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라이스를 이틀 동안 내놓으면 사람들은 아마도 시큰둥하지만 나는 일주일 내내 카레만 먹어도 좋은 인간에 속한다. 카레 안에 많은 재료가 들어가지 않고 그저 카레만 멀겋게 끓여서 밥 위에 부어 먹어도 좋고, 그 안에 당근만 왕창 들어가도 아주 좋아해서 매일 먹을 수 있는 인간이 나다. 심지어는 카레 가루를 그냥 밥 위에 뿌려 비벼 먹어도 되고, 라면에 카레 가루를 부어서 먹기도 한다. 나는 어째서 이리도 카레를 좋아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마도 처음 카레를 먹었을 때의 그 느낌이 형상기억 합금처럼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내 어린 시절에 옆집에 인도 사람인 아미르가 살고 있었다. 그는 종종 카레를 먹었는데 어느 날 나에게 자신이 만든 카레를 만들어 주었다. 아미르가 만든 카레는 입안과 혀 그리고 식도를 따뜻하게 자극했다. 카레와 뒤섞인 고기 같은 물컹거리는 것이 입안에서 스르르 녹았다. 감자튀김 크기만큼 잘린 물컹한 덩어리들을 씹으면 입안에 자극을 줬던 카레와 궁합을 이루어 묘한 맛을 이루었고 나는 그 맛을 알아버렸다. 몸이 부르르 떨리는 모욕감을 느끼며 다시 카레를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그 카레는 양의 뇌를 넣어서 만든 카레였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고.

 

인스턴트 카레도 좋고, 카레로 파스타를 만들어 먹는 것도 좋아한다. 파스타를 만들을 때는 마늘을 가지고 기름에 볶아 준다. 마늘 베이스에 카레를 가지고 만들어 먹는 파스타는 뭘 어떻게 해 먹어도 맛있다.

카레라는 말이 재미있어서 좀 찾아보니 인도의 향신료 조합이었던 커리가 우리가 밥상에서 먹는 카레라이스가 되기까지 250년 이상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250년 동안 카레에 관여한 국가가 인도, 영국, 프랑스, 일본에 이르기까지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음식이라는 문화가 바다를 건너서 현지화가 되고 대중화가 되는 과정은 음식의 수용과 이런저런 문제에 닿게 된다. 카레의 수용과 대중화는 이 차이를 잘 보여주는 예다.


인도를 식민지로 가지고 있던 영국이 영국식 스튜로 만들어 먹던 것이 영국과 인도를 오가던 선원들이 인도식 향신료 조합으로, 이 카레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해군이 ‘해군 카레’를 해 먹으며 일본 전국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카레 전문점이 늘고 카레라고 하는 곳이 있고, 커리 또는 카리라 부르는 곳도 있다. 카레는 어디에서 나타난 단어일까.


curry라는 용어는 영국의 C&B(크로스 앤드 밸랙웰)가 영국식 마실라를 개발하면서 제품명으로 처음 사용했다. 이 커리라는 단어는 소스를 의미하는 남인도 타밀어 카리 kari에서 따온 말이다. 영국으로 건너간 커리는 일본으로 넘어오면서 curry라 쓰고 카레라고 일본인들이 읽기 시작했다.


이름이 커리나 카리라 해서 그 전문점에서 반드시 맛과 균형을 이루지는 않는다. 카레라는 음식은 수용과 토착화의 문제이기에 오뚜기 카레라고 해서 꼴찌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영화 ‘라스트 레시피: 기린의 혀의 기억'을 보면 마지막에 니노 카즈가 두툼한 돈가스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고 맛있다고 처음으로 인정을 하며 울먹거린다. 이 영화는 일본의 요리가 수용을 겪고 전쟁통에 중국의 만주를 넘보는 꽤 무시무시한 내용의 영화다. 요리를 통해 황제를 암살하는 계획을 하며 그 사이에서 요리를 지키려는 왕실의 요리사와 그 뜻을 무참히 짓밟으려는 관료가 나온다.




