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스러운 탐정들 2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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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문단의 틀에 맞서 자신들만의 시를 꿈꾸던 겁 없던 청춘들은 자신들이 찾고자 했던 시의 뿌리를 더듬듯 오래전 자취를 감춘 여성 시인 세사레아 티나헤로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이후 이야기는 20년에 걸쳐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시인 한 사람을 찾는 이야기를 넘어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지나온 시간을 따라간다. 그 시간 속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의 기억 한가운데에는 늘 벨라노와 리마가 있다.

이름도 낯선 시인들이 쏟아지고, 담배 연기 자욱한 골방에서 문학을 이야기하던 젊은이들의 무모한 열기에 끌려갔던 1권을 지나 2권에 접어드니, 이번에는 그 뜨거움보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남는 쓸쓸함이 더 진하게 다가왔다. 볼라뇨는 분파주의에 갇힌 기성 문단을 꼬집으면서도, 그에 맞서 반항하는 젊은 시인들 역시 마냥 낭만적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삶에 시선이 더 오래 머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등장해 몇십 페이지 동안 자기 인생을 털어놓는 사람들. 그들의 삶 하나하나가 또 다른 소설처럼 읽혔다. 시적인 비약이 섞인 이야기들은 마음 한편을 묘하게 찜찜하게 만들고, 웃을 수만은 없는 삶도 끝내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들 덕분에 무겁게만 흘러가지 않는다. 대단히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그렇다고 시선을 돌리게 하지는 않는 참 이상하고도 묘한 작품이다.

“지나간 시절을, 밤이 밤 속으로 침잠하던 그 순간의 시간을 생각하는 동안 위가 쓰려 왔다.” (p. 482)

무언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기대와 열정, 한때는 문학이 인생 그 자체였던 시절,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그때 그런 사람들이 있었지, 하듯 돌아보게 되는 감정이 왜 이리 헛헛하던지. 같은 시대를 살아도 기억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수십 명의 목소리를 통해서 말이다. 벨라노와 리마에 대해 누군가는 자유로운 예술가였다고 하고, 누군가는 무책임한 떠돌이였다고 말한다. 시대를 앞선 혁명가였다는 사람도, 시를 핑계 삼아 방황하던 청년들이었다는 사람도 있다. 특히 리마는 어느 한 곳에도 오래 머물지 않은 채 사람을 만나고, 떠나고, 또 사라진다. 그런데 리마를 잘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크게 놀라지 않는다.

“리마잖아.”


소설 속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건축가 호아킨 폰트가 남긴 잔상도 꽤 깊었다. 자신의 딸 친구들이자 내장사실주의자로 활동했던 젊은 작가들과 인연을 맺고 있던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돌아온 뒤 자신은 이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다시 산책을 시작하고,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구하고, 상사에게 초대받아 파티에 가게 된다. 서로 닮아 있는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가 낯익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그는 이내 안도하고, 허기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배가 몹시 고팠다. 나한테는 별로 없는 일이다. 너무 배가 고르고 너무 울고 싶고 너무 기뻤다. (p. 618)”라고 말한다. 아직 삶과 이어져 있다는 감각을 아주 잠시 되찾은 것만 같은 호아킨의 모습이 어찌나 반가우면서도 먹먹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벅찬 순간 뒤에 찾아오는 상실이 너무나 쓸쓸했다.

“보이다가 안 보이다가, 있다가 없다가 했다. 거리는 어둠의 퍼즐로 변했는데 조각이 몇 개 빠져 있었고, 모자라는 조각 중 하나가 기이하게도 나 자신이었다.” (p. 620)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에서 조금씩 밀려난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그 세계 안에서 자신의 자리마저 희미해진다는 것. 그런데 간신히 다시 삶의 감각을 되찾았다고 느낀 순간 마주한 것이 또 다른 상실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이 과연 호아킨만의 것일까.

