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5시 38분. 폰이 켜지고 노래가 흘러나오며 그 소리에 저는 잠에서 깼습니다. 아, 지금은 여행 중이었지, 이틀 정도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눈뜨자마자 바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낯선 곳의 공기를 맡아봤습니다. 그래 봐야 20초 정도 열었다가 창문은 닫아 버렸습니다. 공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차가웠습니다. 마치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발가벗은 채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때 묻지 않은 오전과 손상받지 않은 하루가 주는 기분으로 낯선 곳에서 여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낯선 곳에는 일탈의 자유가 있습니다. 반면에 일상의 편안함과는 거리가 조금 멉니다. 폰 속에서 조안 바에즈의 ‘Blowin’in the wine’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보브 딜런이 부른 것보다 훨씬 더 듣기가 좋았습니다. 조안 바에즈의 목소리에는 그런 매력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의 평온함을 방해하지 않는 목소리였습니다. 차가운 공기를 맡으며 잠시 노래에 심취했습니다.
맥락 없이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조금은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맹점이 흐트러져 지겨운 기분이 들 때쯤 이곳으로 왔습니다. 7시까지 시간의 사치를 즐기다가 양치질만 하고 밖으로 나와서 30분 정도 조깅을 했습니다. 숨어 차더군요.
이곳도 바닷가라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여는 오래된 식당과 스낵바, 잡은 해산물을 바로 튀겨주는 곳이 있는 곳입니다. 날은 어제보다 기온은 낮았지만 30분쯤 달리고 나니 몸에 데워졌습니다. 9시까지 산책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을 연, 바다가 코앞인 노천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오전이라 기름으로 하는 음식은 준비 중이라서 안 된다고 하더군요. 말린 문어로 만든 샐러드와 햄에그 샌드위를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맥주를 주문했는데 맥주는 리투아니아의 맥주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앉아서 조안 바에즈의 노래를 계속 들으며 맥주를 홀짝이고 샌드위치를 먹고 있으니 여행객들이 어슬렁 체육복 바람으로 나와서 자리를 잡고 식사를 했습니다.
거리는 이내 커피를 볶아대는 향과 햄을 굽는 냄새와 그 사이를 파고드는 바다의 미미한 짠 내가 이곳으로 몰려든 사람들의 피로를 들어주었습니다. 여행을 가면 읽으려고 책을 들고 왔지만 결국 읽지 못했습니다. 넙치를 들고 왔는데, 가슴이 세 개 달린 여자와 미각을 자극하여 욕망을 건드리는 음식이 나오는, 읽다 보면 귄터 그라스의 면모를 느낄 수 있는 책이지만 펼쳐보지도 못했습니다.
샌드위치를 씹어 먹으며 리투아니아의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아무런 미동도 없는 바다를 봤습니다. 그저 바라보는 겁니다. 그것에 무슨 이유라든가 의미 같은 건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미를 너무 따지는 것 같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는데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미미한 해가 이동을 하는지 옅은 그림자가 여기에서 조금 움직인 것 같았습니다.
괜찮았는데 수염이 체셔의 입 모양 같은 주인이 나와서 파라솔을 펼쳐 주었습니다. 안약을 넣은 것처럼 희미한 햇빛이 내려오다가 나에게 닿지 못하고 파라솔에 차단이 되었습니다. 거리의 식당에 사람들로 꽉 들어찼고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괜스레 기분이 들떠 리투아니아의 맥주를 한 잔 더 주문했습니다. 외국인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게다가 르완다 언어까지 들렸습니다. 맙소사. 마치 해저 수만 리에 사는 눈이 없고 학명도 모르는 고생물 같은 물고기가 내뱉는 언어 같았습니다. 그들이 듣기에는 우리의 언어가 또 그렇겠지요.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 보였습니다. 그 속을 벌려보면 씁쓸함도 있을 겁니다.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는 모양이었습니다. 담배 연기는 자석처럼 저에게로만 옵니다. 참 이상하지요. 저의 폐를 더럽히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매일 보는 바다와는 달랐습니다.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고 집에 왔을 때 목줄만 손에 들린 것처럼 놀랄만한 푸르름이라서 아찔했습니다. 바다는 몹시 깊은데 그 안이 다 보인다는 게, 그게 무서운 것 같습니다.
바다는 어째서 바다일까요. 너무 진부하지요. 바다는 시간이 시간을 만나 지나면서 조금씩 희생한 시간의 유전자 같습니다. 바다는 클래식과 같으며 여자의 마음과 비슷합니다. 종잡을 수 없습니다. 바다를 사랑하게 된 많은 이들이 바다를 두 팔로 안으려고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습니다.
남들이 나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바다는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래, 바다를 닮자,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봐 넌 이미 바다를 닮았어.라고 바다가 말을 해주었습니다. 리투아니아 맥주는 그런 마법이 있는 것 같군요. 맥주를 한 잔 더 주문하니 쳬셔의 웃음 같은 수염을 지닌 주인이 와서 마지막 잔이라고 했습니다. 일 인당 3잔 이상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다시 리와인드해서 ‘Blowin’in the wine’를 들었습니다. 아직 덜 손상받은 하루가 있는, 그런 날입니다. 또 편지하겠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