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없는 사람> 중에서...

예술은 삶을 보다 견딜 만하게 만드는 아주 인간적인 방법이다. 잘하건 못하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진짜로 영혼을 성장하게 만드는 길이다. 샤워하면서 노래를 하라. 라디오에 맞춰 춤을 추라. 이야기를 들려주라. 친구에게 시를 써보내라. 아주 한심한시라도 괜찮다. 예술을 할 땐 최선을 다하라. 엄청난 보상이 돌아올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않았는가! - P32

인간은 춤추는 동물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대문을 나서서 뭔가 한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우리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냄새를 피우기 위해서다. 누군가 다른 이유를 대면 콧방귀를 뀌어라. - P66

블루스는 전세계인에게 돌아간 선물인 걸까? 내가 들어본 최고의 리듬앤드블루스 연주는 폴란드 크라쿠프의 한 클럽에서 핀란드 출신의 세 남자와 한 여자가 연주한 것이었다. 재즈 역사가이자 훌륭한 작가이고 무엇보다 나의 절친한 친구인 앨버트 머리가 한 말에 따르면, 이 나라에 노예제—결코 완전히 치유되지 못할 잔혹 행위 —가 번성했던 기간의 평균자살률은 노예보다 노예 소유주 쪽이 훨씬 높았다고 한다. 머리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노예들에겐 우울증을 해결할 방법이 있었던 반면, 노예 소유주들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노예들은 블루스를 연주하고 노래함으로써 노인자살 충동을 떨칠 수 있었다. 머리가 제시하는 또다른 이유도 나에겐 꽤 합당하게 들린다. 즉 블루스는 우울증을 집 밖으로 날려버리지는 못하지만 음악을 연주하는 방 안 구석으로 쫓아버릴 수는 있다는 것이다. 기억해둘 필요가 있는 사실이다. - P71

알렉스 삼촌이 무엇보다 개탄한 것은, 사람들이 행복할 때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한여름에 사과나무 아래서 레모네이드를 마시면서 윙윙거리는 꿀벌들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면 삼촌은 즐거운 이야기를 끊고 불쑥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 행복이랴!"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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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세계문학 단편선을 종종 사 모으고 있었다. 책을 처음 펼칠 때면 새 책을 만나는 설렘에 몇 편을 단숨에 읽고, 한동안 애정을 담아 이리저리 들춰본다. 하지만 그 마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다른 책들이 눈에 들어오면 관심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옮겨 가고, 읽다 만 단편집들은 책장 한켠에서 조용히 기다린다.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닌데, 읽지 못한 책들이 조금씩 밀려가는 느낌이 은근하게 마음을 눌러 온다. 그래서 비교적 얇은 편에 속하는, 흑인 문학의 거장 랭스턴 휴스의 작품을 다시 꺼내 들었다.

41편의 단편 중 맨 처음에 실린 「달빛 아래의 몸뚱이들」에는 아프리카로 화물을 실어 나르는 선원들이 등장한다. 그중 주인공은 열여덟 살, 스스로 바다를 택한 소년이다. 지긋지긋한 가난에 찌든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선원이 된 모습이라기보다는, 바다 그 자체를 숨 쉴 수 있는 피난처로 삼고, 화물선의 좁은 공간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일종의 안식과 자유를 발견한 사람처럼 보였다. 거칠게 느껴지는 선원생활도 그들에게는 대단한 일이 아니다. 마치 영화 《부력》 속 불법 원양어선에 선장과 그의 부하들이 육지에 내려, 소금기 가득한 몸을 대충 씻고 벌거벗은 채로 기다리는 여성의 방으로 달려가는 장면처럼, 혹은 작년에 정주행하면서 재미있게 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작품인 《보물섬》의 프리퀄로 제작된 미드 《검은해적》에서 선원과 해적들이 고단한 일상을 달래듯 창녀촌을 찾는 장면처럼, 본능적인 쾌락이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열여덟 살 소년도 그 속에서 특별한 것 없는 한 명의 선원으로 지내다가 ‘누누마’라는 소녀를 알게 된다.

