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는 어떻게 번 아웃이 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루키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가 떴다. 하루키는 어째서 번 아웃 없이 계속 작품을 써내는가? 하는 것이다.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이에 대해서 언급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번 아웃은 절대 그렇지 않을 것 같았던 미드 ‘덱스터’에게도 온다. 인간미 철철 넘치는 연쇄살인마 덱스터의 긴 시리즈가 죄다 재미있었다. 원작대로 끝을 내려고 했는데 전 세계에서 덱스터의 광풍에 휘말려 10년을 지속하게 되었다.


덱스터는 애인인 리타에게도, 리타의 아이들에게도, 동생인 데브라에게도, 친구인 엔젤과 마스카(한국인)에게도, 경찰서 내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며 자신을 가리고 다정한 이웃으로 지낸다. 애인인 리타가 부르면 전기톱으로 살인마들을 썰어대다가도 달려간다.


덱스터는 명석한 두뇌를 가진 냉철한 혈흔 분석가로, 사랑스러운 애인으로, 다정한 아이들의 아빠 대신으로도, 그리고 연쇄살인마로도 완벽하려 한다. 인간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데 인간의 감정을 느끼려, 최선을 다하다 보니 시즌 2에서 번아웃이 오게 된다. 안 하던 실수를 하고 결국 라일라와 독스 경사에게 자신의 본모습을 들키고 만다.


번아웃이라는 건 최선을 다하려 너무 열심히 하다 보면 오게 된다. 낚시도 취미로 할 때에는 너무나 재미있지만 이게 먹고사는 일로 바뀌면 만만찮아진다. 모든 면에서 완벽하려고 하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하다 보면 번아웃은 자동적으로 오게 된다. 번아웃이 왔을 때 훌훌 털고 일어나는 사람이 적은 이유는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이다. 쓰러지면 일어나면 되지만 주저앉아 버리면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고 싶지 않을 때나 쓰고 싶은 마음이 샘솟지 않을 때는 펜을 놓아 버린다. ‘소설 안 쓴다고 죽을 것도 아닌데, 뭘’ 하는 마음으로 모른 척 살아가는 것이 하루키가 번아웃의 세계에 빠지지 않는 이유다.


그렇지만 하루키가 이렇게 자신만의 루틴을 정하고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포기한 것들이 있다. 그중 가장 큰 것이 자식이다. 하루키는 자식이 없다. 아이가 태어났다면 바로 성인이 될 수 없으니 성인이 될 때까지 돌봐야 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거기에 쏟아부어야 하는 정성과 신경은 우주만큼 크고 넓다. 가정을 지키고, 하는 일이 잘 되고, 아이들이 올바르게 자라게 돌봐주려 최선을 다하는데 번아웃이 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하루키도 아이들이 있었다면 번아웃을 달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건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도 잘 나온다. 장편 소설에는 아이들이 매번 등장하고, 또 엄마와 그 아이와의 관계를 하루키식으로 풀어놨다. 그걸 읽으면 아이와의 간극을 좁히는 일이 힘들다는 걸 하루키는 소설을 통해 말을 하고 있다.


멀리 있는 하루키를 보지 말고 가까이 있는 김영하 소설가를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김영하 소설가 역시 번아웃 없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글을 쓰고 있고 작품을 내고 그림을 아이패드로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의 책 표지를 만들고 전국을 돌며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건네주고 위로를 한다. 소설가 김영하는 문학은 태생적으로 개인주의적이라고 했다. 이기주의가 아니다. 자기중심적인 글을 쓰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평가는 타인이 하면 된다. 비난은 튕겨내고 비판을 받으면 된다.


번아웃이 온 사람들의 특징은 대체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한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매번 최선을 다한다. 책도 공격적으로 다독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다가 적게 읽으면 내가 왜 이렇지? 왜 내가 이것밖에 못 읽지? 할 수도 있다. 최선을 다 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우리는 하루키를 따라 할 필요는 없다. 하루키는 4 반세기 이상 철저한 자기 관리의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줬다.


진실이란 언제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상처 입힌다. 당신을 너무 사랑해요,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위해서 늘 거짓말이 필요했어요.


최선을 다 하다 보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 하는 데까지 하는 게 중요하다. 하는 데까지 해보고 안 되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하고, 그때도 안 되면 말지 뭐,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우리는 그동안 살면서 그걸 터득했기에.






