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튀르키예 작가 쥴퓌 리바넬리의 <세레나데>였다. 독일계 미국인 노교수 막시밀리안 바그너가 59년 만에 이스탄불에 도착해 그를 수행하게 된 마야에게 긴 시간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 한가운데에 스트루마호가 있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피해 루마니아를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가려던 수백 명이 이 배에 올랐고, 바그너의 아내 나디아도 그 안에 있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영국은 아랍인들의 반발 등을 우려해 유대인의 이주를 제한했고, 튀르키예 정부 역시 이들의 상륙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배는 이스탄불 앞바다에서 오랫동안 발이 묶이고 만다.

배 안에서는 먹을 것이 떨어지고,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사람들의 구조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그 외침은 육지에까지 닿았지만, 누구나 자유롭게 배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허가를 받은 이스탄불의 유대인 단체가 스트루마호에 식료품과 약품을 날랐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누군가는 자신의 삶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용기를 내지 않았을까. 배에서 내릴 수 있기를 얼마나 소망했을까. 또 다른 누군가는 눈앞에 육지를 두고도 내릴 수 없는 현실이 오히려 절망스럽지는 않았을까. 나는 그 마음들을 다 알 수가 없다. 바그너가 하루빨리 나디아를 만나 예쁜 집으로 데려가고만 싶었다고 했던 그 말에 콧잔등이 시큰해져 짐작만 해 볼 뿐이다.

“이 일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렵군요. 몇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나디아를 만나는 게 세계 정치문제가 돼버리다니.” (<세레나데>, p. 396)

스트루마호는 한때 다뉴브강에서 가축을 실어 나르던 낡은 배였다. 그 배가 사람들을 태우고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려 했던 것이다. 중부유럽에서 흑해까지 이어지는 다뉴브강.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길이었고, 때로는 제국의 경계가 되기도 했다. 이 강을 따라서는 또 어떤 사람들이 지나갔고,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그렇게 이탈리아 작가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다뉴브>를 만나게 된다.

다뉴브강은 한 줄기의 강이지만,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를 두고 오랜 논쟁이 이어져 왔다. 여러 나라를 가로지르며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품은 강이라서일까. 그 시작을 두고 여러 가설이 나왔는데, 퇴적학자 아메데오는 다뉴브강이 아무도 잠그지 않은 한 수도꼭지에서 생겨난다는 가설까지 내놓았다. 아메데오는 직접 그곳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에게 이 탐사는 단순히 강의 시작점을 확인하는 일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자기 안에 갇힌 생각에서 벗어나 바깥을 바라볼 구실도 필요했던 모양이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언제나 답을 찾아가는 길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제자리에서 맴돌 때도 있으니까. 사실 꼭 답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잠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거나 바깥 풍경을 보고 있다 보면, 내 안에서만 맴돌던 생각도 슬쩍 딴 데로 새곤 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마라, 라고 설교하던 때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느 정도는 틀렸다. 그랬다가는 자기 안에 갇혀 별점을 치다가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 그의 두려움에서 나온 찌꺼기와도 같은 연기에 휩싸인 우상, 저녁기도에서 어서 썩 꺼지라고 명하는 이 악몽에서처럼 어둠 속에 도사린 허망한 이 우상에게 향을 피우게 된다. (p. 29)

이 책은 베네치아의 시의원 마우리치오 체코니가 제안한 <여행 건축: 호텔의 역사와 유토피아>라는 주제의 전시회에 함께하자는 초대장에서 시작한다. 여행의 건축학이라니. 어디 여행이라는 게 계획대로만 흘러가던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뜻밖의 무언가를 발견하기도 하는 게 여행인데 말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여행이고 삶이라는 이야기를, 마그리스는 초대장 한 장에서부터 슬쩍 꺼내 놓는 게 아닐까 싶다.

9부로 나뉜 책에서 1부만 들여다봤는데도 카프카, 괴테, 첼란, 셀린, 헤겔, 횔덜린, 하이데거, 키르케고르 등 여러 인물이 언급된다. 지금까지 읽으면서 든 생각은, 마그리스가 인물이나 역사를 하나의 이름으로 정리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어떤 면을 높이 평가한다고 해서 다른 면까지 긍정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반대로 한 가지 면만으로 그 사람을 다 설명할 수도 없을 테니까. 살아온 시대와 내린 선택, 그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 얽혀 있으니 말이다. 이런 모순과 간극을 여러 인물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역사와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시처럼 읽히는 아름다운 문장을 만나 잠시 쉼을 얻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고아나 다름없이 살아간다고, 횔덜린은 「다뉴브 강의 수원에서」라는 시에서 말했다. 강은 삶의 흐름처럼 햇살에 반짝이며 흘러가지만, 빛나는 그 인상은 눈이 부신 시선이 만들어낸 시각적 환상이다. (...) 강은 늙은 도인道人과 같다. 강변을 따라가며 큰 바퀴 위에서도, 바퀴살 틈새에서도 가르친다. 여행마다 여유로운 시간, 나태, 흘러가는 물결 등, 적어도 남쪽의 한 조각이 있다. 자신의 강변에 있는 고아들에게 무관심한 채, 다뉴브 강은 바다를 향해, 위대한 확신을 향해 흘러간다. (p. 23)

마그리스가 어떤 생각을 하는 작가인지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만나기도 한다. 뜻밖에도 오래전 한 시인과 여인의 사랑 이야기다.

4세기 로마의 시인이자 수사학자였던 아우소니우스는 368년 게르만 원정에 나선 로마군을 따라갔다. 원정에서 승리한 뒤 그는 여성 노예 한 명을 얻었고, 그녀에게 비술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쉰여덟의 아우소니우스는 비술라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었지만 비술라는 그를 따라 로마까지 왔다. 게르만인의 금발과 눈을 지녔으면서도 로마식 옷을 입고 그곳의 생활에 익숙해진 그녀. 아우소니우스는 비술라를 사랑하면서도 그녀의 출생이나 독일의 강과 숲을 부정하라고 하지 않았다.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다고 해서 이전의 자신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을까.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마그리스가 서로 다른 문화의 만남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물론, 늘 조화로운 만남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다른 것들이 부딪히는 순간마다 선택해야 할 일도 생긴다. 다뉴브를 따라가는 동안 마그리스는 또 어떤 이야기들을 이어갈까. 아직 갈 길이 (매우) 멀다.

모든 민족에게는 자신의 때가 있는 법이고, 절대적으로 더 우월하다거나 열등한 문화는 없으며, 다만 민족들이 각기 다른 시기에 번영하고 쇠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체험하여 확실하게 배우지 않는 한, 우리는 진정으로 안전하다 말할 수 없을 뿐이다. 삶을 살아가고 읽는다는 것은, 모든 시기와 모든 국가에서 일어난 ‘인간의 정신사’를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강을 따라 삼각주까지 가다 보면 여러 다양한 사람과 민족 속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보게 될까. 아니면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 속에서 이 모두에도 불구하고 하나 된 인류의 합창을 듣게 될까. (p. 43)

관심이 가는 것마다 따라가다 보면 끝이 없다. 갖가지 사유를 좇으며 그 안에 담긴 본질까지 알아내 빈약한 영혼을 살찌우겠다는 욕심도 그닥 없다. 내 발등에 떨어진 일 처리하기도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자꾸 따라가게 되는 건, 그 안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다뉴브강을 따라 중부유럽에서 발칸으로 관심이 이어졌고, 마침 발칸을 배경으로 한 영화 <킹 페타르: 세계대전의 서막>을 보게 됐다. 1915년 겨울, 세르비아군과 피란민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불가리아의 협공을 피해 알바니아 산맥을 넘어 후퇴해야 했다. 눈앞에 화면을 채우는 건 눈과 추위 속에서 산길을 걷다 쓰러지는 사람들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을 보고 있자니, 그 겨울을 어떻게 버텼을까 싶었다.

