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역사에세이다. 

연도와 사건으로 원인과 결과, 그후 변화들로 역사를 서술하는데 익숙해 있던 눈에서 현대사를 구조적 필연성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행위자관점과 최신의 연구성과를 반영하여 역사인식의 범주를 확대하기를 바라며 쓰여졌다.

 

대표적으로 1.2차대전을 새로 써야 하는 이유를 흥미진진하게 읽었으며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았다는 장 또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아이히만들'에 대한 분석이 미흡했으며, 아이히만들에 대한 최신의 재판과정으로 '능동적 가해자'로서의 자기형성에 주목하도록 한다.

 

선의 평범성.

 

 

개념은 그 후의 해석에 의해서 새로 생명을 얻기도 하고, 낡은 것을 의문시하게 만들기도 한다.

 

현대사 몽타주라는 제목처럼 이 책은 한겨레21에 '이동기의 현대사 스틸컷'이란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토대로 대폭 고쳐서 쓴 글이다. 그의 글에서 2016~2017년 한국의 촛불혁명의 뜨거웠던 현장을 다시 추억할 수 있었다.

 

그때는 뜨거웠고 지금은 미지근한가.

어느 시절 , 어느 시대 치열하지 않은 적이 없건만,

지나간 뜨거움은 공동체란 무엇이고 그들과 함께 가졌던 역사에 대한 전망과 희망을 다시 의문케한다.

 

 

중국 청년이 한국 텔레비전에서 울었다. 2014년 12월 1일 JTBC<비정상회담>에서 장위안이 눈물을 보인 것은 독일 청년 다니엘이 독일의 과거사를 반성하며 심지어 "1차 세계대전도 독일이 잘못했다"라는 ‘개념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장위안은 "잘못을 인정하는 독일의 태도에 감동했다"며 눈물을 보인 뒤 "이전에는 마음이 닫혀 있었는데 이젠 마음의 변화가 생겼다"고 고백했다. 가벼운 말장난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장위안은 계속 서툰 발음으로 "우리에게 언젠가는 국경선도 없는 날이 오고" 결국에는 "아시아도 유럽연합처럼 될 수 있으면"좋겠다고 말해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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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6. 1. 18일 썼다.

 

다시 읽어보니 나는 니체와 이반 일리치의 사상을 연결시켰다.

은총을 과거에는 신에게서 부여된 명령을 실행하려는 인간의 노력, 즉 신적인 것에 자신을 투하하려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이제 니체는 자신으로의 배려, 자신의 능력만큼 어린아이의 순진성을 가지고 영원회귀의 순환성 속에서 절대긍정을 추구하도록 요구하는 것으로 읽힌다.

 

말이 꼬이고 문장이 꼬인다는 것은 여전히 이해가 불충분하다는 반증이리라.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철학자 고병권님이 니체의 여러 저작들을 참조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책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 해석하고 있다.

차라투르트라는 조로아스터교에 나오는 예언자로 그는 선과 악의 대립, 이 세계와 저 세계의 대립을 통해 기독교와 이상세계를 낳도록 만든 산파자이다. 그럼 니체가 말하는 차라투르트라는 누구인가?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얘기한다.

기독교나 플라톤주의는 이 세계를 능력이 아닌 결핍으로서만 보아왔다. 독일어로 죄는 채무를 뜻한다. 쌓여만 가는 죄(채무)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저 세상으로 가는 방법뿐이다. 은총이든 신앙의 행위를 충실히 하든 모든 채무에 대한 청산은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외부에서부터 이루어지는 행위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니체는 명령한다.

권력은 능력을 의미하고 실존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능력만큼 실존한다

의지는 힘이고 모든 힘에는 방향이 있다. 힘은 특정한 방향으로 제 능력을 실현하려 하므로 명령과 동일하게 사용 해석되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위버멘쉬는 자신의 능력만큼 스스로 명령을 내리며자신의 자식을 창조하는 자이다. 이 창조는 부정이나 허무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사위를 던지는 어린아이의 놀이처럼 하늘과 대지위에 끊임없이 반복하는 아이의 창조를 통해서 행해지는 영원회귀의 놀이라고.

    

 

이 세계를 능력이 아닌 결핍으로 본다면 결핍은 현대의 언어로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나는 ~이 필요하다.”

