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포탕은 두부를 가지고 조리한  또는 탕을 말한다. 연포탕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했지만  해보자면, 연포탕의  두부를 가지고 여러 식재료와 함께 끓여서 만든 두붓국의 하나라고 되어 있다. 나는 두부를 좋아해서 두부를 거의 매일 먹는다. 매일 먹는 두부이다 보니 같은 조리로 매일 먹기는 싫기도 하고, 그래서 굽고, 튀기고, 지지고 볶거나 그냥 그대로 뜨겁게 해서 먹기도 하는데, 이상하게도 두부가 가장 맛있는 것은 탕에 풍덩 빠졌을 때다.


또는 찌개나 국에 들어가 있을 때의 두부가 맛있다. 두부는 쉽게 식지도 않고, 식어도 맛있어서 거의 매일 먹고 있다. 매일 먹어서 두부의 맛을 잘 알 것 같지만 시장에서 손두부를 구입해서 먹으면 그건 또 맛이 별로다. 시장의 손두부가 몸에는 더 좋을 텐데 뻑뻑하고 퍽퍽하기도 하고, 아무튼 나는 음식 맛에 대해서는 꽝인 걸로.

두부가 문학적으로 좋은 것은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부자들이라고 해서 엄청난 고가의 두부를 먹지는 않는다. 중국의 북경오리처럼 몇 천 원짜리부터 몇 십만 원짜리 북경오리가 나눠지는 것이 아니다. 두부는 그저 두부일 뿐이다. 물론 비싼 두부도 있겠지만 휴대폰과 비슷하다. 자동차와는 다르다.


두부 하면 또 하루키 아닌가. 그는 갓 사온 두부를 먹어야 한다고 80년대에 쓴 에세이에서 말했다. 하룻밤 지난 두부를 어떻게 먹느냐는 것이 제대로 된 인간의 사고방식이라고 했다. 귀찮으니까 지난 것이라도 먹자는 주의가, 방부제라든가 응고제 같은 것의 주입을 초래한다고도 했다. 두부 장수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침에 된장국에 넣으라고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열심히 맛있는 두부를 만드는 건데, 모두들 아침에 빵을 먹는다든가, 슈퍼에서 파는 방부제가 들어 있는 좋지 않은 두부를 사 먹거나 하니까, 두부장수 쪽에서도 의욕이 떨어져 버리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두부를 만드는 우수한 두부 가게가 거리에서 한 집 한 집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고 하루키는 에세이에서 말했다.


또 하루키는 ‘가장 맛있는 두부는 정사 후에’ 먹는 것이라고 에세이에 말하고 있지만 끝까지 읽으면 반전이 있다. 하루키의 말대로 일본에서 맛있는 두부 집들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해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했는데 그게 80년대다. 정말 그럴까. 집에서 두부를 거의 매일 먹다가 예전에 일본에 한 번 가서 거기서 두부를 한 번 사 먹었는데 도대체 나는 그동안 뭘 먹은 거지? 했던 기억이 있다. 후배와 타 지역에 여행을 가서 배고 고파서 들어간 식당이 오색두부를 파는 곳이었는데 먹어봐야 두부일 뿐인데 두부 치고 가격이 비싸서 놀랐던 기억도 있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두부를 먹기 시작했을까. 지식백과에서 ‘동국세시기’에 연포탕이 등장하는데, 동국세시기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 조선시대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두부를 먹기 시작한 시기가 고려 시대로 올라간다. 고려 시대 문헌인 ‘목인집'을 보면 ‘오랫동안 맛없는 채소 국만 먹다 보니 두부가 마치도 금방 썰어낸 비계 같군. 성긴 이도 먹기 에는 두부가 그저 그만. 늙은 몸을 장으로 보양할 수 있겠도다’라고 쓰여 있다.


