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치버의 팔코너를 읽고 나서

이 소설은 20세기 중반 미국 작가중 가장 위대한 소설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왜일까?

인간의 본성중 비열하고 최소한의 동물적 본능인 쾌락을 얻기 위해 죄수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러한 행위가 팔코너라는 감옥 속에서는 더더욱 중요하고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생활인 것이다.

 

결혼생활, 압도적 성적 본능에 휘둘리고 쾌락을 얻기 위한 대상으로서의 아내, 그녀와의 관계는 아무리 많은 성적 결합을 해도 신뢰나 사랑, 따스함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차라리 감옥 안에서 철저히 인간적 유대나 접촉이 결여된 독방 속에서 그들은 사람과의 접촉, 대화, 하다못해 라디오마저도 얼마나 유용한 정서적 대상물, 충족물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주인공이 감옥 속의 실제세계와 그가 갇히기 전에 외부에서 했던 모든 것, 추억들이 얼마나 깨끗하고 자유로웠는지 끊임없이 별다른 구분 없이 펼쳐진다.

 

창살에 갇히지 않은 햇빛, 오염되지 않은 신선한 공기, 백사장을 뛰고 바다로 뛰어 들어가 수영을 하고, 밥을 먹기 위해서 일렬로 줄을 채 묵묵히 제 차례를 기다리지 않는 평범한 일상이 주는 자유와 편안함이 팔코너에서의 삶과 강렬하게 대비된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맨 처음 주인공이 감옥 속으로 들어가기 전 품었던 생각을 독자도 하게 된다. 가둬둔다는 행위가 인간이 저지른 죄로부터 그를 충분히 괴롭게 함으로써 그가 저지른 잘못만큼 고통을 줌으로써 저울의 눈금을 평행하게 만드는 행위가 아닌가 하는.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좁고 축축하고 냄새나고 타인과의 접촉, 따스함, 웃음, 놀이 등 모든 것을 박탈시킨 채 수십 년을 감옥 속에서 지내게 하는 것은 결코 죄수를 위한 행동이 아니다.

교화나 뉘우침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러한 곳에 사람을 가둬두면 안 된다. 더욱이 인간적 결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씻기 어려운 악을 행한 죄수들이라면 더더욱.

 

그러면 이들은 어떤 식으로 다루어야 마땅히 정의로울까.

 

 

 

& 위의 글은 2015. 11월 썼다. 정말 하나도 기억이 없다.

내가 쓴 글인지도 의심스러웠다.

 

 

 도서관에서 빌려봤던 책, 독후감 속에 있었으나 기억이 안나는 책, 읽고 좋아서 친구에게 주었던 책부터 천천히 사모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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