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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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로 변한 도시를 떠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엄마 아빠와 떨어져 낯선 시골 할머니 집에 맡겨져야 하는 상황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는 아이가 있을까.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미 집안에 감도는 불안한 기운을 느낀 순간부터 이 모든것이 현실이 아니기를 바랐을지도. 그래서 헐레벌떡 뛰어나와 두 팔로 맞이하며 쌍둥이 손자들을 향해 “우리 강아지들”이라며 반겨주는 게 아닌, “개자식들”이라고 부르는 할머니를 마주하면서도 겁먹거나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사람들이 너무나 현실 같지 않아서, 도저히 놀랄 수조차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정말 상처받지 않았는지, 놀라지 않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지극히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적인 묘사만으로 쓰인 글을 읽으며 추측할 뿐이다.

작년에 이 책의 앞부분만 대충 훑었을 때, 할머니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 채로 덮었던 기억이 난다. 하도 입이 험하고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어서. 그런데 다시 찬찬히 읽다 보니, 지옥 같은 날들을 살아온 할머니의 드러나지 않은 삶을 자꾸 유추하게 된다. 내가 이 할머니에게 연민을 느끼게 될 줄이야. 그래도 이름 한 번 불러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손자들에게 아픈 말만 쏟아냈을까 싶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한 번쯤 대들 법도 한데, 대들기는커녕 오히려 할머니가 고운 말 한마디 없이 자신들을 찔러대는 이유마저 이해한다는 듯 굴어댄다. 아니지, 할머니와 피붙이 손자의 관계라기보다는, 지옥 같은 세상을 먼저 살아낸 생존자와, 그 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가는 아이들의 기묘한 동행 같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안쓰러워하는 나를 향해, 아이들은 오히려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뀔 것만 같다.

“우는 건 소용없는 짓이에요. 우리는 절대로 울지 않아요.” (p. 49)

전쟁터에 나가 행방을 알 수 없는 종군기자였던 아버지의 기질을 닮아서인지 탐구욕이 대단해, 할머니 몰래 집안 곳곳을 살펴보기도 한다. 가진 돈도 없이 찾아간 문방구에서 주인에게 기어이 노트와 연필을 얻어내는가 하면, 집에서 챙겨온 사전과 할머니의 다락방에 있는 성경책으로 공부하며 글을 쓰기 시작한다. 둘만의 작문 시간에는 규칙이 존재하는데,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너무나 모호하다는 이유로 배제한 채 오직 ‘사실에 충실한 묘사’만으로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념과 근성이 대단하지만, 때때로 어린아이답지 않은 냉혹함과 잔인한 결을 비출 때면, 마치 생존이라는 목적만 남은 것처럼 보여 그 모습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뭔가 이건 아닌데,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기껏해야 초등학생 정도밖에 안 된 아이들인데, 정말 기가 막히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쩌면 이미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무조건 버텨야 한다는 마음으로 할머니 집 문턱을 넘은 것이 아닐지.

그런데 1부가 끝이 나도록 이 쌍둥이들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대도시에서 살았다는 사실만 있을 뿐 어디인지는 알 수 없고, 시골이라는 공간만 있을 뿐 할머니의 집이 어디인지도 지워져 있다. 그래서인지 분명 1부는 ‘우리’라는 1인칭 복수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인데도, 마치 타인의 삶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기록한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들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슬픔도, 두려움도, 상실의 고통도, 일단은 살아남기 위해, 엄마와 다시 만나 본래의 삶으로 돌아갈 그 이후로 미뤄둔 것뿐인지도 모른다.

전쟁통 속에서 오직 생존이 우선이었기에 평생 억척스럽게 일만 하며 사람의 온정 따윈 사치로 여기며 살아온 할머니. 그리고 그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단 한 번도 온전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채 신체적 결함 때문에 마을 안에서도 짐승 취급을 당하며 밀려나, 기어이 짐승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 언청이 소녀. 지워지지 않는 비극의 껍데기를 씌운 채 살아가는 이들을, 나 역시 끝내 그 껍데기를 벗겨내지 못한 채 할머니를 순수한 노인으로, 소녀를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참 지독하리만큼 슬픈일이다.