또 브라질 영화 ‘에스토 마고’를 보면 음식으로 권력을 손에 넣고 신분을 바꾸는 모습을 브라질의 음식으로 유쾌하게 통찰했다. 에스토마고의 음식을 보면, 세상에서 음식이 가장 섹시하고, 가장 퇴폐적이며, 가장 아름답고, 가장 추하기에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역시 수용과 음모와 수탈 그 모든 것 안에 지켜낸 음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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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 마이 카


드라이브 마이 카 굿즈를 만들어 봤다. 드라이브 마이 카 영화는 단연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토니 타키타니에서도, 하나레이 만에서도 그렇고, 하루키의 단편은 어디로 뻗어가야 할지 모두가 알고 있지만 다 알 수는 없는, 그래서 여러 방향의 길이 있고 각자의 길로 들어가면 그 길이 곧 세계로 이어지는 이상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잔뜩 머금고 있다.


이 단편을 이렇게나 긴 시간을 짧게 느끼게 만들어 버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곧 봉 감독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을까. 나란히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칭찬을 아낌없이 주고 싶은 감독이다.


이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여러 생각을 예술가처럼 말했다. 그런데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운전면허 따고 싶게 만드는 영화. 다양한 생각을 불러내게 하는 게 예술의 역할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아사코에서도 그러더니. 다 알겠지만 원래는 부산에서 찍으려고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드라이브 마이 카 팬들은 지나가다가 굿즈 달라고 하면 드릴게요 ㅎㅎ. 혼자 든 생각이지만 이 영화와 잘 어울리는 음악은 핑크 플로이드의 하이 홉스다. 하이 홉스를 들으면 몸이 분해되어 먼지가 되어 버릴 것만 같은데 이 영화도 그렇다니까.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하루키 #村上春樹#むらかみ#はるき#MurakamiHaruki #드라이브마이카 #영화 #DriveMyCar #굿즈 #goods



이렇게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브런치에 링크를 걸어둔 나의 인스타그램은 순전히 하루키의 글과 소식을 올리는 피드다. 하루키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와 소설에 대한 나의 생각 같은 것들만 올리고 있다.


해시태그를 걸어 놓으면 하루키를 좋아하는 외국인들도 들어와서 본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피드를 보는 건 소설을 보는 것만큼 재미있다. 나처럼 하루키에 대한 각종 그림을 그리고 굿즈를 만들고 하루키에 대해서 강연을 하고, 정말 하루키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영향을 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드라이브 마이 카 굿즈에 대한 피드에도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들어왔기에 그 사람들 피드를 둘러보다가 이런 소식이 있기에 깜짝 놀랐다. 처음 들어보는 소식인 2020년 여름에 가벼운 교통사고로 조깅을 못하게 되었다는 것 –가벼운 교통사곤데 왜 조깅을 하지 못할까. 또 그런 소식이라면 아마도 하루키가 직접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무라카미 라디오’에서 언급을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더 무자비한 소식은 병원 옥상에서 투신했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단골 주점에서 티브이로 그 소식을 접했다는 것.