필요는 결핍에서 나오고 결핍은 만족을 얻기 위한 행동을 유발하는 심리상태, 결핍상태=욕망상태이다. 따라서 결핍은 욕망을 재생산, 확대한다.

자본주의가 결핍을 표준화된 동일한 상품으로 생산하여 결핍을 만족과 필요로 재창조하는 확대과정이라고 본다면?

 

자신의 삶을 창조하지 못하고 전문가의 권능과 만들어진 필요에 따라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현대인들은 신의 죽음이후 그 자리에 과학을 올려놓았고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전문가들로부터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그 필요를 어떻게 충족시킬지조차 교육받는다고 한다면?

 

분명히 이반 일리치의 사상과 니체의 생각은 현시대를 진단함에 있어 서로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

다음은 내가 감동적으로 읽은 부분이다.

 

국가도 위선에 찬 개의 일종이다. 국가도 너처럼 연기와 울부짖음으로 말한다. 사람들의 믿음을 끌어내기 위해 국가도 너처럼 복화술을 쓴다. 즉 국가는 사람들의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온갖 소란스런 사건을 만들고 연기를 피워댄다는 것

니체의 문체는 은유와 상징으로 풍성하다. 이를 살아있는 언어로 다시 읽어내는 몫은 그가 기대하는 독자의 몫이다. 그는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으로읽히기를 원한다.

 

 

 

 

 

 

 

 

 

 

 

 

 

 

& 어제 읽었던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의 영향아래서 한 가지 바람을 가진다.

혼자 있으십시오. 은총이라고 할 만한 명상 속에 머무르십시오.”

32살 전성기의 피아니스트가 은퇴를 결심하며 한 말이다.

모짜르트식의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받는 것으로 피아니스트의 삶이 점철됨을 누구보다 두려워하고 꺼려했던 연주자, 평생을 혼자로 지냈으면서도 정작 혼자있는 순간 자신과 함께 있지 못함을 질책했던 모습, 그 자신이 명상 속에서 사라져가는 충일감을 온전히 느끼길 원했던 모습을 읽었다.

 

5월에 싱그럽게 피었던 장미가 메말라가며 시들고 있다.

시듦과 더불어 다른 꽃들은 이제 피기 시작한다.

시듦과 다시 피어남이 내 속에서도 일어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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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5. 12. 23 일 썼다.

제목은 "책을 읽는 것으로 사회가 바뀔까요?"인데 그로부터 오늘 나는 외로움으로부터의 빨간약을  찾고 싶은가 보다.

 

책을 읽는 것으로 사회가 바뀔까요? 전 모두가 좀 더 많은 책을 읽으면 혹시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사람들이 없다면 아주 소수의 책 읽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2배로 읽어내면 그래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이 책은 책을 위한 책, 서평집이다.

서평가 이현우가 쓴 서평집은 이것 외에도 2권이 더 있지만(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로쟈의 인문학서재) 난 이 책에서 가장 즐거운 읽기경험과 책에 대한 지도(map)를 얻을 수 있었다.

가령 가리타니 고진을 어떻게 읽어내면 좋을지 감을 못 잡고 계속 미뤄두고만 있을 때 저자는 친절하게 가리타리 고진의 사상이 칸트의 자유로워지라!”라는 명령에 따라서 마르크스를 해석해낸 시각이라고 짚어주는 방식이다.

 

그리고 벤야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게 영어권이 아닌 독일어권의 철학자를 다룬 국내 번역본의 경우 그 문체의 난이함과 해석가마다 철학적 개념을 달리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래서 하이데거를 20~30, 헤겔을 20년 넘게 연구하는 철학자도 종종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난 30년이 걸려서 번역했다는 하이데거의 책 앞에서 조금도 나아가지를 못하고 머리를 콩콩박다가 결국 포기한 경험이 정말 많다. 베르그송, 칸트는 엄두도 못내겠다)

 

 

서구 유럽의 경우야 오스트리아에서 살던 벤야민이 프랑스의 문학과 사회분위기, 독일 등 유럽권을 자기 안마당처럼 다니는 것처럼 그 나라 언어를 다루고 또 자신만의 철학을 만들어내지만 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의 독자가 그들의 사상적 발자취를 따라가노라면 먼저 번역본에서부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 서평가 이현우의 진가가 나타난다.

