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요즘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마요네즈라고 하겠다. 아니 도대체 이렇게 기가 막힌 맛의 마요네즈를 나는 왜 이제야 알았을까. 아니다 오히려 지금 알아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 마요네즈를 라면에 넣어서 먹어봤는데, ‘세상에나'를 몇 번이나 속으로 외쳤는지 모른다.


당최 마요네즈란 무엇이란 말인가. 마요네즈는 어떤 음식에도 다 어울렸다. 김치에도, 고기에도, 땡초와 고추장에도, 소시지에도, 심지어는 그냥 맨밥에 뿌려 먹어도 맛있었다. 초간단에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니. 밥에 쓱싹쓱싹 비벼서 김치를 올려 먹을 뿐인데 굿이다. 마요네즈만 있다면 굳이 밥을 먹기 위해 반찬을 만들고, 찌개를 끓이고, 계란을 굽지 않아도 된다.


요즘에는 식빵에 많이 뿌려 먹는다. 옥수수 식빵에 치즈를 한 장 깔고, 계란 프라이를 올리고 그 위에 마요네즈를 뿌려서 먹으면 고소하니 아무튼 맛있다. 저세상 맛이다. 이렇게 맛있어도 될 일인가. 한 입 먹고 거기에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 행복도 이런 행복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근래에 마요네즈를 몇 통을 먹어 버렸다. 불변의 진리. 이렇게 자주, 많이 먹는다면 살이 찐다. 바뀔 수 없는 진리 중에 진리다. 나 같은 경우에는 마요네즈를 몇 통 먹고 났더니 겨드랑이 쪽의 살이 쪘다. 그리고 마요네즈를 많이 먹으면 몸에 나쁘다고 한다.


계란 역시 너무나 맛있는 음식이다. 계란이 프라이팬 위에서 기름옷을 입고 익어가는 냄새를 따라올 음식은 거의 없다. 계란 프라이가 밥과 만나면 어떤 반찬과도 궁합이 좋다. 밥솥에서 갓 지어낸 밥에 계란 프라이를 올리고 멸치볶음을 넣어서 비벼 먹었던 맛을 잊을 수 없다. 거기에 마요네즈가 있었다면. 아 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계란 역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낙인찍힌 식품이다. 인간이 언제부터 달걀을 먹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박찬일 요리사의 말을 들어보면 달걀이 인간계로 들어옴으로써 요리의 신기원이 열렸다고 했다. 이런 달걀과 마요네즈가 만났으니 얼마나 맛이 있을까. 그러나 인간사 수많은 음식을 관통하는 대명제는 왜 몸에 나쁜 건 전부 맛이 좋다는 것이다. 왜 맛있는 건 전부 몸에 좋지 않을까. 브로콜리나 견과류를 먹고 살이 막 찌고 혈관이 막히고 발이 붓고, 마요네즈와 계란을 먹으면 복부 비만이 예방되고 먹을수록 피가 맑아지고 심장이 튼튼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마요네즈의 맛이 한 번 빠지면 좀체 벗어날 수가 없고, 벗어나기도 싫다. 이걸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까. 게다가 마요네즈의 마법 같은 맛은 너무나 쉽게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간편하게, 간단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게 요즘에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유혹이다. 이런 마법의 식품 마요네즈, 할아버지 입맛의 나까지 반해버린 마요네즈에 들어간 첨가물을 보니 난국이다. 그것도 총체적으로 난국이다.