노르웨이 숲에 나왔던 재즈 한 곡 Antonio Carlos Jobim - The Girl From Ipanema https://youtu.be/AWxyzVbiT98


비는 계속 내렸다. 이따금 천둥마저 쳤다. 포도를 다 먹고 나자 레이코 씨는 여느 때처럼 담배에 불을 댕겨 물고, 침대 밑에서 기타를 꺼내어 치기 시작했다. <데사피나도>와 <이파네마의 소녀>를 치고, 그리고 바카락의 곡이며 레넌과 매카트니의 곡을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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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의 밥상에 마요네즈가 빠지면 이상하게 되었다. 정말 마요네즈에 진심을 다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사진으로 더 올리지 못했지만 찌개에도 마요네즈를 넣어서 먹기도 했고, 아무튼 커피 빼고는 마요네즈라는 마법은 모든 음식에 다 어울리는 것 같다.  


덱스터 시즌 3에서도 리타와 슈퍼에서 장을 볼 때 덱스터와 아이들은 마요네즈를 빼먹지 않는다. 덱스터 원작에는 이 어린아이들이 사이코패스로 나온다. 개를 죽이고도 아무렇지 않고. 아이들은 원래 있는 그대로를 표출하니까 아마도 사이코패스적인 경향이 어쩌면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교육과 훈련을 통해 감정을 조절하는 사람으로 커간다. 덱스터는 긴 시리즈를 하면서 극 중에서 티격태격하는 동생 데브라와 실제로 꽁냥꽁냥 하는 사이가 되어서 결혼까지 한다. 그러나 3년인가? 만에 이혼을 한다. 그래도 계속 시리즈에서 다정하게 나온다.  


그런 사이코패스 덱스터의 가족들도 마요네즈를 잊지 않는다. 미국 사람들은 특히 마요네즈를 많이 먹을 것 같다. 그들의 식탁이 한국 식탁처럼 여러 반찬과 음식들을 다 갖춰 놓고 매 끼니 먹지는 못하니까 간단하게 마요네즈를 휙 뿌려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지 않을까.


마요네즈는 정말 인류가 발명한 것 중에서 최고가 아닐까 싶다. 아스피린, 베이비오일이나 바셀린, 계단, 그리고 마요네즈가 내가 손꼽는 발명품들이다.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다.


계란 프라이에 뿌려 먹으면 계란을 고소한 맛이 두 배, 아니 열 배가 되는 것 같다. 계란 프라이를 평소에 4개를 먹는다면 마요네즈를 뿌리면 40개는 거뜬하게 먹을 것만 같다. 살찌겠지 ㅋㅋ.


또 한 번은 그저 양배추에 마요네즈를 뿌려서 오물오물 먹었는데 이거 어떡할 거야. 양배추를 씹을수록 나오는 단맛에 마요네즈의 맛이라니. 양배추는 그냥 먹어도 맛있는데 이렇게 마요네즈를 뿌려 먹으니 몇 통은 그대로 먹을 것만 같다. 마요네즈를 근래에 좋아하게 된 이유를 억지로 같다 붙이자면 소화가 잘 된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좋지 못한 위장 때문에 조금만 빠르게, 조금만 많이, 단단한 음식이나 자극적인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는다. 단순히 소화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소화가 안 되면 속이 거북하고 혈압도 오르고 두통이 온다. 그런 위장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먹는 것이 한 때는 참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친구들과 한창 고기를 먹을 때, 고기는 먹고 싶은데 친구들의 속도를 따라가면 그날 밤에는 어김없다.  


이런 소화가 안 되는 것이 담배 하고도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담배를 못 피운다. 담배를 안 피우는 게 아니라 못 피우는데 담배를 피우면 먹은 밥을 전부 토해낸다. 거참 이상한 일이다. 그러니까 담배를 피우면 소화가 전혀 안 된다.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억지로 몇 대 피우면 먹은 음식을 다 게워내야 했다. 세상에 이런 신체를 가진 사람이 있을까. 담배가 해롭다고 하니 그래서 피우지는 않지만 담배를 못 피운다.