솔직히 너무 놀라기도 해서 네이버를 검색해도 전혀 나오지 않기에 구글, 일본 야후 등 닥치는 대로 검색을 해 보았다. 하지만 그런 소식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놀란 부분은 투신이라는 것이다. 그 투신이라는 말에 하루키가 작가라는 관념을 배제하고 한 인간으로 고뇌와 불안이 있지만 투신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헤밍웨이에 대해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 비록 말년에 힘을 떨어졌지만 죽을 때까지 글을 쓰다 죽은 피츠제럴드에게 손을 들어줬다. 작가는 그래야 한다고. 그런데 투신이라니. 이건 정말 나에게는 손 떨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댓글을 달았다. 그 소식이 정말이냐고. 하지만 답글은 없고, 그래서 인스타그램에서 하루키를 좋아하고 일본에서도 공부한 분에게 부탁을 드렸다. 그분도 이 피드를 보고 너무 놀라서 알아봤지만 그런 소식은 없다고 한다. 만약 그런 소식이, 하루키가 죽었다는, 또 투신을 했다면 일본이 발칵 뒤집혔을 것이라고 했다. 오보이거나 글쓴이가 잘못 들었거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오늘 들어가 보니 하루키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도 궁금하거나 또는 조금은 화가 났다.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이렇게 해버린 것에 대해서. 글쓴이의 다음 피드에는 이 글의 다음 글이 이어지면서, 거기에는 해시태그로 초 짧은 소설,라고 달았다. 그러니 저 피드의 글은 어떻든 거짓이라는 말이다. 저기 피드에는 해시태그에 그저 하루키와 기사단장 죽이기가 달려있을 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요즘 시기에 정말 별거 아닌 일일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사건사고가 일어나고 전쟁이 발발하는 나라도 있으니까. 거기에 비하면 저 정도야 거짓이니까 오, 아니었구만. 하면서 헤헤 거리며 넘어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생각이라는 게 생각하면 할수록 왜 저렇게 올렸을까. 다른 사람들도 꽤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대부분 너무 놀라거나 하루키의 소식이 있나 시간을 들여 기사를 찾아봤다. 그 정도로 사람들은 하루키가 투신했다는 소식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이 글은 나의 소설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또 이렇게 댓글을 단 사람들에게 오해를 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답글을 다는 건 어려운 일일까.

아무튼 세상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노래 핑크 플로이드의 하이 홉스를 라이브로 들어보자. https://youtu.be/HX_du6Gcp1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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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 2집


이승환의 1집은 사라졌고 2집은 남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째서 같이 묶어서 구석에 두었는데 하나는 사라지고 하나는 남아있을까. 사라지는 물품은 다리가 달린 것도 아닌데 시간이 지나서 찾아보면 도망가 버리고 만다. 아아, 나는 주인인 네가 싫어, 너무 싫단 말이야, 라며 어느 날 찾으면 없어지고 난 후다. 이승환의 노래는 학창 시절에 토요일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일찍 들어와 라면을 하나 끓여 먹은 후 누워서 마당이 겨울의 추위에 표백되는 것을 보며 들었다. 그래서 이승환 2집은 겨울의 노래, 계절송처럼 되어 버렸다. 기이하지만 여름에는 들어지지 않는다. 그건 어떻게 생각해도 기이하다. 배도 부르고 볼 거라고는 1도 없는 마당인데 그만 마음을 빼앗긴 것처럼 멍하게 마당 뷰를 보며 이승환의 노래를 몇 번이고 돌려가며 들었다. 그 시간이 참 좋았다. 행복은 순간의 기억이고 기억은 희미해질 뿐이라, 그때 그 순간의 희미한 행복했던 기억은 지금 그때의 음악을 들으며 조금 느껴볼 뿐이다. 1집에서도 그랬지만 2집도 이별, 헤어짐과 사랑을 말하고 있다.


너를 향한 마음

https://youtu.be/PpTWMyaYUwc

트랙의 맨 처음의 가장 유명한 노래 ‘너를 향한 마음’은 그리움을 말하고 있다. 언제라도 내게 돌아오기를 바보처럼 기다리는 나의 모습이 어리석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마음이라는 건 머리와 다르게 사고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또 너를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언젠가 한 번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변한 그리움의 마음은 시간이 지나 스탠딩 에그의 오래된 노래까지 내려왔다. 우리는 애틋하고 애달픈 이런 마음을 죽을 때까지 질질 끌고 가야만 한다. 나의 마음이 이렇다고 들리지 않는 너에게 말한다.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https://youtu.be/KKX2guoAPU8

어쩌면 이 노래가 가장 유명한 노래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이승환 하면 공연에서도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을 부르니까.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알 수 없던 그때 언제나 세월은 그렇게 잦은 잊음을 만든다 해도 우리의 마음에는 정들은 그대는 어쩌면 영영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 요즘은 잘 쓰지 않는 단어 ‘정’이라는 말도 참 좋다. 정들자 이별이네, 같은 말을 예전에는 많이도 했다. 소설에서, 영화에서. 그리고 초코파이 광고에서도 ‘정’이 있었다. 영어로 해결되지 않는 단어 ‘정’. 정든 날에 대해서 노래는 말하고 있다. 여자가 노래를 부른다. 난 기다림을 믿는 대신 무뎌짐을 바라겠지. 세상을 살아가고 삶에 부딪히다 보니 무뎌지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만 무뎌지는 건 생각만큼 되지 않는다.


