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흐린 겨울의 날 오전에 거부할 수 없는 귤을 까먹으며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마당을 본다. 마당은 개념 없는 웅덩이다. 마당에 강아지가 앉아 있으면 그건 강아지의 집이 되고, 바람이 불어 마당의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깔리면 그건 그것대로의 세계가 된다. 그런 마당에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편지봉투에 보낸 사람은 없고 받는 사람의 이름에 나의 이름이 또박또박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편지봉투를 뜯어 편지를 보았다. 편지지에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곧 떠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저 안부였다. 특별한 것도 없고 못 잊은 사랑이라는 가슴 떨리는 말 따위도 없었다.

   

그저 그녀는 어느 날 가슴에 멍울이 잡혀 병원에 갔는데 암이 길어질 대로 깊어졌다고 했다. 받아들이기까지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는 말도 있었다. 담담하게 말하는 투로 적어 나갔다. 그녀는 아직도 내가 준 책을 들고 있다는 말도 했다. 내가 줄을 죽죽 그어가며 읽었던 책을. 그녀는 자신의 시간이 임박했으니 괜찮다면 편지를 한 통 부탁한다는 말을 하며 마쳤다.


그러나 나는 이 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첫 째, 그녀와 내가 만난 건 십 년도 훨씬 전의 이야기다. 둘째, 우리는 삼일동안 만난 것이 고작이다. 삼 년도 아니고, 삼주도 아닌 딱 삼일을 같이 지냈을 뿐이다. 삼일이었다, 삼일. 삼일이라는 단어가 마치 학명도 없는 심해 바닥에 붙어사는 물고기의 이름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때 나는 그녀를 사랑했었다. 사람이 사랑에 그대로 빠진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녀의 작고 보드라운 손을 잡는 것이 좋았다. 그 작은 손바닥 안에 크나큰 세계가 들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통해 그 세계로 들어갔다. 그 세계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과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윌리 왕카 세계 못지않았다.


나는 삼일 내내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녀도 나의 손을 잡는 것을 좋아했다.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없다. 기억의 줄을 잡고 잡아당기면 많은 이야기를 했다는 것. 그녀는 갓 생명을 부여받은 커피처럼 신선한 향이 나는 여자였다. 이른 새벽까지 술을 마셨지만 다음 날 그녀의 눈동자는 바이칼 호수처럼 맑고 투명했다. 그날 오전 맥도널드에 앉아서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발기하고 있었다. 그때 그런 나 자신을 창피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맑은 그녀를 보면서 발기 따위나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발기는 나의 의지와는 무관했다. 마치 반사 신경이 교신을 통하는 무선통신처럼 그쪽으로 온 신경을 바짝 쏟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커피 잔을 사이에 두고 박정대 시인의 슬라브식 시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역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저 슬라브식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는 기억만 있다. 기억이란 늘 제멋대로다. 기억이란 언제나 그렇다. 편지를 받고 떠올린 그녀에 대한 기억은 바람 같은 여자가 그녀라는 것이다. 바람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불어오는지도 모르게 와서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옷을 더욱더 여미게 했다. 그리고 왔을 때처럼 소리소문 없이 가버린다. 바람 같은 여자인 그녀를 한 순간에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건강한 여자였다. 아름다웠고 늘씬했다. 그녀의 모습에서 아픔의 냄새 따위는 나지 않았다. 찬란한 빛이 잠시 내려와 그녀를 빚어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삼일이 지난 후 그녀는 다시 올게라고 떠난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다 다음 해인가,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막연하지만 행복하게만 지낼 줄 알았던 그녀가 침묵의 시간으로 들어가야 할 때라고 편지지에서 말하고 있다. 그녀는 편지에 우리가 손을 잡고 해변에 앉아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보낸 편지는 그녀의 남편이 나에게 부쳤을 것이다. 편지지 글씨체와 편지봉투의 글씨체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어쩌면 나를 증오할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녀의 아내를 몹시 사랑하여서 그녀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자신의 아내를. 내가 그녀의 남편이라면 나는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고작 삼일 만난 남자에게, 그것도 십 년도 훨씬 이전에 만남 남자에게 편지를 써 보내야 한다니. 아내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남편은 그런 아내를 미워할 수만은 없지만 나는 미워하고 증오할 수 있다. 나는 남편의 고독을 이해한다.


