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매일 듣는데 한 라디오 사연에 20년 지기 친구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20년 지기 친구인데 빌려준 돈을 가지고 영영 달아나 버렸다는 그런 사연이었다.


나는 그 사연을 들으며 생각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연수에 그렇게 매달리는 것일까. 연수가 오래되면, 특히 인간관계에서 알고 지낸 기간이 길면 어째서 친밀한 사이라고 믿어버리는 걸까.


20년 지기 친구라고 해도 20년 동안 몇 번을 만났을까. 가끔 티브이에서 우리는 1년에 한 번 만나는 사이지만 매일 보는 사이처럼 너무나 친밀해요, 같은 연예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연예인들은 우리와 너무나 동떨어져서 그런지 뭐 그렇다고 하자.


고등학교 때 친구가 찾아와서 나에게 뭔가를 부탁했다. 만약 이 친구가 4개월 전에 만난 사회의 친구이고 4개월 동안 주욱 만나는 사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그 부탁을 들어줄 의향이 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친구라도, 설령 그 당시에 죽고 못하는 친구였다고 해도 10년 동안 연락이 없다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우리 친구잖아?라고 하는 건 뭔가 이상하다. 내가 그전에 뭔가를 부탁했거나, 손을 내밀었다면 모를까.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지내면서 – 아버지가 병원생활을 2년 동안 할 때에도, 그리하여 나의 생활이 무너졌을 때에도 친구들에게 뭔가를 부탁하거나, 손을 내밀지 않았다. 특히 돈에 관한 것은 누구에게도 빌려달라고 한 적도 없고 빌려준 적도 없다. 좀 이상하게 살아와서 그런지 아직 대출도 한 번 없다.


라디오의 사연에서 20년 지기 친구라고 치고, 그 친구와 20년 동안 몇 번 만났을까. 매일 한 시간씩 만날까. 성인이 되면, 그리하여 각각 가정을 이루고 나면 힘들다. 그래서 인간은 어쩌다 만나서 수다를 떨며 가정생활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그럼 여기에서 친구보다 더 밀접한 관계인 가족, 부모나 형제자매가 친밀한 관계인가. 정희진 작가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적인 제도, 가장 부패한 제도,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는 가족이다. 가족은 곧 계급이다. 교육문제, 부동산 문제, 성차별을 만들어 내는 공장이다. 부(자본) 뿐만 아니라 문화, 자본, 인맥, 건강, 외모, 성격까지 세습되는 도구다. 간단히 말해 만악의 근원이다]라고 했다. 물론 지나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성인이 되어 갈수록, 나이가 들어 갈수록 가족은 힘이 되기보다 짐이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김소연 시인도 가족에 대해서 [우리는 아주 친밀한 사람에게 ‘가족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특별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실재하는 가족은 특별함을 일찌감치 지나쳐 온갖 문제가 산적한 집합체가 되어 있다. 우리들 내면에 간직된 상처의 가장 깊숙하고 거대한 상처는 대부분 가족으로부터 얻은 것이다]라고 했다.


가족도 그런데 고작 20년 지기 친구라고 해서 친밀한 관계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은 연수로 묶어서 관계를 결정짓은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인간은 이상하게도 친구를 좋아한다. 친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친구일까. 학창 시절에는 친구가 분명하게 있다. 매일 교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고 밥을 같이 먹고 같이 놀고 같이 자니며 비밀을 공유한다.


부모보다 선생님보다 당연하지만 친구가 좋다. 여자 친구에게 하지 못하는 말도, 남자 친구에게 열받는 일도 친구끼리는 같이 나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어른이 되어 갈수록 그때만큼의 생각을 가지기는 힘들다. 오로지 친구만 생각하기에는 눈앞에 닥친 일들이 많고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매일 넘치기 때문이다. 만나고 연락하는 문제보다 친구를 친구로 얼마나 생각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성인이 되면 상기해야 한다. 아내가 친구를 싫어할 수 있고, 반대로 아내가 자신보다 친구를 더 좋아할 수도 있다.


김영하 소설가는 [살아보니 친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편이다. 친구를 훨씬 덜 만났더라면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웠을 것이라고 김영하 소설가는 말했다. 쓸데없는 술자리에 너무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 맞출 수 없는 변덕스럽고 복잡한 여러 친구들의 성향과 어떤 남다른 성격, 이런 걸 맞춰주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읽을 걸. 잠을 자거나 음악이나 들을 걸. 그냥 거리를 걷던가. 결국 모든 친구들과 다 헤어지게 된다.라고 했는데 공감이 너무 간다.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친구라고 해서 정녕 친구인가. 그것에 대해서 한 번 생각을 해본다. 운동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조깅을 한 지 10년 정도 되었다고 하면 모두가 와 대단하네, 같은 말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은 조깅을 전혀 해보지 않거나, 1, 2년 정도 하다가 그만둔 사람들이다.


여기서 1, 2년 조깅을 했다,라고 하지만 그 1년 동안 얼마나 달렸는가 따져보면 참담한 수준일 것이다. 일주일에 3, 4일씩 달려도 1년이 지나면 1년 달렸다고 퉁 친다. 하루에 30분 정도, 2킬로미터를 달렸어도 매일 많은 거리를 달렸다고 퉁친다.


그날 한 운동은 그날로 잊어야 한다. 오늘 조깅을 8킬로미터 달렸다면 그건 오늘로 끝인 것이다. 그걸 죽 끌고 다니며 나 얼마나 달렸네, 운동했네 같은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일 년을 꼬박 한 시간 이상씩 조깅을 해도 명절에 이틀 정도 방구석에서 맛있는 거 먹고 나면 이전에 아무리 조깅을 했다고 해도 무용지물이다. 배가 나오고 등살이 붙는다.


그러니 연수로 뭔가를 보상받으려는 그 이상한 일반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친구는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친구가 괜찮은 친구다. 친구라고 해서 죽고 못 살고 없으면 안 되는 건 사춘기 때나 어울린다. 아니다, 요즘은 그것도 별로다. 요즘은 예전처럼 친구가 힘들다고 하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보다 약을 권하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가장 마음에 든 장면은 두 덩어리의 돌멩이가 되었을 때다. 돌은 겉과 속이 같다. 인간은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없다. 얼굴은 참 착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그 속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20년 동안 알고 지낸 친구도 돈을 빌려 도망을 가지. 그러나 돌이 되었을 때는 순수하게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된다. 친구라면 적어도 돌멩이 같은 친구가 나에게도, 또 상대방에게도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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