회상이 지나간 오후

https://youtu.be/z1ziSSJR5iE

이 노래는 도입이 마치 소설의 첫 시작처럼 출발한다. 입김처럼 흐려지는 먼 기억의 끝을 찾아 붙들고픈 마음으로 멍해진 내 모습, 시간은 나를 두고 저 혼자만 가버렸나, 하릴도 없이 흘러간 세월. 이렇게 시작한다. 이 이야기도, 모두가 흐르고 변하는데 나만 그곳에 머물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픔을 말하고 있다. 잎진 가로수 아래에는 부서진 추억과 낙엽만이 쌓여 있어서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는 마음이 너무나도 애절하다. 무엇보다 이승환의 초기 목소리로 덤덤하게 부르기 때문에 더 애틋하게 들린다. 회상이 지나간 오후에는 그저 부질없고 멍하게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할 뿐이다.


먼 시간 속에 추억

https://youtu.be/2b-K8SqYdQs

이 노래에는 철학이 깊게 배어 있다. 나의 슬픔 속에는 떠나버린 그들의 수많은 외로움이 있어서 고민을 하고 사고해도 진실에는 접근할 수 없다. 추억만 남아있는 삶 때문에 웃어 본 지도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노래를 듣다 보면 시인 여림의 시도 스쳐 지나가고, 기형도의 정거장에서도 떠오른다. 정거장은 늘 배경이 되는 내 몸이며 사람들은 나를 지나쳐갈 뿐이다. 누구도 머무르지 않는 쓸쓸하고 황망한 정거장에서 나는 기형도를 노래한다. 정거장에서 나는 고립을 먹고 희망을 노래한다. 모두가 빠져나간 정거장에서 나는 큰 소리로 노래한다. 어디에도 갈 데가 없는 이들에게 고한다. 닳고 허물어져 가는 내 육체에서 머물다 가라고.


하숙생

https://youtu.be/V6AV1O--LYs

하숙생은 최희준의 노래를 이승환이 빠르게 다시 불렀다. 하숙생이라는 노래는 지금 들어서 더 좋은 것 같다. 인생에 대해서 조금은 생각하게 하니까.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우리는 놓여 있는 작은 존재일 뿐이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도 죽고 나면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정일랑 두지 말고 미련일랑 두지 말자고 노래를 부른다. 이 처절하고 고풍스러운 노래를 이렇게 템포를 달리해서 불러 이상할 것 같은데 들어보라. 얼마나 좋은지.


슬픔에 관하여

https://youtu.be/LplsAwaXrqc

1집의 가을 흔적처럼 2집에서는 숨은 노래가 슬픔에 관하여다.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보면 2집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곡처럼 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내용을 파보면 사실 지질한 이야기다. 도입부의 전주가 참 좋다. 시작을 알리는 연주가 꼭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이 노래의 특징이라면 ‘어찌 살아갈런지~’ 다음에 바로 ‘하지만’으로 쉬지 않고 이어지게 부르는 게 포인트다. 자칫 다른 노래들과 비슷해서 잊힐 수 있는 노래일지도 모르는데 포인트 때문에 이 노래가 계속 불러진다. 그걸 생각하고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가사도 시적이고 노래도 의외로 높게 불러야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노래들도 좋다. 특히 '이 밤을 위로' 같은 노래도 계속 부르게 된다. 그저 듣게 되고 한 번 들으면 계속 듣게 된다. 그리움 속으로, 그리웠던 곳으로, 그리운 사람에게로 데려다준다. 노래는 분명히 그런 기이함을 가지고 있다. 노래라는 것은 이상하게 꼭 나의 이야기를 대신하는 것 같고, 나의 마음이 들켜 버린 것 같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음을 붙여서 불러준다. 그러다 보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https://youtu.be/7pzQr72ZOBA


