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이 삼만 원. 같은 말이 나오는 시대가 되었다. 치킨 한 마리에 삼만 원이라니. 닭 자체의 가격도 언젠가 많이 오를 것이다. 닭이나, 돼지나, 소나 들어가는 사료는 엇 비슷하다. 단지 고기 1킬로그램당 들어가는 사료 가격이 닭이 제일 저렴하기에 닭값이 제일 저렴했다.


아주 오래전에는 닭은 귀한 가축이었다. 조선시대에 닭을 집에서 키운다고 해서 막 잡아먹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산에서 수렵으로 얻을 수 있는 꿩이나 비둘기 같은 고기에 비해 닭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사료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사료를 먹고 자란 가축은 고기가 맛있다. 하지만 야생에서 얻는 고기는 질기고 맛도 없다. 해서 닭은 돈이 들어가기에 집에 잔치나 행사가 있을 때에만 닭을 잡았다. 식구가 많다고 해서 닭을 여러 마리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한 마리를 푹 고아서 백숙으로 많이 해 먹었다. 고기 – 다리는 집안의 가장 위주로 먹고 고깃국에 밥을 말아서 한 가족이, 닭 한 마리만으로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닭이 언제부터 가축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치킨이라는 것도 사실 흑인들이 노예로 있을 때 살코기는 주인들의 접시에 올라가고 나머지 부위를 기름에 튀겨 먹던 것이 우리가 먹는 치킨으로 발전을 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닭은 인간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가축이 되었을까. 사실 인간은 동물의 가축화 과정이 긴 세월 동안 있었다. 지금 인간의 옆에는 개, 고양이, 말, 염소, 닭 등 가축 동물이 몇 종류가 있다. 하지만 동물 전체로 보면 협소하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동물의 가축화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고 한다. 요컨대 무굴제국 황제는 치타 50마리를 입막음해서 가축화하려고 곁에 두었다. 치타가 가축이라면 토끼 같은 것도 빠르게 잡을 것이고, 힘도 좋아서 블라블라. 하지만 치타가 가축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치타의 교미 때문이다. 암컷이 시속 100킬로미터가 넘는 속력으로 넓은 들판을 달리면 그 뒤를 수컷들이 먼지를 날리며 따라가서 암컷을 정복한 수컷이 교미를 해서 새끼는 낳는다. 그래서 치타를 키우려면 어마어마하게 광활한 광장이 있어야 하는데 실패였다. 저 앞에서 문어와 오징어를 이야기하면서 한 번 썼던 적이 있지만 인간은 곰도, 표범도, 산양도 가축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햄스터는 1930년대 시라이의 동물학자가 한 옥수수밭에서 최초로 발견했다고 한다. 그 뒤로 햄스터는 인간의 곁으로 오게 된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동물이기도 하다.


곰은 힘도 좋고 잡식성이라 농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지만 다 키우면 사람을 잡아먹었다. 또 현재 말은 되는데 얼룩말은 가축이 안 되어 있다. 미국 동물원에서 사자에게 물려 다치는 사육사보다 얼룩말에게 물려 다치는 사육사가 훨씬 많다고 한다. 얼룩말은 아주 사납다고 한다. 산양도 가축으로 이런저런 이유로 괜찮을 거라 생각을 하고 가축화하려고 했지만 산양 같은 경우는 한 번에 4미터씩 뛰어오른다고 한다. 그래서 산양의 울타리를 전부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닭은 지금의 닭의 모습이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이제 한국에서 야생 닭이라는 건 거의 볼 수 없다. 그전에 가축과 반려동물은 어떻게 나뉠까. 우리가 소와 강아지를 똑같이 대하지는 않는다. 소나 닭은 가축이고 강아지는 반려동물이다. 이는 친밀도로 기준을 잡는다고 한다. 그럼 친밀도는? 그래서 과학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친밀도를 가지며 가축과 반려동물을 나눌까 하며 2017년에 재미있는 연구를 발표를 했다. 야생동물 의학교실 동물행동의학을 연구하는 강은구 교수의 말을 들어보면.


개와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 유전자가 변이를 일으키면 윌리암스 증후군이라는 유전병이 사람에게 생기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만 명 중에 한 명이 발병할까 말까 정도의 희귀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모르는 타인을 대할 때 낯설어하지 않고 마치 강아지가 사람에게 대하듯 친밀하게 다가간다. 유전병 중에 하나인데 애교가 많아지고 사회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특이한 증후군이다. 이 윌리암스 증후군이라는 게.


그래서 이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을 요정이라 일컫는다고 한다. 아무나에게 친절하고 친근하게 다가가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연구를 해보니까 늑대와 개 사이에서 모든 유전자가 같은데 이 유전자 하나가 차이가 나는 것이다. 개에게 이 유전병이 있다는 것이다. 이 증후군이 사람에게 붙으면 병이라고 부르는데 개에게는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늑대에게서 돌연변이가 된 동물이 개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 인간이 개라고 부르는 모든 종류는 늑대와 다른 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돌연변이에 속한다.