이렇게 썰어 먹는  유튜브 영상 보면서  먹기 좋은 각이다내가 유튜브로 자주 보는  영화채널들이다들어가서 보는 몇몇 유명 영화 유튜브가 있는데요컨대 ‘거의 없다 ‘라이너 ‘달콤 살벌한 영화 이야기’ 같은 채널들이다이들의 공통점은 제목으로 어그로를 끌지 않는다. ‘충격’  ‘실체’ 같은 단어로 현혹하지 않고 내용도 좋다역대급이나 1위이니 최고니 같은 제목으로 클릭을 하게 만드는 수많은 영화 유튜브가 요즘 계속 늘어난다 며칠은 마요네즈를 먹으며 마요네즈 영상을 보고 있다하하하 인생이란 그런 거겠지마요네즈를 먹으며 인생을 논하게  줄이야.


요즘 미나리 철이다. 미나리가 정말 맛있다. 얼마나 맛있으면 구겨지듯 어색 어색을 장착하고 광고하던 이무진의 ‘미나리싱싱주’까지 나올 정도다. 얼마 전에는 코미디언 이용식으로 바뀌었던데, 이무진 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웠다. 미나리 주 광고가 다른 소주 광고에 비해서 떨어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돈 때문이겠지. 하지만 막걸리 광고들도 소주 광고에 비하면 조금은 어색하지만 막걸리는 지역별로 인기가 많다. 내가 사는 곳의 막걸리 광고는 이만기 형님이 한다.

미나리무침에 마요네즈를 뿌려 먹어도 정말 맛있다. 이게 얼마나 맛있냐면 미나리 무침이 약간은 간이 되어서 짭조름하다. 거기에 밥과 마요네즈를 넣어서 같이 비벼 먹으면 아주 맛있다. 요즘은 미나리 풍년이니까 자주 이렇게 먹고 있다. 미나리 싱싱 주 한 번도 못 먹어 봤는데 같이 마시면. 미나리 철이 되면 나는 아주 많이 미나를 먹는데 미나리는 많이 먹어도 소화가 잘 된다.


이건 뭐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조합이다. 명란젓과 마요네즈의 만남이다. 거기에 밥을 넣어서 같이 먹으면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마요네즈는 짭짤한 반찬과 만나면 그 맛이 더 극에 달아하는 것 같다. 마요네즈와 와사비와 땡초를 같이 버무려 노가리를 찍어 먹으면 맥주가 꿀꺽꿀꺽 들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반찬이 아무것도 없을 때 계란 프라이를 해서 그 위에 마요네즈만 뿌려도 아주 맛있다. 거기에 쓰디쓴 싸구려 와인 한 잔을 곁들여 먹어도 좋다.


호박전과 양파전에는 마요네즈다. 간장 양념도 맛있지만 눈이 가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마요네즈를 뿌려서 먹게 된다. 편의점에서 파는 6천 원짜리 와인에 탄산수를 부어서 얼음을 넣어서 같이 마시면 더 맛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두루치기에는 마요네즈다. 마요네즈를 뿌려서 휘휘 저어서 먹는 게 아니라 이렇게 고기 위에 마요네즈를 뿌린 다음에 고기를 그대로 건져서 먹는다. 넣은 고추가 아주 맵기 때문에 매운맛도 줄여주고 고기의 맛도 끌어올려준다. 아무튼 고기에 마요네즈를 뿌려 먹으면 이상하게도 고기를 먹어서 소화가 안 되고 하는 게 없다. 그건 어떻게 봐도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고등어구이에 뿌려 먹는다. 내가 좋아하는 고등어구이는 구워 놓고 하루나 이틀 정도 지난 고등어다. 비린내가 아주 많이 나는 고등어구이를 좋아하는데 이렇게 마요네즈를 뿌려 먹으면 비린내는 덜 한데 비린내가 맛있게 난다. 보고는 싶은데 만나기는 싫다, 그 식당이 좋은데 거기까지 가는 게 싫다? 와 비슷한 말인가. 아무튼 마요네즈를 찬양하자면 그렇다.


그러나 이렇게 마요네즈에 빠져서 몇 통씩 먹게 되면,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살이 찐다. 나는 최소 10년 정도는 늘 비슷한 몸을 유지하고 있다. 조깅을 거의 매일 하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조깅에 대한 글을 많이도 올렸었다. 마요네즈를 많이 먹는 요즘은 조깅의 강도를 더 높일 수밖에 없다. 시간적으로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 조깅을 하면서 걷거나 몸을 푸는데 시간은 같으나 오르막 길을 코스에 넣어서 계속 달린다든가, 반환점을 돌아서 올 때는 어슬렁 걸어서 오는데 요즘은 반환점을 돌아서도 계속 달려서 오거나 빠르게 걷거나 한다.