영화 속에서 만난 세르비아의 페타르 1세 국왕은 실제로 젊은 시절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세르비아어로 옮겼을 만큼 자유주의적 신념을 품었던 인물이다.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이야기하던 사람이 포화가 빗발치는 전선에서 병사에게 듣는 자유는 ‘고통받을 자유’뿐이었다. 그 앞에서 페타르 왕은 끝내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자니 발칸의 역사를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어졌고, 책장에 꽂혀 있던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를 펼쳤다. 영화에서 본 전쟁은 그 땅이 겪어온 긴 세월 가운데 한 시기였다. 소설은 그보다 훨씬 앞선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그곳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망각은 모든 것을 치유시켜주었으며 노래는 망각의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노래 속에서 오직 사랑하는 것만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늘과 강과 산 사이 카사바에서 대를 이어간 세대는 혼탁한 물결이 휩쓸고 간 것에 그다지 슬퍼하지 않는 태도를 터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삶은 끊임없이 닳고 소모되지만 그러면서도 역시 지속되고 ‘마치 드리나 위의 다리처럼’ 단단하게 서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라는 카사바의 무의식적인 철학이 그들에게 스며든 것이었다. (p. 117)

새 신발에 뒤꿈치가 콱 깨물려도 괜찮겠거니 하며 계속 걷다가, 도저히 아니다 싶어 양말을 젖혀보면 이미 많이 까져 있다. 삶에도 그런 일이 있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거나, 뒤늦게 알아채거나, 알면서도 별일 아니겠거니 여긴 것들이 어느새 덩치를 키우고 있다. 미리 뒤꿈치에 밴드라도 하나 붙여두었으면 될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제 뜻대로만 살 수 없다며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여긴 방향들을 조금씩 지우기도 하고, 실리를 좇는 기회주의자이자 몇 가지 요령만을 갖춘 겁쟁이가 되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은 유연해진 것이라고 위안이라도 삼아 본다. 이렇게 스스로를 달래보는, 별거 아닌 하루다. 그런데 그 뒤늦음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에 닿고 나면, 내가 뭘 안다고 그랬을까 싶어진다. 훨씬 큰 힘에 떠밀려 살아야 했던 사람들은 그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지나왔을까. 사실, ‘어떻게’랄 게 있을까 싶다.

역사라는 이름 아래 몇 줄 줄거리로 요약되기 전에, 그곳에는 각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책이나 영화로 만난다.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이야기도 많다. 익숙하고 비슷한 이야기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 안에 있던 사람에게는 처음이자 단 한 번의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책을 통해 만난 사람들, 영화 속 그 겨울에 쓰러진 사람들에게도 한 사람 몫의 하루가 분명 있었을 텐데, 그 하루들은 대부분 이름도 없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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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무거운 생각이 그토록 오랫동안 그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그 생각 속에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인 것이다. - P61

"인생은 고약한 함정 이지요. 한 인간의 사색이 무르익어 완숙한 단계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출구 없는 함정에 빠졌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우연성에 의해 무로부터 세상으로 불려나온 거예요······ 왜죠? 그는 자기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알고 싶어하지만, 그것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도 없고, 말해준다 하더라도 헛소리들일 뿐입니다. 그는 문을 두드리지만, 그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죽음이 찾아오지요. 이 역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합니다. 감옥에서 공통의 불행으로 엮인 인간들이 함께 지내며 위안을 느끼듯이, 인생에서는 분석과 이론을 즐기는 인간들이 함께 모여 고담준론을 자유롭게 나누며 시간을 보내지요. 그러다보면 그것이 함정이라는 것도 잊게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지성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쾌락입니다." - P78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죽음에는 오로지 이득만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먹거나 마시지 않아도 되고, 세금을 안 내도 되며, 사람들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 무덤에 누워서 일 년도 아니고 백 년, 천 년을 지낼 테니, 그걸 다 계산하면 엄청난 이득이 되지 않겠는가. 사람은 살아 있으면 손해고, 죽으면 이득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일리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더라도 모욕적이고 뼈아픈 진리다. 이 세상의 이치란 왜 이리도 괴상한 것일까? 인간에게 단 한 번 주어진 삶이 이토록 아무 쓸모 없이 흘러가버리니 말이다. - P159

저는 떠올려봤어요. 실상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만족하고 행복해하며 살고 있는지! 이들의 세력은 참으로 압도적입니다! 우리 삶을 한번 보세요. 강자들의 몰염치와 나태, 약자들의 무지몽매, 주변의 끔찍한 궁핍, 비좁은 환경, 타락, 폭음, 위선, 거짓······ 그런 와중에도 집안이나 거리는 조용하고 평온합니다. 이 도시에 사는 오만 명의 사람 중 그 누구도 비명을 지르거나 큰 소리로 분노를 토하는 사람은 없지요. 시장에 가면 식료품을 사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들은 낮에는 먹고, 밤에는 잠자고, 제각기 헛소리를 지껄이다가, 결혼을 하고, 나이를 먹고, 그러다가 죽은 이웃을 싣고 숙연한 얼굴로 묘지에 갑니다. 우리에게는 고통받는 이들이 보이거나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지요. 그런데 이 세상의 끔찍한 일들은 무대 뒤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거든요. 모두 조용하고 평온한 가운데서 오직 통계 숫자만이 소리 없는 항변을 합니다. - P200

어쩌면 바로 이 영속성 속에, 우리 모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 완전한 무관심 속에, 인간의 영원한 구원에 대한 약속이, 지상의 생명들의 끊임없는 운동과 끊임없는 완성에 대한 약속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여명 속에서 너무도 아름다워 보이는 젋은 여인과 나란히 앉아, 바다와 산과 구름과 광활한 하늘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풍경들에 매혹되고 마음이 평온해진 구로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본질적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 이다. 존재의 고귀한 목적과 자신의 인간적 가치를 망각한 채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것들을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아름답다. - P259

좀더 지내다보면 해결책을 찾게 될 것도 같았다. 그때는 새롭고 멋진 삶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끝은 아직 저멀리 있고,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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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한 자리 차지하고는 있지만, 내내 읽을 기회를 놓쳐 ‘머무는 중’으로만 있던 세계문학 단편선 몇 권을 뽑아 들었다. 이 덩치들에게 숨통도 틔워줄 겸. 올해 안에 몇 권이라도 완독해 봐야지, 혼자 다짐을 실컷 하다가 이게 또 다짐까지 해야 할 일인가 싶지만, 다짐씩이나 필요하다. 몇 편 읽고 덮어도 좋고, 다른 책으로 넘어갔다 돌아와도 좋고, 이 책들과 조금 느슨하게 지내볼 생각이다.


랭스턴 휴스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 외 40편>

「떳떳한 코라」에는 멜턴이라는 아담한 마을에서 40년을 살아온 코라가 나온다. 주민들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사람. 그녀를 사람들은 흑인, 검둥이라고 부른다. 스튜더반 집안의 잡부로 일하며 개처럼 취급받아도 코라는 견딘다. 나가봤자 더 가난한 백인 집에서 학대받을 게 뻔하니까. 망할 아버지는 주정뱅이에다가 딸린 자식은 또 왜 그리 많은지, 그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부담감에 코라는 아이였을 때부터 놀 시간조차 없이 지내왔다. “예, 마님.”을 입에 달고 순종하며 지내는 코라가 백인 노동자 조와 짧은 사랑을 나누고 임신하지만, 그가 떠나고 혼자 낳아 키운 아이마저 백일해에 걸려 품에서 떠나보냈을 때서야 신에게 악다구니를 해 본다. 그래서 주인마님의 딸 제시를 속으로 제 딸처럼 여기며 사랑으로 보살폈는데, 제시마저 그 집안의 위선과 거짓에 둘러싸인 채 죽게 된다. 그동안 참고, 보고, 알고 있었던 것들이 장례식장에서 더는 눌러지지 않는다. 오래도록 꾹꾹 눌러두었던 말들이 결국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아가씨, 내가 잠깐 할 말이 있어요.”

이 단편선에 담긴 이야기들은 인종차별을 이야기하면서도 누군가를 줄곧 짓눌리는 사람으로만 두지 않고, 그렇다고 반대편 사람들을 악역으로 세우지도 않으면서도 사람을 좀 불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경매에 부친 소년」에서는 예술과 음악을 사랑하며 살아가던 백인 부부가 집에서 일하던 흑인 여성이 죽은 뒤, 그녀의 사촌인 흑인 소년을 집에 들이게 된다. 잘해준다. 친절하다. 그런데 그 친절 앞에 서 있으면 이상하게 한 발 물러서고 싶어진다. 선의라고 하기엔 어딘가 미심쩍고, 악의라고 하기엔 또 너무 멀쩡하다. 그래서인지 이 부부에게는 늘 이상한 이물감이 남는다. 흑인 예술에 관심이 많은 부부는 영감을 얻기라도 한 듯 아이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곡을 쓴다. 이렇게만 말하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어 보이지만, 노예를 그려보고 싶었다며 그림의 제목마저 ‘경매 부쳐진 소년’이라고 붙이질 않나, 속옷을 벗어달라고 하질 않나. 이들이 아이에게 보인 애착과 관심이 너무나 기괴하다. 여기서 만만치 않은 인물이 하녀 매티다. 다루기 힘들어졌다며 주인부부가 내보낼 생각을 하자 그녀가 받아친다.