코로나 전 이승환의 콘서트는 작정하고, 몸을 만들어서 가야 한다. 이승환은 공연이 끝나면 발이 부어서 신발이 벗겨지지 않을 정도인데, 길게 몇 시간씩 해서 그렇다. 팬들의 고령화를 고려해서 쉬는 시간도 있지만, 더 신나고 길게 터져라 공연을 펼친다. 록스타 적인 이승환도 좋고, 이렇게 발라드 적인 이승환도 좋다. 언젠가 코로나가 끝이 나고 이승환의 공연에서 또 열심히 몸을 움직이려면 신체를 만들어놔야 한다. 그저 어물어물 보내다가 이승환의 공연을 가게 되면 한 시간이 지나면 주저앉고 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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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2-23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제 이승환도 60 바라 볼 텐데 지금도 왕성하게 공연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이승환 좋아하는데...

그런데 교관님 나름 젊으신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밑의 글도 그렇고 꼭 그렇지만도 않으신가 봅니다.
카세트 테이프와 데크 요즘도 나오나요?ㅋ

교관 2022-02-23 14:32   좋아요 1 | URL
이승환 형님 왕성하게 공연을 합니다! ㅋ
저는 78년 생인데 너무 늙었습니까 ㅋㅋ

stella.K 2022-02-24 15:41   좋아요 0 | URL
읏따, 화끈해서 좋구마잉~!
아직 젊으신데요 뭐.
요즘엔 50줄은 타야 슬슬 늙었다고 합니다.ㅋㅋ

교관 2022-02-25 11:04   좋아요 1 | URL
보니 타일러 2017년도 공연 보니까 너무 왕성해서 놀랐어요 ㅋㅋㅋ
 


지금이 딱 브라이언 아담스를 듣던 그때의 날씨다. 겨울이지만 썩 춥지 않고 흐리고, 그래서 어딘가 작은 카페에 들어가서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며 듣던 브라이언 아담스. 그때에도 저 카세트테이프를 미니 카세트 플레이어로 들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저 앨범을 듣고 있다니.


음악이라는 건 들으면 그 음악에 심취해있던 그때로 나를 되돌려 준다. 우리는 왜 지난 유년의 시기를 잊지 못하고 자꾸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할까. 그 추억 속에는 아마도 가슴 저 안쪽에서부터 따뜻하게 하는 무엇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무엇은 그리움이며, 그리움 속에는 장소도 포함되어 있고 그 장소에서 듣던 음악, 마시던 음료, 먹었던 음식 그리고 지금은 볼 수 없는 사람이 있어서 이기도 하다.


지금 시기는 뭐랄까 너무나 혼란스럽고 가혹한 시기다. 서로가 서로에게 칼부림을 하지 않을 뿐이지 미워하기 대회를 일상에서 보는 것 같다. 물론 나도 그 속에 있다. 사람을 죽이는데 칼과 총보다는 말로 죽인다는 게 이제 놀랍지 않은 시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리운 것들이 많은 예전으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강해진다. 영화 범블비도, 원더우먼 1984도, 공포영화 피어 스트리트도, 넷플의 기묘한 이야기도 배경이 전부 80년대와 90년대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시대를 보냈던 아이들이 커서 지금은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귀재 에드가 라이트의 영화 속에는 7,80년대의 음악이 잔뜩 나온다. 모두가 그런 이유다.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이 가슴 저리게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시기는 아픈 사람이 너무 많고, 멀쩡하게 보이는데 아픔이 짙은 사람은 더 많다. 무엇보다 자신이 아픈지 모르는 바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런 시기에 할 수 있는 건 시간의 틈을 벌려 그리움 속으로 파고는 것뿐.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을 읽고 쓸 수밖에 없다.



