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수족관에는 불가사리도 한 마리 있었다. 불가사리의 종류도 수만 가지에, 모양도 천차만별이다. 불가사리는 수족관에 깔린 모래나 돌에 붙어있는 균이나 녹조류 같은 것을 먹어 치운다고 해서 입양을 했지만, 어느 순간 불가사리가 보이지 않아서 물어보니 불가사리 역시 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쪽 다리부터 점점 흐물흐물하게 녹아 없어지더니 그 형체도 없이 물에 녹아버렸다는 것이다.   

  

 안타깝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수족관 속에 있는 생명체들은 각각의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 맞게 주인은 수족관에 맞는 생명체들을 입양해 온다고 했다. 참 재미있는 세상이다. 니모들의 행동을 관찰하면 아주 흥미로운 것들이 많은데, 커진 수족관에는 총 세 마리의 니모들이 있었다. 니모는 암수 구별이 없다가 후에 자신이 원하는 성별을 택하여 교배한다. 세 마리의 크기는 다 다르다.     


 가장 큰 놈, 중간 놈, 작은놈 이렇게 나뉘는데 이들의 놀이터는 그동안 수족관 속에 넣어둔 작은 커피잔이나 소품 속이다. 그런데 산호가 들어오고 나서 수족관 속 가장 큰 산호와 함께 니모들이 놀기 시작했다. 산호에서 부드러운 촉수가 나오면 니모는 그 촉수에 몸을 비비며 아아 너무 좋아, 하는 모습으로 산호 속에서 몸을 비볐다가 나왔다가 들어갔다. 재미있는 것은 큰 니모가 산호에서 몸을 비빌 때 두 마리의 니모는 절대 산호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면 나머지 두 마리는 산호를 싫어하나? 하고 생각했는데 큰 니모가 산호에서 나오면 중간 니모가 산호에 들어가서 몸을 비볐다. 그들은 서열이 확실했다. 하지만 제일 작은 니모는 절대 산호에 들어가지 않았다.  


어느 날은 중간 크기의 니모 몸에 검은 반점들이 생겼다.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했다. 스트레스라는 건 인간이든, 물고기든 생명이 붙어 있는 생명체에게는 전부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다. 니모들에게 먹이를 줘야 하는데 서열이 강한 니모가 밥을 다 먹어버리고 서열이 낮은 니모는 먹이를 먹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먹이를 줄 때 가장 작은 니모를 위해 손을 집어넣어 다른 물고기가 가장 작은 니모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하면 중간 니모가 손을 공격했다. 이런 모습은 영화 ‘니모를 찾아서’를 봐도 나온다. 첫 부분에 어린 니모가 잡혀있을 때 아빠 니모가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 니모인가? 암튼 서열이 두 번째인 니모가 공격을 한다. 니모의 습성을 잘 관찰해서 애니메이션에 삽입했다. 중간 서열의 니모가 서열이 가장 높은 니모를 받들면서 서열이 가장 낮은 니모를 보호하는 역할까지 한다. 그러니 중간 니모가 스트레스가 심해서 몸에 검은 점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어항 속에는 두 마리의 새우도 살고 있다. 두 마리의 새우도 ‘니모를 찾아서’에 나오는 새우와 같다. 새우의 역할은 물고기에 붙어있는 세균들을 먹어치운다. 새우는 가만히 있는 물고기에게 다가가서 마치 어린아이가 놀이터에 앉아서 흙을 파먹는 놀이를 하듯 가늘고 긴 다리로 정교하게 물고기의 몸에 붙어있는 세균을 떼서 오물오물거리며 먹는다. 수족관 속에는 락 블레니라는 아주 못생긴 물고기도 한 마리 있다.     