“우리도 당신들 백인들의 멍청한 짓거리에 염증이 나던 참이에요!”

부부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만큼 맹랑한 말. 매티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말. 차별, 억압 등 익숙한 이야기를 가져와, 익숙한 사람을 만들어내지 않는 거, 당연한 스토리 안 만드는 거, 이게 매력이다.



허먼 멜빌 <선원, 빌리 버드 외 6편>

작년에 이 책에 실린 「꼬끼오! 혹은 고귀한 수탉 베네벤타노의 노래」를 읽다가 허먼 멜빌이 보통 입담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뒤늦게서야 알아버리고는, 선뜻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모비 딕>을 샀건만 언제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일단 맨 처음에 실린 「바틀비」를 읽어봤다.

화자는 변호사다. 자신의 법률 사무소에서 문서를 베껴 쓰는 필경사 몇 명과 함께 일하고 있다. 건물이며 직원이며 자기 성격까지 한참을 설명한다. 자신을 꽤 좋은 고용주라고 생각하는 이 변호사의 관찰력이 빛나는 온갖 설명과 변명을 잘만 듣고 있다가도 내심 속으로는 ‘아니 그래서 바틀비는 언제 나오는 건데’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는! 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일반적이지 않은 듯 보이면서도 그렇다고 주변에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변호사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해석하고, 혼자 이해하고, 또 납득이 안 돼서 머리를 굴리고, 속은 속대로 타는데 겉으로는 평화를 유지하느라 하루 에너지를 다 쓰는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집에 가면 씻지도 못하고 쓰러져서, “으으……” 영혼 빠져나가는 앓는 소리 내면서 잠들진 않을지ㅋㅋㅋ 이 와중에 드디어!!! 바틀비가 등장한다. 조용해 뵈는 바틀비가 새로 들어와 변호사는 너무나 만족스럽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참으로 예상 못 한 일이 벌어진다. 피식 대다가 의아스럽고 답답하다가 착잡해지고 씁쓸함까지 맛보게 된다.

아, 행복은 빛을 불러들이고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즐거운 곳이라고 여기는 반면, 불행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잠복해 있어서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지. 병적이고 어리석은 머리가 빚어낸 망상임이 분명한 이런 서글픈 상상은 바틀비의 기벽과 관련된 좀 더 특별한 다른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는 뭔가 이상한 것들을 발견할 것 같은 예감에 휩싸였다. 무정한 낯선 이들 사이에서 하늘거리는 수의에 싸여 누워 있는 바틀비의 창백한 모습이 떠올랐다. (p. 35)



윌리엄 트레버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

맨 처음에 실린 「욜의 추억」은 시작부터 묘했다. 호텔 테라스에서 깜빡 잠든 미스 티처가 눈을 떠보니, 산책을 나간 친구 미스 그림쇼가 앉을 자리에 낯선 남자가 와 앉아도 괜찮겠느냐고 묻는다. 미스 티처는 차마 안 된다고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퀼런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대뜸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미스 티처는 그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준다. 나였다면 진돗개 하나 발령과 동시에 이 사람이 계속 앉아 있으면 어쩌지, 해코지하면 어쩌지, 나중에 따라오면 어떡하지, 아마 온갖 걱정과 추측부터 하느라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못했을 것 같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내 앞에 앉아 있게 되는 이 상황 자체를 이렇게 오래 두고 보지도 않았을 거다.

처음에는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지?’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왜?’를 따지고 있을 틈조차 주지 않으니 말이다. 퀼런이 욜에서 보낸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려줄수록,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이 상황을 조금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됐다. 미스 티처가 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왜 낯선 남자의 사정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는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등등, 이 모든 걸 판단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고 다른 한 사람이 그것을 들어준다는 일이 더 중요하게 느껴질 만큼. 이때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미스 그림쇼의 등장으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다. 여기서 흥미롭게 들여다본 것은, 미스 티처가 퀼런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은 아주 사적인 마음과 그 마음을 옆에서 너무 아무렇지 않게 끊어버리는 미스 그림쇼에게서 느끼는 미묘한 불편함이었다.

“우리는 추억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윗옷 어깨에 비듬이 내려앉은 지저분한 낯선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짜증이 나 있는 미스 그림쇼에게 아무렇지 않게 껄껄대며 말하는 퀼런. 마치 ‘당신이 하는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사실인지조차 알 수 없군’ 하는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가벼운 대답 정도만 해주는 미스 그림쇼. 그런데 그 ‘가벼운 판단’이 미스 티처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아직 이야기를 다 듣지도 않았는데 누군가의 아픔을 이미 자기가 아는 도식 안에 넣어버리는 모습에 실망한 것 같기도 했다. 이쪽도 저쪽도 이해는 갔다. 언제나 타인의 마음을 깊이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비난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막상 내가 아끼는 사람이 타인의 아픔을 가볍게 바라보는 모습을 마주하면 어쩔 수 없이 실망하게 되는 그 감정. 희한하게도 별 감흥 없이 읽어내려 간 줄 알았는데, ‘나란 사람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충분히 흘러갈 시간을 주었던가’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든다. 사람의 이야기를 오래 듣는다는 건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전처럼 낯선 사람으로만 바라볼 수 없게 만들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함께.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 수도 있지만, 이런 상황을 내가 맞닥뜨릴 일이 있을까 싶기도 한 묘한 어긋남이 「탁자」에서 이어진다. 지극히 계산적인 유대인 가구 중개업자 제프스는 탁자를 사고파는 일을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추측하고, 그들의 삶을 짜맞추며 거의 확신까지 한다. 상상은 자유. 게다가 돈도 안 들고. 그런데 짐작을 사실처럼 굳혀버리는 일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사는 게 바빠 남의 일에 관심도 없고 신경 쓸 필요성을 모르겠다며 무심한 얼굴로 마음속으로 중얼거릴진 몰라도, 조각조각 쪼개서 들여다보면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타인의 삶에 참 관심이 많다. 문제는 자기 안에서만 완결된 해석을 붙들고 내 짐작은 틀림이 없다고 자부하면서 그 생각을 어느 순간 사실처럼 믿어버린다는 것. 이런 심리를 드러내고 끝이 나버린다면 아, 뭐야 싶을 텐데, 제프스에게서 느껴지는 건 뜻밖에도 그의 고독과 결핍이었다.

제프스는 눈을 감은 채 마음속으로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넓은 빅토리아풍 집에 홀로 서 있는 자기 모습을 보았다. 그의 집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러 달이 흐르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구는 단 한 점도 없었다. 그는 팔고 또다시 샀다. 그는 카펫을 깔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가 온전히 제 것으로 소유한 거라고는 예전에 누군가가 아무런 가치 없는 물건이라고 일러 준, 오래된 라디오 하나밖에 없었다. (「탁자」, p. 46)

조금 더 황당하고 조금 더 긴장하며 읽게 만든 「펜트하우스」는 런던의 한 건물에서 개 한 마리와 함께 사는 중년의 독신 여성 윈턴의 이야기다. 그녀가 사는 건물의 꼭대기층에는 돈 많은 런카 부부가 살고 있다. 그 집에서 일하는 비안카가 식료품점에서 만난 윈턴에게 펜트하우스 구경을 부추기고, 윈턴은 본의 아니게 자신의 개와 함께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게 된다. 수줍음이 많아 15년을 외롭게 지낸 윈턴이 먼저 다가와준 비안카의 손길을 저버릴 수가 없었나 보다. 마침 수도를 고치러 와 있던 관리인 모건까지 합세해 칵테일을 마시는 세 사람. 그런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던 모건이 꽃병을 깨트리고, 카펫 한가운데가 큼직하게 젖어버리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뭔가 이럴 줄 알았어 싶은 일이 기어코 벌어지니 속이 탄다. 어휴. 게다가 오늘은 런카 부부의 펜트하우스를 잡지에 싣기로 한 사람들이 오기로 한 날. 당황스러운 윈턴 앞에서 모건과 비안카는 깔깔대고, 모건은 윈턴이 데려온 개가 꽃병을 깨트렸다고 하자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 그 뒤로도 짜증 나고 어이없는 상황이 이어지는데 나랑 윈턴만 쫄려 죽게 생겼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비안카와, 관리인으로 지내며 여러 세입자의 못 볼 꼴을 다 봐온 탓에 분노와 억한 심정으로 가득한 모건. 이런 두 사람을 보며 윈턴은 나이도 훨씬 많고,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p. 71)인 자신이 이 상황을 정리해야겠다고 느끼기라도 한 건지, 온갖 상황을 머릿속으로 상상한다. 곧이어 펜트하우스 주인 부부와 잡지사 사람들이 도착하고, 서로를 이해시키고 오해를 풀고 싶어 하는 마음은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는다. 윈턴이 이 집에 발을 들일때 부터 왜인지 그냥 제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천만 번 했던 내 속도 점점 끓어올랐다.