이렇게 맛있는 마요네즈를 계속 먹으려면 어쩔 수 없다. 작년은 재작년과 비슷한 몸을 유지했는데 올해는 때 이른 더위 탓에 5월에 집 앞 해변에서 훌러덩 벗고 책을 읽었는데 겨드랑이에 살이 붙었다. 조깅을 하고 작년과 똑같은 옷을 입고 사진을 찍어보면 아직은 유지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 겨드랑이 쪽에는 살이 붙어있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맛있는 걸 매일 먹을 수 있는 삶이란 더 없는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맛있는 걸 먹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귀찮을지도 모르지만 생각해보면 귀찮은 걸 귀찮아하지 않으면 대체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멍 때리는 것도 좋지만 하루 종일 멍만 때리다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가끔 생긴 여유가 소중하다는 걸 알지 매일이 여유롭다면 그게 여유보다는 불안으로 점철될지도 모른다.


조깅은 운동화와 달릴 수 있는 길만 있으면 되니까 너무 좋다.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니니 달리다가 힘들면 걸으면 된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앙 다물고 영차영차 달리면 된다. 그러면 이 맛있는 마요네즈를 매일 먹을 수 있다. 언젠가는 마요네즈와도 이별을 하겠지만 지금은 열심히 찾아서 먹고 있다.

올해는 다른 해보다 빨리 피부가 탔다



이거 어쩔 거야, 이 맛 이거 어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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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6-06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교관님의 각선미는 언제 보아도 좋은데요.
더구나 적당히 탄 피부에서 건강미가 느껴 집니당~ㅋㅋ

교관 2022-06-07 11:32   좋아요 0 | URL
여름의 피부는 태워야 맛이죠 ㅋㅋ
 


맥주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무라카미 라디오 책 버전의 표지 디자인은 참 마음에 든다. 근래에는 실제 라디오 방송이 무라카미 라디오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무라카미 라디오의 출발은 아무래도 이 디자인이 있는 책이다. 디자인을 편집했는데 마음에 든다. 꼭 호크니의 60년대 초기작을 보는 것 같다.


하루키는 무라카미 라디오를 통해 에세이는 ‘맥주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소설가이니 소설을 끝내고 나서 다음 소설을 적기 전까지의 터울을 에세이를 쓰면서 보낸다. 나는 맥주를 못 마셔서 우롱차밖에 안 마셔, 하는 사람도 많으니,라고 했는데 사실 제약회사의 지갑을 뚱뚱하게 채우는 효자는 바로 비타음료다. 각종 제약회사에서 약을 개발해서 팔고는 있지만, 구론산, 바카스, 비타 500 같은 비타음료가 일등 공신이다.


하루키 마니아들에게 소설이 좋은지 에세이가 좋은지 물어보면 대부분 소설이 좋다고 하면서, 그 뒤에 그렇지만 에세이도,,, 같은 말을 한다. 아마도 우리는 자신 있게 라면보다 컵라면이 좋다고 말하지 못한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쉽지 만은 않다. 라면보다 컵라면이 더 좋다고 말해버리고 나면 라면 마니아에서 벗어나는 이상한 불안감. 끓여 먹는 라면이 당연히 더 맛있지, 하지만 컵라면은,,, 라면보다 컵라면이 더 좋다고 하기에는 딱히 설명할 수 없는 부족함이 도사리고 있다.


하루키 마니아들은 당연하게도 하루키의 소설을 먼저 접하고 소설을 읽으며 중간중간 에세이를 읽었기에 어쩌면 소설 쪽으로 마음이 더 가 있을지도 모른다. 잘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손으로 들고 더 자주 읽는 건 에세이인데도 하루키 하면 에세이는 2등이고 소설이 먼저야 라는 생각이 지배를 해버릴지도 모른다.


