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시골로 가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시골에 들어가는 순간 시골만이 가지는 냄새를 맡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시골냄새를 맡으면 기묘하지만 편해진다. 도시에서 시달리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시골만의 그 냄새가 있다. 그 냄새가 족쇄를 풀어헤친다.
뜨거운 태양열을 잔뜩 받은 풀냄새, 솥에서 나는 냄새, 소똥 냄새 같은 냄새가 풍기면 여름이라도 에어컨을 끄고 차 창문을 열고 달리게 된다. 거기에 외할머니가 해주던 음식 냄새, 시골집에서 나는 냄새, 시골의 개울가에서 나는 시골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그대로 무장해제가 된다. 냄새만으로도 인간은 그렇게 된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아로마 향을 피우는 사람에게 쓸데없는 짓이라 나무라지 말자. 그 사람은 아마도 그 누구보다 열심히 생활을 해내고 싶어 하는 것이니까.
시골의 냄새를 맡는 순간 내 속의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안심이 된다. 시골의 냄새는 여름에 집중된다. 학창 시절에는 7번 국도를 늘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완행버스를 타고 가서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렸다. 온 동네방네 정류장에는 다 들렀다. 그 재미가 있었다. 포항을 지나면서 대체로 비슷하지만 다른 시골의 풍경이 이어지는데 그 풍경을 멍하게 보면서 가는 재미가 좋았다. 7번 국도는 포항을 지나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나서부터는 계속 바다를 끼고 달리게 된다. 내가 사는 곳도 바닷가지만 7번 국도를 따라 보이는 바다와 느낌은 다르다. 그건 일상이 배제된 일탈의 바닷가라 그럴 것이다.
버스에서 차창이 열리는 곳은 뒷자리라 늘 뒷자리에 앉았다. 완행 버스는 올라타서 얼마 가지 않아 내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주로 앞부분에 사람들이 많이 앉았다. 주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 주로 할머니로 압축이 되었다. 그러나 이 마저도 포항을 지나면서부터는 급격히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에어컨이 너무 춥다 싶으면 창문을 살짝 열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후끈한 바람이 들어오는 동시에 시골 냄새도 딸려 들어왔다. 흠흠, 하며 그 냄새를 맡았다. 좋은 냄새였다. 뜨거운 열기를 잔뜩 받은 풀냄새, 바다에서 나는 짭조름한 미역 냄새와 포구에서 나는 짠 내.
출발 전에 햄버거를 사들고 올라타서 경주와 포항을 지나면 밖의 풍경을 보며 야금야금 먹었다. 완행 버스에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사람들은 각자 먹을 걸 꺼내서 냠냠 먹었다. 영해 같은 작은 도시의 정류장에서 정차를 했을 때에는 어떤 할머니가 내리면서 운전기사에게 삶은 감자를 두 개 건네기도 했다. 그러면 늘 하는 인사인지 “할매 올도 잘 묵겠심더”라고 했다.
울진까지 가야 했지만 한 번은 포항 터미널에 잠시 정차했을 때 그냥 내린 적이 있었다. 포항 터미널로 들어가기 직전의 포항의 모습이 그냥 좋았다. 내 나름대로 포항으로 접어들었을 때 저쪽으로 가면 포항 공대, 저쪽으로 가면 성모병원, 저쪽은 다운타운이 입력이 되어 있었다.
포항 성모병원은 큰 이모가 살아있을 적 자식이 없어서 크게 다쳐 입원을 했을 때 내가 병실을 며칠 지킨 적이 있었다. 그때 고1 방학인가 그랬는데 같은 병실에 엄마 간호를 하러 온 여학생과 찌리릿 같은 것이 있었다. 둘 다 쭈뼛쭈뼛거렸는데 서로 병문안 오면서 받은 음료와 빵을 나눠 먹으며 친해졌다. 그래서 방학 동안 병실 생활을 하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코로나가 막 터졌을 때 큰 이모는 성모병원에서 마지막 생을 다 했다. 그리고 거기서 장례식까지 치렀다. 당시에 포항에서 코로나 환자들이 속출한다고 해서 큰일 나는 분위기가 있었고, 장례식 같은 곳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게 했다. 그때 작은 이모와 이모부, 사촌 누나 두 명과 사촌 형과 나 그리고 모친이 전부였다. 코로나 덕분에 정말 조촐한 장례식을 치렀다. 그래서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은 큰 이모 덕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밤을 지새웠다. 사람들이 오지 않아서 장례식장이 쓸쓸하다든가 초라할 것 같은데 그런 분위기는 또 없었다. 결혼식이나 사람들이 많은 장례식장에서는 나누지 못할 이야기를 밤새 나누었다.