늑대 무리 중에서 일부 무리가 이런 변이가 생겨서 몇 만년 전에 인간과 같이 살을 비비며 지내면서 가축이라는 형태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근데 이런 돌변이가 야생에서는 별로인 것이다. 왜냐하면 먹고 먹히는 관계의 야생에서는 생존에는 불리하다. 육식동물에게도 친근하게 다가갔다가 잡혀 먹히고 말았다. 그래서 개는 지금 인간의 곁에서만 가능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개에게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집에서 내쫓지도 않으며 밥도 챙겨주는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개는 인간의 곁으로 왔다. 생각을 해보면 외국은 아주 오래전부터 강아지를 가족처럼 여겨서 그런지 이런 증후군의 증상을 많이 보인다. 그들은 대체로 친밀하고 말 걸기도 편하다. 요즘 가만히 봐도,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강아지에 대해서 말을 걸면 주인 역시 아주 친밀하다. 개와 지내게 되면 정말 그런 마법 같은 증후군에 걸려 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강아지가 애교가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교성을 나타내는 호르몬 중에는 옥시토신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게 많아지면 유대감이 많아지고, 유대감이 많아져 포옹하고 스킨십이 많아지면 이 옥시토신의 분비가 많아진다. 강아지가 고양이와 비교했을 때 놀아주면 이 옥시토신의 혈중농도가 고양이에 비해 5배나 올라간다고 한다. 강아지는 이제 호르몬도 유전자도 전부 사람과 친밀하게 지내게끔 진화를 해버렸다.


이제 닭으로 넘어오면 닭은 위의 친밀한 반려동물은 아니다. 가축화가 된, 그러니까 가축으로 되기까지 많이 변화가 되었다. 가축이라는 건 인간이 고기를 얻기 위해 야생동물을 인간 가까이 두고 키우는 행위를 통해 진화된 동물이다. 우리가 지금 먹는 닭의 조상은 한 가지 종류의 닭이었다. 적색 야계라고 하는 인도 지방의 닭이 있는데 나무 위키를 찾아보면 꿩과 닭 속에 속한 조류로 현재 사육되는 가축 닭의 직계 조상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 닭에서 현재 우리가 먹는 모든 종류의 닭이 탄생되었다고 보면 된다. 이 닭이 야생에 있을 때에는 잡기가 참 힘들었다. 하지만 개에서처럼 인간과 가까이 지냈던 유전자를 가진 닭이 인간사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 닭을 가지고 인간이 개량시켜 현재 먹을 수 있는 가축 닭이 되었다.


유전학자들의 말로는 닭에게도 원래 가지려는, 보호하려는 유전자를 지키기 위해 인간 곁으로 가서 인간에게 사육되어 고기가 되는 것을 묵인하게 됨으로 야생의 닭은 야생에서 생활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게 가능한 것이 지구 상의 닭의 개체수가 인간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만약 닭이 가축화가 되지 못하고 야생 닭을 수렵해서 먹었다면 씹을 수 없을 정도로 질기거나 고기 부분이 적어서 한 마리로 인간 두 명이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치킨이 삼만 원 해도 자주 사 먹을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주 사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집에서 닭으로 요리를 해 먹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조리를 잘하면 아주 맛있지만 그럭저럭 먹을만하게 조리를 해도 닭은 꽤나 맛있다. 간장 베이스에 마늘이나 방울토마토 같은 것들을 넣고 같이 조리를 한다. 그러면 닭이 익으면서 간장을 빨아들여 맛있게 된다.

 

조리한 닭 위에 후추를 솔솔 뿌려준다. 닭을 구입해서 집에서 조리를 해 먹으면 치킨보다 양이 크고 많다. 집에서 닭요리를 해 먹을 때에는 버드와이저와 와인 한 병을 같이 먹는다. 나는 그렇다는 말이다. 소주를 좋아하면 소주를 준비하고 증류주가 좋다면 그걸 준비하면 된다. 술이 싫다면 밥과 함께 그저 닭을 조리한 것만 먹어도 된다.


닭요리라는 게 전 세계의 집집마다 다 조금씩 비슷한 것 같다. 그 나라의, 그 도시의, 그 집의 문화적 음식 섭취에 따라 들어가는 양념이 달라서 그렇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많은 고기를 먹을 수 있어서 닭은 아마도 지구가 멸망하지 않은 이상 계속 소비가 될 것이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치킨을 최초 먹을 때 정말 한 마리 가격이 삼만 원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세상은 정말 지속적으로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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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부터는 감독이 두 명으로 1,2,3화를 연출했던 감독에서 바뀌었다. 그래서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조금 느낌이 다른데? 하는 생각이 든다. 선자의 가난하고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조촐하고 우울한 결혼식에서 선자의 어머니는 담담하다.

