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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들 ㅣ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3
치고지에 오비오마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7월
평점 :
치고지에 오비오마의 첫 장편소설 <어부들>은 이번에 내가 처음 읽어보게 된 나이지리아 이보족 출신 작가의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요 인물이 이보족 가정의 형제들이기 때문에 간략하게 역사를 덧붙이자면, 식민 지배라는 역사를 빼놓을 수 없는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역시 대영 제국이 식민화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 국경선을 마음대로 그어버려 같은 부족이 여러 나라로 갈리고 다른 부족이 한 나라에 섞여버렸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1967년에 나이지리아의 종족 중 ‘이보족’들이 비아프라 공화국을 건국하고 분리 독립을 선언했는데, 영국 식민 통치에 협조하고 영국으로부터 지원받았던 이보족의 역사로 인해 독립 후 나이지리아에서는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아픔의 무게가 실린 시계추는 멈추지 않고 세월은 흘러갔다. 그렇게 흘러간 세월만큼 잊을 수 없을것만 같았던 것들도 점차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히고 있을테지만 그럼에도 지울 수 없는 기억과 상처를 안은 채 사람들은 오늘의 평화를 바라며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리라.
1996년 1월, 나이지리아 아쿠레 마을에 사는 중산층 이보족 가족의 하루도 분명 그러했다. 아버지가 자식 욕심이 많아 열다섯 살인 장남 이켄나와 보자, 오벰베, 벤저민(화자), 데이비드, 그리고 여동생 은켐까지 총 5남 1녀를 두었다. 너무 어려 어머니의 손길에서 떨어질 수 없는 데이비드와 은켐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 넷이 이 소설의 핵심 인물로 등장하는데, 한참 밖에서 놀기를 좋아할 나이다 보니 우르르 몰려다니며 축구공을 뻥뻥 차서 남의 집 창문을 깨부수기도 하고, 한바탕 꿈에 부풀어 희망 찬 미래를 상상하면서도 지나간 일은 굳이 담아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개구쟁이들답게 방문 밖에서 들리는 부모님의 높아진 목소리에 귀가 쫑긋해져 동태를 살피며 자기들끼리 추리를 펼치는 등 천진난만한 일상을 보낸다.
역사적 원한과 갈등이 있는 이보족과 요루바족이 같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지만, 이 가족이 사는 마을에서는 요루바족인 선생님이 이보족 학생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등 일상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정도만 종종 나온다. 어찌 보면 주어진 환경과 생계가 어려운 아이들과 달리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제대로 경험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뛰쳐나와 집에 들어가기 전 막다른 골목을 향해 계속해서 걷는 이 아이들의 발걸음을 따라가면 북부인들이 거주하는 곳에 다다르게 되고, 대부분 기독교인인 남부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무슬림이 거주하는 곳임을 알 수밖에 없도록 깔개에 무릎을 깔고 앉아 허리를 숙여 기도를 하는 모습, 그리고 장터 전체가 구더기 떼처럼 모여든 사람들로 부글거리는 모습까지…. 이처럼 지역마다 인종, 언어, 문화, 종교, 경제적 차이 등을 실감하게 하는 문장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나이지리아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조만간 오랜 시간 내 책장에서 잠들어 계시는 같은 이보족 출신의 작가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도 살살 깨워 드려야겠다.
얌전히 집에서 독서를 하는 모습을 보이면 부모님이 무척이나 좋아하시겠지만 슬슬 또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 형제들이 친구 몇 명과 함께 ‘오미알라’ 강에 낚시하는 것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다. 참고로 이 강이 어떤 곳이냐 하면, 이제는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경멸을 당하게 된 통행 금지령이 내려진 곳이다. 원래는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유럽에서 식민주의자들이 찾아와 성경을 소개했을 때부터 점차 아쿠레 마을 주민들에게 버려지게 되었다는 이곳에서 아이들은 보상도 없이 고생만 하고, 이곳저곳 다치면서도 부모님 몰래 하는 짓이 대체로 스릴 있고 재미있듯이 그저 물고기 잡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즐거워했다.
