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스티븐 라우리, 1958, Industrial Landscape를 그려봄


매일 눈뜨면 좀비 같은 몰골로 시간에 맞춰 전철을 타야 하고 꽉 끼는 듯한 조여옴과 사람 냄새를 참아가며 회사에 도착해서 정신없이 오전 근무를 하고 나면 짤막한 점심시간에 허겁지겁 밥을 먹고 다시 오후 업무에, 직장상사에게 깨지고 퇴근 후에 부장을 씹으며 소주를 털어 넣다가 차 시간이 다 되어서 땀을 흘리며 겨우겨우 막차를 집어타고 집으로 와서 씻자마자 잠이 든다. 그리고 눈을 뜨면 어제와 똑같은 오늘의 반복.


또 한국 회사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이 놀랐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 5시가 넘어 들어가서도 오전 출근 시간에 칼같이 나와서 아무렇지 않게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놀라는 외국인들.


보통 티브이나 영화에서 회사원들은 이렇게 비쳤다. 똑같은 업무를 매일 반복적으로 보다 보니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통렬한 결락에 의해 회사를 뛰쳐나와 자기 하고픈 일을 하여 성공을 한 케이스는 또 여러 프로그램에서 소개가 되었다. 하지만 회사원 모두가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애착과 뿌듯함은 가장 작은 단위 ‘가정’에서부터 우리는 익혔다. 우영우 역시 그 뿌듯함을 느끼며 마지막을 장식했다.


한때 회사원이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의 크리에이터처럼 말이다. 90년대 사람들이 기를 쓰고 공부를 해서 들어가고 싶어 하던 회사는 ‘미생’이나 ‘무한도전’에서 정 과장이 있었던 무슨 무슨 상사 같은 회사였다. 당시에는 모두가 들어가고 싶어 하는 회사였다. 야근이 많았고 점심시간과 야근이 끝나고도 회사원들은 자기 계발을 위해 배우고 싶은 학원에서 영어회화나 취미 활동을 열심히 했다. 하루가 촘촘한 인도인 머리카락처럼 빽빽했다.


회사원들은 본인의 하루 일과가, 루틴의 반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사이를 벌려서 하고 싶은 것들을 해야 했다. 운동을 했고, 책을 읽었다. 책을 읽는 것과 운동을 하는 것은 시간이 날 때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시간을 내서 해야 한다. 그래서 회사원들은 근성이 강하다. 근성이라는 말이 언젠가부터 조금 호러블 한 의미로 쓰였지만 근성만 있는 놈이 근성도 없는 놈보다는 낫다. 회사원들이 시간을 내서, 시간을 들여 공연을 보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고, 극장에 가지 않고 미술관에 가지 않으면 예술과 문화는 망가진다.


더 나아가 문화와 예술에 종사라는 작가들은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 제 아무리 글을 잘 쓴다고 한들 사람들이 책을 사보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음악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듣지 않으면 역시 굶어 죽는다. 회사원들이 빽빽한 루틴으로 한 달을 열심히 보낸 후에 받은 월급으로 문화의 1선에서 활동한다. 회사원들이 여러 권의 책을 구입해서 읽고 그 책이 마음에 들면 사진과 함께 짤막한 코멘트를 sns에 올린다. 그 정보는 파도처럼 퍼져나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서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어제오늘의 말이 아니다. 그런데 2016년 돈가? 아무튼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출판 7위다. 어마어마한 책을 만들어 내고 있고 또 소화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내 주위를 둘러봐라. 책을 읽는 인간이 거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출판을 많이 할까. 그건 바로 책을 좋아하는 회사원들이 월급을 타면 읽고 싶은 책을 왕창 구매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매달 수많은 책벌레 회사원들이 문화의 일선에서 책을 왕창 구입해서 읽고 그것을 공유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들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건 시스템은 지금도 여전하고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노래도 마찬가지다. 노래를 만드는, 일종의 독특하고 천재 소리를 듣는 뮤지션이라는 사람들이 일반 대중을 무시하는 듯한, 음악을 창작하는 것은 엄청난 일이기에 일반 대중은 카피, 오마주, 레퍼런스 같은 의미를 알지 못하니까 표절이라고 시시비비를 따지지 말라고 하는 언행은 올바르지 않다. 정치인들도 대중의 지지율 2, 3%에 공약이 파기되거나 숨거나 싹싹 비는데. 음악인들끼리 하는 말을 대중을 상대로 하는 곳에서 무시하듯 하지 말라는 말이다.