선자의 손을 꼭 잡아 줄 뿐이다. 그러나 선자가 떠나가는 선착장에서 오열을 한다. 어머니이기 전에 여자였던 것이다. 4화부터는 이렇게 연출이 되어 간다. 하지만 시리즈 말미에 가면 다시 초반의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

4화에서는 내가 믿고 있는, 믿어야만 하는, 그래서 나의 온 미래가 걸려 있는 거대한 압박에서 벗어났을 때의 해방감에서 오는 큰 기쁨과 찌꺼기처럼 깔려있던 미미한 그리움이 일렁이다 폭발하게 되는 건 나도 모르게 내가 그동안 맡았던 내 삶의 냄새, 내 삶의 촉감, 내 삶의 소리와 바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나의 감장이 터져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나의 노래가 이토록 마음의 연약한 부분을 건드리고 건드려 억압에 대해 강하게 분노를 드러냈다. 하얀 드레스에 번지는 붉은 피가 안타깝고 슬프게 보이는 건 비록 영화 속의 모습뿐만 아니라 현실의 우크라이나의 모습도 보이기 때문이다. 파친코는 여러모로 보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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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 세계사의 썬킴 참조


제주 4.3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름에 의미가 들어있는 경우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당시 제주도민이 30만 명인데 10분의 1, 3만 명이 죽음을 당했다.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나와 있지만 최대 제주도민 10만 명이 죽었다는 것이 비공식적인 수치다. 3명에 1명 꼴로 죽었다. 그대로 죽음을 당한 것이다. 당시에는 남로당 좌익이 죽었다고 했지만 그런 사람들이 3만 명이나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비극 중에서 가장 큰 비극의 끝에 서있는 사건이다. 그래서 제주도에서는 한 날 한시에 제사를 지낸다는 슬픈 이야기다.


제주도라는 섬은 조선시대에도 내내 아픈 섬이었다. 왜냐하면 유배를 전부 제주도로 보냈다. 광해군도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오니까 제주도는 그렇게 슬픈 섬이었다. 제주도민은 일제강점기 때 정말 무지막지한 고생을 많이 했다. 일단 제주도가 일본에서 제일 가까우니까 징용, 징병으로 가장 많이 끌려갔다. 조선 팔도에서도 끌려갔지만 특히 제주도에서 가장 많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과 가장 가깝다는 이유였다. 지금 현재 오사카에 가면 코리아타운 비슷한 마을이 있는데 거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주도민이다. 지금도 제주도 방언도 통하고, 제주도민들이 주로 살고 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 침략이 극에 달했을 때 1945년 원자폭탄을 맞고 패망을 하는데 그전에 최고의 결전을 준비한다. 그 준비를 제주도에서 한다. 밑에서부터 미군이 쳐들어 올라오니까 사이판이 무너졌고, 오키나와도 무너졌다.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 최후의 방어선이 제주도였다. 그 당시 가미가제 특공대가 있었는데 자살 어뢰정도 있었다. 사람이 타서 끌고 가서 박아버리는 자살 어뢰정을 준비했는데 그 기지를 제주도에 만들었다. 지금도 제주도 해안가에는 그 구멍이 아직 남아있는 곳이 있다. 미군이 올라오면 이렇게 보고 있다가 자살 어뢰정을 타고 출발을 하는데 그 자살 어뢰정의 운전을 제주도민들이 했다. 이렇게 일제강점기에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버티다가 드디어 1945년에 해방이 된다. 대한독립만세!라고 힘껏 불러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내륙에는 미군이 바로 들어왔지만 제주도에는 한 달 후에 미군이 들어오게 된다. 그 한 달의 공백기 동안 일본군이 그대로 제주도에 남아있는 상태가 된다. 제주도민들은, 해방이 되어서 육지에서는 만세를 부르고 기분 좋게 난리 났지만 제주도에서는 아직 남아있는 일본군 때문에 만세도 부르지 못했다. 제주도민들은 마음 놓고 대한독립만세도 부르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패망해서 돌아가는 거니까 곱게 돌아가지 않았다. 회가 많이 난 일본군은 일본이 전쟁에 진 것에 대해서 분풀이를 제주도민에게 하게 된다. 제주도는 조선시대부터 공물이라고 해서 제주도에서 나는 곡물 내지는 특산물을 중앙정부에 세금으로 보냈다. 그래서 먹을 게 늘 부족했다. 일본군은 패망하여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제주도민의 식량을 전부 끌어 모은 다음 거기에 불을 질러 버린다. 제주도민에게 다 굵어 죽으라며 제주도민이 먹을 식량에 전부 불을 지른다.


