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뉴올리언스를 완전히 덮친 5등급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메모리얼 병원에 있던 환자와 가족들 그리고 의사, 간호사 1200명이 고립이 된다. 그들은 모두 긴장을 하고 태풍에 대비를 한다. 메모리얼 병원은 병원에 있는 사람들 이외에 마을 주민들도 병원에서 대피할 수 있도록 했다. 늘 그렇게 해 온 것이다. 마을은 흑인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태풍이나 자연재해에 연약한 집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화에서는 카트리나가 상륙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드라마) 속에서는 실제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장면을 교차 편집해서 몰입감을 최고조로 이끈다. 메모리얼 병원의 의사, 간호사 그리고 직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늘 그런 것처럼 농담도 하며 태풍에 대비를 한다. 밤이 도래하고 깊어질수록 카트리나의 강도는 점점 거세진다. 모두가 아무렇지 않은데 주인공 애나만 두려움에 몸이 떨려 온다.


애나는 메모리얼 병원에 상주하는 의사가 아니라 파견된 의사여서 처음 겪는 병원에서의 태풍 대비는 겁나기만 했다. 카트리나는 뜨거워지는 바다의 영향으로 엄청난 허리케인으로 발전을 하는 것 같았는데 생각하는 것만큼의 큰 피해는 주지 않고 지나가게 된다. 그럼에도 병원의 창문이 깨지고 사람들은 두 병동이 있는 메모리얼 병원에서 한 병동으로 옮겨야 하는 과정이 있었고 그 통로는 태풍으로 인해 곧 무너질 것만 같았다. 모든 사람들을 그 통로를 통해 저 병동으로 옮겨야 하는데 그 중심에 애나가 사람들을 도운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고  해가 뜨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틀째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영화는 카트리나가 덮치고 간 후 15일이 지나 메모리얼 병원에서는 시신 45구가 발견이 된다. 그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정부 조사단은 의료진을 조사하게 된다.


카트리나가 지나가고 난 후 다음날부터 문제가 발생하는데 불어난 둑의 물이 점점 뉴올리언스 마을을 덮치게 된다. 대지가 해수면보다 낮아서 모든 집들이 점점 물에 잠기게 되고 흑인들은 대피할 곳이 없어서 점점 병원으로 몰리게 된다.


카트리나가 상륙하기 전 시설담당자가 예전부터 태풍이 와서 병원이 침수가 되었을 때 전력이 차단이 되는 것을 경고했다. 전력은 1층에 있기 때문에 태풍 때문에 둑이 무너지면 1층은 자연스럽게 물에 잠기게 되고 발전기가 있는 1층이 침수가 되면 병원 전체가 마비가 될 수 있음을 계속 경고를 해왔지만 병원의 임원진들은 늘 무시했을 뿐 아니라 병원에는 모든 매뉴얼(전쟁 시, 강도가 들었을 시, 무너졌을 시 등)이 있었지만 침수에 대한 매뉴얼이 없었다.


태풍이 몰려와서 병원에 고립이 되었을 때 침수가 되고 나서 갇혀 있는 사람들의 대처에 대한 병원과 정부의 데이터 교류가 전혀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틀째부터 침수로 인해 병원과 도시 전체가 점점 물에 잠겨 외부와 통신이 단절되고 도시의 전력이 차단된다. 도시의 전력으로 발전기가 돌아가는 병원 역시 전기 공급이 중단된다. 산소호흡기, 의료장비를 사용하지 못해 환자들이 곳곳에서 죽음과 마주하게 되고 병원으로 대피해온 사람들로 인한 식량부족, 엄청난 더위로 인한 환자들의 고통, 무엇보다 사람들이 언제 탈출할지 모르는 극심한 두려움 때문에 고립된 병원이라는 곳은 사람들을 살리는 곳이 아니라 죽음을 내 모는 지옥이 되어 간다.


옥상에 헬기장이 있지만 18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탓에 위험하기만 하고, 구조대가 오지만 환자들을 색깔이 있는 띠로 분류한다. 움직일 수 있는 환자, 못 움직이는 환자, 그리고 살 가망이 없는 환자. 처음에는 병원의 의료진들은 구조대가 오면 위독한 환자들부터 먼저 내보냈는데 구조대는 말이 달랐다. 그렇게 하면 시간이 너무 더디다, 움직일 수 있는 환자 먼저 살리는 게 낫다. 그래야 시간이 절약된다.라고 한다. 도대체 누가 생명의 순서를 정할 수 있을까. 병원은 아비규환이 되어간다.


