죔레는 거기에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0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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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호흡과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도입부에 확 빨려 들어가 100쪽을 쭈욱 읽어버리게 만든 <사탄탱고>의 매력에 빠졌던 작년의 그 짜릿함을 기억한다. 황폐한 마을, 곰팡내 가득한 방,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던 그 음울함이 아직도 잔재처럼 머릿속에 콱 박혀 있는데, <죔레는 거기에>를 펼치자 웬걸, 점심으로 먹을 감자국수를 만드는 한 노인이 나온다. 예상 밖이다. 뭔가 소박하고 인간미도 느껴지고, 첫인상부터 내가 알던 작가의 느낌과는 꽤 다르다. 그런데 또 가만히 읽고 있으면 이 편안함 속에 놓치기 힘든 미세한 긴장감이 있다. 대체 이 노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역사와 맞물려 돌아가는 이야기도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하고, 그렇게 몰입해서 읽다 보니 결국 이러나저러나 역시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이 맞긴 하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과도 거리가 멀어 사람도 거의 살지 않는 산 위의 집에서 살아가는 올해 아흔두 살의 은퇴한 전기 기술자 요제프(요지 아저씨)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뒤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전기 기술자와 유랑 가수, 전직 교사, 퇴역 군인 등 서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찾아오기 시작한다. 더 이상한 건 모두가 그를 “폐하”라고 부른다. 요제프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살아온 왕위 계승자라는 것이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집을 찾아온 사람들은 그를 헝가리 국가의 기틀을 세운 중세 마자르계 왕조, 아르파드 왕가의 마지막 후손으로 여기며 왕으로 추대해 왕정복고를 이루려고 한다. 물론 단순한 호기심으로 찾아온 사람도 있고, 정치적 계산을 하는 이들에게는 그가 더없이 좋은 상징이기도 하다. 영 느낌이 싸하다. 어쨌든 숱한 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요제프는 왕좌에 오르는 일에 별다른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정작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랑했던 사람들, 가족, 그리고 한 인간으로 살아온 긴 세월에 관한 기억들이다. 무엇을 잃었고, 누구를 사랑했으며, 무엇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지.

처음에는 요제프가 비밀을 간직한 채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은둔자 같은 노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국회와 대주교, 유럽연합 관계자, 독일 대통령에게까지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논리를 끊임없이 세상에 던졌다. 자신을 왕위에 올리든지, 아니면 그에 걸맞은 존엄을 인정해 연금을 지급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답장을 기다린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답은 오지 않는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면 요제프 역시 그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헝가리. 요제프는 독일 병사들의 무덤 6천 기를 찾아내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 훈장에는 당시 헝가리가 겪어야 했던 복잡한 역사도 함께 담겨 있다. 그런데 왕위 계승자이자 전쟁 영웅이었던 노인의 현실은 영 빠듯하다. 가진 돈의 거의 전부를 전기료로 쓰면서도 그는 “더 이상은 불을 때지 않겠다”며 전기난로를 사용한다. 전기료가 그렇게 부담스러우면서도 왜 굳이 전기난로를 고집하는 걸까. 그건 그렇고 잔뜩 모여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곁들인 와인 탓인지, 세월이 무거워진 탓인지 이내 잠에 들어버린 요지 아저씨. 거대한 역사와 한 사람의 초라한 일상이 한 몸 안에서 겹쳐 보이는 모습에 착잡함을 느끼며 눈길을 거두기 어려운데, 역사학자 버디지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이 요제프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한 말을 꺼낸다.

“우리에게는 아르파드 왕가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이 좋은 서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왕이 필요하고, 당신은 바로 그 자리에 딱 맞습니다.” (p. 68)

여기서 ‘좋은 서사’라는 말이 여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요지 아저씨에게 지금 왕좌에 오르는 일보다 더, 더,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서로 등을 돌리게 된 가족 문제를 정리하는 것이다. 해 질 녘 테라스에 앉아 늦봄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는 평온한 일상. 그 아름다운 풍경 너머로, 늘 목에 큰 가시가 박힌 듯한 심정으로 살아온 건 아닐까. 눈앞의 풍경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누리기에는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것이 너무나 많았을 것만 같다.