그렇게 한 달 후에 미군이 제주도에 들어오게 된다. 그때 제주도민은 들떠있는 상태였다. 해방되었으니까. 지금까지의 핍박에서 벗어나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미군이 들어와서 이제 자유로운 세상이 되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미군정이 들어와서 우리나라를 미군이 통치를 하는데 보니까 제주도가 굉장히 큰 섬인 것이다. 당시에는 제주도는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다. 전라남도 제주군, 이렇게 되어 있었는데 미군이 제주도에, 이렇게 큰 섬을 왜 전라남도의 섬으로 하느냐, 별개의 ‘도’로 만들자. 그렇게 해서 제주도로 승격을 하는데 이때부터 문제가 터진다. 전라남도 소속일 때에는 전라남도에서 제주도에 지원을 해주었지만 제주도로 승격이 된 후에는 지원이 끊기고 만다. 독립된 도가 되었기에 알아서 각자도생 하라며 지원이 끊어진다. 더 문제는 독립된 도가 되었기 때문에 중앙정부에 세금을 더 내야 했다. 제주도민들은 제주도로 승격이 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이게 이상하게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미군정이 봤을 때, 당시에 크나큰 전라도를 통치하는 경찰이 몇 백 명 밖에 되지 않았다. 미군정이 보니까 제주도가 전라도와 경상도 같은 도가 되었는데 제주도에 경찰이 너무 없다고 판단하여 미군정이 경찰을 왕창 제주도로 보낸다. 당시에는 경찰을 새로 뽑을 수가 없어서 친일파 경찰들을 긁어모아서 제주도로 내려보냈다. 그 경찰들을 응원경찰이라 했다. 응원경찰 수천 명을 제주도로 내려 보내는데 모두가 친일파 경찰들이었다.


제주도민들은 어이가 없었다. 세금 더 내지, 전라남도에서 지원 끊겼지, 새로 치안 담당하러 내려온 경찰들은 친일 파지. 제주도민들은 미칠 지경이었다. 친일파 경찰들이 내려오니까 제주도민들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 제주도 방언과 서울에서 내려온 친일파 경찰들과의 의사소통이 너무 어려웠다. 이 사람들은 무슨 외국어를 쓰는 거지?라고 응원경찰들이 생각했다. 그래서 제주도 친일파 경찰들과 제주도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일본어로는 대화가 되었다.


그 당시 친일파 경찰들도 제주도민을 굉장히 괴롭혔다. 그러면서 2년이 지났다. 1947년 3월 1일. 3.1절에 제주도에서도 독립기념식을 당연히 하고 있었다. 만세, 만세, 만세. 근데 한 장소에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있으니까 친일파 경찰들이 겁을 먹게 되었다. 저것들이 저렇게 모여 있다가 우리를 어떻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며 친일파 경찰들은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모여있는 제주도민들을 감사하라고 기마경찰들을 보냈다. 신나게 제주도민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는데 한쪽에서 기마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혹시라도 도민들이 소요를 일으키면 조치를 취하라고 기마경찰들에게 대기를 시켰다. 그때 일이 터지고 만다. 한 기마경찰이 말을 타고 코너를 도는데 6살짜리 애를 말의 발굽에 차이고 만다. 그 기마경찰이 그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가거나 조치를 취하면 괜찮았지만 그대로 아이를 밟고 지나가버린다. 만세 운동을 하고 있던 제주도민들이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6살짜리 아이가 말에 밟혀서 저러고 있다. 말을 타고 가는 기마경찰을 따라가게 된다. 사과를 해라! 사과를 해라! 아이가 다친 거 사과를 해라!


근데 기마경찰이 혼자여서 너무 겁을 먹고 말을 더 몰고 달렸다. 그러면서 제주도민들이 더 따라붙게 된다. 잡아라! 저 경찰을 잡아라! 뛰어가면서 외친다. 기마경찰은 잡히면 죽는다며 말을 더 몰았다. 그렇게 경찰서까지 오게 되었다. 근데 경찰서에 있는 경찰들이 상황을 모른 채 보니 기마경찰이 도망을 오는데 뒤에서 주민들이 소리를 치며 달려들고 오니까 이건 소요사태다!라고 판단을 한다. 그래서 바로 발포를 한다. 그때 6명이 죽는다. 그 6명은 길거리에 서 있다가 총에 맞아서 죽었다. 그 6명 안에는 초등학교 6학년 짜리 아이도 있었고, 젖먹이 애를 안고 있던 21살의 젊은 엄마도 있었다. 전부 등에 총을 맞아서 죽었다. 이때 제주도민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전부 경찰서로 가서 책임자를 불렀다. 민간인 6명이 죽었으니 책임자를 나오라고 했다. 당장 진상조사를 하라! 하지만 제주도 경찰들이 경찰서 앞에 기관총을 설치하게 된다. 철커덕, 물러나라 그렇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같은 민족끼리 해도 해도 너무 하다. 광복을 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래서 당시에 양심 있는 경찰들과 제주도민 전체가 파업을 하게 된다. 책임자를 찾아내라고. 점포, 식당, 모든 곳에서 생계보다 더 중요한 건 책임자를 찾아내는 것이라며 양심 있는 경찰들도 일을 하지 않고 파업에 동참하게 된다.


