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 동안 읽은 책 중에서 꼭 다시 읽어보고 싶은 작가의 책 위주로 몇 권 구매를 했다. 물론, 처음 읽게 된 작가의 책도 있다. 앞서 읽고 평을 올려주신 분들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도움받아 고를 수 있어서 반갑고도 감사한 마음으로 품에 들였다. 무사히 도착한 책들을 차가운 냉기로 가득한 상자 속에서 꺼내 한 권 한 권 만지작거리다가 빳빳한 종이에 지문이라도 남겨 정도 쌓고 분위기만이라도 느껴볼 겸 앞부분만 가볍게 읽어보았다.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헤르쉬트 07769>, <죔레가 사라지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부터!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가시덤불땅에 헝가로셀 패널 오두막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있는 한 남성(직업은 교수)! 창문 밖에는 그의 딸이 지역 TV 방송국 취재진과 신문 기자들을 우르르 데리고 와서 무언가 받아야 할 것을 받아낼 때까지 떠나지 않을 기세를 보이며 버티고 있다. 혼외로 얻은 딸이 있다는 사실도 기억나지 않는데 19년이나 지난 뒤에 “이제 빚을 갚으시지.”라는 팻말까지 들고 와서 설쳐대고 있으니, 교수는 모든 것이 적절히 계산되고 의도된 계획 앞에 지금 무진장 심란하다. 아니, 그런데 교수의 대응 방식도 만만치 않다. 냅다 방아쇠를 당겨 사람들을 쫓아내는 게 아닌가! 아직 벵크하임 남작도 못 만났으니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전에 읽은 <사탄탱고>보다는 시작이 덜 무겁게 느껴진다.

자신이 마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자신을 보호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므로 그는 모든 조각을 맞추려고 발작하듯 애썼으나 모든 것이 아무 의미도 없었으니 아무것도 예상 가능한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요,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p. 27)

라슬로의 신작 <헤르쉬트 07769>는 구매 전 책 소개를 읽자마자 개인적인 취향을 자극해 이건 재미가 없을 수가 없겠다 싶어 바로 구매했다. 종말 앞에 선 인간의 정당한 태도를 고민하게 한다는 점이 내가 느낀 라슬로의 매력 중 하나인데, 그의 작품은 대체로 음울하고 불안한 심리를 다루는 것으로 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헝가리 유대계 중산층에서 자란 라슬로가 보고 듣고 느낀 세상을 떠올려보면 그렇다. 쉼 없이 이어지고 반복되는 비극적인 언어라도 현실의 붕괴 그 안으로 진입하려는 시도 자체가 삶의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 스스로 삶의 방향을 설정하려는 의지로써 읽힌다. 긴말이 필요 없다. 상당히 재미있다! 누군가 생사와 직결된 중요한 문제를 담은 편지를 독일 연방공화국 총리, 앙겔라 메르켈에게 보내려 한다. 보내는 이 주소를 적는 왼쪽 상단에 헤르쉬트 07769만 적은 이 수상한 편지의 목적은 확실하다. 문제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즉시 안보리를 소집할 것! 편지를 보내려는 이의 정체는 독일 튀링겐 동부 전역에 이름난 담벼락 청소 사업을 하는 독일인 보스 밑에서 일하는 ‘플로리안’이다. 일단, 그의 보스가 어떤 인물인지부터 간략히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네오나치 성향인 인물로 플로리안에게 서독의 국가를 부르라고 명령하며, 목소리가 맥이 없으면 너는 유대인이나 뭐 그런 거냐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독일인은 음악에 분명하고, 멋진 귀를 가지고 있다나 뭐라나…. 암튼, 독일에 ㄷ만 나와도 칭송부터 나오는 사람이다. 그 와중에 눈치는 또 얼마나 빤한지 자기 혼자만 재미있는 농담에 지루함을 느끼는 플로리안을 절대 그냥 못 넘어간다.

다아아앙연히 이 모든 것이 지루하지, 딱 봐도 그래! 보스는 엔진 넘어 고함을 질렀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플로리안은 목을 한 대, 보스가 농담으로 부르듯이, 찰싹 맞았다, 말 그대로, 난데없이, 한 대 찰싹, 그리고 그걸로 끝, 플로리안이 오랫동안 당연시하던 손찌검으로 막을 내렸다, 보스는 대화에 오른 이런저런 주제는 한 대 때리는 일로 마무리했고, 그는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 자신의 운명이 이런 것이려니, 털어버렸다, 보스가 자신의 운명이고 그것은 바꿀 수 없기에, (p. 25)

보스의 위압적인 태도에 입도 벙긋하지 않고 기분 나쁜 내색 한 번 하지 않는 다소 순종적인 플로리안은 시민대학 강좌를 진행하는 ‘쾰러’ 선생님에게 물리학 수업을 듣고 나와 집으로 가던 중, 선생님이 전하려는 말을 뒤늦게 파악하고 벼락에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여 지금 보스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다. 세계가 붕괴할 것이라는 우주론적 예측에 사로잡혀 있는 플로리안과 그를 진정시키는 쾰러의 대화는 이 소설의 맨 처음 장면인 생사와 직결된 문제를 담은 편지를 플로리안이 왜 써야만 했고, 왜 독일 총리, 그것도 자연과학자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보내야 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해 준다.

