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컵라면만 한 게 없다. 날이 헤실헤실 거리며 바람을 동반하여 하늘이 마치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보일 때에는 고민할 필요 없이 컵라면에 물을 붓는다. 몸이 국물을 갈구할 때 이것저것 엄청난 것을 떠올리려 해 봐야 기대만큼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고민 없이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부으면 그만이다. 빠르고, 간단하고, 무엇보다 맛있다. 근래에는 컵라면에 계란을 넣지 않지만 컵라면에도 계란을 하나 톡 넣어서 먹었었다. 겨울에 컵라면을 먹을 때는 계란을 하나 넣어야지. 끓이는 라면과는 다른, 계란이 풀어진 맛이 좋았다. 매운맛이 싫어서 컵라면을 더 그렇게 먹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초등학생 때 학교 벤치에 앉아서 컵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그때의 겨울은 분명 고드름이 꽁꽁 열리는 추운 겨울일 텐데 기억 속에서는 따뜻한 겨울의 모습이 가득하다. 아직 방학 전이었고 우리는 벤치에 앉아서 후후 불어서 웃으면서 컵라면을 맛있게도 먹었다. 걔의 이름은 남자 이름 같아서 늘 놀림을 받았는데 집이 한 동네에 있어서 같이 등하교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에도 컵라면만큼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뜨거운 물에 데쳐진 후레이크를 서로 보이며 낄낄거리던 겨울이었다. 우리의 손에는 작은 컵라면이 있었다. 초4부터 아바의 노래를 듣기 시작했는데 컵라면 옆에는 아바의 치키티타가 흐른다고 생각을 하자. 겨울이지만 해가 쨍하게 떠 있고 바람이 없어서 포근했다고 하자.
아바의 노래를 듣게 된 건 순전히 특별 활동하는 부서의 선생님 때문일 것이다. 나는 형도 없고 누나도 없으니 내가 팝을 자연스럽게 듣게 된 건 아무래도 그 선생님 덕일 것이다. 초등학교 때에 동화부라고 하는 특별활동반이 있었다. 나는 4, 5, 6학년 내내 동화부였다. 동화부라고 해서 특별히 동화를 배우거나 파고는 건 아니고 그냥 모여서 이야기하고 논다. 좋게 말해서 동화 이야기를 가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건데, 그러다 보면 이야기는 늘 다른 길로 새 버린다. 동화부 선생님은 늘 팝을 들었고 우리에게 팝 가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팝송도 가르쳐 주었다. 이를테면 ‘워스~ 돈 컵이지 투미~’ 같은 노래들.
그러다가 오후가 되면 선생님은 뜨거운 물을 끓여 우리와 함께 컵라면을 먹었다. 컵라면이라는 게 각자 하나씩 들고 먹을 뿐인데 마치 다 같이 끓인 라면을 떠서 먹는 것처럼 친밀감이 있었다. 교실의 난로 주위를 빙 둘러앉아서 맛있게 먹으며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4, 5, 6학년 때에는 집에 일찍 들어가지 않았다. 학교가 재미있었다. 학교가 재미있다니.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하지만 생각해보면 중학교 시절 먼지처럼 보내서 그렇지 또 고등학교 시절에도 꽤나 드라마틱하게 보낸 것 같다.
5학년 때 담임은 싫었다. 담임은 장난감이 많은 나에게 자신의 어린아이들에게 줄 거라며 이사할 때 버리려거든 장난감을 달라고 했다. 그 소리를 아버지에게 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버리지도 않을 거면서 내 장난감을 5학년 담임에게 꽤나 주었다. 나는 미술작품 활동에 적극적이었는데 담임은 나를 부려 먹기도 했다. 자신의 어린아이들 숙제 같은 것도 같이 만들기를 바랐고 그림도 같이 그려주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교실에 와서 담임의 부탁으로 커튼을 갈아주기도 했고 손재주가 좋은 아버지는 교탁이나 책상 같은 것들도 손봐주었다. 나는 뒤에서 뾰로통하게 서 있었다. 어린 눈에도 담임은 밉상이었다.
무엇보다 담임이 가장 밉게 보일 때가 내가 컵라면을 먹을 때 나의 컵라면을 꼭 한 젓가락씩 먹었다. 계란이 들어있는 그 부분에 젓가락을 넣어서 면과 계란을 가져가서 먹었다. 내색은 못했지만 담임이 아주 싫었다. 그래서 수업시간이 아니면 나는 늘 동화부에 가서 동화부 선생님과 아이들과 놀았다. 그곳에는 미운 사람도 없고 팝송도 있고 내가 컵라면을 먹을 때 한 젓가락씩 뺐어 먹는 사람도 없었다. 겨울이면 일주일에 몇 번은 컵라면을 먹었다. 동화부에서는 여러 가지 것들을 했다. 방패연을 만들어서 날리기도 했고, 학교에 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같이 다녔는데 그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도 했다.
동화부 교실 하면 늘 그런 기억이 떠오른다. 창으로 투과되어 들어오는 빛이 따뜻한 자리에 앉아서 컵라면을 물에 붓고 기다리는 시간, 그 시간이 아주 좋았다. 컵라면의 맛있는 냄새가 동화부 교실에 퍼지고 그 애와 컵라면 3분을 기다린다. 그 시간이 정말 기가 막힌 시간이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은 없지만 그 애와 이런저런 얘기를 한 것은 기억이 난다. 컵라면의 뚜껑을 열기 직전까지의 그 시간. 그리고 우리는 호로록 거리며 맛있게 컵라면을 먹었다.
요즘은 컵라면에 계란을 넣어서 먹지 않는다. 대신 오징어도 넣고, 치즈를 넣기도 하고, 김치를 넣어서 휘휘 저어서 먹기도 한다. 조깅을 하다가 편의점을 지나치면 그곳에 앉아서 초등학생이 컵라면을 세 개를 놓고 먹고 있는 모습은 왕왕 본다. 그냥 컵라면, 마라탕 컵라면, 불닭 볶음면 컵라면, 이렇게 3개를 먹더라. 편의점 유리를 사이에 두고 세계가 격하게 갈라졌다. 나이가 든다는 건 컵라면 하나 정도를 국물까지 후루룩 마시고 나면 배가 부르다는 것이다. 거기에 밥까지 말아먹으면 뒹굴뒹굴하게 된다. 나도 한 번에 세 개의 컵라면을 꼭 먹으리라.
사랑의 달콤함을 알기에는 우리의 삶은 너무나 길고,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삶은 터무니없이 짧다고 했는데, 컵라면도 주로 먹는 것만 먹게 된다. 수많은 컵라면을 다 먹어보기에는 나의 인생이 짧아도 한참 짧다고 생각된다.
또 먹고 싶네 컵라면 이것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