찜통 같은 병원의 복도와 병실은 마구 갈긴 대소변 때문에 악취와 세균으로 인해 사람들은 공황상태가 되고 더 이상 사람들을 받을 수 없는 병원 측에서는 병원으로 오는 흑인 가족들에게 총을 겨누게 된다. 도시의 사람들은 병원에 헬기가 오는 모습을 목격하고 메모리얼 병원에 가면 탈출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몰려오지만 사실 헬기로는 환자 한 사람 정도만 이송할 수 있었다. 그것도 신생아 정도.


병원 밖 도시에는 가게를 털고 탈취가 난무하고 밤에 움직이는 사람들은 총으로 쏴 버리기까지 한다.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부시 대통령과 정부는 어떠한 도움의 손길도 제대로 뻗지 않는다.


점점 생지옥으로 변해가는 병원. 이 드라마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드라마에서처럼 2005년 여름 미국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문에 엄청난 피해가 있었다. 실종과 죽은 사람의 수가 2,500명에 이르렀다. 드라마를 보면 잘 나오지만 남부에는 흑인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자동차도 없어서 허리케인이 온다는 소식에도 제대로 피난도 가지 못했다.


미 정부는 허리케인이 빈민층을 휩쓸고 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빈민가의 피해를 줄이는 비용과 허리케인이 지나가고 난 후 시신을 치우는 비용을 계산을 했다. 그리고 자본이 덜 드는 쪽을 택한다. 그것이 후자였다. 당시 미 정부는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후 수많은 시신들을 지역 경찰이나 단체, 민간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여름이라 시체는 곳곳에서 썩어가고 엉망이었다. 그럼에도 미 정부는 시민단체나 지역 공무원들은 건드리지 못하게 한 후 하나의 업체를 지정해서 시체 인양의 권한을 준다. 그 업체는 시체 한 구당 얼마, 식으로 시체 독점 체재로 인양을 했다. 지옥이었다.


이를 두고 선진국이라 불리는 미국의 민낯 ‘재난 자본주의’라 부른다. 후에 그 사실이 국회에서 미국 전 국민에게 까발려졌고 미국 사회는 발칵 뒤집어졌다.


요즘은 2시간짜리 영화보다 이렇게 방대한 스케일의 드라마가 훨씬 내용면이나 디테일에서 눈을 뗄 수 없다. 허리케인이 몰아닥친 도시를 이렇게 표현을 하다니, 하며 놀랄 수밖에 없다. 베이츠 모텔에서 미친듯한 연기를 보여줬던 베라 파미가가 ‘재난, 그 이후’에서는 의사로 분해 고군분투한다.


4화 말미에서 지칠 대로 지친 애나가 동료 간호사에게 말한다. 아비규환의 주위를 둘러보며 "이건 제3세계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에요, 여기가 아니라.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는 거죠?"


인간에게 있어서 최선의 희망인 동시에 최고의 절망은 바로 인간이었다.


그래픽에 몰두한 영화보다 원작을 중심으로 실화를 배경으로 스토리가 이어져 매우 아프고 묵직한 몰입감을 보여준다. 살아있는 듯한 플롯과 함께 흑인들의 배제에서 나타나는 사회적인 이면성을 보여준다. 시작은 태풍이라는 자연의 재해가 일으켰지만 비극은 인간의 재난으로 인한 인재로 이어지는 대단했던 미드 ‘재난, 그 이후’였다.


https://youtu.be/eZhde_BLv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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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포포(담뽀뽀)

음식의 탐미와 미식의 허영.

굴에 떨어진 피가 퍼지는 예술작품 같은 마법.

단 음식에 대한 인간의 갈망.

라면을 빨아 당겨 목구멍으로 넘기는 쾌감.

쾌락적 후추와 쾌락적 레몬을 젖가슴에 뿌려 먹는 욕망.

쾌락의 절정은 음식에서 완성되고.

죽음을 앞두고도 끊을 수 없는 완탕면의 유혹.

