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의 우리가 주로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는 정해져 있었다. 학교에서는 교실보다는 사진부 암실, 등나무 벤치, 운동장 로열박스 구석. 학교를 나오면 강원분식이나 대구분식에서 양 많은 라면을 먹으며 이야기를 했고, 다운타운의 카페가 하나 있고 바닷가에 있는, 어제 말했던 합기도 도장 근처의 카나리아 치킨 집이었다. 그 외의 시간은 대부분 음감에서 보냈다.


혼나 미나코를 닮은 그 애는 주말에 호산나에서 디제이를 하며 음악을 틀었다. 인기가 많았다. 다른 디제이들은 멘트를 하는데 그 애는 신청곡이 들어오면 휙휙 음악을 찾아서 들려주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테이블에 오밀조밀하게 앉아 있으면 그 애는 머릿속에 쌓여 있는 풍부한 록 밴드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학생들이 주로 가는 다운타운의 카페는 블랙박스였다. 창문이 없다. 그냥 온통 시커멓다. 좀 더 구석진 곳으로 가면 학교에서 노는 아이들이 앉아서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담배를 피웠다. 각 학교마다 일진들이 있고 각 학교를 대표한다는 이유 때문에 밖에서는 서로 앙숙이기도 했지만 블랙박스 안에서는 전부 평화를 유지했다. 이런 모습은 내가 구치소에서 근무할 때에도 비슷했다. 구치소에 근무하면 가장 골 때리는 부류가 조폭들이다. 조직폭력배들. 내보내면 어김없이 며칠 뒤에 또 들어오고, 또 들어오고.


내가 있는 바닷가에서도 밀수가 이뤄지고(나는 이 사실을 구치소에 근무를 하면서 알았다) 향정신성의약품을 취급하고, 즉 뽕쟁이들이 많다는 말이다. 그리고 술집 관리 같은 것들이 아주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구역이 있으니 각 구역마다 파가 있다. 이 도시는 목공파가 아마 가장 유명할 것이다. 한때는 김호중이 현직 목공파 조폭이라며 가세연의 누군가가 자기 방송에서 그냥 막 제멋대로 말하기도 했는데.


여하튼 여러 파들이 있는데 파벌싸움이 일어나면 무섭다. 그런데 구치소에 모이게 되면 서로 평화협정을 맺었는지 이쪽 파의 애기들이 저쪽 파의 중간 보스에게 똑같이 형님 대우를 해준다. 밖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구치소 내에서는 서로 잘 지내는 것이다. 조폭들이라 몸에 문신도 어마어마하고 전부 깍두기 머리에 험상궂은 얼굴이지만 게 중에 친하게 지낸 형도 있었다. 나에게 잘해주었다. 영치품으로 맛있는 과일이나 소시지가 들어오면 불러서 이만큼씩 주었다.


아무튼, 그래서 블랙박스에서 혼다 미나코를 닮은 그 애는 인기가 많았다. 각 학교의 잘 나갔던 남자애들이 전부 와서 인사를 하거나 꼬셔보려고 했다. 그 애와 친해지게 된 건 록, 메탈 밴드 때문이기도 했지만 축제 때 그 애도 자신의 학교 사진부에서 사진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그때는 이 도시 안에 있는 고등학생 밴드들이 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우리 학교는 공업탑 근처에 있었는데 거기 한 건물의 지하에 딩클럽이라는 공연할 수 있는 무대가 있었다. 클럽 같은 분위기인데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가 있고 구경하러 온 학생들은 일어서서 그대로 소리를 지르며 공연을 관람했다. 술은 당연하지만 판매하지 않고 음료도 판매하지 않았다. 그 애는 학교 밴드의 모습을 사진으로 멋지게 담고 싶어 했다. 게 중에 한 밴드가 스콜피온스 노래를 커버 쳤다.


야, 야, 스콜피온스 기타 이름이 왜 루돌프인 줄 알아?

몰라, 왜 그래? 뭐 크리스마스에 태어났나? 크크크

야, 야, 루돌프 쉥커가 독일 이름이라 그래.

