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레나데 대산세계문학총서 185
쥴퓌 리바넬리 지음, 오진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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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 뒷좌석에 앉아서 창밖만 바라봤다. 정말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그들 대부분은 서로 단절된 채,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 삶이라는 건 다양한 목적을 좇아, 수많은 근심과 함께 흘러가는 것일 뿐.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속사정은 알지 못한다”

서른여섯 살 마야. 이혼했고 열네 살 아들을 키운다. 양육비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생활비와 학비는 혼자 감당한다. 문학을 좋아해 한때 소설을 써보려고도 했다. 먹고살아야 했고, 돌봐야 할 아들이 있었고, 일은 쉴 수 없었다. 그렇게 마야는 원해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비행기 안에서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시작에는 석 달 전 이스탄불 공항에서 만난 87세의 독일계 미국인 막시밀리안 바그너가 있었다.

어떤 얼굴은 웃고 있어도 슬픔을 숨기지 못한다. 마야가 공항에서 마주한 얼굴이 그랬다. 여행 가방과 바이올린 케이스를 나눠 든 노교수. 지치고 슬픔에 잠긴 듯한 눈빛, 그러면서도 웃고 있는 얼굴. 이전에 만나던 손님들과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마야는 금세 알아챘다.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이스탄불 대학에서 외국인 손님을 맞이하고 수행하는 계약직 공무원인 그녀에게 손님을 마중 나가는 일은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뭔가 달랐다. 바그너가 묵을 숙소로 향하는 택시 뒤로 낯선 차 한 대가 계속 따라붙는 게 아닌가. 우연일까. 이 교수가 혹시 스파이는 아닐까. 뒤따르는 차는 정보국 차량인 걸까. 갑자기 요원들이 들이닥쳐 교수를 납치하는 것은 아닐까. 공상하기 좋아하는 마야의 머릿속에는 벌써 위험한 이야기가 한 편 펼쳐진다.

하루는 바그너의 제안으로 둘이 마주 앉아 저녁을 먹는다. 대화는 1930~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히틀러 정권을 피해 이스탄불로 온 유대인 교수들과 그 시절 튀르키예를 둘러싼 국가 간 정보전의 역사가 바그너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그런데 그는 왜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갔고, 하필 59년 만에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온 걸까. 마야의 의구심은 커지기만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행의 정체도 드러난다. 정보기관 소속이라는 세 사람이 총장실에서 마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간단했다. 바그너 교수의 모든 말과 행동을 보고하라는 것.

어느 날 이른 새벽, 바그너의 일정이 잡혀 있었다. 이 시간에 대체 어디를 가려는 걸까 싶었는데 목적지는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이스탄불 북쪽 흑해 연안의 쉴레였다. 쉴레 부근에 이르러 바다가 보이자, 바그너는 차를 세우게 한다. 언덕 뒤에서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바이올린 가방과 ‘나디아에게’라는 글귀가 적힌 화환을 들고 내린다. 강추위 속, 파도가 거칠게 몰아치는 흑해 해변으로 87세의 노인이 바이올린 가방과 화환을 들고 걸어간다. 언덕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야와 운전기사는 두 눈을 의심했다. 바그너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화환을 바다에 던진 그는 눈보라 속에서 아름답고 서정적인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면서도 돌아올 답은 알 수 없는 사람처럼, 그는 같은 곡을 연주하고 또 연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곡은 같은 곳에서 자꾸 막힌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또 그곳에서 멈춘다. 왜 하필 이 추운 날 바다까지 찾아왔는지도, 왜 바이올린을 켜는지도 아직 알지 못한다. 그저 매서운 바람과 거센 파도 속에서 어디론가 소리를 보내고 있는 바그너의 모습만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남았다. 바다는 계속 파도치는데, 이 노인만 그곳에 붙들려 있다.

아, 길고 긴 하루가 참으로 고단하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일에 놓인 건지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말할 수 없는 일만 잔뜩 안고 있는 마야는 온몸이 녹초가 되어 돌아온다. 피곤에 절은 머리를 뉜 베개가 눈물로 젖어버린다. 꿈속에서는 어린 시절 부모님, 오빠, 할머니와 함께했던 평온한 날을 보낸다. 온몸에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이 편안함. 깨고 싶지 않은 꿈. 그런데 마야에게는 아무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가족의 이야기가 있었다. 아르메니아인이었던 할머니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의 강제 이주와 학살을 피해 다른 이름과 종교로 살아야 했다. 크림반도의 튀르크계 주민 후손인 외할머니에게도 숨겨야 할 과거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으로 넘겨질 위기에 놓였고, 살아남기 위해 이름을 바꿨다. 한 사람은 아르메니아인이라는 뿌리를 숨겼고, 또 한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이름을 숨겼다.

