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 클리볼드가 지은 원제 : mothers Reckoning (엄마의 생각)이 책 제목으로 표현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란 말보다 주제에 더 적합하다. 엄마로서의 절망, 좌절, 죄책감로 부서진 마음에서 아들 딜런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마음을 다시 세우기 위해 눈물과 한탄으로 쌓은 숭고한 기록물이다.


자신과 에릭을 포함 15명을 죽이고 25명에게 부상을 입힌 딜련에 대한 악마성, 폭력성향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굳이 출발점을 잡자면 콜럼바인 고등학교에 입학한 15세 쯤에 시작되어 17살 때 절도를 하여 다이버프로그램을 받고 딜런은 오랫동안 자살을 계속 꿈꾸었지만 자살 또한 자신을 살해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생명을 앗아가는 폭력성을 함축하고 있음을 몰랐다. 딜런보다 가학적 살인, 폭력의 에너지가 컸던 에릭을 만나면서 딜런의 사고, 감정, 행동은 콜럼바인 총격사건으로 나타난다.



, ., 딜런은 <<7인의 사무라이>>라는 긴 영화를 봤다. 1주일에 한 번 밖에서 따로 사는 바이런과도 함께 가족이 식사를 한다. 이것이 집에서 보여준 딜런의 모습이라면 그 즈음 딜런은 렘퍼드 산맥이란 비디오을 찍는다. (에릭, 권총을 판 마크 메인스가 그동안 모은 무기를 쏘는 모습을 찍은 비디오다.) 한 인물의 내면에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두 개의 개별인격이 살고 있는 듯 하다.


  딜런의 일기에는 991월부터 구문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지고, 의미파악이 불가능한 내용으로 바뀐다. 혼자다. 철저히 혼자라고 절망에 빠진 상태의 일기를 남기며 한편으로는 그 당시 짝사랑하는 그녀에게 사랑받고 싶은 갈망, 격심한 자기혐오를 드러내는데 혹시 뇌질병이 있었던 건지 의심하게 될 만큼 급격히 나빠진다.


딜런은 고등학교에 들어오기 전 야구선수가 되기를 훈련했지만 자신의 팔 부상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고 스스로 완벽한 모습이길 바라는 자신에 대한 기대치에 부응못해 늘 자기혐오로 치달을 수 밖에 없었다. 왜 엄마에게 속을 털어놓지 못했을까? 단순히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가 아니라 본인이 그런 바보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이지않을까? 완벽주의는 자만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자신이 부족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란 걸 스스로에게도 인정하지못했다.


자기혐오는 점점 생명력을 앗아가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비디오에서 영향받은 폭력물,검 붉은  , 생명, 생명이 분수처럼 솟구치고 밖으로 분출되고 나면 무, 폭력의 불꽃놀이로 검은 하늘을 수놓은 뒤 영화의 자막처럼 The end로 마침표를 찍고 싶었을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에 대한 마침표로서 자살, 자기혐오라는 분노, 붉은색, , 총구에서 나온 화염의 불꽃의 이미지에 경도되고 늘 딴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던 딜런은 정상적인 사고의 체계를 놓아버렸을 때 에릭에게로 끌려갔다.


위험징후로서 피해망상(p368) 푸에블로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십대 아이들이 자기를 비웃는다고 빨리 나가자고 했다. 병적징후의 표출..

무기력이 수엄마를 계속 따라다니는 괴로움의 근원이다. 어떠한 노력을 했어도 딜런을 막을 수 없었겠구나.

창조주가 하는 창조행위와 가장 유사한 일을 했던 엄마는 생명을 품어서 자신의 몸 밖으로 밀어내고, 성장시키고, 어른으로 키워서 그 아이가 온전히 자신으로 만족하며 살기를, 공동체와 잘 어울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이를 도와주며 살 것이라고 꿈꿨을 거다.



삶이 지옥이고 이 보다 더한 지옥은 없을 것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던 수에게 직장으로 돌아오라는 전화와 다시 직장일을 하면서 딜런에 대한 생각을 잠시 분리하여 자신만의 작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과 집중력을 가지며 조금씩 회복하게 된다. 모성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감에서 벗어나 자살유가족 자조모임에 참가하여 자식을 잃은 다른 엄마의 슬픔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이 정돈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걸 느끼고 위로를 받는다. 수는 자신의 고통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동시에 보면서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자신의 역할을 찾고 그로써 삶의 의미를 재창조한다. 이 글처럼 슬프고 아프고 무기력한 감정에 빠트리게 한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


 딜런이 왜 그랬는지에 대한 얘기는 추측으로  짐작될 뿐 나는 이 책을 엄마에 대한 슬픈 고백,, 부서진 마음을 다시 일으켜세우며 세상속에서 끝내 살아가기를 선택한 한 엄마의 경험담으로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라는 소설 제목은 주인공과 관계가 있을 수도 있는 주소 로마(이탈리아), 부티크 옵스퀴르 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2번지라는 공간이다. 주소를 제목으로 삼았다는 것은 사람과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얘기를 거리로 풀어내고 싶었다는 의미리라.