방랑벽이 있는 열여덟 살에게 세상은 아름다웠다. 선원이 된 첫해 나는 식당에서 일을 했다. 가지고 있던 교재들일랑 모두 뱃전 너머로 던져 버리고 몇 달 동안 부모님에게 편지도 한 장 쓰지 않았다. 내 생각에 그때껏 내가 알던 사람들은 내게 친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자유였다. 바다는 나를 어머니처럼 맞아 주었고 웨스트일래너라는 화물선은 내 안식처가 되었다. ( 「달빛 아래의 몸뚱이들」, p. 8)

날들이 가고 밤들이 지나갔다. 다시 날들이 가고 밤들이 지나갔다. 광활한 아프리카의 무연한 하늘은 별들이 총총하게 들어찼다가는 뜨거운 태양이 떠올랐다. 웨스트일랜호는 조용히 침묵하듯 떠 있었다. ( 「달빛 아래의 몸뚱이들」, p. 12)

백인 선원들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장난스럽게 농담을 건네는 누누마와의 관계는 문란하거나 저질스럽게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청춘 멜로의 한 장면처럼 부드럽게 흐른다. 서로를 이해하며 필요할 때 의지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자연스럽고 조심스럽게 맞물린다. 소년은 한때 누누마를 사랑한다고 믿었고, 세월이 흘러 거의 잊힌 지금, 그녀와의 기억이 이 이야기를 쓰게 만들었다 고백한다. 이어지는 단편 「눈부신 그 사람」에서도 같은 화물선 웨스트일래너호와 선원들이 등장하지만, 이 이야기가 같은 소년의 시선인지, 혹은 또 다른 선원의 기억인지 명확하지 않다. 이야기는 선실을 담당하는 한 선원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그가 우연히 승객 중 데이지 존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의 일기장을 보게 된다. 그 안에는 선원 중 가장 잘생긴 에릭 긴트에 대한 호감뿐 아니라, 외로움과 고독이 은밀하게 담겨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일해 온 선교사 부부의 딸인 온순하고 순종적인 그녀에게 호감 가는 남자가 생긴 것이다. 일기장을 처음 본 선원은 입이 새털인 것이 분명하다. 입이 한가하면 답답해 죽나보다. 이미 선원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싹 퍼졌다. 배 후미에 있는 선원들 숙소에서 각자 침대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서 시시덕거리며 한 여성의 은밀한 속사정을 떠들어 대니 말이다. 그런데, 한가해도 너무 한가해 보이는 선원들의 모습이지 않은가? 부릴 화물이 거의 없는 탓에, 배는 한참을 정박해 있다가 자정이 되어서야 다시 항해를 시작한다. 바다의 고요 속에서 소소한 소란과 수다, 그리고 은밀한 호기심은 그렇게 배 위에서 느릿한 시간 속에서 퍼져나간다.

컬럼비아 대학 자퇴 후 잠시 화물선에 올랐던 저자가 실제로 겪은 이야기는 아닐까라는 착각에 잠시 빠지기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 랭스턴 휴스가 흑과 백으로 나누어진 삶에서 어떤 경계를 두지 않고 자유로움을 얻고 싶었던 갈증을 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껄껄껄 웃어대는 선원들을 따라 거리낌없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지만, ‘지금 웃어도 되는 걸까’ 싶은 복잡함이 마음 한쪽에 남아 특유의 여유로움이 온전히 즐겁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신기하게도 흔들흔들하는 배가 멀미를 일으키지 않고 잔잔하게 다가온다. 욕이 섞인 농지거리를 주고받는 선원들의 장난 역시 불쾌하지 않다. 아마도 저자는 고된 삶의 면면을 거칠게 드러내기보다는, 상륙해 항구를 거닐고 농부들과 섞여 어울리는 선원들, 해 질 무렵 선원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항구 처녀들과 산책로를 걷는 장면 등 고된 삶의 연속인 나날 속에서도 서글픔을 감춘 그들만의 생기와 문화를 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의도가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스며든 듯하다.

태양이 바다 너머로 떨어지자 다카르 항에 어둠이 찾아온다. 니스나리옹의 브루사드 호텔의 작은 정원 카페. 원주민 음악, 분수, 흑인 웨이터들, 담배 연기, 포도주, 별들. 여기저기 테이블에 흩어져 앉아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선원들과 흑인 소녀들, 몇 명의 프랑스 여인들이 보인다. 뚱뚱한 가게 주인은 손을 마주 부비며 흥청대는 가게 분위기에 고무되어 있다. 프랑스 여인들 중 한 명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지만 뉴어크 출신의 마이크가 부르기 시작한 < 왜 내가 너 때문에 울어야 하나>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갑판장은 테이블 위에 대자로 뻗어 잠이 들었다. 제리는 분숫가에서 춤을 추고 있다. 취한 사람들의 웃음과 주정소리가 작은 정원을 가득 채운다. (「눈부신 그 사람」, p. 26)

