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팬들아 오늘은 하루키 소설 ‘댄스 댄스 댄스’에 관한 이야기야. 전부 얘기하지는 못하고 한 부분만 얘기해 볼게. 이 소설은 ‘양쫓모’의 주인공이 그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잖아. 기억나지?
주인공은 유키라는 소녀를 만나잖아. 고작 초등학생 저학년 정도의 소녀인데 당돌한 데다 팝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시니컬하지.
유키의 아버지는 소설가이며 이름이 ‘마키무라 히라쿠’야. 그리고 주인공은 유키의 부친이 쓴 소설에 대해서 주절주절 평을 했어. [그 뒤는 형편없었다]라며 신랄하게 비판을 하지.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지 않아? ㅋㅋ 그리고 유키의 엄마는 세계적인 사진작가야. 이름이 아메. 하루키의 아내 요코 여사 역시 사진작가니까 소설 속 유키의 부모님은 마치 하루키와 요코 여사 같아. 마키무라 히라쿠와 무라카미 하루키는 다른데 닮은 이름이야.
하루키의 장편 소설 속에는 여자아이가 늘 나오잖아. 남자아이는 나오지 않아. 이 소설에서 ‘유키’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열세 살 소녀 ‘마리에’가 나오며, [태엽 감는 새]애서 조금 더 큰 ‘메이’가 나오고, [일큐팔사]에서 고등학생인 '후카에리' 그리고 '아오마메'가 나오잖아.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에는 ‘사라’가 나오잖아. ‘스미레’부터 ‘키키’까지.
개인적인 생각으로 하루키는 현실에서 자식이 없는 대신 소설 속에서 딸을 낳아서 키운 것 같아. 하루키 소설을 죽 읽어본 하루키스트들은 알겠지만 여러 장편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 아이와 소녀들은 전부 하루키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느낌이잖아.
어릴 때부터 가요보다는 팝이나 재즈를 들으며 평을 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글을 아주 잘 쓰지. 일큐팔사의 '후카에리'는 당대 최고의 소설을 남기잖아. 내가 하루키의 딸이야~ 같은 느낌이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사랑은 무언가를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 어떤 특수한 채널을 통해 현실이 비현실이 될 수 있다. 혹은 비현실이 현실이 될 수 있다. 만약 간절히 염원한다면. 하지만 그것이 사람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증명하는 건 오히려 그 반대의 사실인지도 모른다’라고 했는데, 이런 프로이트 식의 말을 들으면 하루키는 소설 속에서 딸을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키워 온 것 같아.
소설 속이니까 현실적이지 않아도 되는 거야. 아오마메는 특수한 채널을 통해서 현실이 비현실이 되잖아. 아오마메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간절히 사랑을 찾아가잖아. 전혀 현실적이지 않지. 하루키는 자신의 딸이라면 적어도 아오마메가 아니면 곤란한데, 하는 느낌이야.
이 소설 속에서 마키무라의 소설은 젊은 시절에는 문장도 시점도 신선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도 당시 신진 사진작가였던 메이와 결혼을 했지만 이후에는 형편없는 작품이었다고 했어. 아무래도 일본의 문단에서 배척받는 분위기를 감지하던 하루키는 자신을 한 번 돌려 까면서 일본의 고착화된 문단도 아울러 돌려 까 버리는 것 같아.
소설 속 마키무라가 제대 후 글을 쓰지 못하게 되자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예리한 청춘소설에서 전위 작가로 전락하고 말았다며 까고 있는데 아무래도 일본 문단 전체에 깔려있는 관습적인 문학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는 것 같아.
그러면서도 소설 속 사진작가의 아메는 일상생활은 비록 엉망아지만 냉철한 시선의 사진으로 세상을 사로잡았다고 추켜 세우고 있어. 하루키는 일큐팔사 3권이 나왔을 무렵 2010년쯤 인터뷰를 보면 아내는 요코 여사에 대해 ‘태어나서 한 번도 화장이나 파마를 해본 적이 없는 심플한 화이트 셔츠 같은 여자’라고 했지. 아무튼 대단히 재미있는 사람이야 하루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