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6. 1. 18일 썼다.
다시 읽어보니 나는 니체와 이반 일리치의 사상을 연결시켰다.
은총을 과거에는 신에게서 부여된 명령을 실행하려는 인간의 노력, 즉 신적인 것에 자신을 투하하려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이제 니체는 자신으로의 배려, 자신의 능력만큼 어린아이의 순진성을 가지고 영원회귀의 순환성 속에서 절대긍정을 추구하도록 요구하는 것으로 읽힌다.
말이 꼬이고 문장이 꼬인다는 것은 여전히 이해가 불충분하다는 반증이리라.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철학자 고병권님이 니체의 여러 저작들을 참조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책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 해석하고 있다.
차라투르트라는 조로아스터교에 나오는 예언자로 그는 ‘선과 악의 대립, 이 세계와 저 세계의 대립’을 통해 기독교와 이상세계를 낳도록 만든 산파자이다. 그럼 니체가 말하는 차라투르트라는 누구인가?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얘기한다.
기독교나 플라톤주의는 이 세계를 능력이 아닌 결핍으로서만 보아왔다. 독일어로 죄는 채무를 뜻한다. 쌓여만 가는 죄(채무)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저 세상으로 가는 방법뿐이다. 은총이든 신앙의 행위를 충실히 하든 모든 채무에 대한 청산은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외부에서부터 이루어지는 행위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니체는 명령한다.
권력은 능력을 의미하고 ‘실존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능력만큼 실존한다’
의지는 힘이고 모든 힘에는 방향이 있다. 힘은 특정한 방향으로 제 능력을 실현하려 하므로 명령과 동일하게 사용 해석되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위버멘쉬는 ‘자신의 능력만큼 스스로 명령을 내리며’ 자신의 자식을 창조하는 자이다. 이 창조는 부정이나 허무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사위를 던지는 어린아이의 놀이처럼 하늘과 대지위에 끊임없이 반복하는 아이의 창조를 통해서 행해지는 영원회귀의 놀이라고.
이 세계를 능력이 아닌 결핍으로 본다면 결핍은 현대의 언어로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나는 ~이 필요하다.”
필요는 결핍에서 나오고 결핍은 만족을 얻기 위한 행동을 유발하는 심리상태, 결핍상태=욕망상태이다. 따라서 결핍은 욕망을 재생산, 확대한다.
자본주의가 결핍을 표준화된 동일한 상품으로 생산하여 결핍을 만족과 필요로 재창조하는 확대과정이라고 본다면?
자신의 삶을 창조하지 못하고 전문가의 권능과 만들어진 필요에 따라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현대인들은 신의 죽음이후 그 자리에 과학을 올려놓았고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전문가들로부터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그 필요를 어떻게 충족시킬지조차 교육받는다고 한다면?
분명히 이반 일리치의 사상과 니체의 생각은 현시대를 진단함에 있어 서로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
다음은 내가 감동적으로 읽은 부분이다.
“국가도 위선에 찬 개의 일종이다. 국가도 너처럼 연기와 울부짖음으로 말한다. 사람들의 믿음을 끌어내기 위해 국가도 너처럼 복화술을 쓴다. 즉 국가는 사람들의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온갖 소란스런 사건을 만들고 연기를 피워댄다는 것”
니체의 문체는 은유와 상징으로 풍성하다. 이를 살아있는 언어로 다시 읽어내는 몫은 그가 기대하는 독자의 몫이다. 그는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으로” 읽히기를 원한다.
& 어제 읽었던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의 영향아래서 한 가지 바람을 가진다.
“혼자 있으십시오. 은총이라고 할 만한 명상 속에 머무르십시오.”
32살 전성기의 피아니스트가 은퇴를 결심하며 한 말이다.
모짜르트식의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받는 것으로 피아니스트의 삶이 점철됨을 누구보다 두려워하고 꺼려했던 연주자, 평생을 혼자로 지냈으면서도 정작 혼자있는 순간 자신과 함께 있지 못함을 질책했던 모습, 그 자신이 명상 속에서 사라져가는 충일감을 온전히 느끼길 원했던 모습을 읽었다.
5월에 싱그럽게 피었던 장미가 메말라가며 시들고 있다.
시듦과 더불어 다른 꽃들은 이제 피기 시작한다.
시듦과 다시 피어남이 내 속에서도 일어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