하루키의 마니아인데, 엄청난 팬인데, “아휴 저는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좋더군요.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답니다. 소설은 웃을 일이 없는데 에세이는 웃게 하더라고요. 호호”라는 사람을 만난다면 참 독특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렇든 저렇든 하루키의 마니아들은 많고, 그들은 하루키의 글을 좋아한다는 사실. 맥주와 우롱차를 섞어 마시는 인간들도 많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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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거리 곳곳에 있었다. 여름을 알리는 뜨거운 빛이 길거리의 그림자 사이사이에 자리를 잡고 뜨거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여름이구나.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여름이 거리 곳곳, 사이사이에 뜨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누군가 찾아왔다. 누군가'들'이었다. 이 도시에는 젊은 작가들이 예술을 알리고 싶어서 활동하고 있다. 사진작가들도 있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 그리고 설치미술을 하는 작가들, 그리고 연극이나 예술 영화인들이 있다. 지방의 도시라서 이들의 활동은 아무래도 제약을 받거나 영역이 중앙 도시만큼 활발하지는 않다. 하지만 10년 전에 비하면 뭐랄까 비약적으로 나아졌다. 골목의 숨은 곳에 소극장이 들어서고, 소규모의 갤러리도 여러 곳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나도 작년 딱 이맘때 한창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때 전시회를 했었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1894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건물과 자동차만으로는 먹고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문화가 있어야 사람들은 감정을 드러내거나 숨기면서 인간관계의 중요성과 소통과 위로를 알게 된다. 나를 찾아온 사람들은 예술영화를 논하는 사람들로 나의 영화 리뷰를 보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서 오는 것일까. 영화 리뷰라고 해봐야 아주 짤막한 글을 쓸 뿐이고 게다가 근래의 예술영화(라고 해야 할까, 예술 영화의 기준은 도대체 뭘까)에 대해서 쓴 글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와 이름 모를 감독의 이름 모를 제목의 영화, 그리고 예전의 이문열 소설의 원작인 ‘젊은 날의 초상’에 대해서 쓴 글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 나는 상업영화도 좋아해서 상업영화에 대한 리뷰도 쓴다. 그래 봐야 순전히 개인적인 글이지만. 상업영화가 나는 더 좋다.

 

예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답게 ‘베를린 천사의 시’나 내가 좋아해서 꽤나 보았던 고다르의 ‘알파빌’이나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부터 우리나라의 김기영 감독의 ‘하녀’까지 여러 예술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근래의 ‘드라이브 마이카’까지. 하루키는 내가 좋아하니까 소설과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어떤 영화를 제일 좋아하냐고 하기에, 아 그전에 그들이 찾아온 목적이 있을 것이다. 모임을 같이 하자는 목적이 제일 크고, 또 모임을 할 때마다 그 장면을 사진이나 글이나 영상으로 남겨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일 년 뒤에 전시를 하는 목적이었다.  


그들 중 나에게 어떤 영화를 제일 좋아하냐기에 한 영화를 말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는 스파이더맨이기에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좋아한다고 했다. 스파이더맨 시리즈 중에서 예전의 샘 레이미 감독의 초기작을 좋아한다. 그러자 그들 중 한 명이 그런 영화를 보는 건 시간이 좀 아깝다고 했다. 상업영화는 봐도 남는 게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말했다. 예술 영화를 보는 게 인생의 시간을 잡아먹는 쓸모없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예술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는 간혹 예술 영화가 마치 최고라고,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영화학이 등장하고 영화 역사가 이루어진 현재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변화하고 감동을 주는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상업영화였다. 예술 영화가 마치 상업 영화 그 위에 있다는 생각은 뭐랄까 참 졸렬하다.  


