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어쩐지 카프카를 닮았다. 특히 변신. 이 영화를 융의 집단무의식과 연결시키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에게 폴은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잠자처럼 느껴졌다.

카프카는 모든 소설에서 하는 말이 ‘출구는 없다’였다. 변신에서도 출구는 없다가 큰 골자다. 집단무의식에 의해서든, 변신에서든 잠자도 그렇고, 폴도 그렇게 폭력에 시달린다.

영화 속 폴은 호모 사케르가 되어 간다. 인간이긴 하나 인간 사회에서 인간들에 의해 ‘기능’을 잃어버리는 운거지퍼가 된다. 기능을 잃어버린 정체성 인간이 되어 사람들의 호기심에서 추종으로, 다시 비판에서 비난을 듣는다.

어째서 아무런 잘못도 없는 폴이 그런 비난을 받아야 할까. 이 폴의 경우를 지금 현재 박정훈 대령에게 대입하면 대번에 알 수 있다. 박정훈 대령은 아무런 잘못은 고사하고 진실된 일을 했을 뿐인데 기능을 잃어버린 인간, 호모 사케르 취급을 받는다.

출구가 없는 것이다. 박정훈 대령은 아침에 출근하면 아무도 없는 막사에서 혼자서 하루 종일 가만히 있다가 밥 먹고 저녁에 퇴근을 할 뿐이다.

이 영화의 예고 문구가 현실 같은 악몽, 악몽 같은 현실이다. 이 영화는 똥 같은 현실을 잘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똥과 대변은 같은 말이니까.

얼룩말의 폴은 눈에 띄게 되어서 그러지 않아야 하지만 sns의 타깃이 된다. 폴은 사람들의 맹목적인 경멸과 비난을 받아서 딱하게 보여야 하는데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건 욕망과 욕심이 잔뜩 붙어 있는 폴의 모습을 니콜라스 케이지 밉상스럽게 연기를 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에서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는 그야말로 넘사벽이었다. 더 록에서 숀 코네리에게 뒤지지 않는 연기력을 보여 승승장구였던 그는 콘에어에서 엄청난 근육으로 액션까지 해냈다. 그야말로 탄탄대로로 돈과 명예 그리고 예쁜 한국인 아내까지.

그러나 내리막길로 추락한 니콜라스 케이지는 사람들의 비판에서 비난을 듣는다. 날려버린 돈을 메꾸려 수많은 영화에 싸구려 비용으로 등장했었다. 가망 없어 보였던 니콜라스 케이지는 그야말로 할리우드 영화판의 호모 사케르였다.

술과 가정불화, 이혼, 여성편력, 돈 지하 끝까지 떨어졌던 니콜라스 케이지였지만 피그를 기점으로 다시 조짐을 보이더니 드림 시나리오 같은 허를 찌르는 영화를 꿰찼다. 아직 중간밖에 올라오지 않았다 생각하지만 니콜라스 케이지는 계속 오를 것으로 기대된다. 출구는 분명 없다. 하지만 그 출구가 되면 된다.

뭐 그런 생각이 들었던 ‘드림 시나리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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