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의 실종 을유세계문학전집 95
아시아 제바르 지음, 장진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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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감정을 전달받기도 전에 그 감정을 느끼기를 요구받는 듯한 느낌이 드는 글을 만날 때가 있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의 보통의 날, 유난히 감정이 잘 다루어지지 않는 날에 아직 정리되지도 못한 감정들이 톡 하고 튀어나온 글이라면 오히려 더 좋다. 아는 척하고 싶다는 유혹을 참을만큼. 이상하게 그 마음에는 내가 끼어들어도 될 것만 같다. 그런데 소설에서만큼은 조금 다르다. 뭘 느껴야 하는지 알아채는 식으로 읽게 만드는, 어떤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 감정에 먼저 도달해버린 듯한 문장을 만나면 김이 좀 샌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 읽은 아시아 제바르의 글에는 그런 느낌이 없었다. 그냥 인물이 그 상황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견디는지를 따라가게 할 뿐이었다. 무언가를 더 느끼라고 재촉하지 않으니 나도 내 속도대로, 내가 느낀 감정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글로 접한, 식민 지배를 겪은 인물들은 대체로 지배자의 언어로 자기 감정을 말해야 할 때, 분명 자기 감정인데 자기 말이 아닌 듯한 순간, 입 밖으로 말을 내뱉는 그 순간부터 감정조차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어지는 비참함을 들여다보도록 했다. 그래서 <프랑스어의 실종>이라는 제목에 갸우뚱했다. 알제리 작가가 쓴, 알제리 남자의 이야기인데? 사라진 건 프랑스어가 아니라 아랍어 쪽 아닌가. 모국어도 아닌 프랑스어를 배우고 글을 써야 했던 사람에게, 그 프랑스어마저 사라졌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라도 있었던 걸까.

20년 전 알제리를 떠난 베르칸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일하며 한 여자를 만났고, 서로 사랑했고, 결국 이별을 통보받았다. 글을 쓰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글쓰기에서도 멀어졌고 자신의 성장소설을 쓰겠다던 계획도 몇 년 전 접은 상태다. 자신의 기억과는 사뭇 달라진 고국에서 베르칸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고, 자신의 이야기도 조금씩 꺼내놓는다. 그런데 이 소설의 시점 변화가 참 독특하다. 베르칸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도 어느 순간 제3자의 시선으로 넘어간다. 알제리에 와서 친해진 어부 라시드와 대화를 나누다가 현재에서 자연스럽게 과거로 흘러가기도 한다.

“난 여섯 살이었네.” 베르칸이 다시 말을 잇는다. “프랑스 학교 2학년이었지. 그날의 카스바 거리에서 나는 우리 국기를 보았다네, 처음으로 말이야!” (p. 43)

“우리는 누구나 학창시절의 추억을 갖고 있지…. 그런데 그 시절에 대한 내 추억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날 밤의 꿈에서 벗어난다) 프랑스 선생에게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뺨을 맞은 거라네!” (p. 44)

아버지는 독립전쟁이 발발하고 알제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다. 하나뿐인 형도, 베르칸 자신도. 그런 기억을 품고 있는 베르칸은, 이제 알제리 사람들의 눈에 그저 돈 많은 외국인으로 보일 뿐이다. 어느 정도 갖춰진 생활을 했던 프랑스에서의 삶을 접고 돌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무언가를 써야만 했던 것 같다. 그는 글이 자신에게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날, 방문객으로 찾아온 한 아랍 여성을 알게 된다. 모든 걸 다 잊기 위해 떠났었지만 다시 돌아왔다는 나지아. 첫 만남이라는 낯선 분위기 속에서도 서로의 시간을 빼앗으려 할 생각은 없지만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또 듣고 싶어 하는 그 드러내지 않는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서 너무나 조심스럽게 새어 나왔다. 시간은 소리도 없이 흐르는 듯했고, 나지아는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 안에는 알제리의 복잡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독립운동에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민족해방전선에 의해 암살된 할아버지와 그 뒤에 남겨진 가족들의 삶까지. 베르칸과 나지아가 떠올린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독립전쟁과 죽음, 그리고 알제리 국기를 그렸다는 이유로 맞았던 한쪽 뺨이었다.

