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팔의 정봉이가 심장 때문에 수술을 하고 난 후 몸을 회복하는데 힘이 드는 가운데 정팔이가 병실에 오니 정봉이가 다 죽어가는 소리로 정팔이에게, 너 코피 나는 건 괜찮냐고 묻는다. 그 장면은 기억에 참 많이 남는다. 가족을 가장 잘 표현한 장면이었다.


가족.

가족 하면 눈물이 먼저 나오는 사람이 있고, 한숨이 먼저 나오는 사람도 있다.


MBC 스트레이트 2023 청년보고서 ‘희망금지’ 편을 보면 2, 30대 고독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작은 집에서 고독사한 삼십 대 여성의 유품을 찾아가라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연락을 하니 찾아갈 것이 없어 전부 태워달라고 했다. 그렇게 30대 여성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 채 쓸쓸하고 고통스럽게 홀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f_AZQvPkkhc


YTN기사 중 ‘가족 돌봄 청년, 친구들보다 7배 더 우울하다’라는 기사가 있다. 청년인데 가족 중 장애를 가지거나 중병을 가진 가족을 돌보며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청년의 삶의 질은 무척 심각하다.

https://www.ytn.co.kr/_ln/0103_202304261646136914


기사에도 나오지만 열에 여섯은 우울증을 겪고 있다. 또 우울증을 겪는 대부분은 제대로 된 치료나 상담조차 받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다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조금은 이해한다. 나 역시 청년 시절 아버지 병간호를 2년 정도 했었다. 두 번의 크리스마스를 병실에서 보냈다. 병원 앞에 호텔이 있는데 병실에 난 창으로 보이는 반짝이는 호텔의 불빛을 보며 두 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 병원으로 와서 낮동안 병간호를 한 어머니와 교대를 했다. 밤새 간이침대에서 잠이 드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새벽에 아버지가 뒤척일 때는 자동적으로 일어나서 아버지를 살펴야 했고 이상이 있다면 간호사를 호출해야 했다. 잠을 거의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전에 어머니가 교대하러 오시면 출근하기 전에 잠시 눈을 좀 더 붙이고 출근하곤 했다.

잠은 늘 부족하고, 부족한 잠이 누적이 되니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그런 상태가 된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면 적응이 되고 몸이 너무 피곤하여 모두가 잠이 든 새벽 병동을 확인한 후 쿨쿨 간이침대에서도 잘도 뻗어 잤다. 얼마나 달콤하냐면 몇 분 잠든 것 같은데 벌써 아침이라 사람들이 오고 가고, 병실에 불이 들어오고, 간호사들이 다녔다.

처음에 간이침대에서 잠이 들어 일어나면 9세의 기운 좋은 남자아이가 몽둥이로 여기저기 때린 것처럼 몸이 욱신거렸지만 적응은 이딴 모든 것들을 해결을 해준다. 일 년 동안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생각도 없었고 나을 길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보며 낫기를 바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처음 크리스마스를 병실에서 보낼 때, 든 생각은 작년까지는 친구들과 여자애들과 함께 즐겁게 크리스마스를 보냈는데 내년에는 여기를 벗어나서 그렇게 보내겠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2년 병실 생활을 하는 동안 몸은 몸대로 정신은 정신대로 피폐해져 갔다. 보험이 되지 않는 수술을 할 때에는 벌어 놓은 돈을 전부 부어야 했고, 무엇보다 수술의 도장을 받을 때에는 어머니도, 여동생도 아닌 아들인 나의 선택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 압박이 심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반나절을 병실에서 병시중을 드느라 혈압이 190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한 마디로 엉망진창인 것이다. 생활이란 것이 없다. 그저 일하고 일 끝나면 병원으로 가는 것이다. 그나마 일 할 때가 좋다. 그러나 어머니의 전화번호가 폰으로 뜨거나, 병원의 전화번호가 폰 화면에 뜨는 순간 가슴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숨소리와 신음소리로 들끓는 병동도 밤이 되면 고요해졌다. 나는 2년 동안 모두가 잠이 든 병동을 보며 간이침대에 엎드려 그날그날 글을 썼다. 글이라고 하기에는 거창하고 그날의 일들을 메모를 했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들어가면 내가 할 일이 없기에 대기실에서 책을 읽었다. 그렇게 쓰고 읽은 책과 글이 꽤 많았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 못된 자식처럼 도망쳐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같은 것에 대해서 생각이 드는 건 아버지는 2년 병실 생활 끝에 돌아가셨다. 만약 1년 더 병실 생활을 했다면 집을 팔고, 빚을 내야 했을 것이다. 모두가 다, 너는 빚이 없어서 다행이야,라고 말하는데 정말 다행일까.

기사에서 처럼 저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중증환자를 가족으로 둔 청년들의 삶에서 질이라는 건 찾아볼 수 없다. 밑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을 것이다. 설령 겉으로 표를 내지 않으려 할 뿐이지 힘들다고 말도 못 할 것이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그게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런 건 힘내라 같은 말은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고작 2년 병실에 있을 때 과일 같은 거 사 오는 친구에게 이거 말고 기저귀를 사가지고 오라고 했다. 누구라도 이렇게 한 글자, 한 문장으로 적어서 계속 노출을 하여 공론화시켜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만드는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최고의 방법이며 최선의 선택이다.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정부에서 돌봄 청년 실태 조사가 이번이 처음이다.

사람들은 생각만큼 남 일에 관심이 없지만 생각보다 타인을 돕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알아야 도움을 줄 수 있다. 엄마 아버지를 병간호 잘한다고 효녀, 효자 같은 말로 퉁 치려 하는 관습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가족이 힘에서 짐이 되는 건 한 순간 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속에 내가 속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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