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물김치


바야흐로 오이물김치의 계절이다. 작년에도 오이에 대해서 글을 적고 1년 뒤에 보자,라고 했는데 1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1시간은 참 안 가는데 1년은 참 빨리 지나간다. 1년이 지나가고 오이의 계절이 곁으로 왔다. 조깅을 하며 땀을 열심히 흘린 다음 시원한 오이를 와그작 씹어 먹는 맛은 아주 좋다.


오이를 먹는다는 건 비관하지는 않지만 낙관적이지 않는 나의 생활을 반영한다. 나는 빨강머리 앤을 좋아한다. 소설도 좋아하고 만화도, 그리고 시즌 2까지만 봤지만 넷플릭스 드라마도 좋아한다. 앤 셜리는 극강의 긍정주의며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또 무슨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까 하는 생각에 하루가 너무나 재미있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다. 빨강머리 앤의 소설을 좋아하지 앤은 나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하루에 대한 기대가 그다지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기 전까지 오늘 어떤 재미있는 일어날까 하는 기대가 1도 없는 사람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생활을 보면 하루에 재미있는 어떤 이벤트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매일 똑같은 반복이다. 또 그 순환을 지겨워하지도 않으며 밀어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변화 없는 하루 속에 작은 일이 일어나면 그 하찮은 일 때문에 재미없을 하루가 꽤나 괜찮다고 느낀다. 아무 기대 없이 지내다가 여름이 시작되어서 이렇게 오이냉국의 오이를 와그작 씹어 먹으면 기분이 좋다. 오이는 그런 기대 없는 하루에 비관적이지 않는 작은 기분 좋음을 전해준다.


맛도 좋아서 여름에는 오이를 씹는다. 이렇게 오이를 먹고 있으면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에 대청마루에 앉아서 오이를 먹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오이로 냉국을 만들어서 대청마루에 나란히 앉아서 마당에 핀 포도나무를 보며 같이 후루룩 먹는다. 포도나무는 작년에 식목에 묘목을 구입해서 화단에 심어 놓았다. 포도나무가 잘 자라도록 약도 주고 거름도 줘야 하지만 그냥 묻어 놨을 뿐이다. 그런데도 포도가 열렸다. 비록 맛과는 거리가 멀지만 나무는 어떻게든 뿌리를 통해 양분을 배달해 포도를 맺었다. 신기한 일이다. 우리는 그런 대견한 포도나무를 보며 냉국을 후루룩 먹는다. 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 현실은 우리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지만 우리는 오이냉국을 먹으며 현실의 통증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준비를 한다. 아름다운 계절에 아름다운 날들이 지나가고 있다. 마당에 심어 놓은 포도나무를 비롯해 상추와 허브들 사이로 벌레들이 날아다닌다. 매미들이 신나게 울고 틀어 놓은 선풍기의 머리가 왔다 갔다 하면서 더위를 식혀주었다. 오이를 먹으면 이런 풍경이 떠오른다.


찬밥이 있다면 말아먹어도 맛있다. 여름에는 자주 오이냉국에 밥을 말아먹는다. 여름에는 자주 오이냉국에 밥을 말아먹는다. 오이냉국에 밥을 말아먹으면 밥알이 탱글탱글 살아있어서 씹는 맛이 일품이다. 라면 마니아들이 라면을 먹고 난 후에 미지근해진 국물에 찬밥을 말아먹으면 맛있다고 하는 이유가 납득이 간다. 씹는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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