하늘을 봐, 저 구름을 봐, 이렇게 들어오는 햇살을 봐, 이것들은 다 만져지는 실제적인 것들이야, 너는 이 모든 진공 문제니 뭐니에 너무 깊이 정신을 팔 필요가 없어, 결국 네가 아예 완전히 잠겨 헤어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특히 너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양자물리학의 무력한 실패가 아니라 제한적인 인간 정신의 파탄인 탓이야,

나는 하늘을 올려다봐도, 쾰러 선생님, 더 이상 행복하지 않습니다, 나는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혀요, 왜냐면 내가 얼마나 무력한지, 우주가 얼마나 무방비한지 느껴져서 공포에 사로잡혀요, (p. 35)

물리학 지식이라고는 어린 시절부터 읽었던 책 정도에 불과한 데다가 직업학교를 졸업한 뒤 받은 중등학교 졸업장만 가지고 있는 플로리안은 이런저런 계기로 쾰러가 멘토가 되어 매주 대화를 이어가며 지내왔다. 조금은 어리숙하고 부족하지만, 물리학적 종말론에 대한 플로리안의 고뇌는 굉장히 심오하고 철학적이다. 휴, 그건 그렇고 편지를 다시 써야 할 지경이다!! 감히 총리에게 보내는 편지에 “젠장”이라고 적어버린 게 아닌가. 흠...



<순수 박물관> 오르한 파묵

최근에 오르한 파묵의 <눈>을 읽고 그의 책을 좀 더 검색해 보았다. 현재 소장하고 있는 <내 이름은 빨강> 외에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순수 박물관>이었다. 곧 약혼하고 결혼할 참인 이스탄불 상류층의 서른 살 케말과 그의 먼 친척이자 가난한 열여덟 살 퓌순의 사랑. 서로를 강하게 그리고 격정적으로 끌어안으며 희열을 위해 서로를 이용한다. 퓌순이 내지른 고함과 케말의 행복한 외마디 신음 외에, 극도의 정적에 휩싸인 방 안의 침대 위 두 남녀는 벌거벗은 채 서로를 껴안고 누워 있다.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이들의 흥분과 더없는 기쁨의 감정이 케말에게는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주고받았던 일과 오랜 세월 동안 후회할 말들과 행동일지 몰라도 내 눈엔 불순한 과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구태여 시간이 흘러 기억해 내고 꺼내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혹시라도 마음 한구석에 있던 외로움을 들먹거리며 회유하는 어조로 다가오거나 현학적인 말로 교묘히 속아 넘어가게 한다면 비난을 마구 퍼부어주겠다고 다짐하며 읽어 내려갔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비밀과 불안, 두려움이 있다고 생각했다. 저 잘 차려입은 손님들 가운데 몇 명에게 이상한 불안과 정신적 상처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 속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한두 잔을 마시면, 우리가 고민했던 것들이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저 순간적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p. 62)

무한하고, 어린아이 같은 섹스의 희열 이외에, 나를 그녀에게 매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은 어떻게 그녀와 그렇게 진심 어린 형태로 사랑을 나눌 수 있었을까? 사랑을 낳은 것은 섹스의 희열과 계속해서 반복되는 그 욕구였을까, 아니면 이 욕구를 낳게 하고 키웠던 다른 것들이었을까? 퓌순과 매일 몰래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그 행복한 나날에는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들을 전혀 하지 않았고, 그저 사탕 가게에 들어간 행복한 아이처럼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게걸스럽게 사탕을 먹곤 했다. (p. 93)