바다에서 일주일을 같이 생활하다 보면 그리스인, 서인도 제도 흑인, 아일랜드인, 포르투갈인, 미국인 등으로 잡다하게 구성된 선원들끼리 꽤 친해지기 마련이다. 날씨가 따뜻하면 선원들은 후갑판에 모여 서성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 바다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끼리도 아주 친해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 타국의 항구에서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그들은 마치 형제들처럼 똘똘 뭉친다. 물론 언제나 형편없는 음식을 내놓는 주방장과 설전을 펼칠 때도 모든 선원은 하나로 뭉친다. 바다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어머니로 치자면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서로 피를 나눈 형제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꼬마 숫총각」, p. 31)


제법 묵직한 덩치를 자랑하던 책들 중 하나를 골라 겨우 몇 편만 읽었을 뿐인데, 왠지 숙제를 마친 듯 후련한 기분이 든다. 리뷰를 올릴 때마다 별점을 매겨야 하는 것도 참 곤욕스러운 일 중 하나인데, 페이퍼는 그 곤욕스러움에서 자유롭다는 점이 한몫한 걸까? 끝으로 최근에 구매한 네 권의 책을 기록해 본다. 다음에 펼쳐질 읽을거리가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미국의 체호프’라 불리는 레이먼드 카버의 열두 편의 단편이 실린 책이다. (사실, 나는 정작 둘 다 아직 안 읽어봤다.)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책이었는데, 얼마 전 박완서 작가님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읽다가, 똭! 등장하는 게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변영주 감독님이 추천하는 책이기도 하고, 손에 넣고 싶었던 책이기도 해서, 이건 분명 나에게 보내진 ‘사라’는 우주적 신호였다. 한동안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비우기를 연거푸 반복했지만, 결국 이번에는 사버렸다. 저번 페이퍼에 뚱책을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인 것처럼 올려놓았는데,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얇은 책들이 줄줄이 놓여 있다. 덩치에 좀 질렸나? 낄낄. ㅋㅋㅋ 일단, 분위기라도 느껴볼 겸, 맨 처음에 실린 「깃털들」을 읽어봤다. 새 자동차, 두 주 정도 캐나다로 여행을 원하며, 반면에 아이들은 원하지 않는 부부인 잭과 프랜이 등장한다. 어느 날, 직장에서 알게 된 버드라는 친구에게 저녁 초대를 받게 된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평범한 일상일 뿐인데, 두 사람이 풍기는 느낌은 뭐랄까, 뭔가 묘하게 불편하다. 흠...

“우리 달달한 과자를 가져가자.”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프랜이 말했다. “아니다. 뭘 가져가든 난 신경 안 쓸래. 이건 당신 체면치레니까. 법석 떨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면 난 안 갈 거야. 라즈베리 커피링을 만들 수는 있어. 아니면 컵케이크나.”

“디저트는 준비하겠지.” 내가 말했다. “디저트도 정하지 않고 식사 초대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p. 15)

저녁 초대가 달갑지 않은 듯하면서도 그렇다고 완전히 거절할만큼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은 두 사람의 대화는, 읽는 내내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버드의 집으로 가기 위해 교외로 나서는 길에서 잭은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운전하며 드라이브의 즐거움에 빠진다. 그는 눈 앞에 펼쳐진 목초지와 낡은 축사, 그리고 천천히 이동하는 젖소떼를 바라보며 “참 그림 같은 풍경”이라고 말하지만, 프랜은 그 말에 공감하기는커녕 짧게 “깡촌이네.” 뚝 잘라 말한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감정적이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프랜의 반응에도 잭은 크게 맞서지 않고, 그녀를 이해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또 한편으로, 이 부부는 아이를 갖는 문제를 언젠가는 하게 될 일처럼 미뤄 두고 있다. 그래서인지 버드의 집에 있는 생후 8개월 된 아기가 혹시 이들 부부에게 어떤 감정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만드는 요인이 될까 봐, 괜히 나 혼자 은근히 긴장감이 돌았다. 버드 부부는 안정적이고 평온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결국 이 날의 저녁 식사는 주인공 부부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해 보이는 결말로 이어진다. 쌉싸름하다.



