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통닭인데 옛날 통닭 같지 않은 건 기분 탓이겠지. 아니면 날씨 탓으로 돌린다. 단순히 크기의 문제는 아닌 거 같다. 머리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몸이 기억하는 것들이 있다. 손발, 다리나 팔이 어어? 하면서 기억을 재생하기도 하는데 그게 아마도 ‘맛’에도 그런 요소가 들어 있지 않을까 싶다. 맛이라는 건 추억의 절반을 채우고 있지만 절반이나 되는 추억 속 옛날 통닭의 맛은 아니다.
맛이 없어서 그렇지도 않다. 그러니 그냥 기분 탓이거나 날씨 탓이다. 요즘의 옛날 통닭의 맛은 예전의 통닭에 비해 맛은 분명히 좋아졌을 것이다. 뭐 그럴 것이다. 따지고 들면 기름의 신선도나 뭐 그렇지 않을까 싶다. 또 요즘의 옛날 통닭은 꼭 ‘옜날’ 통닭 같다. 메타버스나 멀티버스 속 통닭 같은 느낌이다. 가상세계의 메타버스보다는 멀티버스 쪽이 더 가깝겠다.
평행 우주 속의 여러 시간대의 통닭이 존재하고 조금씩 맛이 다르다. 예전의 통닭은 그렇지 않았는데 같은 모습이지만 요즘의 통닭의 맛에는 약간 매콤한 맛이 있다. 매콤하다, 보다 좀 더 나은 표현이 없을까. 맵싹 하다? 먹다 보면 맵싹 한 맛이 통닭 전체에 입혀져 있다.
요즘의 옛날 통닭은 전문점이 있다. 이름은 조금씩 다르나 가마치, 다마치 같은 프랜차이즈다. 내가 있는 도시에는 오래전부터 전통 시장 안에 통닭골목이 있었다. 마주 보며 통닭집들이 데면데면 주르륵 붙어 있는데 심하지 않은 호객행위가 골목을 다니는 재미를 준다. 일단 좋은 말들의 향연이다.
잘생긴 청년, 예쁜 언니, 여기 들어와서 드셔.
저, 저는 못 생겼는데?
아이구, 아니야. 잘 생겼는데. 들어와서 닭 좀 뜯어.
지나다니면 삼삼오오 앉아서 통닭을 뜯고 있다. 사이다와 함께. 어쩐지 정겹다. 통닭집 안에서 닭을 튀기는 모습을 신기하고 재미있게 보던 때가 있었다. 요즘도 가끔 그 골목에서 닭을 포장해 간다. 근데 옛날 통닭보다는 후라이드다. 통닭 골목의 통닭집 대부분이 후라이드나 양념 치킨을 판다. 집집마다 맛이 조금씩 다른데 튀김옷을 나름의 비법, 방법으로 만들어서 취향에 맞는 통닭집을 찾아서 먹는 맛이 있다.
내가 가는 집은 튀김옷에 카레가루가 들어간다. 맛있다. 요즘은 음식이 전부 매콤하거나 맵다. 그래야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한다. 나는 전혀 맵지 않은 음식이 좋은데 카레가루가 들어간 후라이드는 맵지 않다. 아 그런데 작년부터 여기도 매콤의 기차를 탄 모양이다. 거기서는 아마도 ‘이상하다? 매주 한 번씩 와서 포장해 가던 그 삼촌은 왜 요즘 안 올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가면 약간은 친해지게 되기 때문이다.
통닭 골목의 집들은 오랜 시간 세월을 버텨온 노하우가 있어서 그걸 지키면서 대형 프랜차이즈와 차별을 두며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사람들도 북적북적 닭을 뜯으며 즐거웠다. 하지만 불황을 모르던 통닭 골목도 코로나를 겪으면서 모습이 바뀌었다.