1권 리뷰에서 ‘나와는 접점도 거의 없고, 호감 가는 인물도 그닥 없는데 이상하게 감겨서 읽게 된다’라고 썼었다. 지금 와서 보니 그 이유가 더 분명해졌다. 이 소설은 ‘1970~90년대 멕시코는 이랬다’라고 설명하는 대신 수많은 사람의 기억을 따라가게 만든다. 그들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먼발치에서 슬쩍 훔쳐보는 기분으로, 뭐랄까 그 시대와 사람을 이해한다기보다 잠깐 함께 살아본 기분이 들게 하는 분위기를 따라가게 한다. 그야말로 동행. 나와는 너무 달랐고 향한 곳도 달랐지만, 어딘가에 온 힘을 쏟던 시기의 갈망과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모든 것이 어정쩡했지만 피만큼은 끓었던 시절의 나를 끌어내기도 했다. 그들에게 끌렸던 건 닮아서가 아니라 끝내 닮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무모함은 부러움도 동경도 아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한 시절을 바라보는 낭만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낭만이 피어난 곳이 어디인가. 그야말로 “현실은 결코 꿈속에서 보고 사는 것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야만의 시절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래 듣고 싶다는 생각. 묵묵히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 그들이 내게 들려만 준다면.

“제 유일한 바람은 직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열 번에 아홉 번은 구불구불한 선에 이어 뾰족뾰족한 선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에 다다르면 제 몸이 쪼개지는 듯했습니다.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요. 복부에서 시작해서 이내 머리와 목구멍까지 쪼개지는 듯한 경험이었고, 그 고통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잠에서 깨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지만요.” (p. 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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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스러운 탐정들 2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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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게 아니라 함께 떠돌다 온 기분. 그야말로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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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스러운 탐정들 1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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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접해 본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가 유일하다. 길고 긴 이름 공격에도 불구하고 뚫고 올라오는 매력과 재미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부터 로베르토 볼라뇨까지 여러 권을 책장에 채우기만 했는데, 요즈음 무거운 소설만 읽었던지라 조금은 다른 분위기를 찾다가 예상보다 이 책을 빨리 펼쳐보게 됐다는 별 필요도 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본격적으로 멕시코의 세계로 들어가야겠다.

2권으로 구성된 이 소설의 1권은 다시 두 파트로 나뉜다. 1부는 열일곱 살의 시인 지망생 ‘후안 가르시아 마데로’의 일기로 시작한다. 시가 쓰고 싶었으나 등 떠밀리듯 법대에 입학한 마데로는 기성 시인 알라모가 수업을 진행하는 대학교 안 시 창작 교실에 발을 들인다. 그런데 워낙에 패기가 지붕을 뚫고 대기권을 향해 직진하는 마데로인지라 알라모의 말이 영 와닿지가 않는다. 가고자 하는 방향도 달랐던 것 같고. 그러던 어느 날, 자신들이 발간하려는 잡지에 참여할 시인을 찾는다며 ‘내장 사실주의’인 아르투로 벨라노와 울리세스 리마가 교실 안으로 들어온다. 이들이 누구인가. 기성 문단의 질서에 순응하느니, 그 판을 한 번 뒤집어엎고 자기들 방식대로 시를 써보겠다는 청춘들이다. (참고로, 벨라노와 리마는 로베르토 볼라뇨와 그의 친구이자 동료 시인인 마리오 산티아고를 모델로 한 인물이라고 한다.)

아니, 그런데 왜 이름도 영 껄쩍지근한 ‘내장 사실주의’를 만들었을까? 정확한 이유야 하나로 설명할 수 없겠지만, 당시 이들에게는 부모 세대처럼 순응하며 살아가는 방식이 영 답답하게 느껴지고, 사회뿐 아니라 기존 문단 역시 현실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세계처럼 보였던 것 같다. 어쩌면 그런 반항심과 시대의 분위기가 내장 사실주의가 탄생하는 데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전투가 시작되었다. 내장 사실주의자들은 알라모의 비평을 문제 삼았다. 알라모도 내장 사실주의자들을 초현실주의자들의 아류나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비판했다. (p. 17)

알라모의 눈에는 이 젊은이들이 그저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초라한 아류’로 보일 뿐이지만, 진짜 삶의 바닥에서 건져 올린 시를 쓰는 건 바로 자신들뿐이라는 듯 벨라노와 리마는 굴하지 않는 기세로 대응한다. 안 그래도 교실 구석에서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마데로에게 벨라노와 리마 같은 선배들의 등장은 가슴 속 불꽃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그렇게 내장 사실주의자들의 품으로 쏙 빨려 들어간 마데로의 일기를 읽다 보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공부는 안 한다.