존 치버 『팔코너』

에제키엘 패러것. 영락한 집안의 차남으로 중년의 대학교수이자 마약중독자이다. 동시에 유일한 형제인 형을 죽이고 팔코너 교도소 독방동에 수감된 734-508-32번 죄수.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푸른 하늘이 자신에게 허용된 유일한 자유 공간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는 이제 사기꾼과 살인자는 동료로, 폭력과 인권유린이라는 채찍을 휘두르는 교도관들은 관리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출판사의 소개 글을 여기까지 읽고, 더 내려가면 스포일러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예감에 손가락이 멈췄다. 그리고 스크롤을 쭉쭉 내려보다가, 먼저 읽고 리뷰를 남겨주신 폴스타프님의 조언: “출판사 소개 글은 읽지 말고 읽길 바란다.”를 발견했다. 폴스타프님께 땡투를 날리고, 망설임 없이 바로 구매 버튼을 눌렀다. 실제 변호사인 저자가 억울하게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을 변호하며 겪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월터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을 읽은 이후,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책은 오랜만이다. 책이 도착하자마자, 혹시라도 스포일러가 될까 소심하게 뒤표지를 들여다봤다. “희망과 구원의 가능성을 고찰하는 작품”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자기 죄의 무게를 실감하게 만드는 상상할 수도, 굳이 만나야 할 이유도 없었던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에 갇혀 지내게 된 그가 들려줄 이야기는 과연 어떤 것이 될까.



저메이카 킨케이드 『내 어머니의 자서전』

작년에 읽은 책 중 손꼽히는 작품중 하나는, 카리브 문학의 거장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미스터 포터』였다. 주인공의 할머니가 맞이한 죽음, 차가운 파도가 몰아치는 순간의 그 슬픔과 고요가 아직도 마음을 붙든다. 글이 이렇게 날카롭고도 시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정도로 여운이 길었다. 나중에 이 책 속에 담긴 그녀의 기록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 통찰과 언어의 힘이 또 얼마나 깊숙이 나를 흔들지 기대된다.

내가 스스로에게 말하기 시작한 이유는 나의 목소리를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목소리는 내게 다정하게 들렸고, 나를 덜 고독하게 해 주었는데, 나는 고독했고 나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였나? 내 어머니는 죽었고,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p. 21)

무슨 일이 일어났고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나는 즉각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나마, 분별없게나마 나는 몇 마디 말을 통해 내 생활을 변화시켰다. 아마 내 생명까지 구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로 나는 늘 스스로에게든 남들에게든 내 상황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내가 나 자신을 극도로 의식하고, 스스로의 욕구에 그토록 관심을 갖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신경을 쓰고, 나의 불만을, 나의 즐거움을 자각하게 된 계기는 그 때문이다. 뚜렷한 목적 없는 이 어린애다운 고통의 표현으로부터 내 인생이 바뀌었고 나는 그 점을 마음에 새겼다. (p. 28)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죔레는 거기에》

원래 『죔레가 사라지다』라는 제목으로 예약 구매한 책이, 막상 손에 쥐니 『죔레는 거기에』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새로운 제목이 훨씬 마음에 든다. 올해 아흔두 살, 세월의 무게가 온몸에 배인 노인 카다 요제프와 그의 노견 죔레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라슬로는 긴 호흡과 난해함으로도 유명하지만, 이 소설은 주인공이 노인과 개라는 설정 덕분인지 비교적 편안하게 읽힌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줄거리와 역자 후기를 읽어보면 세대 간 갈등, 가치관의 충돌,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이 배경으로 깔려 있지만, 아직은 숲의 가장 높은 지대에 살고 있는 요제프와 죔레의 세계는 고요함을 뿜어내고, 조금은 여유롭다. 그러나 평온함 뒤에는 긴장이 숨어 있다. 헝가리 아르파드 왕가의 벨러 4세, 칭기즈 칸의 후손이자 왕위 계승자인 것을 숨기고 사는 요제프가 자신의 집을 찾아온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을 둘러본다. 군주제를 재건하려는 추종자들, 무장봉기를 꿈꾸는 집단, 또 다른 정치적 세력까지 뒤얽혀 있다. 지금은 말할 수 없는 이유로, 1945년에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결심했고, 그 결정을 지금까지 단단히 지켜온 요제프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자신이 바라는 것은 그들이 이해해주는 것이라고, 그 이유는 이제 이 삶이 지쳤기 때문이며, 벌써 세 번째 만남이라는 이 시점에서 그는 그들에게 신뢰가 간다고 여기기에 솔직하게 고백하는데, 아주 작은 노력조차도 육체적으로 자신을 지치게 하며, 이제 그만하고 놓아도 된다는, 마지막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이만하면 충분하고, 한 사람의 인생으로는 아흔한 해면 충분하지 않느냐?, 그는 너무도 많은 것을 보았고, 너무도 많은 일을 겪었으며, 너무도 다양한 것들을 견뎌야 했지만, 그는 결국 그것들을 이겨냈고, 가족과 종교적 계율과 사랑하는 조국이 그에게 요구한 대로 품위를 지키며 살아왔으나, 이제는 이만하면 되었다고, 매일 음식을 해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잠자리를 들고, 제때 일어나지만, 그것은 단지 모든 것이 제 궤도를 따라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라면서, (p. 28)