대두유가 들어가는데 두유의 일종? 하면서 이게 뭔가 하고 찾아보니 대두, 그러니까 콩에서 채유되는 반 건성유다. 주로 미국이나 남미 쪽에서 들고 온다. 정제수가 들어가고, 해바라기유 15%가 들어간다. 해바라기유는 말 그대로 해바라기의 씨앗에서 추출한다. 주로 유럽이나 말레이시아 등에서 수입한다. 발효식초가 들어가고, 난황액이 들어간다. 난황액이라는 건 검색이 되지 않는다. 난황이라는 건 계란 같은 알의 노른자를 말하는 것이라 노른자에서 추출한 액을 말하는 것일 게다. 그리고 어떤 마요네즈에는 난황액 1이 들어가고, 또 난황액 2가 들어간다. 두 가지의 알에서 추출한 액을 넣는 건가? 아무튼 그렇다. 그리고 정제소금이 들어가고, 또 난백액이 들어간다. 난백액은 난황액의 반대?라고 해야 할까. 알의 흰자에 식염이나 당류 따위를 가한 물질이라고 한다. 그리고 애매하게 표기한 첨가물이 있다. 향신료 조제품, 기타 가공품, 복합 조미식품이 들어간다고 나와 있다. 애매한 표기로 인해 찾아봐도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나처럼 이런저런 첨가물을 찾아본 사람이 있어서 복합 조미식품에 대해서 정리해 놓은 걸 보니, 복합 조미식품이라는 건 당류, 식염, 향신료, 단백 가수분해물, 효모 또는 그 추출물, 식품첨가물 등을 혼합하여 분말, 과립 또는 고형상으로 건조 등 가공한 것으로서 식품에 특유의 맛과 향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는 첨가물이라고 나와 있다. 한데 이 안에서도 단백 가수분해물이 뭔지는 일반인들은 또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복합 조미식품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라면 스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또, 이. 디. 티. 에이. 칼슘 나트륨으로 표기를 했는데 EDTA라고 영어로 표기해도 될 것을 한글로 저렇게 표기를 해놨다. 이건 산화방지제로 식품이 변질되는 것을 막는다고 한다. 진탄검이 들어가는데 이건 마요네즈의 끈적한 점성과 물성을 만든다. 그 외에 향미유, 포도당, 효소제제, 간장 믹스 등이 들어간다.


그저 간편하게 먹는 마요네즈 안에는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첨가물이 잔뜩 들어가 있다. 이 엄청난 첨가물이 들어간 것을 알고는 마구 먹을 수 없기에,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마요네즈의 맛에서 벗어나기를 싫고 또 이 맛있는 마요네즈를 곁에 두고두고 먹고 싶어서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기에 돌입했다. 상온에 둔 계란 1개와 식용유와 식초와 머스터드만 있으면 판매되는 마요네즈와 똑같은 맛을 낼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아직 해 먹어 본 적은 없고 영상만 내내 보는 편인데 이렇게 간단하게 만들 수 있기에 조만간 만들어서 먹어보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서 먹으면 살이 안 찐다고 하는데 뭐든 많이, 자주 먹으면 살은 찐다는 것을 염두에 두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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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이 또 하루키 이야긴데요, 이번 이야기는 여러 하루키의 에세이와 소설, 그리고 무라카미 라디오에 나온 비슷한 이야기를 한데 묶어서 해보겠습니다. 작년, 그러니까 2021년 11월 28일 자 19:00부터 19:55분간 진행된 무라카미 라디오로 하루키의 소소한 일상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날 소개된 에피소드는 앞서 여러 번에 걸쳐 피드에 소개를 했고요, 이번에는 오픈카를 탔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도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말을 했는데요, 하루키는 오픈카를 타면 꼭 자유라고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신호 대기 중에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구름의 흐름이나, 날아가는 새라든지, 그러한 것이 꽤 마음에 스며들어 그만 신호가 바뀌는 것도 모르고 멍하게 앉아 있다가 뒤에서 빵 하며 경적을 울리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사실 운전을 하다가 멍하게 하늘을 보는 건 꼭 오픈카가 아니더라도 자주 있는 일이죠. 새의 활공을 보다가 재수가 없는 날에는 새의 똥이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금방 울상이 되고 말 겁니다. 새는 말이죠. 대소변의 배설 통로가 한 군데입니다. 그렇게 진화를 했어요. 그래서 날아가면서 바로 변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먹이를 먹는 순간 위에서 바로 소화시켜 배설 구로 보낼 수 있게 프로그램이 되어 버렸습니다. 간혹 메추리알에 똥이 굳어서 묻은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그런 이유죠. 그래서 새똥도 인간의 변만큼 냄새가 지독합니다. 아마도 하루키는 아직 그런 경험이 없는 모양이지요.


수동기어의 즐거움.