평범했던 일상이 지나가고 한순간에 상황이 바뀌어 나이지리아 중앙은행에 다녔던 아버지가 북쪽 마을로 전근을 가게 되어 장터에서 신선식품 가게를 운영하는 어머니가 졸지에 혼자 아이들을 돌보게 된다. 더욱이 아버지가 계신 ‘욜라’라는 곳에 1996년 3월 유혈 분파주의 폭동이 터져 집에 자주 올 수 없게 되는데, 여기서 잠깐 부모님 소개를 간단히 해보자면, 이보족의 전통과 변화 앞에 균형 있게 가정을 유지하기보다는 서구 문화에 치우치는 아버지는 ‘서구적 교육’에 열성이면서도 이보족의 전통인 가부장 제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잘못할 경우 채찍질을 하는 아버지와 달리 미신적 행동을 하면서도 남편의 말에 의존하는 어머니의 힘 잃은 모습이 펼쳐진다. 사랑하는 어린 자식들을 불완전한 사회 속에서 지키려는 부모의 표현이 현대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분명 안정감을 느끼기 어렵게 보이고 우려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게 될 때가 있긴 하지만, 이들의 문화와 분위기를 인식하고 바라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번개가 번쩍이며 우르르쾅 천둥소리 뒤에 금방이라도 무섭게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불안감에 집 밖을 소심하게 내다보듯 서서히 질서가 무너지고 균열을 보이는 상황은 아직 사회의 복합성과는 거리가 먼 아이들의 경직된 감정을 느끼게 했고, 각 등장인물의 상황 안에 예전 식민주의가 아프리카 대륙을 잠식했을 때 겪었을 아픈 역사와 문화 충돌,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불안을 떠올리게 할 만한 문장까지 적절히 녹여 더욱 안타까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도록 만들었다.
“가고 말고는 너희 마음이지만, 그런 식으로 다시 목소리를 높이지는 말거라. 알겠느냐?” (p. 34)
우리 모두 꺼리는 점이 있었다. 보자는 오미알라강이 작고 그 안에는 ‘쓸모없는’ 물고기밖에 없다는 점을 싫어했다. 오벰베에게는 물 밑, 강 속에는 빛이 없는 만큼 밤에 물고기들이 뭘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는 밤이면 강은 이불처럼 덮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물고기들이 대체 어떻게 ―전기도, 등불도 없는데―돌아다니는지 자주 궁금해했다. 그리고 나는 방어와 올챙이의 나약함이 매우 싫었다. 강물에 담아두는데도 얼마나 쉽게 죽는지! 이런 약점에 나는 가끔 울고 싶었다. (p. 81)
어느 날 아이들은 강에서 모두가 미친 사람이라고 부르는 ‘아불루’를 만나게 되는데, 이들의 만남은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이 떠올려지기도 했다. 주인공 살림의 외할아버지가 카슈미르 골짜기의 지박령 같은 존재인 늙은 뱃사공 ‘타이’를 만났을 때처럼,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마치 꿈속에서 벌어진 일 같기도 한 상황이라든지, 기괴함이 느껴지는 아불루에 대한 묘사 등이 그러했다. 극히 일부분에 대한 비교일 뿐이지만, 살만 루슈디의 작품에서는 ‘아니, 어딜 맨입으로 단박에 알려고 들어?!’라는 듯 너스레 속에 잔혹한 인도의 역사적 진실을 녹여 기발함에 놀라면서도 익살스러움 뒤에 숨겨진 애환을 헤아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신적 교감을 오고 가게 했다면, 치고지에 오비오마의 <어부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형들을 통해 대부분의 사물을 이해하며 자라온 동생이 어디서도 본 적이 없고 들어본 적 없는 처음 겪는 기묘한 상황을 아직은 동심을 가진 아이의 시선으로 표현해 준 느낌이었다.