당신들이 발견한 사실, 즉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과 여기에서 우리가 이렇게 만난다는 사실은 일곱 겹으로 봉인된 비밀로 남아야 하오, 알겠지만 누구도, 아무도 이것을 알아서는 안 되며,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알아서는 안 되오, (p. 31)



(헥헥)
작정하고 페이퍼를 작성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나 혼자 신나게 이 말 저 말 말보따리를 풀어놓고 말았다. 뭐, 늘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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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26-03-08 0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소개가 참 좋습니다. ^^ 다 읽어보고 싶도록 만드시네요. ㅎㅎ

곰돌이 2026-03-08 08:16   좋아요 1 | URL
아쿠, 감사합니다. 끄적끄적 적어 내려가는 동안 저도 꽤 즐거웠어요. 책이 재미있었거든요. 하하. 즐겁게 읽어주신 것 같아 제 마음도 좋습니다. 오늘은 밥 한 끼만 먹어도 될 것 같아요. ㅎㅎ

자목련 2026-03-08 0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만난 책은 <대성당>뿐인데 이 한 권이 있어 괜히 좋습니다. ㅎㅎ

곰돌이 2026-03-08 09:33   좋아요 0 | URL
좋다고 생각해 주시는 그 마음이 저는 더 좋습니다. (부끄)

페넬로페 2026-03-08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표지가 마음에 들어 저도 세계문학 단편선을 몇 권 구매했는데, 잘 안 읽게 되더라고요. 라슬로의 신간은 헝가리어 직접 번역이라 저도 희망도서 신청했어요. 곰돌이님의 책 소개는 우아하게 아름답습니다^^

곰돌이 2026-03-08 09:35   좋아요 1 | URL
살아생전 ‘우아’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없던 곰이 세상에나 마상에나…. 제 두 눈을 의심했습니다. ㅋㅋ 저 오늘 밥은 다 먹었습니다.
 

<악마의 시 2> 중에서...

꼭대기에서 하얀 먼지를 피워올리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래언덕이었다. 폭신폭신한 산, 끝내지 못한 여행, 일시적인 천막, 바람에 날려 날마다 새로운 모습이 되는 고장을 어떻게 지도로 표시할 수 있으랴? 이런 질문 때문에 그의 언어는 너무 추상적이었고, 그의 심상은 너무 유동적이었고, 그의 운율은 너무 불규칙했다. 그래서 그는 키메라 같은 형상들을 창조했고, 사자의머리 염소의몸 뱀의꼬리, 존재하지 않는 것들, 그들은 쉴새없이 모습을 바꾸었고, 그래서 고전적 순수성을 간직했던 문장 속에 통속성이 끼어들고 끊임없이 침투하는 우스갯소리가 사랑의 이미지를 훼손시켰다. 아무도 그런 시를 좋아하지 않아, 하고 그는 벌써 천 번이나 했던 생각을 한 번 더 했고, 의식의 끈을 놓치는 순간, 마음에 위안을 주는 결론을 내렸다: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없지. 망각은 곧 안전이다. - P121

‘적어도 정신 연령이 십대쯤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닫기 마련이다: 인생은 결코 익살극이 아니라는 것을, 하다못해 점잖은 희극도 아니고, 정반대로 오히려 본질적 결핍이라는 깊디깊은 비극적 심연에 뿌리내린 채 꽃피우고 열매 맺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정신생활을 영위할 줄 아는 이들은 늑대가 울부짖고 밤의 음탕한 새가 지저귀는 위험한 숲을 물려받는다’ 명심해라, 이 녀석들아. - P160

그는 자기가 증오심을 오래 품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축했다. 역시 증오보다 사랑이 더 지속적인지도 모른다. 비록 사랑이 변했다 하더라도 사랑의 그림자일까, 아무튼 뭔가가 길이길이 남는다. 예를 들자면 파멜라에 대해서도 이제는 지극히 이타적인 애정을 느낄 뿐이다 증오심이란 어쩌면 민감한 영혼의 매끄러운 유리에 남겨진 지문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저절로 없어지는 손자국 같은 것, 지브릴? 흥! 잊어버렸다. 더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봐라: 적대감을 벗어던지면 자유로워진다. - P175

내 아들은 그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자리에 모인 이유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도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아프리카인, 카리브인, 인도인, 파키스탄인, 방글라데시인, 키프로스인, 중국인-만약 우리가 저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다면, 만약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일자리와 존엄성과 자식들의 더 나은 삶을 찾아 저 하늘을 건너오지 않았다면, 우리 모습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사회를 다시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죽은 나무를 잘라내고 새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우리 차례입니다.’ - P187