그리고 하루키는 수동 기어 자동차가 위기종으로 가고 있지만 자신은 오토매틱 차는 아무래도 좋아하지 않는다는군요. 하루키는 말합니다. 수동기어의 어디가 좋을까요? 그건 물론 스스로 기어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불편한 것들은, 자동차의 수동 기어만큼은 내 손으로 직접 기어를 넣어서 붕붕 가고 싶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물론 그 결과로 기어를 잘 못 넣어서 엔진을 꺼트리기도 하지만 그런 게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산길에서 무의미한 시프트다운을 하는 기쁨은 수동기어 운전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전적으로 그 즐거움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나의 자동차가 수동기어이기 때문이다. 수동기어로 된 차를 오랫동안 몰고 다녔다. 그래서 오토 기어만큼 편하지는 않지만 수동기어만의 즐거움을 나는 안다.


물론 오르막길에서 대기를 하거나 정차를 하는 순간에는 아직도 등에서 땀이 한 줄기 죽 흘러내리지만 하루키의 말처럼 그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하루키는 오픈카를 타고 수동기어를 모는 사람은 메일을 보내달라고 했다. 이런 동질감의 고독을 위로하자며.


응? 쓰다 보니 높임말에서 어느새 ㅋㅋ. 하루키는 20여 년 전에 라디오 한국의 의뢰로 한국 대학생들이 가장 만나고 싶은 ‘일본인’ 2위에 뽑혔다면서 내심 1위는 누구일까, 하며 궁금해했다. 시간이 지나 독자들에게 이 메일을 받아서 답메일을 보내기도 하고 주고받은 메일을 모아서 출판을 한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아직 깜깜하다. 거기에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받은 메일을 소개하기도 했다.


물론 영어나 일본어로 보내야만 한다. 한국어로 보내봐야 수많은 이메일 중에 어? 이건 한국이군. 하며 그냥 넘길 것이다. 하루키 굿즈를 편집해서 출력해서 만들었더니 정말 아주 예쁘다. 하루키 굿즈를 판매하는 곳에 가서 보니 새끼손가락만 한 열쇠고리가 만 팔천 원, 이만 원 정도 하기에 직접 편집해서 만들기 시작했는데 주위의 반응이 좋다. 판매하는 건 아니고 하루키 팬들에게는 나눠주고 있다.]


또 [노르웨이 숲]에 대해서 하루키가 여러 곳에서 언급을 했는데요, 비틀스의 원곡에 대한 오역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하죠. 원래는 ‘노르웨이 가구’가 맞는다고 합니다. 그건 확실하다고 해요. 하지만 그대로 ‘노르웨이 가구’라든가 ‘노르웨이산 가구’ 같은 제목으로는 할 수가 없었다고 하죠. 아마도 존 레넌이 제목을 ‘노르지안느 우드’라고 했을 때에는 그 뜻이 있었을 거라고 하루키가 말했습니다. 존 레넌은 아무래도 영국인이니까 ‘노르지안느 우드’는 영국에서는 노르웨이산 가구라고 받아들인다고 해요. 그런데 이 제목이 미국으로 넘어가면 ‘노르웨이 숲’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합니다.


이런 변화? 변역? 또 나라마다, 도마다 받아들이는 것이 달라서 하루키는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해서도 에세이에서 언급을 했습니다. 샐런저의 그 소설 속에는 많은 욕이 나오는데 이 욕이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는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는가 대해서 하루키는 에세이에서 말을 했죠. 지금까지 수많은 작가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해서 비평을 써 놓았는데요, 영국이나 미국에서 또는 다른 나라에서, 같은 단어지만 받아들이는 것은 제각각이라는 겁니다. 요컨대 ‘~해야만 한다’와 ‘~하지 않으면 안 된다’처럼 말이죠.


노르웨이 숲이라는 제목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요, 하루키와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호밀밭의 파수꾼, 라는 제목도 나라마다 완전히 다른 거 아세요?


이탈리아: 한 남자의 인생

일본: 인생의 위험한 순간들

노르웨이: 모두들 자신을 위해 그리고 악마는 최후 순간을 취한다

스웨덴: 기억의 순간에 나타나는 구원자

덴마크: 추방당한 젊은이

독일: 호밀밭의 남자

네덜란드: 사춘기


독일이 우리와 흡사한 제목을 사용하고 있고, 네덜란드가 빙빙 돌리지 않고 직설적이네요. 호밀밭의 파수꾼, 하면 늘 기억나는 문장이 있어요. ‘난 하품했다. 이 방에 들어온 이후로 하품이 멈추질 않는다. 이 방이 지나치게 따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졸리게 만드는 것이다’라는 글이 이상하게도 내내 기억에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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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첫 소설로 내용은 오사카 출신의 주인공이 도쿄에서 공부를 하다가 여름방학에 고향으로 와서 친구와 함께 15일 동안 지내는 맥주 일기다.라고 간단하게 말하면 좋겠지만 짧은 책에 비해 내용은 고고(높고 오래되고) 하다.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청춘은 늘 죽음을 생각하고 나이 듦에 대해서 고민한다.