 

누군가를 읽어보고 싶을 때 먼저 읽어낸 성실한 다독가이자 분석가 무엇보다도 책을 가장 사랑하는 자칭 책벌레라고 스스로 말하는 그의 성실함을 길 안내잡이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서평집은 큰 주제별로 묶여있다.

국가란 무엇이며, 폭력과 이데올로기의 문제, 보편적 보편주의, 미국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 등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주제별로 천천히 조금씩 읽어가노라면 그가 의도했을 지점을 향해서 나아갈 수도 있다.

 

즉 책을 다 읽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우리라면 책을 읽지 않고서도 읽은 척, 그 책에 대해서 말할 수 있고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지점은 여러사람들이 책을 다양하게 읽어내면서 그 사상가, 혹은 굵직한 주제에 대한 지도(map)을 그려줄 때 어느 정도 성공하게 되리라.

이현우가 그린 지도는 다분히 이현우의 가치관과 시각, 과거 경험이 묻어있는 지도이다. 그가 아무리 객관성을 지향한다고 해도 말이다.

나도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좋은 책이다.

 

 

 

 

& 며칠 전 독서모임에 갔었다.

내가 인간박물관으로 존경하던 한 선생님의 총기가 더 흐려지셨다. 그분의 권유로 3년 전 녹색평론읽기 모임까지 했었는데 시간이 무섭다.

 

어제는 책을 읽다가 저자의 사망 연도와 그의 저작출판연도를 계속 계산했는데 당연히 규칙은 없었다.

늙음과 질병 이 모든 것들이 한 번도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이라 덜컥 절대적 타자로 다가온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준비한다고 대처가 될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두려움에 웅크리고 앉아서 떨며 처분만 기다리고 싶지는 않은데 왜 오늘 햇살은 이렇게 아침부터 뜨거운가.

 

조용한 뜨거움, 적막, 얼마 남지 않은 생기마저 수분을 흡수해 말라비틀어지게 할 것 같은 무서움에 나도 모르게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안 좋아. 몸살인 것 같애.”

병원 가서 영양제 주사를 맞고 와. 너를 위해서 새벽에 기도 많이 했으니 이제 괜찮아질 거.”

 

엄마의 종교가 늘 기복신앙이라고 삐딱하게 봤는데, 그 엄마의 기도에 뜨겁고 가빴던 숨이 편해졌다. 엄마가 아프시지 않은 게 내게는 최고의 빨간약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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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3일 책모임 책으로 읽고 썼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이 책은 젊은 일본의 사회학자가 일본젊은이는 어떠어떠하다라는 자국내 기성언론에 퍼져있는 얘기들을 하나하나 반론하고 분석하고 관찰한 결과를 풀어놓은 책이다.

사회학의 학문적 틀에 충실하려고 해서인지 쉽게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을 인터뷰하고 그들과 직접 시위현장이나 모임에 참가해서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모았다는 측면에서 사례의 풍부함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주 문제제기는 이것이다.

앞으로 일본경제는 호황의 시기를 맞기 어려울 것이다. 워킹푸어들은 계속 양산될 것이고 일본사회의 평균연령은 42세로 이미 초고령사회이다.

젊은이 2~3명이 1명의 노령인구를 사회보장제도의 측면에서 부양해야 하고 그들의 고용, 의료, 현실정책에서 뚜렷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문제가 쌓여만 가는데 실제로 일본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삶에 행복해하냐?”고 질문을 던지면 그들의 70%가 넘게 행복하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럼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지.

그에 대한 대답이 이 책의 내용이다.

성급하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소한의 생활만 할 수 있다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화적인 최소한의 생활이란 “wii(인터넷), psp(인터넷게임)를 손에 쥐어주는 생활을 말한다고 저자는 몇 차례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왜 이런 대답을 하는 걸까?

젊은이들은 더 이상 과거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일본이 전후의 패전에서 경제부흥을 일으키던 초고도성장기에 사축으로 얘기되던 회사원생활이 있었고 회사에 올인하여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개인적인 만족도는 없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잠깐의 버블경제시기에도 호화로운 사치생활을 겪어 봤지만 물질에 대한 소비만으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입시전쟁처럼 입시전쟁을 겪고 그 후 많은 수의 대학생들이 졸업했지만 이제 그들이 세계시장을 무대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지 못한다면 이전세대들이 만들어놓은 부를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조건하에 놓인 젊은이들은 지금 행복하다.”고 얘기한다.

