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판타지다. 주인공 태석은 고도자본주의가 만개한 이 세계에서 히어로적인 캐릭터다. 말수가 적고, 손으로 뭐든 만들고,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집과 인간의 관계를 적립한다.
태석은 오토바이로 전단지를 돌리는 일을 하는데 전단지가 문에 며칠씩 있으면 그 집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문을 따고 들어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활한다. 빈 집에서 목욕도 하고, 책도 읽고, 티브이도 보고 잠도 잔다. 요즘 일본 드라마 히루도 이 같은 방식이다.
그렇지만 태석은 빈집에서 돈을 가져 나온다거나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러운 곳은 치우고, 닦고, 화초에 물도 주며 망가진 물건은 고쳐 놓는다. 마치 살아있는 집으로 바꾸어 놓고 집을 나온다.
그러던 중 평창동의 부잣집에 들어간다. 태석은 그 집에서 자기만의 고요를 즐기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내는데 그 집은 빈집이 아니었다. 그 집의 어두운 구석에 선화라는 멍투성이의 힘없는 여자가 쭈그리고 앉아서 태석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화는 태석의 행동에 마음의 안정을 찾아간다. 비뚤어진 걸 바로잡고, 안정되지 않은 걸 안정되게 하는 태석의 손에서 선화는 마음의 안정울 찾아간다. 선화는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는데 사과와 폭행의 반복이 이루어진다.
태석은 자신의 손재주로 골프채 3번 아이언을 휘둘러 골프공을 날려 남편을 쓰러트리고 선화를 데리고 집을 나와 오토바이를 타고 둘이서 빈집을 돌며 생활을 한다. 빈집에서 망가진 티브이를 고치고 흐트러진 물건을 바로 잡는 태석의 모습에서 선화는 웃음을 찾아간다.
그러다가 북촌의 한옥 집에 가게 되는데 그 집에서는 두 사람이 할 것이 없었다. 문도 잠겨있지 않고, 정리할 물건도 없고, 안타까운 화초의 모습도 없었다. 그 집의 가족들이 끈끈한 정으로 집을 따스하게 잘 이끌어 왔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집에서 두 사람은 잠만 자다가 나온다.
한 낡은 연립주택에 들어가는데 노인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성스레 염을 하고 묻어준다. 하지만 노인의 가족이 태석을 무단칩입과 살해의 죄를 물어 태석은 교도소로, 선화는 남편에게 가게 된다.
태석은 교도소에서 선화에게 가기 위해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훈련을 한다. 그건 인간의 시야각 180도를 벗어나는 훈련이다. 어둠과 공간을 이용해 교도관의 시야각에서 벗어나 선화를 찾아간다.
태석은 선화의 집에서 남편의 시야각에서 벗어난 채 생활을 한다. 남편은 아내와 단 둘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세 명이 그 집에 있었다. 선화는 남편에게 미소를 지으며 밥 맛있게 먹으라는 대사를 한다. 그 대사는 남편의 시야각에서 벗어난 남편 뒤의 태석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 형태를 띠고 있다. 태석의 대사가 한 마디도 없다. 집이라는 공간은 인간이 편안한 유대관계가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점점 소유욕의 대명사로 변질해 가는 모습을 영화는 꼬집는다.
해외버전의 제목은 쓰리 아이언이다. 태석이 휘둘렀던 골프채를 말한다. 김기덕은 재능은 있었으나 삐뚤어진 욕망이 자신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