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임박이다. 마치 세일하는 질 좋은 물건의 시간 임박처럼 대선이 조여 온다. 방송가에서는 세계를 초토화시킨 오미크론보다, 실종자 수색보다 더 많이 다루고 있다. 광고에서도 공약을 잘 지킬 수 있습니까, 노후도, 어린이의 안정도, 처우 개선도, 실업 문제도 자신 있습니까,라고 한다.


대통령 한 명이 바뀐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물론 거의 절대적 권력을 손에 거머쥐며 모두가 허리를 굽히다 보니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바꿀 것 같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시대다. 지금 이전까지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제부터 나오는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것을 대통령 후보자들도 아는지 우리가 혹 할 만큼 괜찮은 공약은 나오지 않고 있다. 대체로 5년 동안 청와대 안에서 모두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다 보면 말기에는 레임덕이 되기 마련이다.


대통령으로 당선되어서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이룰 수 있었던 시기는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집권 시기였다. 그 이후로 어떤 분야든 가속페달을 밟으며 오를 대로 올라 자리를 잡았기에 현재 그 시스템을 바꾸거나 갈아치우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 시스템을 구축하는 동안 거기에 가담한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자동차 하나를 만들면 그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개개인에게는 3인 또는 2인의 가족이 있다. 자동차 공장이 들어선 도시는 자동차 공장 때문에 메트로폴리탄이 되기도 한다. 그 시스템이나 구조가 잘못되었다 해도 거기에 이미 몸을 담고 있는 수많은 사람, 수많은 가족들을 무시할 수가 없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매불쇼의 심용환 역사교육 연구소 소장의 말을 참고로 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직접 보시면 될 듯하다. 1993년부터 2002년 정도까지가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시기였고 이 시기에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 개혁이 가능했다. 그 이전에 시스템이나 구조가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금융실명제를 93년에 김영삼 대통령이 통과시키고 그다음 해에 종합소득세 기준안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지금까지 종합소득세를 신고하고 있다. 또 외환위기 이후에 실물경제가 너무 떨어지고 나라 경기가 너무 어려워졌다. 사람들에게 월급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김대중 대통령이 아이디어를 낸 것이 미래의 자산을 당겨 쓰자, 지금 당장 돈이 없지만 앞으로 우리가 돈을 벌 거니까 미리 돈을 당겨 쓰자, 해서 카드 사용이 대대적으로 시행됐다.


카드를 쓴다는 건 다음 달 소득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카드를 많이 풀었는데 그만 풀어버린 양이 어마어마했다. 그때 엘지카드가 천삼백만 장을 남발했다고 한다. 부자 되세요, 의 비씨 카드도 그 당시에 엄청나게 남발했다. 그런 단점이 있었지만 그 당시에 카드 사용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 모든 부분이 신용카드화가 되어 세금을 숨긴다던지, 포탈하는 것들은 어렵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세금을 뒤로 빼돌리는 인간이 있지만 예전만큼 그 양과 깊이가 심각하지는 않다, 예전에는 통장에 자기 이름을 쓰지 않고도 계좌가 개설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대통령 호칭을 빼겠습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일제강점기 때 태어났다. 10대 때 일본인 교사한테 대들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일본인에게 끌려가서 고생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또 나이가 너무 어렸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게 된 시기는 1950년대였다. 이 두 사람을 419 혁명의 아들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정치를 시작하고 419 혁명이 일어나고 시스템도 무너뜨릴 수 있고 새로운 민주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를 이제 민주 공화국으로 만들자. 두 사람은 이 하나의 신념이 강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모두가 알겠지만 김영삼은 우리나라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다. 아직도 그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요즘 이준석이 너무 어린것 아니냐 하고 하지만 김영삼은 26살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근데 실제로는 한 살 더 어렸던 걸로 나온다. 당시에는 커트라인이 26살이라 그렇게 한 살 올려서 출마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김영삼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무엇인가를 할 때에는 정치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집을 팔았다고 한다. 여러 번 팔았다. 김영삼은 투명하기로 유명한데, 정치 쪼랩부터 집을 팔아서 정치 자금을 모았다. 아마도 그 후광을 돌봐주는 사람이 마산에서 큰 멸치어장을 하고 있던 아버지가 아닐까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그 당시 정치인들은 중에 김영삼의 멸치 상자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김영삼은 클리어하고 투명하게 돈을 벌면서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김영삼의 대통령에 대한 갈망은 10대부터였다.