회사원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지 않았나 싶다. 1세대 회사원들이 일주일에 6일씩 일을 했기에 이 작은 나라에 선박을 만들어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또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가 몇 군데나 있다. 이건 어떻게 봐도 너무 신기한 일이다. 또 포털 사이트 역시 몇 개나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을까. 휴대전화를 만들어서 꾸준하게 세계적으로 팔고 있는 회사도 한국에 있다.


이 모든 게 회사원들이 아니었으면 해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나라가 발전을 하는 것은 대통령 한 사람이 노력을 한다고 해서 될 문제도 아니고, 정치인 몇 명이서 외국에 나가서 홍보를 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다. 먹고살기 힘든 시기에 문화예술은 더 그렇다. 코로나가 덮쳤던 때를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다.


사는 게 하루하루가 전쟁이더군, 하는 노래처럼 매일이 전쟁이고 지옥 같은 하루지만 근성을 가지고 이른 아침에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들의 등을 보고 있으면 아버지도 떠오르고 기분이 나쁘지 않다.



회사원들은 공감할 노래, 장미여관의 퇴근하겠습니다 https://youtu.be/xmAsPX0xYCY

뮤직비디오는 초현실이라 좋음. 트루먼 쇼도 생각나고.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또 다른 제목 ‘일각수의 꿈’에는 세계의 끝에 있는 마을이 나온다. 아주 춥고 몹시 추운 긴 겨울이 있고 그곳에 일각수가 꿈틀대고 있다.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는 마을에 들어오면서 따로 떼어 놓고 오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은 ‘마음’이라는 것이 점점 사라지게 된다.


주인공은 그림자와 함께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는 계획을 짜 놓지만 마지막에 마을에 남기로 한다. 주인공은 아직 조금 남아있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마음을 잃어버린 그녀와 함께 있기로 한다. 너무 흥미롭고,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상실의 시대에서도 와타나베는 목숨보다 사랑하는 피 같은 나오코를 따라가지 않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녹음이 짙은 미도리에게 희망을 건다. 다자키 쓰쿠루에서도 다자키는 이 전화가 사라에게서 오는 전화라는 걸 안다.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게 한다.


마음이 사라지면 얼굴의 표정도 없어지고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도 없어지기 때문에 이 행동이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지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로렌스 스티븐 라우리의 ‘Industrial Landscape (1958)’ 그림을 따라 그렸다. 라우리의 그림 속 인물들은 가늘고 길쭉한 성냥개비 인간들 같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나오는 마을 속 사람들의 모습이 꼭 라우리 그림 속의 사람들 같다. 그들은 1950년대 영국 산업 시대의 사람들로 모두가 생존하기 위해 공장에서 밤낮으로 일을 한다. 그림 속 성냥개비 인간들은 그림자를 잃어버리고 살아간다.


라우리는 고독하지 않았다면 그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회사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어머니가 잠든 후 고요한 새벽에 그는 매일 낮에 본 쓸쓸한 산업 시대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렸다. 고독은 라우리 그림의, 그의 예술의 원천이었다. 라우리는 공장에서 일하는 동료들에게 자신은 화가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저 밤이 하늘을 수놓으면 캔버스를 꺼내서 가늘고 긴,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렸다. 1950년대 당시의 영국 노동자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라우리의 그림 속, 사람들은 전부 굳은 표정에 등을 구부리고 어딘가로 바쁘게 걸어가며 그림자도 없지만 색감만큼은 생동감이 강하다. 인파 속에서 고독하고 외롭지만, 고독하여 외로워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라우리의 그림을 보는 것이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