그런 소식을 들은 미군정에서는 제주도에 응원경찰을 더 보내고 서북청년단을 찾아간다. 서북청년단은 평안도 출신들인데 거기서 김일성 정권이 들어온 다음에 지주들, 기독교인들이 전부 땅도 빼앗기고 쫓겨났다. 남쪽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이 서북청년단이었다. 서북청년단에게 최고의 적은 공산당 빨갱이인 것이다. 김일성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밑으로 밑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서북청년단에게 지금 제주도에서 빨갱이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키고 있으니 가서 진압을 해라며 미군정은 서북청년단에게 경찰 타이틀까지 준다. 그래서 몇 백 명 서북청년단이 제주도로 내려가게 된다. 그래서 47년부터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서 빨갱이 사회주의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서 고문을 한다. 말이 ‘빨갱이 사회주의자로 보이는 사람들’이지 눈으로 그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저 그렇게 보인다는 이유로 사람을 잡아서 고문을 하고 죽을 만큼 괴롭혔다.


이렇게 응원경찰, 서북청년단, 미군정에게 탄압을 받던 제주도민들이 1948년 4월 3일, 우리 이대로 못 살겠다며 우익 단체를 무장 공격을 하게 된다. 물론 제주도민들 사이에도 좌익이 있긴 있었다. 우익을 공격했던 좌익 남로당 세력도 반성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익 단체를 공격하다가 우익 쪽의 죄 없는 가족들도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익과 우익의 무력대결이 발발하게 된다. 4월 3일에.


당시 제주도에는 조선경비대라는 군부대가 주도하고 있었다. 김익열 사령관이 데리고 있던 부대가 있었고 이 김익열이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다. 김익열 사령관이 보니 경찰과 주민들이 무력으로 대결을 하고 있는 모습에 좌익을 찾아간다. 찾아가서 지금 투항을 하면 아무 처벌도 받지 않게 하겠다, 내가 다 책임을 지겠다, 같은 민족끼리 왜 이렇게 서로 죽고 죽이느냐,라고 했다. 그러니까 좌익의 대장도 우리도 실수한 게 있으니 좋다, 우리도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을 하겠다, 그러니 우리의 신병을 보장해 달라. 김익열 사령관은 내가 군 책임자로서 당신들의 신병을 보장해줄 테니까 걱정 말고 총 놓고 한라산에서 내려오라고 했다. 그래서 좌익 사람들이 투항을 하고 내려오는데 느닷없이 우익의 서북청년단들이 민가에 불을 지른다. 공교롭게 불을 질렀는데 미군 정찰기가 그 위를 지나가면서 사진을 찍는다. 마치 서북청년단이 몇 월 며칠 몇 시에 거기에 불을 지른다는 걸 알았다는 식으로 하필 그 시간에 정확하게 미군 정찰기가 그 위에서 불 지르는 걸 공중에서 사진을 찍는다. 찰칵.


그러면서 봐라, 이건 소요사태가 통제불능의 상태라고 미군정이 판단을 한다. 그래서 지금으로 치면 경찰청장인 조병옥이라는 사람이 제주도로 내려가게 된다. 조병옥과 미군정 관계자가 제주도로 내려가서 김익열 사령관에게 왜 빨갱이와 협상을 하느냐며 다그친다. 김익열은 아니다, 나에게 시간을 조금 더 달라, 그러면 사태는 일어나지 않게 설득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조병옥이 제주도 주민들은 싹 다 빨갱이기 때문에 다 죽여야 한다고 했다. 정확하게는 싹 쓸어버리자,라고 했다. 결국에 미군정은 ‘싹 쓸어버리자’에 손을 들어준다. 조병옥은 완전한 우익인 인물이었다.


미군정이 봤을 때 김익열이라는 사람은 자꾸 좌익을 옹해주니까 이상한 것이다. 그래서 해고를 해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박진경이라는 새로운 사령관을 데리고 와서 둔다. 박진경은 부임하자마자, 대한민국을 건국해야 하는데 제주도민 30만 명 죽는 건, 그 정도의 희생은 필요하다는 망언을 한다. 그래서 무지막지하게 탄압을 한다. 박진경 밑의 부하도 이게 너무 하다고 생각을 했다. 아니, 도대체 같은 민족을 이렇게 쏴 죽여도 되나 싶어서 갈등을 한다. 그러다가 박진경 사령관은 부하에게 암살을 당한다. 당신은 해도 해도 너무한다. 이렇게 같은 민족을 이렇게 쏴 죽일 수가 있나. 그래서 암살을 당하게 된다. 탕.