동류를 향한 끌림이라고 해야 할지 두 사람은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다. 베르칸이 나지아에게 마음을 여는 데에는 언어가 분명 한몫했을 것이다. 헤어진 프랑스인 여자친구와의 관계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프랑스어로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 했다면, 나지아에게는 굳이 애써 번역하지 않아도 됐다. 자신의 감정을 다른 언어로 옮기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게다가 나지아가 들려주는, 이제는 잊어버려 정확한 뜻조차 알 수 없는 사투리와 희귀한 단어들. 가깝고도 어딘가 멀게 느껴지는 그 말들을 듣는 일이 베르칸에게는 묘한 편안함이었을 것이다. 말을 고르지 않아도 되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앞에 있다는 것. 말과 몸과 생각 사이에 번역이 필요 없는 순간. 애쓰지 않아도 서로에게 닿을 수 있다는 것. 베르칸이 나지아에게서 느낀 편안함이란 어떤 경계도 의식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그 순간에 빠져도 된다는 것이 아니었을지.

알제리 독립전쟁을 거쳐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맞은 1960년대와 1990년대 초의 알제리를 오가며, 베르칸의 삶과 기억을 따라간다. 베르칸이 자신의 성장소설 <청소년>을 쓰기 시작하면서 다시 열다섯 살 소년으로 돌아가기도 하는데, 그중에서도 1960년 12월 11일 알제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중시위를 묘사한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잔인한 장면은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어린 베르칸이 그 나이에 느꼈을 민족주의적 열망과 흥분을 고스란히 따라가게 한다. 맨몸으로 뛰쳐나온, 아직 사춘기도 벗어나지 못한 아이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것에서 뿜어져 나온 액체에 눈이 젖어 붉어지고,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혼란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무질서 속에서 손도끼 하나를 얻어 들고, 자신보다 더 앞에 서 있는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베르칸. 그리고 그들은 암담한 열광 속에서 외친다.

“알제리인의 알제리!” (p. 179)

베르칸이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식자공으로 일하다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혔던 이야기를 나지아에게 들려주는 장면은, 프랑스어가 그에게 무엇이었는지가 처음으로 보였다. 당시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정치적인 이야기를 좀처럼 꺼내지 않았는데, 어느 날 한 신참이 토론을 시작하며 프랑스어로 ‘라익(laïc)’이라는 단어를 내뱉는다. ‘세속적’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세속적, 합의, 대표자 회의, 내각처럼 독립 이후의 사회를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들이 그들에게는 낯설었다. 가장 어린 축에 속했던 베르칸은 그때 독립만을 꿈꾸고 있던 자신들에게 정작 독립 이후의 사회를 상상하고 논의할 언어가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베르칸에게 프랑스어는 단순히 모국어의 자리를 대신한 고통의 언어라기보다는, 자신을 지배한 세계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그 세계를 넘어가기 위해 익혀야 했던 언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프랑스어를 붙들었던 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마음을 쏟아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일찍 알았던 것처럼, 어린 시절 고문을 당하는 그 순간에도 상대에 대해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하고 있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견디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이었을 만큼 베르칸이라는 인물은, 자신이 겪은 일을 감정적으로 폭발시키기보다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고, 언어로 다시 정리한다. 거기에서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밀어내지 않고 말없는 소통으로 서로를 끌어당겼던 베르칸과 나지아의 첫 만남처럼 말이다.

나의 카스바, 나는 그곳으로 돌아간다. 나는 다시 살기 위해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선 내 가슴이 뛴다. 나는 그곳에서 잠들고 싶고, 언제나 안에서 회상하고 싶고, 언제나 바깥에서 달리고 싶다. 그래, 어제도, 오늘도, 언제나 그렇듯이 그날도 비록 내가 다른 곳에 있을지라도 나는 이곳에 있는 것이다…. (p.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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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8-27 1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제목도 리뷰도 뭐랄까. 곰돌이 님만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아요. 아 너무 좋네요.