그건 사진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진 학회의 사람들은 사진협회의 사람들을 자신들보다 조금 밑으로 보는 경향이 짙다. 사진협회는 사진업으로 먹고살아야 하니까 예술보다는 상업사진이 주가 되는데 사진 학회의 사람들은 사진업을 하진 않더라도 사진학을 공부하고 사진을 전공하거나 프랑스에서 사진에 대해서 유학을 하고 와서 그런지 프라이드가 굉장하다. 하지만 그들의 사진을 보면 그림자 찍어 놓고 자기네들끼리 대단하다고 칭찬하고 손뼉 치지만 일반인들이 봤을 때는 그저 그런 하나의 사진일 뿐이다. 그것보다 오히려 잘 나온 가족사진 한 장이 시간이 지나 추억을 하게 하고 그 당시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소중한 사진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감정의 변화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위로를 하는 건 상업영화였다. 이번 박찬욱도 자신의 영화가 예술영화로 비칠까 봐 노심초사했다고 했다. 자신의 영화는 상업영화라고 말이다. 예술영화는 분명히 영화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할이 마치 상업영화의 위에서 행해진다는 생각은 아주 몹쓸 생각이다. 허진호 감독의 ‘행복’이라는 영화는 상업영화지만 보는 내내 주인공 은희에게 빠져들었다. 지켜봐 주는 이가 없어서 한없이 강해지는 한 여자의 이야기. 미래가 보이는 남자와 현재만 살아가는 여자. 옅은 병을 가진 남자를 사랑하며 위태한 여자. 현재가 중요한 여자와 내일이 중요한 남자의 사랑. 그런 은희에게 밀땅 같은 걸 할 여유가 없다. 절대 뛰어서는 안 되는 병을 지녔지만 새벽에 언덕을 달리는 은희에게는 몰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맞은편에 앉아서 밥을 먹던 황정민이 “너, 밥 천천히 먹는 거 지겹지도 않니?” 이 대사가 콕 박혔던 영화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 나는 그 모임을 하지 않기로 했다. 등을 구부리고 구석진 곳에 앉아서 외로움과 싸워가며 글도 써야 하고, 매일 1시간 반 정도 조깅도 해야 한다. 요즘은 특히 마요네즈를 매일 먹고 있어서 조깅하면서 쉬지 않고 일정 거리는 달리려고 한다. 이 죽일 놈의 너무나 맛있는 마요. 어제는 두루치기에 휘휘 둘러서 먹었는데 소름 돋을 정도로 맛있어서 그만. 그리고 3일에 두 편의 영화를 보고 있다. 요즘 보는 영화, 그 안에 예술 영화는 그다지 없다.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것일까. 신기하다. 근래에는 넷플릭스의 ‘기묘한 이야기 시즌4’와 ‘덱스터 시즌 2’를 보고 있다. 그리고 디즈니 플러스의 ‘오비완 캐노비’ 2편까지 봤다. 이 영화들? 이 드라마들의 리뷰를 신나게 적었다. 특히 오비완 캐노비의 이완 맥그리거의 연기, 꼬꼬마 레아 공주를 보는 재미가 있으며 스타워즈 이전 시리즈가 확 떠오른다. 스타워즈 팬이라면!


스타워즈의 깊이 있는 세계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릴 때 명절이면 늘 라이트 세이버를 휘두르는 제다이들과 한 솔로의 스타워즈를 친척들과 이불을 덮고 귤을 까먹으며 봤던 기억 때문인지 스타워즈를 좋아했다. 고등학생 때 겨울방학이면 서울에 왕왕 갔었다. 그건 삼성동인가, 백남준 비디오 아트를 보기 위해서 여름과 겨울에 갔다. 사실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단지 잘 설명은 못하겠지만 그의 예술 세계가 나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플럭서스. 자기 파괴, 정신적 제설 작업, 자아의 또 다른 표현. 뭐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이끌렸다.  그리고 전시회장에서 큐레이터에게 질문을 너무 해서 따로 불려 가기도 했다. 어느 한 큐레이터가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나도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잘 알지 못한다. 그의 예술을 이해하려고 하면 너무나 어렵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아름다울 수 있다." 그 이후에 나는 백남준의 세계가 더 좋아졌다. 아마 그 당시에 나는 몹시 외로웠고 어디에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없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


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고요하고 조용한 성격인가 봐.

하지만 조용한 성격이란 없다. 사람 앞에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말을 들어주지 않기에 보통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말 수가 적은 아이도 마음에 맞는 친구와 함께 있으면 말을 많이 한다.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란 없다. 상대방이 나의 말을 대체로 무시했기에 그 사람 앞에서는 조용한 것이다. 당시에는 이런 단순한 마음을 복잡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날 밤 사촌 누나 집에서 뛰쳐나와 연락도 하지 않고 어딘가 여관에서 혼자 잠을 잤다. 작은 창으로 난 밤하늘의 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새벽이 어스름 오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나와 무관하게 흘러간다는 것과 나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무렵 나는 그대로 몸을 말고 잠이 들었다. 인터폰으로 체크아웃 시간이라고 해서 나는 나왔다. 사촌누나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서 혼나고 그녀의 사무실에서 짜장면을 얻어먹고 고모 댁에 가서 인사를 하고 나와서 둘째 외삼촌 댁이 있는 시흥으로 갔다. 작은 슈퍼를 하던 외숙모가 나를 위해 저녁을 맛있게 차려주었다.  