더 이상의 전개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여러 소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저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움직이듯 세상과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기준이 분명한 요지 아저씨의 시선과 말을 따라가면 될 뿐이다. 사뭇 진지함이 오가는 상황에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읽다가 난데없이 입에서 어이없는 실소가 터지게 만들기도 하는 이야기에 웃어? 울어? 말어? 싶은 순간들. 최대한 웃음 포인트를 살리고자 했다는 번역가의 마음이 곳곳에서 느껴졌고, 즐기기만 하면 됐다. 에구, 이렇게만 말하고 끝내는 것이 아쉬워, 기억에 남는 이야기 조금만 더 담고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요지 아저씨가 오늘날의 삶에서 사라진 도덕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정직해지시오, 용감해지시오, 인내하시오, 그의 목소리는 울려 퍼졌다, (...) 이러한 고귀한 원칙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도우시오, 이것이 단순한 이성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바이며, 이것만 따르면 충분하고, 다른 어떤 지침도 필요하지 않소.” (p. 161)

요지 아저씨가 말하는 삶의 원칙은 거창한 교리나 신념이 아니라, 의외로 단순했다. 정직할 것, 용감할 것, 인내할 것. 그런데 이게 참 별것 아닌 말 같으면서도 쉽지가 않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기, 두려워도 해야 할 말을 하기, 금방 달라지는 게 없어도 조금 더 견디기. 다 아는 이야기인데 막상 내 일이 되면 또 달라진다. 무엇이 옳은지는 알고 있는데, 매번 그쪽을 선택하며 사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그저 상황이 조금은 나아지는 쪽으로 기울여 보는 거다, 오늘도.

사람이 평생을 살아도 그 인생 안에 도저히 들어맞지 않는 일이 항상 하나쯤은 있어요, (p. 274)


이 책의 번역가 김보국 님은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죔레는 거기에>의 경우 외국어로는 처음으로 한국어로 번역한다는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선뜻 번역 의뢰를 받고는 덥석 번역을 맡겠다고는 하였으나, 헝가리 내에서 작품 관련 논의를 살펴보던 중, <사탄 탱고> 이후 점점 더 난해해지는 크러스너호르커이 작품의 정점이라는 어느 독자의 댓글을 읽고, ‘큰 나무에 도끼가 제대로 물렸다’라는 헝가리 속담이 떠올랐다.”

번역가에게는 처음으로 이 작품을 한국어로 옮기는 호사였다면, 독자인 나에게는 그 번역을 통해 이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한 여름날의 즐거움이었다. 헝가리를 사랑하는 번역가가 헝가리를 사랑하는 요지 아저씨의 마음을 헤아리고, 헝가리를 사랑하는 크러스너호르커이의 글을 우리에게 전해준 것 같은 느낌. 헝가리를 향한 마음이 한 사람에서 또 한 사람을 거쳐 내게까지 건너온 것 같다. 작가의 또 다른 매력, 아름답기까지 한 문장을 만날 수 있었고, 요지 아저씨와 그의 심장, 죔레까지 한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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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8-12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책이 2권 있는데 아직 못 읽고 있어요. 재미는 없는듯한데...별5개라니!! 안보면 안될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곰돌이 2026-08-12 13:32   좋아요 0 | URL
읽는 데 문제는 전혀 없는데, 개인적으로 <죔레는 거기에>는 라슬로 작품을 좀 읽고 마지막쯤 에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읽다보면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이나 <헤르쉬트 07769>가 떠오르는 장면들이 직간접적으로 (조금) 나오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삶의 막바지에 다다른 노인이라 그런지, 크러스너호르커이가 그동안 써온 세계와 인물들이 파노라마처럼 쭉 떠오르는 그 느낌적인 느낌이 있었어요. ‘아, 뭔가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일렁이는 감정을 조금 더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소장하고 계신 책 중에 당연히 <사탄탱고>가 있으실 테니, 혹시라도 그 책이 별로라면 이 책까지 읽게 되진 않으시겠지만 ㅋㅋㅋ 괜찮으셨다면 이 책은 무조건 추천이요.

