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서서히 가을의 색으로 물들어 가려고 한다. 가을의 색이라면 허브차의 이런 색이지 싶다. 봄의 초록을 지나 푸른 여름과 다르고 하이얀 겨울과도 다른, 그 어디에도 끼지 않는 독자적인 색감이 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밤에 맥주를 버리고 허브차를 한 잔씩 마시고 있다. 한 잔이라기보다 하나의 티백으로 세 잔 정도 우려내서 마신다. 허브차라는 게 그냥 풀 맛이 날 뿐인데 이상하게 계속 홀짝홀짝거리게 된다.


커피와 다르고 뱅쇼와도 다르다. 정말 풀 맛이 미미하게 날 뿐인데 이상하게 맛있다. 맛이 없는데 그 맛이 없는 게 맛있다. 맛없는 맛있는 음식이 있다면 허브차가 그렇지 않을까 싶다.


어른들의 맛이다.


어린이는 절대 먹지 않을 맛이다. 어린이는 입에 대자마자 우웩 하는 맛이다. 나도 어린이 입맛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이런 풀 맛에 매료되어 버렸다. 어째서 나이가 들면 이런 맛없는 맛이 맛있다고 느껴질까.


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는 세포가 노화하면서 어쩌고 하겠지만 그 외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인간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기까지, 그러니까 어른의 입맛으로 바뀌기 전까지 수많은 음식을 먹게 된다.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는 밥과 반찬부터 학교의 급식, 친구들과 먹는 떡볶이부터 짜장면, 달달한 음료까지. 씁쓸하고 풀 맛난 맛을 제외하고 많은 맛있는 음식들을 먹었다.


그러다 보니 입은 맛있는 맛으로 채워졌고 보통의 맛있는 맛으로는 입맛을 채울 수 없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더 자극적이고 더 더 자극적인 음식을 원한다. 어제보다 오늘 더 맛있는 음식을 원하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거라는 희망을 가진다. 그렇게 자극적인 맛이 길들여진 입으로 어느 날 풀 맛이 나는 허브차가 마치 신처럼 내려왔다.


슴슴하고 심심한 맛.

가미되지 않은 하나의 맛.

밋밋하지만 묵직하고 깊은 맛.

위장을 채우는 맛이 아니라 위로에 가까운 맛.

어른이 되면 그런 맛을 알게 된다. 가을에 이르러 깊은 색감을 내는 것처럼.


어제는 날이 쌀쌀해져 가죽재킷을 꺼내서 호다닥 입고 나왔는데 더워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1리터 정도 마셨을 것이다. 어쩐지 나의 몸은 아직 여름의 끝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 가을의 색감을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된 것일까.


한 인간이 준비가 되고 말고 할 것 없이 자연은 때가 되면 법칙을 착실하게 지킨다. 자연이란 마음이라는 게 없어서 그저 육체는 시간에 따라 계절의 색감을 바꿔 입는다. 그러나 인간은 또 다른 문제다. 인간의 육체 역시 시간의 착실한 법칙에 순응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이 그 법칙에 따라가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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