1948년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해인데 이때 4월 3일에 이 사달이 난 것이다. 그리고 한 달 후 5월 10일에 510 총선거가 이루어지는데 제주도만 이 선서를 하지 못했다. 4월 3일에 이 엄청난 사건 때문에 선거를 하지 못했는데 이 과정을 겪으면서 8월 15일에 미군정이 물러가고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이승만은 전국이 선거를 했는데 제주도만 빨갱이들 때문에 선거를 하지 못했다며 가만 놔둘 수 없다고 해서 여수에 있는 14 연대에게 지금 제주도로 내려가서 제주도에 있는 빨갱이들을 다 죽여라고 명령을 내린다. 여수에 있던 14 연대는 이승만 정부의 연락을 받고, 아니 지금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 같은 민족을 쏴 죽이라는 거야? 라며 의아해한다. 그러다가 14 연대가 탈영을 하면 했지 도저히 제주도로 내려가지 못하겠다며 들고일어난다. 아무리 빨갱이라고 해도 같은 국민인데 어떻게 무참히 총을 쏴 죽을 수 있나 우리는 못 간다. 여수의 군인들이 들고일어났다. 반란을 한다. 같은 국민에게 총을 못 쏜다며 순천까지 점령을 해버린다. 이것이 옛날 표현으로 여수반란사건이다. 지금은 반란이라는 말이 빠지고 여수사건으로 되어있다. 예전에는 국방군이 대한민국에게 반기를 들었다고 배웠다. 그러니까 여수사건을 잘못 배운 것이다. 이면을 보면 같은 민족에게 총을 쏘기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다른 군대를 파견한다.


지금부터는 경찰, 서북청년단, 군대가 들어가서 대대적인 토벌을 감행한다. 해안가에서 5킬로미터의 선을 그은 다음 선 안에 있는 제주도민은 다 죽여라고 명령을 한다. 좌익세력은 한라산 쪽으로 다 숨어있기 때문에 5킬로미터 안의 해안가는 괜찮지만 이 선을 넘어 있는 사람들은 그냥 다 쏴 죽여라고 한다. 그래서 토벌작전에 들어간다. 숨어 들어간 사람도 있겠지만 그 안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던 어르신들은 뭔지도 모르고 내가 왜 해안으로 가야 하느냐? 나는 여기가 내 땅이니까 여기서 농사를 지으며 지낼 거야, 설마 같은 국민인데 총을 쏘겠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안가로 안 나갔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어마 무시하게 토벌을 했다. 지금 여러 가지 기록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자면.


엄마가 있고 13살짜리 남자애가 있고 그 밑으로 10살, 7살, 4살 동생이 있었다. 13살짜리를 보며 너 빨갱이지? 아닌데요. 무슨 소리냐 너 딱 봐도 빨갱인데. 그래서 엄마와 함께 동생들까지 – 엄마, 13살, 10살, 7살, 4살 순으로 한꺼번에 묶어 버린다. 엄마가 토벌대에게 싹싹 빌었다. 제발 아이들만은 살려 달라고. 그래서 토벌대는 10살 이하는 풀어준다. 하지만 13살, 너는 빨갱이니까 묶는다. 묶자마자 드르륵 하며 총으로 갈기는데 엄마가 본능적으로 아들을 안고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엄마와 함께 쓰러졌는데 그때 엄마의 뜨거운 피가 입 안으로 왈칵 들어왔다고 한다. 이분이 최근까지 살아계셨다.


또, 부모가 3살짜리와 1살짜리 젖먹이를 데리고 도망을 갔다. 총을 쏘며 달려오니까 동굴 안으로 숨었다. 근데 1살짜리가 뭘 알겠어. 동굴 밖에서 빨갱이들이, 다 나와 드르르르륵 하니까 1살짜리가 울고 말았다. 토벌대는 그 안으로 수류탄을 까서 집어던지고 만다. 3살짜리, 1살짜리가 그 자리에서 조각이 나서 다 죽고 만다.


이런 일이 무려 7년 동안 이어졌다. 1948년부터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까지. 이 4. 3 토벌을 7년이나 하면서 제주도민들이 무참히 죽고 말았다. 맨 위에서 말한 제주도민 30만 명 가운데 공식적으로 3만 명이 죽었다고 되어있고, 비공식적으로는 10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주도는 4월 3일에 동시에 제사를 지낸다. 아직 살아 계신 분들이 있는데 이분들의 말로는 이 사건이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어지면 볼 자신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제주도민들에게 7년이나 행해진 4. 3 토벌은 너무나 큰 상처다. 이렇게 큰 사건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516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국시가 반공, 멸공이었다. 이후에 4. 3 사건이라는 말 자체가 금기어가 되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입으로 알려지지가 않았다.


오늘 뉴스 기사에서 우크라이나에 간 폭스뉴스 기자가 두 다리와 한쪽 눈을 잃은 기사를 읽었다. 폭스뉴스 기자 벤저민 홀은 트위트에 포격을 받은 지 3주가 지나서 그 당시의 일에 공유를 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 한쪽 다리의 반절을 잃었고, 다른 쪽은 발을 잃었다. 한쪽 눈은 시력을 잃었고,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살아남게 된 것은 ‘빌어먹을 행운’이며,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분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전쟁이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리고 이런 끔찍한 기사를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본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26073&cid=40942&categoryId=31778 <= 여수사건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384757&cid=47322&categoryId=47322 <<= 510 총선거



전쟁을 멈춘 노래로 잘 알려진 크렌베리스의 좀비 

https://youtu.be/YPYS108N6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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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4-11 2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그 악이 얼마나 평범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네요.