이 모든 것들을 “그냥 이런 일들이 있었다.” 하고 쓱 베어내듯 보여주는 1부를 지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인 서점 주인 빅토르가 등장하는 2부에 이르자, 자꾸만 이런저런 생각들이 끼어드는 탓에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더뎌졌다. 평화롭고 정상적인 일상에서는 오히려 숨을 쉬지 못하고,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야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고 글을 쓸 수 있다고 믿게 된 알코올중독자 빅토르. 그의 삶을 마주하면서, 그제야 내가 이 소설에서 ‘붙잡게 된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과,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이미 내면이 지옥이 되어 평화 속에서조차 구원받지 못하는 삶. 어느 것이 더 지옥일까.

내가 무엇을 쓸 수 있었겠는가? 내 생활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주변을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쓸 거리라고는 전혀 없었다. 누나는 끊임없이 내게 차를 날라다주고, 가구를 닦아주고, 내 장롱 안의 내 옷들을 정리해주었다. 누나는 내가 글을 얼마나 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 어깨 너머로 넘겨다보곤 했다. 그래서 나는 종이를 자꾸 메워나가야 했다. 나는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베껴놓았다. 가끔씩 누나는 내 어깨 너머로 그 문장들을 한두 장 읽어보고는 멋진 문장이라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나를 격려했다.
누나가 나의 속임수를 알아챌 염려는 없었다. 누나는 책이라고는 통 읽지 않으니까. 누나는 평생 동안 단 한권의 책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만 해왔기 때문에 책을 읽을 시간도 없었다. (p. 338)

3부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안다고 믿었던 것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나는 경험을 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더 눈길이 갔던 것은 인간의 존재 자체보다, 상처가 한 인간을 만들어가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인간의 영혼을 안에서부터 서서히 무너뜨리는 상처는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또 어떤 방식으로 선을 그어 말해질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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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7-02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둥~ 헝가리 욕쟁이 할머니 등장이군요.

곰돌이 2026-07-02 22:08   좋아요 0 | URL
할머니는 전쟁 이전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더라고요. 끝이 날 거라는 기대도 없이, 생존만을 위해 너무 오랜 시간을 버텨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인지 더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었던 것 같아요.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2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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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서랍 속에서 꺼낸 듯 기억의 먼지가 가득한 문장을 따라가는 것이 흥미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참 희한하게도 시선을 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는 동안 묘하게 느껴지는 차분함도 나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왜 더 깊숙이 파고들어 가지 않지? 왜 더 끄집어내지 않지?’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는데, 지금의 평온을 굳이 깨고 싶지 않아 작은 소음조차 내지 않으려는 사람 특유의 어딘가 잔뜩 움츠린 듯한 느낌이었다.

학교 하나 보내는 데도 사회주의(붉은 위험)니, 종교 극단주의(검은 위험)니 하면서 온갖 거창한 사상과 이념을 갖다 대고 저울질을 해야 하는 오즈의 주변 환경부터 국가와 언어, 시온주의의 이상을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친가와, 잃어버린 고향의 기억이 한숨처럼 맴돌던 외가의 차이까지 읽기만 해도 가슴이 갑갑했다. 어린시절의 오즈는 또래 아랍인 여자아이에게 대화 한 번 거는 것조차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불신과 긴장을 의식하면서 “나는 네게 선의를 품고 있어”라고 증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짐을 지고 평범한 아이로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러니 가족과 이웃의 상처만 조심조심 들여다보는 그 좁은 시선이 어쩐지 이해가 가기도 했다. 알 것 같다고는 말하지만 내가 얼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을까. 자기 그림자에 놀라 두려움부터 느껴야 한다는 걸.

동유럽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자라며 아름다운 문장과 낭만을 가득 품고 살았던 오즈의 엄마, 파니아. 하지만 나치에 의해 동포와 친구들을 잃고 고향마저 파괴되어 버린 상실감, 그리고 척박한 예루살렘의 현실이 주는 괴로움으로 그녀는 서서히 빛을 잃어가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뛰어난 지성을 지녔지만, 감정을 표현하고 헤아리는 데 서툴렀던 남편 곁에서 파니아가 홀로 겪은 우울증과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선택은, 결국 이 ‘집 안의 어둠’과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알지 못했고, 말하지 못했고,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원망도 했지만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는 무력감과, 엄마에게 자신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절망감으로 오즈는 오랜 시간 자신을 자책했다. 어린 소년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방구석에서 숨을 죽이거나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를 채워가고 있다고 믿는 것뿐이었을 테니까.