목요일 배캠의 ‘철수는 오늘’이 나를 사색케 한다

이하 배철수 육성의 맨트 -


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작가들은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회상하는 글을 많이 쓴다. 반면 중년시절과 노년시절을 써내는 일은 드문 것 같다. 노벨상 수상작가 존 쿳시의 자전소설 3부작 소년 시절, 청년시절, 서머타임은 엄밀히 말해 작가의 일대기가 아니다. 1940년생인 작가는 회고록 비슷하게 써 내려간 작품에서 1970년대까지만 언급한다. 그는 특히 유년과 청년을 보내며 겪은 고뇌에 집중하여 1940년대 남아공 식민의 역사 1950년대의 인종차별로 얼룩진 사회, 1960년 조국을 떠나 런던에 와서 느낀 불안과 좌절 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회사에 취직하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고 일 년에 두 주뿐인 휴가를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이기는 정당이 법을 바꿀 수 있다면 선거를 왜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누가 공을 던지고 던지지 않을지를 타자가 결정하는 것과 같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못마땅한 소년은 불만과 부정과 회의 속에서 아무도 자신을 건드릴 수 없지만 또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인정하고 만다. 그는 청년이 되자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조국을 등지고 런던에 와서 예술가가 되려 한다.


하지만 런던은 그에게 무표정하고 미로 같고 차가웠다. 방 하나에 찬물만 나오는 싱크대, 더구나 욕실과 화장실은 위층의 공용 시절을 이용해야 하는 작고 초라한 원룸을 그는 룸메이트와 나눠 쓴다. 영국에 올 때 그에게는 이런 계획이 있었다. 우선 직장을 잡고 돈을 모으는 것, 그러다 돈이 충분히 모이면 직장을 그만두고 글쓰기에 전념하는 것. 그는 자신의 계획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 곧 알게 된다. 아무리 예술이 결핍과 열망과 고독을 먹고 큰 다지만 그에게는 친밀감과 열정, 사랑이 필요했다. 철수는 오늘 유명 작가들이 자신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자꾸 뒤돌아보며 고통을 반추하는 까닭을 생각해본다. 나아가 세상의 누구도 청년기를 불안하지 않게 보내기란 어렵다는 보편적 생각에 이른다. 청년시절의 존 쿳시는 라디오 방송 그중에서도 BBC의 제3 프로그램으로 위안을 얻는다. 힘든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라디오를 켜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음악이나 근사하고 지적인 대화를 듣는 일, 제3 프로그램이 장파가 아니라 단파로 방송되었다면 그래서 케이프 타운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면 고국을 떠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가 배철수 형님의 목요일 '철수는 오늘'이었다. 많은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평소에 조건 없이 약간의 위안을 받고 위로가 되는 건 지난 시간의 음악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디제이들의 음성이다. 그리고 소설 정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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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여행법


이 세상에서 가장 촌스러운 책 표지라면 바로 이 책 ‘하루키의 여행법’이지 싶다. 마치 포토샵을 막 배운 사람에게 “그래, 너 좋을 대로 한 번 (멋지게) 디자인을 해봐”라고 해서 호기롭게 덤벼들어 초보 북디자이너가 열정(만) 가득하게 디자인한 것 같다.


표지의 이 난해한 배열과 아메바 같은 와꾸 모양, 난데없는 그러데이션과 푸름과 푸르댕댕과 파랑의 균형적이지 않는 조화. 7가지나 되는 폰트의 남발과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하루키만의 세계에 있는 패션 센스와 안자이 미즈마루 씨가 실사화 해 놓은 것 같은 점, 선, 면으로 된 얼굴이다.


그런데 이 촌스러운 디자인 덕분에 ‘하루키의 여행법’이 유명하게 되었다.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기념으로는 그만인 하루키의 책이다.

이 여행 에세이가 유별난 이유가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하루키 만의 유머를 잃지 않고 있지만 또 몰래 찍은 사진도 실려 있는데,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얼씨구 반가운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삽화도 함께 실려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짬짜면에 탕수육까지 있는 세트메뉴 같은 느낌이다. 노몬한 여행길은 '태엽 감는 새'의 노몬한과 만주 이야기를 보고 잡지사에서 실제로 가보지 않겠냐, 해서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 부분은 또 다른 ㅇㅅㅇ ‘우천 염전’에도 나오는 걸로 아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여행지에서 먹는 것이 안 맞아서 구시렁거리는 것부터 쇠파리, 구더기, 철조망, 국경까지 긴박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면서 잊지 말아야 할, 잊을 수 없는 노몬한 전투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을 한다.