이는 당시의 하루키의 내면과 비슷하다. 하루키는 대학에 입학했지만 학생들은 격렬한 시위와 정부의 폭력이 가미된 진압이 부딪히는 시기였다. 공부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고민이 많았고 그 고민을 위로해 주는 건 일본 순문학이 아니라 학창 시절부터 읽었던 세계문학이었다. 그리고 동네를 다니며 들었던 레코드 가게의 음악들. 재즈와 클래식 그리고 풍부한 팝.


글을 쓰고 싶었던 하루키는 자신 같은 인간은, 평범한 인간은, 막연하나마 작가가 되려고 했던 것에 의미를 가질 수 없었고 흥미조차 나지 않았다. 대학 가는 장기간의 휴업에 돌입하고 하루키는 레코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재즈를 실컷 듣고,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파스타에 대해서 눈을 뜬다. 그때 문학을 전공하는 아내인 요코를 만나 결혼을 해버리는데, 요코를 만나는 그 순간과 과정을 노르웨이 숲에 미도리를 만나는 와타나베를 보며 알 수 있다.


그러면서 빚을 끌어서 우리가 잘 아는 재즈 바 피터 캣을 운영한다. 그러면서 흥미를 잃었던 소설에 대해서 써야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진다. 하루키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여러 번 읽고 카프카의 소설도 학생 시절에 다 읽었다. 그러면서 소설을 쓰려고 하면 이런 작가들보다 뛰어난 소설을 쓰지 못하면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하루키는 야구를 보다가 문득 '왜 내가' 도스토옙스키보다, 카프카보다 잘 써야 하지?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도스토옙스키나 카프카에 초점이 가 있는 게 아니고 ‘~보다’에 초점이 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내가 좋아서 쓰는, 나를 위해 소설을 쓰는 게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 유명한 진구구장의 야구를 건방지게 벌러덩 누워 맥주를 홀짝이며 보다 깨닫게 된다. 나의 이야기, 나를 위해, 누구와 비교하지 않는 소설을 쓰자.


모든 소설가의 첫 소설은 저녁상을 물리고 난 후 식탁 위에서 탄생되었다, 라는 말이 있듯이 하루키는 피터 캣의 장사가 끝난 새벽에 소설을 쓰기 작했다. 그 적막과 그 고요, 그리고 고독을 가득 끌어안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고독하지 않았으면 쓰지 못했을 것이다. 하루키는 그때, 몸은 피곤에 절어 곧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그 몸을 이끌고 소설을 쓰는 그 순간이 아주 행복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쓰는데 문체가 하루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통 우리가 하루키의 문장을 따라 하듯이 하루키 역시 이전에 읽었던 작가들의 문체를 따라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키는 고민 끝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영어로 먼저 적었다.


처음으로 탄생한 영문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보면 아직 발걸음 수준이었다고 한다. 문장도 단순하고 간단명료하며 유치했다. 그런데 그 문체는 아주 신선했고 어떤 작가도 하지 않은 문장이었다. 이 첫 소설은 하루키가 몇 페이지를 영어로 먼저 쓰고, 그걸 다시 일본어로 번역을 해서 차곡차곡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쥐의 3부작의 첫걸음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탄생이 되었다.


비켜간 이야기로 에픽하이의 타블로의 소설집‘당신의 조각들’도 무척이나 좋다. 우리나라에서 전혀 볼 수 없는 문체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주 신선했다. 타블로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생활하면서 이 소설을 영어로 적었다. 내용도 꽤나 독특했다. 또 음악 씬에서 거의 신으로 불리는 이승열 역시 유앤미 블루 시절부터 가사를 영어로 먼저 작사한 다음 한글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사실 유앤미 블루는 유투가 다시 한국적으로 환생한 것 같아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좋은 이유를 찾자면 주인공은 나이가 들어가는 것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 주인공 ‘나’는 글을 쓰는 일을 몹시 고통스러워해서, 한 달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할 때가 있고, 사흘 밤낮을 계속 썼는데 모두 엉뚱한 내용인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일은 즐거운 작업이라고 주인공은 생각한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나이는 어리지만 알게 된 것이 있다. 삶이 힘든 것에 비하면 글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간단하기 때문이라는 걸.