나는 평소 친하지 않았던,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촌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그리고 그날 밤 사촌들과 다 같이 한 방에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자게 되었는데 그날 밤이 해가 바뀌는 12월 31일이었고 티브이에서 스타워즈가 했다. 모두가 두꺼운 한 이불에 발을 집어넣고 귤을 까먹으며 스타워즈에 빠져들었다. 스타워즈의 캐릭터와 몬스터들에 대해서 떠들며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몰랐는데 같이 보는 스타워즈가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만달로리안을 볼 때는 느껴지지 않았던, 옛 추억의 스타워즈가 확 밀려오는 건 이번의 ‘오비완 캐노비’였다.


나도 제다이들보다 아임 유어 파더,라고 말하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줬던 다스 베이더를 좋아했다. 스카이 워커가 용암에서 팔다리가 다 잘린 그 후, 파메드가 죽고 난 그 후, 아기 루크와 아기 레아의 그 후, 제다이들이 몰살당한 그 후, 그 후의 이야기가 이번 오비완 캐노비에서 보여준다. 회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면서 존 윌리암스 느낌의 음악과 함께 ‘루카스 필름’ 글자가 나올 때 뭔가 짜릿하다. 스타워즈가 처음 나왔을 당시 루카스 필름에서 한창 그래픽을 배우던 이십 대 청년 워즈니악은 파견근무 형식으로 디즈니사로 가서 애니메이션의 움직임도 연구하고 있었다. 그때가 70년대에서 80년대였다. 그 당시의 그래픽이라고 해봐야 8비트, 16비트 이런 시기에 우주선을 날리고 라이트 세이버를 휘둘러야 하니 골 때렸다. 그런 그에게 와서 우리 같이 일해보지 않겠나, 나에게 좋은 3D 애니메이션 기획이 있네,라고 손을 내민 사람이 스티브 잡스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10년 뒤에 세계를 놀라게 한 토이스토리를 만들어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 이번에 버즈의 이야기가 새롭게 영화가 됐는데 기대가 된다.


뭐 그건 그렇고, 오비완 캐노비는 보는 재미가 있는데, 꼬꼬마 레아 공주의 똑 부러지는 연기를 보는 재미가 크다. 무엇보다 이완 맥그리거의 연기가 굿이다. 유다인이라는 도시는 꼭 중국이나 일본 같은 느낌이고 의상도 기분 상으로 중국 느낌이 확 든다. 한국계 배우 성 한도 나오는데 분장을 떡칠해서 도통 알아볼 수 없다.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헤이든 크리스텐슨이 그대로 나온다 하니 역시 기대.


영화는 사람과 비슷하다. 사람 위에 사람이 없듯이 예술 영화가 상업 영화 그 위에 있지도 않고 상업 영화가 예술 영화보다 못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늘 겸손해야 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예술이 영화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 사진, 건축, 의상, 음악, 미술 이 모든 예술이 영화라는 예술보다 선배다. 그래서 영화는 선배 예술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그러니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https://youtu.be/_Lzx0dLZ16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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볶음밥이 귀여워!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 상이 먹는 양이 실로 많아 보이지만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우리나라처럼 여러 반찬이 푸짐하게 나오는 게 아니라 대체로 중점적인 요리 하나 정도가 나온다. 그 양이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고로 상은 두 세 요리를 먹는데 가격적으로 보면 보통 3만 원은 넘게 나오는 것 같다. 실제로 밥 한 끼를 먹는데 3만 원 정도를 써야 한다면 현실적으로 큰 고민이다. 하루 꼬박 세 끼는 먹지 못 하더라도 두 끼를 먹는다면 6만 원이 홀라당 달아나 버린다. 천만번 양보해서 고로 상은 1인 기업 형식이며 돈도 잘 버는, 그 짝에서는 재능을 가진 유능한 사람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삶의 낙이자 행복으로 여기는 독신이니까 가능하리라 본다. 하지만 고로 상의 먹성이 참지 못하고 터졌을 때는 부산에 와서 낙지볶음을 먹고 돌아간 후 (급작스레 부산으로 오게 되어서 그런지) 일본의 포장마차에서 라멘 한 그릇을 먹은 후 다시 한 그릇을 주문하면서 미친 듯이 튀김과 덴푸라를 이것저것 여러 개를 시켰다. 카메라가 멎는 마지막까지 주문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 고로 상은 그 정도의 많은 양을 먹어야 만족에 가까워져 정말 잘 먹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고로 상이니까. 평소의 고독한 미식가에서의 고로 상은 정말 만족할 만큼 배를 채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고로 상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순전히 픽션의 세계에서의 이야기다.