락 블레니는 다른 물고기와는 다른 모습으로 헤엄을 친다. 생긴 것도 망둥어처럼 못 생겼다. 다른 물고기처럼 시종일관 떠다니지 않고 산호에 붙어있던가 바위에 안착해 있는 경우가 많다. 락 블레니는 발처럼 생긴 지느러미로 산호를 꽉 움켜쥐는 모습으로 붙어 있다. 얼굴에는 전혀 표정이라는 게 없는 문화 주인공처럼 생겼고 육상동물처럼 눈코입이 앞면에 붙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락 블레니는 어딘가에 늘 찰싹 붙어 있다. 그러면 새우가 다가간다. 새우가 자신에게 다가오면 아이 귀찮아, 오늘은 긁어낼 세균이 없는데? 하는 표정을 짓고는 새우를 무시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그러면 새우는 어?하며 잠시 당황하더니 락 블레니가 떠난 바위를 긁는다. 그렇지만 락 블레니는 평소에 새우가 자신의 몸을 청소해 주는 걸 좋아한다. 새우에게 몸을 맡긴 다음 아, 정말 시원하구나, 하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걸 보면 참 재미있다.     


 그러던 중 새로운 가족이 한 마리 들어왔다. 복어 종류인데 다른 물고기들에 비해 움직임이 아주 느리고 지느러미의 움직임이 거의 없다. 마치 허공에 공중 부유하고 있는 느낌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복어 종류는 몸이 갑각류처럼 껍질로 덮여 있어서 몸이 유선형으로 휘어지는 헤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마치 갈치가 세로로 떠다니는 것처럼.     


 그 작은 복어의 유영은 시선을 몽땅 앗아갔다. 시간 잡아먹는 귀신이다. 하지만 다른 물고기가 조금씩 자라는 것에 비해 작은 복어는 여전했다.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몸의 색채가 노란색과 갈색의 중간색을 띠었는데 그 색이 나날이 옅어져 갔다. 몸 안의 내장 기관이 다 보일 정도였다. 약을 써보고 다른 곳에 옮겨 물을 더 깨끗하게 해 주었지만 얼마 뒤에 죽고 말았다. 그렇게 그곳의 세계는 변하고 변하는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물고기는 사라져 갔다. 그런 모습은 인간 세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인간도 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면 뒤처지고 그러다가 어느 날 사라지고 만다. 물고기들은 정직하며 솔직하다. 인간들처럼 자신의 기준에 타인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고픈 주인의 노력과 수족관 속 세계에서 그들만의 보이지 않는 규칙을 지켜가며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누구에게나 각각의 사정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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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호가 바뀌었다. 500미터 앞에 또 하나의 신호등이 있고 어김없이 내 앞에서 빨간불이 된다. 대기를 하는 곳에는 교보문고가 있던 건물이 있다. 규모가 크지 않아서 서점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 서점은 현재 시점에서 살아남기가 어렵다. 서점은 살아남지 못하지만 나는 언젠가 책방을 하고 싶다. 동네 책방은 방향만 잘 잡으면 살아는 남는다. 서점에 잠깐 들러 몇 분 동안 서서 읽는 책은 꽤나 재미있다. 그러다가 그 재미를 죽 끌고 가고 싶으면 그 책을 구입하면 된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해서 택배로 받는 기쁨보다 서점에서 원하는 책을 손에 쥐고 들고 나오는 기쁨이 아직은 더 크다.     


 그러고 보면 10년 전까지는 대형 마트 안에도 서점이 다 있었다. 특히 내가 자주 가는 곳에 있는 서점 코너에는 책을 읽을 수 있게 파스텔 톤으로 설치해 놓은 푹신한 소파가 있었다. 지하에서 그로서리 쇼핑을 한 후에 그걸 들고 2층으로 올라 서점에서 책을 골라서 좀 앉아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것 때문에 대형 마트에 일주일에 서너 번은 가게 되고, 그러다 보면 서점에 들러서 책을 읽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읽은 책 중에 책을 구입해서 나오게 된다.     


