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미움이 가득한 것처럼 심술궂었다. 금방이라도 하늘은 뭔가를 토해낼 듯 우울한 회백색을 띤 구름들이 기묘한 형태를 이루는가 싶더니 이내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펑펑 내리기를 바랐지만 하늘은 그런 마음이 싫었던지 그저 흩날리는 눈이 나릴뿐이었다. 이런 눈은 기분을 적실뿐이다.


그러나 날은 차가웠다. 아마 온도가 조금 더 내려갔다면 눈은 흩날리지 않고 직선으로 내려와 사람들의 머리에 앉아서 잠시 살아서 또 다른 풍경을 보였을 것이다. 흩날리는 눈은 애초에 내려앉지도 않고 이리저리 춤을 추다가 그림처럼 사라졌다.


전통시장의 내복 집 가판대 위에서 흩날리는 눈을 휘저으며 골라골라 박수를 치며 손님을 기가 막히게 끌어 모으는 사람이 있었다. 내복집주인아저씨였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이다. 내복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눈이 흩날리고 있어서 아저씨의 골라 골라는 더 드라마틱했다. 그걸 보는 재미가 있었다.


가판대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아주머니들. 엄마들이었다. 아주머니들은 가판대 위에 쌓여 있는 겨울 내복을 들춰 아이들과 아이 아빠의 내복을 고르는데 전투력이 올라간다. 매의 눈으로 내복을 집어서 아이 아빠의 몸에 맞을지, 허리둘레와 길이를 자로 재는 듯이 쟀다. 아빠의 내복을 고르는데 컬러나 디자인 같은 건 무시다. 그저 노동을 하는데 따뜻하고 몸에 맞기만 하면 그만이다. 겨울에는 따뜻하면 된다.


수많은 내복 중에 하나를 고르는 일은 어려웠지만 어려움 없이 아주머니들은 내복을 골랐다. 골라 골라 소리는 저 시장의 골목 끝까지 뻗어 나갔다. 그렇게 고른 내복은 바구니에 집어넣기 바빴다. 가판대 주위로 내복쟁탈전을 하는 용병 같은 아주머니들을 따라 나온 아이들은 엄마 뒤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내복 집골목은 먹자골목으로 엄마가 무사히 내복을 다 고르면 옆에서 순대를 사주었다.


내복집이 있는 먹자골목에는 떡볶이와 순대를 파는 리어카가 일렬로 죽 서 있다. 그곳에 서서 먹는 순대는 일품이었다. 맛도 맛이지만 집 근처 시장이 아니라 좀 더 먼 곳, 시내 중심가와 가까이 있는 전통시장에 오는 것이 좋았다. 엄마를 따라오면 순대를 사준다. 아이들은 그렇게 엄마들이 겨울 준비로 내복을 고르는 동안 얌전하게 기다렸다가 옆에서 순대를 먹었다.


순대는 자주 사 먹을 수 있는데 자주 사 먹지 못했다. 딱히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순대는 시장에서 바로 사 먹는 게 맛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가끔 아버지가 보온이 유지될까 순대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집에서 먹었던 경우가 있었지만 시장에서 바로 먹었을 때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시장에서 먹는 순대는 맛있었다. 붉은 소금에 살짝 찍어 먹으면 겨울이 따뜻했다. 먹자골목에는 소규모의 진흥백화점이 붙어 있어서 시내에 나오면 엄마와 그 안을 구경했다. 겨울에는 따뜻한 용품들이 가득했다. 특히 안쪽으로 들어가면 수입제품과 장난감을 파는 코너가 있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좋았다. 용품들은 계단에 죽 진열을 해놔서 구경하기가 수월했다. 그 옆에는 아이와, 파나소닉, 소니제품의 워크맨을 판매하는 곳이 제일 좋았다. 겨울 음악이 잔뜩 흘러나오고 소년시대에서 나온 워크맨들이 일렬로 조용하게 누워있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백화점을 나오면 바로 먹자골목이다. 맛있는 냄새가 골목에 가득하다. 붉은 소금에 살짝 찍어 먹는 순대의 맛을 어릴 때부터 알게 되었다. 이상하지만 순대는 추운 겨울에 먹는 게 맛있었다. 순대 옆을 지켜주는 뜨거운 어묵 국물이 있기 때문이다. 날이 아무리 추워도 순대를 먹고 어묵 국물을 한 모금 마시면 아무리 추운 겨울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날이 차갑기 때문에 먹다 보면 코가 발갛게 된다. 그때 뜨거운 어묵 국물을 한 모금 마시면 속이 뜨거워졌다.


어묵 국물은 따뜻해서는 안 된다. 뜨거워야 한다. 아이들은 잘 먹지 못할 만큼 뜨거운 어묵 국물이어야 겨울의 순대와 어울렸다. 뜨거운 어묵 국물이 위로 뚝 떨어지고 나서야 세상이 맛있어지는 순간이었다. 겨울이 온 세상을 덮치고 내복이 얼굴을 내미는 시장은 활기로 가득했다. 전통시장은 그랬다. 그래서 시장에 가면 신이 났다.


겨울 방학이 다가오기 전 아이들과 수업이 끝나면 시장으로 우르르 가기도 했었다. 학교에서 먹자골목 시장까지는 좀 먼 거리였다. 걸어서 오면 30분은 넘게 걸렸다. 그 사이에 전통시장이 2곳이나 있다. 우리는 그 두 곳의 전통시장을 지나 먹자골목까지 왔다. 두툼한 스키장감 같은 장갑을 끼고 우리는 시장을 구경하며 다녔다. 아직 어린이였지만 4학년은 고학년에 속했다.


먹자골목의 시장까지 온 이유는 덕원이가 시장에서 일하는 엄마에게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우르르 온 것이다. 덕원이 엄마는 시장에서 신발장사를 한다. 덕원이 심부름을 따라가면 덕원이 엄마가 우리들에게 순대를 사주었다. 친구들과 서서 먹으면 너무 맛있는 것이다. 할머니가 순대를 파는 곳에서 먹고 있으면 덕원이 엄마 덕분에 우리에게 순대를 더 썰어 주었다. 우리는 신나서 손뼉을 쳤다.


고기도 아닌 것이 소시지도 아니지만 설명하기는 애매하지만 붉은 소금에 살짝 찍은 먹는 순대는 맛있었다. 날이 차가운 겨울이었지만 곧 겨울방학이 온다. 그리고 옆에는 겨울 방학 내내 같이 뛰어놀 친구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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