나치와 유대인, 독일 학자들의 망명, 튀르키예의 역사와 문학까지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데도 장면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콕콕 박히면서 책장이 쉼 없이 넘어갔다. 이상하게 이야기가 많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아니면 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마야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이 사람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들어야 할 것 같은 마음.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거대한 역사나 이스탄불의 풍경이 아니었다. 그저 아침에 눈을 뜨면 버스에 몸을 싣고 지랄맞은 직장으로 향해야 하는 사람. 사이가 좋지 않은 아들과의 거리를 좁힐 기회만 엿보며 나름 무진 애를 쓰고, 이 녀석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없는 엄마이면서도, 시간이 조금 남으면 괜히 그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어 하고, 삶의 의무에서 잠시 벗어나면 뭔가 더 해보고 싶어 하는 사람. 대단히 평온할 것도 없는 하루를 살아가는 마야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어서인지, 이 소설이 꽤 가까이 느껴졌다. 솔직하고 불평도 많지만 그런 마야가 나는 좋았다. 어쩌다 생기를 보이면 내 가족일처럼 반갑기까지 했다.

마야는 힘들 때면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그런데 바그너를 만나면서 기억은 과거를 떠올리는 일이 아니라, 과거를 찾아가는 일이 되었다. 가족에게 묻혀 있던 이야기에서 튀르키예의 역사까지 하나씩 따라가다 보니, 결국 쓰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가 생겼다. 무엇이 그녀를 다시 쓰게 만들었을까. 곧 마야가 탄 비행기는 보스턴에 착륙한다. 그 전에 글을 마무리할 생각이다.

“나는 작가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내가 어떤 주제에 관해서 쓰고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튀르키예로 망명 온 독일 교수에 대해서 쓰고 있다고 답했다. 그녀는 놀란 듯 그런 사실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이해한다는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라고 했다” (p.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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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나데 대산세계문학총서 185
쥴퓌 리바넬리 지음, 오진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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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곳에서 자꾸 멈추는 곡이 있다. 87세의 노교수 바그너는 눈보라 속에서 그 곡을 몇 번이고 다시 연주한다. 못다 한 연주와 못다 한 이야기는 어쩌면 같은 것이었을까. 어디론가 소리를 보내던 그 겨울의 바그너처럼, 마야는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라도 닿기를 바라며 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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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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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다. 그럼 나를 나이게 하는 건 이름일까 기억일까 지식일까. 포로가 된 베네치아인과 그를 빼닮은 오스만 학자는 삶을 캐묻고 지식을 나눈다. 이상하다. 서로를 읽고 써내려갈수록 나와 타인을 가르던 경계는 흐려진다. 책장을 덮고 질문 하나를 던져봤다. ‘나’라는 말은 뭘 딛고 해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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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의 실종 을유세계문학전집 95
아시아 제바르 지음, 장진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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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감정을 전달받기도 전에 그 감정을 느끼기를 요구받는 듯한 느낌이 드는 글을 만날 때가 있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의 보통의 날, 유난히 감정이 잘 다루어지지 않는 날에 아직 정리되지도 못한 감정들이 톡 하고 튀어나온 글이라면 오히려 더 좋다. 아는 척하고 싶다는 유혹을 참을만큼. 이상하게 그 마음에는 내가 끼어들어도 될 것만 같다. 그런데 소설에서만큼은 조금 다르다. 뭘 느껴야 하는지 알아채는 식으로 읽게 만드는, 어떤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 감정에 먼저 도달해버린 듯한 문장을 만나면 김이 좀 샌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 읽은 아시아 제바르의 글에는 그런 느낌이 없었다. 그냥 인물이 그 상황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견디는지를 따라가게 할 뿐이었다. 무언가를 더 느끼라고 재촉하지 않으니 나도 내 속도대로, 내가 느낀 감정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글로 접한, 식민 지배를 겪은 인물들은 대체로 지배자의 언어로 자기 감정을 말해야 할 때, 분명 자기 감정인데 자기 말이 아닌 듯한 순간, 입 밖으로 말을 내뱉는 그 순간부터 감정조차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어지는 비참함을 들여다보도록 했다. 그래서 <프랑스어의 실종>이라는 제목에 갸우뚱했다. 알제리 작가가 쓴, 알제리 남자의 이야기인데? 사라진 건 프랑스어가 아니라 아랍어 쪽 아닌가. 모국어도 아닌 프랑스어를 배우고 글을 써야 했던 사람에게, 그 프랑스어마저 사라졌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라도 있었던 걸까.

