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시로 간 처녀’는 81년 작품으로 김수용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김수용 감독은 우리나라 문예 영화의 거장이라 불렸다. 이 영화의 각본을 김승옥이 썼다. ‘도시로 간 처녀’ 이전에 김승옥과 김수용 감독이 만나서 작품을 만들었던 건 64년에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소설 ‘무진기행’을 영화로 만든 ‘안개’였다.


영화 ‘안개’가 소설만큼 재미있는 건 김승옥이 직접 각본을 썼기 때문이다. 이때 재미있는 일화가 김수용 감독이 김승옥에게 제발 쉽게 써달라고 요청했다고.

김승옥이 한국문단에 등장하자 그야말로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그 이전까지 대한민국의 대중 소설은 무협소설과 민담 설화에 가까운 소설이었는데 김승옥이 문단에 등장하자마자 모국어의 폭발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야말로 피츠제럴드 같은 직유와 은유, 그리고 구조가 너무나 완벽하게 이루어진 문장이 사람들의 염통을 후려쳤던 것이다.


김승옥이 등장했을 때의 일화 중 하나는, 지금 한국의 대문호 격인 소설가 김훈, 김훈의 아버지 김광주 소설가도 우리나라 거의 1대 문인이었다. 김훈이 꼬꼬마 16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아버지 김광주의 방에 아버지 후배들, 즉 문인들이 모여서 심각한 얼굴들을 한 채 이야기 중이었다. 이야기 즉슨 읽어봤냐? 괴물이 등단을 했어! 였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훈에게 막걸리를 받아오게 해서 김광주와 문인들이 마시면서 이제 우리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같은 이야기를 밤새 했다고 한다.


김훈은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였다. 당시 최고의 소설이 황석영의 장길산이었다. 장길산은 한국일보에 74년부터 84년까지 매일 연재된 소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황석영이 매일 소설을 연재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다 도망을 쳤다. 도망을 쳐도 어느 지역에서 그날그날 쓴 소설을 우편으로 동봉해서 신문사에 보냈는데 그날은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이다. 신문사는 발칵 뒤집어졌다. 사람들이 연재가 끊어져 난리가 났다. 그래서 도망간 황석영을 잡으러 간 사람이 담당 편집기자인 김훈이었다.


아무튼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세상에 나온 이후 한국 문단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상상의 도시, 무진의 명산물 안개를 여귀가 뿜어낸 입김 같다고 표현을 했는데 그 이후 지금까지 안개를 이만큼 표현한 소설 속 미문이 없다. 소설 속의 여귀는 영화 ‘안개’ 속에서 마녀로 대신 나온다.


김승옥의 문장 속 세계관을 나타내는 언어는 지금도 유효하다.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약방의 진열장 안에 있는 어떠한 약보다도 가장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제약 회사의 전무님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조용히 잠들고 싶어 하고 조용히 잠든다는 것은 상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 무진기행]


소설 속 ‘조’가 영화에는 조한수로 나온다. 두 사람은 세무서장이 된 조의 집으로 가서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숙, 하인숙을 만나게 된다. 영화에서 하인숙을 연기한 배우는 윤정희다. 아주 어린 모습의 윤정희는 그 당시로는 보기 드문 예쁜 얼굴의 배우다.


이 무진기행은 세 번 영화가 되었다. 67년에 한 번, 76년, 87년에도 만들어졌다. 윤정희는 두 번 하인숙으로 열연했다.


안개가 재미있는 이유 중 또 하는 배우들의 열연이다. 이제 고인이 된 신성일과 윤정희가 주인공으로 나오며 소설 속의 문체를 영화적 문채로 절묘하게 녹아냈다. 김승옥의 각본과 김수용 감독의 연출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그런 김승옥과 김수용이 다시 한번 영화를 만든 것이 ‘도시로 간 처녀’였다. 이 영화는 재미있기도 하지만 사회고발 영화의 시초였다. 이 영화는 그 당시 버스 안내양의 부당함을 말하고 있다. 돈을 삥땅 하는 일 때문에 알몸수색을 하는 문제가 당시에 있었는데 김승옥은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며 버스 안내양들을 취재하여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다.

영화에서 부당한 대우와 모욕감 때문에 유지인이 투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당시에는 난리가 났다. 김수용 이전의 영화에서는 누가 봐도 마네킹이 절벽 같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연출을 했는데, 김수용은 실제로 유지인이 투신하는 것처럼 보이게 연출을 한 것이다.


이 영화는 33일 밖에 상영하지 못했다. 실제 일어나는 사회고발 영화이기에 기득권이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영화는 몇 번이나 삭제를 하고 또 당해서 나오게 되었지만 군사정권 시대라 마음껏 상영할 수 없었다. 우리 사회의 단면을 가장 잘 드러낸 영화였다.


그럼에도 재미있는 장면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바보들의 행진의 히로인 영자의 이영옥의 모습과 금보라의 풋풋한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다른 의미의 재미다) 건 이 영화가 상영되고 지금까지 시간이 몇십 년이 흘렀는데 조직이나, 단체, 회사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여전하고 그들을 지금 이 더운 태양 아래서 농성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핍박당하고 죽음을 각오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순수함을 지키려 하고 진실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는 것 역시 예나 지금이나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다.


이 영화에서 마지막 유지인, 극 중 문희는 투신을 하지만 살아난다. 희망을 주며 끝이 나지만 해피엔딩이 말할 수는 없다. 김수용 감독은 2005년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영화에 무슨 사회성이냐, 폭로 항변 메시지는 접어두고 좋은 세상 만날 때까지 사랑하고 정사하고 눈물 짜는 영화나 찍자”라고 했다.


김승옥 소설가가 광주민주화항쟁의 충격으로 절필을 선언했을 때 이어령 박사가 붙잡아서 호텔에 던져 놓고 장편 소설을 계속 쓰게 했는데 그 소설이 ‘서울의 달빛’이었다. 그런데 김승옥은 끝끝내 소설을 다 쓰지 못하고 절필을 하고 만다.


그래서 ‘서울의 달빛 0장’으로 단편 소설이 되었다. 만약 장편으로 이어졌다면 1장, 2장 주욱 이어졌을 것이다. 김승옥의 단편 소설들은 읽고 또 읽었지만 너무 재미있다. 김승옥의 소설 속에는 위트와 유머가 살아있다. 이후 김승옥의 몸에 풍이 와서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2014년인가 순천에서는 무진기행 50주년 행사를 하기도 했다. 김승옥 소설가도 41년 생이시니까,,,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얼마나 무진, 즉 순천의 자랑이었냐 하면 응사, 응답하라 1994에서 순천의 해태와 여수의 학생이 술집에서 서로 더 대단한 도시라고 싸운다. 비행장이 있니 없니, 백화점이 있니 없니. 그러다가 밀리게 된 해태가 그런다. 김승옥! 무진기행! 우린 무진기행이 있는디. 정말 멋진 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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