처음에는 화자(기 롤랑)의 실제 이름이 무엇이고 직업과 그가 사랑해서 결혼했던 드니즈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해 조각난 퍼즐조각을 맞추다 자꾸 기억맞추기를 의도적으로 흩으러 트리는 저자의 의도를 통해서 기억 찾기가 정체성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만큼이나 빨리 저녁 빛 속으로 지워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첫 문장부터 남김없이 얘기해준다.


기억을 잃어버린 내가 기억을 짜맞춘다고 아무것도 아닌 자에서 무언가로 혹은 무언가가 되는 걸까? 하는 질문을 말이다. 이 소설은 프랑스인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치른다는 바칼로레아 시험문제에 대한 저자의 답안지 같았다.

당신은 과거의 기억을 얼마만큼 정확히 가지고 있나요?


엊그제 점심에 뭘 먹었는지, 햇볕이 기울어질 때 당신과 함께 거리를 걸었던 사람의 이름은 무엇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수 있나요?

기 롤랑을 만나는 사람들이 기억해내고 소중하게 간직했던 낡은 사진을 건네는 것에 훨씬 못 미치게 나는 내 기억에 하나도 자신이 없고 또 무엇보다 나를 소중하게 기억해 줄 누군가가 있을지 조차 모르겠다.


저자(파트릭 모디아노)뤼디를 위하여와 아버지를 위하여이 소설을 바쳤다.

뤼디는 저자가 사랑했던 동생으로 전쟁이 끝난 1947년에 태어나 10살의 나이로 저녁 빛 속으로 지워졌고 유대인 혈통의 이탈리아 출신 사업가였던 아버지 알베르와 벨기에 영화배우인 어머니 루이자는 소설 속에서 아버지에 대한 회상과 아버지의 행적에 대한 오마주로 읽혔다. 파리가 독일에 점령되고 유대인계 비프랑스국적의 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또 감추어야 했던 삶에 대한 오마주말이다. 파트릭은 초기 소설부터 그래도 그 당시에 위험한 처한 사람들을 구해주려 애썼던 작은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과 감격을 가져가며 동시에 기억과 정체성문제를 평생의 화두로 가졌다는 점에서 소설과 작가의 삶과 그에 대한 감정이 섞여있는 글로 읽었다.



 당시 등장했던 미술에 있어서 추상화처럼 더 이상 정확한 형태를 묘사하고 서사를 표현하는 것은 더 이상 적합한 표현방식도 아니었다. 오히려 뭉개진 형태와 색깔 속에서 창작자의 감정을 드러내는 게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이었다면 파트릭이 사용한 표현방법은 오롯이 감정을 드러냈다. 유려하고 서정적인 문체로서.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문제가 기억과 정체성 문제를 논하라였다면 기억과 정체성을 각각 논해야 한다. 기억이란 내 기억인지 타인이 가지고 있는 조각 기억을 엮어서 만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정체성을 보여줘야 한다.

전화번호부와 신사록에 기록된 기록들과 시대가 만들어준 배경 속에서 내 직업과 내이름 마저 기명으로 속이고 살았던 한 남자에게 정체성은 무엇이며 왜 찾아야 하는지를,


소설 속에서 답답증을 느낄 즈음이면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체와 빛나는 정제된 언어들로 기꺼이 길을 계속 헤매며 도저히 찾을 길 없을 것 같은 목적지에 대한 막막함을 조금은 위로 받을 수 있었다. 가령 이런 문장에서다.

저녁 어둠이 내렸다. 저녁의 초록빛이 사위어가면서 함수호의 빛이 점점 더 흐릿해졌다. 물위에는 아직도 몽롱한 광채를 내면서 보랏빛이 감도는 그림자들이 흐르고 있었다.” (262p.)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첫 문장부터 남김없이 얘기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상의 허물어짐과 무질서, 더러움은 피할 수 없는 법칙처럼 느껴진다.

엔트로피 제2 법칙이라고 했었나 아무튼 가만히 있어도, 혹은 늘 평소의 루틴대로

일상을 단단히 틀어쥐어도 어느새 어질러진 일상 속에 서 있다.