후에 ‘세종실록’에는 명나라 황제가 ‘칙서가 이르거든 특히 두부 만드는 솜씨를 익히 보내주기 바라오’까지 되어있다. 우리나라의 두부가 이렇게나 역사가 깊다. 물론 맛도 깊다. 연포탕이라는 이름은 원해 두부가 들어간 국을 칭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난중일기에 ‘아침에 초계 군수가 연포탕을 마련하여 와서 권하지만....’라는 부분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먹었다는 연포탕은 두붓국에 가깝다. 조선시대 가정생활백서 ‘산림경제’에 연포탕을 표기해놨는데 연포탕은 [두부를 잘게 썰어 한 꼬치에 서너 개 꽂아 흰 새우젓국과 꿀을 타서 그릇에 끓이되, 배를 그 위에 덮어 소금물이 스며 나오게 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이 먹었다는 연포탕은 쇠고기가 들어가고 주재료가 여러 갈래로 썬 두부였다. 해서 감칠맛은 배제되어 있고 두부의 향과 맛이 풍부했다고 전해진다.


맨 위의 사진 속, 집에서 끓인 국에는 밑에 쇠고기가 들어있다. 그래서 두부의 슴슴한 맛과 새우젓의 깔끔하고 시원한 맛과 쇠고기의 육즙이 살짝 스며든 맛이 난다.



두부와 와인은 한 몸처럼 어울림


햄을 다 태우면서까지 구워서 두부와 함께 먹음


좀 멀리까지 가서 구입한 두부와 양파 무침


두부에 명란젓을 곁들여서 먹으면 정말


약간 멀리까지 가서 구입한 두부. 맛있음. 두부만 먹으면 될 정도로 맛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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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2-05-18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하..저도 두부 좋아요. 텁텁한 무맛인 듯, 무앗아닌..그 어떤 말로 규정짓기 어려운 맛이랄까요? ㅎㅎ 저도 오늘부터 더 열심히 두부 먹어야겠어요. 건강에도 좋으니

교관 2022-05-19 11:08   좋아요 1 | URL
두부 맛있고 좋아요 ㅎㅎ. 근래에는 가장 저렴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음식이 아닌가해요
 


계절을 입 안으로 맛보는 오월이다. 오월도 벌써 반이나 지나갔다. 오월 이전까지 붉은 음식을 먹었다면 – 요컨대 찌개나 라면이나 탕 같은 국물음식이 추워서 찾게 되었다면 오월이 되면 계절의 눈높이에 맞는 음식을 찾게 된다. 물김치는 먹으면 푸른 푸른 녹음이 입안으로 후루룩 들어와 시원하다. 한 여름의 에어컨 바람 같은 시원함과는 다른, 낮에는 햇빛 때문에 조금 더워 겉 옷을 벗어야만 하지만 아침은 선선하고 밤이 되면 서늘해서 겉옷이 필요한 날의 시원함이다. 이제 곧 히사이시 조의 썸머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질 것만 같은 초여름의 전초전 같은 시원함이다. 호로록하고 물김치의 국물을 마시면 봄나물의 향이 입안에 확 퍼진다.


봄나물로 물김치를 해서 봄나물을 씹으면 약간 쌉싸름한 맛이 난다. 물김치의 시원한 맛과 그 쌉싸름한 맛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정말 이런 늦봄에 먹는 물김치의 상쾌한 맛은 우리나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이 아닐까.


이렇게 상큼한 물김치를 맛보는 계절이 오면 늘 어린 시절 손을 잡고 따라다녔던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먹기 싫은데 자꾸 숟가락으로 물김치를 떠 먹여 주었다. 나는 어린 시절 어떤 사정으로 집에서 떨어져 외할머니 손에서 몇 년을 살았다. 외가가 있는 곳은 온통 계곡과 산과 소똥뿐이었다. 그곳은 불영계곡이 있는 곳으로 외지에서 왔다고 동네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거나 둘러싸여 맞아서 울고 있으면 외할머니가 원더우먼처럼 날아와서 아이들을 혼내 주었다.