밤새 피워대는 담배 연기로 찌든 공간에서 자신들의 이정표가 되어주는 책들을 돌려 읽던 70년대 멕시코 변방 반항아들의 뜨겁고 퀴퀴한 골방 공기가 날 것 그대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이들에게 문학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자기들이 여기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꽤나 절박한 싸움에 가까워 보였다. 완고한 권위의 벽을 쌓아 올린 기성 문학의 세계에 이들은 잘 닦인 한복판으로 멧돼지처럼 들이닥친 존재들이었을 테니 말이다. 이따금 치기 어린 시절 특유의 거들먹거림과 마초적 허세, 여기에 거침없는 농담까지 첨가된 별 시답잖은 이야기로 괜히 에너지를 쏟을 때가 (자주) 있는데, 그 소란스러운 난장판 속에서도 중심을 꽉 잡고 있는 건 시와 시인들이다.

독특하게도 2부는 1976년부터 1996년까지를 오가며 벨라노와 리마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다만 1권에서는 1979년까지의 이야기만 담긴다. 흥미로운 점은 벨라노와 리마가 누구의 기억을 거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처럼 그려진다는 것. 그만큼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평가도 제각각이다. 그중에는 작가가 자신의 분신 벨라노를 “내가 본 사람 중 최고 미남이었다. 축구를 할 때는 웃통을 벗어 상반신을 드러냈다. 그리스 신화 잡지에 나오는 그리스인과 똑같다고 생각했고, 어떤 때는 가톨릭 성인 같았다. (p. 222)˝라고 기억하는 고등학교 친구의 눈을 빌려 자신을 조각상으로 박제해 두는 장면이 나오는데 뭐, 그렇다고 하니 그런걸로... (풉)

때론 무모해 보이기도 했지만, 풋풋했던 시절의 기억 가운데 유독 눈길이 머물렀던 것 중 하나는, 나이 차이는 한참 나지만 벨라노와 친구처럼 지냈던 ‘아욱실리오 라쿠트레’의 이야기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1968년 멕시코시티 틀라텔롤코 광장에서 권위주의 정부에 맞서 정치적 자유와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던 학생과 시민들이 국가의 폭력 앞에 쓰러졌던 공포가 선명히 박혀 있다. 탱크가 들이닥치고 전경들이 캠퍼스를 짓밟던 야만의 시간, 사람들을 어디론가 실어 나르는 트럭을 화장실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던 아욱실리오는 화장실 문을 꼭 걸어 잠근다. 배고픔은 수돗물로 채워가며, 기억나는 시를 암송하기 시작한다. 오직 ‘시’라는 마지막 끈 하나를 붙잡은 채 그 지옥 같은 며칠을 버텨냈다.

내가 미치지 않은 것은 늘 웃음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내 치마 때문에 웃고, 내 홀태바지 때문에 웃고, 줄이 간 내 스타킹 때문에 웃고, 점점 금발이 사라지고 흰머리가 늘어나는 내 프린스 밸리언트 헤어스타일 때문에 웃고, 멕시코시티의 밤을 세심히 살피는 내 푸른 눈 때문에 웃고, 대학의 이야기들, 즉 부상(浮上)과 추락, 개무시, 승진탈락, 납작 엎드리기, 아부, 허위 업적, 멕시코시티의 밤하늘에서 분해되었다가 다시 조립되는 흔들리는 침대들 등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내 분홍빛 귀 때문에 웃었다. (p. 310)

그런 시간을 견뎌낸 끝에도 “내가 익히 아는 그 하늘 아래에서 나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멕시코의 모든 시인과 함께”라던 처연하면서도 단단한 그녀의 고백이, 덥고 습한 여름날 방 한구석에서 책을 붙잡고 있는 곰 한 마리의 마음을 건드린다. 아까는 허세 가득한 10대 시절 특유의 찌질하고 하찮은 모습에 피식 웃어가며 읽는 잔재미를 야무지게 뽑아먹고 있었건만, 지금은 마음이 찌릿거리고 뜨거워지고, 아 왜 이래 ㅠㅠ

