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디지코 KT 광고에 라면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렇게나 라면을 맛없게 먹을 수 있나. 라면을 맛없게 먹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어떻게 하면 라면을 맛없게 먹을 수 있을까. 티브이 속 여자들이 젓가락으로 깨작깨작 먹어도 맛있게 보이는 게 라면이다. 유튜브의 프로 먹방러들의 먹방 중에서도 라면 먹방이 제일 맛있게 보인다. 인기도 제일 많은 것 같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기 최고 순위에 있는 게 라면 먹방이다.
예전 어릴 때 살던 동네에는 작은 슈퍼가 있었다. 영화에서나 볼법한 오래된 동네 슈퍼. 점빵. 점빵에는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가게를 지켰다. 입구의 문은 여닫이가 아니라 미닫이 문으로 나무틀에 유리가 있는, 고풍과는 거리가 멀지만 나름대로 예술혼이 깃든 미닫이 문을 열면 드르륵 거리는 소리가 나서 몰래 들어올 수도 없다.
할머니는 방인지 카운터인지 구분이 안 되는 작은 공간에 담요를 깔고 모로 누워 있다가 드르륵 소리가 들리면 일어났다. 누워있었기에 할머니의 파마머리가 눌릴 법도 한데 스프링처럼 탱탱하기만 해서 원형의 헤어서타일을 고수했다. 도대체 머리에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점빵에는 작은 테이블이 두 개가 있는데 거기에 동네 어르신들이 매일 두서너 명씩 모여들어 막걸리를 마셨다. 안주가 주로 라면이었다. 할머니는 라면을 하루에 몇 십 개나 끓였다. 배를 채우는 라면보다는 막걸리에 어울리는 안주용으로 라면을 끓였지만 라면은 금방 동나고 만다. 코끝이 발갛게 된 어르신들은 네가 한 젓가락 더 먹었네 마네 하며 마냥 어린이가 되어 막걸리를 사이에 두고 티격태격했다.
할머니는 매일 안성탕면을 여러 개 끓이니까 라면 끓이는데 도가 텄다. 도사가 다 되었다. 곤로에 냄비를 올리고 물이 팔팔 끓으면 라면과 스프를 넣고 젓가락으로 면발을 공기와 마찰을 준 다음 계란을 탁 깨트려서 넣어서 휘휘 저어주었다.
운이 좋아 점빵에 떡국 떡이 있으면 몇 개 들어갔다. 떡국 떡이 들어가면 별거 아니지만 이상하게 맛있다. 최민식 주연의 카지노에서도 이동휘가 라면을 먹자니까 최민식이 떡도 좀 넣어달라고 하는 생활 연기는 너무 좋다. 할머니는 물 양을 기가 막히게 조절했다. 두 개, 세 개를 끓일 때와 하나를 끓일 때의 물양을 눈대중으로 대충 냄비에 붓는데 기가 막히게 조절을 한다.
짭조름함과 밍밍함 그 사이의 간극을 아주 잘 타는 솜씨가 있었다. 안주라지만 젓가락을 대는 순간 끝을 봐야 하는 그런 마법이 숨어 있었다. 어르신들은 막걸리를 한 잔 들이켜고 크 하고 난 후에 젓가락을 재빠르게 움직여 라면을 획득했다. 맛있었겠지. 집에서 따로 밥 달라 하지 않아도 되었다. 막걸리에 배가 차고 라면에 배가 불러오니까.
그러다 보면 어르신들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정부를 욕하고, 그러다 보면 서로 응원하는 정치가나 정당에 대해서 큰 소리를 내고, 그러다 보면 곧장 싸움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점빵 밖으로 나가서 서로 죽일 듯 노려보지만 주먹질을 할 만큼 용기는 없어서 노려만 보고 소리만 지르다가 주위에서 사람들이 말리면 그제야 앉아서 막걸리를 마시며 화해를 한다. 화해의 기념으로 점빵 할머니는 기가 막힌 라면을 끓여 온다. 기 승 전 결이 다 있는, 뭔가의 탄생, 성장, 소멸 과정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점빵의 풍경이었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없을 때 할머니 점빵에서 라면을 먹으면 그렇게 맛있었다. 적당히 꼬들꼬들한 면발과 국물에 배인 계란의 맛과 할머니 표 김치가 정말 맛있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짭조름함과 밍밍함 그 중간을 오고 가는 미묘한 맛을 잘 우려냈다. 그냥 맛있었다. 집에서 끓여 먹으면 이런 맛이 나지 않았다. 마치 분식집에서 끓여주는 라면처럼 특별한 맛이 있었다.
조깅을 하다가 그쪽으로 멀리 돌아서 가보니 이야 그 점빵이 아직도 있고 아직도 라면을 끓여주고 있고 아직도 어르신들이 테이블에 앉아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주위는 온통 엘지와 삼성 전자제품 판매 건물과 하이마트와 홈 플러스가 있는데 그 사이에 아직도 드르륵 미닫이 문으로 된 점빵이 있었다. 문틀이 나무에서 새시로 바뀌었지만. 할머니는 그때도 할머니인 것 같았는데 아직도 할머니였는데, 나의 기억이 뭔가 이상하겠지.
언젠가 거기에 앉아서 라면을 먹고 싶지만.
간식라면은 여전하고, 두루치기에 계란 후라이도 생겼네. 복사도 하는 모양이네.
점빵이름이 기묘하다. 간판에 라면이 당당하게 메뉴로 있다. 가게 저 안 쪽의 문은 나무틀이다. 저 안쪽은 방이자 주방.
주위는 온통 요즘 것들의 건물이지만 그 중간에 점빵은 단단하게 버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