교관 2022-04-12 10:20   좋아요 0 | URL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한다는 모순과 위배가 얼마나 무서웠던가를 오펜하이머를 보며 알게 되었습니다
 


일드 ‘무챠부리! 내가 사장이 되다니’와 ‘미스터리라 하지 말지어다’를 보면 주인공들이 전부 삼성 갤럭시 폰을 들고 나온다. 특히 미스터리라 하지 말지어다,에 이토 사이리의 폰은 갤럭시 Z 폴드 3다. 펼쳐서 사용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지만 주인공들이 죄다 삼성 갤럭시를 사용하고 있다. 이거 일본 우익 네티즌들이 공격할 거리인데 그런 기사는 또 없다.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도 드라마에서 대체로 아이폰을 들고 나오는데 일본 드라마에서 이렇게 전부 삼성폰을 주인공들이 들고 나온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삼성이 굉장한 스폰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일드 하니까 레전드로 꼽히는 예전의 일드 ‘하늘에서 내리는 1억 개의 별’이 얼마 전에 다시 한번 했다. 우리나라에도 서인국 주연으로 리메이크가 되었는데, 아무튼 막장의 끝을 달리는 시초 격인 이야긴데 다들 너무 재미있어서 몰입해서 봤던 드라마. 일단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타쿠야의 미모에 반하고, 기억을 잃은 오빠가 꼬신 여자와 잠을 자고 진정한 사랑에 빠지는데 그 여자가 어릴 때 헤어진 자신의 친동생이고 나중에 친동생에게 총 맞고 죽고 여동생도 울면서 총으로 자신의 가슴에 총알을 박고 비극으로 끝나는 막장 막장 개막장의 슬픈 이야기. 조수혜의 파릇한 모습이 나오는데 조수혜는, 일본 이름 이가와 하루카는 20년이 지난 요즘 맥주 광고에 나오는 모습이 더 예쁜 거 같음. 조수혜는 데뷔 초 한국계라고 차별을 많이 받았단다. 그래도 이 드라마 이후 사진집도 내고, 사진집 이름이 ‘월간 이가와 하루카’. 그 뒤로 죽죽 잘나가다가 결혼하고 그냥 안정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요즘은 맥주 광고에 나오는데 훠어어어얼씬 예쁜 거 같다. 

요즘 말이야, 케이블티브이 인디필름 채널은 스티븐 시걸 형님하고 무슨 계약 맺었냐. 어째 매일 스티븐 시걸의 영화를 할 수가 있지. 스티븐 시걸의 CIA가 끝나면 바로 스티븐 시걸의 비밀 요원. 헐. 다 엇비슷한 내용의 엇비슷한 액션의 영화를 연달이 두 편씩, 매일 한다. 분명 시걸 형님과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을까. 몸집이 비대해진 시걸 형님의 영화는 분위기상 대부분 시걸 형님이 감독이나 제작자처럼 이래라저래라 해서 만들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무슨 말이냐 하면 재미가 없다는 말이지. 그런 영화를 인디필름은 어째서 매일 틀어주는 것일까. 

윌 스미스가 오스카 회원을 본인이 던졌다고 하지. 오스카를 보면 윌 스미스가 귓방망이를 날리기 전에, 여자 진행자 세 명이 나와서 아직 총각들로 이루어진 배우들을 무대로 불러낸다. 브래들리, 티모시, 또 누구더라. 아무튼 아직 미혼 배우들을 불러내고 난 다음 코미디언이자 배우인 진행자가 윌 스미스에게 이러잖아. 너는 결혼을 했는데 여기 명단에 있네, 어서 올라와. 이런 말을 하며 웃고 넘어가는데 그때부터 사실 윌 스미스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다들 잘 알지? 논란에 섰던 윌의 부인 제이다가 아들의 친구들하고 알지? 그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할리우드에는 죽 퍼져 있으니까 오스카에서 진행자가 그런 농을 던진 거지, 그때부터 윌은 빡이 채기 시작했던 거야. 

또 할 얘기가 있는데 브루스 윌리스의 이야기. 하지만 길어지는 관계로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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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4-10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걸 형님은 인생사 모든 감정을 한가지 표정으로 연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배우이시죠.
그래서 영화도 다 한가지처럼 느껴지는데, 언더시즈는 그래도 참 재밌어요.

교관 2022-04-11 11:09   좋아요 0 | URL
언더시즈 완전 재미있죠 ㅋㅋ 언더시즈 1,2는 많이도 봤어요. 2에서 케서린 헤이글이 거의 초짜일 때 조카로 나와서 한 건 했는데 ㅋㅋ 한국어린이 입양도 하고, 이제는 엄마가 되었고. 시간이 참 ㅋㅋㅋ
 

무라카미 라디오 – 전쟁을 멈추게 하기 위한 음악 6, 7번째


6.