20년 전 알제리를 떠난 베르칸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일하며 한 여자를 만났고, 서로 사랑했고, 결국 이별을 통보받았다. 글을 쓰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글쓰기에서도 멀어졌고 자신의 성장소설을 쓰겠다던 계획도 몇 년 전 접은 상태다. 자신의 기억과는 사뭇 달라진 고국에서 베르칸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고, 자신의 이야기도 조금씩 꺼내놓는다. 그런데 이 소설의 시점 변화가 참 독특하다. 베르칸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도 어느 순간 제3자의 시선으로 넘어간다. 알제리에 와서 친해진 어부 라시드와 대화를 나누다가 현재에서 자연스럽게 과거로 흘러가기도 한다.

“난 여섯 살이었네.” 베르칸이 다시 말을 잇는다. “프랑스 학교 2학년이었지. 그날의 카스바 거리에서 나는 우리 국기를 보았다네, 처음으로 말이야!” (p. 43)

“우리는 누구나 학창시절의 추억을 갖고 있지…. 그런데 그 시절에 대한 내 추억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날 밤의 꿈에서 벗어난다) 프랑스 선생에게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뺨을 맞은 거라네!” (p. 44)

아버지는 독립전쟁이 발발하고 알제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다. 하나뿐인 형도, 베르칸 자신도. 그런 기억을 품고 있는 베르칸은, 이제 알제리 사람들의 눈에 그저 돈 많은 외국인으로 보일 뿐이다. 어느 정도 갖춰진 생활을 했던 프랑스에서의 삶을 접고 돌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무언가를 써야만 했던 것 같다. 그는 글이 자신에게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날, 방문객으로 찾아온 한 아랍 여성을 알게 된다. 모든 걸 다 잊기 위해 떠났었지만 다시 돌아왔다는 나지아. 첫 만남이라는 낯선 분위기 속에서도 서로의 시간을 빼앗으려 할 생각은 없지만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또 듣고 싶어 하는 그 드러내지 않는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서 너무나 조심스럽게 새어 나왔다. 시간은 소리도 없이 흐르는 듯했고, 나지아는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 안에는 알제리의 복잡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독립운동에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민족해방전선에 의해 암살된 할아버지와 그 뒤에 남겨진 가족들의 삶까지. 베르칸과 나지아가 떠올린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독립전쟁과 죽음, 그리고 알제리 국기를 그렸다는 이유로 맞았던 한쪽 뺨이었다.

동류를 향한 끌림이라고 해야 할지 두 사람은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다. 베르칸이 나지아에게 마음을 여는 데에는 언어가 분명 한몫했을 것이다. 헤어진 프랑스인 여자친구와의 관계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프랑스어로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 했다면, 나지아에게는 굳이 애써 번역하지 않아도 됐다. 자신의 감정을 다른 언어로 옮기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게다가 나지아가 들려주는, 이제는 잊어버려 정확한 뜻조차 알 수 없는 사투리와 희귀한 단어들. 가깝고도 어딘가 멀게 느껴지는 그 말들을 듣는 일이 베르칸에게는 묘한 편안함이었을 것이다. 말을 고르지 않아도 되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앞에 있다는 것. 말과 몸과 생각 사이에 번역이 필요 없는 순간. 애쓰지 않아도 서로에게 닿을 수 있다는 것. 베르칸이 나지아에게서 느낀 편안함이란 어떤 경계도 의식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그 순간에 빠져도 된다는 것이 아니었을지.

알제리 독립전쟁을 거쳐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맞은 1960년대와 1990년대 초의 알제리를 오가며, 베르칸의 삶과 기억을 따라간다. 베르칸이 자신의 성장소설 <청소년>을 쓰기 시작하면서 다시 열다섯 살 소년으로 돌아가기도 하는데, 그중에서도 1960년 12월 11일 알제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중시위를 묘사한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잔인한 장면은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어린 베르칸이 그 나이에 느꼈을 민족주의적 열망과 흥분을 고스란히 따라가게 한다. 맨몸으로 뛰쳐나온, 아직 사춘기도 벗어나지 못한 아이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것에서 뿜어져 나온 액체에 눈이 젖어 붉어지고,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혼란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무질서 속에서 손도끼 하나를 얻어 들고, 자신보다 더 앞에 서 있는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베르칸. 그리고 그들은 암담한 열광 속에서 외친다.