김대중은 원래 사업가였다. 사업으로 성공도 여러 번 했다. 두 사람의 특징이라면 김영삼은 어머니가 무장공비에 살해를 당했다. 김대중은 사업을 하고 있을 때 광주로 들어온 북한군에 의해서 체포되어서 죽다가 살아난 이력이 있다. 그리하여 이런 배경이 이 두 사람이 정치활동을 하는데 방어막이 되어 주었다. 김대중이 김영삼보다 나이는 한 다섯 살 정도 형이었다. 이 두 사람은 초기에는 아주 친한 것으로 추정하지만 말년에는 아주 사이가 안 좋은 걸로 유명하다. 김영삼은 자서전에서도 3분의 1이 김대중의 욕이라고 한다. 폭격 수준이었다. 아무튼 할 말은 시원하게 다 하면서 살았다. 김대중은 김영삼과 다른 방법으로 김영삼을 무시했는데 이를테면, 나 빼고 나머지 중에는 김영삼이 좀 괜찮아, 너는 나와는 급이 되지 않아, 하는 식으로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예전의 여야는, 두 사람은 필요로 할 때에는 서로 불렀고, 도움을 청하고 도와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경쟁하고 미워하지만 연대는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비난만 있고 그 비난을 덮을 비난뿐이다.


이 두 사람이 정치 쪼랩 시절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이 조병옥이었다. 조병옥은 1800년대 사람으로 유학파에 제주 43 사건을 강경하게 대응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승만의 라이벌이기도 했고, 정치적 거물이었고, 315 부정선거 당시 암으로 별세했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김두환의 스승으로 나오는 인물이다. 엘리트에 독립운동에 경찰 쪽의 우두머리(예전에는 검사보다 경찰이 더 힘이 있었다, 순사 시절)였던 사람이 조병옥이었다. 이런 조병옥이 김영삼과 김대중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다. 조병옥이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투철한 민주주의자였다고 한다.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은 계속 정치적으로 성장해오다가 1971년에 삼선개헌이 일어난다. 그때 김영삼이 앞으로 나오면서 ‘40대 기수론’을 펼친다. 그 때문에 김영삼이라는 정치인이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당시 거물 정치인들은 김영삼을 젓 비린내 나는 아이로 보고 무시를 했다. 김영삼이 김대중보다 먼저 치고 나오게 된다. 김영삼은 26살부터 정치를 했고 9선이다. 36년 동안 국회의원을 하면서 대통령을 한 번 했다. 김영삼은 퇴임 후에 편안하게 살다가 할 말 다 하면서 돌아가신 분으로 기억된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김영삼은 40대 기수론이라는 어젠다를 외치면서 그 당시의 오래된 정치인들을 다 은퇴시켜버린다. 그러니까 김영삼이 대선주자로 나오지만 자신은 떨어지고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 후보가 되니까 기성 정치인들이 다 날아가게 되었다.


