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봐 주는 이가 없어서 한없이 강해지는 한 여자의 이야기. 은희와 영수는 요양소에서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수는 서울에서 바를 경영하며 호랑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사람이다. 약국에 약을 사러 가서도 약사에게 치근덕거리는 영수. 영수는 그런 방탕한 생활에 젖어 살다가 심각한 간경변에 걸린다. 바도 망하고 애인과도 사이가 멀어진다. 영수는 심각해지는 병에 몸을 방치하다가 요양소에 갈 요량으로 엄마에게는 유학을 간다고 한다.

영수는 그렇게 삶을 포기했지만 요양소에서 8년이나 지낸 스탭 같은 여자 은희를 만나면서 조금씩 희망을 얻는다. 처음 요양소에서 영수는 적응을 하지 못한다. 자신의 소개를 하는데 모두가 시니컬하게 자신을 소개한다. 난 신부전이야, 난 간경변이야. 넌 뭔데? 라는 식이다. 그 속에서 영수는 적응하기가 힘들다. 그런 영수에게 먼저 다가간 것이 은희였다.

은희는 폐 질환을 앓고 있는 심각한 환자지만 그녀는 언제나 밝다. 은희는 오랫동안 병과 동거를 하고 있어서 삶이 너무나 담담하다. 조금만 뛰어도 죽을 수 있는 은희지만 밝게 웃는 그녀에게 영수도 마음을 연다. 은희는 천천히 움직였고 걷는 것도 느렸다. 은희 씨는 정말 아무것도 아파 보이지 않아요. 라고 영수가 말하니 은희는, 그건 누가 나를 봐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제 좀 티를 낼까요. 라고 한다.

두 사람은 아픈 몸으로 연애를 하기 시작한다. 연애를 시작한 은희는 행복에 겨워, 근데요,,, 남녀가 깜깜한 극장에서 영화 보게 되면요,,, 손도 잡고 그러잖아요? 근데 그건 영화에서나 그러나 봐요? 사랑스럽게 보이는 은희의 모습이다.

그러다가 은희가 영수에게 같이 살자고 고백을 한다. 영수 씨, 우리 같이 살래요? 같이 살래요? 결혼하자는 얘기가 아니에요, 나 몸도 아프고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요, 영수 씨 몸 낫 도록 도와줄게요.

결혼을 하는 건 아니라고, 살다가 싫어지면 헤어지자고, 요양원을 나와 시골에서 함께 살아가는 두 사람은 행복하기만하다. 영수의 간수치가 좋아진다. 그의 병에 진척이 보임으로 두 사람의 미래가 불투명해진다.

미래가 보이는 남자와 현재만 살아가는 여자.

헤어진 애인인 수연이 찾아와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영수는 수연이가 알고 있는 자신이 은희가 알고 있는 자신보다 더 자신의 모습으로 받아들인다. 영수와 은희의 세계는 수연이가 주고 간 핸드폰으로 벌어지기 시작한다.

영수는 서울로 가고 은희에게 연락을 끊은 채 며칠을 보낸다. 전화를 아무리 해도 영수는 받지 않는다. 너무 무서운 은희는 영수에게 계속 전화를 한다. 영수는 어쩔 수 없이 은희의 전화를 받는다. 수화기 너머로 은희는 말한다. 나 너무 무섭고 보고 싶고 화가 나.

서울에서 돌아온 영수에게 은희는 한 마디 한다. 못 생겨졌어. 그만큼 은희에게 영수는 낯선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후 영수는 은희의 폐에 찬 물을 빼는 소리도 듣기 싫었다. 끝내 술을 마시고 은희에게, 넌 천천히 먹는 게 지겹지도 않니? 난 지겨운데. 너 그냥 나보고 헤어지자고 하면 안 되니? 니가 좀 떠나줘 나 그런 얘기 못하는 거 니가 더 잘 알잖아.

이후 영화는 어떻게 될까. 자신보다 옅은 병을 가진 남자를 사랑하며 위태한 여자. 현재가 중요한 여자와 내일이 중요한 남자의 사랑. 그런 은희에게 밀땅 같은 걸 할 여유가 없다. 절대 뛰어서는 안 되는 병을 지녔지만 새벽에 언덕을 달리는 은희에게 한 없이 몰입되었던 영화 ‘행복’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유월 초부터 어제까지의 비슷한 곳의 조금씩 다른 풍경의 모습이다. 유월이 되면 개늑시에 하늘은 그야말로 아름다움의 결정체가 된다. 도화지에 그림 좀 그린다 하는 아마추어 화가가 멋지게 각각 채색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쪽 하늘은 동쪽 하늘인데(저기가 동해다) 분홍과 자줏빛의 색채가 펼쳐졌다. 거기에 고요가 세상을 덮친 것 같다.