 

 

그때의 기분이란, 참 익숙하면서도 절대로 친근해질 수 없는 패배감 비슷한 것이 있다.

그때 이 책은 도움이 되리라 싶다.

 

 

 

 

 

  『시와 산책

제목만으로는 시에 문외한인 내가 읽어도 될까 싶었다.

하지만 역시 애정 어린 찬사를 무한히 받고 있으므로 자석에 끌리듯 집었다.

대성공. 히얏

 

허물어지고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언젠가 먼 훗날에 ,...’를 흥얼거리며 조용히

산책준비를 하는 자신을 본다.

가만가만히 저녁 어스름같이 불명확한 어둠과 낯섦을 시인인 저자는

언어로 정제된 새 숨을 불어넣는다. 잘 모르지만 이게 아마도 언어의 힘일지도 혹은

시의 치유일지도 모르겠다.

 

지겹고 싫증 나서 헤어진 미운 마음에 연약하고 보드라운 단어 하나 몇 줄의

문장으로 온 주위의 풍경을 다르게 채색해놓는 힘 말이다.

저자가 그렇게도 몸속 깊이 붙여놓은 산책을 그래서 나도 뒤따라 가야겠다.

남은 부분은 돌아와서 저녁 어스름에 불도 켜지 말고 조용히 낭랑하게 읽어봐야겠다.

저자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완벽한 아이를 읽다 보면 욕이 나오고 몇 번이나 그만 그만 소리치고 싶다.

마음을 상하게 하고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한 폭력과 지배, 위선과 거짓말이 횡행한다. 게다가 그 폭력이 연약한 아이와 동물을 대상으로 어른이 행하는 나쁜 짓일 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서양의 종교는 절대자와 연계되어 있으니 죽음은 부활이고 자세히 언급되어 나오는 프리메이슨이라는 기사단도 종교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해되는 바로는 광신이요 왜곡된 욕망과 쾌락에 의해 변주된 냄새나는 누더기일 뿐이다.

 

문제는 왜곡되고 부서진 자아상을 가진 자가 새로 태어난 생명에게 자신이 원하는 자아상을 투영하고 완성하기 위해 완벽한 아이를 만들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힘이 있고 돈과 권력이 있으니 할 수 있으니 할 뿐이라는 식이다.

 

책을 읽다가 욕지기가 일어나면 정희진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 글은 무수한 은유로 읽힐 수 있으니 다시 마음을 다잡고 거리를 유지한 채 읽으려 애썼다.

 

마음이 불편하고 속이 거북했음은 이 글이 보여주는 시공간과 지금 시대가 다르다는 데 자신있게 말할 수 없음이다.

교묘히 가려진 아동학대와 가정 내 폭력과 부모가 사랑과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가하는 양육은 정말 철학과 윤리 위에 서 있는 걸까.

 

어린이라는 세계에 대해 알고 싶어진다.

몰랭 선생님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책은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

 

명랑한 은둔자가 그랬다.

축축하게 그늘져버린 감정은 그 무엇으로도 뽀송뽀송하게 말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답답하게 막연하게 불편하게 했던 감정의 정체가 뭔지 이 글은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보여준다.

 

표현될 수 있는 슬픔과 고통은 견딜 힘도 가지고 있는 법.

 

 

처음에는 정신분석가인 아버지와 전시회를 몇 차례나 연 화가인 어머니 밑에서 게다가 7분 먼저 태어난 쌍둥이 언니까지 둔 그녀의 가정환경을 샘냈다.

브라운대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20년 넘게 저널리스트로 몇 권의 저자로 탄탄대로를 걸은 그녀는 왜 20대 초반부터 알코올중독과 신경성 섭식장애, 그리고 고립과 고독의 경계에서 그녀만의 전쟁을 치러야 했을까.

 

중독이란 들이닥치는 감정을 외면하려는 행위다.

 

헛헛한 외로움과 공허감이 몰아칠 때 음식을 배 터지도록 몰아 넣어본 경험이 있다면, 자신을 벌주고 싶어서 한참 동안 굶기기를 해봤다면,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수줍고 불편해서 그냥 나무나 바위로 태어날 걸 하는 소망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글을 읽고 동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응원하게 될 것이다.

살아낸다는 것의 무게와 슬픔과 불안과 그 모든 것들 속에 햇살처럼 비치는 기쁨과 우정과 고마움에 대해서.

 

그녀는 마흔두 살에 폐암으로 죽었다.

책을 읽다가 저자가 죽었다는 사실에 이렇게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또 처음이라 낯설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