419 혁명, 518 광주 민주화운동, 1212 군사쿠데타,라고 하는 이 말을 현직 대통령으로 확정시킨 사람이 김영삼이었다. 역사를 정리했다. 또 작년에 문재인 대통령이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을 했는데 그것의 최초의 선례가 김영삼 정부 첫 해에 임시정부요인들, 2대 대통령인 박은식 대통령의 유해를 모셔오는 역할을 했다. 또 공직자 재산등록제 같은 경우도 김영삼 정부 시작 이틀 만에 자기의 재산을 다 오픈을 해버린다. 나 17억 8천만 원 가지고 있어, 너는 얼마 있어? 라면서 다 까발린다. 일주일 내로 김종필 등등 전부 다 공개를 하게 된다. 육 개월간 법을 열심히 만든다. 그렇게 해서 나온 법이 공직자윤리법이다. 이후 공직자는 재산 공개가 의무화가 되었다. 지금의 공직자 재산공개가 그때 생겨난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지금의 국힘당을 만든 장본인 격이다. 그래서 법을 고치고 역사를 바로 잡는 일들이 어려웠다. 하지만 밀어붙이는 것은 또 밀어붙였다. 이렇게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다가 힘이 달리면 야당의 김대중 총재에게 연락을 했다. 직접적으로 연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호를 보내면 야당의 김대중 총재는 지금 김영삼에게 잘하고 있다며 일이 처리되도록 도와주었다.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여야가 대화가 되었다. 하지만 문제도 많았다. 김영삼은 아들 문제도 있었고 정치자금 문제도 있었고. 김영삼 대통령은 선례는 잘 만드는데 구조와 시스템을 구축하지는 못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북핵문제를 전혀 관리하지 못했다고 한다. 클린턴이 와서 빨리 북핵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때 클린턴과 대립을 하면서 문제를 크게 만들기도 했다. 그때 일화 중 매일 아침 조깅을 하는 김영삼 대통령을 따라서 클린턴이 조깅을 했는데 지기 싫어하는 김영삼 대통령이 빠르게 달려버려서 클린턴이 따라다가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달렸다고 한다. 김영삼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외환위기였다.


하지만 이 외환위기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기회를 주게 된다. 그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하거나 남북관계를 좋게 만드는 활동을 외환위기를 극복하면서 하게 된다. 그러면서 오늘날과 같은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터넷 즉 초고속 광통신망 같은 경우 첫 시작은 김영삼 정부에 계획이 나왔고 그걸 김대중 정부가 받아서 IT산업으로 확 키웠다. 그 길을 열었다. 또 그때 재벌개혁, 빅딜이라고 해서 모든 재벌에 모든 계열사가를 다 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그런 정책을 해서 재벌의 부채 비용을 낮추는 등 시스템을 정리했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가 드러나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추진력이 좋았다. 추진력은 좋았으나 구조를 만들지 못했다. 그 만들지 못한 구조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서 시스템을 구축했다. 김영삼은 추진하는 데 있어서 거침없었는데 요컨대 금융실명제를 하는데 경제수석이 반대를 하면 경제수석만 빼놓고 나머지를 모아 놓고 금융실명제를 발표를 하는 등 그냥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계속 인터뷰를 하는 스타일로 국제사회에서 더 유명했다. 하버드 경제를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대중경제론인가 하는 수업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재벌개혁을 한다고 하면 IMF 총재를 데리고 오거나, 아니면 빌 클린턴 대통령을 데리고 왔다. 클린턴이 98년에 우리나라에 와서 외환위기를 해결하려면 재벌개혁을 해야 합니다,라고 미국 대통령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게 했다. 대단한 전략적인 외교력을 가진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대통령 후보가 나오면 이렇게 후보들의 지난 이야기를 사람들이 하며 관심을 가진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는 후보가 현재 있냐는 것이다. 나처럼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이 정도로 예전 대통령들에 대해서 흥미롭게 검색하고 책도 읽어 보지만 지금 나오는 후보자들에게 이런 관심을 기울이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다. 지금 시대에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뀌어서 개혁을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비방만 하다가 대통령이 어영부영되는 것도 참으로 이상하다.


워낙 이상한 시기이고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진 지금이지만  잘못된 시스템 하나 정도는 대통령이 나서서 노력을 하고, 여당은 야당의 도움을 받아서 국민들이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대선 구도와 행보를 보면 너무나 끔찍할 뿐이다. 게다가 현재 후보들이 김영삼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처럼 정치 쪼랩부터 활동한 과거의 이력이 지금 우리가 궁금해서 찾아보고  관심 가질 만한 것인가. 현재 후보의 과거가 너무나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런 사람들 중에 대통령이 나온다 하니 외신에서도 역대급 비호감 선거라고 평을 했다.


정치는 생활 그 자체라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정치인들은 너도나도 말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끊게 만드는 것 같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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