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구원 후기 2017. 3. 12

 

한 철만을 품을 수 있는 마음에게 마음 전부를 쥐어 준 적이 있었다.”

(박준시인의 마음 한철에서 따왔다.)

 

아름다움의 구원이란 지속성의 구원이다.

충실성과 구속성은 서로를 제약한다.

라고 저자는 마지막에 쓰고 있다. 앞으로 가서 문장을 다시 읽으면

아름다움이 자유와 화해를 약속한다고 말한다.

 

위로를 할 줄도 받을 줄도 서투른 나는 이제 그의 말을 적당히 의심하면서 계속 읽는다.

필요성과 유용성에 지배되지 않는 사물과 활동만이 아름답다.

이 말은 자유의 구체화된 모습일게다.

 

그럼 화해의 구체화는 어떤가.

fair란 말에는 정의롭다와 아름답다는 뜻이 있다.

이 말의 이중적 의미는 미와 정의가 원래 동일한 표상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뒤를 잇는 중요한 말 한마디.

주체의 후퇴는 정의에 본질적이다.

 

이제서야 긴장을 풀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씨익 웃으며 계속 읽어간다.

상처가 없으면 진리도, 나아가 지각도 없다.

동일자의 지옥 안에는 진리가 없다.

그는 상처, 재앙, 은폐를 가져온다. 만약 이 말에 부정적 얼룩이 묻어 있었다면

그 얼룩을 지워내고 말이다.”(이 말은 다시 읽어봐야겠다. 이해가 안 된.)

 

재앙은 자신을 놓지 않는 자기애적인 주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미는 은신처다.

미에는 은폐가 본질적이다. 투명성은 미와 화합하지 못한다.

미적 형식의 일치성의 핵심은 일치하지 않음에 있다.

파괴적인 것을 증오하는 자는 삶 또한 증오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변주한다.(같은 말의 의미변주다)

예술은 자유와 화해의 실천이다.

자신의 대상이 그 자체를 위해 자유롭게 존재하도록 내버려둔다는 점에서 예술적 관심은 욕망의 실천적 관심과 다르다. (이 말도 잘 모르겠다.)

 

의지와 관심의 부재가 시간을 고요하게 만들고, 정지하게 한다.

예술이 제공하는 시간경험의 본질은

우리가 머무르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데 있다.

아마도 이것이 영원이라고 불리는 것의,

우리에게 허용된 한에서의 모습일 것이다.

 

& 한동안 한병철의 철학책을 시집을 읽듯이 꼼꼼히 읽어내려갔던 적이 있다.

그때는 알았던 걸 지금은 모르겠고, 하지만 여전히 그의 문체는 굵고 힘이 세다.

만약 철학책을 읽고 내가 무언가 쓴다면 그처럼 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심한 과대망상이었음을 느낀다. 그냥 나는 쉽게, 자세히, 구구절절 쓰는 게 맞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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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치버의 팔코너를 읽고 나서

이 소설은 20세기 중반 미국 작가중 가장 위대한 소설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왜일까?

인간의 본성중 비열하고 최소한의 동물적 본능인 쾌락을 얻기 위해 죄수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러한 행위가 팔코너라는 감옥 속에서는 더더욱 중요하고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생활인 것이다.

 

결혼생활, 압도적 성적 본능에 휘둘리고 쾌락을 얻기 위한 대상으로서의 아내, 그녀와의 관계는 아무리 많은 성적 결합을 해도 신뢰나 사랑, 따스함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차라리 감옥 안에서 철저히 인간적 유대나 접촉이 결여된 독방 속에서 그들은 사람과의 접촉, 대화, 하다못해 라디오마저도 얼마나 유용한 정서적 대상물, 충족물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주인공이 감옥 속의 실제세계와 그가 갇히기 전에 외부에서 했던 모든 것, 추억들이 얼마나 깨끗하고 자유로웠는지 끊임없이 별다른 구분 없이 펼쳐진다.

 

창살에 갇히지 않은 햇빛, 오염되지 않은 신선한 공기, 백사장을 뛰고 바다로 뛰어 들어가 수영을 하고, 밥을 먹기 위해서 일렬로 줄을 채 묵묵히 제 차례를 기다리지 않는 평범한 일상이 주는 자유와 편안함이 팔코너에서의 삶과 강렬하게 대비된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맨 처음 주인공이 감옥 속으로 들어가기 전 품었던 생각을 독자도 하게 된다. 가둬둔다는 행위가 인간이 저지른 죄로부터 그를 충분히 괴롭게 함으로써 그가 저지른 잘못만큼 고통을 줌으로써 저울의 눈금을 평행하게 만드는 행위가 아닌가 하는.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좁고 축축하고 냄새나고 타인과의 접촉, 따스함, 웃음, 놀이 등 모든 것을 박탈시킨 채 수십 년을 감옥 속에서 지내게 하는 것은 결코 죄수를 위한 행동이 아니다.

교화나 뉘우침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러한 곳에 사람을 가둬두면 안 된다. 더욱이 인간적 결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씻기 어려운 악을 행한 죄수들이라면 더더욱.

 

그러면 이들은 어떤 식으로 다루어야 마땅히 정의로울까.

 

 

 

& 위의 글은 2015. 11월 썼다. 정말 하나도 기억이 없다.

내가 쓴 글인지도 의심스러웠다.

 

 

 도서관에서 빌려봤던 책, 독후감 속에 있었으나 기억이 안나는 책, 읽고 좋아서 친구에게 주었던 책부터 천천히 사모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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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면서 세 끼를 챙겨서 먹었고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과 정희진의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를 읽었다.