이상 돌팔이였습니다.
 
죔레는 거기에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0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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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마음에 남은 건 한 인간이 사랑했고, 잃고, 살아온 시간이었다. 요지 아저씨가 들려준 삶의 이야기가 이토록 쓸쓸하고 아름다울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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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 크툴루의 부름 외 1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7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김지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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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운 두려움이던 시대를 떠올리며 읽었다. 그 불안이 얼마나 컸기에 한 인간의 상상력을 이렇게까지 밀어붙인 걸까. 봤지만 설명할 수 없고 말해도 믿어주지 않으며 결국 홀로 견뎌야 하는 그 고독이 이해할 수 없는 것 앞에 선 인간의 두려움과 맞닿은 소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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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리고 그때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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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작품 중, 겉으로는 아버지의 이야기지만 결국 딸이 오랫동안 삼켜온 감정을 꺼내는 일이기도 했던 <미스터 포터>를 아주 인상 깊게 읽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이들의 삶까지 토해내듯 써 내려간 딸의 심정이 오래 남았고, 그 인연이 <내 어머니의 자서전>으로 이어졌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한 사람의 삶에 식민주의와 사랑의 결핍이 남긴 흔적을 끝까지 따라가는 지독한 결기를 느끼면서도, 그런 삶마저 끝내 살아내는 사람의 힘 앞에서 서글픈 안심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그리고 그때>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이전 작품들처럼 분노가 격렬하게 터져 나오기보다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증오와 슬픔이 삶에 깊이 배어 있었다. 이전 작품들이 과거를 끌어올려 현재를 바라보게 했다면, 이번에는 과거가 현재를 찾아오는 이야기처럼 읽혔다. 킨케이드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자전적 성격이 짙고, 카리브해 앤티가섬 출신의 한 중년 여성이 작곡가인 남편 미스터 스위트와 미국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삶은 어떤 잔인한 뜻밖의 일을 준비했을까, 어떤 부당한 과업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떤 고된 임무를 이겨내야 할까. (p. 82)

어릴 적 엄마의 사랑을 받았지만, 결국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바나나보트를 타고 타국으로 떠나야 했던 미시즈 스위트. 사랑받았던 기억과 버려졌다는 마음의 상처를 동시에 안고 살아온 그녀에게 미국에서의 삶 역시 결코 아늑하지 않았다. 유럽 작곡가의 클래식을 듣고 자란 남편과,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섬의 노래를 들으며 자란 이민자 아내. 두 사람의 출발점은 너무나 달랐다. 한때는 그 다름에 끌렸을지 몰라도, 둘 사이에 놓인 문화와 기억의 차이는 끝내 메워지지 않았고, 그 틈은 차가운 권태로 남았다. 길쭉한 다리가 매력이었던 젊은 시절의 아내는 사라지고 지금은 그저 “바나나보트를 타고 온 끔찍한 년”(p. 17)이자 자신의 삶을 가로막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남편. 그런 무시와 냉소 속에서도 미시즈 스위트는 자식을 사랑하고, 집안을 돌보고, 부엌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가 글을 쓰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기 삶의 한 조각만큼은 끝내 놓지 않는 사람. 어릴 적부터 그랬다. 그림책 너머의 의미를 먼저 읽어내던 아이였고, “그냥 내 맘대로 사는 게 내 권리”라고 말할 만큼 자신의 마음을 먼저 따르던 아이였다.

