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바라보는 아이들



한 계절이 죽어 갑니다. 계절이 죽어가면서 공허가 조금 깊어졌습니다. 이 공허라는 건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내 몸속에 무엇이 있지만 아무것도 없고, 너무나 어둡고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하얗게 빛이 보입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허무한 마음이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습니다. 당신은 그런 공허를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지난번 계절이 죽어갈 때 들었던 공허보다 좀 더 크고, 깊고, 끈적하고, 짙어졌습니다. 앞으로 몇 번의 죽어가는 계절을 볼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 형태가 있는 것이든, 형태가 없는 것이든 태어나는 순간 죽어갑니다. 죽지 않으려면 태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계절은 비록 죽어갈지라도 때가 되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그리도 태어납니다. 이것을 저는 ‘영원’이라고 부릅니다.


태어나서 죽지 않고 사는 게 영원이 아니라 죽음을 알고 태어나고 죽어가는 걸 반복하는 것이 영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세상에 ‘영원’이나 ‘절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섣불리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이나, 절대로 헤어지지 말자고 하는 말은 쉽게 내뱉으면 안 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좋아했던 그 이유가 헤어지는 이유가 되는 게 우리 인간이니까 말입니다.


오늘 대기의 가스층이 걷혀 깔끔한 밤하늘이었습니다. 불순물이 껴 있지 않은, 아주 검은색에 가까운 밤하늘을 봤습니다. 그리고 별을 봤습니다. 별이 마치 당신의 작고 예쁜 귀에 걸린 귀걸이처럼 반짝거렸습니다. 별을 보면 김환기 화백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그림 속 수백만 개의 작은 점들은 별입니다.


그중에서 김환기 화백이 진하게 찍어 놓은 점이 있습니다. 그 점을 그릴 떼 아마도 김환기 화백의 벗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환기 화백은 70년대 초반 몸이 너무 아파서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의사의 권유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을 받지 않으면 그림을 더 이상 그릴 수 없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중에 침대에서 떨어져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저는 압니다. 그런 김환기 화백이 친구인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를 보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김광섭 시인은 김환기 화백보다 10살 정도 많습니다.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단어 ‘벗’이라든가 ‘동무’ 같은 말들이 이름처럼 친근하게 들렸던 때입니다. 김광섭 시인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한데 말년에 미국에 있었습니다. 몸이 좋지 않았던 시인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벗들을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저녁에’라는 시를 씁니다.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저 별 하나가 나를 내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저 별 하나를 올려본다. 중략.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화백은 벗인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를 보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70년대에서 잊혔던 이 소중한 이야기는 80년대에 유심초라는 그룹이 그림과 같은 제목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예술가들이 마음 깊이 새겼던 밤하늘의 그 별을 오늘 저는 봤습니다. 별이 당신의 귀걸이처럼 반짝일 때마다 저는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이 죽어가는 계절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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