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 퐁스 을유세계문학전집 9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정예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 멀리 퐁스가 신이 나서 걸어오고 있다. 콧구멍이 벌름거리도록 만족스러운 예술품을 손에 쥔 것이다. 대중극장의 지휘자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실뱅 퐁스. 이제는 노파들이 젊은 시절 유행하던 옷으로나 기억할 법한 스펜서를 입고 다니는 노총각인 그는 입고 먹는 데 들어갈 돈까지 아껴 예술품을 사들인다. 그렇다고 굶고 살 순 없는 노릇 아닌가. 퐁스 선생에겐 다 계획이 있다. 바로 자기를 불러주는 파리 사교계와 친척 집을 돌아다니며 숟가락만 얹는 것! 눈칫밥이 대수랴, 한 움큼의 즐거움을 선사해 줄 작품도 손에 넣고 미식을 즐길 수 있다는데! 아니, 그런데 발자크 너무하다. 곧 퐁스에 대한 얼평이 시작되는데 좋은 게 하나도 없다. 듣기만 해도 울적해지는 눈, 코, 입, 눈썹, 얼굴형 묘사에 이어 여성의 마음을 끌지 못한다는 말 안 해도 알 법한 상태(?)를 굳이 또 언급하며 소개에 정점을 찍는다. 그래도 삶의 즐거움을 찾고, 또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 내뿜는 열정 때문인지 시작부터 기분 좋게 읽을 수 있었다.

한때 전도유망했던 퐁스가 이제는 입에 풀칠하기 위해 싼값에 음악을 넘기는, “낡아빠진 8분 음표 (p. 15)” 같은 무명의 삶으로 전락했다. 그나마 위안이 돼줄 만한 게 있다면 그의 집에 빼곡히 차 있는 예술품들이라고 해야 할까? 부모에게 상속받은 재산마저 오직 ‘아름다움’을 소유하기 위해 고스란히 바친 퐁스가 무모해 보이기도 하면서 고독한 예술가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예술품 못지않게 퐁스가 사랑한 건 음식, 한마디로 그는 식도락가였다. 왕실의 화려함이 남아 있던 제정기 시절엔 손님 대접도 후했기에 퐁스는 젊고 잘나가던 예술가로서 귀한 대접을 받으며 파리 사교계의 풍성한 식탁에 당당히 초대받았다. 퐁스 역시 감사의 표시로 자신이 작곡한 연가를 들려주거나, 소소한 잔심부름을 해주는 것으로 서로 기분 좋게 밥값을 톡톡히 하곤 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이 시들해지자, 사람들의 인심 역시 야박해졌다. 점점 퐁스를 부르는 초대장은 뜸해졌고, 한때 품격을 위해 모셔가던 예술가를 이제는 그저 공짜 밥이나 바라는 처량한 식객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제는 맛있는 냄새를 쫓아 경쾌하게 달리던 두 다리 대신, 야윈 손으로 낡은 지팡이를 의지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 고독하고 처량한 노년의 길을 퐁스는 혼자 걷지 않는다. 중년의 길목에서 만난 영혼의 단짝, 독일인 음악가 슈뮈크가 있기 때문이다.

두 친구 중에 한 명이 다른 한 명보다 스스로 우월하다고 믿을 때만큼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것은 없다. (p. 28)

발자크는 우정을 완전한 평등의 관계로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이상보다 현실을 본 걸까. 그렇다고 퐁스와 슈뮈크의 우정이 불편하게 그려지는 건 아니다. 서로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상대에게 으스대지 않으면서도 ‘저 녀석 내가 잘 품어줘야지’와도 같은 나쁜 의도가 없는 보호 본능과 염려에서 나오는 배려가 애틋했고, 참 섬세한 사람들이구나 싶었다. 충분히 공감했다. 이런 모습은 사실 우리 삶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니까. 부모 자식 간에 ‘필수적인 존재’에서도 그렇듯이, 누군가를 온전히 품어줄 만큼 든든한 존재가 되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내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사물이든 사람이든)이 곁에 있길 바라고, 거기에 의존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 문장 안에도 사람을 여러 방향으로 들여다보는 시선이 담겨 있어서인지, 다시 곱씹게 되는 문장들이 많다.