참 희한하다. 나와는 접점도 거의 없고, 호감 가는 사람도 그닥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왜 감겨서 보고 있는 건지.
누군가는 마리화나 연기 자욱한 별채에서 겉멋 든 시를 읊조리고, 또 누군가는 내일의 삶조차 막막한 거친 길바닥에 선다. 당장 주머니는 텅 비어 있을지언정 차가운 다리 밑에 걸터앉아 밤하늘의 달을 보고, 싸구려 와인 한 잔에 밤새도록 낭만을 속삭이던 청춘들. 그런 모든 것이 뒤엉켜 있던 1970년대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볼라뇨도 이런 시절을 지나왔겠다는 생각에 더 실감이 났다. 어딘가에 미쳐 활활 불태우던 그 대책 없는 뜨거움과 유쾌함, 그리고 그 뒤에 남는 묘한 헛헛함까지. 그런 한 시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기분. 꽤 괜찮았다.

아니, 그러고 보니 정작 이들이 그토록 찾아다니는 여성 시인 ‘세사레아 티나헤로’는 언급도 안 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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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스러운 탐정들 1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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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희한한 소설이다. 나와는 접점도 거의 없고, 호감 가는 사람도 그닥 없는데 이상하게 감겨서 계속 읽게 된다. 밤새 피워대는 담배 연기로 찌든 골방에서 책을 돌려 읽던 70년대 멕시코 변방 반항아들의 뜨겁고 퀴퀴한 공기가 날것 그대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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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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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로 변한 도시를 떠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엄마 아빠와 떨어져 낯선 시골 할머니 집에 맡겨져야 하는 상황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는 아이가 있을까.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미 집안에 감도는 불안한 기운을 느낀 순간부터 이 모든것이 현실이 아니기를 바랐을지도. 그래서 헐레벌떡 뛰어나와 두 팔로 맞이하며 쌍둥이 손자들을 향해 “우리 강아지들”이라며 반겨주는 게 아닌, “개자식들”이라고 부르는 할머니를 마주하면서도 겁먹거나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사람들이 너무나 현실 같지 않아서, 도저히 놀랄 수조차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정말 상처받지 않았는지, 놀라지 않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지극히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적인 묘사만으로 쓰인 글을 읽으며 추측할 뿐이다.

작년에 이 책의 앞부분만 대충 훑었을 때, 할머니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 채로 덮었던 기억이 난다. 하도 입이 험하고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어서. 그런데 다시 찬찬히 읽다 보니, 지옥 같은 날들을 살아온 할머니의 드러나지 않은 삶을 자꾸 유추하게 된다. 내가 이 할머니에게 연민을 느끼게 될 줄이야. 그래도 이름 한 번 불러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손자들에게 아픈 말만 쏟아냈을까 싶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한 번쯤 대들 법도 한데, 대들기는커녕 오히려 할머니가 고운 말 한마디 없이 자신들을 찔러대는 이유마저 이해한다는 듯 굴어댄다. 아니지, 할머니와 피붙이 손자의 관계라기보다는, 지옥 같은 세상을 먼저 살아낸 생존자와, 그 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가는 아이들의 기묘한 동행 같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안쓰러워하는 나를 향해, 아이들은 오히려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뀔 것만 같다.

“우는 건 소용없는 짓이에요. 우리는 절대로 울지 않아요.” (p. 49)

전쟁터에 나가 행방을 알 수 없는 종군기자였던 아버지의 기질을 닮아서인지 탐구욕이 대단해, 할머니 몰래 집안 곳곳을 살펴보기도 한다. 가진 돈도 없이 찾아간 문방구에서 주인에게 기어이 노트와 연필을 얻어내는가 하면, 집에서 챙겨온 사전과 할머니의 다락방에 있는 성경책으로 공부하며 글을 쓰기 시작한다. 둘만의 작문 시간에는 규칙이 존재하는데,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너무나 모호하다는 이유로 배제한 채 오직 ‘사실에 충실한 묘사’만으로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념과 근성이 대단하지만, 때때로 어린아이답지 않은 냉혹함과 잔인한 결을 비출 때면, 마치 생존이라는 목적만 남은 것처럼 보여 그 모습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뭔가 이건 아닌데,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기껏해야 초등학생 정도밖에 안 된 아이들인데, 정말 기가 막히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쩌면 이미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무조건 버텨야 한다는 마음으로 할머니 집 문턱을 넘은 것이 아닐지.