그 남자는 우리 눈앞에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다. 걸친 것이라고는 어깨에서 허리까지 느슨하게 걸려 있는 넝마 한 조각이 전부였다. 사타구니는 빽빽한 털로 덮여 있었고, 그 한가운데 혈관이 두드러진 성기가 허리띠처럼 흐늘거리며 늘어져 있었다. 그의 두 다리는 팽팽한 정맥들로 터질 듯 했다. 그는 귀청을 찢을 듯한 시끄러운 고함을 내지르며 망고를 아주 높이 내던졌다. 기세만 봐서는 망고가 30킬로미터쯤 떨어진 마을 중심부에라도 떨어질 것 만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발밑이 쑥 꺼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p. 135)
기괴함으로 오싹하게 만드는 아불루가 이켄나를 부르기 시작한다. 평범한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그의 부름에 두려움에 찬 친구들은 하나둘 떠나고 형제들만 남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켄나를 부르는 아불루가 “너는 붉은 강에서 헤엄칠 것이나 다시는 그 강물에서 떠오르지 못할 것이다.”라며 영 사람을 찜찜하게 만드는 재수 없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침이나 ‘퉤’ 뱉어버리고 탁 털어내면 좋을 이 말 한마디를 예언처럼 받아들인 이켄나는 완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가웠던 모습을 잃어가고 형제 간의 사이도 점점 틀어지게 된다. 그런 이켄나를 놓쳐버린 연의 끈을 바라보듯 했을 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애 좋던 시절이 눈앞에서 필름처럼 지나가는 것을 허망하게 느끼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길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을까 싶어 내 콧등도 조금 시큰해져왔다.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인 아프리카 출신의 작가라는 이미지가 심어준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 간의 갈등이나 정체성 혼란, 사회적 및 문화적 영향 등을 중심으로 줄거리가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1986년생이라 나이지리아 독립(1960년) 이후의 내전, 쿠데타 등을 직접적으로 겪은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 사회 문제에서 조금은 빗겨나갈 수 있지 않았겠는가. 물론, 대규모 반정부 폭동이 일어났던 1993년에 형들의 손에 이끌려 다녔던 겁먹은 동생의 불안과 공포를 다루고는 있다. 어쩌면 저자가 직접 눈으로 봤을지 모를 그때의 공포스러운 광경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심정을 그대로 담고 싶어서 이 소설의 화자를 형제 중에서 당시 자신의 나이와 비슷한 벤자민으로 정한 걸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어려운 나이지리아의 현재까지 이어지는 내전, 부정부패,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가 가속화시키는 남북전쟁 등으로 무고한 시민이 희생당하고 빈부 격차가 나날이 벌어지는, 그야말로 반 토막으로 썰린 세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지나간 역사를 알아챌 수 있도록 곳곳에 담았다. 비중이 크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위기를 맞닥뜨리게 된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감정 변화를 담은 서사에 나이지리아 속담, 전통 등을 접목하여 그들의 문화를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특히, 동물에 관해서 많이 접하게 되었는데 평소에 좋지 않은 징조로 느껴졌던 ‘거미’가 이보족에게는 슬픔의 동물이라는 것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슬퍼하는 사람들의 집에 둥지를 틀고, 점점 더 많은 그물을 소리 없이, 마음 아프게 짠다고 믿었다는…. 이 말에 왠지 앞으로 집에서 거미를 발견하게 되면, 예전과 달리 ‘이 녀석이 내 슬픔을 알고 찾아왔나?’라는 생각에 조금은 덜 무섭고 덜 징그럽게 들여다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보면 나란 사람은 말 한마디에 참 현혹되기 쉬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심리 변화가 오히려 인간이든 사물이든 동물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바라보기 나름이고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생각, 존재의 다면성을 떠올리게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낯선 곳에 덩그러니 놓여진 것만 같은 십대의 연약한 소년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까지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의미다. 그런 내가 가장 흥미롭게 들여다본 것은 연약함과 강함이 공존하는 인간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과 미래에 그려지는 불행 중 어느 것이 더 구체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드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점이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에만 멈추도록 저자는 한정된 곳에 독자를 가두지 않는다. 그래서 꽤 생각할 게 많은 소설이었다. 이것은 치고지에 오비오마가 독자와 마주하게 한 단순한 아이의 시선이 던지는 불완전하고 연약한 메시지가 오히려 깊은 사유를 끌어내는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