외할머니는 밖에서 놀다가 땀을 흘리고 들어온 나에게 시원한 물김치에 국수를 삶아서 말아 주었다. 라면 끓여 달라고 막 그랬는데 할머니는 이게 훨씬 맛있다며 나에게 떠 먹여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매년 오월에 물김치를 먹게 되면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외할머니를 떠올리기 위해서라도 이 계절에는 물김치를 먹는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고 한 반찬일 요리사의 말처럼 물김치에 대한 나의 추억 속에는 외할머니가 오롯이 있다.


물김치와 더불어 이제부터 오이무침이나 오이물김치를 먹는다. 이렇게 먹으면 보통 여름이 끝날 때까지 오이를 대여섯 박스 정도를 먹는다. 여기서 말하는 박스는 라면박스가 아니라 보통 요만한 택배박스 정도의 박스다. 오이는 보통 그런 박스에 팔기 때문에 그런 박스로 대여섯 박스를 먹게 된다. 누군가 밖에서 무슨 음식 좋아해? 그거 사줄게,라고 해서 나는 오이를 좋아하니까 오이요리를 사줘,라고 하고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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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내내 먹었던 라면은 안성탕면이었다. 나는 오뚜기 라면이 좋았는데 아버지가 안성탕면을 늘 집에 사놓아서 아무래도 있던 라면을 끓여 먹게 되었다. 좀 우습지만 친구의 집에 가도 다른 라면에 비해 안성탕면이 선반에 월등하게 많았다. 그래서 안성탕면을 많이 먹었다. 그리고 학교 앞 강원 분식집에서 맛있게 먹었던 라면도 안성탕면이었다. 거기 이모는 늘 위에 고춧가루를 뿌려 주었는데 나는 고춧가루를 빼 달라고 해서 먹었다. 분식집의 라면은 집에서 끓여 먹는 라면보다 10배는 맛있었다.  


주말에 친구 집에 갔을 때 친구의 누나가 있으면 누나가 라면을 끓여 주었다. 얼굴이 꼭 강수지를 닮았던 누나는 라면에 파를 많이 썰어 넣어서 끓여 주었다. 라면만 끓여서 먹지 말고 파도 많이 넣어서 먹어야 해.라는 다정한 말을 하며 안성탕면을 끓여 주었다. 라면에 계란과 파가 많이 들어가면 나는 맛이 있는데 파에서 나오는 조금은 달달한 맛과 함께 5개 이상 라면을 끓이면, 끓여서 먹는다는 맛보다는 삶은 쪽에 가까운 맛이 그 라면의 맛이었다.  뭐 어쨌거나 친구들과 한 밥상에 둘러앉아 영화를 보며 먹는 라면 맛은 최고였다. 그때 우리는 어른들 몰래 야동을 보고 있었는데 친구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방문을 두드리면 재빠르게 다른 화면으로 전환하는 건 연습으로 인해 잘했다. 그러나 일어나서 인사를 해야 했는데 모두가 바지 앞섶 때문에 엉거주춤하게 일어나야 했다. 아마 어른들은 눈치 못 챘겠지. 그럴 거야. 아들의 친구들을 너무 좋아했던 친구 어머니는 방에서 빨리 나가지 않고 이것저것 질문이 많았고 라면 말고 먹고 싶은 걸 이야기하라고 했고, 친구 누나는 빨리 라면 먹여서 집 밖으로 내쫓아서 사춘기 냄새를 없애려 했다. 입으로는 라면을 먹고 뇌와 시선은 야동으로, 신체는 신체대로 반응을 하는 인간이란 참.


