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역시 오리올 파울로의 가장 최근의 영화다. 주인공 알리스 굴드로 나오는 바르바라 레니는 한국판 [자백]에서 나나 역할을 원작에서 했던 배우다. 매력적이고 아주 예쁘다.

신의 구부러진 선은 70년대 스페인의 소설가의 동명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그래서 영화 속 배경도 70년대다. 화면상으로는 70년대 같지 않지만 그렇다.

보다 보면 스페인산 셔터 아일랜드인가 할 정도로 진실과 허구, 진짜와 가짜가 모호해진다. 알리스는 탐정으로 한 사건을 의뢰를 받는다. 굴지의 부자인 델올모 가문의 아들이 정신병원에서 죽었는데 자살로 판명이 난다. 델올모는 알리스에게 자살이 아닌 것 같으니 정신병원에 들어가서 자살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아 달라고 한다.

알리스는 정신병원에 들어가기 위해 환자로 위장을 하고 들어가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정신병원에는 많은 환자들이 있고, 그 환자들과 접촉을 하면서 단서들을 필두로 사건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병원장이 알리스를 진짜 편집증 환자로 취급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알리스 역시 자신이 환자인지 사건을 의뢰받은 탐정인지 모호해진다. 밖에 있는 의뢰인과 남편도 딴 소리를 하고 병원장은 자신에게 계속 주사를 맞힌다.

알리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믿을 수 없는 환자들 뿐이다. 진실과 거짓이 뒤바뀌고 다시 한번 반전을 거듭하면서 이야기는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스릴러가 된다.

영화는 150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인데도 감독의 재능이 발휘되어서 그런지 지루한 감이 없다. 미스터리 스릴러를 영상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말을 하는 영화다.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보다 보면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 감독의 이전작들이 전부 재미있고 볼만하기에 이 영화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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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귀재 오리올 파울로 감독의 영화 [폭풍의 시간] 역시 반전에 반전에 반전이 기가 막힌다. 처음 반전에 헉하게 되고 그 뒤로 반전이 계속 거듭되는데 방해받지 않는다.

오리올 파울로의 최고의 반전 영화는 [인비저블 게스트]로 정말 재미있게 봤는데 우리나라에서 소간지가 리메이크해서 [ 자백]으로 나오기도 했었다. 자백은 원작과 달리 후반이 다른 결말이었다. 또 [더 바디]는 김희애 주연의 [사라진 밤]으로 리메이크되었는데 다 재미있었다.

이 이야기는 판타지가 있다. 타임슬립 내용이 있는데 영화의 큰 흐름에 해가 되지 않는다. 베를린 장벽에 무너지기 전 독일의 니코라는 소년이 비디오로 자신의 기타 연주를 녹화하고 있는데 옆 집의 아줌마가 남편에게 죽음을 당한다. 니코는 아줌마를 죽인 니코를 피해 집 밖으로 나가다가 차에 치여 죽는다.

25년 후 니코의 집에 한 가족이 이사를 온다. 베라는 간호사로 일하며 딸 글로리아와 남편을 사랑한다. 그러다가 집구석에서 오래된 티브이와 비디오를 발견하고 틀어 본다. 거기에는 니코의 영상이 녹화되어 있다.

태풍이 부는 날 티브이가 자동으로 켜지면서 그 속에서 과거의 니코와 마주하게 된다. 니코 역시 태풍이 부는 날에 티브이 속에 어떤 아줌마가 나와서 이상한 말을 한다. 자신이 죽기 때문에 옆집을 가지 마라, 아줌마가 있는 곳은 25년 후 니코 너의 집이다. 같은 말을 한다. 니코는 무서워서 가려는데 벨라는 니코에게 내일 학교 시계탑에 번개를 떨어져 휴교가 일어나는 걸 말해준다.