재미? 글쎄. 집중하느라 손톱을 잘근거리며 읽게 만드는 그런 재미는 아마 이 책을 덮는 순간까지도 없을지도 모른다. 아직 이 한 권도 다 읽지 않은 터라 대단히 섣부른 판단일 수 있지만, 느낌상 그렇다. 그런데 왜 자꾸만 그 한 장면, 그 잠깐 느껴진 분위기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무심히 뽑아내는 한마디와 그 순간의 감정 속에서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마음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 굳이 재미를 찾지 않게 만드는 이유가 되어주는 것 같다. 「펜트하우스」의 윈턴만 해도 내내 외롭게 지내다가 타인의 손길에 15년 만에 용기를 냈다. 처음으로 남들처럼 평범하고 소소한 즐거움에 어렵게 한 발 내딛어 본 날, 그야말로 개떡같은 일에 휘말린 거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그럼 그렇지. 살던 대로 살지, 내가 무슨.’ 이런 자괴감에 다시 몸을 움츠리진 않을까. 그런데 또 누가 알아. 사람이라면 아주 진절머리가 나서 ‘아, 됐다. 나 혼자서 잘 먹고 잘 살 거야!’ 할지도 모르지.

윌리엄 트레버라는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 때문인지 궁금했었다. 그의 글이. 몇 편의 이야기를 읽으며 느낀 건, 이해가 필요한 여러 상황 속에서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은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는 거다. 인물의 말에 담긴 뉘앙스가 어느 순간 ‘아, 이거’ 하고 확 읽히면서 내가 알던 그 마음을 알아보게 되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한 번씩 붙잡히기도 한다. 잔잔하게 이야기가 흘러가다가도 어느 순간 공기를 확 제압해버리는 문장이 툭 등장한다. 그 갑작스러움에 쓸쓸했고 서글펐고, 때로는 간사했고 오만했고 외로웠던 그때의 내 마음들이 자연스럽게 불려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나의 곁이 필요한 때가 있다는 생각도 하면서. 그러던 중 최근에 받아든 헤르만 브로흐의 <현혹>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나에게 속하지 않고 인류에게 속해 있는 무한성, 어제를 지워버리고 내일만을 인정하는 무한성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시시한 일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일이란 이제는 인식하는 일이 아니고 살기, 함께 살기, 필요할 땐 가끔 도움을 베풀기이다. 나의 내일이 점점 짧아지고 있으니 그렇게라도 해서 어제를 구원하고 싶은 모양이다”


8월이 가고, 9월이 왔다. 지나가고, 새로 왔다.
새로 온 것 중에는 책도 몇 권 있다. 그리고 커피까지. 드립백, 오랜만이다. 알라딘에서 커피를 사는 건 처음이다. 디카페인은 제외하고 싱글 오리진으로만 고르다 보니 종류가 몇 가지밖에 없어, 일단 종류별로 골라봤다. 궁금하니까. 이제 차가운 컵을 쥔 손의 시원함보다 온기를 찾게 되는, 따뜻한 커피가 생각나는 계절에 다다르긴 했나 보다.

그래도 아직은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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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9-21 0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윌리엄 트레버 작가 책 저도 가지고 있어 중복되어 반갑네요. 사다놓은지는 한참인데 아직 읽진 못했어요. 한때 현대문학 단편선에 꽂혀 수집?해 보리라 다짐한 적 있었는데 여적 세 권밖에 못 모았어요. 읽지도 않는데 구입만 해서 뭣하나? 그런 생각도 들었고.ㅋㅋ 근데 곰돌이 님 리뷰 읽다보면 아, 다시 모아야 하는 건가? 또 들썩여지기도 하네요.ㅋㅋㅋ 그나저나 알라딘 커피 많이 구입하셨네요? 드립백인가보죠? 하긴 드립백은 갯수가 적어 금방 다 먹어지긴 합니다. 저렇게 쟁여놔야 한 달은 마실 수 있겠어요. 저는 한여름에도 뜨라떼를 마시는 편인데 아직도 아아를 마시다니…많이 젊으시구나! 생각했습니다.ㅋㅋㅋ 제 주변 젊은이들?은 제가 뜨거운 커피 마시는 걸 보고 안 더우세요? 하며 깜짝 놀라곤 하시길래 아, 내가 엄청 나이를 많이 먹었나보군! 그런 생각을 올해부터 하게 되었거든요.ㅋㅋㅋ 그래서 따뜻한 커피를 마셔도 주변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계절이 다가와 참 좋네요.^^ 그리고 즐거운 독서의 계절인지, 방해의 계절인지 모를 계절. 가을! 곰돌이 님께는 즐거운 독서를 즐길 수 있는 좋은 가을이 되셨음 싶네요.^^

곰돌이 2026-09-21 08:10   좋아요 1 | URL
책장에 언젠가는 읽어야 할 텐데, 라는 마음의 짐이 느껴지는 책들 많으시죠? 저는 세계문학 단편선 몇 권, 안나 카레니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 등이 있는데요. 뭔가 스스로 작정하지 않으면(?) 안 읽힐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시작해보자!! 해서 가장 얇은 것들 위주로 꺼내봤어요. 몇 편씩만 읽어봤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나무님도 맛있는 커피 호로록 마시면서 윌리엄 트레버 슬쩍 만나보세요. 요즘 날씨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아, 맞다! 잃시찾 읽고 계신 나무님이시다. 그럼 덩치들에게 눈길이 가기란 쉽지가 않을.... 그럼, 더 천천히 더 느긋하게 즐기면 되겠어요. 그런데 굳이 마음을 먹지 않아도 계절의 변화나 혹은 어떤 감정의 기복에 따라 전혀 생각도 안 했는데 알아서 손에 잡히는 책이 있는 것 같아요. 점점 날이 썰렁해져서 그런지 뭔가 바스라지는 낙엽 같은 건조한 이야기도 조금씩 생각나요. 체호프의 단편도 올해 한 번 읽어보려구요. 차곡차곡 뭔가 자꾸 쌓이기만 한다. ㅋㅋ

정말 오랜만에 드립백이었어요. 다 마셔보진 못했는데, 예가체프 G1 게뎁 첼첼레 괜찮더라고요. 부모님도 드리고, 저희 언니 가방에도 몇 개 쳐 넣어주고 ㅋㅋㅋ 그러다 보면 한 달도 못 갈 것 같아요.

아, 월욜이 좋기란 거의 희박한데, 오늘은 나무님 덕분에 평소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시작을 하게 되네요. 진짜루요. 흑..

다락방 2026-09-21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저는 오늘 언급하신 책 중에서 랭스턴 휴스가 관심이 갑니다. 저는 인종차별, 그리고 디아스포라 에 대해 정말 관심이 많거든요. 그런 글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실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도 물론 관심이 있지만, 문학으로도 읽고 싶어요. 덕분에 오늘 알아갑니다.

역시, 곰돌이 님의 서재에 오는 일은 즐겁습니다. 좋은 글과 함께 좋은 책을 알아가니까요. 계속 써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좀 더 자주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루에 반드시 하나씩!! 어때요?

곰돌이 2026-09-21 09:50   좋아요 0 | URL
오늘은 이 곰이, 다락방님과의 공통점을 찾아낸 날이네요. 저 역시 인종차별, 디아스포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어서인지 많이 읽어보려고 하고 있어요. 깊이는 얕지만, 꾸준히 손길이 가요.