곰돌이 2026-08-27 21:25   좋아요 0 | URL
저만의 분위기라고 하시니, 그 분위기가 뭘까 살짝 궁금도 하지만... 제가 저를 알잖아요. 분위기는 개코나 암것도 없습니다. (감히 다락방님의 생각에 토를 답니다.ㅋㅋㅋ) 그래도 좋다고 건네주셔서, 이 책을 읽는 동안 저에게 와닿았던 그 순간의 감정이 다락방님께도 닿은 걸까 싶어 기분은 매우 좋다는!

얄리얄리 2026-08-27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다 읽고 잔향이 남아서 다시 한 번 읽어 보는데, 두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독립전쟁이 발발하고 알제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다.˝
˝독립운동에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민족해방전선에 의해 암살된 할아버지˝

베르칸의 아버지를 투옥한 쪽은 프랑스였을 것 같네요.
만약 그렇다면 프랑스(베르칸)와 알제리(나지아)에 의해 고통당한 두 사람이 각각 자신에게 고통을 준 언어를 익히고 말하면서 살아가고 살아왔다는 것이네요.
그래서 제게는 ‘견딘다‘는 말이 주는 여운이 작지 않게 느껴졌나 봅니다.

곰돌이 2026-08-27 21:28   좋아요 0 | URL
베르칸이라는 인물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였어요. 다른 아랍 가정과 달리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란 작가의 성장 환경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고요.

독립을 둘러싼 여러 갈등과 당시 알제리의 상황이 소설에 아주 잘 담겨 있습니다. 오히려 작가는 그 안에서 역지사지를 하게 만들기도 하고요. 어쨌든 베르칸에게 프랑스어는 쉽게 놓을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모국어를 쓸 수 없어 배워야 했고, 또 프랑스어를 쓰는 지식인이었기에 떠나야 했던 사람이니까요. 그러면서도 프랑스어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기억하고 글로 옮길 수 있는 언어이기도 했고요. 결국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보다 그 사이에서 견디는 사람에 가까워 보였기에, 저는 이 소설을 ‘견디는 삶’에 마음을 두고 읽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읽는 동안 깊이 빠져 읽었는데, 얄리얄리님 덕분에 이 책에 대한 기억과 여운이 배가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프랑스어의 실종 을유세계문학전집 95
아시아 제바르 지음, 장진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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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언어와 살아가기 위해 배운 언어 사이를 부유하는 베르칸. 그는 견딘다. 그 견딤을 자신이 붙든 언어로 옮겨 적는다.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인물의 그 후의 삶이 궁금한 소설을 오랜만에 만났다. 견디기만 하는 삶 말고, 알제의 파도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글을 써내려가는 그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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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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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과 <더러운 아이>가 가장 와닿았다. 무엇보다 누군가를 돕고 싶으면서도 내 일이 되는 건 싫은 마음. 외면하고 싶으면서도 끝내 그러지 못하는 마음. 그런 솔직함이 현실의 끔찍함과 만났기에 화자의 후회와 분노, 연대까지 나란히 따라갈 수 있었다. 가까운 마음으로 읽는 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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죔레는 거기에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0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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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호흡과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도입부에 확 빨려 들어가 100쪽을 쭈욱 읽어버리게 만든 <사탄탱고>의 매력에 빠졌던 작년의 그 짜릿함을 기억한다. 황폐한 마을, 곰팡내 가득한 방,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던 그 음울함이 아직도 잔재처럼 머릿속에 콱 박혀 있는데, <죔레는 거기에>를 펼치자 웬걸, 점심으로 먹을 감자국수를 만드는 한 노인이 나온다. 예상 밖이다. 뭔가 소박하고 인간미도 느껴지고, 첫인상부터 내가 알던 작가의 느낌과는 꽤 다르다. 그런데 또 가만히 읽고 있으면 이 편안함 속에 놓치기 힘든 미세한 긴장감이 있다. 대체 이 노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역사와 맞물려 돌아가는 이야기도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하고, 그렇게 몰입해서 읽다 보니 결국 이러나저러나 역시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이 맞긴 하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과도 거리가 멀어 사람도 거의 살지 않는 산 위의 집에서 살아가는 올해 아흔두 살의 은퇴한 전기 기술자 요제프(요지 아저씨)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뒤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전기 기술자와 유랑 가수, 전직 교사, 퇴역 군인 등 서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찾아오기 시작한다. 더 이상한 건 모두가 그를 “폐하”라고 부른다. 요제프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살아온 왕위 계승자라는 것이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집을 찾아온 사람들은 그를 헝가리 국가의 기틀을 세운 중세 마자르계 왕조, 아르파드 왕가의 마지막 후손으로 여기며 왕으로 추대해 왕정복고를 이루려고 한다. 물론 단순한 호기심으로 찾아온 사람도 있고, 정치적 계산을 하는 이들에게는 그가 더없이 좋은 상징이기도 하다. 영 느낌이 싸하다. 어쨌든 숱한 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요제프는 왕좌에 오르는 일에 별다른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정작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랑했던 사람들, 가족, 그리고 한 인간으로 살아온 긴 세월에 관한 기억들이다. 무엇을 잃었고, 누구를 사랑했으며, 무엇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지.