오늘의 선곡은 막막한 대해에 한줄기 빛과도 같았던 소설 속에 등장했던 음악 비치보이스의 캘리포니아 걸스https://youtu.be/KcrbDYe4qL4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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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옛날 핫도그를 먹었다. 음식이라는 게, 먹으면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음식들이 있다. 핫도그도 꼭 그렇다. 요즘의 핫도그는 간식이라기보다 식사대용이라고 해도 될 만큼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를 먹고 나면 어쩐지 식사를 해버렸다는 느낌에 핫도그를 자주 사 먹게 되지 않는다. 핫도그를 너무 좋아해서 없으면 나 죽어! 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상하지만 핫도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자주 먹지는 않는다. 요즘에 나오는 핫도그는 모양이나 맛도 다양해져서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 정말 이만한 크기에 감자튀김이 박힌 핫도그는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핫도그 전문점에서 핫도그를 고를라치면 선택 장애가 온다. 세상은 편리해지고 다양해진 대신 선택 장애 역시 늘어난다. 서브웨이처럼 너무 다양한 핫도그가 생겨났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핫도그는 오래전 기본적인 핫도그가 다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삼겹살도 그렇다. 삼겹살이 세상에 도래하고 난 후 삼겹살 시장은 아주 커졌다. 그러다 보니 삼겹살 집들은 살아남기 위해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와인 삼겹살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된장 삼겹살, 카레 삼겹살, 금을 입힌 삼겹살 등 여러 가지 삼겹살이 나타났었다. 사람들은 맛과 재미를 느끼며 삼겹살을 불판 위에서 구워 먹었다. 그게 한 2000년도에 유행을 탔다. 그러다가 유행이 시들해지더니 싹 다 없어지고 지금은 대부분 기본의 맛, 삼겹살 본연의 맛을 찾아서 먹고 있다. 나처럼 쌈도 안 싸 먹는 인간에게 여러 가지 첨가물이 들어간 삼겹살 구이가 그냥 삼겹살보다 맛이 더 있을 리 없다.


짜장면도 종류가 많다. 유니 짜장, 사천짜장, 간짜장, 백짜장 등 여러 짜장면이 있지만 가장 많이 먹는 짜장면은 그냥 기본적인 짜장면이다. 기본이 가장 맛있고 기본이 맛있는 집은 늘 손님이 많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기본을 찾게 된다. 그건 어떤 음식이나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짜장면을 안 먹은 지도, 코로나 전에 먹어보고는 아직이다. 일 년, 일 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


소 이에바, 핫도그도 그렇게 해서 다시 회귀를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핫도그는 들고 먹는 맛도 맛이지만 핫도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어릴 때에는 눈이 빠지도록 바라봤다. 나무젓가락에 분홍 소시지가 끼워지고 밀가루 반죽에 몇 번 돌려서 옷을 입힌 다음 튀김가루를 묻혀 젓가락을 꼽을 수 있게 제작된 기름통에 하나씩 넣어서 튀긴다. 들어가는 순간 촤르르 하며 경쾌한 소리를 내며 핫도그가 익어간다. 다 익으면 주인이 꺼내서 설탕과 케쳡을 발라준다. 핫도그에 뿌린 설탕은 왜 더 맛있을까. 뜨거울 때 바로 먹는 그 맛. 특히 겨울에 포장마차에 서서 뜨거운 핫도그를 먹으며 어묵 국물을 홀짝이는 맛은 행복이었다. 어릴 때 동네 친구들과 핫도그를 먹으면 먹는 방법도 천차만별이었다. 게 중에는 꼭 소시지는 마지막까지 사수한 다음 한 번에 먹는 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먹어봐야 맛있을 리도 없을 텐데 꼭 그렇게 먹었다. 그리고 그렇게 먹는 방법은 전염이 된다. 너도 나도 소시지 이외의 부분을 먼저 먹고 마지막에 한 번에 소시지를 먹었다.