오월의 금계국이 아직 유월 초에 붙어 있을 때다. 눈으로 볼 때는 몹시 멋진 풍경이었는데 사진으로 담는 순간 형편없어진다. 그게 아쉽네.

구름이 마치 부처님의 손바닥 같았다. 저 멀리서 제천대상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의봉을 흔들며 날아올 것만 같다.

유월에도 비가 자주 내렸다. 그 사이에 맑은 날. 이런 날은 비 온 뒤라 대기에 가스층이 없어서 아주 맑아 보인다. 그러나 저 멀리 나뉜 충위로는 대기가 안 좋아 보인다. 이렇게 같은 지역인데 여기저기 날씨가 다른 경우가 어린 시절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저 일상이 되어 버렸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날이다. 낮동안은 비가 쏴 왔지만 저녁에는 이슬비가 내렸다. 조깅을 하러 나왔던 날이다. 누군가 강가에 의자를 버려놨다. 도대체 누가 이런 곳에 의자를 들고 나와서 버릴까. 나 의자를 버릴래 하며 강변까지 나오는 사람의 상태는 어떤 모습일까. 아니면 엄청난 예술가라서 오브제 용으로 여기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에 사라진 걸 보면 말이다.

이 날도 비가 왔던 날이다. 땅바닥이 촉촉하게 젖어 있다. 저 멀리서 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있다. 오늘은 정말 붉게 붉게 타오른다. 신기하기만 하다.

이제부터 여름의 날로 젖어들었다. 일곱 시에도 날이 밝다. 달도 떠 있다. 마치 일큐팔사 안으로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달과 새와 하늘을 한 번에 담았다. 이런 순간을 포착하기에 폰이 최고다. 카메라라면 아마 뷰 안에 새는 없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새만 찍는 아마추어 사진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다. 예전에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자신이 희귀한 꽃을 찍고 다른 사람들이 찍지 못하게 그 희귀한 꽃을 꺾어 버리는 일들이 많았는데 요즘도 그런 사람은 늘 그렇다고 한다.

이곳은 국가정원의 한 곳인데 이곳으로 조깅을 했다. 보통 달라는 코스의 반대쪽이다. 사람들이 많아서 잘 안 오려 하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가끔 이쪽으로 달리게 된다.

이 날도 비가 오는 날인데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저녁의 하늘은 노을이 빛나고 있다. 달리다가 뒤로 돌아서 보니 하늘이 저래서 사진을 담았다. 조깅 코스에서 하늘에 대고 사진을 담고 있으면 사람들 역시 멈춰서 하늘을 본다.

어제의 서쪽 하늘이다. 그야말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 노을을 볼 수 있을 때 실컷 보자. 매년 보는 노을이지만 매년 색다르다. 노을이란 어떻게 이렇게 불타오르는 것 같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7, 80년대 오래된 라디오를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어서 듣고 있다. 고작 4, 50년 정도밖에 안 된 방송인데 마치 200년은 된 방송처럼 느껴진다. 마치 세계가 형성되기 전 동굴에서 오롯하게 방송을 듣는 기분이다. 70년대 노래들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평온을 유지하게 하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가사가 많다. 파랑새, 님, 해, 당신 없이는, 나의 사람아, 같은 가사가 죽 이어진다. 그리고 모든 노래의 연주가 록이 기반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요즘처럼 컴퓨터로 음을 입히는 기술이 없기에 손가락이 불어 터져라 오직 직접 연주해서 녹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드럼 소리와 전기 기타 소리가 대부분의 노래의 배경이 되고 있다. 사연이 소개되어 선물도 설탕 1킬로그램을 주기도 한다.


좀비 드라마 [라스트 오브 어스]에서도 80년대 노래가 계속 나온다. 웸이라든가, 린다 론스테드의 롱롱 타임이라든가. 80년대를 청년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그 시절을 미치도록 그리워하고 있다. 그들은 현재 돈과 권력을 쥐고 많은 80년대를 떠올리는 창작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넷플릭스 같은 플랫폼이나 요즘 나오는 영화에서도 그걸 잘 알 수 있다.


추억이라는 건 가슴을 따뜻하게 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기억 하나씩은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추억을 조심스럽게 자신을 모르는 불특정 사람들에게 풀어놓는다. 그게 영화나 영상인 경우가 많다. 또는 그런 영상 밑에 달린 댓글들.


