈기 때문이다. 때론 날 것 그대로의 감정과 맞닥뜨려 당혹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이 또한 나 자신이 피할 수 없는 내면을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통해 느낀 조용한 감정의 소통, 그게 이야기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장면은 줄거리 속 중심이 아니어도, 마음속에 오래 남아 우리를 조금 더 섬세하게, 조금 더 깊이 바라보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내 이름은 빨강》은 내 삶과 감정을 비춰보기에 충분했다. 물론, 재미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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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4-10 1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돌이 님의 리뷰를 읽으면 늘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이 책 꼭 읽어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갖게끔 만들어요. 읽었는데도 또 읽고싶게 만드는…^^
그만큼 리뷰를 잘 쓰신다는 결론이겠죠.
한동안 오르한 파묵에 푹 빠져 사셨을 듯한 상상도 해보면서 저도 곧 파묵 세계로 풍덩해야지. 또 지켜지지 않을 결심?을 했어요.ㅋㅋ

곰돌이 2026-04-10 14:40   좋아요 1 | URL
제가 들어도 될 칭찬이 아닌 것 같아요. 구멍 하나 파고 들어가야 할까봐요. 몸이 커서 안 들어가겠지만요 ㅎㅎ
차분함을 느끼셨다는 말씀에 씨익 미소가 지어졌어요. 끄적거리는 동안 머릿속 정리하는 시간이 더 많은 편이라, 왠지 제가 어떤 마음으로 읽고 써내려갔는지를 책나무님께서 알아봐주신 것 같았거든요. 어떤 지점에서 공감이 닿는 느낌이었어요. 그런 기분 좋은 순간을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