처음에는 요제프가 비밀을 간직한 채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은둔자 같은 노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국회와 대주교, 유럽연합 관계자, 독일 대통령에게까지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논리를 끊임없이 세상에 던졌다. 자신을 왕위에 올리든지, 아니면 그에 걸맞은 존엄을 인정해 연금을 지급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답장을 기다린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답은 오지 않는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면 요제프 역시 그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헝가리. 요제프는 독일 병사들의 무덤 6천 기를 찾아내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 훈장에는 당시 헝가리가 겪어야 했던 복잡한 역사도 함께 담겨 있다. 그런데 왕위 계승자이자 전쟁 영웅이었던 노인의 현실은 영 빠듯하다. 가진 돈의 거의 전부를 전기료로 쓰면서도 그는 “더 이상은 불을 때지 않겠다”며 전기난로를 사용한다. 전기료가 그렇게 부담스러우면서도 왜 굳이 전기난로를 고집하는 걸까. 그건 그렇고 잔뜩 모여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곁들인 와인 탓인지, 세월이 무거워진 탓인지 이내 잠에 들어버린 요지 아저씨. 거대한 역사와 한 사람의 초라한 일상이 한 몸 안에서 겹쳐 보이는 모습에 착잡함을 느끼며 눈길을 거두기 어려운데, 역사학자 버디지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이 요제프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한 말을 꺼낸다.

“우리에게는 아르파드 왕가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이 좋은 서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왕이 필요하고, 당신은 바로 그 자리에 딱 맞습니다.” (p. 68)

여기서 ‘좋은 서사’라는 말이 여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지 아저씨에게 지금 왕좌에 오르는 일보다 더, 더,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서로 등을 돌리게 된 가족 문제를 정리하는 것이다. 해 질 녘 테라스에 앉아 늦봄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는 평온한 일상. 그 아름다운 풍경 너머로, 늘 목에 큰 가시가 박힌 듯한 심정으로 살아온 건 아닐까. 눈앞의 풍경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누리기에는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것이 너무나 많았을 것만 같다.