 그 덕에 대형 마트에는 늘 사람들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즐거운 것들이 많으니까. 심각하지 않고 진지하게 사람들은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했다. 위트와 유머가 가득했다. 바로 옆에는 수족관 코너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족관 역시 보는 재미가 있다. 열대어들이 유영을 하는 모습을 멍하게 보고 있으면 그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물고기의 유영을 옆에서 볼 수 있는 건 수족관 밖에 없다. 수족관은 완벽한 하나의 세계다. 수족관 속에 살고 있는 생명체에도 각각의 사정이 있다.     


 나의 활동 반경 내에는 작은 카페가 있다. 어느 날 카페의 주인이 어항을 들여놓았다. 길이가 60센티미터에 높이는 25센티미터 정도 되는, 물고기는 니모라고 불리는 열대어 두 마리에 말미잘 한 마리뿐인 작은 어항이었다. 산호나 다른 물고기는 없었다. 그런데 이동도 없는 말미잘을 보고 있는 것은 의식이 Zilch 상태가 되는 것만 같았다. 그저 ‘무’의 상태로 가만히 어항 속을 삼십 분, 사십 분씩 바라보게 된다.     


 매일 꾸준하게 보다 보면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 각각의 사정에 맞게 작은 어항 속이 자신들의 집이라 여기며 생활했다. 물고기 따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물고기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고 그들에게는 그만한 이유 역시 분명하게 있다.     


 어항 속의 물고기를 쳐다보고 있으면 시간의 흐름이라는 게 소용없어진다. 어항 속의 풍경에 한없이 빠져들게 된다. 카페의 주인은 어항 속의 물고기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 동안 어항의 크기가 커져 수족관이라 불러야 했다. 수족관 속의 세계도 풍성해지고 물고기 역시 늘어났다. 규모가 상당해진 것이다. 수족관의 길이가 옆으로 1미터가 되었고 높이는 50센티미터의 크기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산호초 종류만 스무 여종이나 되었다. 열대어와 산호초를 꾸준하게 관리하는 일은 참 대단한 일이었다. 그건 그 세계가 사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영화 속 괴생명체처럼 보이는 말미잘도 있고 사람의 뇌처럼 보이는 산호도 있다. 하늘하늘 거리는 촉수가 비어져 나와 있는데 물고기들이 닿으면 괜찮은데 사람의 손이 닿으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물의 흐름이나 수족관을 비추는 빛의 양에 따라 촉수가 나오거나 들어가기 때문에 빛의 양과 물의 흐름, 흐름의 세기를 매일매일 체크해서 관리를 해야 한다. 정말 박수를 치고 싶어 진다. 그래야만 수족관 속의 물고기들과 산호와 말미잘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죽지 않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     