뭐? 스콜피온스가 독일 그룹이야? 거참 미국적이네.

그래도 클라우스 마이네는 이상하지만 독일적이지 않아.

독일적인 건 뭐야?

독일적인 건 램슈타인(람슈타인) 같은 거야.


그때까지 우리는 스콜피온스가 미국 밴드라고만 생각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 밴드는 람슈타인밖에 없었다. 람슈타인의 강력한 노래를 들으면 독일! 독일! 독일! 이 그냥 뿜어져 나왔다. '두 하스트'는 너무나 강력한 노래인데 요즘 공연에서는 고출력 전자음과 합세하여 더욱 신나고 강력해졌더라고.


그래서 그 애에게 풍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애는 롤링 스톤즈, 스웨이드, 오비츄어리, 알파타우루스, 메가데스, 판테라 같은, 온갖 메탈 밴드에 대해서 박식했다. 아무튼 그 애에게 스콜피온스의 가십에 대해서 왕왕 듣곤 했다. 스콜피온스는 좋은 노래가 많다. 너무 많다. 아주 멋진 록발라드 명곡들이 많다. 스틸 러빙 유부터, 올웨이즈 섬웨어, 홀리데이, 윈드 오브 체인지 등. 아주 많다. 록 발라드가 귀에 쏙 박히게 멋지게 들리는 건 곡 자체도 좋지만 클라우스 마이네의 목소리 때문이다. 목소리가 내가, 사람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목소리다.


너무 좋은 노래가 많지만 클라우스의 목소리가 호소력 짙게 들리는 변화의 바람, '윈드 오브 체인지'가 세계의 마음을 흔들었다. 우리는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이 독일의 장벽을 허물고, ‘워 아 더 월드’가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살리고, 스콜피온스의 ‘윈드 오브 체인지’가 변화의 바람에 불을 지폈다는 것에 일조한 것에 대해서 상당히 흥분했었다. 총과 칼보다는 노래와 글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 움직이게 한다는 걸 굳게 믿고 있었을 때였다.


음감에서 ‘윈드 오브 체인지’ 뮤직비디오만 봐도 눈물이 글썽글썽했었다. 그럴 때였다. 굳건한 진실보다는 흔들림이 많은 가능성을 믿고 있는 바보였을 때였다. 우리 모두는.


이 노래는 고르비가 개혁, 개방 정책 이후 변화의 바람이 부는 러시아를 이야기한다. 영화 ‘테트리스’를 보면 소련이 붕괴되는, 자유를 찾아가는 내용이 잘 나온다. 테트리스가 소비에트 연방 시대 모스크바의 한 컴퓨터실에서 알렉세이라는 프로그래머에 의해서 개발되었다는 사실. 이 테트리스가 소련에서 나와서 전 세계인들의 오락실과 티브이용 게임기 그리고 닌텐도에 들어가기까지의 그 험난하고 첩보작전이 어떻게 이루어져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다. 정말 재미있다. 테런 애저튼이 실제 인물과 싱크로 99%다. 이 영화에 고르비가 소련의 공산주의에 염증을 느낀 젊은 세대가 소련을 붕괴시킬 거라는 예견하는 장면이 잘 나온다.


그런데 요즘 스콜피온스가 투어를 하면서 ‘러시아를 낭만화하기 때문’이라는 가사를 도저히 부를 수가 없는 것이다. 가사에 ‘고리키 공원을 따라 모스크마를 거닌다. 변화의 바람 소리를 들으며’라고 되어 있는데 이런 광경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서 클라우스는 가사를 바꿔서 부르고 있다.


'내 마음을 듣는다. 우크라이나라고 말하네. 변화의 바람을 기다리며'로 체인지해서 노래를 부른다. 윈드 오브 체인지는 변화의 바람으로 냉전 종식을 알리는 노래로 알려져 전 세계인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감동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윈드 오브 체인지를 들어보자 https://youtu.be/n4RjJKxsam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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