그렇게 안성탕면을 주로 끓여 먹었다. 라면을 끓일 때 안에 넣어봐야 계란 정도였다. 그러다가 군대를 제대하면서 안성탕면은 멀리하게 되었다. 라면의 종류가 많아졌고 골라 먹는 재미도 늘어났다. 라면에 식초를 넣어서 먹기도 했고, 된장을 풀어서 먹기도 했다. 아주 매운 라면에 토마토를 숭덩숭덩 잘라서 끓여서 먹기도 했다. 기가 막힌 맛이었다. 삼겹살을 구워 넣어서 먹기도 했고, 먹다 남은 후라이드를 넣어서 같이 끓여 먹기도 했다. 라면은 어떻게 먹든 맛있었다. 그러다 보니 안성탕면을 기본적으로 끓여 먹는 것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라면을 끓여 먹을 때는 항상 옆에 간 마늘과 후추, 그리고 식초 내지는 촌에서 받아온 고춧가루가 있었다. 라면에 갈아 놓은 마늘을 넣으면 맛이 확 달라진다. 아주 풍성해진다. 마치 무슨 탕이나 찌개를 먹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부대찌개라면도 나오고 찌개 라면에 햄과 소시지를 넣어서 먹으니 역시 맛있는 것이다.


그렇게 10년이 넘게 안성탕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이것저것, 다른 라면을 여러 방식으로 먹었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덮친 그 해 4월에 큰 이모의 상을 치르게 되었다. 처음 겪는 감염병 때문에 나라가 엉망진창이었다. 모두가 그러했겠지만 그 당시 포항은 난리도 아니었다. 큰 이모 장례식을 포항에서 했다. 그 장례식장에 두 사람의 장례식이 있었는데 그 당시 경조사로 인해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감염병 방역법으로 금지가 되었다. 그래서 두 장례식에는 가족들만 오롯이 장례식장을 지켰다. 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음식을 준비하지도 않고 그렇게 가족들만 모여서 이야기를 하며 장례식을 치렀다. 그때는 아직 초기라 병원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는데 나는 라면을 주문했다. 그때 라면이 그냥 기본적으로 라면만 끓여서 나오는 거였다. 먹었는데 아, 하는 맛이었다. 라면의 맛이었다. 간 마늘이나 뭣도 들어가지 않고 라면이 가지고 있는 그냥 라면의 맛에 놀랐다.


근래에는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면 안성탕면을 끓여 먹게 되었다. 안성탕면보다 맛있는 라면이 많겠지만 이상하게도 안성탕면을 찾게 되는 건 아무래도 그리운 맛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학창 시절에 그렇게 먹었던 그 맛. 안성탕면은 정말 그리운 맛이었다. 어느 순간 이제 안성탕면은 맛이 없어, 훨씬 맛있는 라면이 많은데 왜, 하면서 눈을 돌렸지만 결국에는 돌아와 버렸다.


맛있는 라면은 많다. 하지만 뭐랄까 맛있는 음식이 흘러넘치는 요즘, 맛있는 음식을 아무리 먹어도 그 맛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른 맛있는 음식들이 눈을 돌리면 도처에 널렸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기억하고 있던 안성탕면을 먹어보니 그립던 냄새, 그립던 촉감, 그립던 시간, 그립던 소리까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고작 라면 하나 끓여 먹으면서 뭘 그런 거창하게,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는 대부분 고작 요만큼 작은 것에 마음이 기울고 작은 것에 싸우고 행복해지며 상처받고 눈물을 흘린다. 그 작은 행복이 계속 이어진다면 인간의 생이라는 게 거대한 구멍은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안성탕면에 대해서 또 하나 기억나는 건 지금은 믿는 종교가 없지만 중학교 때 교회를 다녔다. 어쩌다가 믿음이 없는 내가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중학교 때에는 매주 착실하게 교회에 나갔다. 그리고 교회에서 착실하지 않게 선생님 말도 잘 듣지 않고 기도가 내 차례가 되었을 때에는 도망을 갔다가 누나들을 괴롭히려고 교회의 어딘가에서 꿍꿍이를 하곤 했다. 중학교 때에는 장난이 심해서 어른들에게 혼나기를 여러 번이었다. 스테이플러의 스테플러심을 꼬아서 지뢰를 만들어 누나들이 앉는 의자에 뿌리기도 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이쪽저쪽에서 아야,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그리곤 혼이 났다.  