니코는 벨라 덕분에 죽음을 면하고 죽 지내게 된다. 그러나 현실의 벨라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 달라져 있다. 딸은 없어지고 남편은 자신을 몰라보고 자신은 간호사가 아니라 의사가 되어 있다. 벨라는 딸 글로리아를 찾기 위해 다시 니코를 보려고 하고.

니코는 옆집 아줌마를 죽인 남편을 의심해서 경찰에 신고하지만 증거나 나타나지 않는다. 니코 역시 벨라를 만나기 위해 비디오 앞에 앉지만 만날 수 없다. 니코는 점점 그 사건에 집착을 보이며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25년 후 니코와 벨라가 만나서 범인을 찾고 딸을 찾아가는 이야기. 타임슬립 판타지로 시작해서 스릴러로 이어지다가 드라마로 끝이 난다. 이 감독의 영화들이 몰입하게 되고 대체로 재미있게 잘 만든다.

이 감독은 영리하게 영화를 잘 만들어서 책으로 친다면 불란서의 기요미 미소 같다. 대중을 확 잡아끌면서 그 속에서 던지는 메시지나 철학적인 의미를 풀어낸다. 그나저나 요즘도 기요미 미소 소설 많이 읽나.

폭풍의 시간은 2시간 러닝타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휙 지나간다. 오락물을 좋아한다면 봐도 좋을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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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남 다른? 아들놈이 엄마와 아빠, 누나를 음식에 수면제를 타서 잠들어서 깨지 못하는 틈을 타서 집 근처 산에 있는 벙커에 넣어두고 지켜보는 기묘하고 괴기한 이야기.

얼핏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영화다. 파스쿠아 시스토라는 감독인데 요르고스의 분위기를 약간 맛을 본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영화 뭐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은데 집중해서 보게 된다. 나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영화였다. 왜 나는 기생수 보다 이런 영화가 더 좋을까. 기생수가 여러 나라에서 일등 먹는다는데 기생수보다 눈물의 여왕이 훨씬 재미있던데.

이런 기기괴괴한 이야기는 예측불허라서 그런지 존이라는 녀석이 뒤에 어떤 행동을 할지 불안하면서 기대가 된다. 등장인물도 많지 않다. 주로 한 가족이 전부인데 유명한 배우들이 나온다. 아빠로는 너무 재미있게 봤던 엑스터의 마이클 C 홀, 엄마 역의 제니퍼 엘은 여러 영화에 나왔지만 하정우가 나왔던 더 벙커(여기도 벙커네)에 나왔다.

누나로 나오는 배우는 아주 유명한 타이사 파미가. 타이사 파미가는 사실 언니가 더 유명하다. 베라 파미가로 베라 파미가 역시 하정우와 꽁냥꽁냥 하는 영화 [두 번째 사랑]에 나왔다. 그때의 베라 파미가의 미모는 하늘을 뚫고 나갔다.

아무튼 이 영화에서 존은 좀 남다르다. 질문이 아주 많은데 연결되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무작위 마구잡이로 질문을 하는 이상한 아이다. 벙커 속에서 깨어난 가족이 벙커 위에서 무표정으로 쳐다보는 존에게 꺼내 달라고 하지만 그저 계속 보기만 하는 존. 그리고 먹을 걸 던져준다.

그러면서 존은 혼자 집에서 자유롭게 지낸다. 엄마가 없다고, 아빠가 없다고 전혀 슬퍼하거나 불편해하지 않는다. 하루에 한 번 정도 먹을 걸 던져주던 존이 먹을 걸 던져주는 걸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면 가족은 이틀이고 그냥 굶을 수밖에 없다.

존은 왜 그러는 것일까. 아주 위태위태하고 엉망처럼 보이지만 느긋하고 평온한 존.