“알제리인의 알제리!” (p. 179)

베르칸이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식자공으로 일하다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혔던 이야기를 나지아에게 들려주는 장면은, 프랑스어가 그에게 무엇이었는지가 처음으로 보였다. 당시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정치적인 이야기를 좀처럼 꺼내지 않았는데, 어느 날 한 신참이 토론을 시작하며 프랑스어로 ‘라익(laïc)’이라는 단어를 내뱉는다. ‘세속적’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세속적, 합의, 대표자 회의, 내각처럼 독립 이후의 사회를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들이 그들에게는 낯설었다. 가장 어린 축에 속했던 베르칸은 그때 독립만을 꿈꾸고 있던 자신들에게 정작 독립 이후의 사회를 상상하고 논의할 언어가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베르칸에게 프랑스어는 단순히 모국어의 자리를 대신한 고통의 언어라기보다는, 자신을 지배한 세계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그 세계를 넘어가기 위해 익혀야 했던 언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프랑스어를 붙들었던 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마음을 쏟아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일찍 알았던 것처럼, 어린 시절 고문을 당하는 그 순간에도 상대에 대해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하고 있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견디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이었을 만큼 베르칸이라는 인물은, 자신이 겪은 일을 감정적으로 폭발시키기보다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고, 언어로 다시 정리한다. 거기에서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밀어내지 않고 말없는 소통으로 서로를 끌어당겼던 베르칸과 나지아의 첫 만남처럼 말이다.

나의 카스바, 나는 그곳으로 돌아간다. 나는 다시 살기 위해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선 내 가슴이 뛴다. 나는 그곳에서 잠들고 싶고, 언제나 안에서 회상하고 싶고, 언제나 바깥에서 달리고 싶다. 그래, 어제도, 오늘도, 언제나 그렇듯이 그날도 비록 내가 다른 곳에 있을지라도 나는 이곳에 있는 것이다…. (p.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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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8-27 1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제목도 리뷰도 뭐랄까. 곰돌이 님만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아요. 아 너무 좋네요.

곰돌이 2026-08-27 21:25   좋아요 0 | URL
저만의 분위기라고 하시니, 그 분위기가 뭘까 살짝 궁금도 하지만... 제가 저를 알잖아요. 분위기는 개코나 암것도 없습니다. (감히 다락방님의 생각에 토를 답니다.ㅋㅋㅋ) 그래도 좋다고 건네주셔서,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에게 와닿았던 그 순간의 감정이 다락방님께도 닿은 걸까 싶어 기분은 매우 좋다는!

얄리얄리 2026-08-27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다 읽고 잔향이 남아서 다시 한 번 읽어 보는데, 두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독립전쟁이 발발하고 알제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다.˝
˝독립운동에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민족해방전선에 의해 암살된 할아버지˝

베르칸의 아버지를 투옥한 쪽은 프랑스였을 것 같네요.
만약 그렇다면 프랑스(베르칸)와 알제리(나지아)에 의해 고통당한 두 사람이 각각 자신에게 고통을 준 언어를 익히고 말하면서 살아가고 살아왔다는 것이네요.
그래서 제게는 ‘견딘다‘는 말이 주는 여운이 작지 않게 느껴졌나 봅니다.

곰돌이 2026-08-27 21:28   좋아요 0 | URL
베르칸이라는 인물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였어요. 다른 아랍 가정과 달리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란 작가의 성장 환경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고요.

독립을 둘러싼 여러 갈등과 당시 알제리의 상황이 소설에 아주 잘 담겨 있습니다. 오히려 작가는 그 안에서 역지사지를 하게 만들기도 하고요. 어쨌든 베르칸에게 프랑스어는 쉽게 놓을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모국어를 쓸 수 없어 배워야 했고, 또 프랑스어를 쓰는 지식인이었기에 떠나야 했던 사람이니까요. 그러면서도 프랑스어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기억하고 글로 옮길 수 있는 언어이기도 했고요. 결국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보다 그 사이에서 견디는 사람에 가까워 보였기에, 저는 이 소설을 ‘견디는 삶’에 마음을 두고 읽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읽는 동안 깊이 빠져 읽었는데, 얄리얄리님 덕분에 이 책에 대한 기억과 여운이 배가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프랑스어의 실종 을유세계문학전집 95
아시아 제바르 지음, 장진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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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언어와 살아가기 위해 배운 언어 사이를 부유하는 베르칸. 그는 견딘다. 그 견딤을 자신이 붙든 언어로 옮겨 적는다.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인물의 그 후의 삶이 궁금한 소설을 오랜만에 만났다. 견디기만 하는 삶 말고, 알제의 파도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글을 써내려가는 그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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