더 이상의 전개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여러 소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저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움직이듯 세상과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기준이 분명한 요지 아저씨의 시선과 말을 따라가면 될 뿐이다. 사뭇 진지함이 오가는 상황에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읽다가 난데없이 입에서 어이없는 실소가 터지게 만들기도 하는 이야기에 웃어? 울어? 말어? 싶은 순간들. 최대한 웃음 포인트를 살리고자 했다는 번역가의 마음이 곳곳에서 느껴졌고, 즐기기만 하면 됐다. 에구, 이렇게만 말하고 끝내는 것이 아쉬워, 기억에 남는 이야기 조금만 더 담고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요지 아저씨가 오늘날의 삶에서 사라진 도덕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정직해지시오, 용감해지시오, 인내하시오, 그의 목소리는 울려 퍼졌다, (...) 이러한 고귀한 원칙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도우시오, 이것이 단순한 이성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바이며, 이것만 따르면 충분하고, 다른 어떤 지침도 필요하지 않소.” (p. 161)

요지 아저씨가 말하는 삶의 원칙은 거창한 교리나 신념이 아니라, 의외로 단순했다. 정직할 것, 용감할 것, 인내할 것. 그런데 이게 참 별것 아닌 말 같으면서도 쉽지가 않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기, 두려워도 해야 할 말을 하기, 금방 달라지는 게 없어도 조금 더 견디기. 다 아는 이야기인데 막상 내 일이 되면 또 달라진다. 무엇이 옳은지는 알고 있는데, 매번 그쪽을 선택하며 사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그저 상황이 조금은 나아지는 쪽으로 기울여 보는 거다, 오늘도.

사람이 평생을 살아도 그 인생 안에 도저히 들어맞지 않는 일이 항상 하나쯤은 있어요, (p. 274)


이 책의 번역가 김보국 님은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죔레는 거기에>의 경우 외국어로는 처음으로 한국어로 번역한다는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선뜻 번역 의뢰를 받고는 덥석 번역을 맡겠다고는 하였으나, 헝가리 내에서 작품 관련 논의를 살펴보던 중, <사탄 탱고> 이후 점점 더 난해해지는 크러스너호르커이 작품의 정점이라는 어느 독자의 댓글을 읽고, ‘큰 나무에 도끼가 제대로 물렸다’라는 헝가리 속담이 떠올랐다.”

번역가에게는 처음으로 이 작품을 한국어로 옮기는 호사였다면, 독자인 나에게는 그 번역을 통해 이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한 여름날의 즐거움이었다. 헝가리를 사랑하는 번역가가 헝가리를 사랑하는 요지 아저씨의 마음을 헤아리고, 헝가리를 사랑하는 크러스너호르커이의 글을 우리에게 전해준 것 같은 느낌. 헝가리를 향한 마음이 한 사람에서 또 한 사람을 거쳐 내게까지 건너온 것 같다. 작가의 또 다른 매력, 아름답기까지 한 문장을 만날 수 있었고, 요지 아저씨와 그의 심장, 죔레까지 한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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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8-12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책이 2권 있는데 아직 못 읽고 있어요. 재미는 없는듯한데...별5개라니!! 안보면 안될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곰돌이 2026-08-12 13:32   좋아요 0 | URL
읽는 데 문제는 전혀 없는데, 개인적으로 <죔레는 거기에>는 라슬로 작품을 좀 읽고 마지막쯤 에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읽다보면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이나 <헤르쉬트 07769>가 떠오르는 장면들이 직간접적으로 (조금) 나오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삶의 막바지에 다다른 노인이라 그런지, 크러스너호르커이가 그동안 써온 세계와 인물들이 파노라마처럼 쭉 떠오르는 그 느낌적인 느낌이 있었어요. ‘아, 뭔가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일렁이는 감정을 조금 더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소장하고 계신 책 중에 당연히 <사탄탱고>가 있으실 테니, 혹시라도 그 책이 별로라면 이 책까지 읽게 되진 않으시겠지만 ㅋㅋㅋ 괜찮으셨다면 이 책은 무조건 추천이요.

이상 돌팔이였습니다.
 
죔레는 거기에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0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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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마음에 남은 건 한 인간이 사랑했고, 잃고, 살아온 시간이었다. 요지 아저씨가 들려준 삶의 이야기가 이토록 쓸쓸하고 아름다울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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