히라노는 슬로우 독서법을 얘기해서 좋았고, 정희진은 여성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책에 대한 서평을 썼는데 자신의 늙어감과 외로움을 적당히 버물러서 책에 투사한 글이 좋았다.

 외로운 사람은 책을 읽는다.

우울한 사람도 책에서 도망갈 구실을 찾고 책을 통해서 아찔하게 변하는 속도전에 자신만의 방법으로 게릴라전을 펼친다고 생각한다.

 

 책이 엄청나게 많이 쏟아지는 지금 책을 많이 더 많이 읽어야한다는 강박감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작정해놓고 100페이지씩 읽어야지 하며 똑바로 앉아서 책에 줄을 긋고 모르는 말을 사전에서 찾다가 보면 나중에는 힘들어서 맥이 탁 풀리곤 했다.

물론 어쩔 때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들어 시계를 보면 시끄럽다고 일부러 재운 시계가 시치미를 뚝 떼고 나를 바라보는데 시간이 훅 지나간 것에 기쁨을 느끼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쫓기는 느낌은 여전했다.

 

정희진님의 한 마디, 투지에서 바빴던 눈이 멈춘다.

투지란 말은 종이를 찢을 듯이 종이를 오래 바라본다는 의미다.

 

이럴 때 작정하고 책을 읽을 때 5W 1H(who, when, what, why, where)와 how를 생각해보라는 히라노의 주문은 유용하다.

예를 들어, 소세끼의 마음을 분석한 곳을 읽다가 소세끼에서'선생님'의 의미와 첫문장을 눈여겨본다.

첫문장은 "나는 그 사람을 항상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아버지와 형이 생각한 선생님과 나가 생각한 선생님의 의미가 다르고 이 책에서 작가가 낯설게 쓰는 에고이스트가 또 의미가 다르다.

 

인간이 하는 주요한 행동이 의미를 찾기위한 몸무림이므로 소세키를 히라노의 관점으로 책을 읽다가 작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의 단편들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틈틈이 쉬어야 겠다는 마음이다.

생각이 안나면 투지라도 해볼일이다.

 

 

‘슬로 리딩‘이란, 한 권의 책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읽는 것이다. 책을 감상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을 아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시간과 노력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책읽기 방법이라고 이해해두기 바란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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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두 권의 책 <<파이>><<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이란 책을 읽었다.

이 두 권의 책 어디서도 프로이트나 라깡의 무의식개념을 찾을 수는 없었다.

전자는 신경과학자의 입장에서 본 뇌 실험, 이론_사고실험, 신경생리학적 입장에서 실험된 의식을 보여주고 후자는 실험사회심리학회의 입장에서 본 의식을 그리고 있다.

 

특히 후자의 책을 읽고는 영어원제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서 책을 선택해야겠다고 깨달았다.

 

<<라캉과 정신의학>>은 라깡의 기본개념들이 구체적인 임상 과정 속에서 환자의 문제를 공식화하고 분석가에게 지침이 될 만한 사항을 마련하는 데 쓰인 것처럼 나같이 라깡에 대해 전혀 모르는 초보자도 분석가의 입장에서 그의 기본개념을 익힐 수 있도록 쓰여졌다.

저자인 브루스 핑크는 이 책을 수련 분석가들이나 현재 활동 중인 분석가들, 심리학과나 관련 학과에 재학중인 대학 상급반 학생들에게 적합할 것이라고 하는데, 읽어내면서 적용된 사례를 보면서 스스로를 분석가로 학습시키는 효과가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라깡은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후기 라깡이다.

 

모든 책 읽기에는 동기가 있는데 이번 책도 역시 다니엘 부어스틴의 영향력 때문이다.

개인의 사고와 행동이 이미지와 미디어의 범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인간을 지배하는 무의식에 파고든 그러한 환상과 이미지는 어떻게 할 거냐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우리는 왜 라깡이 <의미는 상상적>이라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의미가 자기-이미지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 관해 갖는 이미지와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의미는 <에고>나 <자기>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1950년대 라깡이 <프로이트로의 회귀>라는 슬로건으로 의도했던 것은 당시의 <에고 심리학>이 에고를 지나치게 강조했던 것에 대항해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물론 아직도 상황은 많이 바뀌지 않았다. 미국의 심리학과 대부분의 정신분석학파들은 아직도 에고를 강조하고 있는 실정이다.에고가 본질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갖는 이미지인 이상 에고는 우리가 이질적이라고 판단하는 모든 것을, 다시 말해서 실수 행위를 통해 새어나오는 모든 사고나 욕망을 배제해 버리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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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란 책을 보면 인터넷을 통한 책읽기는 F형, 말 그대로 대문자 F형태를 취하며 스킵하듯이 미끄러진다.

그렇다면 SNS를 들어가자 마자 무수히 쏟아지는 사진, 이미지들은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사람의 눈에 화살을 쏘듯이 들어온다. 그 뒤를 이어 문자는 부끄럽게 캡션을 달듯이 붙여진다.

 

내게  이미지는 환상이다.

현실은 희미해지고 생기없어지며 사진으로 크게 확대된 꽃들과 나무들은 인간의 시각이-아니 나의 침침한 눈이-지각하지 못하는 대상을 더욱 선명하고 크게 확대시켜서 보여준다.

이러한 가상 이미지는 동어반복적으로 계속 이어진다.

그러한 화려한 색상과 이미지들은 내 두뇌에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할까.

 

하이퍼링크와 도표와 이미지와 학습도우미를 동반한 인터넷상의 글읽기가 평면적이고 활자만 가득한 책을 읽는 것보다 학습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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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08-27 0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