모든 것을 잊고 사랑을 나누었던 그 순간, 창문으로 불어오는 봄바람과 지저귀는 새 소리부터 시야에 들어오는 물건 하나하나를 추억처럼 떠올리는 케말의 모습을 보자니, 공간과 사물에 대한 기억을 예민하게 끄집어내는 사람인 것 같다. 이것이 퓌순을 그리워해서인지, 퓌순과 사랑을 나눴던 그 때의 나 자신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그 어느 것도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가 불안정하게 공존했던 사회적 분위기와 여전히 폭력과 차별에 시달리는 튀르키예 여성의 모습을 미화하지 않는 이 소설을, 누군가의 인생이 옳았는가 아닌가보다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시선으로 보려 한다. (아직 이 소설의 끝을 보지도 못했고...) 니샨타쉬의 세속적인 부르주아로 지내면서 그에 걸맞은 여성과의 결혼을 앞둔 카멜은 퓌순을 잊겠다며 마음먹지만, 그게 그리 쉽지는 않고 이슬람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서구화된 자유로움이 드러나는 퓌순은 현실적인 욕망이나 삶에 대한 주체적인 계산 또한 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런 퓌순을 계속 옆에 둘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카멜의 모습에서 가난한 이슬람권 여성을 바라보는 평면적인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카멜은 배덕감에서 쾌감을 느끼는 인간 이었단 말인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퓌순과의 만남에 죄책감과 두려움을 바꿔주는 무언가를 찾으며 지내는 그의 있는 그대로의 삶의 한순간, 꿈의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의 일부라고 느끼게 해 준 그날을 좀 더 따라가 본다.



<모비 딕> 허먼 멜빌

모비 딕은 평소에 읽어보고 싶었으나, 선뜻 고르기가 쉽지는 않았는데 허먼 멜빌의 단편을 읽고 난 뒤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구매했다. 분량으로만 치면 바라만 봐도 심사가 고달파지지만, 허먼 멜빌의 글을 안 읽어봤으면 모를까 절대 외면할 수가 없었달까.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불구덩이 같은 가슴 속 열기를 좀 식히고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릴 겸 배를 타고 나가 두루 둘러볼 생각인 남자, 이슈메일. 내가 멜빌의 글에 이끌려 모비 딕까지 덥석 들었듯, 이슈메일도 나침반 바늘의 자력에 이끌리듯 모여들게 만드는 바다에 승객으로서가 아닌 (뭐, 주머니 사정이 좋지도 않고...) 선원으로 나갈 생각이다. 시련이나 고생 따위는 딱 질색이라고 말하지만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것처럼 나름 현실에 자신을 맞춰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자존심이 박박 긁히는 상황 속에서도 뭐, 별 수 있나. 고달파해야 나만 손해이니 괴로움 따위는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사라진다고 생각할 수밖에! 바닷물 못지않게 적잖은 짠내와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쿨내를 동시에 풍기는 이 남자.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봤자 먹고 싸고 자고 남다를 게 없는 인간 세계에서 벌어진 비극에 신물이라도 난 걸까. 어찌 됐든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고래잡이 항해에 뛰어들었다. 경이의 세계로 통하는 거대한 수문이 열리고, 나 역시 마치 놀이기구를 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곧 입장하기 직전에 두근거림처럼 바다에서의 모험에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아, 그런데 출항은커녕 배에 타기까지도 영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아직 여행 가방도 안 싸놓은 이슈메일이 멜빌과 닮아 말이 여간 많은 게 아니라서 포경업의 비상지이기도 하고, 미국에서 최초로 고래의 사체가 해안에 떠밀려 온 곳이라는 낸터컷 섬 얘기도 해야 하고, 지갑이 두둑하지 못하니 날씨도 더 춥게 느껴져 불안한 마음에 주머니도 괜히 일없이 뒤져봐야 하고 그 외 뭐뭐뭐뭐 다 들려줘야 하니 말이다. (헥헥) 입담이 워낙에 좋아 나름 술술 읽히게 해주니 요 맛에 보는 재미도 있다. 별 의도를 갖고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닌 듯하면서도 내뱉는 말 속에 철학을 품고 있는 멜빌의 글은 역시나 굿이다!



<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

사실적이고, 강렬하며, 날카롭게 적힌 문장이 1970년대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런던과 파리 두 도시의 상대적인 모습을 단숨에 눈앞에서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도록 한다. 단 몇 장만 읽어도!

깊이 생각해볼 놀라운 사실 하나, 모든 인간이 서로에게 심오한 비밀이자 수수께끼라는 것. 밤에 대도시에 들어설 때면 숙연하게 떠오르는 생각 하나, 저기 시커멓게 옹기종기 서 있는 모든 집들이 나름대로 비밀을 품고 있으리란 것, 저 모든 집의 모든 방도 나름대로 비밀을 품고 있으리란 것, 저곳의 수십만 가슴 속에 뛰고 있는 심장들도 저마다의 생각 속에서는 가장 가까운 심장에게조차 비밀스러운 존재란 것! 무엇인가 경외로운 것, 심지어 죽음 자체도 이와 비슷할지 모른다. (p. 28)