 어항에서 수족관이 되었다면, 그만큼 크기가 커졌다면 커진 만큼 물고기들은 스트레스를 더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일 년 동안 죽어 없어진 산호와 물고기도 몇 마리나 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의 세계가 싫어서 그대로 죽어버린 것이다. 수족관을 가지고 산호와 물고기를 키우는 일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죽어가는 산호가 있었다. 죽어가는 산호는 죽어가는 물고기와는 다르다. 산호는 죽고 난 후 다른 산호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거나 다른 산호의 서식지가 된다. 수족관 속이지만 대단한 세계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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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는 주차장의 차에 앉아서 또 한 번 웃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웃음을 짓지 않는다는 말을 어제 들었기 때문이다. 시동을 걸었다. 차는 오래되었고 수동기어다. 나의 차에서 자동은 고작 창문 정도다. 아직 카세트테이프를 넣어서 음악을 듣는다. 지금 꽂혀 있는 테이프는 장국영의 앨범이다. 장국영의 영화도 좋지만 나는 어쩐 일인지 그의 음악을 먼저 접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구매한 장국영의 앨범이 몇 개 된다. 카세트테이프로 말이다. 카세트테이프를 사람들은 오래되면, 또는 많이 들으면 늘어나서 듣지 못한다고 하는데 나는 대부분의 카세트테이프 앨범을 지금까지 잘 듣고 있다. 장국영뿐만이 아니라 맨하탄스, 스키드로우, 본조비, 이승환, 라디오 헤드 등 대부분 수없이 많이 들었지만 지금도 탈 없이 잘 듣고 있다. 음이 늘어지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내 생각에 카세트테이프의 음이 늘어나는 건 테이프의 문제가 아니라 그걸 트는 카세트 쪽의 문제가 아닐까. 전기로 돌아가는 전축이나 오디오라도 기계가 오래되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만약 한 가수의 한 앨범을 10년 넘게 계속 듣는다면 카세트테이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여러 가수의 여러 앨범을 돌려가면서 듣는데 수많은 앨범을 매일 매시간 틀어버리는 건 오디오 쪽이니까 음이 문제가 있다면 카세트테이프를 돌리는 오디오 쪽이 느슨하게 늘어난 것이 아닐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가지고 있는 카세트테이프는 늘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잘 듣고 있다는 게 증거다. 특히 차에서 들으면 너무나 깨끗하고 좋은 음질로 음악이 들린다. 차는 오래됐고 카세트테이프지만 결과적으로 나오는 음악 자체는 좋다.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와서 늘 다니는 도로를 탄다. 징크스 같은 게 있다면 늘 보는 한의원이 문을 연 모습을 보지 않으면 그날 하루는 찝찝하다. 도로에서 반드시 한 번 멈추게 되는 신호등이 있다. 그 신호등은 항상 내가 가는 시간에 어김없이 빨간불이 된다. 거기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한의원이 있는데 문을 열어 놓는다. 물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다. 일요일에도 일을 하는 나는 일요일에 문이 열린 모습은 본 적이 없다. 당연하게도. 어떻든, 평일에는 한의원 문이 열린 모습을 봐야 한다.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징크스 같은 습관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으므로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누군가에게 말하는 게 아니다. 나 혼자 알고 있기에 비밀인 것이다.     

          

 한의원은 동네에 꼭 필요한 병원이다. 근육통이 심하거나 다리를 접질렸을 때는 신경외과보다는 한의원을 찾게 된다. 그리고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으면 금방 낫는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의원에 안 간 지 십 년은 넘었다. 한의원은 동네 미용실 같은 분위기가 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저기 보이는 문이 열린 저 한의원이 그렇다는 말이다. 한의원에는 40대 초반의 젊은 남자 한의사가 있다. 통통한 몸매에 씩씩하고 동네 어머니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하고 치료해 준다. 무엇보다 카운터에서 접수하고 보조를 해주는 직원들이 너무 좋아서 동내에서 인기다. 대기실에서는 미용실처럼 행복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흘러넘친다. 커피 향도 가득하다. 병원에서 행복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의원은 닥터 오피스 중에서도 심각하지 않은 생활에 밀접한 치유를 하는 것이라 그런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다.    

 

 엘토르 씨는 에스파냐계 사람으로 한국으로 시집온 딸의 육아를 위해 이곳에 왔다가 눌러앉게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노력을 해서 국적을 취득했다. 보험이 가능하게 되었다. 한국말은 도저히 늘지 않지만, 한의원에 가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아기를 많이 안고 본다고 허리가 아프거나, 다리가 아프면 한의원을 찾았고 거기서 따뜻하게 환대해 주는 직원들 덕분에 말이 통하는 친구 한 명 없어도 이곳이 너무나 좋다. 엘토르 씨는 “이렇게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니! 내가 사는 곳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에요! 딸과 사위 덕분에 말년에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라고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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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들어오는 풍경이 천장이 아니었다. 분명 예전에는 아침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천장이었다. 천장의 기하학적 무늬가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였다. 그리고 한참을 본다. 저런 무늬라면 건물의 벽면을 전부 기하학적으로 꾸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면 오늘이 시작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으면 타이머가 라디오를 틀어 주었다. 이른 오전에 나오는 라디오는 고요할 것 같지만 출근 준비를 하는 청취자들 때문에 오히려 소란스럽다. 그게 나쁘지는 않다. 어차피 일어나야 하니까. 라디오는 정오가 되기 전, 오전 10시부터 12시 사이에 나오는 음악이나 멘트가 고요하고 조용하다. 적요와 잘 어울리며 커피와도 궁합이 좋다. 그런 음악이 10시부터 12시 사이에 나온다. 그 시간이면 출근할 이들은 전부 출근해서 바쁜 아침 업무를 끝낸 후거나, 집에 있다면 청소를 끝냈을 시간이다. 그 시간에 듣는 라디오가 하루 중에서 가장 호수의 수면처럼 잔잔하고 평온하다.     