교회 앞에는 작은 분식집이 있어서 우리는 그 분식집에서 라면을 자주 사 먹었다. 그 집도 안성탕면으로 라면을 끓여 주었다. 라면을 먹으러 가면 중학생 주제에 연애를 하던 기범이가 진영이와 함께 나란히 앉아서 안성탕면 한 그릇을 놓고 꽁냥꽁냥 하던 꼴베기 싫던 모습이 떠오른다. 라면이 불어서 국물을 다 빨아먹었는데도 둘이 서로 얼굴을 보며 좋아 죽고 앉아있다. 중학생 주제에. 국물을 다 빨아먹어서 퉁퉁 불은 라면이 불쌍해 보였다. 그런데 일주일 뒤에 라면 먹으러 가면 옆에는 진영이가 아닌 혜정이와 앉아서 또 꼴베기 싫은 얼굴과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집에서는 단무지를 주었는데 이상하게 라면을 먹지 않고 불어 터지는데 단무지는 다 먹고 빈 접시만 보였다. 중학생 주제에. 아무튼 이상한 놈이었다. 언젠가 한 번 그 교회 앞을 조깅하면서 오다 보니 분식집은 없어졌고 지금은 어른들을 상대로 하는 동네 호프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안성탕면을 먹기 전에는 위에서도 말했지만 여러 식재료를 넣어서 먹었다. 그렇게 먹으면 역시 맛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근래에 안성탕면을 그냥 끓여 먹게 되면서 거의 아무것도 넣지 않고 있다. 삶은 계란이나 계란 프라이, 남은 미역국을 넣어서 먹기도 했지만 새로운 맛에 눈을 떠버린 기분이다.


주제에 맞게 오늘은 라면인건가 https://youtu.be/l4DXQFYjkgY <= 클릭 

이 노래의 배경그림은 2018년에 서울경인초등학교 6학년 3반 아이들이 노래 가사에 맞게 그림을 그렸는데 그걸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정말 음악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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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5-17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억의 왜곡인지 모르지만 비싸고 고급스러운 것보다 싸고 투박한 것들이 기억에 오래 갑니다.
전 대학교때 돈이 궁해 구내 식당에서 점심으로 사먹던 오백원 짜리 라면과 가끔 짬장이 뭔 좋은 일이 있는지 야간 근무 교대때 가끔 끓여주던 군대 라면이 기억에 남네요.

교관 2022-05-18 10:33   좋아요 0 | URL
정말 그러네요. 작고 소박한 것들이 기억에 많이 남네요. 불량식품 사먹었던 것까지ㅎㅎ
 


하루키는 에스콰이어지에 거의 처음으로 길게 음악에 대한 인터뷰를 했다. 스피커에 대한 이야기, 시디와 레코드가 주는 음악적 정감, 그리고 비틀스와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에 관한 - 브라이언 윌슨이 만든 세기의 앨범 팻 사운드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전에 처음으로 온 마음을 빼앗긴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재즈 그리고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또 학생 때 자주 들리던 레코드 가게와 그 주인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진다.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역시 좋다. 팻 분도, 냇 킹 콜도 좋지만 어쩐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찾게 된다.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재미있는 이야기는(전혀 재미없을 수도) 20세기의 캐럴은 머라이어 캐리에게 다 내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이클 부블래가 나타났다. 이름도 이 따구인, 부블래 씨가 우리나라 사람이고 부블래 씨처럼 노래를 부르면 우리나라에서는 인기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블래 씨는 미국에서 인기를 얻고 죽죽 뻗어나갔다. 그러다가 부블래 씨가 캐럴을 불렀다.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은 새로운 탄생이었고 부블래 씨가 부르는 캐럴은 고전을 다시 부르는 것이다.


21세기에 고전 캐럴을 이렇게 맛깔스럽게 부를 수 있는 가수는 부블래 씨가 정말 딱이다. 그러다 보니 부블래 씨가 그만 빙 크로스비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부르는 시대로 가서 같이 듀엣을 부르고 돌아왔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2012년에 일어난 일로 전 세계는 그때를 기쁨의 충격적인 날로 지정 발표했다.