재미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흥미롭다. 13살짜리 소년이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그 뭐든 지가 테러블 쪽으로, 안 좋은 쪽으로 마음을 먹으면 무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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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에 버터를 발라 구웠다. 버터를 전복에 발라서 구운 이유는 인간이 음식을 좀 더 맛있게 먹으려는 집착이 만든 것 같다. 전복은 그냥 날 것을 잘게 썰어서 먹어도 맛있다. 하지만 가스레인지 불을 켜고 프라이팬을 달군 다음 버터를 전복에 발라서 이리저리 굴려 가면서 굽고 그 안에 마늘도 같이 굽는 이 행위가 무척이나 귀찮은 데도 하는 이유는 좀 더 맛있게 먹어보겠다는 집착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게 뭐 집착이야 라고 하겠지만 나는 그걸 집착이라고 부르겠다. 내 경우에 집착이 그다지 없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집착을 보인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방청소, 자동차 청소 하는 건 싫은데, 욕실 청소는 집착을 보이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집착이라는 말이 나쁜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집착 없이는 이루어지는 것이 없는 경우도 있다. 가령 버터 발라 전복을 구워서 먹는 일 같은 거 말이다. 집착이 있으면 좀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사실 인간 사회의 모든 것들이 집착으로 이루어졌다. 인간의 집착이 하늘을 날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들어 냈다. 스티브 잡스의 집착 없이는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니는 아이폰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집착이 너무 심해지면 모습만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을 뿐 행동이나 사고, 생각은 마치 기계처럼 변한다. 권력을 향한 집착은 인간성이 말살된다. 사람인데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사람의 말을 하는데 사람의 말이 아니다. 자리에 대한 욕심이 과하고 하고자 하는 신념이 사라진다.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남의 탓으로 돌린다.


주위에는 하는 쓴소리는 전혀 듣지 않고 달달한 말만 하는 사람으로만 주위를 채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기분이 안 좋으면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업무를 보러 나가지도 않는다. 일주일 주에 며칠은 몇 시간씩 지각에다가 살이 쪄서 늘 구부정하게 걷는다. 심각한 집착은 오만을 불러들이고 외모를 변화시킨다. 심각한 집착은 결국 몰락을 몰고 온다. 그러나 그 사실을 당사자는 알지 못한다. 집착이 심해지면 그렇게 된다.


하지만 버터를 전복에 발라서 구워 먹는 정도의 집착은 좀 귀찮지만 일상을 풍요롭게 한다. 이 정도의 집착으로 풍요로운 하루를 맞이한다면 괜찮은 집착이다. 자동차는 더러워도 욕실을 깨끗하게 하는 정도의 집착은 무난하다. 그래서 버터를 발라 구운 전복을 칼스버그와 맛있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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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활동 ㅋㅋ


유채가 강변을 따라 활짝



조깅을 하고 오다가 어제는 시내 전화국이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전화국 그 맞은편 중앙극장 1층에서 친구들을 기다릴 때를 생각했다. 전화국 앞에는 공중전화박스가 일렬로 죽 있었다.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공중전화박스는 인기였다. 사람들은 전부 시내의 전화국 앞에서 만날 약속을 정했고 삐삐를 보며 그 앞에서 친구나 연인을 기다렸다. 사람들의 약속장소였지. 대구의 대백 같은 그런 장소였다. 토요일 오후에는 사람들로 가득해서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그렇게 사람이 많아서 더 약속 장소로 재미있었다.


그때에도 요즘처럼 카페가 많았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에 카페 하나씩은 있을 정도였다. 중앙극장 건물에도 커피숍이 있었다. 그곳은 다른 곳보다 공간이 커서 중 2층이 있고 중 2층에 앉아서 커피숍 실내를 내려다봐도 이상하지만 재미있었다. 전화국 앞에 가득 모인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커피숍에 가득 찬 사람들을 보는 것 역시 재미있었다. 또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로비에 가득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사람구경하는 게 여러 재미있는 구경 중에는 제일인 것 같다. 그렇기에 우리는 대 놓고 사람을 보지 못하고 영화로 사람을 본다. 사람이 나오지 않는 영화는 대체로 인기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극장에서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보기 전에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사람을 구경하고, 커피숍에서 음료를 마시며 사람들을 구경하고, 영화 속에 나오는 사람을 구경하고.