인간의 위를 채우기 위해 무수히 죽어간 생물들.

이 모든 것들이 나대거나 모자라지 않게 영화 속에 잘 스며들어 있다.

영화는 웨스턴의 대결구도를 따라간다. 맛이 없는 탐포포네 라멘을 일으키기 위해 은둔 고수들을 찾아 나서고 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라면 맛의 ‘1’을 올리기 위해 노력과 훈련을 처절하게 한다.

라멘집에서 라멘과 주인장인 탐포포를 둘러싼 대결은 그야말로 웨스턴 서부극의 일대일 결투와 같다. 장엄하고 비장한 음악과 배경은 없지만 라멘에 대한 집념과 80년대 도쿄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수구에서 대결을 펼치는 장면은 너무나 멋지다.

라멘 하나로 이렇게나 재미있게 인간의 모든 욕망을 표현할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영화다. 인간의 발끝부터 시작하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음식이다. 음식은 죽음과 직결한다.

영화 속에는 김치와 상추에 싸서 먹는 돼지갈비가 나온다. 돼지갈비는 꽤 오래전에 일본에 상륙한듯싶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 끝에 탐포포는 네기소바를 만들어낸다. 바로 줄을 서서 먹는 라멘. 그것을 해내고 만다.

마지막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다. 아기가 엄마의 품에서 젖을 빨고 있는 장면은 긴 호흡으로 점점 클로즈업이 되며 끝난다. 인간의 탄생은 음식과 함께 출발한다. 그 출발을 알리는 것이 엄마가 만들어낸 모유였다. 엄마 젖을 빨아먹는 아기의 마음속에는 생존과 함께 오감도 열리게 된다.

음식이 인간의 탐욕을 잘 말해주는 영화가 후에 또 나오게 된다. 브라질과 이태리 영화 ‘에스토마고’다. 요리 영화가 아닌데 요리 영화인 이상하고 굉장한 영화다. 음식 하나를 가지고 권력을 가지게 되는, 인간의 욕망 충족에 대한 갈망을 음식으로 만들어낸 영화였다.

영화 ‘탐포포‘는 ‘담뽀뽀‘라고도 발음이 되고, 제주도에는 담뽀뽀라는 일본식 라멘집도 유명하다고 한다. 탐포포는 민들레이며, 영화 속 간판이 민들레 삽화로 되어 있다. 85년 영화로 영화 속 라멘 한 그릇 가격이 480엔이다. 우리나라 돈으로 50원 정도인데 아주 저렴해서 서민화가 확 이루어졌나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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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즈응말 잘 만들었다. 픽사에서 만들면 영화는 참 잘 만든다. 이음새 하며, 우주선이 날아가며 분사하는 하얀 연기며, 캐릭터들의 대사와 행동은 나무랄 데가 없다. 그저 입을 벌리고 신나게 보다 보면 한 시간 반이 휙 지나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등장하는 고양이 삭스, 이 삭스의 대활약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재미가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95년도에 나온 토이 스토리의 꼬꼬마였던 앤디가 가장 좋아했던 영화 속 주인공 ‘버즈’가 나온 영화의 내용이다. 

이 영화를 보고 꼬꼬마 앤디가 버즈에 반하여 장난감으로 가지게 되며 후에 대학생이 되면서 그 유명한 대사 ‘소 롱 파트너’라며 떠나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 ‘버즈 라이트이어’를 토이 스토리와 동일선상에 놓고 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분명 27, 8년 정도가 흘러 영화는 진일보했지만 그간의 픽사 영화에서 쿵 하며 받았던 그런 감정적 흥분이나 감흥은 훨씬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저 신나고, 또 신나고, 자꾸 신나다가 끝이 난다. 이 영화는 꽤 많은 영화를 버무려놓았다. 캡틴 마블도 떠오르고, 요즘 대 유행인 평행우주, 깨진 우주 뭐 이런 것들부터 해서 긴 줄거리는 ‘로스트 인 스페이스’가 아닌가 할 정도다. 

로스트 인 스페이스도 영화가 정말 재미있었다. 영상도 그렇지만 평행우주 속에서 미래의 나와 만나는데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내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악마처럼 변해있고. 아폴로 440의 음악 역시 굿이었다. 베이스의 중저음 소리가 난타 강타하며 기가 막히게 연주하는 이 음악은 지금 들으면 더 미친다. 아폴로포포스의 음악은 정말 굿.

