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보는 하늘인데 오늘은 구름이 심심한지 그림을 그려 놨다. 저렇게 보여도 5분을 고개를 꺾어 계속 보고 있으면 어느새 그림의 형태가 달라져 있다. 그 말은 현실적으로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증거다. 다른 말로 하면 구름은 늘 어딘가로 뻗어가고 싶어 한다.
이런 멋진 장면을 이렇게 밖에 담을 수 없는 건 순전히 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직 아이폰 8을 쓰고 있어서 밤에는 이렇게 멋진 장면도 이 정도로밖에 담을 수 없다. 저 하늘에 뜬 저 반짝이는 별들이 밑의 아주 밝은 인공조명에도 굴하지 빛을 내고 있어서 점처럼 보이는 저 별의 존재가 안타까우면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연일 시끄러운 정국과는 다르게 데카브리를 파고든 4월의 날씨는 포근하고 고요하기만 하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아직 입어도 될 법한 재킷인데 이렇게 길거리에 내팽개치듯 버려져 있다. 도로나 길거리에 신발이나 옷이 떨어져 있으면 무슨 사연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일부러 와서 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야간의 다운타운가에는 사람들이 북적북적 인다. 모두가 밝은 표정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도 모두 하나씩의 고민은 있을 것이다. 다 사연이 있다. 그 사연들을 한 번씩 들어보고 싶다. 저 버려진 옷에 얽힌 사연도 보고 싶다.
포근한 밤하늘의 심심함을 나뭇가지가 채워주고 있다. 나무는 더 이상 위로 자라지 않는다. 그 대신 땅밑으로 뿌리는 계속 자란다. 어둠 속으로 뿌리를 뻗어서 당당하게 맞선다. 그래서 가끔 나무는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좀 더 가까이서 보면 저기 저 별이 존재를 빛내고 있다. 하늘이 뿌옇고 흐른데도 저 별은 수십만이나 떨어진 이곳까지 존재를 알리고 있다. 마치 쳐다보는 사람과 교신이라도 할 것처럼.
날도 푸근하지만 바람 한 점 없어서 세상이 멎은 것 같은 날이다. 적요하고 적막하기까지 하다. 이곳까지 시끄러운 자동차의 소음이 도달하지 않기에 가만히 있으면 그야말로 정지한 세상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데카브리가 되면 다리에 조명이 춤을 춘다. 그에 맞게 저 불빛은 하늘로 올라올라 별까지 닿고 싶어 한다. 올해는 그 흔한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송도 들리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캐럴이 소멸했다. 날도 따뜻하고 포근하다. 교회마다 화려한 장식들도 없어졌다. 도시는 점점 거대화되고 기능적으로 변하지만 감성적인 부분은 사라지고 있다. 도시에서는 나도 어르신도 모두가 빠르게 걷는다. 도시와 시골의 시간의 흐름은 다르다. 아이와 어른의 시간처럼.
가끔 사람들이 나에게 긍정적이세요,라는 말을 한다. 나는 긍정적이지 않다. 단지 사람들에게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으로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들리는 것뿐이다. 나는 오히려 긍정보다는 비관적인 부분이 많다. 비관주의자는 아니지만 늘 긍정적 사고를 하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지내와서 지금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해서 딱히 바꿔야 한다는 생각도 없다. 소심한 성격이지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지낸다면 그것으로 그냥저냥 만족하는 편이다. 여러 사람들을 위하고 누군가를 위로하는 사람보다는 그저 한 사람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 애쓰며 지내는 그런 축에 속한다. 그런 소심함을 연소 삼아 매일 태워가며 조금씩 글을 쓰고 있다. 나의 소심함과 긍정적이지 못한 부분 같은 것들이 글을 쓰는 연료다.
아무래도 큰 소리로 인사를 하는 것도 사람들이 나를 긍정적으로 보는 약간의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청소하시는 이모님을 매일 만나면 허리를 굽혀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지내다 보니 이모님들이 빵도 주시고, 귤도 주시고, 책 읽고 있으면 와서 책 이야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나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보이는 걸까.
어제 김장김치를 받아서 수육과 함께 얼마나 먹었던지 아직도 소화가 안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