요즘도 창을 사이에 두고 여기에 앉아서 창밖으로 내리는 빗속을 다니는 사람들을 멍하게 보면 재미있다. 벚꽃이 만개하는 날에 비가 내려 사람들은 마치 손해 봤다는 표정으로 어딘가를 향해 빠르게 걸어 다닌다. 멍하게 있어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뭔가를 해도 시간을 빠르게 지나간다. 사람들이 우산을 들고 지나간다. 모두가 다 다른 우산을 들고 있다. 우산이 촌스러우면 나는 싫다. 그런데 내가 드는 우산은 늘 촌스럽다. 촌스러운 우산이 있으니까 다른 우산이 빛을 발하겠지.


예전에는 비가 오면 극장 앞에서 비닐우산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근데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영화 속에서만 봤다. 요즘도 비가 느닷없이 내리면 극장 앞에서 우산을 팔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몰고 붕 가버리니 우산이 딱히 필요가 없다.


우산도 개성의 시대(라는 말도 나온 지 오래되었다)인데 도대체 언제, 누가 우산을 제일 먼저 썼을까. 하루키 에세이 중에 [브리그의 우산]이 있다. [에스콰이어]에서 하루키가 퍼 온 이야기다. 이 에세이도 하루키가 80년대에 쓴 에세이인 것 같다.


처음 우산을 쓰고 런던 거리를 걸었던 조나스 한웨이라는 남자는 당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그 괴상한 꼴로 다니지 말고 비를 맞고 다니라는 말을 들었다고. 그때가 1750년의 일이고, 우산이라는 게 일반인에게 퍼진 건 그 후 30년이 지난 후라고 한다.


18세기 당시 남자들은 칼을 들고 다녔는데 우산이 등장했을 때 꼴 사나워 보였다고 한다. 이상하다는 것이다. 비에 젖지 않으려는 노력이 비열해 보이기까지 했다고.


19세기에 칼을 버리고 지팡이를 들고 다녔지만 우산은 아직 저 세계의 이야기였다고 하니 뭐든 처음이란 참으로 어렵고 힘들다. 처음이라는 건 타인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기도 한다. 아니 이상하게만 보일 것이다. 좀 비켜간 얘기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와서 [난 알아요]를 불렀을 때 전문 음악인들의 눈에도 기괴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19세기 이후 우산은 뼈대가 생기고 마치 신이 인간을 빚듯이 우산은 여러 과정을 거쳐 현재의 형태로 발전을 했다. 요즘 우산은 개인맞춤으로 제작을 해 주기도 한다. 나만의 우산인 것이다. 근데 맞춤 우산이 아니라도 어떤 우산을 들던지 대체로 내가 사용하는 우산은 나만 사용하고 있다. 나와 똑같은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보지 못한다. 그래서 비싼 돈을 주고 개인 우산을 맞춤 제작해서 들고 다녀야 하나? 우산은 다른 물품에 비해 잘 잃어버리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잃어버리면 낭패다.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제멋대로니까.


우산에 대해서 한 번 검색하면 우산에 대해서 모르는 것들이 주르륵 나온다. 우산의 세계 역시 넓고 풍부한 것이다. 개인 맞춤 제작을 하는 우산이 있어야 또 공급을 하여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기에 함부로 별거 아니네 마네 할 수는 없다.


어제까지 그렇게 더운 사월이더니 오늘은 10도 정도 낮아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사월이다. 비가 오는 날은 어떤 음악이 어울릴까. 라디오를 늘 켜 두고 있는데 비가 오면 비에 걸맞은 노래를 선곡하려고 디제이들도 나름대로 분주한 것 같다. 그렇다고 대 놓고 비! 하는 노래보다는 비가 내려 감성을 건드리는 노래를 선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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