해가 지면 몽고의 하늘은 별들로 뒤덮인다로 시작해서, 피투성이의 싸움을 벌이고, 그곳에서 수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총에 맞고 화염 방사기에 불태워지고, 탱크의 캐터필러에 깔려 죽는다며 생매장을 당하고 또 그것의 몇 배나 되는 사람들이 깊은 상처를 입고 팔이나 다리를 잃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암담한 심정이라고 했다.


이러한 기록은 장편 소설 ‘태엽 감는 새’에 잘 나온다. 포로의 가죽을 벗기는 이야기나, 전투 중에 버려진 군인들을 처리하는 방법이나. 전쟁의 아이러니는 평화를 위해 서로의 몸에 충을 겨누고 총구멍을 낸다. 평화를 부르짖으며 전쟁을 한다니 참으로 모순이다. 인간이 있는 한 전쟁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여행 에세이는 ‘먼 북소리’와 비슷하다. 먼 북소리가 저쪽으로 다니면서 적은 기록이라면 이 책은 이쪽으로 다니면서 적은 기록처럼 보인다. 아무튼 이 책에 실린 하루키의 얼굴은 아주 젊고, 책을 읽는 동안에는 세상의 시름을 잊어버리게 된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또 그런 맛이지.





재미있는 챕터는 하루키의 중국에 대해서 기억하는 부분이다.

요즘 동계 올림픽을 보며 정말 중국이란 뭐지? 이런 생각이 든 사람들이 많다. 모든 중국 사람들이야 그렇겠냐마는 동계 올림픽을 보면 엉망진창도 이런 엉망진창이 없다. 올림픽이라는 세계적인 대회를 이렇게 방구석에서 하듯이 운영을 하다니 참 이상하고 또 이상한 나라다.


중국에 대해서 놀라고 기가 막힌 것은 하루키도 그렇다.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를 보면 그런 일화를 잘 말하고 있다. 하루키가 중국에 처음 갔을 때다. 일본에서 중국까지는 너무나 짧은 거리였다는 것에 놀란 하루키는 더 깜짝 놀란 것은 일본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도쿄의 일본에도 사람은 굉장히 많다. 하지만 한국도 그렇지만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빠져나오면 대체로 한산하거나 양팔을 휘저으며 편안하게 걸어 다닐 수 있다. 하지만 하루키가 본 중국은 어디를 가나 인파였다. 인간이 없는 정경이라는 건 전혀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어디서 인지도 모르게 꾸역꾸역 인간들이 나타나는데 도시뿐 아니라 시골도 마찬가지다. 버스든 뭐든 교통수단이면 엄청난 사람들 때문에 넋을 잃을 정도라고 했다.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은 장소를 상관 않고 담배꽁초를 버리거나 침을 뱉으며 고함을 치거나 멋대로 물건을 팔고 산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두려움마저 든다고 했다. 어쨌든 도로 상황은 최악에 가깝지만 자동차는 모두 달리고 싶은 대로 달리고 사람들은 모두 걷고 싶은 대로 걸어 다닌다. 교통이 복잡한 여러 나라의 도시를 돌아다녀봤지만 중국의 도시 교통의 과격함에는 그야말로 압도되어 버렸다. 할 말을 잊었다. 이런 곳에서는 아예 운전대는 잡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물론 그때는 꽤나 오래전이고 그런 중국의 모습은 해외에 많이 소개되었지만 한 나라의 국민성이라든가 도민성 같은 경우는 쉽게 바뀌거나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더불어 쇼트트랙 남자 계주 은메달을 따고도 뭔가 미안하고 죄짓는 듯한 선수들 모습에서 울컥하는데 아마 한국인들 모두가 정말 기분 좋을 텐데. 값진 은메달이니까 기분 좋아했으면,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암담하고 억울한 이번 올림픽이었지만, 그래서 분노가 일이지만, 그렇기에 메달은 아주 값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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