중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에 다녔는데 옆집에 살았던 고등학생 누나는 사람대우를 해줬다며 지금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냐는 이야기들.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소주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주인이 아닌 것이다. 보잘것없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역사 하나하나가 모여 지금 이 사회가 망가지지 않게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자들아 제발 착각하지 마라. 평범한 사람들이 일구어 놓은 몇십 년의 역사를 한 번에 무너트리려 하지 말라고.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겨울은 그래도 기억이 난다. 아버지와 주말에 목욕탕에 다닌 덕분이다. 하나의 작은 기억은 확대되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겨울의 기억은 만개한 꽃처럼 선명한데 여름은 기억에서 소거되어 있다.


왜 그럴까. 무척 더웠을 텐데, 그래서 분명 그에 따른 이야기가 기억이 날 텐데 기억이 없다. 여름 방학에는 뭘 했는지 방학숙제는 했는지 탐구생활은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김세원의 팝스퍼레이드를 듣고 있었다. 60년 알랭드롱의 [태양은 가득히]의 주제곡이 나왔다. 알랭드롱은 리플리를 너무나 무섭고도 아름답게 연기를 했다. 우리는 나이를 먹고 늙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싫어한다. 늙으면 외모가 볼품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멋있게 나이 들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늙어가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사람이 알랭드롱이다. [태양은 가득히]에서 알랭드롱은 그야말로 잘생기고 멋진 아름다운 청년이다. 지구상에서 볼 수 없는 외모를 지녔다. 그런 생각을 하며 노래를 듣는데 강아지 새끼의 입 냄새가 떠올랐다. 아직 이가 덜 나서 여기저기 막 깨물고 다닐 때 입에서 나던 연한 비린내가 너무 좋은 아기 강아지의 냄새.


마당이 있었다.

우리는 늘 마당이 있는 집에 살았다. 생각해 보면 마당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겨울에 얼음이 얼어 얼음 위에서 놀다가 동생이 미끄러져 턱이 깨져서 병원에서 꿰맨 자국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때 엄마한테 많이 혼났다. 마당에서 논 기억은 분명히 많은 머물러 있지는 않은 거 같았다. 마당은 그저 마루와 대문의 사이에 있고 그 연결 통로 같은, 가로질러 안과 밖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곳이었다.


늘 여러 집이 같이 사는 집에서 마당도 공유를 해서 그저 지나치는 곳일지도 모른다. 어린이 때에는 집 마당에서도 잘 놀았는데 학교를 다니고부터는 마당은 그저 지나치는 공간이었다. 집의 마당보다는 친구들이 있었던 학교의 운동장이 좋았다.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시작해서 방 두 개에 마당이 딸린 전세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마당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도 누구 하나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으니까. 장난감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아버지는 일요일에는 볕이 드는 마당에 같이 앉아서 프라모델을 만들어주곤 했다. 그 시간이 나에게는 가장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우리만의 공간이라는 게 행복의 충족요건이었다. 우리만의 공간인 마당에 처음으로 강아지를 키우게 되었다. 아버지는 원래 개를 무척이나 싫어하셨다. 그런 어른들이 있다. 아버지가 그랬다. 그런데 새끼 강아지가 생기고 아버지는 마당에 개집을 직접 지었다. 목공소에서 나무를 직접 사 와서 뚝딱뚝딱 개집을 지었다. 아버지는 아기 강아지를 위해 매일 수프를 끓이고, 우유를 데워 먹이곤 했다. 그때부터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해서 아버지는 돌아갈 때까지 개와 함께였다. 외식이라도 할라치면 집에 있는 강아지가 걱정이 되어서 안 된다며 숟가락도 놓으시고 집으로 가버렸다. 그때가 호텔에서 예약해서 먹는 식사였는데도 그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강아지도 아버지 곁으로 갔다.


강아지를 키우면서 마당에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마당은 좁지만 넓은 세계였다. 가족 만이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마당, 그 마당에서 자유롭게 다니던 새끼 강아지들. 그 녀석들의 입에서 나는 보드랍고 연한 비린내가 생각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앨리스와 셀린은 둘도 없는 친구로 남편에 아들도 한 명씩 비슷한 구석이 많다. 아들들은 등교도 같이하고 하교도 같이 한다. 축하할 일이 있으면 두 집이 함께 축하를 할 정도로 가족 같은 사이다.

그러던 중 셀린의 아들 맥스가 2층 베란다에서 새(🦅) 집을 만지다가 그만 떨어진다. 건너편에서 앨리스가 보고 소리를 지르며 셀린의 집으로 뛰쳐 가지만 셀린은 청소기를 돌리느라 듣지 못한다. 그렇게 맥스는 죽고 만다.