스티비 원더가 밥 딜런의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이 “Blowin’ In The Wine”를 부릅니다. [바람에 날려(또는 바람이 불어서)]. 1992년의 일입니다. 이 가사는 아마 여러분이 다 아시지요. 하지만 일단 읽어드리겠습니다.


스티비 원더는 15살 때 이 곡을 커버했습니다. 그는 곡 앞의 이야기에서, 60년대 당시 민권 운동이나 베트남 전쟁이 있었지만, 그 후로도 세계의 트러블은 끊어지지 않았고, 결국 이 곡은 어느 시대에도 빛을 잃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딜런 앞에서 이 곡을 뜨겁게 불렀겠습니다. 백 밴드는 부커 T & 더 MG’s 가 뒤를 받쳐주고, 피아노를 치는 것은 스티비 원더 자신입니다.


7.

피터, 폴 & 메리가 [비참한 전쟁] “cruel War”를 부릅니다. 이거 일본에서의 라이브가 너무 좋아서 그걸 틀어 드리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그 CD를 찾을 수 없어서 오리지널 LP로 틀겠습니다. 낡은 앨범이기 때문에 초반의 거친 음은 신경 쓰지 말아 주세요. 사람에게 역사가 있는 것처럼 레코드에도 옛 상처가 있습니다. 그나저나 메리 트래버스의 목소리는 몇 번이나 들어도 멋지군요.



 https://youtu.be/WZnv6qLWPy4 <= 스티비 원더


https://youtu.be/A6SEwcjeupI <= 피터 폴 앤 메리


무라카미 라디오 – 전쟁을 멈추게 하기 위한 음악 8, 9번째

(의역이 많음을 알려드립니다. 의역 없이 보시려면 위의 원본을 보면 됩니다.)


8.

도어즈의 “The Unknown Soldier” [이름 없는 병사]를 틀었습니다. {Waiting for the Sun}라는 앨범에 들어있는 곡입니다. 제가 학창 시절에 자주 라디오에서 들었던 곡입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입니다. 도어즈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밴드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너무 날카로워 그 날카로움에 자신들이 자멸해버립니다만. 이 곡 역시 “투사 시인” 짐 모리슨 다운 가사입니다. 눈에 띄는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단편적으로, 병렬적으로 반복됩니다.


9.

비틀스 해체 후에 존 레넌이 만든 대표적인 곡 [이메진]을 한 번 들어보세요. 이 곡이 발표된 해가 1971년입니다. 오늘은 잭 존슨이 부릅니다. 이 가사는 너무나 유명해서 여러분은 아마도 다 아시리라 생각하지만 일단 소개를 하겠습니다.

이렇게 읽고 나면 상당히 낙관적인 가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실제로 부르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역시 뭉클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1971년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우리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미래를 믿을 수 있던 시기였습니다. 냉소적인 이상주의자 존 레넌. 그의 죽음으로 세상은 타격을 크게 입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이죠.


https://youtu.be/JLBOjvl6i5s <=도어즈


https://youtu.be/UJ4rsrTxEjY <= 이메진



무라카미 라디오 – 전쟁을 멈추게 하기 위한 음악 10, 11번째


10.

Love And Mercy. 브라이언 윌슨이 콘서트 마지막에 자주 이 노래를 부르더군요. 혼자서 피아노를 치며 아주 조용하게 노래를 부릅니다. 마치 자신에게 말을 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것에 꽤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듭니다. 사랑과 자비의 마음 말이죠.


11.

이제 오늘의 마지막 곡은 하비 맨이 연주하는 “Amazing Grace”입니다. 오래된 찬송가입니다. 작사가 존 뉴턴은 18세기에 영국의 노예 무역업자였는데, 훗날 자신이 관련된 수많은 잔인하고 잔혹한 행위를 후회하며 회계하는 마음으로 이 곡을 썼다고 합니다. 들어보면 정말 아름다운 곡입니다. 플루트는 하비 맨, 피아노와 보컬에 소울이 넘치는 레스 맥캔입니다.


자, 오늘의 마지막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입니다.

킹 목사는 1968년에 암살당했습니다. 그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한 행위가 모두 합법적이었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Never forget that everthying hitler did in Germany was legal.”


킹 목사는 분명 이런 말이 하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자유를 위협할 수 있는 법 아래에서 개인의 권리는 틀림없이 합법적으로 빼앗길 것이라고 말이죠.


근래에는 의회제 민주주의가 효율적이지 않아서 권력을 중앙에 집중적으로 포함한 [권위주의] 같은 시스템에 마음이 끌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확실하게 효율적일지도 모르지만, 그 어둠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둔다면 결국 우리는 매우 위험한 사태에 직면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충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브루스 스프링스턴의 말은 아니지만, 지도자에게 순순히 잠자코 맹목적으로 따라가다가는 큰일이 나니까요.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평화로운 세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https://youtu.be/2y3J46DhoL0 <= 브라이언 윌슨


https://youtu.be/-TKEt6ky0qA <= 하비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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