미르자 사이드는 잠들지 못했다. 스리니바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스리니바스는 자기도 머릿속에서는 간디주의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실천하기엔 너무 나약해서 탈이오. 부끄럽지만 사실이오. 나는 고통을 견뎌낼 능력이 없소, 선생. 차라리 마누라와 아이들 곁에 남아 있는 편이 좋았을 텐데 쓸데없는 모험병 때문에 이런 꼴이 돼버렸소." 잠 못 이루는 미르자 사이드는 이미 잠든 장난감 상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집안에도 일종의 병이 있어요. 초연함이라는 병, 온갖 만물과 세상사와 감정에 무관심한 병.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이나 연고 따위로 자신을 정의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을 머릿속에서만 살아왔어요. 그러니 현실에 대처하기가 힘겨울 수밖에 없지요. 다시 말해서 그는 지금의 이런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음을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 P300

비록 수많은 질문에 뒤덮인 어렴풋한 미래였지만 어쨌든 미래는 과거에 가려질 수 없다. 죽음이 무대 중앙에 등장하는 시기에도 삶은 여전히 동등한 권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한다. - P342

상여, 꽃을 뿌린, 거대한 아기 요람 같은.
시신, 하얗게 감아놓은, 향기로운 백단향 대팻밥을 여기저기 잔뜩 뿌려놓은.
또 꽃, 쿠란 구절을 금실로 수놓은 초록색 비단 덮개.
구급차, 상여를 실어놓고 미망인들의 출발 허락을 기다리는 여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
묘지. 상여를 짊어지려고 달려가던 남자 조객들이 살라후딘의 발을밟고, 엄지발톱이 조금 부러지고.
조객 중에는 사이가 멀어졌던 창게즈의 옛친구도 한 명, 양측폐렴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따라왔고, 또 한 명의 노신사가 펑펑 울고, 그역시 바로 이튿날 숨을 거둘 테고,그 밖에도 온갖 사람들, 죽은 자의 일생을 보여주는 걸어다니는 기록들.
무덤. 살라후딘은 그 속으로 들어가 머리맡에 서고 묘지 인부는 발치에 선다. 창게즈 참차왈라가 아래로 내려진다. 아버지의 머리 무게가 내 손에 놓였네. 나는 그것을 내려놓았네. 편히 쉬소서.

누군가 이렇게 썼다: 이 세상은 우리가 죽을 때 비로소 현실이었음을 알 수 있는 곳이라고.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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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시 1> 중에서...

생각해봐, 스푸노, 그려보라고, 도시락 서른 개 마흔 개를 담은 길쭉한 나무 쟁반을 머리에 이고, 기차가 멈출 때마다 일 분 이내로 다녀오지 못하면 기차를 놓치고, 그때는 트럭 버스 스쿠터 자전거 기타 등등을 요리조리 피하며 전속력으로 하나둘, 하나둘, 도시락이오, 도시락, 자, 도시락 지나갑니다, 그러다가 장마철에 기차가 고장나면 철도를 따라 냅다 달리거나 허리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게다가 불량배들이 있어서, 살라드 바바, 정말이야, 조직적인 도시락 도둑패였는데, 워낙 굶주린 도시니까 어쩌겠나, 하지만 우린 놈들을 너끈히 처리했지, 우린 어디든 없는데가 없고 무엇이든 모르는 게 없었으니, 어떤 도둑인들 우리 눈과 귀를 피할 수 있었겠나, 경찰을 찾아간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우리 스스로 동료들을 돌봐줬으니까. - P37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브릴 파리슈타가 살라딘 참차에게 말했다. "다시 태어나려면 우선 죽어야 해. 나야뭐 반쯤 죽었을 뿐이지만 그런 일을 두 번이나 겪었으니, 병원과 비행기에서 말이야, 합산하면 한 번은 죽은 셈이지. 그러니까 스푸노, 친구. 지금 여기 빌라예트의 진짜 런던에서 자네 앞에 서 있는 나는 다시 태어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새사람이라고, 스푸노, 이거야말로 기차게 멋진 일이잖아?" - P57

지니가 소리쳤다. "입 닥쳐! 그런 얘기는 뭣하러 해? 안 그래도 이사람은 우리를 무슨 야만인이나 열등한 인종처럼 생각하는데."
한 가게에서는 근처 크리슈나 사원에서 태울 백단향과 함께 분홍색과 흰색 에나멜을 바른, 삼라만상을 볼 수 있다는 ‘크리슈나의 눈’을 팔았다. 부펜이 말했다. "봐야 될 게 너무 많죠. 그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 P92