큰 이모는 자식이 없어서 어떻든 우리가 큰 이모의 일을 처리해야 했다. 큰 이모는 불영계곡의 작은 집에서 아파도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 그저 아코디언처럼 몸을 웅크리고 아픔을 견디다 쓰러졌다. 나와 모친밖에 없는 이곳으로 오라고 해도 고향이 좋다며 그곳에서 김치를 담그면 늘 나 먹으라고 보내 주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큰 이모가 살던 집에 모여 장례식장에 들어간 비용 같은 것을 엔 분의 1로 나눠서 내기로 했다. 그래서 큰 이모의 우체국 통장을 확인해 보니 내가 10년 전부터 매달 용돈으로 5만 원에서 10만 원씩 보냈는데 그 돈을 전혀 쓰지 않고 그대로 통장 안에 있었다. 그걸 생각하니 눈물이 너무 났다. 그 돈으로 병원비와 장례식 비용을 처리했다. 큰 이모의 장롱 속에는 곱고 예쁜 옷들이,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들이 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생들(나의 모친과 작은 이모)에게 나눠주려고 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있다. 큰 이모는 생활을 어떻게 하며 보냈을까.
외가에 가면 외가만의 시골냄새가 있다. 그 냄새를 맡기 위해서 여름이면 늘 외가에 가곤 했다. 최정례 시인의 ‘4분의 3쯤의 능선에서’가 생각난다.
언덕길 4분의 3쯤 내려오다가
문득 산딸나무 생각하는 것
전에 살던 동네 공원길
거기 4분의 3 능선에 산딸나무 있었다고
이러는 것, 이러는 것은
뭔가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다
지금은 산딸나무 꽃 피었겠다
꽃이 아니라 꽃받침 같았던 꽃
산딸나무 없는 아파트 숲에 살면서
그 동네 떠나온 것, 후회하는 것
공허를 옮기는 일이다
마트에 가서 애써 푸른 사과를 찾아내고
그 사과 3등분으로 쪼개면서
그 색깔 그 향기에 손 넣어보며
대신 사과를 먹으면 되잖아
이런 식으로 위로의 말을 꺼내는 것
그것도 그렇고
산딸나무 꽃과 사과의 내부가
푸른 기미의 미색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과가 산딸나무에 매달리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어디에든 정붙여보려고
산딸나무 꽃 지나는 것과 사과 쪼개 먹기를
동일시하는 것, 이것은
대책 없는 어거지인데
꽃받침이 꽃이 되고
앞이 꽃받침을 꽃인 줄 알고 받들어 올리고
그래서 꽃받침이 바로 꽃이라고
텅 빈 생각을 피워보려는 것도 그렇고
산의 딸이라서 산딸나무인가봐
그 생각도 말장난일 뿐이고
십자 모양으로 피는 네장의 꽃잎
산딸나무를 사과나무라고 부르고 싶을 지경이면
제정신 버리고 넘어가는 것이다
생각의 4분의 3 능선에서 피어나 흔적 없이
사라질 것에 걸려 넘어져서는
머뭇거리는 것, 이러는 것
시는 긴 시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간 속으로 들어가면 시골의 냄새가 있다. 외할머니는 오랜만에 온 나를 위해 연탄불에 양념돼지고기를 구워 주었다. 시원한 저녁 바람이 부는 개울이 보이는 외가의 마당에서 먹는 탄내가 입혀진 양념돼지고기. 그 냄새가 가끔 생각이 난다. 집에서 해 먹으면 전혀 그 냄새가 나지 않지만 해 먹는 동안 그때를 생각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