아버지는 어머니 무릎에 머리를 대고, 돗자리에 대자로 누워, 풀잎을 씹고 있었다. 나도 똑같이 했다. 돗자리에 누워, 어머니의 다른 쪽 무릎을 베고, 풀잎을 씹으며, 겨울바람과 비가 깨끗이 씻어내린 봄에 취한 곤충들의 윙윙 소리와 싱그러운 향으로 가득한 따스한 공기로 내 허파를 채웠다. 그녀가 죽기 2년 전인, 그 봄 축제 때 텔아즈라 숲에 우리 셋이 있던 장면에서 시간을 멈출 수만 있다면, 글쓰기도 여기서 멈출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p. 231)

우리는 그해 가을, 같은 독방을 쓰는 세 명의 사형수처럼 함께 묶여 들러붙어 있었다. 아직 우리는 각자였다.
천 년의 빛의 세월이 우리를 갈라놓았다. 아니, 빛의 세월이 아니다. 어둠의 세월이.
그러나 그들이 겪고 있는 것에 대해 내가 뭘 알았을까?
그리고 그들 둘은 어땠을까? 아버지는 어머니의 시련에 대해 뭘 알았을까? 어머니는 그의 고통에 대해 뭘 이해했을까?
천 년의 어둠의 세월은 모두를 떼어놓았다. 한 독방에 갇혀 있던 세 명의 죄수까지도. (p. 308)

살아가면서 얻은 상처나 불행이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주위를 에워싸면서 결국 그 사람의 결이 되어버릴 때가 있다. 오즈가 평생 어머니의 부재와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것처럼.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무엇이 일어났는가’라는 역사적 사실보다, 그 일이 한 사람에게 ‘어떤 흔적으로 남아 계속 작용하는가’라는 점에 더 주목하며 읽어 나갔다. 그러나 한 사람의 과거로만 뚝 떼놓고 볼 수 없었기에,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1권을 읽고 남겼던 “오즈가 비추는 곳은 바깥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좁고 밀폐된 ‘내부의 숨 막힘’이었다”라는 감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오즈의 모습을 아쉽게 바라봤음에도, 나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구름 한 조각이 되고 싶었다. 달 표면에 놓인 돌덩이가 되고 싶었다. (p. 331)

이제,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세상 속에서 도대체 어떤 마음가짐으로 버티고 살아가야 할까? 당장에 내 가족의 아픔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채 놓치듯 떠나보냈는데 전쟁과 증오로 가득 찬 세상에서, 당장 내 반대편에 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내 마음대로 골라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면 서로 사랑할 수 없을 때, 우리가 서로에게 행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걸까? 오즈의 외할아버지는 그 답을 거창한 곳이 아닌 집 안에서 찾는다.

“그런데 지옥이 뭐냐? 천국은 뭐고? 분명 그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있단다. 우리 각자의 집에 있어. 모든 방에서 너희는 지옥과 천국을 발견할 수 있을 게다. 모든 문 뒤에. 두 겹 담요 아래. 사실은 이런 거야. 작은 사악함으로 사람은 사람에게 지옥이 되지. 작은 연민, 작은 관대함으로 사람은 사람에게 천국이 되고.” (1권, p. 290)