그래서 이 영화 ‘버즈 라이트이어’에서 버즈는 그간의 토이 스토리에서 나온 로보트 버즈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이다. 버즈의 시그니처인 녹색 수트를 왜 입게 되는지. 그런 걸 알 수 있다. 어쨌거나 이 영화를 보려면 소울이나 업, 코코처럼 생각하지 말고 보기 바람요. 

그냥 신나게 봐야 신나게 즐길 수 있는 신나는 영화 ‘버즈 라이트이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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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미스트는 또띠븐 킹의 그 영화 ‘더 미스트’의 드라마 버전이다. 총 10부작으로 시즌 1만 방영이 되었다. 또띠븐 킹의 ‘미스트’가 영화가 된 해가 2007년이고 10년 후에 드라마 버전으로 제작이 되었다.

10부작의 더 미스트는 영화보다 더 심오하고, 훨씬 호러적이고, 꽤 정적이다. 영화에서는 어떤 차원의 문을 열고 들어온 벌레들이 안개를 타고 인간을 잡아먹는다면, 드라마 버전은 좀 더 영적이고, 안개 저편의 어떤 존재들이 안갯속에 들어온 인간의 마음을 잠식하고, 몸속으로 벌레들을 밀어 넣어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러니까 안개 그 자체의 무서움에 반응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에서처럼 두려움에 몸부림치는 인간 사회에 삐뚤어진 종교적인 믿음으로 파고드는 캐릭터도 구체적이다. 드라마에서는 어린아이도 이종의 존재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런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있던 주인공 여고생은 안갯속에서도 살아서 쇼핑몰로 들어오고, 죽은 아이의 엄마는 왜 내 아이만 보는 앞에서 죽어야 하는지, 왜 같이 갔던 저 여고생은 살아서 오는지, 점점 미궁 속으로 들어가기만 한다.

갇혀 있던 사람들의 과거에는 폭력, 강간, 동성애 같은 이야기가 섞이면서 공포와 괴물 그리고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인간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는 재미있게 봤지만 시즌 2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더 미스트는 하나에 집중하지 못해서 일까 드라마도, 공포도, 괴물도, 인간관계도 뭔가 조금씩 어설프다. 10부작이니 만큼 사람들의 모습에 초점을 잘 맞춰야 하는데 워낙 나오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야기가 늘어지고 산으로, 산으로 영차영차 간다.

하지만 초자연적 징그러운 괴물 벌레들이 인간을 죽여버리는 장면만큼은 영화못지 않는, 안개 그 자체의 무서움을 말하고 싶어 하는, 이번 팬데믹 훨씬 이전에 나왔는데 코로나 바이러스에 미스트를 집어넣으면 딱인  미드 ‘더 미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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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독립영화로 이런 발상으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이 재미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듣고 있는 노래가 있는데 그게 윤시내 노래와 저짝 천조국의 조니 미첼과 제니스 조플린이다. 이 가수들의 노래는 오래되었는데도 정말 기가 막히게 좋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세상에 그런 노래가 있나?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가수들이다. 나는 음색이 좋은 가수에게 계속 끌리고 그들의 노래를 듣는 걸 좋아하는데 조니 미첼과 윤시내가 그렇다. 제니스 조플린의 목소리 음색은 말 다 했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에서도 제니스 조플린의 방귀 소리는 쉿소리가 날 거야,라고 했을 정도로 음색이 강했다.


제니스 조플린의 그 주렁주렁 스타일과 패션, 그리고 헤어 같은 모습은 지금까지 많은 예술가 내지는 가수들이 따라 하고 있다. 그 자유분방함과 뿜어내는 울분 같은 것들의 관념들, 총과 칼을 음악으로 밀어낼 수 있다고 진정으로 믿었던 아티스트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제니스 조플린은 '헤이 죠'를 연주한 지미 헨드릭스처럼 28살 꽃다운 나이에 가버리고 말았다. 묘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커트 코베인 역시 28살에 짧은 삶을 마감했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한 번에 확 피었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조니 미첼과 윤시내는 지금까지 우리 곁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다. 물론 조니 미첼의 건강이 안 좋다는 소리가 몇 해 전부터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에 비하면 윤시내는 우리가 정말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예술가이자 아티스트이자 대중가수다. 이런 수식어를 아마도 부담스러워하겠지만 그렇게 부르고 싶다. 윤시내는 인기가 정말, 아주 많다. 인기에 비해 티브이에 자주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윤시내의 팬들은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 퍼져있다.