그녀는 밝고 건강하고 아름다웠지만 표백해 놓은 마당 같은 얼굴을 할 때가 있었다. 그녀는 고독했던 것이다. 그녀는 분명 나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그녀는 고독했던 것이다. 그 고독은 나로 하여금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나의 가슴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그녀의 고독을 달래줄 수는 없었다. 그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사실과 본질이 같다고만 생각했다. 본질은 사실에서 다른 경우가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바보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상실이 몸과 마음에 내려와 있었다. 어쩌면 삼일 동안 나로 하여금 그녀 자신의 상실을 덜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깊어지는 상실을 내가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그녀는 나에게 상처 주기 싫어 그대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다. 상실의 시대는 이름만 다르고, 표정만 바뀌었지 언제나 우리 옆에 머물러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11월이었다. 해운대의 물결은 투정 부릴 수 없을 정도로 햇빛을 튕겨 내고 있어서 눈부셨다. 그녀가 그 앞에 서 있으니 현실감은 떨어졌다. 그녀 역시 햇살처럼 빛났지만 그 빛에 내가 다가갈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그저 바라보는 것뿐이다. 그뿐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행복했지만 동시에 불안이 거대하게 밀려들었다. 마치 돈이 많아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불안에 떠는 것과 비슷했다. 실존적 불안에 가까웠다. 이데아적 불안은 아니었다. 한 번에 사용하기에는 나에게 큰돈인 백만 원이 손에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졌다. 나에게 들어온 돈은 늘 그렇게 사라진다. 그래서 늘 가난하다. 이런 가난은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던지면 돌아오는 부메랑과 같은 것이다. 그녀의 웃음만 보고 싶었지만 삶이라는 것은 언제나 바늘을 대동하고 우리의 연약한 피부를 찌르기 마련이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은 행복했다. 행복할수록 불안의 짐짝이 붙어 있는 것처럼 불행했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 그녀는 텅 빈 동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그녀의 잔상만 남아서 무형태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빛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고 그저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온 삼일 동안, 잠깐 있으면서 우리는 상실의 냄새를 안 것이다.


그녀는 내가 있는 모든 주위에 존재했다. 사물에, 노래에, 시에, 나의 주위 모든 것에 그녀가 존재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나는 그녀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늘 없는 존재였다. 그녀의 이름은 말하지 않기로 한다. 그녀의 최종 목적은 이름의 거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믿고 싶었다. 그녀의 이름에 그녀가 당도하고 나면 그 이후에는 아마도 더 이상 상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잘 알아서 척척 헤쳐나가리라. 그녀가 좋아하는 시의 세계에서, 겨울의 조각케이크의 세계에서 잘 헤쳐나가리라.


그녀는 십 년 전에 삼 일간의 만남을 뒤로하고 사라졌다. 그녀는 지금 그녀가 있는 그 자리에서 그녀의 모습으로 잘 살아왔을 것이다. 나는 나대로 내가 있는 이곳에서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불안하기는 해도, 불안을 잔뜩 끌어안고 지내고 있지만 그 불안의 덩어리가 대단히 커지지 않고 고만고만한 덩어리를 유지하며 지내고 있었다. 매일 불안하지만 죽을 때까지 껴안고 가야 할 관념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문득 불안해야 하는데 불안하지 않으면 왜 불안하지 않지? 하며 불안했다. 그런데 지금은 도대체 왜 덜 불안하지. 이대로 나는 괜찮을까.


나에게 도착한 그녀의 편지는 덜 불안하고, 더 불행한 나의 삶을, 그런 나의 삶에 파동을 주었다. 그렇게 강한 파동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파동의 진폭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한다. 나는 그것을 감지하고 있다. 편지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존재를 증명했다. 서랍에 넣어 두었는데 책상 밖으로 나와 있었다. 항상 편지를 보관하는 통에 넣어두었는데 컴퓨터 옆에 있기도 했다.


한 사람이 사라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녀는 나에게서 한 번 사라졌다. 사라졌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지금 그녀는 이제 온전히 사라지려고 한다. 그녀는 나에게서 사라졌을 뿐이다. 세상에서 사라지진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그 본질을 증명하려고 편지를 보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녀에게 온 편지를 서른 시간 만에 태우고 말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나의 편지보다 그녀의 곁에 있어줄 수 있는 그녀의 남편이다.


가끔씩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이 훌쩍 지나 모습이 변한 나에게 그녀가 안부를 묻게 된다면, 그저 '잘 지내'라고 대답하겠다고. 비록 잘 지내 그 뒤에는 복잡하고 시끄러운 일들이 있겠지만 그녀에게는 잘 지낸다고 그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사랑이라는 거 너무 모호하고 손으로 잡히지 않아서 다시는 이런 사랑하지 않겠다 맹서를 하더라도 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면 무모한 나방처럼 불 속으로 뛰어들게 뻔하다.


이륙과 착륙이 있는 가장 공허한 느낌들, 술에 매달리는 실망한 표정의 사람들 너머로 바닥에서 부서진 벌레들처럼 실망하고 배회하는 이곳, 껍질은 박살 나고, 체액이 흐르고 날개를 꺾이고, 다리는 어디 가고 없는 벌레들을 보며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날개가 돋아날 거라고 믿으며 라디오 헤드의 렛 다운을 좋아했던 그녀와 다시 한번 바닷가에 앉아 렛 다운을 듣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설령 기회가 온다고 해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너는, 너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 거야, 땅이 무너져도 다시 떠올라서 튀어 오를 거야.

 



눈물 나게 좋아하는 곡, 라디오 헤드의 렛 다운 https://youtu.be/HMrIRpWMaoU?si=QQoDzrBH5u200Dq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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