어느 날, 퐁스는 체면을 생각해서 밥 한 끼 내어주는 유일한 사촌인 법원장 집으로 발길을 서두른다. 오늘은 명분이 그럴싸하다. ‘비루한 식객’쯤으로 여기는 법원장 부인에게 부채를 선물로 건네기 위해서! 겉은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예술을 누리며 자라온 뼛속부터 명문 귀족이 아니었기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부채를 한물간 고물 취급하는 부인에게 퐁스가 눈을 반짝이며 부채의 진가를 조목조목 짚어주는 장면은 마치 <진품명품> 파리 특집을 보는 것 같았다. ㅋㅋ 안타깝게도 이날 퐁스는 쫓겨나다시피 밖으로 내몰린다. 사람들의 냉소적인 시선을 그대로 흡수해 버리는 ‘습자지 같은 감성’의 소유자 퐁스의 두 줄기 굵은 눈물에 내 마음마저 미어졌다는... 흑흑.

치사스러워서라도 안 먹고 말면 되는데, 그에게는 식도락이라는 운명이 너무나 가혹하게 발목을 잡는다. 사람들 눈총을 받으면서도,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코를 찌르는 고급 요리의 냄새를 맡는 순간 이성이 마비되고 마는 이 지독하고도 슬픈 미식가의 본능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만,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공짜 최고급 요리에 목을 매는 그 구차함에는 속이 터진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의 판이 완전히 뒤바뀌는데, 퐁스가 평생 방구석에 모아온 예술품들이 실은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었다는 것! 모든 가치가 돈으로만 환산되던 세상에 이런 빅 이슈가 터졌으니 냄새 맡은 하이에나들의 등장 또한 당연? 게다가 재산이 ‘유산’의 의미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겠지?

줄거리 자체는 퐁스의 ‘예술품 컬렉션’ 뒤로 각각 다른 종류의 ‘탐욕 컬렉션’이 펼쳐지는 익숙한 설정인데, 인간 내면의 허영심과 위선, 어설픈 우월감, 속물근성 등을 여러 인물의 삶 속에 채워 넣어서인지 마냥 꿀떡꿀떡 읽히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결국 온갖 감정이 쌓이다가, 한낱 먼지인 인간이란 뭐고, 산다는 게 대체 뭐길래와 같은 허탈감에 마음이 바닥으로 툭 내려앉고야 말았다.

입에 자물쇠라도 채우고 싶은 분노 유발자가 꽤 많이 나오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나 역시 여러 가능성이 내 눈앞에 놓였을 때 결국 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아 보이는 쪽, 더 유리한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때로는 그런 기대가 썩 떳떳하지 않은 선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다양한 환경에 따른 고유한 차이들이 있겠지만, 같은 결과들이 되풀이 된다. (p.150)”는 문장이 내 마음 귀퉁이 한 부분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백번 천번 양보해서 인간의 보편성으로 들여다보려다가 결국 내 안의 속물성을 발견한 꼴.

책을 덮고 나서도 마음 한구석 깊게 맴도는 건, 퐁스와 슈뮈크의 관계에서 본 결핍과 사랑(우정)이다. 자신에게 부족한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예술품을 수집하는 데 평생을 바친 퐁스, 그리고 정서적으로 온전히 발붙일 곳 없던 세상에서 오직 퐁스라는 인간의 마음 하나만을 수집하고 간직하며 그것에 자신의 온 영혼을 바친 슈뮈크. 두 사람은 결핍을 충족시키는 방법뿐 아니라 자신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을 지키는 방식 또한 달랐다. ‘계속 잘 먹고 살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잘 차려진 밥상을 포기할 수 없었던 퐁스였고, 또 그런 친구를 위해 매일 별미를 준비한 슈뮈크였다. 하지만 발자크는 세속적인 세상과 대비되는 이들의 우정만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복의 원천이 도리어 슬픔의 원인이 되는 모순적인 과정까지 담아 가슴을 훑어놓는다. “사람은 어떤 종류든 만족을 느끼며 살아야 진정으로 존재한다(p. 23)”는 전제하에. 더욱이 그 수많은 등장인물 중에서도 하필 가장 연약하고 선한 두 사람을 통해서 말이다.

처음엔 이 소설이 탐욕을 다룬 이야기 위주일 것 같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줄거리 이면에 얽힌 시선들이 워낙 복합적이라 퐁스와 슈뮈크,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감상 위주로 채워봤다. 그런데도 말이 길어졌다. 겨우 이 소설 한 권 읽어보고 다 알 순 없겠지만, 발자크가 인간도 세상도 그리 믿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평생을 거대한 ‘인간 희극’에 바친 걸 보면, 포기할 수 없었나 보다. 인간을.