보름달이 진 후 동트기 직전의 어둠, 바로 이때가 그들이 나타날 순간이다. 굽이치는 돛, 번뜩이는 노, 기함의 뱃머리에 우뚝 선 정복자, 따개비가 즐비한 나무 방파제와 뒤집어놓은 몇 척의 경주용 보트 사이로 덮쳐오는 함대.-오, 한때는 나도 많은 일을 볼 수 있었지, 옛날부터 그 능력을 가졌으니, 환상을 보는 눈을. 정복자는 코를 덮는 쇠붙이가 달리고 끝이 뾰족한 투구를 쓰고 그녀의 집 앞문으로 들어서고, 케이크 스탠드와 등받이 덮개를 씌운 소파 사이를 미끄러지듯 지나고, 마치 이 추억과 갈망의 집에서 희미하게 울리는 메아리처럼, 그러다가 고요해진다. 무덤처럼. - P205

참차는 생각했다. 우리는 높이 오르려고 노력하지만 천성이 우리를 배반한다. 왕관을 얻으려 하는 어릿광대. 벅찬 슬픔이 밀려왔다. 한떄는 나도 더 명랑하고 더 행복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지. 그러나 이제 내 혈관 속엔 검은 물이 흐른다. - P263

이 임시 고향에서는 밤낮없이 중앙난방을 최고 온도에 맞춰놓고 창문도 꼭꼭 닫아놓는다. 망명객은 데시의 건조한 더위를 잊지 못하므로 이렇게 흉내라도 내야 한다. 마치 갓 구운 차파티에서 버터가 떨어지듯 달빛마저 뜨겁게 뚝뚝 떨어지는 그곳, 과거의 땅 미래의 땅. 그리운 땅이여, 해님과 달님은 남성이되 그들의 뜨겁고 감미로운 빛에는 여성의 이름이 붙는 그곳이여. 밤이 되어 망명객이 커튼을 가르면 낯선 달빛이 방안으로 스며들고 그 차가움은 쇠못처럼 눈을 찌른다. - P320

잔디밭에 떨어진 알라트의 시체는 차츰 오그라들어 이내 검은 얼룩만 남는다. 그리고 데시의 수도인 이 도시의 모든 시계가 일제히 종을 울리는데, 열두 번을 넘어, 스물네 번을 넘어, 천 번하고도 한 번을 넘어, ‘시간’의 종언을 선포하며 때를 알린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각, 돌아온 망명객의 시각, 물이 포도주를 이겨낸 승리의 시각, 이맘의 ‘비非시간’의 시대가 시작되는 시각. - P331

그는 오비디우스를 버리고 루크레티우스를 선택했다. 변하기 쉬운 영혼, 만물의 가변성, 자아, 그 모든 것. 삶을 살아가는 존재는 살면서 많이 달라져 아예 타자가 될 수도 있다. 역사로부터 분리되어 개별적 존재가 된다.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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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무게> 중에서...

계단에 들어서서 여권을 넘기다가 자기 사진을 들여다봤다. 마지막으로 이 사진을 본 것은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의 개인 서재에 있을 때였다. 그때는 미래가 없는 사람의 사진이었지만, 이제는 가능성이 다시 열린 어떤 남자의 모습이었다. - P7

유리창 손잡이를 잡았다. 이번에는 그때와 달리 버티려고 꽉 잡는 게 아니었고, 이제 안개에 대고 시험 삼아 해보는 말도 망설임이나 복잡함에 대한 불안 없이 평소처럼 물흐르듯 가볍고 경쾌한 기쁨을 드러냈다. 평생 지속됐고, 그에게 다른 그 무엇보다도 더 큰 행복을 의미했던 가벼움과 기쁨이었다. - P36

사랑하는 사이먼, 너는 늘 강하고 경탄스러운 아이였고, 아무도 모르게 학교와 부모님 집을 떠나서 대도시의 불빛과 그 아래 다니는 기차로 도망친 소년이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진기하며 위험한 의지인가! 도박꾼의 의지다! 두려움에 떨 때도 많겠지만 얼마나 큰 자신감이 필요한 일인가! 네가 이렇듯 뜨겁고 정신 나간 의지, 그리고 그 의지의 바탕이 되는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을 다시 한번 불태워서 너 자신의 단어로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펜을 잡길 바란다. - P46

한번은 리비아가 집에 돌아와서, 패트가 음식을 가져다준 후에 구름이 걷히고 별이 나타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런 말을 했다고 전했다. "나는 하늘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다." 레이랜드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뗐다. "나쁜놈. 단테의 <신곡> 지옥편 마지막 장면이잖아.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에서 나와서 드디어 별들을 다시 볼 때 말이야." 그러고 책을 가지고 와서 소리 내어 읽었다.
"그 사람 안에는 다른 삶이 있어." 언젠가 소피아가 한 말이었다. - P134