그런데 1부가 끝이 나도록 이 쌍둥이들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대도시에서 살았다는 사실만 있을 뿐 어디인지는 알 수 없고, 시골이라는 공간만 있을 뿐 할머니의 집이 어디인지도 지워져 있다. 그래서인지 분명 1부는 ‘우리’라는 1인칭 복수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인데도, 마치 타인의 삶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기록한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들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슬픔도, 두려움도, 상실의 고통도, 일단은 살아남기 위해, 엄마와 다시 만나 본래의 삶으로 돌아갈 그 이후로 미뤄둔 것뿐인지도 모른다.

전쟁통 속에서 오직 생존이 우선이었기에 평생 억척스럽게 일만 하며 사람의 온정 따윈 사치로 여기며 살아온 할머니. 그리고 그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단 한 번도 온전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채 신체적 결함 때문에 마을 안에서도 짐승 취급을 당하며 밀려나, 기어이 짐승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 언청이 소녀. 지워지지 않는 비극의 껍데기를 씌운 채 살아가는 이들을, 나 역시 끝내 그 껍데기를 벗겨내지 못한 채 할머니를 순수한 노인으로, 소녀를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참 지독하리만큼 슬픈일이다.

이 모든 것들을 “그냥 이런 일들이 있었다.” 하고 쓱 베어내듯 보여주는 1부를 지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인 서점 주인 빅토르가 등장하는 2부에 이르자, 자꾸만 이런저런 생각들이 끼어드는 탓에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더뎌졌다. 평화롭고 정상적인 일상에서는 오히려 숨을 쉬지 못하고,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야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고 글을 쓸 수 있다고 믿게 된 알코올중독자 빅토르. 그의 삶을 마주하면서, 그제야 내가 이 소설에서 ‘붙잡게 된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과,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이미 내면이 지옥이 되어 평화 속에서조차 구원받지 못하는 삶. 어느 것이 더 지옥일까.

내가 무엇을 쓸 수 있었겠는가? 내 생활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주변을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쓸 거리라고는 전혀 없었다. 누나는 끊임없이 내게 차를 날라다주고, 가구를 닦아주고, 내 장롱 안의 내 옷들을 정리해주었다. 누나는 내가 글을 얼마나 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 어깨 너머로 넘겨다보곤 했다. 그래서 나는 종이를 자꾸 메워나가야 했다. 나는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베껴놓았다. 가끔씩 누나는 내 어깨 너머로 그 문장들을 한두 장 읽어보고는 멋진 문장이라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나를 격려했다.
누나가 나의 속임수를 알아챌 염려는 없었다. 누나는 책이라고는 통 읽지 않으니까. 누나는 평생 동안 단 한권의 책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만 해왔기 때문에 책을 읽을 시간도 없었다. (p. 338)

3부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안다고 믿었던 것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나는 경험을 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더 눈길이 갔던 것은 인간의 존재 자체보다, 상처가 한 인간을 만들어가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인간의 영혼을 안에서부터 서서히 무너뜨리는 상처는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또 어떤 방식으로 선을 그어 말해질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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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7-02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둥~ 헝가리 욕쟁이 할머니 등장이군요.

곰돌이 2026-07-02 22:08   좋아요 0 | URL
할머니는 전쟁 이전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더라고요. 끝이 날 거라는 기대도 없이, 생존만을 위해 너무 오랜 시간을 버텨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인지 더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었던 것 같아요.

젤소민아 2026-07-22 0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충격적인 반전!! ㅎㅎ

곰돌이 2026-07-22 04:51   좋아요 0 | URL
이야기는 끝이 났는데, 독서는 끝날 수 없었던 반전이었죠! 다른 작품은 어떨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작가였습니다. <르 몽스트르>도 눈여겨보고 있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