핫도그는 편의점에서도 팔고 편의점 핫도그 역시 맛있지만 튀김기에서 바로 꺼낸 핫도그만 못하다. 일전에 옛날 핫도그를 먹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편의점에서 튀김기를 갖다 놓고 핫도그를 팔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전자레인지에서 전기로 데운 것보다 훨씬 맛있는 핫도그를 먹을 수 있을 텐데. 새벽에도 말이다. 튀김옷이 붙은 핫도그는 하나씩 포장이 되어 있고 핫도그가 하나씩만 들어갈 수 있도록 제작된 튀김기 위에 핫도그를 넣으면 기름이 튀지 않게 뚜껑이 닫히고 5분 정도 있다가 꺼내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핫도그가 튀겨져 나오는 것이다. 맛도 기존의 핫도그와 똑같다. 아니 그보다 더 맛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새벽에 작업을 하다가 아 출출하군, 하며 집을 나와 근처의 편의점에 쓱 들어가 핫도그를 그 자리에서 튀겨서 냠냠 먹기 때문이다. 새벽의 흐릿한 하늘을 보며 핫도그를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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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미코를 보면 답답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쿠미코를 계속 보게 되는 건 그 답답함 속에서 나의 모습도 얼핏 보이기 때문이다. 쿠미코는 숨이 막힐 듯한 삶의 압박 속에서 선택지가 없다. 쿠미코는 그저 숨을 쉬는 것뿐, 그리고 자신 옆에 인간의 손을 탄 토끼 한 마리뿐이다. 쿠미코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무게에 짓눌러 숨을 쉬고 싶어서 쉬는 게 아니라 숨을 쉴 수밖에 없어서 쉬는 것뿐이다.


그런 쿠미코에게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선택지가 생겨난다. 영화 파고가 허구가 아니라는 것, 파고에 가면 그 돈 가방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쿠미코는 영화 내내 일그러진 표정이나 무표정이나 화난 표정일 뿐이다.


쿠미코는 3천만 명이 사는 도쿄에서 29살이라는 나이라는 것이, 웃지 않는 여자라는 것이,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남자 친구가 없다는 것이, 사회생활을 못한다는 것이 쿠미코가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그녀의 선택처럼 당연시해버리는 사회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쿠미코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쿠미코는 사장의 아내의 생일선물을 사 오라며 받은 법인카드를 들고 파고에 갈 준비를 한다. 분신과도 같은 토끼를 공원에 풀어주지만 토끼 역시 선택지를 선택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쿠미코는 토끼를 보며 자신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다. 결국 토끼를 안고 전철을 타지만 토끼를 전철 안에 두고 내린다. 엉엉 울면서.


쿠미코는 미국의 한 모텔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파고의 돈 가방을 찾으러 다닌다. 운명이 달린 도서관에서 받은 지도 한쪽을 들고 비디오에서 본 부세미 씨가 눈밭에 묻은 그곳으로 이불을 질질 끌며 간다. 만나는 사람 모두가 파고에는 못 간다, 돈 가방이 없다며 쿠미코를 딱하게 여긴다.


쿠미코는 우여곡절 끝에 지도의 그곳에 도착한다. 추위에 얼굴은 얼었고 손가락은 다 터져 손톱 밑으로 피가 흘러나왔지만 돈 가방은 있었다. 하지만 너무 추웠다. 눈보라가 몰아닥쳤고 온도는 심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아침이면 돈 가방을 들고 갈 수 있다, 쿠미코는 피곤에 지쳐 이불을 돌돌 말아서 몸을 덮고 그 자리에서 잠이 든다.


하얀 설원의 아침이 밝아오고 쿠미코는 영화 속 그 자리에 눈을 파내고 돈 가방을 집어 든다. 그 속에는 부세미 씨가 넣어 둔 돈이 가득했다. 쿠미코는 얼굴도 깨끗했고 처음으로 활짝 웃는다. 쿠미코는 자신의 선택이 올바르다는 것에 더 기뻤다. 그리고 옆에 있는 토끼를 끌어안고 가방을 들고 기분 좋게 파고를 떠난다.


쿠미코는 영원히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죽음 같았던 삶 속에서 벗어나 생존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쿠미코의 행복을 보며 안타깝고 애달프고 아름다운 뒷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영화 ‘쿠미코, 더 트레져 헌터’였다.


https://youtu.be/rrsiRTwysYc <= 예고편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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