이따금 책을 핑계 삼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 것이 전 여전히 ‘내가, 내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해요. 또 그때마다 당근을 손수 입에 물려주시기까지 해 주셔서 어찌나 감사한지, 직접적으로 알려드릴까요? 뭔가 범접하기 어려운(?)분들이 많은 이 공간에서 저처럼 보통의 사람들도 무언가를 쓴다는 것에 대한 주저함을 조금씩 덜어내는 계기가 주어진다는 것은, 그 사람의 그 날의 하루와 감정을 책임지기도 한단 말이죠!

그런데, 삶과 운명은 다락방님께 땡투까지 해서 구매한 건데, 저 책 갖고는 계시죠? ㅋㅋ

다락방 2026-09-21 10:11   좋아요 0 | URL
당연히!! 갖고 있습니다!! (읽지는 못했지만요. 속닥속닥)

yamoo 2026-09-21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윌리엄 트레버, 허먼 멜빌 현대문학사판 2권에다가 현혹이라니.. 거기다가 제노의 의식까지...4권이 겹치네요!! <삶과 운명>3권도 주문했습니다!ㅎㅎ

곰돌이 2026-09-21 14:08   좋아요 0 | URL
yamoo님과 감히 책 취향이 비슷하다고 생각해 버리겠습니다. ㅋㅋ 최근에 올려주신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도 궁금했던 작품이었는데, 리뷰 올려주셔서 뭔가 해소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지금 언급된 책들 중에서도 몇 권 먼저 읽고 리뷰 써주시면 좋을 텐데요...

rainbass 2026-09-22 0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돗개 하나를 아는분과 커피한잔 하고 싶습니닷!! 우리 축구얘기도 해봐요. ㅋㅋ

곰돌이 2026-09-22 05:23   좋아요 1 | URL
세상이 숭해서 경계부터 하게 된 곰. 그러나 rainbass님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자, 앉으시죠!
 

주문한 책이 도착해 박스를 열어 볼 때마다 어찌나 후끈한 열기를 가득 품고 있던지, 거의 구해내듯 책을 꺼낸 것 같다. 한동안 책 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 책장에 새 책들을 옮겨 보지만, 그 생각도 오래가지는 않는다. 어느새 아침으로는 습하지만 조금은 선선해졌고, 또 이때쯤이면 눈길이 가는 이야기가 생긴다.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스토리>라는 책을 만났다. ‘아무도 나무를 보지 않는 시대’에 대한 경고를 담은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환경 서사시라는 소개가 눈에 들어왔다. 2019년 퓰리처상 수상작이라고 적힌 띠지를 떼어내고 한 장 한 장 넘겨보는데, 예상한 것보다 더 좋았다. 단순히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 영 마음에 안 차지만, 이 두툼한 책을 읽는 동안 내게 무언가 닿는 순간이 많을 것 같다는 섣부른 확신 같은 게 들었다.

자연을 의식하며 살아본 적이 거의 없다. 나무는 늘 나무였고, 산은 늘 산이었다. 계절은 알아서 바뀌었고, 나는 그 곁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늘 거기에 있었다. 당연했다. 아니, 당연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결락이라는 말이 내 삶에 들어왔고, 아무것에도 위안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지려 마음을 쓰지 않았으니 애쓸 일도 없고, 애태우지도 않았다. 내가 너무 구름 위를 걷는 듯 살아왔던 걸까. 상실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경계 너머의 것이었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는 기억에서도 지워졌지만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는 것만은 분명한 그날, 걷다가 저 멀리 보이는 울창한 산을 바라봤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거짓말이다.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보이는 그 산은, 보기만 해도 속이 답답했다.

그렇게 걸었고 또 걸었다.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그제야 안다.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아 잊고 있었던 것들을. 냄새도 맡아보고, 소리도 들어보고, 방향도 바꿔보라고. 자연은 내다볼 줄 안다. 그러니 나는 자연에 빚을 졌다. 자연만이 아니다. 책에도 빚을 졌다. 지금은 꼭 이유가 있어야 책을 펼치는 것은 아니다. 읽다 보면 읽고 싶어지고, 읽고 싶으면 또 펼친다. 그 사이 어딘가에 의리도 조금은 있는 것 같다. 이제 아주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지나간 순간의 숨을 다시 쉬는 날이 있긴 하지만, 예전처럼 오래 붙들고 있진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된 나에게, 그때의 나와 내가 해보았던 여러 시도를 떠올리게 했다. 이 책이.


리처드 파워스 <오버스토리>

오버스토리. 숲의 지붕을 이루는 나무들의 층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뿌리, 몸통, 수관, 종자’로 이어지는 목차를 보니, 나무 한 그루를 들여다보듯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는 소설인 걸까. 전후 사정도 알지 못하면서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이 있었다”라는 이 짧은 첫머리를 읽고, 어디라고 정확히 짚을 수 없는 곳에서부터 찌르르해지면서 나의 묵힌 감정들이 올라왔다. 자연에 기대어 본 적이 있기에 조금 더 특별한 감정으로 다가왔는가 보다. 그때의 나는 분명 이 책을 읽을 생각조차 안 했을 테지만, 지금은 읽고 있다.

어떤 여자가 바닥에 앉아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다. 나무껍질이 여자의 등을 인생처럼 딱딱하게 누른다. 솔잎은 허공에 향기를 뿌리고 나무 한가운데에서 전해지는 힘이 나직한 노래를 부른다. 여자의 귀가 가장 낮은 주파수에 집중한다. 나무는 말이 존재하기 전의 말로 이야기를 한다. (p. 13)

뒤이어 “신호가 여자의 주위로 씨앗처럼 떨어진다”는 문장에 시선이 한동안 머물렀고, 당장에 눈에 띄는 것은 없었지만 천천히 비집고 나오고 있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며, 아주 조금은 가상히 여겨보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책 속의 죽음을 읽으며 누군가를 잃었던 때를 떠올렸다. 글쎄, 그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 만한 말은 잘 모르겠다. 그저 어쩌지 못하겠는 마음을 책을 통해 다시 마주하니 조금 힘들었다. <모든 저녁이 저물 때>라는 책 때문이다.


예니 에르펜베크 <모든 저녁이 저물 때>

갈리시아의 한 작은 도시, 유대교 여성과 기독교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여덟 달 된 아기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 속하는 일 앞에서 아기 엄마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예전에 장례를 마치고 아직 슬픔에 잠겨 있는 유가족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곤 했던 그녀의 발치에는, 이제 한 친구가 가져다 놓은 음식 그릇이 놓여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할머니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더 이상 할머니가 아니다. 다시 딸의 엄마일 뿐이다. 이야기는 어머니가 오래전 겪었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딸이 이제 조만간 깨닫게 될 사실을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이 죽은 하루가 저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이 저무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p. 24)

그런데 작가가 이야기를 참 묘하게 끌고 간다. 한 장면을 한 방향으로만 밀어붙이지 않고, 아주 작은 틈을 통해 자연스럽게 다른 결로 옮겨간다. 풀어가는 방식 자체가 꽤 마음을 잡아끌고 매력 있다. 예측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마음이 슬픈데, 아름답다. 너무 알겠는데, 어디서 읽어본 적은 없다. 이러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


그리고,


시몬 드 보부아르 <레 망다랭>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돌아가다>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책들과 동성애자로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 내가 파리에 정착하게 만든 두 가지 큰 이유였던 것 같다”는 부분을 읽고 밑줄까지 그어 가며 궁금해했다. 보부아르를. 누군가의 글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과, 그 글이 실제로 삶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 아닌가. 출신 계급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처럼, 성적 지향은 평생 감춰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았을 그가 보부아르를 읽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이 자신의 삶을 전부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가능성’을 발견했을 때의 그 표정이, 짧은 문장 안에서도 다 들여다보이는 것만 같았다.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게 된 자의 해방감이. 나도 보부아르를 펼쳤다. 여러 책 중에서도 <레 망다랭>을.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앙리는 ‘희망’이라는 뜻의 신문사 <레스푸아>를 운영하고 있다. 크리스마스이브, 앙리와 그의 동거녀이자 전직 가수인 폴이 사는 원룸에 작가 뒤브뢰유와 그의 아내 안, 딸 나딘을 비롯한 사람들이 모인다. 전쟁이 끝나가는 시기, 이들은 한자리에 모여 술과 음식을 함께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뒤브뢰유는 앙리에게 자신의 정치적 활동에 함께할 것을 권한다. 신문사를 계속 운영하는 한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앙리도 잘 알지만,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어 한다.