 

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질 전망이 없으므로 자기충족적 생활을 추구하고 정치나 사회생활보다는 사생활에 중점을 두면 행복해 할 수 있는 조건이 그 어느 시대보다 지금이 최적이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 행복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친구랑 있을 때(64%)”

 

일본 내에서 만화 원피스가 2억불 판매된 것은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만화 원피스가 친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모험과 여행을 떠나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제 젊은이들은 마음 둘 곳과 소속감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회단체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어한다. 이렇듯 사회공헌하고 싶어 하는 의식은 56%이지만 실제 최근 5년간 투표율은 30%후반이다.

투표율이 전국민을 대상으로 계산되므로 전체인구를 100으로 잡았을 때 20~30대의 투표수는 33%이다. 20~30대의 전체인구가 투표를 해도 전체 정책방향에서 다수를 차지하지 못하는 다수결의 원칙상 그들은 더는 의회민주주의, 투표에서 무언가 해결되리라고 바라지도 않는다.

 

기존 언론들은 젊은이가 문제다. 일본이 끝장난다고 하지만 실제 정책 측면에서 젊은이를 위한 정책은 일어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칭 어른들은 이래라 저래라 계속 요구하고 야단치고 큰일이라고 위기감을 고조시키려고 하지만 이제 좀 아는 젊은이들은 그들의 말에 신경쓰지 않는다.

 

? 우리는 행복하니깐.

물론 그들도 사회운동을 한다. 지진 때 직접 찾아가서 봉사활동도 하고 구호기금도 자발적으로 모은다.

하지만 불끈하는 젊은이들은 이러한 불끈함이 사라졌을 때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색다른 경험과 뿌듯한 만족감을 느끼며.

제도화된 사회 내에서 무언가 바꾸거나 지속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이제 사회운동은 즐거움과 문화적 측면 + 엔터테인먼트 요소 강화로 축제로 일회성으로 끝날 뿐이다.

 

축제는 즐기면 되는 거고 아무것도 바라거나 바꾸지 못한다.

 

 

이 책을 덮고 나서는 무언가 더부룩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과자나 인스턴트 음식을 먹고 난 뒤 몸이 불편한 것처럼.

사실 이것은 행복이 아니다.!? 하지만 행복이 불가능한 시대, 계속해서 꿈만 꾸는 사람은 그 기대치를 맞출 수가 없어서 더욱 불행할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다고 느끼고 더는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인식이 전반적으로 퍼질 때 사회라는 꿈쩍도 하지 않는 대상이 살짝 움직이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의 글을 읽으면 그때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사이에 분명한 온도와 관점의 차이가 있다.  현재의 일본 젊은이를 주제로 삼은 사회학관련 책을 한 번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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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위치는 소파 위다.

쉬려고 잠시 소파에 앉았을 때 핸드폰으로 정신을 산만하게 하지 않으려고 산 책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재밌다.

 

러시아 문학은 모르지만, 최근에 <<안나카레니나>> 를 재미있게 읽고 톨스토이가 나오기 전 19세기 러시아문학을 알고 싶었지만 역시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고골의 <외투>나 몇몇 단편으로 흩어져있던 상념이 천천히 묶이는 느낌이 좋다.

그것도 한 작가와 그의 대표작품, 그가 살았던 시대를 개괄하면서 도도하게 시간을 헤엄친다.

천년의 역사를 가진 러시아에 대한 대략적인 역사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러시아의 정체성까지 호기심을 가지고 책을 읽도록 안내한다.

 

현재 1/3정도 읽었는데 왜 러시아작가들이 위대해졌는지 알겠다.

푸슈킨, 고골, 레르몬토프를 비롯해 이들은 자신의 문학행위가 러시아를 위해서 혹은 러시아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식한 듯하다.

그런 엄청난 무게감과 주제를 가지고 당대 러시아의 문제점과 종교와 농노문제를 다루고 있으니,

특히 고골의 마지막 모습은 기억에 오래 남을 듯싶다.

러시아, 그 광활한 영혼 속으로 들어가볼까요?

우리는 루시인이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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