거대한 비극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작은 연민과 관대함만큼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외할아버지는 오즈에게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 말은 멀리 있는 세계를 향한 말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먼저 드러나는 말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말 한마디를 헤아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침묵의 세월이 흘러갔던가.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아픔을 들여다보는 눈’을 통해 노년의 오즈는 이해와 후회의 잔인한 시간 속으로 들어섰고, 그 안에 남은 것은 붙잡을 수 없는 순간들뿐이었다. 후회, 먼지처럼 날아가 버렸다가도 이내 또 달라붙는 후회가 어디 그만의 것일까. 덜 후회하고 더 헤아리며 살고 싶어 다른 이들의 삶을 읽고 또 읽는데, 읽는 만큼 내가 마음도 읽고 사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서로에게 작은 지옥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그 생각만 겨우 붙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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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1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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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쯤 읽은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시블리의 <사소한 일>이 떠올랐다. 1948년, 이스라엘 점령군의 무자비함 속에 짓밟힌 베두인 소녀의 운명과 수십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과거를 마주해야 했던 팔레스타인 여성의 시선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들에게 그해는 나라를 빼앗기고 총칼 앞에 강제로 추방당해야 했던 ‘나크바(대재앙)’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같은 역사의 다른 자리에 서 있었던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의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를 펼쳤다. 유럽 곳곳의 오랜 반유대주의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떠나온 이민자와 난민들로 가득했던 예루살렘. 그해 유대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며 환호한다. 하지만 또다시 갈 곳 없는 난민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한쪽은 나라를 빼앗기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야 했고, 다른 한쪽은 오랜 박해의 기억 속에서 또다시 갈 곳 없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했다. 이 대립 속에서 작가가 어떤 시선으로 이야기를 써냈는지보다, 결국 어느 쪽이든 비극과 고통을 겪어야 했을 무고한 시민들의 처연한 삶이 먼저 눈에 밟혀서인지 가슴이 턱 하고 막혔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흐릿한 자전적 소설 속에서, 어린 ‘오즈’는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 자신이 자란 예루살렘의 케렘 아브라함 마을을 ‘체호프의 소유지’라고 말한다. 마을로 이주해 온 유대인 중 상당수가 러시아나 동유럽에서 도망쳐 온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에 몸은 중동 땅에 있지만, 여전히 유럽의 문화와 러시아 문학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향수와 미래의 불안 사이에 갇혀 있던 사람들, 시간이 멈춘 듯한 그곳의 공기, 그리고 그 안에서 서서히 빛을 잃고 시들어가던 어머니까지. 그래서일까. 오즈는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활기차게 살아가는 이웃 도시 ‘텔아비브’의 생기와 밝음을 갈망한다.

내 삶도 새로운 노래, 태양이 작열하는 날의 시원한 물 한 잔처럼 맑고 정직하고 순전한 삶이 될 것이다. (p. 16)

유월절에 처음 가본 텔아비브는 경악할 만큼 놀라운 곳이었다. 늘 집 창문 너머로 먼지 쌓인 나무나 꽉 막힌 벽만 보며 자란 꼬마에게, 거긴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한창 온몸으로 부딪치고 뛰어놀고 싶을 나이인데, 오즈는 그 자유를 오직 상상으로만 채운다. 그런데 애처롭게도, 아니 어쩌면 참 다행히도 이 덧없어 보이는 상상이 생기 없는 우울함 속에서 오즈를 숨 쉬게 하고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되어준다. 지독한 결핍으로 눅눅해진 집구석에서 벗어나 바깥세상을 꿈꾸는 그 순간만큼은, 마음껏 빛나고 자유로웠을 테니까.

처음엔 역사적 수난을 앞세운 서사가 펼쳐질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오즈가 비추는 곳은 바깥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좁고 밀폐된 ‘내부의 숨 막힘’이었다. 오즈가 자란 예루살렘은 외부의 전쟁만큼이나 내부의 사상적 충돌과 갈등 역시 치열하게 부딪히던 곳이었고,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가진 역사의 상처보다 오즈를 더 짓눌렀던 건, 어른들의 거대하고 갑갑한 이념의 세계였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당장 땅과 군대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집안의 시온주의자 어른들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끝내고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우겠다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지만, 신의 뜻보다 앞서 인간의 힘으로 역사를 바꾸려는 움직임을 경계했던 메아 셰아림의 정통파 유대인들과의 갈등이 컸다. 이 모든 상황을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그저 무겁기만 했지만, 그렇다고 집안 어른들이 그저 목을 죄는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대 학계의 거물이자 강한 민족주의적 신념을 지닌 큰할아버지로부터 유대인들의 고대 언어인 히브리어 단어를 배우는 시간만큼은 오즈에게 갑갑한 이념의 세계와는 다른 경이의 세계였다. 부르는 이름 없이 겉돌던 일상에 ‘셔츠’나 ‘양말’ 같은 살아있는 이름을 붙여, 진짜 현실을 선물해 주는 마법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오즈는 그 속에서 언어의 힘을 얻었다.

