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가 아직 아가였을 적,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 집에서 예방접종이며 피부과며 다 했다. 동생은 아무래도 엄마가 있는 집에서 딸내미를 케어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지 조카를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몇 달을 그렇게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리 오래 전도 아닌데 그때에는 동네에 소아과도 꽤 있었는데 지금은 거짓말처럼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한 여름이었다. 폭염의 중간에 조카의 피부과 예약이 있었다. 오전 10시 20분이 예약시간이었다. 나는 40분 정도 일찍 주차장에 내려가서 차 안에서 에어컨을 2단으로 틀어놓고 에어컨 주둥이를 조금 위로 올려놓은 다음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카의 아빠는 집에 있고 동생과 조카만 내려왔다.
두 사람이 준비하는 동안 폭염이라 여름날의 차 안을 시원하게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장점이라 함은 기다리는 걸 군말 없이 잘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기다린다고 해도 큰 불만은 없다. 노력도 아니고 어느 날 번개를 맞아서 머리가 돌아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저 본디 그렇게 생겨먹은 것인지도 모른다.
동생과 조카가 나올 때까지 스티븐 킹의 ‘애완동물 공동묘지’ 하권을 읽고 있으면 지루함 따위는 전혀 없다. 에어컨을 켜고 기다렸던 최초의 시간은 오전 9시 40분이었다.
애완동물 공동묘지 하권이 시작하자마자 주인공 아들인 게이지가 죽는다. 이제 두 살 배기인데. 이야기는 점점 재미있어간다. 이 소설은 영화로 두 번이나 만들어졌다. 83년의 오래전 버전이 있고 얼마 전 2019년에 만들어진 최신 버전이 있다. 나는 전부 다 봤는데 다 재미있게 봤다. 소설도 재미있고, 영화도 원작과 리메이크 전부 재미있게 봤다.
그러니까 그 공동묘지에 시체를 묻으면 안 되는데 묻으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하지만 죽기 전의 모습이 아니라 좀 더 테러블 하게 변한 채 살아나는 것이다. 몸에는 썩는 냄새를 풍기며. 그런 내용이다. 공포 대가답게 스티븐 킹은 요리조리 잘 도 돌려가며 썼다.
고개를 드니 택시 승강장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근처에서 택시를 잡아타는 모습이 보였다. 조카만 한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아빠가 보였다. 그는 택시를 잡았다. 택시의 뒷 도어를 열었다. 아이를 안고 택시를 타고 문을 닫는다. 이것이 보통 택시를 타는 사람들의 전말이다. 다른 건 없다. 택시가 오면 택시를 타는 것이 목적이니까. 오른손을 들고 택시를 잡고 타면 되는 것이다. 택시를 타는데 그 중간에 무엇인가 끼어 들 거리는 없다.
그런데, 무심결에 보니 택시의 뒷좌석에 아이를 안고 타는데 택시 뒷문의 윗부분에 아빠의 머리가 닿을 듯 하지만 닿지 않고 거의 빈틈없이 아슬아슬하게 택시 안으로 들어갔다. 또 다른 사람이 택시를 잡고 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다. 어째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지 물어본다면 그저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여성은 꽤 높은 힐을 신고 있었고 여름용 시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한 손은 4살 정도 된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택시를 잡고 아이를 먼저 태우고 택시를 타는데 또 머리가 뒷문 윗부분에 아슬아슬하게 닿을락 말락 하며 택시 안으로 들어갔다.
책 읽기를 포기하고 택시를 잡아타는 사람들을 지켜본 결과 대부분의 어른들이 택시 뒷좌석에 타면서 머리가 닿을 듯하며 들어갔다. 머리를 콩 하며 박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은 아이를 안은 대로 택시의 문을 열고 뒷좌석에 들어갈 때 머리가 닿을락 말락 하며 탔다. 머리와 뒷문 윗부분의 유격은 거의 나지 않았다. 마치 종이 한 장 정도의 틈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정밀한 기계처럼 잘도 그 간격을 지키며 머리를 콩 박지 않고 택시를 잘 탔다.
그러다가 70대 중반의 할머니가 택시를 잡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학명도 알 수 없는 심해의 물고기를 비춰주는 화면을 응시하는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손을 들었다.
택시가 앞에 섰다.
할머니는 머리가 하얗고 파마를 했다.
알록달록한 난해한 색의 남방을 입었다. 표현하기 힘든 색이다.
패션블루라든가, 카마인 레드, 오페라 바이올렛, 퍼머넨트 옐로 딥이 전부 섞인 컬러 같았다.
택시가 멈춰 서고 택시의 뒷도어를 열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뒷좌석에 타면서 머리를 콩 박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게 타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택시 안으로 빨려 들어가서는 문을 닫았다.
그 모습은 며칠 전 모친이 차 뒷문으로 타면서 머리를 콩 박고는 아무렇지 않게 타는 모습과 흡사했다.
또 방학을 맞은 손자와 할아버지의 모습도 보였다. 오늘은 모두 택시를 타는 날인 모양이다. 두 사람은 무척이나 더운 길에 서서 택시를 잡고 있었다. 택시가 왔다. 설마 했지만 손자를 먼저 태운 할아버지도 뒷좌석에 타면서 머리를 콩 박았다. 나이가 든다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일까. 젊은 시절에 비해 택시 뒷좌석에 탈 때 머리를 콩 박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시간을 보니 10시 17분이었다. 3분 있으면 예약시간인데 지금이라도 그녀들이 나와야 하는데 나오지 않고 있다. 예약시간도 하나의 약속인데 병원에서는 조카의 진료시간에 맞춰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18분이 되었다. 하지만 저쪽에서는 그녀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이다. 어느 책에서 본 문구가 생각이 났다. 그러나 약속은 약속대로 중요한 구실을 갖고 있다. 약속은 한쪽의 일방적인 언행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쌍방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약속이다. 약속은 아마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관념이 아닐까. 서로 믿음 같은 것들. 나는 병원입장을 고려하니 조금 초초해졌다. 지금 출발을 해도 예약시간에 맞추어 갈 수는 없다. 19분이 되었다. 1분은 아주 소중한 시간이다.
올림픽에서 잘 알 수 있다. 펜싱 경기에서 그 사실을 더 잘 알 수 있다. 1초 만에 경기가 뒤집어진다. 1초에 자동차가 4대나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1분은 정말 상당한 시간이다. 어떤 이는 짜장면을 1분 만에 먹는다. 1분 동안 만두달인은 만두를 몇 개나 빚어낸다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며 1분 만에 그녀들이 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내 생각을 묵사발로 만들었다.
더욱 초조해졌다. 난 초조해지면 괄약근이 느슨해지며 그 사이로 방귀가 시종일과 나오지는 않지만 초조함이란 아주 묘한 감정이다. 밖에는 사람은 바뀌었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택시를 잡는 사람들이 있다. 전국의 택시는 도대체 몇 대나 있는 것일까. 택시에는 왜 이름이 없을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건 순전히 초조함 때문이다.
그날 점심에는 생선구이 집에서 열심히 생선을 뜯어먹었다. 조카는 냠냠 잘도 먹었다. 현실로 돌아와서 요즘도 거의 매일 생선을 먹고 있지만 조카가 아가아가였을 때처럼 신나게 생선을 먹을 수 있는 마음이 줄어들어 간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