 그런데 요즘은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아이패드의 화면이다. 예전처럼 똑바로 누워서 눈을 뜨지 않고 옆으로 누워 잠에서 깨어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아침에 죄다 똑바로 누워 있다가 일어나는데 나는 옆으로 누워서 눈을 뜬다. 눈을 뜨는 것과 거의 동시에 아이패드의 라디오가 커졌다. 일어나서 약을 하나 먹고 물을 마셨다.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서 변기에 앉아서 볼일을 봤다. 하루의 시작은 이렇게 변기에서 시작된다고 과언이 아니다. 밤새 소화가 된 음식 찌꺼기들을 밀어내는 것부터 하루의 시작이다.   

  

 한 아파트에서 하루 동안 나오는 인간의 배설물량은 얼마나 될까. 나는 그걸 자주 생각한다. 생각만 할 뿐 입 밖으로 뱉어내지는 않는다. 모두가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달력의 뒤편 같은 것이다. 아마도 한 아파트에서 나오는 인간의 찌꺼기 양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 도시에서 나오는 배설물의 양은 상상 그 너머에 있다. 만약 하루만 정화 처리가 막히거나 고장이 나면 도시가 끔찍한 모습이 될 것이다. 그게 이틀, 한 달, 일 년이 된다면 도시는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가 되지 않을까. 한 집 안에서도 배설한 다음 변기의 물이 내려가지 않으면 큰일 난 것처럼 군다. 하물며 도시의 변기가 전부 막혀 버린다면 이건 정말 큰 일인 동시에 엄청난 일이다. 어째서 영화감독들은 재미없는 영화 말고 이런 영화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일까. 세상의 수많은 재앙이 있지만 인간이 배설해 놓은 인간 찌꺼기가 인간을 멸망시키는 이야기는 제대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재빠르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이불을 갠다. 이불을 개는 행위는 나에게 있어 일종의 쾌락 같은 것이다. 끌과 끝을 맞추어서 제대로 개 놓으면 이상하지만, 기분이 짜릿하다.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데 이불은 끝과 끝을 맞추어서 칼처럼 개 놓는 게 좋다. 그렇게 습관이 되었다. 라디오에서 김성호의 노래가 나온다. 웃는 여잔 다 예쁘다고 김성호는 노래를 부른다. 김성호의 감성이 묻어나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정말 웃는 모습이 다 예쁠 것 같지만 실은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 반대가 더 많다.    

 