큰할아버지를 둘러싼 어른들은 자신들을 밀어내고 박해했던 유럽의 역사와 정치를 뼈저리게 증오하면서도 도스토옙스키와 체호프의 세계를 사랑하고, 괴테와 실러의 시를 읊조렸다. 히브리 문학의 부활부터 사회주의와 토지 균등 분배론에 이르기까지, 온갖 거창한 사상적 논쟁을 서재에서 고상하게 벌이면서도, 정작 그들이 ‘조상의 땅’이라 주장했던 곳에서 흙먼지를 마시며 농사를 짓거나, 가난한 아랍인들과 섞여 살아야 하는 현실은 경멸했던 지식인들이었다. 오즈는 이런 어른들의 위선과 모순을 빼놓지 않고 끄집어내는데, “모든 적들을 다 물리쳐야만 해. 우리가 흠씬 두들겨 패면 그들은 우리에게 평화를 구걸하게 될 거다 (p. 206)”라며 강한 힘과 민족을 앞세웠던 큰할아버지의 세계관과, “이론에 따라 삶을 구성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는 일이야! (p. 310)”라며 인간과 정의를 먼저 생각했던 외할아버지의 세계관,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라진 부모의 성향까지 모두 어린 오즈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어른들의 세계였을 것이다.


국립도서관 사서였던 아버지 덕분에 늘 책과 가까이 지냈던 오즈에게, 인생 최고의 날은 아버지가 책장 한 칸을 비워 자신만의 책을 꽂도록 허락해 준 날이었다. 이 작은 도서관이야말로 내 편과 네 편, 허락된 행동과 금지된 행동 등으로 모든 게 명확하게 갈라져 있었던 현실과는 다른 공간이자, 수많은 다른 길을 꿈꾸고 상상할 수 있는 온전한 세계였다. 책을 펼치고, 상상하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동안, 마음속 상처와 흉터를 꼭꼭 숨기거나 억지로 씻어내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조각조각의 일화만으로 오즈의 삶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언제 숨통이 트였고 어떤 미래를 꿈꿨는지는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왜 그가 작가가 아닌, ‘한 권의 책’ 그 자체가 되고 싶어 했는지도 말이다.

나는 사람들은 왔다가 가고 태어나고 죽지만, 책은 영원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 내 야심은 자라서 한 권의 책이 되는 것이었다. 작가가 아니라 책 말이다. 사람들은 개미처럼 죽을 수 있다. 작가들은 어떤 인물이든 쉽게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 계획적으로 파괴하려 들어도 늘 하나의 복사본이 살아남고, 레이캬비크나 바야돌리드 혹은 밴쿠버의 어딘가 인적 드문 도서관 한구석 선반에서의 삶을 계속 즐길 기회를 얻는다. (p. 46)

이 책 안에 담긴 복잡한 역사와 줄거리를 다 떠나서, 무언가 한쪽에 너무 치우치면 반드시 놓치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특히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 속 인물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줄거리에 이끌려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과거에 놓았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나를 계속 읽어 나가게 하는지 다시 한번 멈춰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 이어졌고, 어떤 글은 그 문장 속에 그대로 파묻히고 싶기까지 했다. 이 책을 통해 얻을 거라 예상한 감정이 전혀 아니다. ‘지나친 이입이었을까’라는 소심한 염려 섞인 마음조차 이내 안도로 바뀌며, 안개 같은 무언가에 가려져 있거나 어둠 속에 묻어 둔 이야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야 꺼내놓는 오즈의 기억을 더 따라가 보려 한다. 그 좁은 책장 한 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얼마나 멀고 험난한 세월을 돌아 여기까지 왔는지, 가장 아프고 따뜻한 눈빛으로 들여다보는 노년의 오즈 곁에 아무도 모르는 존재인 나는 그저 가만히 나란히 서본다.