“집구석에서 몇 명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내 야심의 전부였건만! 모두에게 인생은 쓴잔과 같지.” (p. 3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염소의 축제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5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한때 라파엘 트루히요 독재 정권의 핵심 권력자였으나 이제는 모든 것을 잃고 병든 채 누워 있는 아버지 아구스틴 카브랄을 내려다보는 우라니아. 얼어붙은 눈동자가 마주한 것은 단지 병든 노인이 아니다. 그 시선 끝에서, 35년 전 인간의 영혼까지 길들였던 권력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거대한 서커스장. 사람들의 등에 보이지 않는 줄을 꽂아 조종하는 인형술사로서의 트루히요. 그 무대 위에서 가장 비참한 줄인형들은 역설적으로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장관과 관료들, 우라니아의 아버지인 아구스틴 카브랄 같은 인물들이다. 트루히요라는 줄잡이가 줄을 조금만 팽팽하게 당겨도 공포에 질리고, 다시 느슨하게 풀어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탐욕스럽게 춤을 춘다. 줄이 끊어지는 공포보다 줄에 매달려 사는 굴욕을 견디는 것이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아니, 뻔히 알면서도 끝내 ‘염소’의 변덕스러운 손가락 끝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 세계에서 트루히요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는 언론과 수치심이다. 그는 사람을 무너뜨린 뒤 다시 손을 내민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욕받았다는 사실보다, 버림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무엇보다 치가 떨리는 건, 트루히요가 쥔 줄이 인간의 가장 내밀한 영역인 ‘가족’과 ‘성(性)’에까지 꽂혀 있다는 점이다. 부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 그들의 아내나 딸을 요구하고, 부하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이들을 제물로 바친다.

한편, 우라니아는 자신의 애칭인 ‘우라니타’라고 불러주는 유일한 친척인 고모를 만나게 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견뎌온 이들의 대화는 같은 언어에 닿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상대의 상처 주변만 맴돈다.

“그 일이 내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우라니타, 적어도 네게는 전화위복이 되었어. 그렇지 않았다면 넌 지금 위치에 있지 못했을 거야. 반면에 우리에게는 재앙이 되었지.” (p. 19)

트루히요가 친 그물에서 빠져나간 자와 남겨진 자의 대화는, 서로 악의가 있어서라기보다 지나온 삶이 너무 달라서 어딘가 계속 서글프게 어긋난다. 14살 때 도미니카 공화국을 떠나 미국에서 번듯한 엘리트로 성공했으나 자신의 가장 깊은 아픔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우라니아와, 반대로 정권의 찌꺼기를 온몸으로 감당하며 눈에 보이는 사회적, 경제적 고초만 이야기하는 고모.

그래, 이제는 말해야만 한다 우라니아. 오래 침묵했던 이유를, 그리고 침묵으로밖에 버틸 수 없었던 시간들을.

그러나 혹시라도 그 고백이 치유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붕괴로 이어지면 어쩌나 우려스러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숨죽여 들여다봐야 했다. 나에게 우라니아는 과거를 회상하는 인물이라기보다, 현재 속으로 걸어 들어온 과거 그 자체였다. 악몽 같은 시간을 어떻게든 지우고 잊어보려 일과 공부, 그리고 책을 붙잡고 단 한 순간도 ‘생각’에 빠질 틈을 주지 않으려 했던 우라니아의 날들. 그렇게 시간은 멈춘 듯이 흘렀다.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다. 우라니아는 컵을 들지만, 텅 비어 있다. (p. 364)

이처럼 철저히 외면해 온 우라니아의 과거는, 35년 전 독재자의 숨통을 끊으려 했던 이들의 역사와 맞물리는 순간 더 이상 개인의 비극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1권에서 암살단이 독재자를 향한 거사를 앞두고 차 안에서 과거를 되짚는 사이 정권의 악행들이 조각처럼 흘러나왔다면, 2권은 트루히요의 내부 집무실과 핵심 관료들의 시선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야말로 ‘트루히요의 긴 팔’이 조종하는 추악한 실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아직 정권이 무너지지 않아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타들어 가는 공포 속에서, 암살자들의 이름이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한 명씩 호명되는 장면을 읽는 동안, 이들에게 씌워진 대역죄인이자 테러리스트라는 낙인은 내 안에서 거꾸로 읽히고 있었다. 만만한 제물에 책임을 씌우고 본보기로 처벌하면서, 그 안에서 국민에게 어떤 교훈을 남기려는 독재자들의 모습은 어딜 가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제아무리 날조와 수치심으로 인간을 지배하던 트루히요라 할지라도, 국민의 영혼을 쥐고 있는 교회와의 불화와 미국의 냉혹한 외면 앞에서는 무력했다. ‘신과 트루히요’라는 기만적인 축제가 끝나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서커스장의 천막도 걷힌다. 다 드러난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다. 이제 무대 뒤조차도 권력이 작동하는 또 하나의 무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독재라는 건 거대한 폭력인 동시에, 각자 살아남기 위해 택했던 비겁함이 얽혀서 지탱해 온 시간이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끔찍했던 것은 사람이 망가지는 순간보다, 망가진 자기 모습을 끝내 견디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비린내 나는 피와 달콤한 향수가 뒤섞인 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을 지켜보는 것은 지옥을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인간이 한 사람으로 존재하기보다 역할 속에서 살아가도록 길들여진 세계를, 달리 말할 방법이 없다.