옛날 통닭을 먹으면서 옛날 통닭 맛은 나지만 옛날은 추억 나지 않는 건 감각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옛날 통닭을 먹으면서 옛날 통닭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감각의 문제이다. 문제여서 큰일이군 문제다!라는 건 아니다. 단지 감각이 전달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럴 것이다. 감각이 신경물질을 내보내 뇌의 기억 장치에 도달해서 자극을 해야 하는데 –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감각이 도달하지 못해서 자극이 안 되기 때문에 옛날의 맛을 느끼면서도 추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기억의 감각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요 근래에 본 ‘웨스트 월드’ 시리즈와 ‘1899’ 시리즈는 확실히 인간의 기억에 관한 스토리가 깔려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이 세계를 두 세계나 그 이상의 세계로 나뉜다. 현실 세계를 제외한 다른 세계는 정신의 세계로 몸과 마음을 분리하여 각각 살아간다. 여기서 마음이라는 건 정신을 말한다. 우리는 대체로 마음이 움직인다고 하지만 그건 전부 정신, 머리가 하는 일일 뿐이다. 그래서 오래전 데츠카 오사무(1928)는 아톰의 심장을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 심어 두기도 했다.
우리는 기억하기 싫은 부분이 있지만 기억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계속 기억되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기억하고 싶지만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어떤 실험이나 약물 또는 수술의 방법으로 몸이 죽더라도, 또는 몸은 지금 여기에 있더라도 정신은 또 다른 세계 속에서 그 세계에 맞는 몸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다. 지금의 기억을 완전히 삭제가 된 채. 그 시기가 1899년도가 되기도 한다.
그건 바로 동시 공체이며 나는 이 세계관을 미드보다 훨씬 전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접했다. 감각을 살려 놓으면 몸은 재가 되어 버리더라도 정신의 세계 – 이를 어떤 세계에서는 웨스트 월드라고 할 수 있고, 어떤 세계에서는 1899년의 프로메테우스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안에서 무한 루프로 살아갈 수 있다. 즉 불멸하는 것이다. 부작용도 있다. 이 부작용이란 마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멸할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이 뭔지 모르고 ‘시’라는 것도 모른다. 단지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부부관계를 가지지만 격정적인 쾌락이나 행복의 척도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면 더 편하다. 게다가 불멸하는 사람들은 그게 슬픈 건지 우울한 건지, 알 수더 없고 알 필요도 없다. 그런 감각 자체가 없다. 이런 부작용이란 여기서 거기를 보는 입장일 뿐이지 그 세계의 사람들은 부작용이라고 느끼지도 않는다. 그 세계의 무한 반복이 되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며 불멸한다는 것도 모른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다.
닭 먹다가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하겠지만 감각이란 뭐 그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요즘의 미드를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너무 말이 되게 잘 만들어서 보다 보면 음 맞아, 하는 부분이 있다.
내가 기억하는 옛날 통닭의 맛에는 맛있다 맛없다, 가 아니라 그 속에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통닭을 집에 튀겨 오기도 했지만 그 기억보다는 위에서 말한 시장통 통닭집에서 가족이 앉아서 먹은 기억이 있다. 그렇게 먹는 통닭이 맛있었다. 온통 닭 튀기는 냄새가 풍기는 시장통 닭집 테이블에 앉아 큰 은쟁반에 갓 나온 통닭을 뜯어먹었다. 짜장면이나 삼겹살보다 통닭집에서 외식하는 기분이 더 들었다.
감각이란 너무나 신묘하다. 만약 아픔이 기억되면 아마 인간은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병에 걸려 죽을 것처럼 아팠을 때, 지금은 다 낫고 괜찮은데 기억이 그 아픔 자체를 기억한다면 끔찍할 것이다. 기억의 역할은 아팠을 그때 그 아픔으로 인해 불편하고 고통스러웠던 나를 기억한다. 아픔 자체는 기억할 수 없고 기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아픔을 기억을 해버리는 감각적 사고가 나기도 한다. 아마 환지통을 겪는 사람들일 것이다. 뇌는 실제 감각으로 인지해 버린다.
맛에 대한 감각 역시 기묘하다. 음식의 맛은 예전을 기억한다. 맛은 시간이 흘러도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맛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통닭을 먹는데 옛날 통닭에 대한 기억이 덜 한 것은 역시 감각의 문제다. 나는 닭 먹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나저나 닭이 너무 작다. 이건 15일이나 살아 있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