그대여, 묻지 말라. 이것들이 사실이오? 이게 저 작가에게 일어난 일이오? 스스로 질문하라. 자신에 관해 물으라. 그러면 그 답을 당신에게 남길 수 있을 것이니. (p.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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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어둠의 이야기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1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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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올해 상반기 읽은 책들 가운데 오래 기억에 남을 책이다. 줄거리에 끌려 집어 들었을 뿐인데, 내가 왜 내려놓았던 책을 다시 펼쳤는지, 그리고 왜 계속 책을 읽는지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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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퐁스 을유세계문학전집 9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정예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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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퐁스가 신이 나서 걸어오고 있다. 콧구멍이 벌름거리도록 만족스러운 예술품을 손에 쥔 것이다. 대중극장의 지휘자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실뱅 퐁스. 이제는 노파들이 젊은 시절 유행하던 옷으로나 기억할 법한 스펜서를 입고 다니는 노총각인 그는 입고 먹는 데 들어갈 돈까지 아껴 예술품을 사들인다. 그렇다고 굶고 살 순 없는 노릇 아닌가. 퐁스 선생에겐 다 계획이 있다. 바로 자기를 불러주는 파리 사교계와 친척 집을 돌아다니며 숟가락만 얹는 것! 눈칫밥이 대수랴, 한 움큼의 즐거움을 선사해 줄 작품도 손에 넣고 미식을 즐길 수 있다는데! 아니, 그런데 발자크 너무하다. 곧 퐁스에 대한 얼평이 시작되는데 좋은 게 하나도 없다. 듣기만 해도 울적해지는 눈, 코, 입, 눈썹, 얼굴형 묘사에 이어 여성의 마음을 끌지 못한다는 말 안 해도 알 법한 상태(?)를 굳이 또 언급하며 소개에 정점을 찍는다. 그래도 삶의 즐거움을 찾고, 또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 내뿜는 열정 때문인지 시작부터 기분 좋게 읽을 수 있었다.

한때 전도유망했던 퐁스가 이제는 입에 풀칠하기 위해 싼값에 음악을 넘기는, “낡아빠진 8분 음표 (p. 15)” 같은 무명의 삶으로 전락했다. 그나마 위안이 돼줄 만한 게 있다면 그의 집에 빼곡히 차 있는 예술품들이라고 해야 할까? 부모에게 상속받은 재산마저 오직 ‘아름다움’을 소유하기 위해 고스란히 바친 퐁스가 무모해 보이기도 하면서 고독한 예술가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예술품 못지않게 퐁스가 사랑한 건 음식, 한마디로 그는 식도락가였다. 왕실의 화려함이 남아 있던 제정기 시절엔 손님 대접도 후했기에 퐁스는 젊고 잘나가던 예술가로서 귀한 대접을 받으며 파리 사교계의 풍성한 식탁에 당당히 초대받았다. 퐁스 역시 감사의 표시로 자신이 작곡한 연가를 들려주거나, 소소한 잔심부름을 해주는 것으로 서로 기분 좋게 밥값을 톡톡히 하곤 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이 시들해지자, 사람들의 인심 역시 야박해졌다. 점점 퐁스를 부르는 초대장은 뜸해졌고, 한때 품격을 위해 모셔가던 예술가를 이제는 그저 공짜 밥이나 바라는 처량한 식객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제는 맛있는 냄새를 쫓아 경쾌하게 달리던 두 다리 대신, 야윈 손으로 낡은 지팡이를 의지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 고독하고 처량한 노년의 길을 퐁스는 혼자 걷지 않는다. 중년의 길목에서 만난 영혼의 단짝, 독일인 음악가 슈뮈크가 있기 때문이다.

두 친구 중에 한 명이 다른 한 명보다 스스로 우월하다고 믿을 때만큼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것은 없다. (p. 28)

발자크는 우정을 완전한 평등의 관계로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이상보다 현실을 본 걸까. 그렇다고 퐁스와 슈뮈크의 우정이 불편하게 그려지는 건 아니다. 서로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상대에게 으스대지 않으면서도 ‘저 녀석 내가 잘 품어줘야지’와도 같은 나쁜 의도가 없는 보호 본능과 염려에서 나오는 배려가 애틋했고, 참 섬세한 사람들이구나 싶었다. 충분히 공감했다. 이런 모습은 사실 우리 삶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니까. 부모 자식 간에 ‘필수적인 존재’에서도 그렇듯이, 누군가를 온전히 품어줄 만큼 든든한 존재가 되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내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사물이든 사람이든)이 곁에 있길 바라고, 거기에 의존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 문장 안에도 사람을 여러 방향으로 들여다보는 시선이 담겨 있어서인지, 다시 곱씹게 되는 문장들이 많다.

어느 날, 퐁스는 체면을 생각해서 밥 한 끼 내어주는 유일한 사촌인 법원장 집으로 발길을 서두른다. 오늘은 명분이 그럴싸하다. ‘비루한 식객’쯤으로 여기는 법원장 부인에게 부채를 선물로 건네기 위해서! 겉은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예술을 누리며 자라온 뼛속부터 명문 귀족이 아니었기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부채를 한물간 고물 취급하는 부인에게 퐁스가 눈을 반짝이며 부채의 진가를 조목조목 짚어주는 장면은 마치 <진품명품> 파리 특집을 보는 것 같았다. ㅋㅋ 안타깝게도 이날 퐁스는 쫓겨나다시피 밖으로 내몰린다. 사람들의 냉소적인 시선을 그대로 흡수해 버리는 ‘습자지 같은 감성’의 소유자 퐁스의 두 줄기 굵은 눈물에 내 마음마저 미어졌다는... 흑흑.