"뭔가 다른 의미에서는, 더 깊은 의미에서는 여전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네.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에 뭘 해야 하지? 이제 ‘중요한’ 건 뭘까? 번역을 다시 시작하자 약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네. 이 질문에 내포된 절망적인 불안감이 문장을번역할수록 뒤로 물러나고, 차분하고 명확한 감정만 남은 거지. 내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도 중요한 것은 내가 제일 즐겁게 하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즉 올바른 언어를 찾는 일이었네. 이 감정이 흔들리지 않고 확고했다는 뜻은 아닐세. 정신 나간 짓을 많이 했다네. 하루 종일 배를 타기도 하고, 폭우가 내리는 바깥으로 나가기도 하고, 더는 읽지 못할 책을 산더미처럼 사들이기도 하고, 중국어도 배우기 시작했지. 하지만 언제나 다시, 특히 밤이 되면 항상 파베세의 책으로 돌아왔네. 아침 여명이면 책상에 앉아,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해도 언어와 함께 보내리라는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네." - P219

"쉼표가 중요하군. 없애면 유치하게 들리네. 짧고 건조해. 그게 끝이야. 사실 의미가 없지. 잊힌 모든 기억이 어떻게 풍요로움에 도움이 되겠나? 그렇다면 그건 전혀 모르는, 알 수 없는 풍요로움일세. 그게 어떻게 풍요로움이 되겠어? 쉼표는 모든 것을 바꾸네. 추억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생에서 얼마나 큰 부분이 추억인지 우리는 그제야 알게 돼. 그리고 쉼표 뒤에서야 우리가 이 보물을 잊고살 때가 얼마나 많은가 기억하지. 또한 쉼표에 내포된 망설임은 잊어버린 이 보물을 추억을 통해 다시 반복하라는 요청으로도 익히네. 그러면 방향을 제시해주는 깊은 문장이지. 진부하고 단순한 문장을 쉼표가 위대한 문장으로 만드네." - P237

타인의 소망이 자기 자신의 의지를 찾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그런 일도 있었다. 타인의 단호함이 자신의 내면에 대한 통찰을 던져주므로. - P340

소피아가 구원의 소식을 들고 그의 집으로 달려온지 이틀 후, 레이랜드는 기차를 타고 밀라노로 가서 오랫동안 대성당에 앉아 있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모여서 저마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위하고 있었다. 레이랜드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그들이 무릎을 꿇고 굴복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가 오르간으로 바흐를 연주했다. 바흐를 이렇게 들어본 적이 있던가? 이렇게 내면이 울린 적이 있나? - P342

온갖 폭포, 갈등의 다급한 폭포. 나는 이게 어떤 모습이어야할지 알 고 있었고, 모든 것은 이론의 여지 없이 저절로 일어났답니다. 내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있다는 걸 깨닫고 무척 행복했지요. 내 안의 풍경을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더라는 뜻이에요. 숨어서 침묵하던 지식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식이 됐어요. 추상적이 아니라 경험으로 들어와서 영향을 끼치는 지식이었어요. 내가 첫 상상력과 문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각성, 멈출 수 없는 각성과도 같았고, 나는 더는 예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 P345

닳은 느낌이엇네. 많은 생각과 감정, 단어들을 너무 많이 찾다가 닳아버린 느낌. 당시에 나는 사십 대였고 이제 곧 예순이네. 내가 그때와 같은 사람인지 그사이에 달라졌는지 묻는 건 의미가 없어. 이런 말은 친숙한 동시에 낯설고, 놀라운 동시에 권태로운 그 중요한 무언가를 다시 느끼게 하지 못하니까. - P363

"작고 초라한 접수대 뒤에서 나도 일종의 모자이크에 열중했어. 단어들의 모자이크였지. 어두운 예배당의 그 여자와 마찬가지로 나도 모자이크를 볼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네. 그 모자이크는, 그러니까 문장과 텍스트는 누가 알아채든 아니든 그냥 ‘옳아야’ 했지. 지금도 번역을 할 때면 나는 어두운 예배당에 있는 것과 같아. 시정으로 가득한, 도드라진 현재의 순간을 경험하네. 그러다가 번역이 출간되어 세상에 공개되면, 예배당의 어둠을 떠나 현란한 빛속으로 나오면 거의 유감이라고 느낄 때도 이따금 있지. 정신 나간소리 아닌가?" "아니, 전혀 아니야." 디 로시가 대답했다. -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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