고독한 미식가 시즌 4에서 9화를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고로 상은 철판요리 집으로 들어가는데 거기에는 모택동 립이 있는 가게다. 모택동 립이라는 걸 손으로 들고 뜯어먹은 다음 검은 볶음밥을 먹는다. 철판요리라서 요리사가 그 위에서 요리를 하는데 우롱차로 볶음밥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커플의 남자가 저건 우롱차로 만드는 볶음밥이라고 애인에게 말한다. 그러면 애인이 “헤에, 카와이”라고 한다. 그러자 옆에서 밥을 먹고 있던 고로 상이 속으로 ‘볶음밥이 귀엽다니, 흠’라고 한다. 정말 볶음밥이 귀엽다니, 고독한 미식가의 시나리오 작가는 대단히 재치가 넘치는 사람이거나 글에 대한 재주가 뛰어난 인물임에 틀림없다. 아니면 여러 명이 시나리오에 매달리고 있을지 모른다. 요컨대 세계의 인기작 미드 프렌즈의 작가는 50명이 넘었다. 여하튼 고독한 미식가를 볼 때마다 고로 상이 내뱉는 주옥같은 음식에 대한 찬양 멘트가 하늘을 날아다녔다. 이번에는 고로 상이 또 어떤 멘트로 음식을 가지고 놀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커플의 여성이 말한 것처럼 음식 중에서 볶음밥이 가장 귀여운 음식이 아닌가 싶다. 볶음밥을 해 놓고 보면 귀여워! 하는 느낌이 있다. 그건 뭐랄까 찌개를 보고 귀여워!라고 하는 느낌은 없다. 역시 고기를 굽거나 튀긴 생선을 보며 귀엽다는 느낌도 덜 받는다.


볶음밥이라는 걸 아이들과 함께 먹게 되면 더 귀엽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렇게 볶음밥을 다 조리 한 다음에 식힌다. 뜨겁지 않게 식힌 다음에 아이들에게 비닐장갑을 끼게 하고 별 모양이나 삼각형의 모양의 판에 꾹꾹 눌러서 예쁜 모양을 잡는다. 그 위에 김가루를 뿌리면 맛도 좋고 보기에도 역시 귀여운 볶음밥이 된다. 볶음밥 안에 채소를 왕창 넣어도 아이들은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야금야금 맛있게 잘 도 먹는다.


이 볶음밥이 ‘귀엽다’라는 말보다 일본의 ‘카와이’가 좀 더 어울리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일본의 학부형이 아이들의 도시락을 볶음밥으로 만들어 그 위에 귀엽게 데코레이션을 해서 더 그렇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가정집 도시락을 보면 짱구부터, 병아리까지 무척이나 귀엽게 도시락을 만들었다. 입으로 들어가면 다 똑같지! 뭘 그렇게까지!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인간은 음식을 먹기 이전에 보는 것으로 한 번 맛을 보기 때문에 프랑스 요리나 뉴욕의 식당가에서 접시 위의 공백을 중요시하며 데코에 신경을 쓴다. 입으로 들어가서 다 똑같은데 왜 과자의 모양은 끝없이 다르게 출시를 할까, 한 번 생각해보라.


기무타쿠 주연의 그랑 메종 도쿄에서도 미츠히로의 유치원생 딸의 도시락을 기무타쿠가 주연한 오바나가 매일 새벽에 좋은 재료로 예쁘게 만들어줘서 반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는다.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여기저기서 반 아이들의 입에서 ‘초 카와이~’가 터져 나온다. 우리는 예쁜 도시락을 보고 ‘와 귀여워’보다는 ‘와 예쁘다’를 더 말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볶음밥을 보고 있으면 정말 꽤나 귀엽다. 각가지 재료가 한 곳에서 볶아져 아름다운 색감을 자아낸다. 컬러에서 중후함이나 노련함보다는 재잘재잘대는 귀여움이 가득하다. 물론 볶음밥은 맥주와 참 잘 어울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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