누군가의 노동과 노력 위에서 자신의 일상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미스터 스위트는, 아이를 돌보고 집을 지키며 자신의 몫까지 감당하고 있는 아내의 큰 목소리를 싫어한다. ‘전혀 타당하지 않은 이유로’ 싫어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그녀에게 해보지만, 매번 묵묵히, 그것도 ‘척척’ 해내는 미시즈 스위트의 유능함은 다시 그의 열등감과 좌절을 건드린다. 아내가 일상을 버텨낼수록, 그는 자신이 빼앗겼다고 믿는 삶의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미스터 스위트는 차고 위의 작업실에 있었다. 그는 항상 그곳에 있기를 좋아했는데, 그곳이 장례식장은 아니었고, 단지 지금까지 누려보지 못한 자신의 삶을 애도하며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p.65)

끝없이 자기 연민에 잠긴 미스터 스위트의 작업실이 마치 장례식장처럼 보이는 그 한 줄이 꽤 신랄했다. 내가 느낀 미시즈 스위트라면 남편의 이런 꼴사나운 슬픔마저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오히려 작업실 앞에 국화꽃 한 송이를 말없이 놓고 문을 닫아줄 것만 같다. 그녀는 아들 헤라클레스가 인형을 가지고 노는 모습도 그저 애들 장난으로 넘기지 않고, 아이의 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니까. 맥도날드 해피밀 사은품으로 받은 작은 플라스틱 인형은 병사가 되기도 하고, 영웅이 되기도 하며, 온 세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편 눈에 아내는 사소한 것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소설은 계속해서 ‘지금’과 ‘그때’를 오간다. 시간은 결국 모든 것을 그때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어떤 기억은 현재로 되살아나, 다시 지금이 된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저마다 지나온 수많은 ‘그때’를 데리고 흘러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나간 시간을 계속 불러오는 일은 자신을 위로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시간을 자신의 삶에서 떼어내지 않는다. 행복도 상처도 결국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라는 듯이. 지워질 수도,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었던 시간을 다시 생생하게 불러내는 것. 그리하여 누군가를 쉽게 이해하거나 판단하기보다, 한 사람을 여기까지 데려온 시간을 먼저 바라보게 하는 것. 미시즈 스위트가 끝까지 붙드는 것은 바로 그런 시간이었을까.

그녀는 지나간 시간을 밀어내지 않는다. 좋았던 일이든 아팠던 일이든, 그것까지 자신의 삶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가닿고 싶고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붙잡는 시간과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이 내겐 쉽지 않았다. 미시즈 스위트의 시선과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조금 피로하게 느껴졌고, 계속 애를 써야 하는 독서가 되어버리더라. 그런데도 킨케이드의 글을 읽을 때면, 글로도 말로도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품고 살아온 내 곁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사랑했는지, 미워했는지, 참고 삼켰는지 그 마음의 결을 나는 다 알 수가 없다. 분명 말해지지 못한 것이 있었을 텐데. 어쩌면 한 사람이 잊지 못한 시간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그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느린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끝내 버리지 못한 시간을 읽어야 비로소 그 사람의 현재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마음에 가닿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다시 내 엄마를 떠올렸다. 내 엄마의 그때와 지금은 어떨까. 그 속에 나는 어떤 인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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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스러운 탐정들 2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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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문단의 틀에 맞서 자신들만의 시를 꿈꾸던 겁 없던 청춘들은 자신들이 찾고자 했던 시의 뿌리를 더듬듯 오래전 자취를 감춘 여성 시인 세사레아 티나헤로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이후 이야기는 20년에 걸쳐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시인 한 사람을 찾는 이야기를 넘어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지나온 시간을 따라간다. 그 시간 속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의 기억 한가운데에는 늘 벨라노와 리마가 있다.

이름도 낯선 시인들이 쏟아지고, 담배 연기 자욱한 골방에서 문학을 이야기하던 젊은이들의 무모한 열기에 끌려갔던 1권을 지나 2권에 접어드니, 이번에는 그 뜨거움보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남는 쓸쓸함이 더 진하게 다가왔다. 볼라뇨는 분파주의에 갇힌 기성 문단을 꼬집으면서도, 그에 맞서 반항하는 젊은 시인들 역시 마냥 낭만적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삶에 시선이 더 오래 머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등장해 몇십 페이지 동안 자기 인생을 털어놓는 사람들. 그들의 삶 하나하나가 또 다른 소설처럼 읽혔다. 시적인 비약이 섞인 이야기들은 마음 한편을 묘하게 찜찜하게 만들고, 웃을 수만은 없는 삶도 끝내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들 덕분에 무겁게만 흘러가지 않는다. 대단히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그렇다고 시선을 돌리게 하지는 않는 참 이상하고도 묘한 작품이다.

