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딱 브라이언 아담스를 듣던 그때의 날씨다. 겨울이지만 썩 춥지 않고 흐리고, 그래서 어딘가 작은 카페에 들어가서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며 듣던 브라이언 아담스. 그때에도 저 카세트테이프를 미니 카세트 플레이어로 들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저 앨범을 듣고 있다니.
음악이라는 건 들으면 그 음악에 심취해있던 그때로 나를 되돌려 준다. 우리는 왜 지난 유년의 시기를 잊지 못하고 자꾸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할까. 그 추억 속에는 아마도 가슴 저 안쪽에서부터 따뜻하게 하는 무엇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무엇은 그리움이며, 그리움 속에는 장소도 포함되어 있고 그 장소에서 듣던 음악, 마시던 음료, 먹었던 음식 그리고 지금은 볼 수 없는 사람이 있어서 이기도 하다.
지금 시기는 뭐랄까 너무나 혼란스럽고 가혹한 시기다. 서로가 서로에게 칼부림을 하지 않을 뿐이지 미워하기 대회를 일상에서 보는 것 같다. 물론 나도 그 속에 있다. 사람을 죽이는데 칼과 총보다는 말로 죽인다는 게 이제 놀랍지 않은 시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리운 것들이 많은 예전으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강해진다. 영화 범블비도, 원더우먼 1984도, 공포영화 피어 스트리트도, 넷플의 기묘한 이야기도 배경이 전부 80년대와 90년대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시대를 보냈던 아이들이 커서 지금은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귀재 에드가 라이트의 영화 속에는 7,80년대의 음악이 잔뜩 나온다. 모두가 그런 이유다.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이 가슴 저리게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시기는 아픈 사람이 너무 많고, 멀쩡하게 보이는데 아픔이 짙은 사람은 더 많다. 무엇보다 자신이 아픈지 모르는 바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런 시기에 할 수 있는 건 시간의 틈을 벌려 그리움 속으로 파고는 것뿐.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을 읽고 쓸 수밖에 없다.
목요일 배캠의 ‘철수는 오늘’이 나를 사색케 한다
이하 배철수 육성의 맨트 -
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작가들은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회상하는 글을 많이 쓴다. 반면 중년시절과 노년시절을 써내는 일은 드문 것 같다. 노벨상 수상작가 존 쿳시의 자전소설 3부작 소년 시절, 청년시절, 서머타임은 엄밀히 말해 작가의 일대기가 아니다. 1940년생인 작가는 회고록 비슷하게 써 내려간 작품에서 1970년대까지만 언급한다. 그는 특히 유년과 청년을 보내며 겪은 고뇌에 집중하여 1940년대 남아공 식민의 역사 1950년대의 인종차별로 얼룩진 사회, 1960년 조국을 떠나 런던에 와서 느낀 불안과 좌절 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회사에 취직하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고 일 년에 두 주뿐인 휴가를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이기는 정당이 법을 바꿀 수 있다면 선거를 왜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누가 공을 던지고 던지지 않을지를 타자가 결정하는 것과 같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못마땅한 소년은 불만과 부정과 회의 속에서 아무도 자신을 건드릴 수 없지만 또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인정하고 만다. 그는 청년이 되자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조국을 등지고 런던에 와서 예술가가 되려 한다.
하지만 런던은 그에게 무표정하고 미로 같고 차가웠다. 방 하나에 찬물만 나오는 싱크대, 더구나 욕실과 화장실은 위층의 공용 시절을 이용해야 하는 작고 초라한 원룸을 그는 룸메이트와 나눠 쓴다. 영국에 올 때 그에게는 이런 계획이 있었다. 우선 직장을 잡고 돈을 모으는 것, 그러다 돈이 충분히 모이면 직장을 그만두고 글쓰기에 전념하는 것. 그는 자신의 계획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 곧 알게 된다. 아무리 예술이 결핍과 열망과 고독을 먹고 큰 다지만 그에게는 친밀감과 열정, 사랑이 필요했다. 철수는 오늘 유명 작가들이 자신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자꾸 뒤돌아보며 고통을 반추하는 까닭을 생각해본다. 나아가 세상의 누구도 청년기를 불안하지 않게 보내기란 어렵다는 보편적 생각에 이른다. 청년시절의 존 쿳시는 라디오 방송 그중에서도 BBC의 제3 프로그램으로 위안을 얻는다. 힘든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라디오를 켜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음악이나 근사하고 지적인 대화를 듣는 일, 제3 프로그램이 장파가 아니라 단파로 방송되었다면 그래서 케이프 타운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면 고국을 떠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가 배철수 형님의 목요일 '철수는 오늘'이었다. 많은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평소에 조건 없이 약간의 위안을 받고 위로가 되는 건 지난 시간의 음악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디제이들의 음성이다. 그리고 소설 정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