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슬픔과 비참함을 팔고 사는 걸 좋아한다. 타인의 슬픔을 보면서 안도하고, 다른 사람의 비참함을 보면서 즐거워한다. 타인이 드러내는 슬픔이 나에게 없어서 안도하고, 다른 사람의 비참함에 내가 닿지 않아서 즐거워한다. 즐거워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하여 클릭을 하거나 슈퍼쳇을 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나에게 면죄부를 준다.
한 유튜버는 나이도 많고 단칸방에서 힘들게 사는데, 당뇨를 오래 앓아서 인슐린을 처방받아서 맞으면서도 매일 라면에 막걸리와 맥주를 마신다. 사람들은 댓글에 그러지 말라고 하면 앞으로는 줄이겠다, 그러지 않겠다, 같은 말을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비참함을 드러내는 걸 좋아한다는 알고 있다. 그래서 라면과 막걸리를 끊지 못한다. 사실 본인이 라면과 막걸리를 좋아해서 그걸 먹을 때만큼은 아주 맛있게 먹는다.
끊을 수 없는 고리다. 나의 비참함이 돈이 된다는 걸 안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하지만 타인의 비참한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다. 그 속에서 안도를 받고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나는 너하고 달라 같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비참함이 돈이 된다는 건 이상하지만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들 역시 잘 안다. 그게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더 잘 안다는 게 문제다.
어금니 아빠로 유명한 이영학이 예로 그렇다. 대한민국의 국민을 상대로 자신의 비참함을 팔아먹었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이영학의 가족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 아니었다. 가장 악독하고 죄질이 나쁜 사람이었다. 쓰레기 중에 쓰레기였다. 일반인은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슬픔을 팔고, 비참함을 팔았다. 그러기 위해 아내를 성노예로 팔아먹고 죽음으로 내몰고, 딸까지 이용했다.
우리는 왜 기쁨보다 슬픔에 더 열광을 할까. 그리고 이렇게 관음화 된 타인의 슬픔을 보며 즐거워하는 건 언제부터일까. 궁금하다. 한 가족이 티브이를 보면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 티브이에서는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 광고를 보여준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 보면 광고와 광고 사이에는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한 나라의 아이들을 보여준다.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보통 저녁밥을 먹으며 그 장면을 본다. 그래서 그 장면을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듯이 보지 않는다. 기아에 허덕이는 영상 속의 아이들은 그저 스쳐 지나간다. 그 누구도 그 장면이 나온다고 해서 밥숟가락을 놓고 안타까워하거나 폰을 열어서 후원을 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저녁 비슷한 시간이 되면 기아에 허덕이는 영상이 저녁밥상을 앞에 두고 나온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계속 이어진다. 매일 이어지는 것이다. 무의식 중에 우리는 우리보다 못한 나라의 사람들의 비참함을 보며 안도할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이 쌓이다 보면 누군가는 지갑을 열지도 모른다. 타인의 슬픔을 사려는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내가 타인의 슬픔에 동참하지 않아서 즐거운 마음과 저 사람보다 비참하지 않아서 안도하는 마음이 지갑을 열게 할지도 모른다.
수잔 손탁도 저녁밥을 먹으며 타인의 고통을 보는 것에 무감각한 우리들을 지적한 바 있다. 기쁘고 행복한 이야기를 사고팔아야 어쩌면 마땅한 일이겠지만 나보다 행복한 타인의 모습에 사람들은 즐거워하지 않는다.
당뇨가 심해서 인슐린을 몸에 꽂아가면서 짬뽕을 맛있게 먹고 막걸리를 마셔야 그게 돈이 된다는 걸 너도 나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눈물의 여왕을 아주 재미있게 봤고 막을 내렸다. 눈물의 여왕이 재미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선과 악이 분명해서 일지도 모른다. 한동안 선과 악이 모호한 것이 유행을 했다. 긴 세월, 10년 정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어벤져스 시리즈가 그랬다. 도대체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나쁜 편인지 분간이 모호했다. 특히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선과 악이 구분이 가지 않아서 사람들은 열광했다. 내가 믿고 있었던 그동안의 선은 선이 아니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는 다수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시켜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기존에 없었던 이야기라 사람들은 역시 열광했다. 내가 희생하고 죽으면 그만인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시켜야 하는 것이 다수를 위하는 것에서 오는 갈등과 고민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선과 악이 대립을 하고 악이 몰락하는 과정을 우리는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해인에게 집착을 보이던 윤은성이 죽는 모습과 세상의 악 중의 악 모슬희의 몰락이 주는 쾌감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이런 모습은 주인공 두 사람, 백현우와 홍해인에게도 적용이 된다. 두 사람이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모습만 보였다면 사람들에게 외면받았을지도 모른다. 홍해인의 악독한 모습이 바늘이 되어 백현우를 찔러도 백현우는 아파하면서도 아파하지 않는 모습에서 우리는 현우앓이를 했을지도 모른다.
저렇게 갑부도 갈등이 심하구나. 이는 실제로도 그렇다. 재벌들의 가족 분쟁과 이혼, 그리고 자살 소식으로 우리는 그들의 슬픔을 보며 즐겁거나 안도한다. 부와 명예가 다가 아니구나. 민희진의 힙합 기자회견을 보면서 열광했던 것 역시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분쟁과 시기, 암투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저 즐겁다.
드라마 속 사람들의 비참함과 슬픔이 없었다면 드라마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슬픔과 비참함을 팔고 사는 걸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