<흥분이란 무엇인가> 장웨이

기회가 닿으면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폴스타프님의 리뷰를 읽고, 주저 없이 모셔 왔다. 옌롄커와 위화 과가 아니라 츠쯔젠에 가깝다는 말씀에 어떤 느낌일지 짐작은 조금 가지만, 뭐든 읽어봐야 알 수 있으니 가장 먼저 실린 「대추나무 지킴이」와 표제작 「흥분이란 무엇인가」부터 읽어봤다. 그런데, 책 제목이 좀... ㅋㅋ 한 장, 두 장 책장은 넘어가고 이내 미소가 지어진다. 갑자기 뜬금없는 얘기지만, 작년 12월 내란 우두머리 피고인석에 앉은 전직 대통령이 ‘통닭 계엄론’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고 기가 찼던 기억, 그리고 예능에 나와서 맥주는 통닭이랑 먹어야 탈이 안 난다는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한 것까지 떠올라 사람 참 한결같다며 헛웃음 짓다가, 모진 삶 속에서도 균형을 알고 조화를 이루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그야말로 정말 환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이야기를 읽으니, 마음까지 산뜻해지는 것 같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장웨이 탓이다!) 시대적 혼란을 잊게 할 만큼 때 묻지 않은 순박함이 느껴지는 시골 소년 네 명이 나누는 대화에는 실컷 소리 내 따라 읽다가도 마음 한편이 쓰라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인민공사 사원 모임이 시작되었을 때 다전쯔를 비롯해 그녀와 같이 어울려 다니는 처녀 몇 명은 어둑어둑한 그림자 속에서 한참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는 중이었다. 몇 번이나 누군가의 제지를 받고서야 겨우 잠잠해졌으나 그것도 잠시, 얼마 안 돼 또 히히 하하 웃음이 터진다. 스웨터 뜨개질을 하며 웃고, 가장자리 레이스 처리를 하면서 웃고, 땅바닥 풀주기를 비틀며 웃고... 손을 가만히 두지 않는 건 물론, 입도 쉬지 않는 그녀들이었다. ( 「대추나무 지킴이」, p. 7)

“이게 인삼하고 거의 비슷한 보약이여. 많이 먹어도 안 되고. 울 아부지 말이, 젊은이가 많이 먹으면 코피 난단다.”
“어메— 진짜, 향기 좋네!” 징둥이 더덕을 씹으며 말하자 장유취한도 말했다.
“모름지기 ‘삼(蔘)’자가 들어가는 건 다 천연 보양식이지. 해삼, 인삼, 현삼⋯⋯ 또 ‘당(黨)삼.’ 공산당원이라야 먹을 수 있는 삼.” (「흥분이란 무엇인가」, p. 184)



<후리> 카멜 다우드

알제리 내전 동안 일어난 참혹한 비극을 담았다는 것에서 고민 없이 바로 구매한 책이다. 기억을 금지하는 곳의 이야기를 드러내며 기억을 되살리려는 작가 카멜 다우드의 메시지가 담긴 2018년의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티 없이 맑고 파란 하늘에 휘날리는 하얀 천을 담은 표지가 온몸을 바람에 맡긴 듯 자유롭게 다가오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스치는 바람에도 쓰라린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추위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처럼, 온몸이 멍에 들어버린 것처럼 아파진다.

내가 네게 말은 하고 있지만, 네가 듣는 내 목소리는 소리가 아냐. 종잇장을 넘길 때 나는 소리, 겨우 그 정도겠지. 게다가 바다를, 개들을, 한 척의 배를, 야자수들을, 아니면 어둠 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내 얼굴을 정의 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니. 정의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이잖아. 다 안심하기 위해 필요한 거지. (p. 15)



비탄 없는 완전한 삶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 지구상에 존재할까? 책에 등장하는 인물의 저마다 다른 삶의 궤적이 때로는 새로운 하루가 저 멀리 내려오는 것처럼, 또 때로는 금방이라도 장대비가 쏟아질 것처럼 먹구름에 휩싸이듯 했다. 어디에서도 토로할 수 없는 내면의 고뇌를 가진 인물의 삶 속에 내 삶을 비추는 지점들이 분명 있었다. 어떤 경계에 서서, 그 경계선 너머 무언가를 혼자 그려보는 동안 느꼈던 고독은 상황과 환경이 달라도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라 생각한다. 내가 별다른 재주는 없지만 나한테 잘 맞는 재미있는 책 고르는 재주만큼은 있는지 각기 다른 개성과 매력을 느끼면서 꽤 만족스럽게 있었다. 읽었다? 아니다! 읽었다고 말하기도 뭐할 만큼의 분량만 읽어서 맥락을 잘못 짚은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하긴, 그럼 뭐 어떤가. 즐겼으면 그만이다. 일상의 고단함에 보상처럼 다급함 없이 안으로 향하는 감각에 평화로움을 느껴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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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1-17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도시 이야기를 다시 읽으려고 주문했어요. 감사합니다.

곰돌이 2026-01-17 21:24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저도 호시우행님 따라서 잘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