그 뒤로 두 사람은 기기묘묘한 기류가 흐른다. 아들을 잃은 셀린은 앨리스의 아들에게 접근하고, 앨리스의 남편의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죽는 등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앨리스는 셀린을 의심하고 점점 광기를 부린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가 없고 과거 병력 때문에 오히려 남편에게 의심만 사게 된다. 아들을 잃은 셀린과 친구를 잃은 테오는 점점 가까워지는데, 앨리스는 엄마인 자신과는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다고 느낀다.

앨리스 주위에서 계속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이 전부 셀린이 꾸민 짓이라 생각하는 앨리스는 급기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저지르는데. 이 영화는 시간도 짧고 앤 해서웨이와 제시카 차스테인의 점점 미쳐가는 연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마지막은 생각지도 못한 결말로 치닫는다. 아마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걸. 아니지 원작이 있으니 소설을 읽은 사람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는 두 명의 주인공 말고도 아들인 테오의 연기를 보는 것 역시 재미있다. 앤 해서웨이는 나아가 든 티가 난다. 그런데 제시카 차스테인은 이전보다 더 아름답고 예뻐졌다. 60년대 자리 잡은 중산층이 입는 의상을 보는 재미도 있다.

광기와 집착에 매몰된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보여주는 영화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존재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한 영화, 두 주인공의 무시무시한 인간 광기의 영화 ‘마더스’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영화는 판타지다. 주인공 태석은 고도자본주의가 만개한 이 세계에서 히어로적인 캐릭터다. 말수가 적고, 손으로 뭐든 만들고,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집과 인간의 관계를 적립한다.

태석은 오토바이로 전단지를 돌리는 일을 하는데 전단지가 문에 며칠씩 있으면 그 집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문을 따고 들어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활한다. 빈 집에서 목욕도 하고, 책도 읽고, 티브이도 보고 잠도 잔다. 요즘 일본 드라마 히루도 이 같은 방식이다.

그렇지만 태석은 빈집에서 돈을 가져 나온다거나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러운 곳은 치우고, 닦고, 화초에 물도 주며 망가진 물건은 고쳐 놓는다. 마치 살아있는 집으로 바꾸어 놓고 집을 나온다.

그러던 중 평창동의 부잣집에 들어간다. 태석은 그 집에서 자기만의 고요를 즐기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내는데 그 집은 빈집이 아니었다. 그 집의 어두운 구석에 선화라는 멍투성이의 힘없는 여자가 쭈그리고 앉아서 태석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화는 태석의 행동에 마음의 안정을 찾아간다. 비뚤어진 걸 바로잡고, 안정되지 않은 걸 안정되게 하는 태석의 손에서 선화는 마음의 안정울 찾아간다. 선화는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는데 사과와 폭행의 반복이 이루어진다.

태석은 자신의 손재주로 골프채 3번 아이언을 휘둘러 골프공을 날려 남편을 쓰러트리고 선화를 데리고 집을 나와 오토바이를 타고 둘이서 빈집을 돌며 생활을 한다. 빈집에서 망가진 티브이를 고치고 흐트러진 물건을 바로 잡는 태석의 모습에서 선화는 웃음을 찾아간다.

그러다가 북촌의 한옥 집에 가게 되는데 그 집에서는 두 사람이 할 것이 없었다. 문도 잠겨있지 않고, 정리할 물건도 없고, 안타까운 화초의 모습도 없었다. 그 집의 가족들이 끈끈한 정으로 집을 따스하게 잘 이끌어 왔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집에서 두 사람은 잠만 자다가 나온다.

한 낡은 연립주택에 들어가는데 노인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성스레 염을 하고 묻어준다. 하지만 노인의 가족이 태석을 무단칩입과 살해의 죄를 물어 태석은 교도소로, 선화는 남편에게 가게 된다.

태석은 교도소에서 선화에게 가기 위해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훈련을 한다. 그건 인간의 시야각 180도를 벗어나는 훈련이다. 어둠과 공간을 이용해 교도관의 시야각에서 벗어나 선화를 찾아간다.

태석은 선화의 집에서 남편의 시야각에서 벗어난 채 생활을 한다. 남편은 아내와 단 둘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세 명이 그 집에 있었다. 선화는 남편에게 미소를 지으며 밥 맛있게 먹으라는 대사를 한다. 그 대사는 남편의 시야각에서 벗어난 남편 뒤의 태석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 형태를 띠고 있다. 태석의 대사가 한 마디도 없다. 집이라는 공간은 인간이 편안한 유대관계가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점점 소유욕의 대명사로 변질해 가는 모습을 영화는 꼬집는다.

해외버전의 제목은 쓰리 아이언이다. 태석이 휘둘렀던 골프채를 말한다. 김기덕은 재능은 있었으나 삐뚤어진 욕망이 자신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지 않았나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