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날 후배가 찾아왔다. 후배라고는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하고 거의 왕래가 없었다. 복학해서 같은 학년이 되었고 제법 친하게 어울렸다. 술도 자주 마시고 어떤 부분의 이야기는, 딱히 설명할 길은 없으나(왜냐하면 후배와 나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인간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제법 잘 통했다. 그래 봐야 스무 살 안팎의 좁은 시야로 보는 세상의 치기 어린 이야기들뿐이다. 후배는 제대 후 마음에 맞는 여성을 만나 결혼을 했고 아들을 낳아서 행복하게 지냈다. 여기까지가 내가 후배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전부다. 결혼을 하면서 결혼을 하지 않은 나와는 자주 만나지 않게 되었다. 왕래가 점점 줄어들어 끊어지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후배가 거의 10년 만인가, 나를 찾아왔다.
후배는 축구를 잘해서 늘 날씬했고 허벅지가 굵었는데 그동안 운동을 하지 않았는지 살이 많이 찐 모습이었다. 그래도 얼굴 낯빛은 나쁘지 않았다. 수염이 잘 나지 않았던 후배의 얼굴은 수염이 거뭇하게 피부를 뚫고 올라와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낯설기도 했다. 살이 찌면서 얼굴에도 살이 붙었다. 나이가 들어 얼굴에 살이 빠지면 그것만큼 보기 싫은 것도 없다. 그래서 그 균형이 나쁘지 않게 보였다.
오랜만에 나를 찾아온 후배와 술은 마시지 않았다. 둘 다 운전도 해야 하고, 나는 술을 마시지 않은 지 오래되었고, 또 후배가 술을 마시며 해야 할 이야기를 하러 온 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커피를 한 잔씩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런 것을 보면 대단한 발전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 모습도 변화시킨다.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지기도 한다. 운전과 몸과 날씨 같은 것들을 받아들이는 나이가 되었다. 대학교 때에는 내일 따위 전혀 생각지도 않고 그저 오늘만 사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밤을 지새우고, 하릴없는 이야기를 하고 공을 차거나 음악을 듣고, 건축 모형을 만들곤 했다. 후배는 전공을 살려 착실히 공부를 하여 시청의 공무원이 되어 그쪽 계통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누구나 되고 싶어 하는 신의 직장, 공무원인 것이다. 축하해주었다.
낯빛이 나쁘지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던 후배는 서서히 고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고민이라기보다 그저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후배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고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런데 아들이 같은 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는 대 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자신의 비관을 아버지에게 풍기는 인상을 주고 있다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아들은 학교 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데 아들이 아버지에게 그런 자신의 모습을 내비치고 있다는 말이.
아들은 몇 개 월째 같은 반 아이들 모두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도대체 왜 아이들이 전부 한 아이를 따돌림하는 거지?
후배의 아들은 태어날 때 소아마비로 몹시 앓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것이다. 체육시간에 아들과 같은 조가 되면 반드시 진다며 아들을 따돌리기 시작한 것이 도미노처럼 점점 번지기 시작했다. 따돌림을 참아내는 건 너무 힘든 모양이었다. 연필을 감추고, 찾아서 주지도 않는다. 다음 날이면 또 다른 물건을 감추고, 다른 날에는 신발을 감춰서 버려 버리고, 아픈 다리로 걷는 흉내를 내며 욕을 한다. 그 수위가 강물의 수면처럼 벗어나지 않으며 늘 일정한 상태를 유지한 채 아들을 매일 괴롭히는 것이다. 아들의 편이 되어주기라도 하는 친구가 있으면 다수에 의해 공격 대상이 된다. 아들은 잔잔한 수면에서 벗어나지 않게 따돌림당하는데 아들과 친하게 지내는 같은 반 아이는 괴롭힘 당하는 수위가 잔혹할 만큼 괴로운 것이다.
아이들의 세계는 단순한 것 같지만 복잡하기만 하다. 비슷한, 힘이 없는 아이들이 한데 뭉쳐 거대한 힘을 만들어서 가장 연약한 아이를 끝없이 따돌린다. 따돌림이라는 건 당사자가 모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이건 너를 따돌리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응당 괴로워야 해. 라며 따돌린다. 주동자가 있고 주동자의 추종세력이 아들의 주위를 돌며 호시탐탐 따돌릴 기회를 노린다.
하지만 그런 심각한 문제를 나를 찾아와서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나는 후배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 사실을 후배도 알고 있을 것이다. 왜 경찰이나, 학교의 전담반이나 이런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후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내가 알 수 없는 진실이 숨어 있을 것이다. 후배는 나에게 어릴 때 누군가를 따돌려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없다고 했다. 생각이고 할 것도 없었다. 왜냐면 누군가를 따돌릴 만큼 영악함이나 노련함 그리고 대범함 내지는 악독함 같은 것들이 나에게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당하는 쪽에 속했다. 그러나 요즘처럼 괴롭힘이 아니라 짝지와 친구 몇 이서 나를 빼고 하교를 한다든가, 그 정도의 따돌림이었다.
후배는 씁쓸한 미소를 유지한 채 사실은 자신이 어릴 때,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 아이를 심하게 따돌렸던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들과 함께 매일 그 아이를 따돌리는 재미에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했다. 화장실 청소할 때 밀대에 물을 많이 묻힌 다음에 거기에 얼굴을 파묻기도 했다고 했다. 맙소사.
물건을 숨기는 건 물론이고, 돈까지 빼앗었던 적도 있다고 했다. 물론 후회하고 있고 고등학교에 갔을 때 그 친구를 찾아가서 용서를 빌기도 했다고 했다.
그래, 그 애가 너의 용서를 받아줬어? 후배는 아니라고 했다. 집 앞에서 무릎까지 꿇었지만 얼굴도 보기 싫어했다고 했다. 그 후로 시간이 흘러 지금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 후배의 아들이 학교에서 반 아이들에게 심각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후배는 숨을 들이마신 후에 이야기를 했다. 아들을 따돌리는 주동자의 아버지가 어릴 때 후배가 따돌렸던 그 아이라고 했다. 맙소사.
그렇다면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의 자식에게 따돌림을 가르쳤던 말인가? 아니다. 그럴리는 없다. 누군가를 따돌리라고 할,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저 우연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후배의 아들이 반 아이들에게 당하는 따돌림은 후배가 어린 시절에 그 아이에게 했던 따돌림과 방법이 같은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