늘 똑같은 얼굴들, 똑같은 환경, 똑같은 대화, 똑같은 문제들, 변하면 변할수록 더욱 비슷해지다니. 결국 살아 있는 채로 죽어가는가 싶은 것이다. (p. 22)

“나는 생각하는 것을 반드시 있는 그대로 말하려고 해. 조직에 매이지 않은 채 말이야.” (p. 36)

서로 다른 생각으로 충돌하고, 사랑하고, 상처받으면서도 자기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초반부만 읽어서 다 짐작할 순 없지만, 정치와 이념을 둘러싼 이야기라 읽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릴 줄 알았는데, 결국은 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생각보다 흥미롭게 읽히고 가독성도 괜찮다.


디노 부차티 <타타르인의 사막>

처음 만나는 이탈리아 작가 디노 부차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는 작가라는데, 몇 쪽을 읽는 동안 가장 크게 느낀 건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담담한데, 어딘가 착잡한 기운이 감돈다는 것.

힘들었던 기숙사 생활을 끝내고 장교가 된 조반니 드로고는 첫 부임지인 바스티아니 요새로 떠난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나 활기가 느껴진다기보다는 미래에 큰 기대도 없어 보이고, 심지어 헛헛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머니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길을 나선 그는 어디에 있는지도, 얼마나 먼지도 모르는 요새를 찾아 계속 산을 오른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마부에게 요새의 위치를 묻자, 뜻밖의 답이 돌아온다.

“이 부근에는 요새가 없어요.”

불안감이 밀려오지만, 그가 잘못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렇게 한참 더 올라 마침내 거대한 군사시설과 마주한다. 황량하고 냉랭한 건축물. 이번에는 정말 요새인가 싶었는데, 또 아니다. 걸인으로 보이는 어떤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며 이곳은 이미 십 년도 넘게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곳이라고 한다. 거센 바람까지 불어닥친다. 잠잠해지고 난 뒤 다시 길을 나서고, 마침내 사람이 눈에 보인다. 오르티츠라는 이름의 대위였다. 인사를 나누던 중, 대위가 드로고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굽니까?”

드로고는 두려움을 느낀다. 아무 뜻 없이 던진 평범한 질문이었을 텐데, 왜 이 말이 드로고에게는 대답하기 두려운 질문이었을까.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안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라도 온갖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와 쉽게 입을 떼기 어려웠을 것 같다. 드로고에게도 그랬던 건 아닐까. 이어 대위에게서 또 한 번 예상 밖의 이야기를 듣는다. 드로고의 목적지인 바스티아니 요새는 더 이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

저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이 거주하기 힘들어 보이는 저 건물과 흉벽, 포대와 탄약고 뒤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까? 아무도 지나쳐간 적 없다는 돌투성이 사막의 북쪽 왕국은 어떠할까? 어렴풋이 기억하건대, 지도에서 국경선 너머 광활한 지역에는 몇 안 되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요새의 높이 정도라면 몇몇 마을이나 초원, 하다못해 집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아니면 오직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의 황량함뿐일까? (...) 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요새 입구에 발조차 내딛지 않고 다시 그가 떠나온 평야로, 그의 도시로, 익숙한 옛 생활로 내려갈 수만 있다면! (p. 21)


버나딘 에바리스토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흑인 여성 최초로 부커상을 받은 작가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작품이다. 열아홉 살 딸을 둔 오십 대 여성, 자칭 전투력 넘치는 중년의 베테랑 ‘앰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런데 앰마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구 도미니크에게로 시선이 옮겨가고, 또 다른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 사람의 가족과 친구, 과거의 시간까지 닿는다. 한 사람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 사람을 둘러싼 다른 삶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열두 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내가 알지 못했던 삶의 모양들을 하나씩 만나게 될 것 같다.

한 사람을 내가 본 모습 하나, 그 단면으로만 기억하는 건 어쩐지 아쉽다. 지나고 나서야 후회로 남는 순간들이 있어서일거다. 누구나 남들이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의 시간이 있고, 누구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니까. 그런데 참 웃긴 것이, 소설 속 인물을 바라볼 때는 내가 알지 못하는 모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깊이 들여다보려고 하면서, 현실에서는 영 그러질 못한다.


아무튼, 오늘도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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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8-23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버스토리>가 맘에 꽂히네요.
자, 이제 색깔별로 꽂아볼 시간입니다. ㅎㅎ

곰돌이 2026-08-23 12:00   좋아요 0 | URL
이대로 색깔 찾아 쏙쏙 채우기만 하면 될 것 같죠? ㅎㅎ 고스란히 들어가 줄 만큼만 책장이 넉넉하면 좋을 텐데요... 흑흑

자목련 2026-08-23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버스토리>아름다운 문장과 자연의 신비로움으로 기억하는 소설이에요.
나란히 발맞추는 책들, 경쾌하고 즐거워 보입니다!

곰돌이 2026-08-23 12:01   좋아요 0 | URL
이 책에 자목련님이 남겨주신 글과 산뜻한 책 사진, 이미 다 보았지요. ㅎㅎ 처서매직은 없지만, 가을로 점점 기울어져가고 있어서인지 어딘가 차분하면서도 잔잔한 이야기에 손길이 가요!

Falstaff 2026-08-23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돌이님 글도 참 잘 쓰셔요. 세상에 이런 일이! 전부 재미나게 읽은 책이라 내 마음까지 므흣하네요.

곰돌이 2026-08-23 12:02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님의 첫 칭찬에는 (혼자 가슴에 새겨둠 ㅋㅋ) 앞으로 더 열심히 읽어보라는 응원의 뜻이라 생각하며 흥분을 간신히 가라앉혔는데요. 이번엔 못 참습니다!!! 폴스타프님의 글을 읽고, 고른 책으로 책장을 채우는 경우가 많으니 (이미 아시죠? ㅋㅋ)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기도 이제 머쓱할 지경이네요.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 계속.

다락방 2026-08-23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돌이님 글도 참 잘 쓰셔요.2 저보다 먼저 폴스타프 님이 말씀해주셨네요. 저도 딱 그 댓글 달려고 했거든요. 곰돌이 님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좋고, 이게 알라딘이다 싶어요. 크- 계속 써주세요!

다락방 2026-08-23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오버스토리 저도 사둔지 한참 된 책입니다! (안읽었지만..)

곰돌이 2026-08-23 18:0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댓글 첫줄에서 폴스타프님 목소리(제가 상상한 그의 음성이...ㅋㅋ)가 들리네요. 큰 의미고 뭐고 없이 재미만으로 읽을 때도 많지만, 속에 들어찬 무언가를 좀 덜어내고 싶을 때, 내 이야기를 써 보고 감정을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는 그 시간만으로도 얻는 게 넘 많아서 겁없이 이어가고 있네요. 제가 잘한 일 중 하나이기도 해요. 큭. 그런데 이렇게 곰 한 마리의 마음을 후끈하게 해주시는 이야기까지 들으니... 이 순간을 잔뜩 누리리! ㅎㅎ <오버스토리>는 제가 먼저 읽어볼게요. 다락방님은 잃시찾도 읽으셔야 하고, 넘 바빠요!
 

최근에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었는데, 호아킨 폰트라는 인물이 자기 딸의 친구이자 젊은 시인인 벨라노와 리마를 향해 이런 말을 했다.