치사스러워서라도 안 먹고 말면 되는데, 그에게는 식도락이라는 운명이 너무나 가혹하게 발목을 잡는다. 사람들 눈총을 받으면서도,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코를 찌르는 고급 요리의 냄새를 맡는 순간 이성이 마비되고 마는 이 지독하고도 슬픈 미식가의 본능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만,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공짜 최고급 요리에 목을 매는 그 구차함에는 속이 터진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의 판이 완전히 뒤바뀌는데, 퐁스가 평생 방구석에 모아온 예술품들이 실은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었다는 것! 모든 가치가 돈으로만 환산되던 세상에 이런 빅 이슈가 터졌으니 냄새 맡은 하이에나들의 등장 또한 당연? 게다가 재산이 ‘유산’의 의미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겠지?

줄거리 자체는 퐁스의 ‘예술품 컬렉션’ 뒤로 각각 다른 종류의 ‘탐욕 컬렉션’이 펼쳐지는 익숙한 설정인데, 인간 내면의 허영심과 위선, 어설픈 우월감, 속물근성 등을 여러 인물의 삶 속에 채워 넣어서인지 마냥 꿀떡꿀떡 읽히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결국 온갖 감정이 쌓이다가, 한낱 먼지인 인간이란 뭐고, 산다는 게 대체 뭐길래와 같은 허탈감에 마음이 바닥으로 툭 내려앉고야 말았다.

입에 자물쇠라도 채우고 싶은 분노 유발자가 꽤 많이 나오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나 역시 여러 가능성이 내 눈앞에 놓였을 때 결국 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아 보이는 쪽, 더 유리한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때로는 그런 기대가 썩 떳떳하지 않은 선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다양한 환경에 따른 고유한 차이들이 있겠지만, 같은 결과들이 되풀이 된다. (p.150)”는 문장이 내 마음 귀퉁이 한 부분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백번 천번 양보해서 인간의 보편성으로 들여다보려다가 결국 내 안의 속물성을 발견한 꼴.

책을 덮고 나서도 마음 한구석 깊게 맴도는 건, 퐁스와 슈뮈크의 관계에서 본 결핍과 사랑(우정)이다. 자신에게 부족한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예술품을 수집하는 데 평생을 바친 퐁스, 그리고 정서적으로 온전히 발붙일 곳 없던 세상에서 오직 퐁스라는 인간의 마음 하나만을 수집하고 간직하며 그것에 자신의 온 영혼을 바친 슈뮈크. 두 사람은 결핍을 충족시키는 방법뿐 아니라 자신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을 지키는 방식 또한 달랐다. ‘계속 잘 먹고 살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잘 차려진 밥상을 포기할 수 없었던 퐁스였고, 또 그런 친구를 위해 매일 별미를 준비한 슈뮈크였다. 하지만 발자크는 세속적인 세상과 대비되는 이들의 우정만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복의 원천이 도리어 슬픔의 원인이 되는 모순적인 과정까지 담아 가슴을 훑어놓는다. “사람은 어떤 종류든 만족을 느끼며 살아야 진정으로 존재한다(p. 23)”는 전제하에. 더욱이 그 수많은 등장인물 중에서도 하필 가장 연약하고 선한 두 사람을 통해서 말이다.

처음엔 이 소설이 탐욕을 다룬 이야기 위주일 것 같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줄거리 이면에 얽힌 시선들이 워낙 복합적이라 퐁스와 슈뮈크,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감상 위주로 채워봤다. 그런데도 말이 길어졌다. 겨우 이 소설 한 권 읽어보고 다 알 순 없겠지만, 발자크가 인간도 세상도 그리 믿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평생을 거대한 ‘인간 희극’에 바친 걸 보면, 포기할 수 없었나 보다. 인간을.

“집구석에서 몇 명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내 야심의 전부였건만! 모두에게 인생은 쓴잔과 같지.” (p.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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