모르는 사람이 나를 보며 웃음을 보일 때 가장 먼저 드는 건 경계다. 나에게 뭔가를 바라거나 물건이나 판매상품을 팔아버리려고 웃음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뒤에서 무방비로 들리는 타인의 웃음소리는 폭력에 가깝다.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은 사실 잘 없다. 웃음이 예뻐지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훈련 없이 예쁜 웃음을 짓는 사람은 정말 몇 없는 것 같다. 웃음이 어울리는 사람은 어린이들이다. 어린이 시기를 지나고 나면 웃음이란 상대방으로 하여금 몰이해와 경악을 유발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침에 나오는데 나를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악의는 없는 웃음이다. 나이는 60대 중후반 아주머니다. 물론 나는 저 아주머니를 모른다. 저 아주머니가 나에게 웃음을 보이는 건 아마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웃음을 지어 보였을 것이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도 남자들은 웃음을 잘 보이지 않는다. 웃음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나도 웃음 대신 아주머니에게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를 건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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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다는 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린이 때에는 걷기보다 주로 뛰어 다닌다. 높은 곳을 보면 오르려 한다. 미끄럼틀이 있으면 어린이들은 이상하지만 미끄럼틀을 기어 올라간다. 계단으로 오르지 않는다. 에너지가 넘친다. 그날 하루에 에너지를 전부 방출해서 방전이 된 다음에야 잠이 든다. 그래서 쿨쿨 잠을 자며 중간에 깨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어 갈수록 뛰기보다 걷게 되고 나중에는 이 마저도 귀찮아 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서 뛰는 사람들은 급한 일이 있는 사람과 조깅을 하는 사람들 뿐이다. 일상에서 아이들처럼 뛰어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두 다리가 있으니 늘 걷게 된다.

2018년 백영옥의 말과 글에서는 ‘어디에 살 것인가’ 칼럼이 실렸다. 백영옥은 쇼핑몰을 종종 걷는다. 미세 먼지 때문이다. 이상한 건 쇼핑몰 산책은 30분만 해도 피곤해진다는 것이다. 걷는 걸음걸이로 보면 공원을 걷는 것과 비교도 되지 않게 적게 걸었는데도 그렇다.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읽은 유현준 교수의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우리가 걷고 싶은 거리가 어떤 거리인가에 대한 답이 있다. 걷고 싶은 환경이 되려면 걸을 때 풍경이 바뀌어야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쇼핑몰에 대형 서점이나 멀티플렉스 극장이 있는 이유는 ’변화하는 자연‘이 없기 때문이다. 계절을 바꿀 수 없으니 극장의 상영작이나, 서점의 책이라고 바꾸는 것이다. 쇼핑몰이 인테리어를 자주 리모델링하는 이유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라면 백영옥은 소설가는 뉴욕의 건축과 뉴욕에서는 서울보다 더 자주 걷게 되는 이야기를 한다.

걷는 것, 인간이 도심 속에서 걷는 다는 행위, 인간이 걷는 다는 것에서 사람은 어디에서 살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한다. 더불어 계절마다 시시각각 다르게 변하는 자연 속에서 걷는 것과 인공적으로 바꾸어주는 거대한 쇼핑몰을 걷는 것의 차이는 걸어본 사람만이 그 차이와 변화를 알 수 있다.

나 역시 십 년 넘게 트레드밀이 아닌 야외에서 조깅을 하고 있다.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고 그날그날의 변화까지 느낄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사는 곳은 바닷가에 인접해 있고 강변도 있어서 조깅을 하거나 걷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굳이 첩첩산골로 들어가서 자연인처럼 생활하지 않아도 쇼핑몰이 아니라 걸을 수 있을 때, 버스 두 세 코스 정도의 거리는 매일 걷는다면 걷기의 소중함과 위대함(까지는 아니지만)을 알지도 모른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언젠가 달리지 못하는 날이 온다. 그전까지 실컷 달리고 싶다. 그러려면 달릴 수 있는 거리의 공간이 있는 것에 살아야 한다. 달리기 위해서 자동차를 타고 먼곳까지 가야 한다면 그건 너무 힘들고 귀찮은 일이다.

그렇게 달리다가도 어느 날 이제 달리지 못하겠구나 하는 순간이 또 온다. 더 이상 몸이 달리는 것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때는 걸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걷지도 못하는 시기가 오면 이제 누워서 보내야만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생이라는 게 긴 것 같지만 지난 십 년을 보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간다. 한 시간은 지루한듯 한데 일 년은 금방이다.

매일 한 두 시간씩 잘 걸어 다닌다면 우리의 삶이 조금은 달리 보이지 않을까. 걷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의 시야도 넓어지는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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