어떤 시간은 끝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한 사람의 전부가 되지는 못한다. 우라니아는 지옥 같은 세계가 씌운 역할로부터 멀어지고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채 잊으려고 애썼던 세월이 너무나 길었다. 상처는 우라니아가 지나온 시간의 일부일 수는 있어도, 우라니아의 이름일 수는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26-06-01 2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라니아‘가 ‘우리나라‘로 읽히는 것도 트라우마의 흔적 같네요.

곰돌이 2026-06-01 21:07   좋아요 1 | URL
‘우라니아’ 자리에 ‘우리나라’를 대입해서 다시 한번 쭉 읽어봤어요. 모든 문장이 뼈아프게 겹쳐 읽히네요. 글자 하나 바꿨을 뿐인데 마음이 괜히 더 울적해지고 먹먹해집니다. 깊이 있는 레이어가 더해진 것 같아요.

혼자 읽을 때보다 훨씬 깊은 마음으로 책을 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염소의 축제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2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재자의 마지막 ‘하루’와 희생자가 견뎌낸 ‘35년’, 그리고 거사를 앞둔 암살자들의 팽팽한 밤. 이 세 갈래 시간을 정교하게 엮어 독재의 공기를 되살린 서사. 섬뜩했지만,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건 아마 오래전 남의 나라 공기가 낯설지 않아서였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염소의 축제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른다섯 해 동안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던 고향, 산들바람과 바닷소리가 들려오는 거리에 ‘미스 카브랄’이 섰다. 아니, 잔혹한 비극의 땅에 발을 내디뎠으니, 오랫동안 누구도 부르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그 이름으로 불러야겠다. 우라니아.

열네 살의 나이에 고향을 떠났던 아이는 이제 마흔아홉의 어른이 되어 돌아왔다.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조차 외면했던 그녀는 왜 이제야 돌아왔을까. 뒤늦은 연민일까, 끝내 끊어내지 못한 피의 이끌림일까. 평생을 절대 권력의 가장 충직한 사냥개이자 맹신자로 살며 온갖 영욕을 맛보았던 아버지는, 이제 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한 채 병상 위에 무력하게 누워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그 파멸을 내려다보는 우라니아의 서늘한 시선은 연민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지독하고, 증오라 부르기엔 너무나 시리다.

넌 그와 의사소통을 할 수 없어. 넌 계속해서 혼자 말해야 해. 네가 30년 넘게 매일 그랬던 것처럼. (p. 185)

분명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없을 그 잔인한 기억들이, 세월을 뚫고 카리브해의 눈 부신 햇살 아래로 들춰지기 시작한다. 어릴 적 기억을 따라 위태롭게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심장을 마구 뛰게 만드는 우라니아의 그 시절의 기억 속에는, 단지 개인의 과거를 넘어 도미니카 공화국 전체를 뒤덮은 비극이 자리하고 있었다.

첫 장부터 압도적인 분위기로 숨죽이게 할 만큼 몰입력이 대단하다. 특히 트라우마로 가득 찬 ‘과거’를 향해 스스로 던지는 인물들의 내면 고백, 저자가 배치해 둔 독특한 문장들이 내게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와서 속으로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보통 자신의 기억을 회상할 때는 1인칭을 쓰기 마련인데,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자꾸만 자기를 ‘너’라고 부른다. 우라니아뿐만 아니라 도미니카 독재정권 아래에서 저마다의 트라우마를 겪은 인물들에게, 과거의 기억은 너무나 끔찍하고 파괴적인 역사적 상처였던 것이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자신을 부르는 이 지독한 역설.

