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치기를 끓이는데 방울토마토를 넣고 오렌지를 넣었는데 옆에서 난리다. 오렌지를 왜 넣냐고. 그러나 막상 완성이 되고 난 후 먹어보면 확 달라진다. 오렌지는 달다, 거기에 짠맛을 흡수해 버리면 단짠의 매력을 잔뜩 가진다. 너무 맛있다. 게다가 과일이건, 채소건 차갑게 먹는 것보다 뜨겁게 조리해서 먹는 게 훨씬 맛있단 말이지. 탕수육 소스를 생각하면 간단하다. 탕수육 소스는 과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과일이 많이 들어간다. 그렇게 뜨겁게 만든 소스가 탕수육과 만나서 맛이 두 배, 세 배가 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과일이 음식을 조리하는데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처럼 생각을 한다. 이를 문화적으로 좀 더 넓혀보면 한때 가수 솔비가 제대로 배우지 않고 그린 그림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비싼 가격에 그림이 팔려 나간다고 해서 그쪽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사람들이 솔비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배우들, 가수들 중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많다. 하정우가 대표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하지원도. 그림 때문에 고생고생을 한 조영남도 있고, 이번에는 강원래도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작품전을 했다.
그 짝 계통의 사람들, 미술가들,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들은 입지가 좁아진다며 제대로 배우지 않고(그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서-그림이 유통되고 브로커를 어떤 방식으로 통해서 이러쿵저러쿵) 그린 그림들을 전시하고 팔아먹는다고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쏟아냈다. 대표적으로 홍대 이작가, 이규원 화가가 유튜브에 나와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대중은 누군가를 비난하는 걸 재미있어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우르르 이작가의 말을 응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의사가 소설을 써서 소설가로 데뷔를 하거나, 화가가 소설집을 발표하거나, 엔지니어가 장편소설을 썼다고 해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프로 소설가들이 그들을 비난하거나 또는 비판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새로운 분야에서 전문적으로 일을 하던 사람들이 소설을 발표했기에 읽어 보니 괜찮더라,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인기 있는 소설가들, 우리가 좋아하는 김영하 소설가나 태백산맥의 조정래, 왼쪽의 황석영 소설가나 오른쪽의 이문열 소설가 역시 이념이나 사상에 무관하게 소설가가 아닌 사람이 소설을 썼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새로운 장르의 소설이 10만 부가 팔려 나갔다고 해서 나의 소설 10만 부가 팔리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입지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다.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어보면 소설가가 즉 하루키가 한 번은 사린 가스 사건으로 도쿄 지하철 사건을 취재해서 쓴 '언더그라운드'를 두고 일본의 논픽션 전문 작가들에게서 혹독한 비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소설가들은 다른 전문인들이 소설을 썼다고 해서 비판하기보다 오히려 호기심이 발동해서 기회가 닿으면 마주 앉아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때로는 격려도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소설은 쓰려고 마음만 먹으면 거의 누구라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나 발레리나로 데뷔하려면 어릴 때부터 길고 험난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소설이라면 문장을 쓸 줄 알고 불펜과 노트가 손 맡에 있다면, 자신만의 이야기를 쓸 수 있다면 전문적인 훈련 따위는 받지 않아도 일단 쓰여버린다.
그래서 ‘소설을 누구라도 쓸 수 있다는 건’ 하루키가 보기에, 소설에게는 비방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이라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장르는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 같은 것이다. 링도 상당히 널찍하고, 참여를 저지하고자 대기하는 경비원도 없고 심판도 그리 빡빡하게 굴지 않는다. 현역 선수들도 누구라도 다 올라오십시오,라는 기풍이 있다. 개방적이다. 손쉽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상당히 대충대충일 수 있다고 하루키는 말했다. 하지만 링에 오르기는 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다. 소설가는 물론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소설 한두 편 써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 이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보통 사람은 일단 못 할 짓, 이라고 말해버려도 무방할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것이 점점 필요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나름의 재능은 물론 필요하고 그만그만한 기개도 필요하다. 또한 인생의 다른 다양한 일들과 마찬가지로 운이나 인연도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어떤 종류의 자격 같은 것이 요구된다. 어찌 되었던 소설가로 계속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냉엄한 일인지, 소설가는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소설가는 다른 전문 영역의 사람이 로프를 넘어 소설가로 등단하는 것에 대해 기본적으로 포용적이고 대범한 게 아닐까라고 하루키는 말했다. 자, 올 테면 얼마든지 오시죠,라는 태도를 많은 작가들은 취하고 있다. 혹은 누군가 새로 들어와도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만일 새로 들어온 사람이 얼마 안 돼 링에서 밀려난다면, 혹은 스스로 내려간다면 아, 가엾게도,라든가, 그럼 안녕히,라고 할 것이고, 만일 그 사람이 노력해서 끝까지 링에 남는다면 그건 물론 경의를 표할 만한 일인 것이다.
소설을 떠나 모든 예술이 진입 장벽은 그리 높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하다가 안 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홍대 이작가는 유명한 연예인들이 그림을 어설프게 그려서 미술가들의 밥그릇을 빼앗아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말을 했다. 그러나 대중을 그렇게 너무 띄엄띄엄 봐서는 안 된다. 만약 미술가들이 그런 점이 별로라면 미술가들이 연예 활동을 하면 된다. 대중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그린 그림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연예인의 모든 모멘텀을 구매하는 것이다. 연예인이 유명해지기 위해 연예인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개고생을 했나. 그걸 딛고 일어나서 연예인으로 유명해진 다음 그리고 싶은 그림을 언젠가부터 그렸다. 대중은 그 모든 것을 구매하는 것이다.
요즘 가장 말 많고 탈 많은 남태현이 그린 낙서도 팬들은 천만 원에 구입을 한다. 일반인이 봤을 땐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이지. 예술계라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미술계도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왜? 이 같은 일들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테니까.
때로는 상상력으로만 쓰인 소설이나 영화가 비평가들에게 쓴소리를 듣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냐하면 평소에 뚱딴지같은 생각을 가지고 뚱딴지같은 행동을 하고 말을 하는 예술가가 그걸 글이나 영상으로 표현을 했는데, 너무나 많이 배우고 똑똑하고 현명한 비평가들이- 그들의 생각과 그들만의 시간의 흐름과 그들의 정확한 틀 속에서 상상력만으로 표현하는 결과물을 평가하려니 쓴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모든 건 대중이 알아서 한다. 대중이 우매하기도 하지만 문화의 주도를 이끄는 것 역시 대중이다. 예술가들끼리 좋아서 희희낙락해 봐야 큰 발전이 없을 수 있다. 대중이 좋아해 주고 응원해주지 않으면 전부 허빵이다. 오렌지가 두루치기에 들어왔다고 이상하게 볼 필요가 전혀 없다. 일단 먹어보면 맛있다. 예술이라는 게 뭐 그런 거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화가들, 마를렌 뒤마나 설치 미술가 트레이시 에민 그리고 우국원 화가는 입지 같은 거 따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유명한 사람들이잖아요,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가만히 앉아서 그저 붓놀림으로만 유명해지지는 않았다는 걸 그 짝 사람들이 모르지는 않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