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하루가 지나간다


하루가 오전 6시의 목욕탕처럼 고요하고 그림처럼 지나간다. 조용한 그림 속에서 나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배경으로 한 부분으로라도 차지하고 있을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반짝이는 햇살 때문에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영하 10도 가까이 되는 날이다. 너무 차가운 공기 때문에 사람들도 드문드문 지나다니고 인파라는 말은 정말 오래 전의 말처럼 되어 버렸다. 이 고요를 깨는 건 라디오의 디제이들뿐이다. 일요일이 이토록 고요하게 흘러도 될까.


코로나는 사람들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았다. 이동이 없어 고요하면 그만큼 코로나에서 조금 떨어져 안전망에 들어 있다는 기분이 들지만 생계의 위협 때문에 불안하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북적이면 생활은 괜찮으나 코로나와 조금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안전망에서 벗어났다는 불안이 든다. 사람이 오지 않아도 생계가 불안하고, 사람들이 많이 와서 혹시 코로나가 거쳐 갔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에 따른 절차를 따라야 해서 또 불안하다. 코로나는 사람들을 이래도 불안하고 저래도 불안하게 만들었다.


코로나가 덮친 이후 사람들의 유튜브 활동은 적극적으로 활발해졌다. 사람들과 대면하지 않고도 유튜브 영상만으로도 수익을 창출할 수 있으니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 영상을 제작하고 있다. 분명 좋은 패러다임이지만 또 단점은 확실하게 드러나고 그 단점은 점점 구멍이 커져간다. 유명 비제이와 배구선수가 악플을 감당하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했고 그에 따른 방송으로 또 다른 유튜버들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사람들은 대선 후보자들의 토론도 티브이보다는 유튜브로 시청하는 것을 선호한다. 실시간으로 직접적 참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달아 놓은 댓글은 남아서 기록이 된다.


코로나 시기와 맞물려 폭발적으로 늘어난 유튜브 영상을 보면 지금은 대비 구조가 확실한 사람들이 생겼다. 정확하게 동전의 양면처럼 확고한 대립구조를 이루고 이 대립은 거의 폭력 수준이다.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디카프리오의 ‘돈 룩 업’을 보면 미국 사회를 병맛으로 꼬집는데 엄청난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대립의 구조가 확실해지면 말도 안 되는 병맛 내지는 거의 폭력 수준이 되어야 사람들이 좋아하고 달려든다. 티브이 예능 프로그램을 봐도 그렇게 패러다임이 흘러간다. 그저 모여서 하는 이야기를 관찰 예능이라는 타이틀로 방송을 할 뿐이다. 그 속에는 모여있는 사람 외에 없는 누군가를 향한 이야기에 모두가 재미있어한다. 관찰 예능이지만 그 마저도 대본으로 짜고 치는 방송으로 전락을 하고 말았다. 드라마도 욕을 하면서도 보는 막장 드라마가 시청률이 높다. 곧 수익이 이루어지는 구조가 그렇다는 말이다.


국가의 큰 행사인 대선이 코앞이라 대립 구조는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고학력자들이 가득한 정치인들도 초등학생들처럼 싸운다. 도대체 이게 뭐지? 같은 수준으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헐뜯는데 서류를 만들어 발표를 한다. 어쩌면 초등학생들보다 못한 수준으로 상대방을 비방한다. 이렇게 되면 메신저보다는 메시지에 사람들은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게 바로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광고 마케팅의 천재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방법이다.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그럴 것이다를 정말 그렇다로 만들어버린 마케팅의 천재였다. 괴벨스의 스승이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가 만들어 놓은 마케팅은 아직도 전 세계에 널리 퍼져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다. 마치 불변처럼 절대 바뀌지 않고 있다. 그에 관한 책을 들여다보는 건 소설만큼 재미있다.


이런 일들이 코로나 이후 더 심해졌다. 뉴스를 장식하는 기가 막히는 일들이 매일 터지고 있다. 편의점에서 10시 이후 음식물을 못 먹게 하니 아르바이트에게 음식을 던진다던가, 손소독제를 시럽으로 잘못 알고 커피에 넣었다가 직원과 싸움을 했다던가. 이런 일들은 명확하게 누가 잘못했는지 나오지만 시간이 하루만 지나면 의견이 반반으로 갈리며 대립구조를 이룬다. 유튜브에서 누군가가 이런 사건을 다루면 그 밑에 사람들은 댓글을 활발히 단다. 그리고 의견이 갈린다. 어딘가에 분노를 표출하고 싶은 울분을 댓글을 통해 욕으로 푼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빌미를 제공하면 그 사람을 걸레가 될 때까지 공격을 한다. 대중은 폭주기관차가 된다. 어딘가,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하는데 폭주기관차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 욕받이가 무릎을 꿇고 잘못을 인정해도 멈출 수가 없다.


이런 복잡한 구조의 세계인데 눈으로 보이는 하루는 너무나 고요하고 조용하게 흘러간다. 그것처럼 나의 몸도 조금씩 조용하게 늙어간다. 어느 날 보니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많이 나면 그것대로 괜찮지만 귀 옆에 한 가닥씩 나는 게 보기 싫다. 뽑고 나면 일주일 정도 지나면 그 자리에 또 하나가 보인다. 시간도 1초씩 조용하게 흘러간다. 그러나 1년은 금방 지나가 버린다. 어느새 한 바퀴 돌아서 자동차보험을 다시 계약을 해야 한다.