소설은 3인칭으로 건조하게 흘러가다가도, 갑자기 2인칭 ‘너는’으로 가슴을 훅 찔러 들어오는 문장들이 불쑥불쑥 등장한다. 그 시점의 균열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그들의 감정 속으로 더 깊숙이 끌려 들어갔고, 가슴 한구석이 서늘할 정도로 슬퍼졌다. 이야기를 읽고 있다기보다, 바로 옆에 나란히 선 채 그들이 외면해왔던 기억들을 함께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깊은 내면에 숨겨둔 상처를 억지로 끄집어내느라, 자신을 얼마나 아프게 다그치고 있을지가 문장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초반부터 할 말이 왜 이렇게 많아지는지 모르겠다. 이 뒤로 교차하며 펼쳐질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의 심리와 암살자들의 긴박한 이야기까지 남았는데, 이번 리뷰는 어째 막판에 무 자르듯 잘라야 할 것 같다.

당시 도미니카가 처한 고립된 국제 정세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절대 권력자 트루히요의 내면이 드러나는 장면도 꽤 흥미롭게 읽었다. 현재의 우라니아 시점과 35년 전의 과거가 교차하는데, 과거 속 트루히요가 목욕을 하면서 라디오 채널을 돌리는 장면이 특히 그렇다. 검열을 받는 라디오 속 세상은 국민을 현혹하고 독재자의 눈을 가리기 위한 뻔한 거짓 승리 소식만 가득했다. 베네수엘라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실제로는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왕따가 된 상태인데, 독재자 혼자 욕실 안에서 그런 방송을 들으며 가짜 우아함과 통제력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셈이다. 그가 통제 못 하는 것은 단 하나, 빌어먹을 방광이다.

재미있는 건 소설 속 트루히요가 자기 안의 ‘검은색’을 경멸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안에 흐르는 아이티 혈통은 죽도록 혐오하면서도 정작 라디오 속 기만적인 세상 뒤에 숨어 완벽한 척 허세를 부리는 모습, 여기에 제 목숨 하나 보전하겠다고 미신에까지 매달리는 그 지독한 열등감과 기괴한 집착을 들여다보자니 참 없어 보이기 짝이 없었다. 제아무리 절대 권력자라 떵떵거려도, 라디오의 거짓말 뒤에 숨은 실망스러운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명치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파국의 서막을 본인 또한 이미 직감하고 있지 않았을까? 더위를 식혀주는 인공적인 찬바람조차 ‘가짜 바람’이라며 집무실에 에어컨조차 두지 않았을 만큼 예민한 사람이니 말이다.

‘염소’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30년 세월이 넘도록 철권통치한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의 별명이다. 겉으로는 대단히 고결하고 전지전능한 지도자인 척했지만, 뒤로는 수많은 여성을 유린했던 그의 추잡한 성적 탐욕과 징글징글한 권력욕을 ‘발정 난 염소’에 비유해 비꼬아 부른 것이다. 그 뒤에 붙은 ‘축제’는 절대 권력자가 벌였던 광란의 지배 역사와 동시에 그 독재를 끝장내기 위해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준비한 거사를 뜻한다. 이렇게 제목의 의미를 알고 나니 확실히 다르게 와닿는다. 하지만 읽기 전에는, 언젠가 꼭 읽어보고 싶은 작가라는 생각만 있었을 뿐 선뜻 손이 가는 제목과 표지는 아니었다. 딱히 그런 걸 많이 따지는 편은 아닌데도 어딘가 껄쩍지근한 느낌이 있었달까 ㅋㅋㅋ 원래는 리뷰도 안 남기고 읽었다는 흔적만 남길 생각이었는데, 이렇게까지 할 말이 많아질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이제 2권으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목련 2026-05-24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돌이 님 리뷰 덕에 아, 이 소설 읽었지 생각합니다!
근데 내용은 자세히 생각이 나지 않아요 ㅎ

곰돌이 2026-05-24 20:56   좋아요 0 | URL
이 책에 자목련님 리뷰를 못 본 것 같아서 안 남기셨구나 했는데 양장본으로 읽으셨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자목련님 리뷰를 못 봤었나 봐요. 그 참에 예전에 쓰신 자목련님의 글을 찾아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 뭐예요! ㅎㅎ
 
염소의 축제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꾸만 스스로를 ‘너’라고 부르며 밀어내는 여자. 그 한 문장만으로도 이 소설은 충분히 잔인하다. 진짜 무서운 건 독재보다, 그 시대가 사람 안에 남긴 상처인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