지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그런 문학은 넘쳐 난다.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최고의 문학이다. 슬플 때를 위한 문학도 있다. 기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지식에 갈증을 느낄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절망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이 마지막 문학이 울리세스 리마와 벨라노가 하고 싶어 한 문학이다. 곧 알겠지만 심각한 오류이다. 예를 들어 평온하고 교양 있고 대체로 건전한 생활을 하는 성숙한 독자, 즉 평균적인 독자를 생각해보자. 책과 문학지를 구매하는 사람을. 자 그 사람이 여기 있다. 그 사람은 차분할 때를 위해, 평온할 때를 위해 쓰인 문학을 읽을 수 있다. 또한 터무니없거나 유감스러운 공모(共謀) 없이 비판적인 눈으로 그리고 냉철하게 다른 모든 종류의 문학을 읽을 수 있다. (...) 사람이 평생을 절망하면서 살 수는 없다. 몸이 결국 말을 듣지 않게 되고, 고통은 결국 견딜 수 없어지고, 총명함은 차가운 세찬 물줄기 속에 사라진다. 절망하는 독자는 결국 책과 멀어지고, 필연적으로 절망만 하는 사람이 된다. 아니면 절망을 치료한다! (...) 광맥을 고갈시키지 말라고! 겸허해지라고! 미지의 땅에서 찾아 헤매고 방황하라고! 그렇게 하되 빵 부스러기나 하얀 조약돌 같은 생명줄은 유지한 채! (《야만스러운 탐정들 1》, p. 321)

기존 문단의 질서에 맞서 자신들만의 문학을 꿈꾸던 반항심 가득한 청년들에게 건넨 조언이었다. 물론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지만... ㅋㅋ 내가 그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호아킨이 최고의 문학이라고 말한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을, 특정한 감정 하나에 독자를 붙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삶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문학으로 읽었다. 그리고 이 말은 꼭 문학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벨라노와 리마를 향해 던진 호아킨의 문학적 조언이 다 와닿는 것은 아니었다. 절망에 깊이 잠긴 문학이 어떤 독자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게 하는 통로가 되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게 만들기도 하니까.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 곳도 갈 수 없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돼버린 이들에게도, 언젠가 문을 열면 자신을 기다려 줄 곳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 이건 어디까지나 독자인 내 바람일 테다. 모든 종류의 문학을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을 만큼 자유롭고 성숙한 독자는 아닌, 그저 취향에 맞는 책을 집어삼키는 내게는 어둠 속을 방황하더라도 결국 삶으로 돌아올 ‘생명줄’을 쥐고 있으라는 당부의 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사실 늘 평온하기만 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아마 호아킨이 말한 평온함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라기보다, 온갖 고통의 소요를 치르고도 끝내 자신을 잃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지. 지금의 나에게는 내공에 가까운 말이다.

예전에는 특정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 중 하나로 문학이 내게 이용당하곤 했다. 이제는 어떤 감정 속에 있더라도 그것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틈을 만들어준다. 그 감정에만 오래 머물지 않게 해준다고 해야 할까. 그 고마움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책을 붙들고 읽어 나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내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다. 삼십삼 년을 살아오며 어설프게나마 깨우친 것이 몇 있긴 해도 (진짜 있기나 한 건지...), 정말 앞날만큼은 알 수가 없다. 그건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와도 모를 일이지. 그리고 오늘의 이런 건전한 생각(?)이 앞으로도 그대로 유지되면 좋겠다만, 온갖 것을 다 쏟아부어도 ‘영 오늘은 날이 아니구나!’ 싶은 개떡 같은 날은 또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런 날에는 화려한 수식어구가 필요치 않은, 그저 글을 썼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사람들의 글을 찬찬히 읽고 마음을 헤아려보며, 잠깐 내 사정은 잊고 몰입한다. 그러다 문득, 몰입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 그 어떤 틈새가 내게도 있었던 거구나 싶어 ‘이만해도 됐지 뭐’ 하며 지나간다. 그렇게 지나가진다. 그러고는 다시 책을 편다.

돌고 돌아 7월에 산 책 이야기다. 이놈의 손가락이 인내라는 것을 몰라 장바구니를 비우고 또 몇 권 품에 들였다. 책을 고르는 일은 늘 그렇다. 읽고 싶은 마음은 앞서고, 참는 마음은 늘 한발 늦는다. 책 선택의 고민을 덜고, 또 다른 세계로 쉽게 발을 들일 기회를 얻는 일은 언제나 반갑고 귀한 일. 이번에도 먼저 읽고 좋은 리뷰를 남겨주신 알라디너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소박한 땡투에 꾹꾹 눌러 담았다. 앞서 호아킨의 문장 하나를 붙잡고 이야기가 길어졌으니, 새 책 이야기는 가볍게 남겨야겠다.



토니 모리슨 《가장 푸른 눈》, 《솔로몬의 노래》

누군가의 상처를 개인의 불행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그 뒤에 놓인 사회와 역사의 그림자까지 드러내는 작품은 늘 내 책장 한 켠을 차지한다. 그중에서도 흑인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다. 그동안 만나봤던 저메이카 킨케이드는 식민지의 기억과 여성의 목소리를, 글로리아 네일러는 흑인 여성 공동체의 삶을, 옥타비아 버틀러는 SF라는 장르를 통해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토니 모리슨이다.



이보 안드리치 《드리나 강의 다리》

한 시대를 담아내는 소설, 역사와 인간이 얽힌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보스니아의 드리나강 위에 놓인 한 다리가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걸까. 시작은 다리를 둘러싼 오래된 전설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천천히 풀어낸다. 오스만 제국 시절 세워진 그 다리는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가고 사라지는 시간을 지켜봤고, 제국이 바뀌고 전쟁이 휩쓸고 지나가는 시간도 묵묵히 견뎌냈다. 수백 년을 같은 자리를 지킨 다리라면, 웬만한 역사책보다 더 많은 사람의 삶과 시간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다리가 간직한 것은 거대한 역사의 기록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이야기로 남긴 순간들, 그리고 그들이 잊어버린 시간까지도 함께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란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고 전설로 바꿀 수 있는 것들만을 기억하고 다시 곱씹어 이야기하는 법이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여러 가지 자연 현상들에 대해 무관심하듯 그렇게 특별한 흔적을 남기는 법도 없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갈 뿐인 것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건드리지도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도 않는 법이니까. (p. 32)



알라 알아스와니 《야쿠비얀 빌딩》

1934년 아르메니아인 사업가 하굽 야쿠비얀이 카이로 중심가에 지은 10층짜리 유럽풍 건물. 처음에는 외국인과 상류층 사람들이 호화롭게 살아가던 최고급 아파트였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모습도 달라졌다.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 외국인과 상류층 사람들이 떠나고, 일부 공간은 사무실이나 병원, 임대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과거 하인들이 머물던 옥상에는 값싼 거처를 찾는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또 하나의 서민 사회가 만들어졌다.

처음 만난 인물은 자키 베다. 상류층 명문가 출신이지만 혁명 이후 집안이 몰락하면서, 한때 꿈을 펼치던 엔지니어링 사무실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신세가 되었다. 여자를 좋아하고 음담패설을 즐긴다. 그리고 그런 그를 20년째 ‘주인님’이라 부르며 모시는 아바스카룬이 있다. 그렇다면 건물 꼭대기에는 어떤 삶이 펼쳐지고 있을까. 라크아를 행하는 모습, 침대에서 있었던 일을 부끄러움 없이 이야기하며 웃는 여자들, 그리고 빵 한 덩어리를 얻기 위해 고단한 하루를 버텨내는 사람들. 그곳에는 팍팍한 삶 속에서도 잠시나마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대단하지 않은 작은 순간들을 붙잡으며 하루를 이어가고 있었다. 소곤소곤 대는 소리,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 기침 소리, 쉬지 않고 이어지는 기도문 소리와 함께.



쥴퓌 리바넬리 《세레나데》

소설의 주인공은 서른여섯 살의 마야 두란이다. 그녀는 지금 보스턴행 비행기에 올라 노트북을 펼쳤다.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생각이다. 마야는 석 달 전으로 돌아가 그날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스탄불 대학에서 외국인 손님을 맞이하는 일을 하는 마야는 어느 날 독일 출신의 87세 미국인 노교수 막시밀리안 바그너를 수행하게 된다. 늘 그랬듯 튀르키예를 소개하고 손님의 편의를 도우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른손에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다른 손에는 여행 가방을 든 노교수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와 침묵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그러던 순간, 교수가 묵을 숙소로 향하는 택시 뒤를 계속 따라오는 수상한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온다. 뭐지? 공상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마야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바빠진다. 이 교수가 혹시 스파이는 아닐까. 뒤따르는 차는 정보국 차량은 아닐까. 갑자기 요원들이 들이닥쳐 교수를 납치하는 것은 아닐까. 온갖 상상을 펼치던 마야. 대체 왜 그녀는 몇 달이 지난 지금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 글로 남기려 하는 걸까.