부블래 씨는 그만 50년대 빙 크로스비가 한창 크리스마스 캐럴을 무대에서 부르고 있는데 그 무대로 난입을 한 것이다. 그리고 세기의 빙 크로스비를 실제로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빙 크로스비 곁으로 다가갔다.


부블래 씨는 빙 크로스비에게 인사를 하며 같이 노래를 하고 싶다고 말하자마자 팽 당한다. 너무나 당연하다. 이 듣보잡은 누구이기에 나와 듀엣을 같이 하자는 거야?라고 빙 크로스비가 생각을 했다.


“저 이 곡을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 함께 줄곧 들었고 6살 때부터 빙 크로스비 씨를 존경해서 왔습니다. 이 아름다운 곡을 함께 할 수 있을까요? 같이 부른다면 정말 영광입니다”라고 했다. 빙 크로스비는 크리스마스라는 기쁨의 날에 흔쾌히 듀엣을 부르기로 하며 부블래 씨와 같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불렀다.


그리고 두 사람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이어진다. 아아 이토록 따뜻하고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부블래 씨는 소원 하나를 이루고 다시 21세기로 와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다는 이야기.



https://youtu.be/FMyBJAZFiqI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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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을 맞이해서,는 개뿔이고, 가정의 달 좀 이제 없앴으면 좋겠다. 중간에 껴서 어버이날, 어린이날, 스승의 날에 결혼식에 작작 좀 하자! 대한민국아.라고 외치고 깊은 밤. 오늘 같은 날과 잘 어울리는 영화가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이 아닌가 싶다. 


이 영화는 홀로된 아버지를 두고 결혼 생각이 없는 노처녀(27살이라 노처녀라고 하기에는 이상하지만 그 당시에는) 노리코가 아버지가 재혼을 한다는 말에 흥! 하는 뭐 그런 이야기다. 이 영화가 1950년이 되기 전에 만들어진 영화인데 이혼 한 번 한 것은 원스트라이크로 별거 아닌 걸로 나온다. 결혼에 대한 회의와 재혼에 대한 의식이 당시 일본 사회와 부딪힌다.

노리코는 주위에서 결혼을 시키려는 것을 싫어한다. 아버지를 홀로 두고 결혼해 버리는 게 너무 싫다. 이런 출발은 이후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 왕왕 나타난다. 그래서 노리코의 아버지와 고모는 아버지가 재혼하려는 것처럼 노리코를 은근슬쩍 속이려 든다. 아버지가 재혼한다는 사실도 싫은 노리코. 

두 가지의 마음이 부딪히는 노리코다. 아버지를 홀로 두는 것도 싫지만 아버지가 재혼을 하는 것도 싫은 노리코. 이때 노리코를 연기한 하라 세츠코의 표정이 극단적으로 바뀐다. 영화 시작부터 아름다운 웃음을 마음껏 보여주는 노리코지만 아버지의 재혼 앞에서는 아버지를 빼앗긴다는 생각 때문에 표정이 굳어 버리는데 무섭기까지 변한다. 

하라 세츠코는 동경 이야기(후에 동경 가족으로 리메이크)에 나올 때 보다 훨씬 예쁘다. 하라 세츠코는 20년 출생으로 2015년에 죽었다. 일본 영화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인데 40살 즈음에 더 이상 늙어가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오즈 감독의 장례식장에 나타난 이후 영화에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성녀로 늙어 죽었다. 46년에 시세이도 화장품 광고 포스터에 등장했다. 이 포스터는 일본 영화 속에 소품으로 왕왕 등장하기도 한다. 

흑백 영화의 히로인 그레타 가르보, 일본의 그레타 가르보로 불린 하라 세츠코는 만춘에서 당시 기성세대에 반하는 젊은 사람을 잘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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