“지나간 시절을, 밤이 밤 속으로 침잠하던 그 순간의 시간을 생각하는 동안 위가 쓰려 왔다.” (p. 482)

무언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기대와 열정, 한때는 문학이 인생 그 자체였던 시절,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그때 그런 사람들이 있었지, 하듯 돌아보게 되는 감정이 왜 이리 헛헛하던지. 같은 시대를 살아도 기억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수십 명의 목소리를 통해서 말이다. 벨라노와 리마에 대해 누군가는 자유로운 예술가였다고 하고, 누군가는 무책임한 떠돌이였다고 말한다. 시대를 앞선 혁명가였다는 사람도, 시를 핑계 삼아 방황하던 청년들이었다는 사람도 있다. 특히 리마는 어느 한 곳에도 오래 머물지 않은 채 사람을 만나고, 떠나고, 또 사라진다. 그런데 리마를 잘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크게 놀라지 않는다.

“리마잖아.”


소설 속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건축가 호아킨 폰트가 남긴 잔상도 꽤 깊었다. 자신의 딸 친구들이자 내장사실주의자로 활동했던 젊은 작가들과 인연을 맺고 있던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돌아온 뒤 자신은 이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다시 산책을 시작하고,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구하고, 상사에게 초대받아 파티에 가게 된다. 서로 닮아 있는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가 낯익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그는 이내 안도하고, 허기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배가 몹시 고팠다. 나한테는 별로 없는 일이다. 너무 배가 고르고 너무 울고 싶고 너무 기뻤다. (p. 618)”라고 말한다. 아직 삶과 이어져 있다는 감각을 아주 잠시 되찾은 것만 같은 호아킨의 모습이 어찌나 반가우면서도 먹먹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벅찬 순간 뒤에 찾아오는 상실이 너무나 쓸쓸했다.

“보이다가 안 보이다가, 있다가 없다가 했다. 거리는 어둠의 퍼즐로 변했는데 조각이 몇 개 빠져 있었고, 모자라는 조각 중 하나가 기이하게도 나 자신이었다.” (p. 620)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에서 조금씩 밀려난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그 세계 안에서 자신의 자리마저 희미해진다는 것. 그런데 간신히 다시 삶의 감각을 되찾았다고 느낀 순간 마주한 것이 또 다른 상실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이 과연 호아킨만의 것일까.

1권 리뷰에서 ‘나와는 접점도 거의 없고, 호감 가는 인물도 그닥 없는데 이상하게 감겨서 읽게 된다’라고 썼었다. 지금 와서 보니 그 이유가 더 분명해졌다. 이 소설은 ‘1970~90년대 멕시코는 이랬다’라고 설명하는 대신 수많은 사람의 기억을 따라가게 만든다. 그들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먼발치에서 슬쩍 훔쳐보는 기분으로, 뭐랄까 그 시대와 사람을 이해한다기보다 잠깐 함께 살아본 기분이 들게 하는 분위기를 따라가게 한다. 그야말로 동행. 나와는 너무 달랐고 향한 곳도 달랐지만, 어딘가에 온 힘을 쏟던 시기의 갈망과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모든 것이 어정쩡했지만 피만큼은 끓었던 시절의 나를 끌어내기도 했다. 그들에게 끌렸던 건 닮아서가 아니라 끝내 닮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무모함은 부러움도 동경도 아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한 시절을 바라보는 낭만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낭만이 피어난 곳이 어디인가. 그야말로 “현실은 결코 꿈속에서 보고 사는 것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야만의 시절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래 듣고 싶다는 생각. 묵묵히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 그들이 내게 들려만 준다면.

“제 유일한 바람은 직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열 번에 아홉 번은 구불구불한 선에 이어 뾰족뾰족한 선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에 다다르면 제 몸이 쪼개지는 듯했습니다.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요. 복부에서 시작해서 이내 머리와 목구멍까지 쪼개지는 듯한 경험이었고, 그 고통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잠에서 깨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지만요.” (p. 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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