나의 문제점을 말해보자. 사람들에게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을 근래에 한다. 참으로 무난한 말이다. 행복하세요, 만큼 안전한 말이 없다. 하지만 매일 행복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의 목표를 행복으로 두고 있다. 매일 행복할 수 없는데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나는 날 수 없지만 가끔 어떤 장치를 통해 가끔 하늘을 날기에 하늘을 나는 것이 목표인 것과 비슷할까. 어떻든 행복하자고 우리는 우리에게 늘 말한다. 그게 잘 못된 것은 아니지만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에 들어가면 역시 제대로 말을 할 수는 없다. 행복은 순간이며 금방 지나가버리기 때문에 행복과 행복 그 사이를 좁히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고 노력 속에는 고통과 아픔, 심지어는 불행이 도사리고 있다. 나는 꼭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게 오래되었고 내 주위는 나를 그런 인간으로 알고 있고 받아들이고 있다. 행복을 좇다 보면 지친다. 일단 한 번 지치고 나면 다시 일어나서 영차 하기가 쉽지 않다. 행복하기보다 덜 불행하기를 바라며 매일 덜 불행하다면 그게 행복에 맞먹는 기쁨이라 여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소소한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퇴근길에 포장해온 통닭 한 마리에 가족들이 행복해하고, 오전에 한 잔의 커피에 소확행을 즐기게 되었다.


근래 이전에는, 한 때는 사람들에게 덜 불행한 하루가 되세요, 했는데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약 짓는 약사 시인이 있는데 그녀만 덜 불행한 것에 크게 공감을 해 줄 뿐이었다. 행복은 인간에게 끔찍한 것일지도 모른다. 찰나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나 이외의 사람들을 괴롭히고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모두가 행복할 수 없는데 우리는 모두 행복하세요, 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뻔 한 얘기지만 누군가 행복하려면 누군가는 지하에서 햇빛도 못 받으며 열심히 페달을 밟아야 한다.


우리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빨리 잊는다. 에르메스를 구입하거나, 새 차를 뽑거나, 집을 계약했을 때의 그 행복감이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망각을 한다. 이 망각 때문에 우리가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다. 사고로 크게 다치거나 병에 걸려 심하게 아팠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행히도 다쳤을 때 죽을 것만 같은 그 아픔은 이미 다 잊었다. 아픔 때문에 따라오는 힘들었던 기억은 있으나 아픔 그 자체는 기억하지 못한다. 만약 죽을 것만 같았던 아픔을 기억한다면 인간은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조물주가 인간은 참 잘 빚었다. 신이 있다면 참으로 인간을 기가 막히게 프로그래밍했다. 행복이라는 순간의 감정도 시간이 지나 일상이 되면 잊어버린다. 행복한 가정은 그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가족의 누군가가 죽을 만큼 힘을 내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렇게 조용한 일요일이 고요하게 흘러간다. 어딘가에서는 포탄이 터지고 누군가는 울부짖으며 죽어갈지라도 지금 오늘은 이렇게도 고요하게 흘러간다. 라디오에서 사베지 가든의 노래가 나온다. 고요해서 따뜻하지만 슬프고 차가운 하루이기도 하다. 그런 하루 속에 각자 각각의 장소에서 보내고 있다.

메타버스 세계에서 사람들의 대립을 볼 수 있다면 현실에서는 보색의 대비를 볼 수 있다. 해넘이 직전 추위를 무릅쓰고 조깅을 하러 나오면 밤하늘과 낮의 하늘이 만나 그러데이션을 만드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다음 날에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곧 어둠으로 바뀔 것이다. 냉기가 얼굴을 할퀴지만 이렇게 잠시 서서 하늘의 얼굴색이 바뀌는 걸 본다. 저기 아파트에 살면 매일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겠지. 하지만 막상 눈앞에 있으면 소홀하게 된다.

하루는 바닷가를 달렸다. 정말 추웠는데 그래서 그런지 해안에 붙어 있는 술집과 카페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밖에는 사타구니가 얼마큼 춥지만 카페 안에는 따뜻해서 겉옷을 벗고 모두가 삼삼오오 테이블에 앉아 소주와 맥주를 마시고 있다. 행복하게 보였다. 바람이 심하면 바닷가는 정말 춥다. 하지만 9시까지 열심히 마셔야겠지.

이는 하천에 반영된 불빛의 모습이다. 날이 너무 차고 하천이 너무 고요해서 그대로 멎은 것 같아서인지 반영된 불빛이 마치 하천 밑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보통날이 추워서 오리들 때문에 물결이 있지만 이날은 조깅을 하다 보니 정말 고요했다. 날이 생각 이상으로 차가우면 사람도 동물도 대체로 움직임이 없어서 세상은 정말 멎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 곧 날이 풀리겠지.


기묘하지만 이 구도에서 사진을 담으면 이렇게 누군가 가로등 밑을 지나가고 저기 아파트 단지 위에 뜬 달과 함께 꼭 그림처럼 보인다. 그리고 늘 고요하다. 조깅 코스지만 여기서 이 구도로 사진을 담으면 사람도 차도 아파트도 하늘도 달도 별도 고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올해 가장 추운 날 조깅을 하니 평소보다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늘 나오는 사람들은 늘 와서 자전거를 타거나 운동을 한다. 가장 추운 날이지만 바람이 없어서 또 달리다 보면 등에서 땀이 난다. 서쪽을 향해 달리면 해가 지면서 오렌지빛이 하늘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며 죽 달릴 수 있다.

정말 아름답다. 아름다운 색감이다. 화려하지 않은 보색 대비가 주는 이 멋진 컬러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풍경에 그림이라도 그리듯 오리 가족이 선을 그으며 지나간다. 평화롭고 고요하다. 바쁜 세상의 일과는 무관하게 이토록 고요하고 조용한 하루가 흘러간다. 우리도 그에 맞춰서 조금씩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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