나는 모든 걸 다 털어놓을 셈이다. 이렇게 다 이야기하고, 내가 목격한 사실을 만천하에 알려야 내 고통도 극복될 테고, 삶도 단순해질 테니까. (p. 10)



마리아나 엔리케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최근에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몇 권 읽었던 터라 이쪽 작품들도 두루 살펴보던 중, ‘라틴아메리카 고딕 리얼리즘의 대가’라는 소개에 이끌려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작품을 집어 들었다. 아르헨티나의 어두운 역사와 오늘날의 사회 문제를 공포라는 장르에 녹여낸 열두 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실제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방화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표제작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부터 읽어봤다.

“뭘 알고 싶어 하는 거죠?” 실비나가 물었다.
“음, 분신 의식이 언제쯤 끝날지 알고 싶어 하더구나.”
“언제쯤 끝날 걸로 보세요?”
“얘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지만 나는 말이다, 영원히 안 끝나면 좋겠어!” (p. 342)

어느새 웬만한 일에는 쉽게 놀라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실비나 역시 거창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버스에서 소매치기가 자신의 가방 속을 들여다볼지 두려워 빈자리가 생기면 안도하는, 어디에서나 마주칠 법한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런 실비나가 개인의 사건을 넘어 국가 폭력의 문제까지 마주하며 여성들의 연대 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간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선뜻 앞에 서지는 못했던 이들이라면, 실비나를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연대는 처음부터 특별한 사람들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사회에서는 자기 몸으로 저항하게 되고, 세상이 끝내 듣지 않는다면 사람은 결국 몸으로 말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었고, 또 알려고 했을까. 세상이 보내는 신호들을 남의 일처럼 지나치고 또 하나의 끔찍한 사건 정도로 넘겨버리면서, 당장 내 앞의 현실을 살아내는 데 바빴던 내 얼굴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왜 많은 여성이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선택까지 했는지, 왜 마리아 엘레나는 끝나기를 바라야 할 이 의식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는지. 그 앞에서 나는 아직 불에 타지 않은 여성 중 하나일 뿐이었다.



H. P. 러브크래프트 《크툴루의 부름 외 12편》

공포 소설은 이상하게 손이 잘 안 갔다. 시청각적 자극 없이 활자만으로 과연 어디까지 몰입을 끌어낼 수 있을까, 늘 반신반의했다. 그런 작품이 있다고 해도 뭘 알아야 읽어볼 거 아닌가. 주구장창 고어만 늘어놓으며 사람 기분만 더럽게 만드는 공포보다는, 밤에 괜히 이불을 바짝 끌어당겨 덮고 싶게 만드는 그런 공포를 원하던 차에 이 책을 발견! 여름이 가기 전 늦은 밤에 펼쳐볼 생각이었는데,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가장 짧은 작품들 위주로 분위기만 먼저 느껴봤다.

꼿꼿한 자세로 감정 기복 없이 읽어 내려가다가도, 분명 별 타격감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읽는 도중이나 마지막 문장에 다다를 때 등을 훑고 가는 싸한 무언가가 있었다. 공포를 빌려 결국 시선을 다른 곳으로 이끄는 작품도 있었다. 난 이게 더 좋았다. 그 끝에서 마주한 기괴한 절망과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조용한 탄식. 나처럼 장르 소설과는 거리가 있는 독자에게도 의외의 재미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총 14편 가운데 「랜돌프 카터의 진술」, 「에리히 잔의 연주」, 「시체를 되살리는 허버트 웨스트」, 「아웃사이더」까지 네 편을 먼저 읽었는데, 가장 오래 남은 건 마지막에 읽은 「아웃사이더」였다. 비명을 내지르게 만드는 공포가 아니라, 마치 피아노의 마지막 단조 화음을 쾅 하고 내리친 뒤, 그 울림이 한동안 가슴에 머무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

과거를 망각한 덕분에 편안해지기는 했어도 내가 아웃사이더라는 것만은 언제나 기억하고 있다. 이 시대와 인간들 틈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낯선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거대한 황금 아치 너머에 있던 그 괴물에게 뻗은 내 손끝에 차갑고 매끄러운 유리 표면이 만져졌을 때부터 깨달은 사실이었다. (「아웃사이더」, p. 109)



오노레 드 발자크 《잃어버린 환상》, 《골동품 진열실》

시작은 《사촌 퐁스》였다. 고구마 줄기의 끝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다. 최근에 고른 《골짜기의 백합》도 시작부터 영 마음을 움찔거리게 했다. 아무래도 이번이 끝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래,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나. 읽으면 되지.

《잃어버린 환상》 1권의 시작을 알리는 니콜라 세샤르. 읽고 쓰는 능력이 없어 식자공이나 교정자의 역할은 할 수 없었던 수습 인쇄공 출신의 그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 속에서 뜻밖의 기회를 얻는다. 국민공회의 법령을 빠르게 유포해야 했던 시대적 필요 덕분에 ‘어쩌다 보니’ 인쇄업 면허를 받고, 인쇄소 사장까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인쇄소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글을 읽고 다룰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이 운이 따르면 문짝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했던가. 때마침 몰락한 귀족 모콩브 백작이 그의 앞에 나타난다.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했던 백작은 살아남기 위해 인쇄소 감독관으로 일하게 되고, 세샤르는 그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다. 서로 전혀 다른 위치에 있던 두 사람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뒤섞인 과정을 흥미롭게 따라가던 중에 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가난이 끝나면 탐욕이 시작되는 법이다.” (p.21)

뒷이야기가 궁금하지만, 읽다 보면 끝이 없으니 함께 고른 《골동품 진열실》을 펼쳤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작은 지방 도시 알랑송, 아직도 옛 귀족 사회의 공기가 짙게 남아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앞서 읽어본 《잃어버린 환상》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 시대가 끝난 뒤 부르봉 왕정복고를 거치며 사회 질서가 새롭게 자리 잡아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세상은 이미 신흥 부르주아가 돈의 힘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로 바뀌었건만, 발자크는 가장 먼저 혁명으로 몰락한 데그리뇽 가문을 보여준다. 많은 것을 잃었는데도 데그리뇽 후작은 여전히 과거 귀족의 명예와 품위를 붙들고 살아가고, 그 곁에서는 충직한 집사 쉐넬이 현실을 묵묵히 떠받친다. 아직은 인물들을 하나씩 소개하는 단계인데, 발자크 표 각성 한 방 기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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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7-26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도 사진도 모두 아름답네요.

곰돌이 2026-07-26 09:58   좋아요 0 | URL
늘 드러내는 것에 있어서는 고민이 많고 쑥스럽기만 해서요. 이 글도 올려놓고 혼자 오버한 것 같아서 ㅋㅋㅋ 지울까 고민하다가 아몰라~ 하면서 뒀는데...... 다락방 님 댓글 잘못 단 건 아니시겠죠? 아, 달디달다...

다락방 2026-07-26 13:23   좋아요 1 | URL
진심입니다.글과 사진이 너무나 고급져요!!

잠자냥 2026-07-26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최근에 들어온 몇몇 땡투의 출처가 곰돌이 님이었군요! 감사합니다. 재미나게 읽으세요.

곰돌이 2026-07-26 15:31   좋아요 0 | URL
곰이라 그런지 맛있는 거랑 재미있는 책 낚아채는 데 빠르답니다. 마리아나 엔리케스 글이 매력 있더라고요. 잠자냥님 덕분에 매번 좋은 작품과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어 신나고, 감사한 마음은 큰데 땡투는 영 변변찮네요.ㅋㅋ

책읽는나무 2026-07-27 0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볼라뇨 책 어디선가 접하고 보관함에 막 쑤셔둔 적 있었는데 저런 문장들이 있었군요. 문학이란…크.^^
그리고 곰돌이 님이 거두신 문학책들과 문학의 정의…크!!
절로 취하네요.ㅋㅋ
이 더운 여름 문학책과 함께 하신다면 그리 많이 덥진 않으시겠어요.
고요한 여름 풍경입니다.

곰돌이 2026-07-27 14:54   좋아요 0 | URL
‘크‘가 두 번!! 갑자기 얼마나 시원한지 감도 안 오는 막걸리가 확 땡기게 만드시는군요!! 요즘 책나무님은 만화책 열심히 읽고 계시던데, 저는 지금 읽고 있는 책 다 읽고 나면 공포 소설이나 한 권 읽어볼까 해요. 으스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