윤시내의 노래 중에 ‘고목’이라는 노래가 있다. 아마 이 노래는 저짝의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비비 킹이나 블루스의 신이라 불리는 애릭 클랩튼도 앞 줄에서 차렷, 열중 쉬어, 차렷, 쉬어해서 입을 아 벌리고 듣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놀랄만한 블루스다. 노래를 이렇게 부를 수 있다니, 그런 생각을 들을 때마다 하게 된다. 내가 사는 곳은 바닷가이고 방파제가 있다. 이곳에 겨울의 끝물에 나가면 봄의 햇살이 따스하리 내려앉는, 시리고 차가운 겨울 속을 젤리처럼 벌리고 나온 선물 같은 날을 만날 수 있다. 조금은 슬퍼 보이는 바다를 보며 우리는 윤시내의 ‘고목’을 듣기도 했다. 윤시내의 노래가 이렇게 멋졌어요?라고 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우리나라 가사 중에 블루스를 이렇게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가수이지 않을까. 그때 방파제의 바다도 블루스적이며 하늘도 블루스적이다. 역동하지 않고 생과 사의 경계도 알 수 없는. 그저 블루스적인 모습과 블루스적인 냄새를 낼 뿐이다. 여기에 어울리는 건 블루스적인 윤시내의 고목뿐이었다.


윤시내가 티브이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그 춤은 춤에서 벗어난 표현의 한 부분이자 예술의 모든 것이다. 윤시내의 동작을 보면 백남준이 건설했던 독일의 플럭서스가 떠오른다. 규정적이지 않다. 누구나 따라 할 수 있지만 누구도 똑같이 따라 할 수 없다. 실험이며 변화를 받아들이고 변화를 꿈꾸는 듯한 춤. 동작. 행동. 그래서 윤시내만이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그런 윤시내가 공연장에서 공연 시작 몇 분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윤시내와 합동 무대를 하기로 한 이미테이션 가수 연시내(주인공)는 망연자실한다. 연시내로 살아가는 순이가 윤시내를 찾으러 다니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이야기는 가짜와 진짜, 진짜를 따라 하는 가짜도 빛날 수 있고, 관종 유튜버 딸과의 관계도 회복해가는 그런 일상 성장의 이야기다.


세상에는 많은 이미테이션 가수들이 있다. 진짜가 가지 못하는 곳,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을 이미테이션 가수들이 그 다리를 대신 채운다. 이미테이션이라고 해서 술렁술렁하거나 허술하게 노래를 부르지도 않는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진짜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피를 토해낼 정도로 노력을 한다.


윤시내가 사라진 발상은 영화적으로 좋다. 영화에서는 윤시내 이미테이션들이 여럿 나온다. 연시내, 윤신애 등. 그들 모두가 하나씩의 사연이 있고 고민을 가지고 있다. 사실 순이가 연시내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만 우리 모두 가면을 쓰고 매일매일 보내고 있다. 회사에서는 부장이나 대리 또는 말 딴 직원으로 굽신거리며, 학부형으로, 인사 잘하는 카페 손님으로, 자신을 숨기며 가면을 쓰고 이미테이션으로 살아간다.


과연 드러내고 이미테이션 삶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가면을 쓴 사람들이 나무랄 수 있을까.


이 영화에 독립영화의 감초 내지는 히로인 김재화가 나오는데 연기가 참 좋다. 이미테이션들의 진심이 비죽비죽 비어져 나오는 영화 ‘윤시내가 사라졌다’였다. 영화에 실제 윤시내가 나올까 안 나올까. 나는 정말 놀라 부렀다. 윤시내는 실제로 요즘 빌리 아일리시 음악을 많이 듣는다고 한다. 그리고 늘 비슷한 몸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포기한 것들이 많다고 한다.


https://youtu.be/f1enp-uMZ3E <= 예고편


https://youtu.be/C-ZWHdSgrdA <= 고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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